논쟁의 불교학 (5)

1. 들어가는 말

인도에서 대승불교라고 한다면 중관학, 유식학, 여래장사상, 불교인식논리학, 밀교 등을 들 수 있다. 그 가운데 중관학과 유식학은 대승불교로서, 학파로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당시 대승불교를 대표하던 학파들로서, 중국 승려로서 인도를 순례한 의정의 《남해기귀내법전》과 현장(602?~664)의 《대당서역기》에서 몇몇 부파들과 함께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대승이 처음부터 중관과 유식으로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며, 교학의 발달과 함께 형성된 것이다. 유식학은 미륵(Maitreyātha: 360~430)과 무착(Asaṅga: 395~470)에 이어 세친(Vasubandhu: 400~480)1)에 와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학파로서 형성된 것은 그 이후 10대 논사들의 활동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나란다사에 호법(530~561)의 제자가 수천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호법 당시에 가서야 비로소 대승 가운데 하나의 학파로서 자리잡았다고 할 것이다. 이에 반해 중관학파는 용수(Nāgārjuna: 150~250년경)와 제바(Āryadeva: 170~270년경)를 이어, 불호(Buddhapālita: 470~540)와 청변(Bhāvaviveka: 490~570), 그리고 월칭(Candrakīrti: 600~650) 등에 와서 학파로서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나타(Tāranātha)의 《인도불교사》에 의하면, 특히 청변의 경우 남인도를 중심으로 한 모든 사찰들의 상수가 되어 그 제자가 1000여 명에 이른다고 하였으며, 청변 당시에 대승은 용수의 종풍과 무착의 종풍으로 나뉘어져 있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시에 호법을 중심으로 하여 중인도 나란다사에서는 유가유식학파가 성립한 반면에, 이에 상대하여 중관학파가 청변을 중심으로 남인도에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대승 안에서 서로 특징을 달리하는 두 학파가 성립함으로써 두 학파의 교학적 특징에서 비롯된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친광(Bandhu-prabha 혹은 Prabhā-mitra: 6세기 중엽)은 청변과 호법이 서로간에 공유논쟁(空有論爭)을 벌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또한 따라나타의 《인도불교사》는 청변이 입멸한 이후 대승은 중관과 유식으로 나뉘어 쟁론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본 논문는 청변과 호법이 동시대인으로서 공유논쟁을 벌였다고 전해진 그 상황을 문헌을 통해 알아보고, 논쟁의 실제적인 모습을 그들의 논서를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2. 대론의 여부

청변과 호법의 대론에 대하여 가장 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현장의 《대당서역기》 권10이다. 《대당서역기》는 청변이 호법과 담론하기 위해 나란다사에 찾아갔으나 호법은 수행하느라고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고 있는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그는 마가다국의 호법 보살이 불법을 선양하여 배우는 무리가 수천에 이른다는 말을 듣고 담의(談議)하고자 하여 지팡이를 짚고 나섰다. 파탈리성에 닿았을 때 호법 보살이 보리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논사는 문인(門人)에게 “그대는 보리수 있는 곳의 호법 보살에게 가서 ‘보살은 부처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넓혀 방황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덕을 마음으로부터 존경한지가 이미 오랩니다. 그러나 일찍부터의 소원을 달성하지 못하여 오늘까지 뵈올 기회가 없었습니다. 보리수는 공허하게 보지 않을 것이며 한번 보게될 때에는 반드시 증과(證果)를 얻어 천인사가 되고자 맹세하고 있습니다’라고 전해주시오”라고 말했다. 호법 보살은 그 사자에게 “사람의 세상은 허깨비와 같고 신명(身命)은 뜬것과 같이 무상합니다. 날마다 수행하고 있어서 담의할 짬이 없소”라고 대답하게 했다. 사자는 왕복을 거듭했으나 마침내 만나지 못했다. 청변 논사는 본국으로 돌아갔다.2)

즉 두 논사가 직접 대면하여 담론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측(612~696)은 《불설반야바라밀다심경찬》에서 친광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 맛이던 불법이 천년이 지난 뒤에 공(空)과 유(有)가 대립하여 논쟁하였음을 서술하고 있다. 친광은 나란다사의 학승이며 동시에 호법의 문하생으로 《불지경론》 7권을 저술하였다.3)

