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한 사람이 논두렁에 앉아 한 마음 청정히 내면, 그 사람이 곧 ‘중’이고 그곳이 곧 ‘절’이며 그것이 바로 ‘불교’이다. (서암 큰스님)

불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불교적으로 산다는 것’이 적어도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중 한 가지 면은 불교적인 것이 나의 삶에 완전히 녹아 있어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내재적인 측면이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 30년 조금 못 되는 인생을 돌이켜 보았다.

나는 오 남매 중에서 막내로, 그것도 아주 늦둥이로 태어났다. 그런 까닭에 어릴 적부터 적게는 10년 많게는 20년 이상 나이 차가 나는 형제들과 그 형제들의 주변 사람들과 많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왔다. 형제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으며 나의 인생을 계획하고 판단하게 되었다. 내가 한창 뛰어 놀던 시절에 형제들은 이미 자신들의 인생에서 중요한 시점에 서 있었고, 여러 가지 인생의 갈림길에 대해 고민하였다.

형제들은 여러 종류의 좋은 일들과 나쁜 일들을 겪으면서 삶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이번 고비만 잘 넘기면…….”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자신의 행복을 유보시키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에서 일하는 시간과 즐기는 시간을 나누고 있었다.

짧게는 ‘주중과 주말’, 길게는 ‘직장생활과 정년 이후’로, 또는 ‘난관과 순조로움’으로 분리하여 진정한 삶의 시간을 계속해서 뒤로 미루었다. 그들에겐 ‘일 속에서 삶을 즐기며 음미하는 시간’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보의 시간은 나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명문 대학만 가면, 편한 군대만 가면, 좋은 여자만 만나면, ……. 나는 형제들처럼 사인․코사인 그래프를 그리며 살아가게 되었다. 그것은 늘 희비를 반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지금 이 순간은 잊은 채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형제들과는 다소 다른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나의 형제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인생이라는 함수의 좌표에서, 수평선 아래로 내려가는 ‘싫음’의 횟수나 기간은 줄이고 수평선 위로 올라가는 ‘좋음’의 그것을, 얼마나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시킬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다. 반면 나는 이리저리 이끌려 인생의 희비에 반응하는 마음을 어떻게 평상심으로 이끌 것인지를 고민하였다.

즉 ‘싫음’ 그 자체에 대한 극단적 혐오감에서 어떻게 자연스럽게 벗어날 것인가가 나의 숙제였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숙제에 대한 잠정적인 해답을 얻게 되었는데, 바로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그것이다. 나는 다음의 예로 그러한 거시적 안목을 확인하곤 한다.

어떤 한 사람이 설악산에 가기로 마음먹고, 모든 장비를 갖추고 휴가까지 받아 설악산에 오르던 중 산 중턱에서 아주 예쁜 꽃을 발견하게 된다. 그 꽃을 꺾기 위해 산비탈을 기어오르자 그의 손은 더러워졌다. 그는 손을 씻기 위해 조금 아래 계곡이 있을 만한 곳으로 내려오게 되었으나, 가뭄으로 계곡은 말라 있었고 작은 웅덩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가뭄 때문에 웅덩이 주위의 돌을 조금은 걷어내야 손 씻을 만한 물이 고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돌을 치우던 중, 돌 밑에 숨은 수많은 가재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뜻밖에 횡재를 하게 된 그는, 가재들을 잡아 그것을 요리해 먹기 위해 아랫마을까지 내려와 취사도구를 빌린 후, 가재들을 요리하여 먹었다.

가재들을 모두 먹고 취사도구를 되돌려 주려 하였더니, 이번엔 그 취사도구의 주인이 서울에 볼일이 있어 자가용을 가지고 올라간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차표도 구하기 힘든 상황에서 공짜로 이 집의 차를 얻어 타고 편안히 서울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그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온다.

