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조선불교유신론의 21세기적 의미

1. 개화기의 명논설

세상의 모든 논설은 ‘글과 내용’이라고 하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글이란 말할 것도 없이 그 논설의 내용을 담는 그릇과 형식이요, 내용은 곧 그 논설 취지의 논리적 체계를 말한다. 따라서 훌륭한 논설이란 위와 같은 글과 내용이 아울러 모두 수승한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기준을 가지고 근대 논설 가운데 탁월한 것을 들어 본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여러 가지 글이 거론될 수 있겠다. 《조선불교유신론》도 우선 꼽히는 것 가운데 하나라 함에 이의가 없을 것으로 안다. 일부 부정적 평가를 듣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결론적으로 어쨌든 명론탁설이라 함이 후인들의 생각인 것이다.

그때 중추원 의장으로서 이 글을 받아 봤던 김윤식(金允植)도, “문체로 보나 사상으로 보나 짝을 찾기 어려운 대문장이다.”라는 감상을 피력한 바가 있었다 하니 이 또한 참작할 여지가 있는 평설이라 할 것이다. 김윤식은 우리 나라 한문학사상 커다란 비중을 갖는 거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유신론》 중에서도 그 서문은 특히 은유법과 시적(詩的)인 함축미가 있어 더욱 묘한 맛을 느낄 수 있는데, 다음에 그 일부를 의역 제시해 보기로 하겠다.

‘산너머 남촌에까지만 가라. 그러면 거기에는 매화나무가 있느니라’―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듣고서 조조(曹操)의 군사들은 그 타는 듯한 갈증들을 풀어 버릴 수가 있었다 한다. 내가 이제 쓰고자 하는 이 《조선불교유신론》은 매화의 열매가 아니라 사실은 그 그림자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나의 갈증은 이미 나의 육신을 태워버릴 지경이 되어 버리고 말았으니, 나는 한낱 그림자를 가지고서나마 한줄기 시원한 물줄기를 대신케 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듣건대 조선 불교에도 한발은 매우 심하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에게도 갈증은 곧 있는 것이라 할까. 갈증이 정녕 있다고 한다면은, 매화나무의 그림자를 가지고서나마 이것을 좀 풀어 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약간 난해한 듯한 감이 있으나, 요컨대 조선불교 유신을 갈망하는 마음의 불을 끄기 위한―곧 매화나무의 그림자와 같은 공덕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이 글을 쓴다는 말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말미에 가서는 또,

나 역시 매화나무 그림자를 보시한 공덕으로써 지옥고를 장차 면할까 면하지 못할까.
하고 여운을 남기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이 《유신론》의 제안 내용들에 대한 확신이 꼭 있어서 쓴 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본론에 제시되는 논리와 제안에는 두고두고 음미해 볼 여지가 아직도 엄존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2. 병폐 척결의 열망

그렇다면 이 글을 쓸 때의 한용운의 마음은 무엇 때문에 ‘육신을 태워버릴’ 정도로 심각한 상태가 돼 있었던 것인가? 다시 말해서 그때 조선불교의 ‘한발’이란 것이 어느 정도의 것이었기에 그의 육신을 태워버릴 지경이 돼 있었다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물론 이번 세미나 발표자들께서도 분야에 따라 구체적인 언급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발제를 맡고 있는 필자로서 이때의 상황을 개괄적, 전체적으로 조감해 보기로 한다면 대개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는 그때의 조선불교, 다시 말해서 왕조 말기 불교의 무기력과 침체가 너무도 심각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그때 교단의 무기력과 침체에서 벗어나 보고자 하는 열망이 필자 한용운에게는 너무도 간절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 글을 쓴 것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는 것이다.

한용운이 볼 때 그때 한국 교단의 무기력과 침체상은 실로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와도 같은 것이었다. 생명을 걸고 단행하는 일대 수술이 아니고서는 소생할 길이 없는 중환자였던 것이다.

