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조선불교유신론의 21세기적 의미

1. 머리말

요즘 학계에서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예술 전반에 걸쳐 근대성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이는 21세기라는 시점에서 근대성의 성찰과 반성을 통한 새로운 사회의 모색이라는 면에서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부분적인 연구나 민족의 코드에 갇혀 지엽적이고 국수적인 논의를 일삼는 것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근대성의 지엽적인 현상들이 곧 근대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사설시조에 봉건사회에 대한 풍자나 비판이 있다는 것을 들어 근대성 운운한다면 한국의 근대는 신라 봉건사회를 비판한 최치원의 한시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근대성의 논의가 뜬구름 잡는 식의 공리공론에서 벗어나려면 텍스트에 대한 정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갑오경장, 동학혁명, 일제식민지, 3·1운동 등 근대를 어느 시기로 설정하든, 그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기에 우리는 그 당시의 현실을 텍스트의 해석으로부터 재구할 수밖에 없다.

또 1차 사료를 비롯하여 서양인이 남긴 사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텍스트로부터 현실을 재구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각각의 텍스트로부터 근대적 세계관과 이를 형성하는 약호를 찾아내는 것이다. 봉건사회에 대한 풍자, 신분철폐와 만인평등, 자유로운 연애와 진리와 사상의 자유, 보통교육 등은 근대성의 체(體)나 용(用)이 아니라 근대적 세계관을 통하여 나타나는 상(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계관은 인간이 자기 앞의 세계를 해석하고 재현하여 의미작용을 일으키는 언어체계의 바탕체계이자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집단 무의식적 대응양식의 총체이다.1) 1) 예를 들어 달이 ‘높이 떠서 들이건 산이건 가리지 않고 두루 비춘다’는 用(기능)을 발하는 것을 보고 불교적 세계관―정확히 말하여 화엄만다라 세계관―에 있던 신라시대의 良人들은 그처럼 자비의 빛을 귀족이건 良人이건 가리지 않고 두루 뿌린다는 인식을 하여 달을 ‘관음보살’로 노래하고 해독한다. 반면에 성리학적 세계관을 지향하는 조선조의 사대부들은 이를 양반과 서민을 가리지 않고 은총을 베푼다는 인식을 하여 ‘임금님’으로 노래하고 해독한다. 이처럼 인간이 자기 앞의 세계를 하나의 텍스트로 보고 인식하고 해석하여 언어 텍스트로 재현하면서 의미를 만드는 체계가 있다. 또 인간은 세계의 부조리에 대하여 집단무의식적인 대응양식을 취한다. 인간은 세계의 분열이 상존하는 한 삶의 평형을 이룰 수 없기에 나름대로 분열에 대응하여 삶의 평형과 조화를 이루고자 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란 세계의 분열을 맞아 새에게 시체를 쪼게 하여 천상계와 지상계의 중개자인 새가 죽은 이의 영혼을 천상계로 실어 날랐다고 하면서 삶의 평형을 되찾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집단에서는 그가 극락정토로 왕생하였으니 곧 만나게 되리라는 노래를 불러 그의 죽음으로 야기된 분열을 극복하고 다시 조화를 모색하고자 한다. 이런 대응은 구조적이자 집단 무의식적이다. 이처럼 인간의 의미작용을 관장하는 구조가 있고 인간의 세계에 대한 대응양식을 집단적으로 규정하는 체계가 있다. 나는 이를 ‘세계관’으로 명명한다. 세계관은 집단적이고 무의식적이기에 인간 스스로 의식하고 텍스트에 투영

때문에 《조선불교유신론》의 근대성을 논하려면 먼저 이 텍스트에서 근대적 세계관과 이를 이루는 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은 1913년 치밀하고 명쾌한 논리로 당시 불교계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한 명저이다. 더구나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불교계의 모순과 부조리가 9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진행 중인 것이 상당하기에 이 저서는 현재성을 갖는다. 이 저서가 당시 불교의 중세적, 봉건적 잔재에 대해 비판한 점, 근대적 교육관, 진리와 사상의 자유, 지주의 선거 등 근대적 개혁을 주장한 것에 대해선 많은 연구가 진행된 것으로 안다.

