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묵스님 지음 <금강경 역해>(불광출판사,2001)

1. 《금강경 역해》를 열면서

대승경전 중의 하나인《금강경》은 선을 표방하는 한국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으로서 많은 불자들이 수지 독송하는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금까지 수많은 종류의 《금강경》 번역서들이 세상에 선을 보였는데, 대부분의 번역서들은 한문본을 저본으로 삼아서 번역되고 주석되었다. 그러한 번역서들은 조사가 발달되지 않은 한문의 특성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여 명료한 번역을 남기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문 번역의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산스크리트 원전을 이용한 번역서들이 출판되었는데, 특히 무비 스님은 《금강경》 산스끄리뜨본과 6종의 한역본을 비교하였고 그 후에 《금강경》 강의를 출간했으며, 이기영 박사도 원전 번역서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원전 번역서도 복합어와 격어미가 발달된 산스끄리뜨의 특성을 정확하게 유추해 내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최근에 출간된 각묵 스님의《금강경 역해》는 산스끄리뜨 단어를 하나하나 문법 구조에 입각하여 분석하고, 그 단어의 의미를 초기불교 경전의 용례에서 유추하여 주해를 논술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한글로 번역된 《금강경》 번역서들 중에서 각묵 스님의 《금강경 역해》는 훌륭한 저작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다.
이 《금강경 역해》를 정독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독자의 머리 속에 몇 가지 의문과 아쉬움을 갖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간단하게나마 그러한 아쉬움들을 중심으로 비판적이고 논리적으로 그 의문점과 아쉬움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부처님의 높은 깨달음을 범부로서 어떻게 정확히 알겠는가마는, 더 좋은 번역을 위해서 논평자가 느낀 몇 가지 의문과 아쉬움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2. 금강경 산스끄리뜨 원전의 분석 형태

《금강경 역해》는 거의 모든 단어들을 문법적으로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특히 동사나 동사 파생어는 완벽할 정도로 어근을 추출한 후 접두사의 의미를 결합하여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산스끄리뜨 단어는 접두사, 어근, 접미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단어의 어근을 추출하지 못하면 정확한 단어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접두사의 역할은 고전 산스끄리뜨와는 달리 불교혼성 산스끄리뜨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접두사는 깨달음의 미묘한 차이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데 사용되고 있는데, 《금강경 역해》에 ‘알다(jNA)’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jAnAti’, ‘saNjAnAti’, ‘vijAnAti’, ‘pajAnAti’, ‘sampajAnAti’, ‘parijAnti’, ‘AjAnAti’ 등의 단어들은 접두사의 역할을 부각하여 불교 교리 체계에 비추어서 잘 분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p.136). 이 단어들은 같은 동사 어근을 가지고 있지만 접두사의 쓰임에 따라서 독특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그 의미를 단어의 분석에서 유추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가는 《금강경 역해》에서 좋은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 해답은 초기 경전 상에서 접두사를 가지는 단어들이 어떤 용례로 사용되는지를 분석하는 것인데, 《금강경 역해》에서는 이 방법을 유용하게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prajNA(pra+jNA)’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 단어의 동사형인 ‘pajAnAti’가 초기경전에서 고․집․멸․도를 안다고 서술할 때와 무상․고․무아를 안다고 표현할 때, 그리고 번뇌를 완전히 단절하여 해탈했음을 안다고 할 때 사용된다고 하여 ‘prajNA’를 정의하고 있다(p.119).

그리고 몇몇 단어의 분석에서는 인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확한 번역어를 추출해 낸 것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piNNDa’는 단순히 ‘주먹밥’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데, 《긍강경 역해》에서는 ‘조그만 덩어리로 뭉쳐진 음식이나 과자류를 뜻하는데 주로 손님 접대 시 내어 놓는다’(p.30)고 설명하고 있다. 인도에서 손님은 우리가 모르는 어떤 곳에서 찾아온 사람으로 인식하여 신과 동일시하여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손님들에게 접대하는 음식 또한 신성하고 정결한 것임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어 분석의 미흡한 점을 느낄 수 있는 부분도 있는데, 특히 《금강경》에서 중요한 표현 중인 하나인 “bodhisattvayAna samprasthitena”를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p.49, p.58), 또는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에 의해서”(p.64, p.65, p.90, p.306)라고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samprasthitena’의 분석인데, 이것은 원래 ‘sam+pra+sthA+(i)ta+ena’로서 ‘sthA’는 ‘머물다’라는 동사이고, ‘sam’은 ‘~함께’를, ‘pra’는 ‘~앞으로’를 의미하는 접두사이며, ‘ta’는 과거분사 접미사이고, ‘ena’는 ‘a’곡용어의 단수 도구격(instrumental)으로 분석할 수 있다.