……여기에 가령 대종을 앓는 환자가 있다 하자. ……그런데 이것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을 생각은 아니하고 다만 약간의 침질을 가하므로써 우선 임시로 고식책을 쓴다면 어떻게 될까.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어리석은 의사, 따라서 오래지 아니하여 대종은 더욱 속으로 상하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침질을 가하기 전보다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당하고 말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서 일시적, 혹은 미온적인 방편만을 가지고서는 소위 적구지폐(積久之弊)를 도려낼 수가 없을 만큼 그렇게 중대한 상태가 돼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침체상을 뒤집어엎고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어야 불교가 사는 것이라 함이 그때 그의 생각이었다.

여기서 ‘뒤집어엎는다’는 말은 다소 과격하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유신론》의 전체 분위기를 볼 것 같으면 그다지 과한 표현도 아닐 것으로 안다. 왜냐하면 위와 같은 침체상을 도려내기 위해서는, 이른바 ‘파괴’―아직까지의 모든 적폐를 과감히 파괴해 버려야 함을 도처에서 역설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인 〈論佛敎之維新이 宜先破壞〉에서는 이 말이 더욱 선명히 부각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유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파괴의 자손이다. 그렇다면 파괴란 또 무언가. 이는 곧 유신의 모체이다. 천하에 어미 없는 자식이 없다는 말들은 하지마는, 파괴없는 유신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없으니…….

말할 것도 없이 불교유신은 파괴라는 과정부터 먼저 겪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렇기는 하지마는, 그렇다고 모든 것을 덮어놓고 그냥 부숴 버리기만 하자는 것은 또한 아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새로운 불교 건설을 위한 전제적 과정으로서의 의미일 뿐 파괴 그 자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파괴라고 하는 것은 덮어놓고 부수어 없애 버리기만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구습 중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 부분을 과감히 혁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이름이 파괴지 실상은 파괴가 아닌 것이다.

즉 현시점에 비추어 맞지 아니하는 모든 사상(思想), 감정 기타 제반 의식(儀式)을 한번 혁신함으로써 좀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불교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유신(維新)’은 곧 ‘파괴’의 모체가 되는 것이었다. ‘유신’과 ‘파괴’와의 이러한 함수 관계는 결국 아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유신이 잘 될수록 파괴도 잘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파괴가 빠르면 유신도 빠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파괴가 크면 유신 또한 크고, 파괴가 작으면 유신도 작게 마련이다. 결국 불교를 유신(維新)한다 함은 곧 얼마나 파괴를 크게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좌우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3. 《유신론》 집필의 배경

1) 왕조 말 불교의 무기력과 침체

그렇다면 그때의 한국불교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파괴라는 말을 서야 할 만큼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일까? 그 배경과 실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왕조시대의 억불정책 속에서 불교는 매우 심한 차별과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이 차별대우의 가장 큰 상징이 알다시피 ‘도성 출입 금지’에 관한 조처인데,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승려들의 도성출입을 막아 놓고 있던 조선 사회의 금령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왕조 말기에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것이 정식으로 해체되었다고 하는 1895년 이후에도 실제로는 여전히 그냥 출입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반대로 양반들이 사찰에 들어갈 때는 일부 승려들이 영접을 하게 되는데, 이때 그들이 겪었다는 수모담은 오늘날의 상식으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허다히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의 가마를 직접 메는 일도 빈번히 있었다 한다. 여기에 다시 가지가지의 침탈자, 토색질 내지는 주구(誅求) 행위가 자행됨으로써 그때 불교는 실로 말못할 신산과 비리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승려로 하여금 눈물을 백세에 남기게 한 역사였다.”는 평설은 바로 이와 같은 참상을 대변하고 있는 말이었다. 그리하여 학자에 따라서는 이 시기의 불교를 가리켜 ‘타성적 수난의 시대’니 ‘가까스로 잔천(殘喘)을 유지하고 있던 시기’니 하는 평들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만큼 이 시기의 불교는 혈맥이 아주 끊어지다시피 되어 있던 일종의 암흑시기였다. 양반 관료들로부터 아전 등속에 이르기까지 너나 없이 침탈을 자행하는 상황 속에서 사회적 신분이 여지없이 떨어져 있던 시대, 그리하여 심지어는 ‘종승(宗乘)도 없고 종통(宗統)도 없었다’는 혹평과 함께 칠천(七賤)이니 팔천(八賤)이니 하는 허설조차 있었을 만큼, 이 시대 불교의 위상은 너무도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침어와 멸시, 냉대에 시달린 나머지 다소라도 학행이 있는 승려들은 큰 절을 피하여 조그만 암자나 토굴을 짓고 거기서 마음을 닦는 것이 그때의 예사였다 한다. 초의(草衣)라든가 우담(優曇)·백파(白坡) 같은 선지식들이 없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부 고승들에게 국한되는 이야기요, 전체적으로는 역시 오랜 타성 속의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말기 불교의 위상이 이러하였으니, 그때 교단이 종교인으로서의 정상적 기능을 행할 수 있었을까? 이른바 ‘보살도의 구현’이니 하는 대승적 자세를 기대해 볼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실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신론》 서문에서 그가 “근래 불교에도 한발은 매우 심하다고 한다.”라고 한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한 말이었다. 그리하여 매화 그림자로서의 공덕이나마 베풀어 보는 마음에서 붓을 든 것이 바로 《유신론》이었다.

