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조선불교유신론의 21세기적 의미

1. 머리말

주지하는 대로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불자(佛子)이나, 그의 생애는 불교만을 위한 데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의 삶은 조선의 독립과 발전, 그리고 그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명저 《조선불교유신론》도 불교의 사상만을 널리 알리고자 한 데 있지 않았다. 불교를 어떻게 이해하며 무엇을 실천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사실이나, 실은 불교의 유신을 통해 조선의 유신을 꾀하고자 했다.

《조선불교유신론》은 불교적 인식만으로는 그 의의를 제대로 알 수 없다. 철학적 인식문제가 제고돼야 하는데, 특히 근대계몽철학의 실천논리가 중시돼야 한다. 만해가 이 책에서 불교는 ‘종교이자 철학’이라고 한데서도 이러한 문제의식은 짚어져야 할 것이다. 다만 근대계몽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 책의 저술시점인 1910년과 출판시점인 1913년이 바로 근대에 해당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만해사상이 철학적이고 계몽적이기 때문이다.

1905년 일본 군국주의는 조선을 소위 보호조치하며 5년 뒤, 1910년에는 아예 병합하고 만다. 이를 각각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라 하거니와 경술합병 이후 많은 선각자들이 이 땅을 떠남도 주지의 사실이다. 신채호(申采浩) 등이며 만해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이들의 망명은 지금까지 싸워온 ‘붓’을 통한 방식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보고, 그 대신 ‘칼’을 든 것이다.

을사에서 경술까지의 ‘한말(1905∼1910) 국권회복운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눠 진행됐다. 하나가 유림과 구식군인을 중심으로 한 ‘의병항쟁’이요, 다른 하나가 전술한 신채호 외 장지연(張志淵)·박은식(朴殷植) 등이 참가한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의병항쟁은 경술 이후 그 무대를 만주로 넓혀 나가 독립군의 중요한 성분이 된다. 신채호의 경우, 경술을 계기로 그 이전까지의 애국계몽운동방식이 무력운동방식으로 바뀌었다.

만해도 만주에서 오래 머물렀다면 무력항쟁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돌발적인 사건을 만나 도중에서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때문에 그의 망명은 단기간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 사건은 만해가 그 일생을 애국계몽운동으로 시종일관할 수 있게 해주었다. 만해가 민족대표 33인으로 1919년 3·1운동에도 참가하지만 이때에도 그의 사상적 경향은 폭력적이기보다는 계몽적인 성격이 강했다.

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을 1910년에 탈고했다는 점에서 그와 한말 ‘애국계몽운동’과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 《조선불교유신론》은 ‘애국계몽운동’이 낳은 한 산물일 수 있으며, 동시에 그 정신과 취지는 이미 ‘애국계몽운동’으로 배출돼 나갔다고 할 수 있다. ‘애국계몽사상가’ ‘민족 3사가’ 등으로 불리는 장지연·박은식·신채호는 을사 이후 〈대한자강회월보〉 등의 학회지에 명(名)애국계몽논설을 펴나갔다. 이들은 일제를 탓하기에 앞서 조선이 왜 그들의 ‘보호령’이 되어야 했는지를 돌아보고 이제라도 힘을 길러야 한다며 조선 민중을 상대로 애국계몽운동을 펼쳐갔다.

만해를 비롯한 당시의 선각자들이 근대 중국의 계몽사상가로 저명한 양계초(梁啓超)의 사상을 거의 일정하게 받아들인 점도 중시할 대상이다. 사실 이들은 잘 훈련된 한문 지식에 의거, 사회진화론 등 양계초가 소개하는 근대학술문명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만해도 일찍부터 ‘신동’이라 불린 만큼 학문소양이 평소 양호한 데다 출가한 후, 불교서적을 섭렵한 탓에 그 지적 수준과 영역은 장지연 등의 정상급 지식인에 비할 만했었다.

이 글에서는 만해의 양계초를 통한 근대계몽철학의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 그 사상적 특질은 어떠한지, 나아가 그것이 한말 ‘애국계몽운동’의 사상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등을 중점 고찰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여 불교가 철학적 종교라는 인식을 새롭게 하는 한편, 《조선불교유신론》이 한말의 사상계 형성과 동향에 적지 않은 공로를 미쳤음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런 시도는 만해의 1900년대 지적활동의 성격을 아는 데 많은 지침이 되리라 믿는다.

2. 사회진화론과 ‘지신(智信)’ 불교

한말 ‘애국계몽운동’의 사상인 ‘애국계몽사상’1)과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에는 사회진화론이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다. 인간사회도 생물계와 다를 바 없이 약육강식의 생존법칙이 엄존한다는 사회진화론은 스펜서 등이 다윈의 《종(種)의 기원》(1859)을 확대 해석한 데서 나왔다. 그런데 사람도 다른 생물과 같이 유기체로 되어 있고, 사회란 바로 그런 사람들에 의해 움직인다는 점에서 사회진화론은 ‘사회유기체설’로도 표현되었다.1) 拙稿, 《愛國啓蒙思想의 構造硏究―韓末 學會誌를 中心으로》(서울대 대학원 사회교육과 역사전공 석사학위논문, 1982).