위의 예에서 여행자는 그 나름대로 순간순간 ‘최선의 선택’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선택은 항상 그 순간에 있어서는 올바른 결정이었다. 우리들 중생의 삶이 바로 이러한 방식은 아닐까 생각된다.

사람들은 흔히 처음의 의도나 목표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는 처음의 목표와 괴리되어 가는 인생을 뒤늦게 발견하고서 괴로워한다. 나는 설악산의 정상까지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오르는 것만이 옳은 행동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잘못 되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의 목표대로 설악산 정상에는 올라가고도, 산 아래에서 가재를 포기한 일을 못내 아쉬워하기도 한다. 또는 가재를 잡아먹기 위해 산에 오르는 것을 포기했을 때, 정상을 정복하지 못한 일에 대해 후회하기도 한다.

불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순간의 유혹을 뿌리치고 정상에 오르려는 처음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거나, 아니면 처음의 목표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저 가재를 먹었다는 좋은 경험에 집중하는 자세와 같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특정한 선택이 완벽하게 좋고도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는지 의심을 하며 지금 이 순간을 잃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행복을 유보시키는 일이다. 현명한 이는 거시적으로 사물을 볼 수 있으며 스스로 인생을 판단하고 결정한다. 그리고 현재에 집중하고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것 이외의 다른 기회에 대한 막연한 미련을 두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내가 삶을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내재적인 측면의 불교적 가치관이다.

불교적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다른 측면은 신념으로서의 측면이다. 그것은 불교적으로 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는 것이다. 나는 싯다르타처럼 살고 싶다. 그것이 안되면 흉내라도 내고 싶다. 부처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상황에 부딪쳤을 때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생각하려고 한다.

그러한 노력에 의해 나는 ‘화’라든지 들떠 있는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 스스로 그 마음을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나는 화가 올라올 때 나의 모습을 본다. 그 흥분되고 흉칙한 표정이 나에게 비춰 보인다. 처음에는 이러한 모습이 혐오감과 창피함으로 다가왔으나,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이제는 그런 모습에 대해 나 자신을 타이르는 듯 웃음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순간 마음속에는 “허허, 또 시작하려는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불교적으로 산다는 것에 다른 중요한 노력이 또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는 점이다. 부처와 불법에 귀의한다는 것은 부처처럼 살고 싶다는 것에 해당된다.

나는 기본적으로 스님을, 그리고 승가 공동체를 존경한다. 근래에 스님과 그 공동체가 오염됐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수행자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이루려는 노력의 공동체에 대해 늘 희망을 가지며 존경한다.

적어도 그 분들은 외적인 모습으로나마 타의 모범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우리가 좋은 꽃이나 좋은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듯이, 그 분들이 가사를 갖춰 입고 정확한 시간에 여법하게 예불을 드리는 모습에서 나는 감동을 받는다. 나는 그 모습 자체에 초발심으로 돌아가는 에너지를 얻는다.

그 분들의 내면을 판단하기 이전에 나는 그 분들의 생활에서 나를 성찰한다. 사실 그 분들의 생각이 오염되었는지 아닌지는 나의 일차적 관심사에서 벗어난다. 내가 남의 다리를 긁어줄 필요는 없지 않는가? 그 분들이 계를 잘 지키는가 아닌가 등의 문제는 그 분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 분들에게 얻을 수 있는 부분만 얻어 가면 그뿐이다. 오히려 내 삶에 충실한 것이 나와 더불어 그 분들에게도 의미 있을 것이다. 서암 스님의 말씀처럼 바깥 경계를 탓하는 것보다는 내가 한 마음 청정히 내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불교적으로 사는 의미는 아닐까.

이것이 내가 ‘불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전부이다. 더 이상 들여다보아도 왠지 이것 이상은 찾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통찰력을 얻기 위해 바로 ‘늘 깨어있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가장 불교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지금 늘 깨어있는가?”라고 물어보면 선뜻 “그렇다!”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워진다. “부끄럽다”는 것은 아직 자신이 없고,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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