요컨대 자체의 위상과 인권부터 회복이 된 뒤라야 만사가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쓴 글, 이 글이 바로 《유신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파괴라고 하는 자기 혁신의 논리도 나오게 됐던 것이다.

2) 일본불교에 대한 호감과 의부

다음에 또 한 가지 배경으로서 우리는 문호개방 이후 밀려오기 시작한 일본불교에 대해 우리가 보여줬던 호감 내지는 경도 현상을 들어볼 수 있다. 즉 그때 우리가 너무도 일본불교에 매료된 나머지, 다투어 그들에게 의부(依附)코자 했던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용운은 이와 같은 부정적 현상을 극복해 보려는 생각에서 《유신론》을 쓰게 된 것이라는 배경도 있었다는 말이다.

명치(明治)시대의 일본불교는 당국과의 유대가 매우 밀접하게 연결돼 있던 집단이었다. 글자 그대로 침략세력의 앞잡이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담당하고 있었을 만큼 그들은 강한 어용성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문호개방 이후 끊임없이 한국을 향해 뱃머리를 돌리게 되는데, 이것이 모두 당국의 원조 내지는 비호 아래 이루어진 현상이었다.

대곡파(大谷派) 본원사를 필두로 일련종(日蓮宗)·정토종(淨土宗) 등에서 세웠던 포교당·별원(別院) 등의 수가 1898년까지 17건이나 되는 것을 봐도 저간의 사정은 짐작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일본불교가 이렇게 정력적으로 밀려오고 있던데 대해 그때 우리 불교의 양상은 어떤 것이었던가? 그때의 한국불교는 위에 말했듯이 오랫동안의 억불정책 속에서 교세가 너무도 쇠잔해 있었다. 따라서 승려의 사회적 지위도 이를 데 없이 떨어져 있던 때가 바로 그때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한국불교의 약점에 착안, 그들은 온갖 방략을 동원해 가면서 우리에게 접근해 오고 있었다. 즉 우리 불교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마운 일’ 혹은 ‘은덕’을 베풀어 주면서 계속 침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억불정책의 중심이었던 ‘도성(都城) 출입 금지’의 악법을 혁파하는 데 그들이 헌신적 주선을 한다든지, 또 혹은 불교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일에 여러 가지로 활동을 한다든가, 어쨌든 불교에 대해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공작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라고도 할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때 한국 교단에서는 점차 그들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고, 나아가서는 그들에게 의부코자 하는 경향이 급속도로 확산돼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본불교인에게 감사장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일본으로 건너가 계(戒)를 받는 승려가 생겨나고, 또 일부에서는 통감부를 움직여 ‘사재보호(寺財保護)에 관한 법령’을 내리도록 종용한 예도 있었다. 그리고 1906년 2월에는 이보담(李寶潭)·홍월초(洪月初) 등의 주동으로 정토종의 정상현진(井上玄眞)과 결탁, 원흥사(元興寺)에다 불교연구회를 만들어 물의를 일으킨 일도 있었다.