특히 양계초가 소개하는 〈정치학 대가 브른츄리의 학설〉2)에 의하면 사회유기체는 ‘국가유기체설’로도 발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브른츄리는 루소의 자유방임주의를 비판, 국가간섭주의를 제창했는데, 양계초가 이를 근거로 자신의 군주입헌사상, 즉 국가주의 우위의 정치사상을 수립해나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양계초는 약자가 강자의 지배 아래 놓이고 마는, 적자생존의 법칙이 중국에도 적용된다고 본다. 곧 청일전쟁(1894∼1895)의 패전으로 중국은 더 이상 강대국이 아니라며, 그런 환상은 시급히 깨야 한다고 믿었다. 2) 梁啓超, 〈政治學大家伯倫知理之學說〉(1903), 《飮氷室文集》 13, p.89. 《梁啓超選集》, p.411. 拙著, 《중국근대화기수 梁啓超》(서울: 林芳書苑, 2000), p.51.

그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은 우리 선각자들이 앞 다투어 읽었다. ‘음빙실’은 그의 호(號)로 뜻은 ‘얼음을 먹어 차오르는 열을 식힘’이라 하겠다. 당시 중국의 참담한 현실이 그로 하여금 열이 나게 했던 모양이다. 그의 글의 특징은 다정다감하고 박학다식한 데 있었다. 즉 계몽사상가가 지녀야 할 덕목을 고루 갖춘 셈이었다. 흔히 계몽사상가를 백과전서학파라고도 한다.

만해와 양계초가 서로 다른 점은 만해가 승려 출신이고, 양계초가 정치를 한 것이고 이를 빼고는 두 사람이 모두 시도 쓰고 소설을 쓰는 등 비슷한 면이 많았다. 양계초는 1873년생으로 만해보다는 여섯 살이 더 많다. 《조선불교유신론》은 내용과 문체에서 상당 부분 양계초를 닮아 있음도 밝혀둔다.

사회진화론을 중국에 처음 소개한 이는 엄복(嚴復)으로 그의 《천연론(天演論)》(1896)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책의 출간에 앞서 사회진화론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가 청일전쟁 직후 천진에서 발행되는 《직보(直報)》 등을 통해 〈세상변화의 극심함을 논함(論世變之?)〉, 〈망국을 구함을 논함(救亡論)〉 등을 발표하면서 이들 논지를 ‘천연’, 즉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중국의 패인과 일본의 승인을 각각 지적했던 것이다

진화론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도 대략 이 무렵이다. 한말의 개화사상가 유길준(兪吉濬)은 《서유견문(西遊見聞)》(1895)에서 인간사회도 ‘미개(未開)·반개화(半開化)·개화(開化)’의 발전과정을 거친다고 보았다. 이 책은 그의 미국 유학 및 유럽 방문의 성과이기도 한데 이에 앞서서 그는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됐었다. 이때 그는 문명개화론자로 이름이 높은 복택유길(福澤諭吉)을 만나 따로 사생(師生) 관계를 맺으면서 많은 교시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근대 한국은 1905년 전후로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이 전래되면서 사회진화론의 저변이 확대되었다. 본래 《조선불교유신론》의 ‘유신’은 체제변혁을 뜻하기보다는 개혁을 뜻했다. 일본의 ‘명치유신’(1868)이 그 전례로 이것은 봉건세력을 타도하고 천황제를 공고화함이었다.

이로부터 30년 후 양계초가 스승 강유위(康有爲)와 함께 전개한 청말의 ‘무술변법운동’(1898)은 명치유신의 교훈을 되살린 것이나 수구파의 반격으로 ‘백일천하’로서 실패하고 만다. 양계초는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일본으로 망명하는데 거기서 그는 사상계몽 잡지인 《청의보》 《신민총보》 등을 잇달아 발간하면서 다시금 명성을 떨치었다.

1900년대 초, 양계초의 저명한 〈신민설〉, 〈자유서〉 등이 발표되고 이들 논문은 우편 및 인편 등의 경로로 우리나라에 곧장 전해져 한말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양계초의 《이태리건국삼걸전》이 1906년 신채호에 의해 번역 출판되고, 또 1907년에는 전항기(全恒基)에 의해 양계초의 《자유서》가 번역 출판되기도 했다. 양계초의 이들 글은 모두 《음빙실문집》에 포함돼 있는데, 따라서 양계초문집이 적어도 1906년 이전에 부분적인 형태로 식자층에 유포됐을 가능성이 높다.

1905년 만해는 백담사에서 한 선사에 이끌려 득도하고 승려가 되는데 원래 그는 불교에 귀의하고자 출가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세상 물정을 알아보고 싶은 충동에서 무작정 서울로 향해 발길을 옮기다 도중에 설악산 오세암을 찾았다고 한다. 또는 동학에 가담하여 싸우다 실패한 뒤 은신할 필요에서 설악산에 들어가게 됐다고도 한다.

출가든, 가출이든 그 시점은 1896년, 즉 그의 나이 만 17세가 되는 때임은 거의 확실하다. 따라서 이로부터 1905년까지의 7년간이 그가 설악산에서 불교에 학문적으로 정진하던 시기라 이해된다.

만해의 학문 소양이 어느 정도인지도 그의 사상 편력을 알아보는 데 한 단서가 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 불렸다고 한다. 출가 이전에 이미 《소학》 《통감》 《삼국지》 《서상기》, 그리고 《논어》 《시경》 등의 《사서오경》을 모두 독파했다고 한다. 그가 설악산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져들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소양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본다.