친광이 풀이해서 말하였다. “천년 전에는 불법은 한 맛이었는데 천 년이 지난 뒤에 공과 유가 대립하여 논쟁하였다. 부처님이 입멸하신지 천년 뒤에 남인도 건지국(建至國, Kāñcipura)에서 두 보살이 같은 시기에 이 세상에 태어났다. 한 사람은 청변이고 또 다른 사람은 호법이다. 유정들에게 불법을 깨우치기 위해 공종(空宗)과 유종(有宗)을 세워 모두 부처님의 뜻을 이루었다. 청변 보살은 공에 집착하여 유를 버렸으니 유에 집착하는 것을 제거하려 하였다. 호법 보살은 유를 세우려 공을 버렸으니 공에 얽매이는 것을 제거하고자 하였다.4)

또한 혜소(651~714)는 《성유식론요의등》에서 호법은 《대승광백론석》을 짓고, 청변은 《대승장진론》을 지어 공과 유를 쟁론하였다고 서술함으로써 ‘공유논쟁(空有論諍)’이라는 술어가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5)

이러한 대론은 단순히 청변과 호법만의 대론에 머물지 않는다. 따라나타의 《인도불교사》에 의하면 청변이 죽은 후, 대승이 용수의 종풍과 무착의 종풍으로 나뉘어 쟁론하게 되었음을 서술하고 있다.

이 두 논사(불호와 청변)가 오기 전에는 무량한 대승인들이 동일한 교법에 머물렸으나, 이 두 논사에 의하여 용수와 무착의 두 종풍으로 뚜렷하게 구별되었다. …… 청변이 죽은 후에 대승은 2부로 나뉘어 쟁론하게 되었다.6)

대승이 두 학파로 나뉘어 쟁론을 벌이는 이러한 긴장관계는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4권에서 현장과 사자광(Siṁharasmi)의 논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때 대덕 사자광(獅子光)은 먼저 대중들에게 《중론》과 《백론》을 강의하면서 그 뜻만을 중히 여기고 《유가론》의 뜻을 공격하였다. …… 그러나 법사는 역시 《중론》과 《백론》의 뜻을 논하며, 단지 사자광의 변계소집(遍計所執)만을 논파했을 뿐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자광은 전혀 깨치지를 못하고 경론에 “일체는 얻을 것이 없다”고 한 것을 보고 “《유가론》에서 세운 원성실 등도 또한 모두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항상 말에 나타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법사는 두 종의 가르침은 화합(和會)된 것이지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회종론(會宗論)》 3천 송을 저술하였다. 논이 완성되자 계현과 대중에게 보였는데, 모두 훌륭하다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아울러 널리 보급하였다. 그러자 사자광은 부끄러워하며 마침내 보리사로 떠났다.7)

법장(643~712)의 《대승기신론의기》에서는 중천축국의 지바가라(地婆訶羅, Divākara, 日照: 613~687)가 전한 말로서, 유가유식학파의 호법을 계승한 계현(戒賢, Śīlabhadra: 6~7세기경)과 중관학파의 청변을 계승한 지광(智光) 등이 각각 자신의 종(宗)의 교설이 상대의 종의 교설보다 수승하다고 교판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먼저 호법을 계승한 계현의 삼시교판(三時敎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계현은 멀리 미륵과 무착을 받들고 가까이는 호법과 난타를 이어서 《해심밀경》 등의 경과 《유가사지론》 등의 논에 의지하여 삼종수(三種敎)를 세웠으니, 법상대승(法相大乘)으로써 참된 요의로 삼은 것이다. 이른바 부처님께서 처음 녹야원에서 사제(四諦)의 소승법륜을 굴리셨으니, 모든 유위법은 연으로부터 생한다고 설하여 외도의 자성인(自性因) 등을 파하였다.

또한 연으로 생함으로 말미암아 인아(人我)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그 외도가 유아(有我)라고 설하는 것을 뒤집었다. 그러나 아직 법무아(法無我)의 이치를 설하지 않으셨으니, 즉 네 《아함경》 등이다. 제2시 중에 비록 변계소집(遍計所執)에 의지하여 모든 법의 자성이 모두 공함을 설함으로써 그 소승을 뒤집었으나, 그러나 아직 의타(依他)와 원성(圓成)에서 아직 유(有)임을 설하지 않으셨으니, 곧 《제부반야경(諸部般若經)》 등이다. 제3시 중에 대승의 정리(正理)에 나아가 삼성(三性)과 삼무성(三無性) 등을 갖추어 설하여 바야흐로 이치를 다하게 되니, 곧 《해심밀경》 등이다.