만약 《조선불교유신론》에서 근대적 세계관과 이를 형성하는 원리가 밝혀진다면 만해는 최소한 이 시기에는 자기 앞의 세계를 근대적으로 인식하는 근대인이 된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아직 중세인이지만 양계초 등의 개혁의 영향을 받아 지엽적으로 근대적 개혁을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근대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원리를 이분법, 인간중심주의, 진리의 확정성, 합리성으로 나누어 이런 원리들이 《조선불교유신론》 텍스트에 나타나는지, 나타난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규명하고자 한다. 단 이해와 논의의 깊이를 더하기 위하여 이와 대립되는 중세적 세계관인 불교적 세계관과 대비하고자 한다.

2. 중도(中道) 대 이분법의 사유

불교는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논리를 편다. 불교는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는 것을 넘어사고자 한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자재(自在)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生)하지만 생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생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곧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머물지 않는다는 뜻은 바로 중도이다. 중도란 뜻은 생과 불생에 다 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수(龍樹)는 “인연으로 생긴 법을 나는 공(空)이라 하고 또 가명(假名)이라 말한다. 또한 이는 중도(中道)의 뜻이다.”라 하였으니 바로 그 뜻이다. 중도의 뜻은 무분별(無分別)이란 뜻이다. 무분별한 법은 자성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끝없이 연(緣)을 따르니 또한 이도 머물지 않는다.2)2) 義湘, 《華嚴一乘法界圖》, 《韓國佛敎全書》 제2책, 6중. “無自性故卽不自在者 卽生不生生 不生生者 卽是不住義 不住義者 卽是中道 道義者 卽通生不生 故龍樹云 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 亦說爲是假名 亦是中道義 卽其義也 中道義者 是無分別義 無分別法不守自性故 隨緣無盡 亦是不住.”

통상 밝으면 낮, 어두우면 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낮은 12시에서 0.00001초도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는 찰나에 스쳐간다. 정오에서 0.001초라도 지났으면 벌써 그만큼 밤이 진행된 것이며, 반대로 0.001초라도 모자랐다면 그만큼 낮이 덜 진행된 것이다. 밤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어느 것을 분별하여 둘로 나누는 것은 두 극단을 취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여러분이 책을 읽고 있는 지금은 낮인 동시에 밤이다.

낮은 스스로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공(空)하다. 밤이 있어서 낮이 있다. 밤을 견주면 낮이 드러나나 낮은 가명일 뿐이다. 밤이 있어 드러난 것이다. 절대 낮은 존재하지 않는다. 낮엔 이미 밤이 담겨 있다. 그러니 낮과 밤을 분별하지 않는다. 이것이 생하나 생을 일으키지 않고 머물지도 않는 중도의 원리이다.

반면에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이래 ‘A or not-A’의 논리를 추구하였다. A가 아니면 나머지는 A가 아닌 것이어야 한다. 동일한 사물이 동일한 사물과 동시에 동일한 점에 속하면서 또한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즉 A이면서 A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이분법적 모순율이다.

서구의 거의 모든 철학과 예술은 이분법적 모순율을 인정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이데아는 이데아이고 그림자는 그림자였고 주체는 주체요 대상은 대상이었지, 이데아인 동시에 그림자요 주체인 동시에 대상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근대화는 이 이분법을 더욱 보편화하고 전면에 드러내면서 진행된다. 서양은 정신/육체, 이성/광기, 주관/객관, 내면/외면, 본질/현상, 현존/표상, 진리/허위, 기의/기표, 확정/불확정, 말/글, 인간/자연, 남성/여성, 서양/동양 등 세계를 둘로 나누고 전자가 후자에 비하여 우월한 권력을 형성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자연의 도전인 홍수에 대한 인간의 대응이 댐을 쌓는 것으로 나타나듯, 인간이 자연의 우위에 서서 자연을 착취하고 개발하는 것, 문명국 서양이 미개한 동양을 계몽시키고 계발하는 것을 근대화로 보았다.