만해가 근대 선각자의 필독서라 불리는 세계지리서인 《영환지략(瀛環地略)》을 비롯해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을 읽었을 시점은 1908년 전후가 되지 않을까 한다. 1908년 그는 불교계의 대표로 일본을 방문하거니와, 거기서 반년 가까이 머무르는 동안 동경의 한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을 청강하는 등 각지의 명찰을 둘러본다. 최린(崔麟)을 만난 것도 이때라고 한다. 만해는 일본의 신문명 시찰을 마친 후 《조선불교유신론》의 집필에 들어가 1910년 완료했던 것 같다.

《조선불교유신론》은 〈서론〉, 〈불교의 성질을 논함〉, 〈불교의 주의를 논함〉, 〈불교의 유신은 우선 파괴에서 시작됨을 논함〉, 〈승려의 교육을 논함〉, 〈참선을 논함〉, 〈염불당 폐지를 논함〉, 〈포교를 논함〉, 〈사원 위치를 논함〉, 〈불가 숭배의 상이나 그림(塑繪)을 논함〉, 〈불가의 각종 의식을 논함〉, 〈승려의 인권극복은 반드시 생산(生利)에서 시작해야 함을 논함〉, 〈불교의 전도가 승니(僧尼)의 가취(嫁娶) 여부와 연관이 있음을 논함〉, 〈사원 주직(住職) 선거법을 논함〉, 〈승려의 단체를 논함〉, 〈사원의 통할(統轄)을 논함〉, 〈결론〉 등 모두 17편으로 구성돼 있다.

이 책에서 만해가 언급한 서양근대철학자들은 거의 양계초를 거쳐서 이해되고 수용된 점에서 그에 대한 양계초의 영향은 압도적이라 할 수 있다. 만해가 중요하게 다룬 불교의 성질과 주의, 그리고 승려의 교육 등은 양계초의 〈불교와 군치(群治)의 관계〉3)에서 상당 부분 참고한 것이다. 양계초는 이 글에서 사람들의 잘못된 불교관으로 인해 여러 가지 사회병폐가 생겨났다며, 예컨대 ‘미신·독선·염세·유한·차별·타력’ 등이라 하고는 이것들을 ‘지신(智信)·겸선(兼善)·입세(入世)·무량·평등·자력’ 등으로 각각 대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3) 梁啓超, 〈論佛敎與群治之關係〉(1902), 《飮氷室文集》 10, pp.45∼52.
‘군치(群治)’란 ‘사회의 다스림’이란 것으로 이는 각종사회문제를 다스리는 이치나 방법 등을 말함을 밝혀둔다.

양계초는 또 불교의 최대강령이 자비와 지혜를 동시에 연마하는 ‘비지쌍수(悲智雙修)’라며 이는 ‘발심(發心)’으로부터 ‘성불(成佛)’에 이르기까지 항상 미혹을 버리고 깨달음을 이루는 ‘전미성오(轉迷成悟)’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중생은 부처만을 알아 이를 맹신한다면서 이것은 올바른 깨달음이 아니라고 했다. 양계초는 또 불경에서도 ‘부처를 알지 못하면서 부처를 믿는 것은 그 죄가 부처를 비방하는 것보다도 더 나쁘다고 한다.’면서 부처에 대한 비방은 회의심 때문인데 실은 이 회의로부터 믿음으로 들어가는 ‘유의입신(由疑入信)’의 믿음이야말로 진실하다고 했다.4)4) “佛敎之最大綱領, 曰‘悲智雙修’, 自初發心以?成佛, 恒以轉迷成悟爲一大事業. 其所謂悟者, 又非徒知有佛焉而盲信之之謂也. 故其敎義云, ‘不知佛而自謂信佛, 其罪尙過於謗佛者’. 何以故, 謗佛者有懷疑心, 由疑入信, 其信乃眞.”(梁啓超, 위의 책, p.46)

만해 역시 “불교는 지신의 종교요, 미신의 종교가 아니라”며 불교의 ‘철학적 성질’을 강조하고 있다. 또 양계초의 ‘전미성오’에 대해서도 이를 ‘이오위칙(以悟爲則)’, 즉 깨달음으로써 법칙을 삼음이 불교의 근본정신이라 이해하고 있다. 그리하여 중생은 모름지기 그런 깨달음으로써 불교 지혜의 바다인 ‘불지혜해(佛智慧海)’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면서 불경에서도 ‘복혜양족(福慧兩足)’이라 하고,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한다고 했다.5)5) “佛敎者는 智信之宗敎요 非迷信之宗敎니라. …夫佛敎――豈曾與迷信宗敎로 同歸一轍이리요. 經에曰福惠兩足이라 하시고, 又曰一切種智者는 證悟自心하여 瑩徹無碍하여 無所不知之謂也니.”(韓龍雲, 〈論佛敎之性質〉, <韓龍雲 全集>2卷(서울:신구문화사,1973),p.102)

즉 ‘복’과 ‘지혜’는 사람에 있어서 ‘두 발’과 같았다. 어느 한쪽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체종지’란 모든 가치와 현상이 마음 안에 있다는 뜻인데 곧 ‘진여(眞如)’를 일컬음이었다. ‘종지’란 ‘갖가지 지혜’를 나타내고, 따라서 ‘일체종지’는 ‘모든 종지’가 된다고 함도 들어둔다. 어떻게 하여 ‘진여’, 즉 ‘일체종지’에 들까? 이를 도와주는 의식이 염불이요 참선이나 그 본래의 뜻이 많이 타락했다고 만해는 본다. 예컨대 중생이 염불(念佛)을 하는 게 아니라 ‘호불(呼佛)’을 하고 있었다. 만해는 곧,

