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조선불교유신론의 21세기적 의미

1. 만해의 지적 편력과 《조선불교유신론》

만해는 어릴 적부터 한문 서적들을 통하여 유가와 도가의 경서들을 광범위하게 섭렵한 전통적 선비이다. 여기에 백담사로의 출가 이후에 오세암 장경각의 방대한 불서들을 접함으로써 유·불·선을 통섭하는 동양적 교양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한학의 바탕에다 스승인 김연곡 화상이 건봉사 등지에서 구해다 준 중국의 근대지식인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을 통하여 근대 서구의 사상과 문물을 익혔고, 타고난 진취적 기상에 힘입어 당시 승려로서는 드물게 일본에 순유(巡遊)하여 근대문화를 경험하였으며, 또한 국내 문인들의 해외문학 번역서들을 통하여 구미의 문예를 접하였다.

한학의 교양에 바탕을 둔 전통적 지식인으로서는 드물게 근대적 시, 소설을 써서 작가가 된 그는 〈님의 침묵〉을 비롯한 120여 편의 자유시, 36수의 시조, 164수에 달하는 한시에 이르는 300여 편의 시작품과 《흑풍》을 비롯한 5편의 소설, 20여 편의 수필, 16편의 논문과 11편의 논설, 그 외에도 15편의 잡문들을 남긴 문사이자 외래사상을 적절히 수용하여 전통적 사상과 융합시켜 새로운 논리를 전개했던 혁신적 사상가이기도 했다.

만해 한용운은 어린 나이에 일본에 유학하고 돌아와서 작가가 된 한국 근대문학 초창기의 주요 작가들인 이광수·주요한·김동인·염상섭 등과는 사뭇 대조적인 지적 형성과정을 밟았다. 이런 점에서 만해는 한문의 교양을 바탕으로 근대 문물을 수용하고 자각의 길을 갔던 단재 신채호나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와 비슷하면서도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사상가이자 문인·지사·혁명가였다.

《조선불교유신론》은 1913년 5월 25일 간행된 만해 최초의 저술로서 원문은 순한문에 한글로 토를 달아 읽기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으며 국판 80여 페이지 분량에 이른다. 조선불교의 현실을 타개하려는 열렬한 실천론이라 할 수 있는 이 저서는 불교계의 모순적 현실에 대한 개혁의 당위성을 치밀하면서도 명쾌한 논리로서 개진한 명저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당시의 부패한 조선불교의 현실을 목격할 수 있을 뿐더러 살아 있는 불교의 진리와 그 현대적 의의를 새삼스럽게 확인한다. 당시 한국의 승려들은, 세계적인 여행가 비숍 여사가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 보이듯이, “무척 무식하고 미신적”이었으며 “불교의 역사나 교의에 대해서, 불교의식의 취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채로 대부분의 승려들이 그저 ‘공덕’을 쌓느라고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1) 이러한 당시 조선 승려들의 전반적인 지적 수준에서 보면 만해의 이 논저는 그야말로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 할 만한 탁월한 것이었다. 1) 비숍, 이인화 옮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살림, 1995).

어릴 적부터 읽었던 방대한 한문적 교양과 오세암 장경각의 먼지 쌓인 경서들과 근대 중국의 지식인 양계초의 명저들의 내용이 종횡무진 무르녹아 활달하면서도 명료하게 장강대하처럼 흘러가는 그의 문체는 그의 명철한 이성과 논리적 분석력에 힘입어 빛을 발한다. 《조선불교유신론》의 명쾌한 분석력은 아마도 타고난 만해의 학구적인 성격과 논술의 교본인 《맹자》를 비롯하여 불교의 인명(因明)논리학을 철저히 육화(肉化)시킨 데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염무웅의 지적처럼 이 저서에는 그때까지의 만해의 모든 교육과 사색과 견문이 조선불교의 현상에 대한 비판의 형태로 전면적으로 집약되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 전개될 그의 모든 행동과 사상과 문학의 윤곽이 총체적으로 부각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은 “만해 사상의 집대성적 성격을 지닌다.”2)고 할 수 있다. 2) 염무웅, 〈만해 한용운론〉, 《한용운―한국시문학대계 2》(지식산업사,

전체 1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논저에서 만해는 제1장부터 4장까지에 걸쳐서 자기 주장의 이론적 근거를 해박한 논증을 통하여 제시하고 제5장부터 제16장까지는 당시의 조선불교가 당면하고 있었던 사안들로 대개 시급한 해결을 요하는 구체적 문제들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우리는 이 글의 논거를 제시하고 있는 앞부분에서 만해가 파악하고 있는 불교사상의 성격과 그의 현실인식 및 세계관을 알 수 있다.

만해는 이 책에서 황폐 쇠미해진 우리나라의 불교를 민족·민중불교로 중흥시키면서 유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불교적 리얼리스트이며, 합리주의에 기반을 둔 계몽주의자이며, 진보론과 평등주의, 대승불교의 구세주의에 기반을 둔 민중주의자이다. 이제 만해의 첫 저서인 《조선불교유신론》에 나타난 사상적 기저를 살펴보고 그의 문학관의 특징적 양상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2. 《조선불교유신론》에 나타난 만해의 사상적 기저

제1장 〈서론〉에서 만해는 조선불교 유신의 당위성을 피력하면서 ‘천운’을 믿고 시대에 순응하는 무기력한 보수적·수동적인 자세를 부정하고 능동적으로 현실을 변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의 각 분야에서 유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데도 불구하고 낙후한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조선불교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시급한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급진적 진보주의자이다. 아울러 그는 옛사람이 말해 온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에 있고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있다.”라는 말을 비판하면서 “성공할 수 있는 이치가 있기 때문에 성공하는 것이고 실패할 만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실패한다.”는 논지 전개를 통해 철저한 합리주의자의 인식을 보여준다.

성공할 수 있는 이치가 있기 때문에 성공하는 것이고 실패할 만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 이것이 곧 진리인 것이다. …… 일을 꾀하는 것도 나에게 있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을 이루는 것도 또한 나에게 있다고 해야 하리니, 이와 같은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자기를 책망하되 남을 책망하지 않고, 자기를 믿되 다른 사물 즉 하늘 따위를 믿지 않는다.3)3)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정해렴 편역, 《한용운 산문선집》(현대실학사,

제2장 〈불교의 성질〉에서는 생존과 진화의 자본인 희망을 주는 것이 종교의 본령이라고 전제하고, 장래의 문명에 적합하지 않을 때는 종교는 존재의의가 없다고 하여 종교의 현실 정합성을 중시하는 철저한 현실주의적 종교관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만해는 ‘금후의 세계는 진보를 그치지 않아서 진정한 문명의 이상에 도달하지 않고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므로 이 불교라고 하는 종교가 부단히 진보해 나갈 인류문명의 미래에 적합할 것인가 그렇지 못할 것인가 하는 문제제기로써 출발점을 삼는다.