만해 또한 당시 불교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하여 세계를 이분법으로 바라본다. 만해는 양계초(梁啓超)를 통하여 칸트의 이분법적 철학을 수용하고 있다.

독일의 학자 칸트는 말하기를 “우리들 일생 동안의 행위가 모두 도덕의 성질에서 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이성이 자유인가, 자유가 아닌가를 알려고 한다면 한갓 껍질의 몸의 현상만으로 논할 것이 아니요, 마땅히 본성의 도덕으로 논해야 할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의 眞我는 비록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없으나 도덕의 이성으로 미루어 본다면 곧 그것이 의젓하게 現象界를 멀리 벗어나서 현상 밖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이 眞我는 반드시 항상 활발하고 자유로와서 육체의 항상 피할 수 없는 이치에 국한한 것과 같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이른바 활발하고 자유롭다는 것은 무엇이냐. 우리가 착한 사람이 되어 보겠다 함과 악한 사람이 되려고 한 그것이 모두 우리가 스스로 선택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미 선정하게 되면 육체는 이에 그의 명령을 따라서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자격을 만든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몸에는 이른바 自由性과 不自由性인 두 가지가 동시에 함께 있는 그 이치가 아주 알기 쉽다.”고 하였다. 양계초는 그 말을 풀이하면서 말하기를 “불교에서 말한 眞如가 있으니 진여란, 바로 칸트가 말한 眞我, 그것이니, 自由性이 있는 것이며, 이른바 無明이라는 것이 있다. 무명은 칸트가 말한 現象我이니 피할 수 없는 이치에 속박되어 자유성이 없는 것이다. ……朱子가 말한 밝은 덕은…… 그 자유인 진아와 부자유인 현상아의 한계가 분명하지 못하니 이것은 칸트를 따르지 못한 것이다.”3) 3) 韓龍雲, 《朝鮮佛敎維新論》(삼성, 1972), 24∼25쪽.(이하 《유신론》으로 약하고 인용은 쪽수만 표시함)

칸트가 이성을 중심으로 한 서양의 근대 철학의 지평을 연 철학자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칸트는 세계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현상과 도덕적 이성으로만 볼 수 있는 현상계 저 너머에 있는 진아로 나누어 본다. 진아는 도덕적 이성에 따라 육체의 구속을 떠나 자유롭고 활달한 것으로, 현상아는 육체에 구속되어 부자유한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만해는 칸트의 이분법적 철학을 수용하고 있다. 더 나아가 양계초의 입을 빌어 진아를 진여에, 현상아를 무명에 배대시키고 있다. 주자가 말한 밝은 덕(德)이 본체를 지시하지 못한 까닭은 지유로운 진아와 부자유한 현상아로 이원적으로 본 칸트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중세의 신의 종속에서 벗어난 인류가 어떻게 선을 지향할 것인가? 근대는 인간행위의 올바름과 거짓됨(선악판단)의 규범으로 도덕적 합리성을 내세운다. 도덕적 합리성의 핵심을 이루는 칸트의 철학이 바로, 도덕적 이성에 따라 육체의 구속, 현상아를 넘어서서 진아를 추구하여 자유를 획득하고 선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를 진아와 현상아의 이분법으로 나누고 전자가 후자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도덕적 합리성이라 본 것이다. 만해는 물론 칸트에 매몰되지 않고 칸트와 불교철학을 비교하고 있다. 인용문 뒤의 서술에서 대동적(大同的)으로 함께 공유하는 불교의 진아가 칸트의 진아보다 나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만해는 한 쪽에 진아-자유-진여, 또 한 편에 현상아-부자유-무명의 이분법으로 나누되, 전자가 후자에 대해 우위를 확보할 것을 천명하였다.

만해는 육체와 정신 또한 이분법으로 나누어 인식하고 있다.