 그러므로 그 인연생법에서 처음은 오직 유(有)만을 설하여 곧 유변(有邊)에 떨어진 것이며, 다음은 오직 공(空)만을 설하여 곧 공변(空邊)에 떨어진 것이니, 이미 각각 변(邊)에 떨어진 것이라서 모두 요의가 아니다. 후시(後時)에 소집성(所執性)은 공(空)이며 나머지 둘은 유(有)가 된다고 갖추어 설하여 중도에 계합하니 바야흐로 요의가 된다.8)

이는 유식교판으로 《해심밀경》에서 판별한 3종법륜과 내용이 다르지 않다.9) 반면에 청변을 계승한 지광의 3시교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광논사는 멀리 문수와 용수를 받들고 가까이는 제바와 청변을 품(稟)받아 반야 등의 경(經)과 《중론》 등의 론(論)을 의지하여 또한 3교를 세웠으니, 무상(無相)을 밝히는 대승을 참된 요의로 삼았다. 이른바 부처님께서 처음 녹야원에서 모든 소근기(小根機)를 위해 사제(四諦)를 설하여 마음과 경계가 모두 유(有)임을 밝혔다. 다음 중시(中時)에 그 중근기(中根機)를 위해 법상대승(法相大乘)을 설하여 경계는 공이며 마음은 유임을 밝혔으니, 유식의 도리이다.

근기가 오히려 하열하므로 아직 능히 평등한 진공(眞空)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설(說)을 짓는다. 제3시에 상근기를 위해 무상대승(無相大乘)을 설하여 마음과 경계가 모두 공임을 변별하였으니, 평등한 한 맛으로써 참된 요의로 삼았다. 또 처음은 곧 외도의 자성 등을 점차 깨뜨리는 것이니, 그러므로 인연생법이 결정코 有라고 설한 것이다. 다음은 곧 소승의 연생이 실유(實有)라는 집착을 점차 깨뜨리는 것이니, 그러므로 의타기연(依他因緣)은 가유(假有)라고 설하는 것이다.

그가 이 진공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유라 하여 접인(接引)한 후에 바야흐로 구경대승(究竟大乘)에 나아가 이 연생은 즉시 성품이 공하여 평등한 한 모습이라고 설한다. 그러므로 법상대승의 유소득(有所得) 등은 제2시로 하여 참된 요의가 아닌 것으로 판별하였다.10)

이러한 내용은 청변과 호법으로부터 시작된 논쟁이 중관학파와 유가유식학파간에 교학적 긴장관계로 발전하면서 각 학파는 자기 종(宗)의 우위를 높이 세우기 위한 교판에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유식학파의 유식교판은 《해심밀경》에 이미 있었지만 지광이 중관을 우위로 하는 교판은 유가유식학파와 중관학파 사이의 긴장관계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이상의 여러 문헌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청변과 호법이 서로 직접 대면하여 쟁론한 사실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논(論)을 지어 서로가 상대의 주장을 논박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대표적인 논서가 청변은 한역으로 《반야등론석》과 《대승장진론》이며 티베트역으로는 《중관심론》이다.

호법은 한역으로 《대승광백론석》이 있다. 야마구치 스스무(山口 益)는 특히 청변의 《중관심론》 제5장을 들면서 중관학파와 유가유식학파간의 쟁론을 ‘무와 유의 대론’이라고 이름하면서 자세히 논하고 있다.11) 또한 불교에서 무와 유의 대론, 공유논쟁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인 연기에 대해 인도불교사상 초기부터 있어 왔던 해석양식을 계승한 한 형태라고 하였다.

사실 《대승장진론》에서 논쟁의 실마리로 하고 있는 구절은 “그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공이어서 그것은 실로 무이며, 이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공이어서 이것은 실로 유이다. 이와 같은 공성(空性)은 천인사(天人師)가 여실하게 설한 것이다”라고 한 인용 구절이다. 이 구절은 《유가사지론》 제36권에서 악취공자(惡取空者)와 선취공자(善取空者)를 설명하는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다.12)

청변과 호법은 이 구절에서 취하는 이치가 각각 다르다. 일본의 수법사(秀法師)의 《장진량도(掌珍量噵)》에 의하면, 호법은 삼성(三性)을 진(眞)으로 하고 삼무성(三無性)을 속(俗)으로 하여 공과 유를 풀이하였으며, 반면에 청변은 삼무성을 진으로 하고 삼성을 속으로 하여 공과 유를 풀이하였다고 한다.13)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각각 상대를 악취공자로, 유집자(有執者)로 낮추어 부르는 것이다.