또 이 무렵 교단에서는 일본 ○○종파의 ‘관리청원(管理請願)’까지를 요청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었을 만큼 저간의 사정은 더욱더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 ‘관리청원’이란 일본 ○○종파와의 연합 또는 그 말사(末寺) 가입을 뜻하는 말인데, 사찰에 따라서는 일본측의 말사가입 공작을 단호히 거부한 예도 있으나, 결과적으로 어쨌든 여러 사찰들이 그것을 수락하고 있었다 한다.
그래서 뒷날 권상로 같은 학자는 이때의 상황을 가리켜,

……승려계의 일변은 풍조를 흡인(吸引)하고 일변은 습관을 고집하고, 혹은 세력을 희모(希慕)하여 외호(外護)도 의뢰코자 하며, 혹은 분개를 포(抱)하여 자립으로 유지코자 하나, 기대부분(其大部分)은 내지(內地) 하종(何宗)과 연락하여 교세(敎勢)를 인상(引上)코자 하는 고로…….

운운하는 평가를 한 일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능화 역시 다음과 같은 문자를 남긴 것이 있는데 이것도 물론 같은 맥락의 논지였다.

조선 승려들은 그때에 대체 어떤 종지(宗旨)를 써야 할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토종(=일본의 淨土宗)을 표방해도 말이 없고, ……원종(圓宗)을 만들어도 무조건 따르며……. 또 혹은 임제종(=일본의 臨濟宗)에 부속을 해도 수수방관…….

4. 파격적 제안의 내용

이상 입성해금(1895) 이후 ‘합방’ 때까지 15년 동안 한국불교가 얼마나 향방 없이 헤매고 있었던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유신론》은 결국 이와 같은 병폐를 극복 지양해 보려는 생각에서 쓰여진 글이었다는 점도 있는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은 취지를 직접 밝히고 있는 것은 아니나,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가지고 볼 때 이것은 족히 입증이 되는 일이다.

즉 ① 《유신론》 본문 가운데 “……이제 타교의 물결이 도도히 밀려오고 있는데……”라는 구절이 보인다는 점, ② 1908년에 한용운이 일본 각지를 순유하고 와서 서울에 측량강습소를 개설, 측량강연을 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일제 기타에게로 넘어가는 토지를 수호할 목적에서 한 일이었다는 점, ③ 《유신론》을 쓴 것이 1909∼1910년에 걸치는 동안이었는데, 이 무렵에 그가 맹렬한 반조동종운동, 즉 임제종운동을 일으킨 일이 있었던 점 등이다.

그러면 다음에 이 글의 골격과 구성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위에서 이 글의 서문이 고도의 비유법을 쓰고 있다는 말을 하였는데, 그러나 본문은 이렇게 문학적 서술만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좀더 직접적이오 구체적인 제안인 것이다. 나아가서는 좌충우돌 당대 교단의 병폐를 파헤쳐 놓고 있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통쾌한 맛까지를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유신론》이다. 내용은 대강 이러하다.

    제1장 서론(緖論) : 현대는 각 분야에 모두 유신의 기운이 팽배하고 있는데 불교만이 이를 외면하고 있음을 통매하면서 그 시급성을 촉구하는 내용.

    제2장 논불교지성질(論佛敎之性質) : 요샛말로 일종의 불교본질론, 즉 불교는 미신이 아니라 고금동서의 모든 철학을 종합·포섭하고 있는 위대한 사상이라는 요지.

    제3장 논불교지주의(論佛敎之主義) : 불교의 이상은 평등주의 내지는 구세주의에 있는 것으로 서양의 자유주의와도 일맥 통하는 데가 있다는 것.

    제4장 논불교지유신(論佛敎之維新)이 의선파괴(宜先破壞) : 위에서 말한 그의 가장 과격한 혁신의 논리, 즉 파괴의 논리를 서술한 부분.

    제5장 논승려지교육(論僧侶之敎育) : 승려도 좁고 고루한 지식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관한 식견도 갖추고 있어야 함을 역설.

    제6장 논참선(論參禪) : 그때 교계에 만연하던 가짜 참선의 실상을 강타하면서 이에 대한 개선책을 펴 나감.

    제7장 논페염불당(論廢念佛堂) : 왕생극락만을 목표로 하는 가짜 염불을 하루 속히 시정하고 진정한 의미의 염불로 돌아가야 함을 역설.

    제8장 논포교(論布敎) : 그때 불교의 침체성을 포교 부재에서 찾고 타교의 포교 실태를 상기하면서 그 방법론을 제시함.