시험 삼아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라. “그대들이 무슨 인연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고. 그들은 대답을 못할 것이다. 또 물어 보아라. 사람의 조직은 대개 정신과 육체의 2대 요소로 이루어졌다. 육체는 물리학자나 의학자들이 설명하고 있지만 정신의 조직은 과연 무엇으로 된 것인가. 정신은 단순한 한 원자인가, 아니면 2개 이상의 원자로써 합하여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별도로 또 다른 한 물질이 있어서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자연적으로 된 것인가, 그들은 대답을 못할 것이다.

또 묻기를 인생은 백 년도 못되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죽을 때에 정신과 육체가 동시에 없어지는가. 아니면 죽지 않는 한 물질이 있어, 영원히 홀로 존재하는가. 그들은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슬프다. 예부터 지금까지 동서양의 철학자와 이학자들이 이 문제에 접근하려고 하였지만, 이 정신적 문제에 이르러서는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무슨 이유인가.(《유신론》, 53∼54쪽)

만해는 참선이 본체(本體)이고 자명(自明)이요, 돈오(頓悟)인데 반하여 철학은 작용이요 연구며 점오(漸悟)라고 하여 참선을 철학을 넘어 돈오로서 본체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참선을 설명하기 위해 정신작용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사람의 조직을 정신과 육체의 두 요소가 합쳐져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정신에 대한 불가지(不可知)를 설파하고 있고 참선을 철학보다 우위에 둔 것은 불교적이지만, 정신과 육체를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은 (서양식) 근대적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에서 근대적 사유가 출발한다. 데카르트는 몸을 정신과 육체로 나누고 “cogito ergo sum”에 잘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몸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을 존재의 기반으로 삼는다. 근대는 이성을 추구하면서 이성의 토대인 정신을 육체로부터 분리시킨다. 근대는 육체-감성-성욕을 초월하여 진리와 허위를 판단하고 그림자에서 벗어나 이데아를 추구하는 추상체로 이성을 설정한다.

이처럼 만해는 중도의 사유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칸트의 도덕적 합리성을 끌어오고 정신작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진아와 현상아,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을 꾀하고 있다.

3. 진여(眞如) 대 진리의 확정성

우리는 궁극적 실체에 이를 수 있는가? 이를 수 있다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궁극적 실체가 아니다.

사리불이 사뢰었다. 일체의 만법은 모두 문자와 언어인데, 문자와 언어의 相은 곧 뜻이 되지 않으므로 如實한 뜻은 문자와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것이거늘, 지금 여래께서는 어떻게 법을 말씀하십니까? …… 일체 만법이라는 것은 세간의 말로 세운 법이다. 진여의 법은 모두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문자와 언어로는 곧 뜻을 나타낼 수 없다. 모든 법의 진실한 뜻은 일체의 언설을 끊은 것이니, 이제 부처님의 설법이 만약 문자와 언어만이라면 곧 진실한 뜻이 없을 것이요, 만약 진실한 뜻이 있다면 마땅히 문자와 언어가 아닐 것이니, 이런 까닭에 ‘어떻게 설법하십니까?’라고 물은 것이다.4)4) 元曉, 《金剛三昧經論》(이하 《金剛》으로 약함) 卷下, 《韓佛全》 제1책, 653상. “舍利佛言 一切萬法 皆悉文言 文言之相 卽非爲義 如實之義 不可言說 今者如來 云何說法…一切萬法者 世間言說 所安立法 如言之法 皆無所得故 唯文言 卽非爲義 諸法實義 絶諸言說 今佛說法 若是文言 卽無實

석가모니께서는 왜 수많은 군중 앞에서 말씀을 안 하시고 꽃만 들었다 놓았다 하셨는가?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합니다’라고 말을 못한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100이라면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장문의 연서를 쓴다 해도 거기에 표현된 사랑은 7, 80밖에 되지 않는다.