만해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하나의 종교로서 불교가 본질적으로 중요하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과연 인류를 행복과 문명으로 이끄는 데 현실적으로 기여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하나의 고정불변의 절대적 가치나 관념으로서의 종교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불교야말로 만해가 보기에는 문명의 이상과 상충되지 않는 합리적 종교였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종교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왜 종교를 믿는가? 그것은 인간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종교가 그에 대한 일정한 해답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희망은 생존과 진화의 자본이므로 희망이 없다면 사람은 도덕적 행위의 지표를 상실할 것이고, 삶의 의의 자체를 상실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상승적 발전의 욕구를 포기하고 찰나적 쾌락주의에 안주하고 말 것이다. 결국 세상은 아귀다툼과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필연적으로 내세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고, ‘예수교의 천당, 유대교가 받드는 신, 마호메트교의 영생(永生) 따위’는 그 구체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해가 보기에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일종의 속임수요 미신이라 볼 수밖에 없었다. ‘미신으로써 어찌 사람을 깨달음의 경지로 이끌 수 있겠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당면하여 만해는 비로소 불교의 진면목을 발견한다.

불교는 ‘민중의 지혜에 부당한 제약을 주는’ 미신과 미혹에서 떠나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천당이니 영생이니 하는 초월적인 환상에 의하지 않고 불교는 어디까지나 각 개인의 마음속에 진리에 이르는 최종적 근거(진여, 불성)가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불교는 중생에게 희망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중생이 이런 더 없는 보배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미혹하여 알지 못하는 까닭에, 우리 부처님께서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이들을 위하여 설법하시었다.4)4) 한용운, 앞의 책, p.18.

이와 같이 불교의 요체를 정확히 터득한 만해는 불교가 미신을 타파함으로써 참된 자아 안에서 불생불멸의 삶을 얻도록 가르치는 희망의 종교라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는 여기서 많은 종교가 지니고 있는 신비주의의 허상을 깨뜨리고자 하는 합리주의자·계몽주의자 만해의 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미신의 종교들이 민중의 지혜를 속박하고 미신으로써 사람의 생명을 낚는 미끼로 삼아 소중한 목숨까지 잃게 하는 폐단이 많다. 그러나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로서 마음 안에 천당도 있고 지옥도 있다고 보는 유심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가 지닌 진여(眞如)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지혜의 종교라고 만해는 불교의 종교적 성질을 규정한다.

다음 불교의 철학적 성질에 관해서는 여타 종교들이 철학적 진리와 자신들의 종교적 진리가 부합하지 않아 마찰을 빚어온 데 비해 불교는 거의 모든 철학적 진리를 포용할 수 있는 포괄적인 진리임을 구체적으로 논증해나간다. 비록 양계초 등의 견해를 인용한 단편적 견해이긴 하나 동서철학의 주요사항들을 불교의 내용과 비교하여 명쾌하게 그 요체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이를테면 중국의 경우 외국에서 발생한 불교와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와 불교는 크게 번성하고 기독교는 크게 번질 수 없었던 것은 기독교의 교리가 협애하고 단순하여 종교성만 내세우므로 철학성이 결핍되어 중국의 지식층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한 데 비해 불교는 종교성과 철학성의 양면을 고루 갖추어 그들을 만족시켰던 데에 원인이 있다고 보고, 결과적으로 불교가 중국철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양계초의 견해를 소개하고 우리나라의 경우 불교가 들어온 지 1천 5백 년이나 되었으나 이렇다 할 조선철학의 이채를 보이지 못했음을 만해는 지적한다.

이어서 역시 양계초의 견해를 인용하여 칸트의 ‘도덕적 성질’ 자유성과 부자유성의 기준으로 한 ‘참된 자아’와 ‘현상적 자아’의 개념을 설명한 뒤, 이를 불교의 진여(眞如)와 무명(無明)의 논리와 연관짓고, 칸트와 부처의 다른 점을 지적한다. 또 진여·무명의 논리와 같은 불교사상의 도움을 받아 중국유학을 혁신시킨 성리학의 비조(鼻祖) 주자의 의리지성(義理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 명덕(明德)과 기품(氣稟) 혹은 인욕(人欲)의 개념을 설명하기도 한다.

이어서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의 주장과 《능엄경》의 내용이,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주장과 《원각경》의 내용을 대비하여 같고 다른 점을 지적하고 이 외에도 플라톤의 대동설, 루소의 평등론, 육상산(陸象山)과 왕양명(王陽明)의 선학(禪學)이 불교의 내용과 부합됨을 지적한다. 결론은 동서고금의 철학이 금과옥조로 삼아온 내용이 결국은 불경의 주석 구실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종교이면서 철학인 불교는 미래의 도덕과 문명의 중요한 원천의 구실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미래의 역사전개에 대한 비전의 제시와 동서양철학사상과 불교의 비판적 대비가 가능했던 것은 난삽한 철학이론들을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만해의 명석함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그보다는 불철주야의 오랜 정진에서 오는 불경 전반에 관한 도저한 섭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제3장 〈불교의 주의〉에서는 불교의 이념을 평등주의(平等主義)와 구세주의(救世主義)에서 찾는다. 사물의 현상이 어쩔 수 없는 법칙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 것이 불평등이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얽매인 바가 없는 자유로운 진리가 평등이라고 정의하고, 불평등한 거짓 현상의 미혹을 벗어나 평등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불교라고 규정한다.

나아가 근세의 자유주의와 세계주의는 평등의 자손이라고 해명하고 진정한 자유는 남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것으로써 그 한계를 삼는 것이며 서로 침탈함이 없이 세계 다스리기를 한 집안 다스리는 것같이 하는 것이 참된 세계주의라고 명명한다. 만해의 이러한 평등 개념은 불교를 형이상학적인 관념으로만 보지 않고 역사적 사회적 현실의 차원에서 해석함으로써 그 독창성을 갖는다.