하지만 위의 번역은 과거분사 접미사 ‘ta’의 의미를 생각해지 않았고, 도구격이 행동을 나타내는 단어에서는 행위자를 의미한다는 문법규칙을 부각시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을 부각시키면 ‘보살승이라는 깨달음의 단계로 나아가는 자’가 아니라 ‘보살승에 나아가 서 있는 자’로서 ‘이미 보살승에 도달한 수행자’를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금강경》에서는, 이 경을 설할 당시 1,250명의 비구들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50명의 비구라는 표현은 ‘ardhatrayodasabhir bhikṣuśataiḥ’로서 ‘ardha’는 ‘절반’을 의미하고, ‘trayodasabhir’는 ‘13’을 의미하며, ‘śataiḥ’은 ‘100’을 의미한다. 그리고 ‘ardha’와 ‘trayodasabhir’는 ‘śataiḥ’에 적용되는 등위복합어로서 ‘ardha-śataiḥ’와 ‘trayodasabhir-śataiḥ’가 되면서 ‘ardha-śataiḥ’은 100의 절반으로 ‘50’이 되고 ‘trayodasabhir-śataiḥ’는 ‘1,300’이 된다. 그러므로 ‘ardhatrayodasabhir bhikṣuśataiḥ’는 1,250명의 비구가 아니라 ‘1,350명의 비구’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함을 알 수 있다. 이 번역서에서 ‘ardhatrayodasabhir bhikṣuśataiḥ’에서 ‘ardha’를 ‘반이 모자라는’으로 분석하여 ‘1,250명의 비구’로 번역하고 있지만, ‘ardha’에는 ‘절반’을 의미할 뿐이므로 ‘1,350명의 비구’로 해석된다.

한편 《금강경》은 구전되어 온 것을 문자로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대 인도인들은 숫자를 말할 때 습관적으로 ‘ūna(적은, 감해진)’라는 단어를 생략하기도 한다. 고전 산스끄리뜨에서 이 ‘ūna’는 19, 29, 39 등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19’를 ‘nāvadaśa’나 ‘ūna-viṃśati(20에서 하나가 작은 것)’로 사용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불교경전에서 숫자를 표현할 때 종종 이 ‘ūna’를 생략하는 것이 불교혼성범어의 특징 중 하나로 분석되는데, 여기서도 불교혼성범어의 특징을 부각하여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ardhatrayodasabhir’에서 ‘ardha’와 ‘trayodasabhir’ 사이에서 언어적인 습관으로 생략된 ‘ūna’를 삽입하면 ‘ardha-ūna-trayodasabhir bhikṣuśataiḥ’로서 ‘1,300에서 50이 적은’으로서 ‘1,250명의 비구’로 번역되는 것이다.
그리고 제1품에서는 부처님께서 스라바스티에서 탁발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금강경 역해》에서 산스끄리뜨본과 한역본의 차이를 잘 지적하고 있다.

다시 설명하면 산스끄리뜨 원전에는 “부처님께서는 공양 후 탁발로부터 돌아오셨다”라고 되어 있는데, 한역본에는 “탁발한 후에 돌아 오셔서 공양을 드셨다”라고 표현되어 있다(p.34). 이 부분을 문법적으로 자세히 설명해 보면 탁발하는 모습을 설명하는 문장에는 분사를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산스끄리뜨 문법에서 분사는 동사와 명사의 문법 범주를 모두 내포하고 있는 동시에 동작을 표현하는 데 자주 사용된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 탁발을 마치고 되돌아오셨다는 것을 표현할 때 ‘pratikrāmtaḥ(還至本處)’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단어는 접두사 ‘prati’에 동사어근 ‘kram’이 연결되어 새로운 동사어근을 만든다.