사랑한다 말을 하면 할수록 답답하고 사랑은 저 멀리 달아난 느낌일 것이다. 세계의 실체는 실제로 그렇지 않은데 인간이 편의상 범주를 만들어, 혹은 분별을 하여 그렇게 이름지어 부른 것이다. 그러니 이성과 언어기호로는 궁극적 진리에 다다를 수 없다. 그러기에 진여(眞如)라고 말하는 것이다. 원효의 말대로 ‘파악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이 진여의 본체를 드러내는 글귀이다.

인간은 언어기호에 의하여 세계를 들여다보고 표상하며 전달할 수밖에 없는데 언어기호란 비어 있는 것이다. 무지개의 빨강과 주황 사이에도 무수한 색이 존재하나 인간이 만든 언어기호의 틀은 빨강과 주황이어서 그 색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세계의 실체는 실제로 그렇지 않은데 인간이 편의상 범주를 만들어, 혹은 분별을 하여 그렇게 이름지어 부른 것이다.

빨강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황이나 파랑에 견주어 ‘빨강다움’을 드러낸다. 파랑이 없다면 빨강도 없다. 다시 말하여 원효의 표현대로 자성(自性)이 없이 한갓 가명에 지나지 않아 참 지혜와는 떨어져 있다. 진리란 우리가 환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환상이다. 그러니 진리의 본체란 근본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필경공(畢竟空)에 대한 인식이 진리의 본체를 드러내는 바이다. 이처럼 세계의 궁극적 실체는 불가언설(不可言說)이고 이언절려(離言絶慮)이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만해는 진여의 불가사의함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진리에 대해 확정성을 긍정한다.

불란서의 학자 데카르트는 말하기를 “학자들이 제각기 그 믿는 진리가 있으면 스스로 그것을 굳게 가지고 一家를 이루는 동시에 만일 그와 서로 다른 것이 있어 서로 용납될 수 없다면 곧 陳을 치고 공격을 개시하여 주고받고 서로 변론하기를 오래하다 보면 완전한 진리가 곧 그 속에서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그 지혜가 비록 높고 낮고 크고 작은 차이가 있으나 그 本性만은 서로 같아 진리가 純一하여 잡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 동일한 본성의 지혜로써 純一無雜한 진리를 찾아 힘쓰고 그것에 종사하면 어찌 길은 다르나 그 귀결점이 같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처음에는 비록 사람마다 이론을 달리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서로 웃을 날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데카르트의 이 이론은 《圓覺經》의 뜻과 부합된다고 하겠다. …… 대저 4+4=8은 변할 수 없는 수인데 수학을 전연 모르는 아이는 혹 7이라 하기도 하고, 혹 9라고 하기도 할 것이다. 7이다, 9다 하는 것은 곧 견해가 막힌 것으로서 허망한 것이다. 차츰차츰 그 허망을 없애게 되면 온 천하의 어떤 아이라도 그것이 8이 아니라고 할 아이는 없을 것이다. 진리는 바로 4+4=8이 되는 그러한 것이다.(《유신론》, 30∼31쪽)

교문(敎門)은 달라도 진리는 하나이다. 이 점은 데카르트나 불교나 유사하다. 하지만 불교가 진여와 부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보는 반면에 데카르트에서 비롯된 근대의 사유는 4+4=8처럼 진리를 이성을 통해 다다를 수 있고 확정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만해 또한 베이컨과 데카르트를 인용하며 진리의 확정성을 옹호한다.

진리를 신에게서 빼앗아 와 인간이 파악할 수 있고 확정할 수 있고 다룰 수 있는 것으로 끌어내리면서 인간은 진리를 이용하고 지배하게 된다. 원래 퍼지인 시간을 몇 시 몇 분 몇 초로 확정하면서 회사, 학교, 군대 등 근대적 시스템을 가동시키고 인간이 정해진 시간에 따라 생산하고 소비를 하며 삶을 영위하는 것에서 보듯, 근대는 시간과 공간을 계량화하여 분할하고 이에 맞추어 근대적 시간과 공간을 탄생시키고 이 위에 근대 시스템을 작동시키면서 근대 문명을 건설한다.

진리에 대한 확정성은 과학기술주의를 낳고 근대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산업혁명을 이루고 60억 명이 대량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거대 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한다.