  •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아미타불을 부르니 누가 부르고 누가 대답을 하리오. 무릇 지극한 도는 무언(無言)이거늘 어찌 그리 다언(多言)이냐. 불도(佛道)를 불러서 구한다면 천번 만번 불러도 좋겠지만 불러서 구하지 못한다면 비록 한번 불러도 군말(贅言)인 것이다.
    내가 듣기에 염불의 목적이 극락정토에 가서 태어남(往生淨土)에 있다니, 어찌 그러리오. 성불(成佛)하여 정토에 가서 태어났다고는 들었지만 호불(呼佛)하고서 정토에 갔다고는 듣지 못했으며, 예토(穢土)가 정토라고는 들었으나 예토 외에 달리 정토가 있다고 함은 듣지 못했다. 흙에 본래 예와 정이 없고 다만 마음에 예와 정이 있음이다.
    진짜 염불이란 어떤 것이냐. 부처의 마음을 생각하여 나 또한 이를 마음으로 삼고, 부처의 배움을 생각하여 나 또한 이를 배우며, 부처의 실천을 생각하여 나 또한 이를 실천함인 것으로, 이렇게 하기를 한 순간의 동정 간에도 잊지 말아야 한다.6) 6) “以阿彌陀佛로 呼阿彌陀佛이면 誰呼誰對리요…聞成佛而往生淨土요 未聞呼佛而往淨土者며 聞穢土가 卽淨土요 未聞穢土之外에 別有淨土也라 土本無穢淨이건마는 但心有穢淨이라…眞念佛者는 何오 念佛之心하여 我亦心之하고 念佛之學하여 我亦學之하고 念佛之行하여 我亦行之하여…” (韓龍雲, <論廢念佛堂>위의 책,p.109)

    고 지적한다.

즉 억겁을 두고 달려야 갈 수 있다는 서방의 정토, 그 정토에 있다는 부처인 아미타불을 소리쳐 불러본들 아미타불이 알아듣겠느냐, 왜 알아듣지도 못할 부처를 소리쳐 부르느냐, 그러면 혹 그 성의에 보답이라도 할 것 같아 그러느냐, 그러나 그런다고 응답하고 복을 줄 부처는 없으니, 꼭 부처에게 자기를 알리고 싶다면 오직 마음으로 해야 할 것이다. 이게 바로 염불이다. 그런데 마음으로 할 것 같으면 굳이 정토에까지 가지 않아도 되니 자기 마음이 곧 정토요 부처요, 아미타불이 아니겠는가. 그런 아미타불인 자신을 보지 못한 채 ‘아미타불’ 하고 외치니, 마치 철수가 철수보고 철수야 하고 부르는 것과 같아 누가 누구를 부르고 누가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그는 의아해 했던 것이다.

예토와 정토가 오직 마음에 있다고 하는 점에서 만해의 불교인식 또한 경험론적이 아니라 선험론적임을 알 수 있다. 이러면 경험 중시의 근대계몽철학과는 위배되나, 이런 제약도 한말이란 특수한 상황에서 불가피했음도 고려해야 한다. 한말의 절망적 시대분위기를 희망으로 바꿔가는 데는 마음이란 주관적인 실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애국계몽의 힘은 바로 그런 인식에서 나왔던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만해가 불교를 미신이 아닌 ‘지신’이어야 한다고 강조한 이면에는 인류문명도 시대의 나아감과 더불어 발전한다고 하는 의미도 들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만해의 사회진화론에 대한 견해 역시 일반적인 문명개화론이나 국민교육론 등으로 그 의미를 짚어 보게 된다. 실제 그는 “교육이 많은 자는 문명이 성하고 교육이 적은 자는 문명이 쇠하며, 교육이 없는 자는 아예 야만금수(野蠻禽獸)의 도(道)와 같이 된다.”고 했다. 또 문명과 교육의 관계에 대해 “문명이 온도계의 바늘이라면 교육은 기후이니 기후의 정도에 따라 오르내리는 것이 온도계의 바늘이요, 교육의 정도에 따라 성하고 쇠하는 것이 문명이다.”7)고도 했다. 교육의 정도 여하가 문명의 정도 여하를 결정짓는다는 뜻이다. 7) “文明은 似寒暑針하고 敎育은 似氣候하니 隨氣候之程度而昇降者 寒暑針也오 隨敎育之程度而盛衰者는 文明也니.” (韓龍雲, 〈論僧侶之敎育〉, 위의 책, p.106)

만해는 “세계가 부단히 발전하여 문명의 피안(彼岸)에 닿기 전에는 그치지 않을 것”이라며 “희망은 생존과 진화(進化)의 자본(資本)”8)이라고 했다.8) “今後之世界가 進進不已하여 不至文明之彼岸而不止하리니…故로 於優劣適不之義에 思之重思之則佛敎之於文明에 非惟不負라 反有特色이라…夫

이것은 곧 그의 역사인식이 미래지향적임을 나타내는 한 단서라 하겠다. 그런데 인류에게 골고루 미래의 발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열에 따라 구분이 있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우자(優者)가 열자(劣者)를 멸할 수도 있었다. 곧 우승열패(優勝劣敗)이니, 우열의 차이는 결국 죽느냐 사느냐의 여부로 직결되었다.