    제9장 논사원위치(論寺院位置) : 사원의 위치가 산간 벽지에 있어 가지고서는 중생과의 교섭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갈파함.

    제10장 논불교숭배지소회(論佛敎崇拜之塑繪) : 미신적인 요소가 많은 탱화들을 일체 없애 버리고 부처님과 보살상만을 예배대상으로 할 것을 역설함.

    제11장 논불교지각양의식(論佛敎之各樣儀式) : 번잡 다단한 의식들을 모두 일소하고 간략하면서도 품위있는 형식으로 개혁할 것을 촉구함.

    제12장 논승려지극복인권(論僧侶之克服人權)이 필자생리시(必自生利始) : 승려의 생활을 신도의 보시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립을 해야 정당한 인권을 누릴 수 있다는 것. 그렇다고 자본 축적까지를 하라는 것은 아니다.

    제13장 논불교지전도(論佛敎之前途)가 관어승려지가취여부자(關於僧侶之嫁娶與否者) : 승려가 독신생활을 함으로써 파생되는 폐단들을 지적하면서 승려도 가취생활을 해야 불교 발전기 가능한 것임을 역설.

    제14장 논사원주직선거법(論寺院住職選擧法) : 주지의 막연한 윤번제 등을 폐지하고 선거법을 제정, 선거한 다음, 적당한 보수와 함께 합리적 행정을 펴게 해야 한다는 것.

    제15장 논승려지단체(論僧侶之團體) : 승려들의 독선적인 이기주의를 지양하고 조직과 체계가 있는 교단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

    제16장 논사원통할(論寺院統轄) : 각양각색의 무질서한 생활방식을 버리고 일정한 원칙하에 전체를 통할하는 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

    제17장 결론(結論) : 이 논설은 조금도 사심이 없이 진정을 토로한 것인 바, 채택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희망은 역시 채택될 것을 바란다는 것.

5. 한계와 문제점

위와 같은 골격만을 가지고 봐도 그가 당대 교계(敎界)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가 하는 것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①부터 ④까지는 비록 항목은 다르지만 결국 이 논설 전체에 대한 서론(緖論) 부분으로 생각해 볼 수 있고, 따라서 구체적인 포부를 제시하는 것은 ⑤의 승려교육(僧侶敎育) 문제 이하 ?의 사원통할(寺院統轄) 문제까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불교지성질(佛敎之性質)’이라든가 ‘불교지주의(佛敎之主義)’라든가 하는 것은 그 이하 부분의 입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서설(緖說)쯤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후의 명논설이란 평가에도 불구하고 《유신론》에는 몇 가지 한계점이 있다. 이를테면 그 당시 교단의 병폐를 피상적, 관념적으로만 지적한 부분이 있다든가, 혹은 급진적 혁신에 조급했던 나머지 수행승의 생명이라 할 계율문제를 세속적 기준에서만 보고 있는 점 등이 그것이다. 특히 이 계율문제를 중추원이니 통감부니 하는 세속 권력에 의지해서 해결해 보려 했던 점은 한용운답지 않은 처사였다는 감마저 없지 않다. 이 취처문제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교단내 선지식들이 거의 모두 비판적인 입장에 있는 것으로 안다.

그리고 이밖의 항목들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모두 찬동만을 하고 있는 것은 또한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일이 필자에게는 있었다. 이를테면 연전에 해인사 일타 스님으로부터, “《불교유신론》…… 참으로 통쾌하고 속시원하게 해놨지요. …… 허지만 그렇게 대번에 혁명을 해서 바꿔 놓을 수가 있는 것인가요 어디…….”라는 요지의 감상을 들은 일이 있었는데, 이 말은 곧 《유신론》에 대한 위와 같은 부정적 평가의 일단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병폐의 척결과 함께 본래 면목으로의 방향제시를 하고 있는 고전이란 점에서 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어쨌든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

정광호
서울대 사학과 졸업. 문학박사. 현재 인하대학교 대우교수. 논저서로 〈일본의 불교계와 식민통치〉 〈일본 침략 시기 불교계의 민족의식〉 《한국불교 최근 백년사 편년》 《한국근대민중불교의 이념과 전개》(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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