3. 논쟁의 실제

청변은 《반야등론석》에서 ‘자부인(自部人)’ 혹은 ‘십칠지론자(十七地論者)’의 설로서 유가유식학파의 주장을 비판하였으며,14) 《대승장진론》에서는 ‘상응논사(相應論師, yogācārin, 瑜伽行人)’의 설로서 유가유식학파를 논파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청변이 처음 《반야등론석》을 저술할 당시에는 소승에 상대하여 대승이라는 상대감이 있었으나, 《대승장진론》을 저술할 때에는 대승과 소승이라는 상대감은 물론 대승 가운데 중관학파와 유가유식학파라는 상대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야마구치 스스무는 청변이 《대승장진론》에서 ‘상응논사’라고 하여 유가유식학파를 비판한 반면에 월칭은 《중론주》, 《사백론주》, 《입중론》 등에서 ‘식론자(識論者, vijñānavādin)’라고 하여 유가유식학파를 비판하는 것에 주목하여 청변이 대론한 유가행인은 진나(Dīgnaga)의 학설이라고 하였다.15) 또한 논사들의 생몰연대를 보아서도 그러하다고 하였는데, 논사들의 생몰연대는 진나가 400~480년,16) 청변 490~570년, 호법(Dharmapāla) 530~561년, 월칭 600~650년을 제시하고 있다.

청변은 세친-덕혜-안혜로 이어지는 무상유식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안혜(Sthiramati: 510~570)의 《대승중관석론》의 유식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청변이 유가유식학파와 대론한 학파는 유상유식학파임에는 확실하다. 다만 청변이 진나만을 상대로 하였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청변과 호법은 동시대의 사람이며, 《대당서역기》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지만, 청변의 대론의 의지는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나타의 《인도불교사》에 의하면, 청변은 남인도 마노야라(摩盧耶羅, Malyara)국의 왕족으로 태어나 그 나라에서 출가하여 삼장에 정통하였다고 한다. 후에 중인도에 와서 승가라고집다(僧伽羅苦什多, Saṃgharakṣita)에게서 대승경전과 용수보살의 논을 수학하였으며, 다시 남인도로 돌아와서 금강수(Vajrapāṇi)의 상호(相好)를 관하고, 삼매야를 성취하여 남인도의 50여 개의 사찰의 상수가 되어 불법을 선양하였다.

불호 논사 입멸 후 불호의 논서들을 숙독하고 그것을 논파하였으며,《중관소》를 비롯하여 경전을 주석하였다. 불호 논사의 제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청변 논사는 1000여 비구가 추종하여 그의 종풍은 널리 통하였다. 이 두 논사가 오기 전에는 무량한 대승인들이 동일한 교법에 머물렀으나, 이 두 논사에 의하여 용수와 무착의 두 종풍으로 뚜렷하게 구별되었다. 청변이 죽은 후에 대승은 2부로 나뉘어 쟁론하게 되었다.17)
또한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는 청변은 당시에 마가다국의 호법보살이 불법을 널리 선양하여 학도가 수 천명에 이른다는 말을 듣고 담론하고자 파탈리성으로 갔다고 하였다. 파탈리성에서 청변은 수 차례에 걸쳐 뵙고서 담론하기를 청하였으나 호법은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하였다고 전한다.18)

이러한 점들은 당시 호법을 중심으로 하는 유식학이 학파를 이룰 정도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청변은 직접 호법과 담론하지는 못하였지만, 청변의 저술에서도 보이는 것과 같이 당시 외도와 소승 각 부파는 물론 유가유식학파의 주장들을 논파하는 가운데 청변을 중심으로 용수보살의 종풍을 선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승은 무착의 교의를 받드는 유가유식학파와 용수의 교의를 받드는 중관학파라는 구분이 뚜렷하게 되었으며, 청변이 입멸한 후 두 교파는 서로 논쟁하면서 교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먼저 청변의 《대승장진론》에서 ‘상응논사’의 견해라고 한 것에 대해 《성유식론》에서 호법의 견해와 대응시키고, 청변의 논박을 알아본다. 그리고 호법의 《대승광백론석》을 참고로 하여 호법의 의견을 알아보는 것으로 서술할 것이다.

1) 삼성설
《대승장진론》은 상하 두 권으로 나누어지는 데, 상권의 총서(總序)에서는 “제법(諸法)의 무자성공(無自性空)의 이치를 증오(證悟)하여서 법성(法性)에 들어가 번뇌로부터 해탈하게 하고, 그리고 유정을 요익케 하고자 한다”는 논을 지은 목적이 서술되고 있다. 그리고는 유위공(有爲空)과 무위공(無爲空)을 입량(立量)한 게송이 나온다.