뒷날 그는 이러한 생각을 ‘불교사회주의’5)라는 말로 개념화한 적도 있지만, 개개인의 자유가 모두 수평선처럼 가지런하게 되어 조금의 차이도 없게 되는 것이 평등의 이상이 실현된 상태라고 보는 것이다. 만해는 나아가 불교의 평등정신이 다만 개인과 개인, 인종과 인종,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동식물과 모든 사물에까지 미치는 철저한 성격이라고까지 말한다.5) 석가의 경제사상을 현대어로 표현한다면 뭐라 하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만해는 ‘불교사회주의’라는 말로 답하고 있다. 재산의 축적을 부인하고 경제상의 불평등을 배척하며 무소유의 이상을 지향하는 불교사회주의에 관해 만해는 한 권의 책으로 저술하려고 했으나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석가의 정신〉, 기자와의 문답, 《삼천리》 제4권, 11월호, 1931.

구세주의는 이타주의(利他主義)의 다른 이름이다. 잘못된 이기주의적 기복 신앙은 불교의 본령과는 배치되는 것이므로 비판하고 《화엄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지극한 중생구제의 이념을 지향하는 불교의 본의를 논증한다. 아울러 현실 도피적 은둔주의를 퍼뜨린 소부·허유·양주 등 신선도의 무리를 질타한다. 이 또한 만해의 철저한 현실주의 사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만해는 불교를 현실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해석하였다. 흔히 불교가 참선과 고행에 의해 자기 한 몸만의 구원을 성취하려는 이기주의적 종교로 오해된 적도 있으나, 부처의 모든 설법은 중생제도의 자비심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만해는 역설한다. 유마 거사처럼 한 사람이라도 해탈에 이르지 못한 병든 중생이 남아 있을 때, 그것을 곧 자기의 병으로 여기고 소승적 해탈을 거부하는 정신, 이러한 대승적 보살정신이 바로 불교정신의 핵심이라고 파악하고, 만해는 이런 불교의 근본정신을 구세주의(救世主義)라고 불렀다.

만해는 이미 《유마경》이나 《반야경》, 《화엄경》 같은 대승경전에 심취한 바 있으므로 이러한 사상 형성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이러한 근본교리에 입각하여 만해는 절을 산 속에서 세간으로 옮길 것과 현실개혁 및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종교로서의 불교를 지향해 갔던 것이다. 염무웅의 다음의 지적은 지금도 유효하다 하겠다.

만해는 새로운 불교해석을 통해서 진보적인 계몽주의자가 되었고, 근대적인 자유주의를 불교적 평등의 개념 속에 흡수하였으며, 그러면서도 자유주의에 결부되기 쉬운 이기적 개인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불교의 보살정신을 사회개혁의 사상적 거점으로 확인하였다. 전통사상의 낡은 형태를 끝내 고집함으로써 시대의 발전에 역행하기도 하고 외래사조에 무비판적으로 휩쓸려 버림으로써 자기상실의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했던 혼돈의 시대에 있어서, 근대사상의 진보적 측면을 불교 속에 철저히 여과시키고자 했던 만해의 경우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매우 값있는 교훈으로 제시된다고 하겠다.6)6) 염무웅, 앞의 글, p.206.

제4장에서 만해의 급진적 개혁주의는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자주 인용되는 그 전반부는 다음과 같다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자손이다.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다. 세상에서 어머니 없는 자식이 없다는 것은 대개 말할 줄 알지만 파괴가 없는 유신이 없다는 것은 아는 사람이 전혀 없다. 비례(比例)의 학문을 가지고 추리(推理)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파괴라고 해서 헐어버리고 없애버리는 것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단지 구습(舊習) 중에서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을 고쳐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름은 파괴지만 사실은 파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신을 좀더 잘하는 사람은 파괴도 더욱 잘하게 된다. 파괴가 더딘 사람은 유신도 더디 이루고, 파괴가 빠른 사람은 유신도 빨리 이루고, 파괴가 작은 사람은 유신도 작게 이루고, 파괴가 큰 사람은 유신도 크게 이룬다. 이와 같이 유신의 정도는 마땅히 그 파괴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난다. 유신을 함에 있어 가장 먼저 시작해야 할 일은 파괴임이 틀림없다.

위의 글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불교의 본의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는 한국불교의 오랜 폐단이 종기와도 같이 곪아 있으며, 대대적인 외과 수술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는 만해의 급진적인 개혁주의 노선이 노회한 수구파적 승려들에 대한 질타과 아울러 자신을 소외시킨 현실불교 중심세력들의 부패와 무사안일과 무기력에 대한 분노와 그들에 대한 만해 자신의 전투적 의중을 읽게 된다.

군살을 도려내고 피를 짜내서 그 독을 제거하고 병의 뿌리를 뽑아내는 과감한 개혁이 없이는 근대사회에 부합하는 참된 종교가 될 수 없다는 만해의 전언은 오늘에도 부합되는 초시대적인 안목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에 기반하고 있는 만해의 이러한 평등주의와 구세주의는 급진적 개혁주의 노선이자 진보주의 노선임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그대로 프롤레타리아 계급혁명을 부르짖는 사회주의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이 오늘날 일부의 문학자들이 말하는 거와 같이 반드시 어느 한 계급이나 몇몇 개인을 위하는 것이 아니”7)라는 만해의 언급으로 보아 그는 이미 유물론적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는 계급주의 사상의 허구성을 어느 정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7) 〈장편작가회의〉, 《삼천리》 제8권, 11월호, 1936. 11, 전보삼 편 《한용운

만해는 근본적으로 중도와 중용에 기반하는 동양적 수양주의와 유심론적 세계관에 깊이 훈습된 전통적 지식인이므로 만해와 같은 주체적인 사상가가 그러한 급진주의 노선에 쉽사리 매몰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만해가 잠시 언급했던 ‘불교사회주의’의 이념도 계급투쟁론적인 전투적 개념이라기보다는 동양적 인본주의에 바탕한 하나의 이상주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만해 사상의 이러한 성격은 만해가 보살사상과 동궤라 할 구세주의를 주창하고 있으면서도 춘원류의 민족개조론에 기반한 전통단절론적 계몽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민족자존론에 거점을 둔 전통계승론적 계몽주의로 나아간 점과도 동궤에 놓인다 할 수 있다. 이는 만해의 확고한 역사인식과 세계의 본질을 꿰뚫는 불교사상을 비롯한 동양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이를 서양의 근대 자유주의 사상과 융합하여 창조적으로 해석해 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일제시대의 항일 저항논리에 도산 안창호의 준비론(혹은 실력양성론)과 단재 신채호의 무장투쟁론의 두 갈래 큰 흐름이 있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준비론의 후예라면 만해의 민족자존론은 단재의 노선과 더 근접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주장은 사상의 근본원리에서도 상이하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남의 종이 되어도 좋으니 잘 살고 보자’는 개화론에 그 거점을 둔다.