만해의 진리의 확정성에 대해 강한 확신은 자연히 경험적 실증을 중시하는 것으로도 연결된다.

금강산이나 설악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는가. 절벽과 斷崖를 기어도 보통 사람은 겁이 나서 떨리는데, 감히 빨리 다닐 수 없는 곳을 나는 듯이 달리어도 조금도 의심이 없으니 어찌 모험이 되리요. 이것은 경험일 것이다. 경험이 없으면 일을 당하여 뜻대로 되지 않아 노예처럼 牛馬를 대하더라도 머리가 자라처럼 들어가고 동정을 구하는 파리와 같아서 한번도 항거하지 못한다. 슬프다. 世事가 절벽과 단애와 같아서 저에서는 용감하고 이에서는 겁내는 것은 어째서인가. 경험이 있고 없는 구별이 있기 때문이다.(《유신론》, 77쪽)

절벽을 기어오른 경험이 없는 자는 이를 두려워하지만 어릴 적부터 그곳을 다녀본 경험이 있는 자들은 이에 대해 겁내지 않는다. 경험이 있어야 일을 당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실천할 수 있다. 베이컨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경험론적 전통은 ‘주술의 정원’인 중세를 마감하고 구체적인 경험에 바탕을 두고 진리를 판단하는 지평을 연다. 이는 실증주의로 더 체계화한다. 실증주의란, 일체의 주관적이고 선험적인 사변을 배제하고 경험―관찰과 실험―을 통하여 과학적으로 검증되는 사실을 바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방식이다. 근대 과학은 실증주의를 통하여 객관성과 보편성을 갖게 된다. 만해는 사원(寺院)의 위치를 정할 때 길흉을 따져 선택하는 것을 지양하고 경험에 입각할 것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만해는 승려로서 진여의 불가사의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근대적 지식인으로서 진리의 확정성을 옹호하고 길흉보다 경험의 객관성과 보편성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할 것을 주장하였다.

4. 불성(佛性) 대 인간 주체

중세는 한마디로 표현해 신성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는 《성경》의 문구처럼 신이 인간 위에 서서 모든 것을 관장하고 통제하고 조종하는 시대였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위로 깨달음을 얻어 모든 중생을 부처로 해탈시키는 데 있다.

중생의 마음에는 실로 다른 경계가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본래 청정하고 도리에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티끌에 오염됨으로 말미암아 3계라 이름하는 것이고 그 3계의 마음을 일컬어 다른 경계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 경계는 허망한 것이며 마음의 변화로 인하여 생긴 것이니 만일 마음에 허망됨이 없으면 곧 다른 경계가 없어질 것이다.5) 5) 《金剛》 卷中, 《韓佛全》 제1책, 641상. “衆生之心 實無別境 何以故 心本淨故 理無穢故 以染塵故 名爲三界 三界之心 名爲別境 是境虛妄 從心化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는 것은 대승(大乘)의 요체이다. 그러니 중생이 곧 부처요, 중생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으로 본래 청정하다. 그런데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그 하늘을 가리듯, 일체의 중생이 무명(無明)으로 인하여 미혹에 휩싸이고 망심(妄心)을 품어 진여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세계를 분별하여 보려 한다.

다만 본래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더러운 것처럼 무명에 휩싸여 욕계(欲界), 색계(色界), 유계(有界)의 3계란 경계를 지어 세계의 실체를 바라보니 이 경계는 허망한 것이다. 이 모두 마음의 변화로 인하여 생긴 것이니 만일 마음에 허망됨이 없으면 곧 다른 경계가 없어지고 중생 또한 본래의 청정함으로 돌아간다.

우리 미천한 인간들이 속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끊임없이 수행 정진하여 완성된 인격에 이를 수 있고 또 이에 이른 사람은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들을 이끌어야 비로소 깨달음이 완성될 수 있다. 저 아름다운 연꽃이 높은 언덕에 피지 않는 것과 같이 반야의 바다를 완전히 갖추었어도 열반의 성에 머무르지 않으며,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도 무량한 겁 동안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고 세간을 구제한 뒤에 열반을 얻는다.