진성(眞性)에서 유위는 공하네.
마치 환(幻)과 같으니, 연(緣)으로 생(生)하기 때문이네.
무위는 실(實)이 있지 않다네.
일어나지 않으니, 마치 공화(空華)와 같네.19)

청변은 이러한 입량에 대하여 여러 논사 등의 힐난을 예상하고, 그에 대해 답함으로써 결택(決擇)을 행하고 있다. 일체불공론자(一切不空論者), 성공론자(性空論者), 불선(不善)의 정리론자(正理論者), 유성론자(有性論者), 수론사(數論師), 상응논사(相應論師)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상응논사의 힐난과 청변의 답변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 당시 호법을 중심으로 하여 상당한 세력을 지녔다고 하는 유가유식학파의 주장과 이에 대한 청변의 견해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힐난과 답변은 청변이 호법과 대면하여 직접적으로 담론하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유가유식학파의 교리에 대하여 청변 스스로 비판의식을 가지고 간접적으로 담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은 《대당서역기》에서도 보는 것과 같이 청변이 호법과 담론하고자 하였으나 호법에 의해 거절당하였지만, 직접 대면하였을 때 청변이 유가유식학파의 교리에 대하여 반박하고자 하는 내용이 상응논사의 힐난과 청변의 답변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상응논사의 힐난을 살펴보자.

상응논사는 이와 같은 반론하였다. 네가 “진성(眞性)에 나아가 유위는 공이다. 연생(緣生)이기 때문에”라고 세우는 것이 만약에 이 뜻이 “모든 유위법은 여러 연(緣)에 따라서 생하며 자연히 있는 것이 아니다. 생무성(生無性)에 나아가 그것은 공이다”라고 세우는 것이라면, 이것은 곧 상응논사의 이치를 이루어 정리(正理)에 부합[符會]하는 것이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공이어서 그것은 실로 무이며, 이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공이어서 이것은 실로 유이다. 이와 같은 공성은 천인사(天人師)가 여실하게 설한 것이다.” 이 가르침의 뜻은 편계소집은 의타기 상(上)에서 자성(自性)이 본래 없다. 그것은 자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능전(能詮)은 소전성(所詮性)을 가지지 않는 것과 같이 또한 소전(所詮)은 능전성(能詮性)을 가지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의타기 자성이 있는 위에 편계소집의 자성은 본래 없다. “그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공이다”고 하는 것은 곧 망령되이 계탁(計度)한 사실 그것은 자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공이다”고 하는 것은 연(緣)으로 생한다는 사실 이것은 자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만약에 없다면 즉 단멸이 된다. 어떠한 사실 위에서 무엇을 공이라 하는가? 이 연으로 생한다는 사실은 즉 의타기성을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에 의지하여 색(色), 수(受), 상(想) 등의 자성과 차별의 가립하는 성품의 전전이 있음을 얻는다. 이것이 만약에 없다면 가법(假法)도 또한 없다. 곧 무견(無見)을 이룬다. 응당 언설을 부여할 수 없으며, 응당 함께 머무르지 않게 된다. 스스로 악취에 떨어지며 또한 다른 이로 하여금 떨어지게 한다.

이와 같이 변계소집의 자성은 공하며, 의타기의 자성은 있다는 것이 성립하여 마땅히 정리에 계합한다. 만약에 이러한 뜻에서 의타기성은 또한 있는 바가 없기 때문에 공이라고 세운다면, 너는 곧 위에서 설한 것과 같이 과실의 깊은 구렁텅이에 떨어지며, 또한 다시 세존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비방하는 과실을 이루게 된다.20)

위의 내용을 간략히 하면 청변이 세운 유위공의 명제가 의타기자성이 공이라는 의미라면 이는 단멸이 되며, 무견(無見)이 되어 악취공에 떨어지고 다른 이로 하여금 악취공에 떨어지게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내용을 가르침을 들어 증명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도 변계소집 자성은 공이며 의타기 자성은 유라는 것이 증명된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의 유가유식학파에서 주장하는 것임을 짐작케 하는데, 이러한 내용은 《성유식론》에 의해 그 내용이 확인된다.

