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의 국민을 ‘원소’(element)라고 한다면, 남․북의 정부는 이 ‘원소’들의 ‘집합’(class)이다. 그러면 통일정부는 남․북의 정부를 요원으로 하는 ‘집합의 집합’(class of classes)이어야만 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 이상의 ‘집합의 집합’이 또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추리는 끝없이 할 수 있다.

이를 무한퇴행(infinite regression)이라 부르고, 불교에서는 이를 ‘무궁지실’이라고 한다. 이 문제는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우리의 통일 방안도 근본적으로 이 문제에 걸려 있어서 불교를 통해 통일 방안을 검토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1982년 1월 22일에 전두환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은 남․북한 쌍방의 주민들의 뜻을 대표하는 ‘민족통일협의회’를 구성하고, 이 협의회에서 통일헌법을 기초하여 그것을 국민투표에 의해 확정한 다음, 그 통일헌법에 따라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것이다.

이 통일방안에서 문제시되는 것은 남․북 화합을 위한 기구로서 ‘민족통일 협의회’를 구성하자는 제3의 기구와 관련된 문제인데, 이 협의회 구성을 남북인구비례로 한다면, 거의 2배나 인구가 많은 남한이 이 협의회를 장악할 것이고, 역으로 남북 동수로 한다면 거기서는 남북이 대결하여 아무런 결론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민족통일협의회’란 제3의 기구를 통해 통일헌법 같은 것을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면 제4, 혹은 제5의 협의회를 만드는 무궁지실에 빠질 것이다.

1988년 9월 1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이 제3의 중간기구로 ‘민족통일협의회’를 두자는 주장에 대해, 노태우 대통령의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은 남북 쌍방이 국가 최고 당국자 회담을 통해서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쌍방의 동수의 인원으로 구성되는 각종 ‘남북 연합기구’를 구성하고, 이 기구로 하여금 통일국가를 준비하도록 하자는 2국가 2체제식 통일방안이다. 그리하여 ‘남북연합기구’ 밑에 ‘남북정상회의’, ‘남북각료회의’, ‘남북평화회의’ 같은 남북 동수의 대표들로 구성하자고 했다.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유엔에 동시가입, 교차승인에 의해 2국가 2체제를 일단 시인하고, ‘남북연합기구’를 통한 접촉과 교류를 확대하다가, 남북 총선거로 단일체제의 단일국가를 만들자는 주장이다. 이 통일방안은 남․북이라고 하는 양 ‘집합’을 인정하고, 제3의 ‘집합’인 ‘남북연합기구’를 통해 교류를 확대한 다음, 두 집합을 하나의 집합으로 만들자는 방안이다.

이 방안은 통일을 목표로 하여 그 수단으로서 남북 양 체제를, 즉 2국가 2체제를 시인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수단이 목적이 되어, 과정 속에서 양 체제가 굳어져 영구분단이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문제를 가진다. 그렇지 않으면 교류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어느 한 체제가 다른 체제를 붕괴시키고 와해시켜 버릴 우려도 있다.

1989년 8월 30일 구 민주당인 통일민주당은 ‘한민족연합제’ 통일방안을 발표하였다. 이 통일방안은 남북 쌍방 부총리 급으로 ‘민족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위원회가 한민족공동체의 완성과 노력을 지원․감독한다는 것이다. 한민족연합체는 1민족 1국가 1체제로 가기 위한 전 단계로서, 느슨한 형태의 남북한 결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민주당은 제3의 기구 혹은 중간기구가 너무 단단할 때는 수단이 목적을 훼손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느슨한 조직체로 한 것을 추천한다. 민정당의 ‘한민족공동체’와는 달리, 민주당은 군비경쟁의 지양, 평화협정의 체결 등 평화의 제도적 보장을 필수로 하고 있다.