열자가 어떻게 하여 우자의 간섭과 지배로부터 벗어날까 하는 것도 중요한데 이를 그는 ‘희망’이라 본다. 즉 아무리 절망스런 때를 만나더라도 결코 낙담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는 과거의 불합리한 집적(集積)을 깨뜨리는 ‘유신’의 각오가 필요한데 이를 그는 ‘파괴’라고 부른다. 곧 ‘파괴는 유신의 어머니며, 유신은 파괴의 자손’이라고 한다. ‘파괴’가 있어야 ‘유신’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과거라고 해서 무조건 허무는 것은 아니었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것을 시대에 맞춰나가는 ‘혁구향신(革舊向新)’이 필요하다고 한다.9)9) “維新者는 何오 破壞之子孫也오 破壞者는 何오 維新之母也라…夫破壞也者는 非毁撤而滅絶之謂也라 但革其舊習之不合於時者하여 使之向新而已라.” (韓龍雲, 〈論佛敎之維新이 宜先破壞〉, 위의 책, p.105)

‘파괴’는 본래 양계초가 주창한 말인데, 그 정치적 의미와 관련해서 그간 의논이 분분했다. 혁명을 뜻하느냐, 아니면 개혁을 뜻하느냐는 논란이 그것인데, 근래는 후자 쪽에 더 무게를 두는 경향이다.10) 만해가 ‘파괴’에 대해 ‘혁구향신’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볼 때 만해 역시 ‘파괴’를 혁명과 같은 대변혁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헤아리게 된다. 만해는 곧 급진적인 사상가가 아니고 계몽적이라고 함을 이런 대목에서도 살피게 된다. 10) 拙著, 앞의 책, pp.146∼150.

근대계몽철학은 국민교육사상과도 연관이 많은데 즉, 7세 이상의 아동을 ‘국민’으로 간주해 이들에 대한 교육을 국가가 직접 관장함을 뜻했다. 의무교육이 그래서 생겼거니와 이를 위해선 사범학교를 나온 전문교사가 필요했다. 만해의 〈승려의 교육을 논함〉이란 글을 보면 마치 그가 아동을 중생이라 보고, 교사를 승려라 보아 훌륭한 아동교육을 위해선 훌륭한 교사가 있어야 하듯 바른 중생계도를 위해선 잘 훈련된 승려가 있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 같았다.

만해의 불교인식은 논리적이고 계몽적이며 구도적인 자세가 강하다. 논리학의 발달 또한 근대계몽철학의 한 성과임도 물론이다. 만해의 불교철학이 논리적이라고 함은 그 철학의 인식체계가 과학적이라는 뜻도 들어 있다. 그런데 사회진화론이라고 해서 당시 꼭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일례를 들면 강국의 약국에 대한 지배가 당연시되는 것이다. 이런 한계성을 만해가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를 보기로 하자.

3. 애국계몽론과 ‘이타(利他)’ 불교

본래 개인적·경쟁적 자유주의의 성격이 강한 사회진화론은 실은 양계초에 이르러 국가주의적 성격으로 탈바꿈한다. 사회진화론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수용한 결과이기도 한데 이런 자의성은 비단 양계초만의 방식이 아니라, 한말의 우리 계몽사상가도 그러했던 것이다. 사실 ‘을사늑약’으로 국권마저 피탈된 상황에서 국가주의를 능가하는 가치란 있을 수 없었다.

만해의 사상과 한말 ‘애국계몽사상’ 간에는 사회진화론적 인식이 강하게 흐르지만 이와 함께 애국계몽론의 인식도 강했다. 본래 애국계몽이란 애국과 계몽의 합성어로 애국은 정치사회적인 인식이 강하고 계몽은 문화철학적인 인식이 강했다. 그런 인식이 만해에게는 국가주의적 호국불교사상과 계몽주의적 불교유신사상으로 나타난다고 하겠는데 실은 사회진화론도 애국계몽의 한 범주인 점에서 둘의 차별성은 그리 크지가 않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고염무(顧炎武)는 국가의 흥망이 모든 이의 책임이라는 ‘필부유책(匹夫有責)’이란 말을 남겨 유명한데, 양계초도 만해도 모두 그러한 인식에 철저했다. 애국계몽론은 바로 이런 우국의식(憂國意識)의 발로라 할 수 있다. 고염무는 명이 망하자 청에 협력하지 않고 전국을 떠돌며 명이 망한 원인을 연구했는데, 그의 저작은 유학의 틀 안에서 핵심을 찾아 중국의 전통과 서양의 지식을 결합하고자 하는 19세기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의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양계초도 실은 ‘중체서용학파’이며, 이 같은 개념으로 우리나라에선 ‘동도서기학파(東道西器學派)’가 있었음을 들어둔다. 장지연 등의 애국계몽사상가도 ‘동도서기학파’에 속하고, 이런 점에서 만해 역시 ‘동도서기학파’에 속한다고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만 사회진화론은 기존의 ‘중체서용론’이나 ‘동도서기론’이 국가의 암운을 떨치고 진운을 열어나가는 데 큰 힘이 되지 못하였음을 반성하고 좀더 서구 수용에 적극적이었음을 밝혀둔다.