이 3성 가운데 몇 가지가 가(假)이고 몇 가지가 실(實)인가? 변계소집은 망령되이 안립하였기 때문에 가(假)라고 할 수 있다. 체상(體相)이 없기 때문에 가도 아니고 실도 아니다.
의타기성은 실이 있고 가가 있다. 취집(聚集), 상속(相續), 분위(分位)의 성품이기 때문에 가유라고 설하고, 심(心), 심소(心所), 색(色)이 연(緣)으로부터 생하기 때문에 실유(實有)라고 설한다. 만약에 실법(實法)이 없으면 가법(假法) 또한 없으며 가(假)는 실인(實因)에 의거하여 시설되기 때문이다.
원성실성은 오직 실유이다. 다른 연에 의거하지 않고 시설되기 때문이다.21)

결국 변계소집은 허망한 것으로 가이며, 의타기자성은 가유와 실유로 구성되며, 원성실성은 실유 뿐이라고 하였다. 또한 3무자성에 관해서도 의타기성에 의거하여 건립한 생무자성(生無自性)은 가정적으로 무자성이라고 하며 자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처음의 변계소집에 의거하여 상무자성(相無自性)을 건립한다. 이것의 체상(體相)이 필경에 존재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마치 허공의 꽃과 같기 때문이다.

다음의 의타(依他)에 의거해서 생무자성(生無自性)을 건립한다. 이것은 마치 환사(幻事)와 같아 여러 연(緣)에 의탁해서 생겨나며 마치 허망하게 집착하는 것과 같아 자연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무자성이라고 말하며, 자성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나중의 원성실에 의거하여 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을 건립한다. 곧 승의는 앞의 변계소집한 아(我)와 법(法)을 멀리 여읜 성품이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무자성이라 말하며, 자성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마치 큰 허공이 갖가지 색법에 두루하긴 하지만, 갖가지 색법의 무자성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다.22)

또한 호법의 《대승광백론석》 제8 「교계제자품」에서는 계경에서 “일체 법성은 모두 공 아님이 없다” 혹은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고하시되 ‘색(色) 등 제법의 자성은 모두 무이다’” 혹은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고하시되 ‘일체 법성은 모두 생함이 없다. 먼저부터 있었거나 없었거나 가히 생함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 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고 묻고 그에 대해 답하고 있다.

여기에는 비밀한 뜻이 있다. 비밀한 뜻이 무엇인가. 이른바 이러한 여려 경전에서는 오직 변계소집성만을 논파한 것이며 일체가 무라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일체가 무라고 하면 곧 삿된 견해를 이룬다.23)

즉 계경에서 공이라고 한 것은 변계소집자성이 공이라는 의미이며, 의타기 자성이 공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유식교판에서 보인 것과 같이 유와 공의 두 집착을 버리고 대승의 둘 아닌 중도의 진리를 깨닫기를 권하고 있다.24) 또한 파상공교(破相空敎)에 편집(偏執)한 이들을 질타하고 있다.

옛날에 법을 비방하는 업을 받아들인 까닭에 여래의 파상공교(破相空敎)를 치우쳐 집착하여 세간 사람들로 하여금 그른 법을 옳은 법이라 하고 옳은 법을 그른 법이라 하며, 그른 이치를 옳은 이치라 하고 옳은 이치를 그른 이치라 하여 자기를 해치고 남을 해치니, 참으로 불쌍한 일이로다.25)

이러한 호법의 견해에 대해 청변은 자신의 여러 논서에서 호법과는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청변은 《대승장진론》에서 먼저 자신의 다른 저서인 서장역의 《중관심론게》의 「입진감로품」에 자세히 설하고 있음은 밝히고 있다.26) 그리고 유가유식학파가 앞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유위법이 생무자성(生無自性) 즉 자연성이 아니기 때문에 공이라고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성이 공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세운다고 하였다. 즉,

안(眼) 등은 소작공(所作空)이 아니어서 자성공(自性空)이기 때문에 응당 무생(無生)이라 해야 한다. 무성(無性)이기 때문에 공이다. 생무성(生無性)에 나아가 그것은 공이라고 설해서는 안된다.27)

결국 유가유식파에서는 생무자성(生無自性) 즉 비자연성(非自然性)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하는 것이며, 의타기 자성 자체는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반면에 청변은 자성공이기 때문에 공이며 의타기 자성 또한 자성공이므로 공인 것이다.

유가유식학파가 내세운 교증에 대해서도 달리 해석하고 있다. “그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공이어서 그것은 실로 무이다. 이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공이어서 이것은 실로 유이다”라는 문구에서, 유가유식학파는 앞의 구절은 망령되이 계탁한 사실 그것은 자성이 없다는 것으로, 즉 변계소집의 자성은 공이라는 의미다. 뒤의 구절은 연으로 생한다는 사실 이것은 자성이 있다는 것으로 즉 의타기의 자성은 유라는 의미이다.