 그러나 한민족연합체를 1국가 2체제로 이해한다면, 2체제라는 집합들을 하나로 묶는 ‘집합의 집합’ 격인 존재가 필요하다. 만약 이것이 ‘한민족위원회’라면 이 위원회를 남북 쌍방의 부총리 급으로 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런 위원회는 ‘집합의 집합’ 격이 아니고 ‘집합의 요원’ 격으로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평화민주당은 ‘공화국연방제’를 제시하였다. 지금까지 나온 통일방안과 다른 점은 남․북 쌍방의 체제를 한 격 낮추자는 점이다. 한민족공동체 방안이나 한민족연합체 방안이 뚜렷한 남․북의 국가기구를 인정하는 반면, 평민당의 공화국연방제는 상이한 두 체제로 남북 정부를 두 개의 지방정부로 격하시키고, 이 둘을 묶는 연방의회와 연방정부를 구성하자는 주장이다.

남․북 쌍방에서 동수의 대표를 파견한 연방의회와 연방정부가 남북통일을 위한 준비를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연방정부는 남북 쌍방이 지방정부의 승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것의 조종을 받은 꼭두각시 노릇을 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마치 U.N.이 미국과 소련의 손에 장악되고 조종 받았듯이, 그러면 연방정부를 규제할 수 있는 제4의 정부를 만들면 될 것이 아니냐 하지만 이것 역시 ‘무한퇴행의 오류’에 빠지고 만다.

1980년에 북한의 김일성 주석에 의하여 제안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은 남․북 쌍방 동수의 대표와 해외동포 대표로 ‘최고민족연방회의’를 조직하여 남북지역 정부들을 지도하자는 것이다. 여기서도 ‘제3의 인간’ 역설이 나타난다. ‘최고민족연방회의’의 그 상설위원회가 연방군을 조직해야 한다고 할 때, 연방공화국 내부에 연방군과 지방정부간에 또 지방정부군 사이의 무력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마치 이스라엘과 이집트간의 전쟁 때 평화군과 두 국가 군대간의 충돌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런 간섭하고 평화를 유지할 평화군을 감시하는 평화군이 또 필요하게 된다. 즉 연방정부가 군사력을 가질 때 연방정부군에 의해 파괴되는 평화는 누가 지켜줄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제3의 기구는 항상 느슨해야 하고, 약해야 하며, 존재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그러나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案)은, 언제 어떤 방법으로 연방국가에서 통일국가로 넘어가야 할 것인가를 명시하지 않고 있다. 연방제안(案)은 혹을 떼려다 도리어 혹을 붙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둘에서 셋 혹은 넷으로 연방정부가 증식될 가능성도 있다.

우리는 분쟁이 있는 모든 곳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무궁지실의 역설’은 정치현실 속에서 더욱 뚜렷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나타난다.

불교는 이러한 무궁지실의 역설을 극복하기 위해 치밀한 논리를 개발하였다. 그 중 가장 탁월한 것이 고구려 승랑대사(僧郞大師)가 개발한 ‘이제합명론’(二諦合明論)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두 개의 대립되는 것을 유(有)와 무(無)로 표현한다. 이를 승랑은 이제(二諦)라고 한다.

이제합명이란 유와 무의 양집(兩執)을 모두 버리고 유무의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근본 목적으로 한다. 승랑은 양극을 종합․지양하여 어떤 절대가치도 얻으려 하지 않고, 양극과 가운데를 파괴함으로써 양극이 서로 상통되어 합명(合明)되기를 원하였다. 우리는 위의 통일방안에서 직면하는 무궁지실의 오류를 승랑의 논리를 통해 접근해 볼 수 있다고 보며, 앞으로 불교가 통일방안에 기여할 가능성 역시 크다고 생각된다.

김상일
연세대학교 졸업. 성균관대 대학원 졸업(석사). 미국 클레어몬트 대학원 졸업(박사). 현재 한신대학교 철학과 교수. 저서로는《수운과 화이트헤드》《현대물리학과 한국철학》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원효의 판비량론과 현대논리학적 고찰〉〈아시아적 가치와 문명충돌론〉등 다수의 저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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