일본 대정(大正) 데모크라시의 분위기에 힘입은 이러한 외세의존적 개화론은 전통단절론에 바탕을 둔 민족개량주의로 윤치호,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이광수, 최남선 등의 노선이기도 하다. 이러한 민족개량주의는 결국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약화시키기 위한 일제당국의 고등술책에 이용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준비론을 추종했던 자들이 대부분 친일로 기울어 민족사에 지울 수 없는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던 것은 이들이 그 근본사상에서 이미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역사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안목이 결핍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은 “국가란 물질문명이 구비된 후에라야 꼭 독립되는 것은 아니다. 독립할 만한 자존의 기운과 정신적 준비만 있으면 충분하다.” 또한 “조선민족은 당당한 독립국민의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민족의 자존성과 함께 전통계승론을 바탕으로 한 비타협주의로 일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광수는 우리 민족이 ‘문명한 생활을 경영할 만한 실력을’ 갖추는 ‘개조(改造)’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스스로의 진로를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한용운은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므로 인류는 누구나 누려 마땅한 ‘자존(自存)’을 실현하기 위해서 즉시 독립을 해야 한다고 했다. 조동일 교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改造’론은 文明을, ‘自存’론은 自由를 특히 소중하게 여기는 데 근거를 둔다. 문명은 노력해서 이룩해야 할 목표이고, 자유는 타고난 조건이다. 사람은 마땅히 노력해서 이룩해야 할 가치를 목표로 설정하고 힘써 실현해야 한다는 데 맞서서,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조건을 왜곡시키지 않고 온전하게 실현하는 것이 더욱 긴요하다고 해서 견해 대립이 심각해진다.

개조론은 차등의 세계관이어서 훌륭한 나라, 잘난 사람만이 정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경쟁을 부추기고, 투쟁을 미화한다. 그러나 자존론은 대등의 세계관이고 평화의 논리이다. 삶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은 사람만 갖추지 않고 모든 생물에게도 다 함께 인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유는 萬有의 생명”이라고 했다. 천지만물이 함께 화합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다. (중략) 오늘날 민족 ‘自存’론은 잊혀지고 민족 ‘改造’론이 극성이다. 선진국을 따르고 배워 세계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입학’을 학문의 기본방법으로 삼아야 한다고 한다. 경제성장, 국민소득 등의 지표에 의해 서열화된 단일한 세계질서 속에서 좀더 윗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한다.

그것은 명백한 진리이므로 다른 말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렇게 나타나는 민족‘改造’론을 바로잡으려면 민족 ‘自存’론을 되살려야 한다. 어떤 후진국이나 낙후한 민족이라도 누구나 자기 삶을 자기 방식대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지구 전체의 범위 안에서 실현하는 것이 세계인의 과제임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학문은 자기능력을 스스로 발현해 인류 공유의 자산으로 제공하는 ‘창조학’이어야 한다. 인류의 문화유산이 근대인이 잘못 알고 있는 것보다 다양하고 풍부하며, 지금의 단일한 세계질서와는 다른 길이 있어 근대를 극복하고 다음 시대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창조학’의 과제이다.8)8) 조동일, 〈만해문학의 사상사적 의미〉, 《현대시의 반성과 만해 문학의 국제적 인식》, 1999, pp.160∼161.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우리는 지금 학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실로 유신이 필요한 시점에 있다. 무분별한 사대주의적 외세 추종을 벗어나서 그야말로 ‘창조학’이 필요한 시점이다. 조동일 교수의 지적처럼 이제 만해 연구는 ‘창조학’의 필수적인 과제다. 《조선불교유신론》을 비롯하여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등 만해 문건에 대한 새로운 검토의 당위성도 여기에 있다.

전통사상이 근대사회와 어떤 관계를 가졌던가 살피는 일을 광범위하게 수행하면서 철학과 문학, 인문학문과 사회학문, 국학과 세계학문이 하나가 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데 만해의 전례는 소중한 지침이 되고, 벅찬 연구과제를 제공한다. 만해의 어느 면을 따로 분리시켜 살핀다든가, 연구는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만해를 숭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든가 하는 잘못을 시정하고,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시야를 확대해서 논의를 새롭게 전개해야 한다. 만해를 기점으로 세계사의 위기 극복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9)9) 조동일, 앞의 글, p.161.

3. 만해의 문학관과 예술관

만해는 스스로 많은 글들을 발표했지만 만해 자신이 의도적으로 문학에 뜻을 두어 전문적인 작가가 되기를 기도하지는 않았으며 묵묵히 문단권 밖에서 문필활동을 해오면서도 막상 스스로 시인·작가로 대접받기를 원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일찍이 총체적인 시도로써 만해 한용운을 연구한 바 있는 박노준·인권환 교수의 주장처럼 “무엇보다도 그는 문학이라는 것을 어떤 자기대로의 필요불가결의 생명적 요소로는 보았으되 본업적인 대상으로는 다루지 않았”10)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시집 《님의 침묵》의 말미에서 밝힌 글(〈독자에게〉)을 보거나 연재장편 《흑풍》에서의 발언을 참고하더라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독자에게〉를 보자.10) 박노준·인권환, 《한용운연구》(통문관, 1960), p.137.

  •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 여러분의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를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을 압니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이는 것과 같을는지 모르겠습니다.

    ― 〈독자에게〉 부분11)11) 한용운, 한계전 편, 《님의 침묵》(서울대 출판부, 1996), p.114.

민족의 어두운 시대를 밝히기 위한 등불로서, 당대적 목적성에서 시를 썼을 따름이지, 어떤 문사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쓴 것은 아니므로 그는 자신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힐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한 어두운 시대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면서 하나의 지향점을 가지고 시를 썼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만해에게 문학이란 민족독립운동의 실천의 일환이거나, 나아가서 중생제도의 보살행의 한 과정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가 《님의 침묵》을 쓴 것은 수많은 논설을 쓴 것과 동일한 선상에서 논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글을 통한 민족 계몽 내지는 민중 계도의 수단이라는 공리주의적·효용론적 문학관의 바탕 위에서 그의 문학행위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다 분명하게 밝혀 주는 것이 다음의 말이다.