만해는 사회진화론이 팽배한 당시를 만나 불교도 진리로 무장해야 함을 강조했는데 ‘지신’ 불교론이 바로 그러했다. 그러나 불자가 혼자 지혜를 가다듬음은 독선(獨善)일 뿐이니 이를 겸선(兼善), 즉 중생과 더불어 해야 할 것이라 보았다. 이리하여 그는 재래의 독선·이기 중심의 불교가 제도중생(濟度衆生)의 ‘도타(度他)’ 불교, ‘이타(利他)’ 불교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며 불교계몽사상을 전개했다.

그가 믿는 불교의 주의는 ‘평등주의’와 ‘구세주의’가 그 모토였다. 이에 따라 자신의 이익만 돌본다는 ‘독리(獨利)주의’가 당연히 배척의 대상이 됐다. 그는 많은 사람이 불교를 ‘독선의 교’로 믿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신앙이라며 《화엄경》을 예로 들어 “나는 마땅히 널리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위하여 모든 세상과 어떤 지옥에서도 영원토록 고통을 받으리라.”고 한 부처의 설법을 인용하고 있다. 동시에 《화엄경》의 모든 교리도 중생제도라는 ‘도생(度生)’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며 ‘독선’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11)11) “…華嚴經에 曰我當普爲一切衆生하여…盡未來際토록 受一切苦라…其外千言萬偈가 不出於度生하니 是果獨善其身乎아.” (韓龍雲, 〈論佛敎之主義〉, 위의 책, p.105)

그는 불교의 출가가 왕왕 세상을 비관하는 염세주의에서 나왔다는 일부의 평가에도 불만을 표시하고 “불교란 구세·도생의 교이니 불제자가 된 자가 염세와 독선을 한다면 이 역시 위배될 뿐이라.”12)고 강조한다. 아울러 ‘정양(靜養)’, 즉 마음을 고요히 하여 ‘진여’에 들어가고자 갖는 참선도 그 본래의 취지는 일신의 독선에 있지 않고 구세의 ‘도생’에 있다고 한다. 또 그는 사원의 제사와 관련해서도 불교가 중생제도라는 ‘도타’를 그 주의로 삼은 까닭에 승려의 자비가 사람의 영혼으로 하여금 ‘왕생정토’하게 한다고 믿고 있었다.13)12) “佛敎者는 救世之敎也오 度生之敎也거늘…” (韓龍雲, 〈論參禪〉, 위의 책, p.108)

불교계몽사상이란 불교를 통해 민중의 몽매를 깨치는 것이며, 혹은 불교 안에서 기존의 잘못된 관습과 인식까지도 바로잡음이 된다. 인식이란 사물에 대한 판단을 어떤 기준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만해가 의욕적으로 펼친 1920년대 불교청년운동의 경우, 여기에는 청년 불자를 앞세워 조선의 앞날을 개척해 나가자는 슬로건이 들어 있는가 하면, 또 불교 안에서 올곧은 청년 불자가 서로 힘을 합쳐 불교의 진운을 개척해 나가자는 슬로건도 들어 있었다. 만해는 근대불교의 가장 뛰어난 계몽선사(啓蒙禪師)라 할 것이다.

만해에게 불교와 조선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였다. 그는 분명 불자이나, 그의 삶은 국가를 위해 더 많이 바쳐졌다. 그의 《조선불교유신론》은 불교의 유신론을 편 데 있다기보다는 실은 조선의 유신론을 편 데 있다고 보아야 좋을 것이다. 그는 불교의 쇠잔(衰殘)을 조선의 쇠잔으로 봤으며, 그 교리의 낡고 고루함을 조선의 재래 사상이 그러함에 빗댔으며, 무엇보다 승려의 무사안일과 ‘염불보다는 잿밥에 눈이 어둔’ 어리석음의 극치를 바로 조선 민중의 삶이라 여겼던 것이다.

이와 같음을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 사상’에 견주어 본다면 만해의 ‘불’은 조선의 국(國)이며, 만해의 ‘법’은 조선의 사상이며, 만해의 ‘승’은 조선의 민(民)이라 할 수 있다. 불교의 진운이 ‘삼보’의 진작으로써 구현된다고 할 때 조선 또한 그 세 가지가 고루 진작돼야 함은 물론이다. ‘삼보’ 안의 세 가지가 서로 다른 듯하나 실은 그 안에서 유기적 기능을 하며 또 그래야 하듯, 나라 또한 그런 유기적 기능이 강화돼야 함도 물론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3보 사상’은 전술한 ‘사회유기체설’과 ‘국가유기체설’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보게 된다.

만해에게 불교와 국가는 하나인 점에서 불교의 세(勢)나 국가의 세가 각각 성대하지 못한 현실이야말로 안타까움의 대상이 되었다. 유기체란 원래 생물처럼 물질이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하나의 전체적 기능을 가짐이 된다. 그런 유기체에 정신적인 것도 들어가니, 예컨대 사회유기체 같은 것이고 사회유기체 중에서 가장 크고도 중요한 것이 국가유기체라고 함은 전술한 바다. 애국계몽사상가 박은식은 ‘국혼(國魂)’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국혼’은 바로 국가를 움직이는 힘이다.

만해가 그런 유기체를 직접 언급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양계초가 유기체란 용어를 자주 썼던 점에서 만해가 이를 몰랐을 리는 없다. 아마도 그가 불자인 점에서 그런 용어말고도 더 좋은 뜻이 있음을 그가 고려하지 않았을까 한다. 예컨대 ‘3보 사상’은 얼마든지 국가유기체설과 대체가 되는 것이다.