반면에 청변은 “만약에 인연력으로 생한 안(眼) 등을 일체 세간에서 함께 실유라고 허용한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범부들의 각혜(覺慧)가 행하는 것이며, 세속에서는 자성이 있는 것처럼 나타날지라도 승의제의 각혜로서 심구(尋求)한 것으로서는 오히려 허깨비와 같이 도무지 참된 성품이 없다”라고 전제하고 상변(常邊)에 떨어지는 과실을 막고자 앞의 구절을 설한 것이며, 단변(斷邊)에 떨어지는 과실을 버리고자 뒤의 구정을 설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인연력으로 생한 안(眼) 등은 세속제에 포섭되어 자성이 유이며, 공화(空華)와 같이 전혀 어떤 사물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진성(眞性)에 나아가서 그것을 공이라고 세울 뿐이다”라고 하였다.28)

즉 청변은 세속제와 승의제를 준별(峻別)하여 세속제에서 의타기성은 유이며 승의제에서는 공이라는 의미이다. 의타기 자성은 세간에 수순하는 언설에 포섭되며, 복덕과 지혜의 두 자량이 되기 때문에 세속제에서 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의타기성은 세속이기 때문에 유라고 건립한다면 곧 이미 성립한 것을 세우는 것이며, 또한 이 성품은 승의제에서 유라고 세운다면 동법유(同法喩)가 없게 된다. 마치 이미 결정코 있는 성품을 주장하는 것을 막는 것과 같이 또한 마땅히 결정코 없는 성품을 주장하는 것을 막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29)

《성유식론》 권제8에 이제(二諦)와 삼성(三性)의 관계에 대해서 세속제는 3성을 모두 갖추고 승의제는 원성실성 뿐이라고 하였다.30) 이러한 서술과 앞에서 《성유식론》에서 밝힌 삼성(三性)과 가실(假實)의 관계의 서술을 놓고 볼 때, 변계소집성은 속제로 가(假)이며 의타기성은 속제로 가와 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성실성은 승의제 즉 실유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3성과 2제, 3성과 가실(假實)의 관계를 각각 서술한 것을 임의로 묶어 유추한 것이라 정확하지 않다. 반면에 청변은 변계소집성은 세속제로 공이며 의타기성은 세속제로 유이며 원성실성은 승의제로 공불가득(空不可得)이라 할 수 있다.

2) 진여실유설과 무분별지
《대승장진론》 상권 무위가 공임을 입량한 것에 대해 비바사사(毘婆沙師), 불선의 정리론자, 경량부사, 동엽부사(銅鐷部師, tāmraśāṭīyika), 상응논사, 수론사, 승론사 등의 힐난과 청변의 답변이 서술되고 있다. 여기서는 진여실유설을 주장하고 있는 상응논사 즉 유가유식학파의 힐난과 청변의 답변을 살펴보고자 한다.

상응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승의 위에 다시 승의는 없다. 진여가 곧 모든 법의 승의이다. 그러므로 승의에 나아가 진여는 공이라고 설한다면 이 말은 이치에 칭합(稱合)하지만 진여는 실유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치에 칭합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출세간의 무분별지와 후득청정세지는 무위의 경계를 연으로 한다. 이것은 마땅히 정리이다.”31)

이러한 내용은 《성유식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유식론》 제10권에 4종열반을 설명하는 가운데 본래자성청정열반을 진여의 본체로 설명하고 있다.

본래자성청정열반은 일체 법의 모습인 진여의 본체를 말한다. 비록 객진번뇌에 오염되어 있으나, 본성이 청정하고 한량없는 미묘한 공덕을 갖추며,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담연해서 허공과 같아 모든 유정에게 평등이 공통적으로 있다. 모든 법과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모든 형상과 모든 분별을 여의었으며, 생각으로 헤아려서 아는 것이 아니며,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서 오직 참다운 성자만이 스스로 내면적으로 증득하는 것이다. 그 성품이 본래부터 고요하기 때문에 열반이라고 한다.32)

또한 전식득지(轉識得智)에 의해 생겨나는 네 가지 지혜들 가운데 대원경지(大圓鏡智)는 진여를 반연하는데 그 경우에 지혜는 무분별지라고 한다. 즉,

(대원경지에 있어서) 진여를 반연하는 경우에서는 이것은 무분별지혜이다. 나머지 다른 대상을 반연하는 경우에는 후득지에 포함된다. 그 자체는 하나이지만 쓰임을 따라 둘로 나눈다.33)

결국 승의제의 입장에서 진여가 공하다고는 할 수 있으나 실유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무분별지의 소연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에 반해 청변은 출세간 무분별지는 진여를 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논식을 세우고 있다.34) 즉,

진여를 연하는 지(智)는 진실한 출세간의 지가 아니다.(종[宗])
소연(所緣)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유위이기 때문에.(인[因])
마치 세간을 연하는 지처럼.(유[喩])

그리고는 경증(經證)을 들어 무분별지는 능히 현관(現觀)하거나 진여를 연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유가유식학파에서 말한 진여는 참된 승의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들이 말한 진여는 소연이기 때문에 마치 색(色) 등과 같다는 것이다. 청변이 주장하는 진여는 성스러운 가르침에 의거하여 일체 분별의 영원히 멸하는 것이며, 실유성이 아니며, 비유(非有)를 여읜 것이 아니다.