나는 소설을 쓸 소질이 있는 사람도 아니요, 또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 애쓰는 사람도 아니올시다. 왜 그러면 소설을 쓰느냐 반박하실지도 모르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동기까지를 설명하려고는 않습니다. 하여튼 나의 이 소설에는 문장이 유창한 것도 아니오, 묘사가 훌륭한 것도 아니오, 또는 그 이외라도 다른 무슨 특장이 있을 것도 아닙니다. 오직 나로서 평소부터 여러분께 대하여 한번 알리었으면 하던 그것을 알리게 된 데 지나지 않습니다. (中略) 많은 결점과 단처를 모두 다 눌러 보시고 글 속에 숨은 나의 마음까지를 읽어 주신다면 그 이상의 다행이 없겠습니다.12)12) 《조선일보》, 1935. 4. 8.

적어도 소설가라면 문장이 유창하거나 묘사가 훌륭하거나 이야기 솜씨가 뛰어나거나 하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장기가 있어야 할 텐데 자기에게는 그러한 특장은 따로 없으므로 다만 평소에 만해가 한국 민중들에게 한번 알리고 싶었던 것들을 알리고자 하는 목적의식에서 소설을 손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해에게 있어 문학이란 결국 육당·춘원 등의 경우와 유사한 계몽주의적 의도를 상당 부분 지니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이 시대의 문인 거의가 전통단절론적 입장에서 외래의 문예사조를 답습·추종하는 데에 급급했던 몰주체적인 행태를 기억한다면 만해의 입장은 이들과 사뭇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만해는 전통의 기반 위에서 일시적인 시류(時流)라든가 박래품(舶來品)에 흔들림 없이 그것들을 받아들이되, 주체적인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하였으며 건전하고 독자적인 문학사상을 견지하여 시종일관했다. 이러한 그의 문학적 태도는

당대에 일제식민지 치하에서의 신채호·박은식·주시경·정인보처럼 전통적인 국학 내지 동양학의 바탕에서 살아오며 끝내 그 거센 친일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절조를 지킨 민족적 지사들과 氣脈을 같이 한다.13)13) 이명재, 〈한용운 문학연구〉, 《중대논문집》, 1975∼1976, 《국문학자료논문집》(대제각, 1983), p.378.

사실 궁핍과 험난만을 거듭하게 마련이던 당시를 살펴보면 “일제말기에 변절한 무수한 지식인들이 대부분 전통적인 유학자 출신이 아니라, 해외유학자 출신이라거나 신교육 출신의 지식인이었다는 사실” 등을 감안하여 볼 때, 만해가 그 파란 많은 생애를 통하여 부단히 계속된 친일에의 현실적 회유책에 굽히지 않고 민족정신에의 의지로 문학의 기틀을 이루어 왔다는 점은 이와 같은 전통적 문예의 바탕이 크게 뒷받침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만해는 예술행위 혹은 예술의 존재의의를 어떻게 보았을까?

예술이란 인생의 한 사치품이지요. 오락물이라고 밖에는 안 보지요. 요사이에 와서는 예술을 이지(理智) 방면으로 끌어가며 그렇게 해석하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감정을 토대로 한 예술이 이지에 사로잡히는 날이면 그것은 벌써 예술성을 잊었다고 하겠지요. 그리고 또 근자에 이르러 너무나 감정이 극단으로 흐르는 예술은 오히려 우리 인간 전체에 비겁과 유약을 가져오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우려까지 하지요. 예를 들면,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기름이나 고추나 깨는 없어도 생활할 수 있어도 쌀과 불과 나무가 없으면 도저히 생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이 없어도 최저한의 인간생활은 이룰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좀더 맛있게 먹자면 고추와 깨와 기름이 필요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어떤 사람은 항의하리다마는 나는 이렇게 예술을 보니까요.14)14) 《삼천리》 제8권, 11월호, 1936. 11, 통권 79호.

그에게 있어 예술이란 곧 ‘고추와 기름과 깨’처럼 인생을 보다 윤택하게 하는 양념과 같은 존재의 위상에 놓인다. 만해는 인간이 생존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으로서 ‘쌀과 불과 나무’를 든다. 생존의 문제만을 생각한다면 이것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살아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보다 높은 삶의 존재의의를 추구한다. 단순히 생존의 차원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인간다운 존재로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만해에게는 전문적이고 자각적인 문학의식은 미미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예술의 필요성만은 강력히 주장하고 있음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지나치게 이지 쪽으로 치우치는 모더니즘 문학은 물론 너무나 감정이 극단으로 흐르는 낭만주의 예술을 모두 경계하는 발언으로 보아 당시에 풍미했던 서구 문예사조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동양적 중용주의 문학관과 전통적인 문사의 통념 위에 만해의 문학이 존재하는 것임을 위의 언급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습작기에 있는 어느 문학청년으로부터 문학과 문예의 관계, 문예에 대한 주의 등에 관한 질문을 받고, 만해가 ‘나의 사견(私見)’이라는 전제를 달고 밝힌 〈문예소언(文藝小言)〉이란 글에 의하면 광범한 문자적 표현을 총괄하는 ‘문학’과 시·희곡·소설 등의 예술적 문예작품을 지칭하는 ‘문예’라는 개념을 전제해 놓고, 동·서양의 문학에 대한 개념을 살피고 있다.

먼저 한문학을 중심으로 한 동양학설에서는 ‘문학이라는 것은 학문이라는 뜻도 되고 경학(經學)이라는 뜻도 된다’라고 파악하고 《논어(論語)》 〈선진편(先進篇)〉과 《사기(史記)》의 예를 들어 “동양의 문학이라는 것은 문자로 된 것은 다 가리킨 중에 경학·윤리학 및 성리학·역사·제자백가어(諸子百家語)의 순서로 된 것이어서 문예만을 지칭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유교로서 천시하던 소설·희곡 따위는 변변히 문학 축에 들지도 못하였을 것”이라고 함으로써 동양에서는 재도주의적(載道主義的) 문학관으로 인하여 전통적으로 시를 제외한 허구적인 창작문학을 홀대해 왔음을 밝히고 있다.