실제 만해는 국가와 함께 불교까지도 유기체의 하나로 보고 있다. 다음의 글은 만해의 그러한 면모를 읽게 하는 데 중요한 시사성을 준다. 그는 ‘세력’에 대해 ‘자유를 보호하는 신성한 장군(神將)’이라고까지 표현하는 데 이에 따라 국가는 국세(國勢), 불교는 불세(佛勢)가 된다고 함도 밝혀둔다. 그는 곧,

조선불교가 유린됨은 그 원인이 세력부진에 있고, 세력부진은 포교하지 않음에 있다. 세력이란 자유를 보호하는 신성한 장군이니 세력이 한번 기울면 살아도 죽은 것과 같다. 오호라 둥지가 뒤엎어지는데 알이 온전하기 만무하며, 피부가 없는데 털을 장차 어찌 구하리오. 불교가 망하는 데도 승려 홀로 살며, 불교가 쇠하는 데도 승려 홀로 성할까. 불교의 흥망이 실로 승려의 흥망을 앞서 선고함이니 이러한즉 승려가 불교를 일으키는 것 역시 간접적이나마 자기를 이롭게 함이요.14)14) “朝鮮佛敎蹂躪之原因이 在於勢力不振이요 勢力不振이 在於敎之不布니…勢力者는 保護自由之神將이니 勢力이 一蹶하면 生或類死라 嗚呼라 覆巢之下에 完卵이 無期요 皮之不存이면 毛將焉求리요 佛敎亡而僧侶獨存乎아 佛敎衰而僧侶獨盛乎아 佛敎興亡이 實僧侶興亡之先聲宣告니 然則僧侶之欲興佛敎가 亦間接之利我而已요.”(韓龍雲, 〈論布敎〉, 위의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둥지’는 불교·국가이며, ‘알’은 다름 아닌 불자·국민이라 하겠다. 승려가 불교 안에서, 국민이 국가 안에서, 각각 그 정신과 삶의 존귀함을 실천할 수 있는 권한이 ‘자유’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이를 지킬 수 있는 ‘세력’이 있어야 지켜지고 발전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천부적인 인권의 자유도 그 뜻이 제한됨이 불가피해진다.

특히 만해는 한 승려로서는 존재 의의가 없거나 크지 않고, 반드시 전체 승려와 더불어 세력이 왕성한 집단으로 거듭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곧 약육강식의 생존논리가 지배하는 인간사회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력’을 부단히 키워가야 하며 여기에 국가는 물론, 불교도 그 예외일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이 ‘세력’이란 앞의 ‘국혼’처럼 정신적이라고 함도 지적해둔다. 다시 말해 물질을 움직이는 힘은 정신이고 이 정신이 곧 ‘세력’이라 할 수 있다.

개체보다 집단의 중요성들을 내세우는 만해의 불교정신은 한말이라는 시대적 분위기를 볼 때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는 ‘만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나온다는 ‘만법유심조’를 받아들이지만 이렇게 해서 양성된 마음은 개인의 수양을 위한 데 있지를 않았다. 그것은 국가의 위기를 구하는 높은 정신력으로 거듭나야 했으니, 이를 위해 불교는 산간에서 나와 적극 중생구제에 나서야 했다. 이것은 불자 본연의 의무이지만, 실은 종교인이 지녀야 할 자기종교의 영역확대라는 포교의 기본적 사명감이기도 했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후 면면히 이어져온 근본원인은 그 속에 깃든 고매한 정신세계가 있어 이것이 민중의 인격수양과 학자의 학문연구에 많은 가치부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조 성리학의 심성(心性) 논쟁도 불교의 영향이 컸던 것이다. 그러했던 불교이나 지나친 도덕취향은 물질경시로 이어져 국력쇠퇴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만해가 승려더러 시주나 받으러 다닐 게 아니라, 농사를 짓는 등 직접 생산적인 활동에 적극 나서야 함을 주장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만해는 재래의 불교가 기복(祈福) 불교, 미신 불교, 수신(修身) 불교, 산간(山間) 불교였던 점을 반성하고 이를 ‘지신’ 불교, ‘도타’ 불교, 호국 불교, 세간(世間) 불교로 바로잡고자 했다.

주지하듯 호국 불교는 멀리 신라의 화랑도로 이어진다. 이런 점에서 만해의 호국 불교사상에도 화랑도와 같은 고대 불교정신이 적지 않게 용해돼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근대계몽철학 본래가 온통 근대만 숭상한 것은 아니고, 고대에 대한 동경도 없지 않았었다. 실제 서양근대의 여명은 뜻밖에도 고대 문헌의 재해석에서 나왔음을 부인 못한다. 근대는 곧 중세의 지양 내지 극복이며 동시에 고대로의 회복이기도 했다. 이런 연유에서 근대에 때 아닌 복고풍이 인 것도 사실이다. ‘문예부흥’의 부흥은 곧바로 고대 고전의 부흥이니, 르네상스운동이 그 실례이지 않던가.