여기에 과거분사 어미 ‘ta’가 부가되어 이 단어는 형용사가 되는데, 형용사는 명사어미를 취하기 때문에 남성단수주격 어미인 ‘ḥ’을 부가한 것이다. 그래서 ‘pratikrāmtaḥ’라는 단어를 통해서 행위자가 남성인 세존임을 알 수 있고, 그가 탁발을 마치고 돌아와 있는 상태라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분사 형태의 단어들은 설명하고자 하는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으며, 분사의 빈번한 사용은 대화체에서 자주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빈번하게 사용되는 동명사에 관해서, 파니니는 동명사의 쓰임을 “한 행위자가 두 가지 행동을 취할 때, 동명사는 동사보다 선행되어 발생한 일을 의미한다(samānakartṛkayoḥ pūrvakāle)”(《팔장송》III.4.21.)고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piṇḍāya caritvā’에서 ‘caritvā’는 동명사로서 탁발을 완전히 마친 후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산스끄리뜨 문법에서 분사는 동사와 동시에 행해지는 동작을 나타내고, 동명사는 동사보다 먼저 완료된 행위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이 경전은 부처님과 수보리의 대화로 구성된 것이므로 대화체에서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분사와 동명사를 빈번히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금강경》을 설하게 된 동기는 아마도 제2품에 나타나는 수보리의 질문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금강경 역해》에서는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는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조복 받아야 합니까?”라고 해설하지만, 구마라집 역에는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조복받아야 합니까?”라고 설명하고, 현장 역은 원전과 일치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p.50).

이러한 원전과 구마라집 역의 차이를 지적한 것은 판본 비교의 훌륭한 연구라고 할 수 있지만 원전어의 번역을 생각하면 다소 부족함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sthAtavyam’은 ‘머물다’를 의미하는 동사의 분사형태로, ‘생활하는’을 뜻하고, ‘pragrahItavyam’은 ‘잡다’를 의미하는 동사의 분사로서 ‘~을 취하는’을 의미하므로 ‘cittam pragrahItavyam’은 ‘믿음을 가지는’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질문을 “보살승에 나아가 서 있는 자는 어떻게 생활해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야 하며, 어떻게 믿음을 가져야 합니까?”라고 번역하면, 보다 원전어에 근접하여 번역한 맛을 느끼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금강경》 9품에서는 사향사과(四向四果)의 교리를 설명하고 있는데, 《금강경 역해》에서는 ‘sakRdAgAmin(한 번만 더 돌아 올 자)’(p.171), ‘anAgAmin(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자)’(p.175)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이 ‘사향사과’의 교리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한다.

《아함경》에서 ‘예류(srota-Apanna)’를 ‘천상계와 인간계를 7번 왕생한 자’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7번 왕생’이라는 표현에서 천상계와 인간계를 왕복한 것을 한번으로 계산할지 아니면 두 세계를 한 번 움직이는 것을 한번으로 계산해야 하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두 세계를 왕복한 것을 한번으로 계산한다면 출발지와 도착지가 같아지지만, 두 세계를 편도로 움직인 것을 한번으로 취급한다면 출발지와 도착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빨리어 경전에서는 ‘인간계와 천상계를 7번 편도로 움직인 자’라고 표현하고 있으므로, ‘예류’는 인간계에서 출발하여 천상계에 도착하여 머물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일래’는 천상계에서 인간계로 온 자로서 ‘한번 옴이 있는 자’로 번역할 수 있으며, ‘불환’은 인간계에서 천상계로 간 자이므로 ‘옴이 없는 자’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라한’은 인간계에서 열반을 성취한 자를 의미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범부, 일래, 아라한은 인간계에 머물고 예류, 불환은 천상계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라한이 인간계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로, 범부는 아라한을 인간계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아라한은 불환의 단계를 경험한 자이기에 다시는 천상계로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이 아라한이 대승에서 보살의 전신이 되어서 보살과 부처도 인간계에 머물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3. 《금강경》 산스끄리뜨 원전 주해의 관점

《금강경 역해》에서는 《금강경》의 중심 사상을 상(想, samjNA)에 집착하지 않거나 상을 극복하는 것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래서 분절의 과목도 소명 태자의 견해를 배제하고 중심 주제를 상(想)과 연결하여 간략하게 정리했다. 이러한 독자적인 과목(科目)의 해설은 학문적인 귀중한 시도라고 할 수 있지만, 상의 개념을 금강경의 핵심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상(想)의 개념을 초기불교 수행에서 언급하는 구차제정과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은 상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그리 명확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p.76~79). 또한 불교 수행의 경지나 깨달음의 단계에 상(想)의 개념을 적용시키기도 힘든 것으로 보인다.