서양학설의 경우는 “문학은 일종의 위대한 언어이다. 그것은 문자로 쓰고 또 서적으로 인쇄한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매슈 아놀드(Matthew Arnold)의 광의의 문학 개념으로부터 “문학은 사람이 그 자신을 종합적으로 타인에게 표현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비네(Vinet)의 정의, 그리고 “문학이라는 것은 총명한 남녀의 사상·감정의 기록으로, 독자에게 쾌감을 주도록 안배된 것”을 이른다는 브루크(S. A. Brooke)의 협의의 정의 등을 살핀 다음, 《대일본국어사전(大日本國語辭典)》이나 《신식사전(新式辭典)》 따위의 일본 사전류의 정의까지 참조하여 비교적 다양하게 문학의 개념을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문학의 정의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저술된 서적이 별로 없는 듯하고’ 신문·잡지 등에 단편적으로 나타나는 문예평론 혹은 문예강좌 같은 데에 실리는 것을 보면, 협의의 문학 개념인 ‘문예로 보는 관념이 심화 또는 보편화되고 있는 듯하다’고 함으로써 전통적인 문학관으로부터 근대적인 문학관으로 이행되고 있음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만해 자신의 경우는 문학을 광의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다음의 인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로 기록된 모든 것을 이름이다. (중략) 모든 사물을 언어로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서 문자로 표현되는 것 곧 자기의 무엇이든지를 문자로 나타내어서 독자가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다 문학이다. 다시 말하면 文理가 있는 문자로의 구성은 다 문학이다.

그러므로 종교·철학·과학·經史·子傳·시·소설·百家語 등 내지 尋常覺暄의 書翰文까지라도 장단·우열은 물론하고 모두가 다 문학에 속하는 것이다. (중략) 만일 일반문학을 통괄할 만한 관사가 따로 있다면, 시·소설·희곡·평론 등 문예만을 문학이라고 한다 해도 불가할 것이 없지마는, 그렇지 아니하고 ‘문학’이라는 술어가 문자의 기록의 전반을 대표한 이상, 문학 즉 문예라고 볼 수가 없는 일이요, 또 시·소설·극본 등에 대해서는 문예라는 대표명사가 붙어있지 않는가? 그러면 시·소설·극본 등 예술적 작품은 문학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문예는 문학이지마는 문학은 문예만이 아니다.15)15) 한용운, 전보삼 편, 〈문예소언〉, 《한용운 시론》, pp.17∼18.

이러한 만해의 문학관은 물론 전통적인 동양의 문학관에 다름 아니다. 모든 문자행위는 기본적으로 문학으로 보는 만해의 광의적 문학관은 전통적인 문사의 문장에 대한 인식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만해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나름의 독자적이고도 다양한 문필활동을 지속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만해는 본래부터 좁은 의미의 문학개념인 ‘문예’에 집착하지 않았다. 또한 그 자신 기량(技倆) 면에 있어서 그다지 자신감을 갖고 있지는 않았으면서도 일제하의 역사적 현실을 좌시하지 않고 어떻게 하든 기울어만 가는 민족적 현실을 직시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자주 독립 정신을 고취하게 하고자 했던 그의 문학적 입장은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계몽주의적 자세를 견지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비록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긴 해도 만해의 문학에 대한 자세와 문예인식의 태도가 비교적 건실하고 다양하면서도 매우 구체적이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육당이나 춘원 등 어린 나이에 일본 유학을 거쳤던 유학파 지식인들에 비해 현대적인 문예에 대한 습득이 늦었다 하더라도 그의 문학관은 결코 낙후되지도 않았으며 편협하지 않고 매우 건전했다. 그리고 그가 소설에 임하는 자세에 있어서는 시류의 흐름에 영합하지 않고 대단히 유연한 ‘픽션 의식(意識)’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중반에 만해가 조선중앙일보에 《후회》를 연재할 즈음 삼천리사(三千里社)에서 주최한 장편작가회의에서 밝힌 다음의 말을 보자.

예술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어떤 시대와 세상만을 그려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세상을 떠나서 天上을 그릴 수도 있는 것이요, 地下를 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러면 그것이 과연 훌륭한 예술이냐 아니냐에 있을 것이다. 예술이 오늘날 일부의 문학자들이 말하는 거와 같이 반드시 어느 한 계급이나 몇몇 개인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예를 꽃에 비해서, 누구나 감상할 수 있는 것, 즐길 수 있는 것이라면 예술성 그것은 어느 한 사회나 계급은 물론이요, 어느 한 시대나 현실을 그려야 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16)16) 〈장편작가회의〉, 《삼천리》 제8권, 11월호, 1936. 11. 전보삼 편, 《한용운 시론》, pp.47∼48.

위에서 보듯이 만해는 문학이 어느 특정한 계급이나 소수의 개인을 위하거나 한정된 시대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자세를 보여 준다. 그러한 점에서 만해가 의식적으로 민족주의 진영에 가담하여 활동한 것이지만 당시에 10년 가까이 유행하던 신경향파적인 문학에 대해서 반대하는 친민족주의적 입장에 섰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신경향파 문학이 본격화되던 무렵인 1926년에 간행한 《님의 침묵》을 비롯한 여러 글들이 지니고 있는 문학적 경향을 보아도 분명하다.

그렇다고 만해가 1930년대 문단에 성행하던 순수문학의 태도를 그렇게 바람직하게 보지는 않은 것 같다. 카프(K.A.P.F.)가 해체된 후, 내면탐구로 칩거해 들어간 문학풍토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다. 물론 이것은 만해의 기질이나 작품경향, 그리고 그의 불교개혁운동이나 민족독립운동에서와 같은 대사회적인 태도에서도 드러나지만 다음과 같은 시를 보아도 그의 문학적 입장을 알 수 있다.

  • 나는 서투른 화가여요.
    ― 中略 ―
    나는 파겁 못한 성악가여요.
    ― 中略 ―
    나는 서정시인이 되기에는 너무도 소질이 없나봐요.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그런 것은 쓰기 싫어요.
    당신의 얼굴과 소리와 걸음걸이와를 그대로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집과 침대와 꽃밭에 있는 적은 돌도 쓰겠습니다.

    ― 〈예술가(藝術家)〉 부분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그런 유약한 감정의 표현으로 자기만족에 그치는 그런 소승적인 문학은 하지 않겠다. 부재하는 ‘당신의 얼굴과 소리와 걸음걸이’를 쓰겠다. 이 점에서도 만해의 문학은 민족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만해의 문학적 입장은 1930년대 중반부터 시작했던 신문연재소설의 집필의도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과 국가의식을 일깨우고 독립의지를 고취시키며 어두운 세계에서 고통 받는 한국 민중을 위해 붓을 든다는 대승적 자세에서 발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문학은 소수의 독자들만을 위한 귀족주의적 순수문학보다 오히려 다수의 민중을 위한 어느 정도 통속취향을 마지않는 대중문학을 지향한다.