이런 근대의 정신 때문인지 청말의 양계초나 한말의 박은식·장지연 등은 모두 고대 문헌의 재해석에 충실했고, 거기서 새로운 가치나 지혜를 빌려오고자 했다. 장지연 등은 ‘애국계몽운동’과 함께 국학보급운동도 병행 전개해 갔다. 만해도 《조선불교유신론》을 출간하던 1913년 불교의 대중적 보급을 위해 국·한문 혼용의 《불교대전》을 펴낸 바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근본 불교, 고대 불교의 정의를 새롭게 해야만 했었다. 근대 선각자가 대부분 고전의 지식이 풍부했던 점에서도 고대를 배척하지 못한 이유가 된다고 본다.

물론 만해가 직접 ‘애국계몽운동’을 펼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애국계몽운동의 사상이 되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그가 정식 승려가 된 1905년,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완성된 《조선불교유신론》은 그의 평소 학문소양이 어느 수준에 와 있었는지를 알려주기에 족하다. 그가 승려라는 특수한 신분에 있으면서도 이에 얽매이지 않고 당시의 일류급 지식인과 어울릴 수 있었던 점 또한 주목해야 한다.

그는 곧 ‘지신’ 불교와 ‘이타’ 불교를 두 축으로 하여 진리와 애국계몽이란 당시의 보편적 가치를 창달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한 그가 시대의 전면(前面)에 나섬은 당연한 귀결이기도 했다.

4. 맺음말

만해의 ‘지신’ 불교는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자유·진리·진취·파괴 정신 등을 고취했고, 그 ‘이타’ 불교는 애국계몽론을 바탕으로 국가주의·구세주의·단체주의·평등주의 등을 고취했다.

이러한 것들을 철학의 이른바 체용관으로 보면 사회진화론은 ‘용’이 되고 애국계몽론은 ‘체’가 된다고 하겠는데, 이러면 사회진화론이 애국계몽론을 위해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지행합일관으로 보면 사회진화론은 ‘지’가 되고, 애국계몽론은 ‘행’이 된다고도 하겠는데 애국계몽론은 곧 사회진화론을 먼저 알고 난 연후에 행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둘이 각각 떨어져 있다기보다는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고 하겠다.

가령 동전이 불교라면 그 한 면의 사회진화론에서는 불자로 하여금 부단히 정진하여 실력을 쌓아가야 하며, 다른 한 면의 애국계몽론에서는 그렇게 양성된 자아를 산간에서 홀로 썩힐 게 아니라 적극 중생구제에 나서야 한다. 즉 한쪽이 수양의 정진이라면 다른 한쪽은 포교활동의 강화이다.

또 동전을 국가로 본다면, 그 한 면의 사회진화론에서는 국민으로 하여금 자강불식하여 생존경쟁시대에 뒤떨어지지 말 것을 경고하며, 다른 한 면의 애국계몽론에서는 그렇게 해서 배양된 힘을 국가와 사회를 위해 써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불교와 국가는 만해에 있어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으로 불가분의 관계이다.

만해는 개인의 자유·진리가 아무리 중요해도 그것을 지킬 힘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음도 일깨워줬다. 그 힘을 ‘세력’이라 하는데, 가장 큰 것이 국가와 같은 단체의 힘이었다. 이에 따라 개인의 힘이란 자연히 한계를 갖게 됨을 면할 수 없게 됐다. 그가 남에게 감화와 감동을 줄 수 있는 ‘겸선’이 중요하다며 ‘독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개체보다는 전체, 개인보다는 국가를 더 많이 강조하고 중시한 게 만해불교사상의 골자다. 즉 개인의 자유보다는 사회의 공덕심과 국가의 애국심을 더 많이 강조했던 것이다. 이러니 사회진화론의 중요한 성분인 자유와 경쟁의 의의가 약화됨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제약성은 당시 국권피탈이라는 한말의 특수한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귀결이기도 했다. 사회진화론의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자 제기된 것이 곧 애국계몽론이었다.

만해의 불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하나로 답하라고 하면 그것은 호국 불교라고 할 것이다. 《조선불교유신론》을 비롯하여 1919년 3·1운동 참가와 1920년대의 불교청년운동이 그런 맥락이다.

이 논문은 만해의 일생이 불교민중계몽사상으로 점철되었다고 하는 점에서 그 단초인 《조선불교유신론》이 근대계몽철학의 어떤 요소를 받아 전개되었는지, 그 본의는 무엇인지, 그것이 당시의 한 역사운동인 한말 ‘애국계몽운동’과는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를 알아보고자 시도되었다.

그 결과 만해는 사회진화론을 중심으로 자유·진리·진취·파괴 등의 정신을 갖는 근대계몽철학의 제요소를 받아들여 불교유신론으로 발전시켜 나갔으며 동시에 전통적 호국불교사상도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고찰할 수 있었다. 그의 높은 애국관·시국관·학문관 등은 그로 하여금 당시 정상급 지식인인 장지연·박은식·신채호 등이 펼친 ‘애국계몽사상’과 밀접한 사상적 연대를 갖게 해주었다.

요컨대 승려 출신의 시인이자 소설가, 쟁쟁한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진 만해의 삶에 그가 한말 애국계몽운동가의 일인이라고 함이 새로 추가되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여 그의 1910년대 조선독립운동과 1920년대 불교청년운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해 보였던 1900년대 지적 활동이 애국계몽사상으로 명명되어도 좋을 것이다. ■

허도학
서울대 대학원 석사(역사교육), 성균관대 대학원 박사(동양사), 국립정치대학 교육연구소 연구위원, 국립대만대학 역사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현재 경남신문 논설위원(서울지사). 논저서로 〈양계초사상연구〉 《중국 근대화기수 양계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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