불교 경전사를 통해 볼 때 초기 대승경전에 속하는 《금강경》은 초기불교 교리와 대승불교 교리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금강경》은 반야부 경전으로서 아함경-반야부경-법화경으로 성립되는 불교 경전사를 연결하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교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초기불교 수행의 마지막 단계를 아라한으로 상정하고 이 아라한은 열반(涅槃)을 증득한다고 설명하는데, 《금강경》 9품에서도 사향사과의 교리를 언급하고 있다.

 반야부 경전에서는 아라한이 증득한 열반도 부정하여 새로운 단계의 열반을 인정하는데, 이 새로운 단계의 깨달음의 경지를 구경열반(究竟涅槃)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 ‘구경열반’이 공성(空性)이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과 동일한 개념으로 상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반야부 경전은 보살의 도리를 알리는 경전이므로 구경열반이나 공성이나 반야바라밀을 증득하는 자를 보살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금강경》은 《법화경》으로 나아가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반야바라밀도 부정하여 한 단계 진전된 반야바라밀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형태의 반야바라밀은 아마도 ‘아뇩다라샴막삼보리’일 것이며, 이 아뇩다라삼막삼보리는 부처의 경지에서 획득하는 깨달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금강경》에서는 ‘열반-반야바라밀-아뇩다라삼막삼보리’라는 초기불교 수행의 목표로부터 대승불교 수행의 목표를 순차적으로 열거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경지는 열반, 반야바라밀, 아뇩다라삼막삼보리 등 특수한 술어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금강경 역해》에서 주장하는 이 경전의 주제를 ‘상(想)의 극복’으로 본다면 논리적인 표현을 진행하는 불교 사상에 적합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열반처럼 상(想)을 깨달음의 경지로 인정하는 것도 무리가 따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한역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를 일반적으로는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때’로 번역하지만, 원전에서는 ‘반야바라밀다’에 처격 어미가 부가되어 있기 때문에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에로 나아가실 때’로 설명할 수 있다.

《금강경》 2품에서도 수보리가 부처님께 “보살승에 나아가 서 있는 자(보살)는 [반야바라밀을 성취하기 위해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야 하며, 어떻게 믿음을 가져야 합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여기서 보살은 이미 반야바라밀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이 반야바라밀을 획득하기 위해 수행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반야부 경전은 보살이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반야바라밀로 상정하고 있고, 이 깨달음의 경지를 획득했을 때 이 경지에 머물지 말고 다음 단계의 깨달음을 위해서, 즉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획득하기 위해서 반야바라밀조차 부정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부정한 것이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성취하기 위함이므로 《금강경》 후반부에는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의 정의와 이 깨달음을 성취하는 자인 여래에 대해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14품에서 반야바라밀을 성취한 보살은 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을 내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20품에서는 이 깨달음의 정의를 설명하고 있으며, 17품에서는 부처의 오안설과 수기사상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금강경》의 흐름은 《아함경》으로 대변하는 초기불교의 교리를 기초로 하여 초기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을 확립한 후, 대승불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법화경》의 도리를 간단하게 언급하여 불교의 중심 사상을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서평을 마무리하면서

각묵 스님의 《금강경 역해》는 과목나누기부터 한역에 의지하지 않고 산스끄리뜨 원전에 입각하여 서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제목은 그 단락의 내용의 핵심을 제시하는 것인데, 저자의 과목나누기는 그리 간략하지 않다는 느낌을 주어 다소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단어 하나하나를 자세히 분석하여 의미를 추출하고자하는 시도는 대단히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며, 특히 단어의 정확한 어근 분석 방식은 다른 여러 산스끄리뜨 불교 경전을 번역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단어의 불교적인 의미를 도출하는 방법에서도 사전적 의미에 매달리지 않고, 초기불교 경전의 용례를 참고로 하고 있는데, 이 점은 불교경전을 연구하는 다른 학자들에게 경전 연구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단어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부분에서는 초기불교 경전의 용례를 적절하게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금강경》의 취지나 경전의 핵심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초기 경전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오히려 경전 고유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미흡하지 않은가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럼에도 산스끄리뜨 불교 원전과 한역본을 비교하여 번역을 시도한 점은 선진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주해를 서술하는 방법에서도 불교적인 시각뿐만 아니라 인도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여 필요한 부분에 적용한 것은 이와 유사한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이건준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석사). 인도 델리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준박사(M.Phil.) 졸업. 동 대학원 산스끄리뜨학과 박사수료. 논문으로는 〈금강경에 나타난 불교 술어에 대한 연구〉(준박사 논문: 영어), 〈범본 금강경 제1품에 대한 연구〉, 〈파니니 문법에 대한 개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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