풍자문학이나 史話·史談의 형식은 훌륭한 예술적 표현으로는 생각지 않는다. 그런데, 신문소설(다른 소설보다도)에 있어서는 합리적으로는 예술성과 통속성, 순수성과 대중성을 겸해야 하겠지마는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예술성보다는 통속성에, 순수적인 것보다는 대중적인 편이 도리어 좋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본래 예술이란 대중적이어야 하는 것은 근본원리인데, 아무리 예술성을 지키고 순수문학적이라 하더라도 독자대중이 없다면 전연 없지는 않겠지만 극소인 경우 좀더 통속성과 대중적인 편이 낫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17)17) 〈장편작가회의〉, 앞의 책, p.48.

이러한 만해의 문학관은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켜 즐거운 마음으로 인(仁)을 행하게 하려 했던 공자의 공리적 효용론적 문학관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러므로 만해는 문학이나 예술이 밀실에서 소수의 독자들만의 전유물이 되는 소승적 문학관을 거부한다. 여기서 우리는 동양의 전통적인 미학과 문예관의 한 축을 이루는 공자와 만해의 문예관을 대비해 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4. 공자의 문예관과 만해의 문예관

공자의 미학은 그의 사상의 핵심인 인학(仁學)으로부터 심미와 문예의 문제를 관찰, 해결해 나간다. 공자는 그가 그토록 신봉해 마지 않았던 주례(周禮)와 예악(禮樂)이 붕괴되어 가던 상황 속에서 독창적으로 인학을 창안하였다. 그는 예가 인간의 본성과 직결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당위로서의 예를 다시 세우려 했다.

따라서 공자의 인학은 잔혹한 투쟁이 난무하던 춘추전국 시대에는 보수적이며 비현실적인 것으로 당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인도주의와 박애정신의 숭고한 아름다움은 빛을 더해갔다. 공자는 심미와 예술이라는 사회현상에 대해 처음으로 깊이 있고도 보편적인 의의와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는 견해를 피력했으며 충분한 자각을 가지고 명확하게 인간의 내재적인 요구로부터 출발하여 심미와 예술을 고찰하고 있다.

공자의 미학은 그의 인학의 자연스러운 연장으로 하나의 윤리학적 미학 혹은 심미적 심리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개인의 심리 욕구와 사회의 윤리 규범, 이 두 가지의 융합 일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18) 공자에게 있어 인심을 감화시키는 예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이 인을 행하게 하는 수단이었다. 이는 ‘성어락 유어례(成於樂 游於禮)’라는 말에 집약되어 나타난다. 18) 〈공자의 미학사상〉, 이택후·유강기 편, 《중국미학사》(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3), p.129.

공자미학의 특성은 대개 다음 몇 가지로 요약이 된다. 흥·관·군·원의 공리적 효용설과 중용의 미학, 그리고 회사후소(繪事後素)의 미학과 자연심미의 비덕(比德)설이 그것이다. 공자는 시의 효능을 일러 ‘일으킬 수 있고(興) 살필 수 있으며(觀) 무리를 지을 수 있고(群) 원망할 수 있으며(怨),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길 수 있고 멀리는 임금을 섬길 수 있으며, 새와 짐승·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흥’은 뜻을 감발(感發)하는 시가의 계발(啓發) 효능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고, ‘관’은 풍속의 성쇠를 살피는 시가의 인식작용을, ‘군’은 ‘무리지어 학문과 덕행에 힘쓰게 하는 시가의 교육적 역할을, ‘원’은 윗사람의 정치를 원망하고 풍자하는 시가의 비판적 역할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19) 19) 유위림, 심규호 역, 《중국문예심리학사》(동문선, 1999), pp. 60∼61.

만해가 시집 《님의 침묵》의 서문격인 〈군말〉에서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고 한 데서 보듯 만해의 시작 행위 역시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비롯된 계몽주의적 교화의 의도에서 출발하고 있다.

《논어》에 군자는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거하고 인에 의지하고 예에 노닌다.”라는 말이 나온다. 참된 선비는 결코 예술을 멀리 해서는 안 되고 그것을 향유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앞에서 인용된 바 있었듯이, 만해는 예술을 인생의 사치품 혹은 오락 정도로 본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문학의식은 약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저 예술이란 곧 ‘고추와 기름과 깨’처럼 인생을 보다 윤택하게 해 주는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문학이나 예술을 효용론적 관점에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지나치게 이지 쪽으로 치우치는 모더니즘 문학은 물론 너무나 감정이 극단으로 흐르는 낭만주의 예술을 모두 경계하는 발언도 공자의 심미표준인 중용 혹은 중화의 미학과도 접맥되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공자는 《논어》 〈팔일(八佾)편〉에서 “즐거우면서 지나치지 않고, 슬프되 지나쳐 조화를 잃지 않았다.”(樂而不淫 哀而不傷)고 하고, 〈위령공(衛靈公)편〉에서는 예술적 정감이 지나치게 강렬한 정(鄭)나라 음악을 음란하므로 추방해야 한다고 했다. 즉 모든 것에 절제와 제한을 둠으로써 정리(情理)의 조화를 꾀해 인과 예의 요구에 부합되는 중화(中和)의 미를 강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중용과 절제의 미학관이 만해에게도 무의식적으로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공자는 정치관이나 도덕윤리관을 서로 연계시켜 자연현상을 관찰함으로써 자연현상을 인간이 지닌 정신상태의 표현이나 상징으로 비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이는 동적이고 어진 이는 정적이며, 지혜로운 이는 낙천적이고 어진 이는 장수한다.”는 《논어》 〈옹야(雍也)편〉의 경우나, “정사를 덕으로 행하는 것은 비유컨대 북극성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뭇별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는 것과 같다.”는 〈위정(爲政)편〉, 그리고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중에 시듦을 알 수 있다.”는 〈자한(子罕)편〉의 예에서 보듯이 공자는 자연물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비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자연물로서 군자의 덕을 비유(比德)한다. 이러한 점은 만해 역시 동일한 경향을 보인다. 그는 문학을 자연현상과 연결시켜 파악하는 예가 많았다. 이러한 만해 문학의 자연표상은 물론 선시나 불교적 게송과도 관련이 있다. 불교에서는 자연 현상 및 우주 전체를 비로자나불의 법신(法身)으로 인식하여 자연에서 진여(眞如)를 보는 것을 가장 높은 경지로 간주한다.

만해 문학의 이러한 특징적 경향은 그의 시집 《님의 침묵》과 소설의 등장인물의 말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먼저 《님의 침묵》의 시들에서 만해는 단순한 배경으로서 자연현상을 제시하거나 자연의 이치를 통해 진실을 드러내는 경우, 자연의 정경이나 분위기를 묘사함으로써 함축적 의미를 표현하는 경우, 자연현상을 왜곡시킴으로써 논리의 비약을 통해 숨겨진 이치를 드러내는 경우 등으로 자연을 표상하고 있다.20)20)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숭원, 〈한용운 시의 자연표상〉 참조.