실성진여(實性眞如)는 전의(轉依)를 상(相)으로 삼아 법신을 성취한다. 공(空)을 관(觀)하여 참된 대치도(對治道)를 얻음으로 말미암아 일체 분별과 변계소집 종자의 의지하는 바인 이숙식 가운데 분별 등의 종자는 남김없이 영원히 끊어진다. 인연이 없기 때문에 필경 생하지 않는다. 본성은 무생(無生)으로서 본성은 상주(常住)이다. 이를 여래전의법신(如來轉依法身)이라 한다.35)
이와 같이 유가유식학파의 진여실유설을 깨뜨리고 또한 유가유식학파의 무분별지를 비판하고 있다. 즉

상응론자가 유(有)를 결정코 집착하여 말한다. “일체 소취와 능취의 분별을 멀리 여의면 이것이 출세간 무분별지이다. 곧 그 가운데 견실(堅實)한 상(想)을 일으켜 꾸준히 닦아 익힌다.”36)

이에 대해 청변은 교증(敎證)을 들어 무분별지는 유위를 관(觀)하지 않으며 또한 무위를 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승의제에 나아가 이와 같은 출세간 무분별지는 실유가 아니다. 연에 따라 생하기 때문에, 마치 허깨비와 같다는 것이다.

진실행해(眞實行解)와 견제(見諦)와 현관(現觀)은 모두 동일한 뜻으로, 관행(觀行)을 닦는 자가 이때 심(心), 의(意), 식(識), 지(智)를 행하지 않는 것을 정행무분별혜(正行無分別慧)라고 한다. 만약에 이와 같이 행하되 행하는 바가 없다면, 곧 여래응정등각(如來應正等覺)의 진실한 수기(授記)를 얻는다고 하였다.37)

4. 나오면서

이상에서 우리는 청변과 호법의 대론의 여부와 실제에 관하여 알아보았다.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청변과 호법은 실제로 대면하여 담론한 사실은 없다. 그러나 두 논사는 논서를 통하여 상대방의 교학을 자신의 교학으로 논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승은 뚜렷이 유가유식학파와 중관학파라는 구분이 생기게 되었으며, 그 이후 두 학파는 서로 논쟁을 거듭하면서 교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각 학파의 상대방의 관한 이해에 대해서는 피상적이고 인색한 점이 다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각 학파가 상대방을 악취공자로, 유집자(有執者)로 함에는 나름대로의 이론을 펼치고 있으나, 중관학파의 공이 악취공은 아닐 것이며 유가유식학파의 유가 유집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중관학파의 2제설을 중심으로 한 무자성공의 교설과 유가유식학파의 삼성과 삼무성을 중심으로 한 교설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교학의 기본적인 입각점의 차이에서 볼 때, 중관학파의 공과 유가유식학파의 유가 단순히 유무의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인식하고도 남음이 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선행하는 용수의 교학이 제법의 무자성공을 밝히기 위하여 차견(遮遣, niṣedha)에 힘쓴 반면에, 뒤따라 일어난 유식교학은 공무자성의 승의제를 세간에 실용하기 위한 시설(upacāra, prajñapti, vyavasthāpanā)에 온 힘을 쏟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선후관계를 뒤로하고 중관학과 유식학을 단순히 병렬로 놓고서, 차견부정(遮遣否定)에 힘쓴 중관학파를 공무(空無)에 떨어진 무리라고 하고, 시설에 힘쓴 유식학파를 유식은 실체론이라 하여 유(有)에 떨어진 무리라고 하는 것은 두 학파의 특징을 강조함과 동시에 과장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연기와 관련하여, 유식학파는 연기는 의타기로 유라고 보는 점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중관학파는 연기는 공이라는 점과 관련하여 무자성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양 학파의 한 특색이면서도 논쟁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고 하겠다.

김치온
동국대 행정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현재 동국대 강사 및 대한불교진각종 종학연구소 연구원. 주요 논문으로는 「불교논리학의 성립과 전용」, 「청변과 호법의 공유논쟁에 대하여」, 「유식학에서 바라본 인간의 유루성과 무루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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