예술을 자연현상과 결부시켜 파악하는 이러한 그의 문학관은 물론 동양 최고(最古)의 문학이론서인 앙(梁)나라 때 유협(劉?)의 《문심조룡(文心雕龍)》과 같은 동양의 전통적인 문학관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그의 소설 《후회》에서 여주인공 한경이 하는 말에서도 이러한 문학관은 확인된다.

(前略) 큰 예술은 자연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만일 선생이 가르치는 대로만 배우고 만다면 누구라도 제자가 선생보다 나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처음에는 선생에게서 규칙적으로 배운다 할지라도 예술의 묘경(妙境)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얻어야 하는 것인데, 스스로 얻는다는 것은 곧 자연에서 배워서 마음으로 얻는 것이겠지요.21)21) 《한용운전집》 제5권, p.112.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道法自然)라는 말이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지만, 체르니셰프스키의 말처럼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미는 우리들로 하여금 인간(혹은 인격)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공자의 ‘비덕’의 심미이론은 봉건사회의 공리적 색채가 짙게 배어 있고, 고대 중국인들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좋은 품덕을 추구하는 심미이상과 심미심리 정취를 반영한다.

만해의 문학관이나 창작방법론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특성은 그가 성장기에 읽은 한학에 바탕을 둔 풍요로운 동양적 정서와 사상의 뿌리이다. 이는 그가 독서경험과 시대상황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문학관을 아우르는 전통적 지식인임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5. 계몽주의적 의도를 지닌 전통적 문사

만해는 전통적 선비(지식인)이자 지사(志士)다. 《논어》에 “지사와 인인(仁人)은 자신의 삶을 구하고자 남을 해치는 일이 없으며, 자신의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子曰, 志士仁人 無求生而害人, 有殺身而成仁)는 구절이 나온다. 만해의 삶이 그러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믿음과 글과 삶이 합일에 이른’ 사람이었다. 기본적으로 만해의 문학에는 지사로서의 민족(민중)계몽이라는 의도가 상당 부분 개입된다. 그러나 춘원류의 민족개조론에 바탕을 둔 전통단절론적 계몽주의와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대승불교의 보살사상과 민족자존론에 기반을 둔 계몽주의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만해에게 있어 문학이란 민족독립운동의 실천의 일환이거나, 나아가서 중생제도의 보살행의 한 과정이라고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가 《님의 침묵》을 쓴 것이나 수많은 논설을 쓴 것은 동일한 선상에서 논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의 시와 소설의 창작행위는 글을 통한 민족 계몽 내지는 민중 계도의 수단으로 볼 수 있다. 그 자신은 앞서 인용한 바 있었던 〈장편작가회의〉에서 “나는 사실주의에 속한다.”고 말한 바 있었지만, 그의 소설은 목적의식이 과도하여 대중소설적인 자세로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소설적 성격의 한계마저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권영민의 지적처럼 그의 소설은 인간심성의 본질에 대한 해명을 추구하는 도덕적 우화의 속성을 지닌다. 또한 신성성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정신적인 것의 의미를 극화하려는 기획으로서 신성한 것을 인간적인 차원으로 이전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지닌다. 그는 현존하는 현실로서의 삶보다는 그가 대망하는 약속으로서의 미래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적 접근을 요구하는 근대소설의 논리와 어긋난다22)고 할 수 있다.22) 권영민, 〈만해 한용운의 소설과 도덕적 상상력〉, 현대시의 반성과 만해 문학의 국제적 인식, 《만해축전 자료집》(만해사상실천선양회, 1999), pp.289∼294.

그러나 만해의 소설이 당시의 대중소설의 문법에 충실하고 자각적이었으며, 신문연재소설에 유행하고 있던 탐정과 모험과 연애라는 대중소설의 코드를 이용하여 대중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전달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대중소설이면서도 대중소설의 경계를 넘어가고 있다23)는 점에서 특별하다. 따라서 만해 한용운에게 있어 문학의 목적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당위의 현실을 위해 어떤 주제에 접근하고자 하며, 보다 아름다운 언어로 아름다운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문학적 태도는 한편으로는 감상적이면서 도덕적이고 교훈적이다. 바로 이러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만해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특이한 멜로드라마적 구성법이다.

멜로드라마는 강렬한 주정주의적 성향을 드러낸다. 이것은 서사의 기본원리와 어긋나는 것이지만, 인간 심성에 근거한 본질적인 주제를 형상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현상이기도 하다. 멜로드라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성격과 행위의 극단성이다. 구성의 원리와 상관없는 행위의 극단적인 배치는 멜로드라마적이라는 관형어의 대표적인 표시이다.

인물의 성격의 경우에도 도덕적인 양극화 현상에서 나타나는 선에 대한 악의 박해와 선에 대한 최후의 보상이 강조된다. 그러므로 개인의 성격의 내면이라든지 인간관계의 사회적인 양상이라든지 하는 문제가 개입될 여지가 별로 없다. 도덕적·정신적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멜로드라마에는 극단적인 수사학과 과장적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24)24) 권영민, 앞의 글, pp.289∼290.

만해 한용운의 소설 전체에 걸쳐 있는 남녀 주인공들의 해외유학과 영웅화 내지 권선징악적 내용과 함께 여성해방회의 혁명 운동 등속의 계몽성25)이나 1935년대에 이미 우리 문단이 제2기의 리얼리즘 소설기에 이른 때였음을 감안한다면 만해의 문학관은 현실 문단과는 별개로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25) 이명재, 〈만해소설고〉, 《국어국문학》 70집, 1976. 국어국문학회, 《현대소설연구》(정음사, 1982), p.193.

인위적인 제작의식이 상당 부분 개입되는 타 장르에 비해 한시에 그의 솔직한 심경이 자주 토로되는 것에서도 짐작하듯이 만해의 문학행위는 전통적인 의미의 문사로서의 목적성을 강하게 지닌 문필행위로서, 정리(情理)조화설과 자연심미의 비덕(比德)설과 함께 근원적으로 유불로 통칭되는 인간주의적 문학관의 동양적 훈습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

고명수
동국대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현재 동원대학 교수. 저서로 《나의 꽃밭에 님의 꽃이 피었습니다―민족의 청년 한용운》 《시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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