반면에 근대는 신의 종속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 모든 실재의 주인이 되고 자연과 대상을 자신의 뜻대로 해석하고 변화하고 개발할 수 있는 존재의 주재자가 되는 시대이다. 만해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하나라는 주장을 펴는 가운데 인간중심주의에 부합하는 견해 또한 피력한다.

만일 無形의 하늘이라면 그것은 바로 天理는 하늘이 아니다. 천리는 곧 眞理이다. 이룰 만한 이치가 있으면 이루어지고, 실패할 만한 이치가 있으면 실패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

그렇다면 이루는 것도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요, 실패하는 것도 저절로 실패하는 것이니 “성사는 하늘에 있다.”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렇기 때문에 有形의 하늘과 無形의 하늘도 아무런 타당성이 없다.(《유신론》, 13쪽)

불교 유신에 뜻을 두는 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아무 말이 없는 것은 어찌된 이유인가. 첫째는 天運에 맡기고, 둘째는 남에게 미루는 그것이 주 원인일 것이다. 나는 “成事는 하늘에 있다.”는 말에 의혹이 없은 후, 조선불교를 유신하는 책임이 천운에도 있지 않으며, 타인에게도 있지 않고 오직 나에게 있음을 비로소 알았었다.(《유신론》, 15쪽)

반면에 근대는 신의 종속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 모든 실재의 주인이 되고 자연과 대상을 자신의 뜻대로 해석하고 변화하고 개발할 수 있는 존재의 주재자가 되는 시대이다. 만해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하나라는 주장을 펴는 가운데 인간중심주의에 부합하는 견해 또한 피력한다. 만해는 “모사(謀事)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고 성사하는 것은 하늘에 있다.”는 운명을 천운에 맡기는 중세적 세계관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하늘이 만약 유형(有形)의 하늘이라면 하나의 대상에 불과한 것이니 물건이 인간의 성패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 무형의 하늘이라면 천리가 곧 진리이니 진리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나타나는 것이기에 하늘과 관련이 없다. 그러니 하늘이 사람이 꾀하는 일을 성공과 실패로 이끈다는 것은 사람에게서 자유를 잃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해는 단정적으로 “천하에 어찌 일의 성패가 있겠는가는 오직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을 뿐이다.”라는 단정적인 말로 《조선불교유신론》의 서막을 여는 것이다.

이처럼 만해는 부처와 중생과 마음이 하나임을 알면서도 인간 중심의 사유를 전개한다. 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를 펴낸 것도 한국불교의 현실을 천운에 맡기지 말고 인간 주체들의 의지와 실천에 의해서 개혁해 나가겠다는 근대적 각성에 따른 것이다.6) 6) 이 밖에도 세계관의 원리로 작용한 것은 아니나 현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근대성에 포함될 만한 것이 많다. 미신과 기복에 대한 신랄한 비판, “교육이 많으면 문명이 발전하고, 교육이 적으면 문명이 쇠퇴한다. 교육이 없으면 野蠻禽獸가 된다.”라고 하는 근대적 교육관, “지혜와 진리가 없는 것은 그럴 수가 있다지만, 사상의 자유가 없는 것은 전연 불과하다.”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는 진리와 사상의 자유 등은 근대성과 맞닿아 있다.

5. 불교와 근대적 세계관 착종(錯綜)의 의미

만해는 “전통사상의 낡은 형태를 끝내 고집함으로써 시대의 발전에 역행하기도 하고 외래사조에 무비판적으로 휩쓸려 버림으로써 자기상실의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했던 혼돈의 시대에 있어서, 근대사상의 진보적 측면을 불교 속에 철저히 여과시키고자 했던”7) 승려다. 승려로서 불교적 세계관을 지향하였지만 근대적 각성을 하여 시대를 통찰하고 실천을 행한 선각자이다.

만해는 중도의 사유를 하면서도 이분법적 사유를 하고 승려로서 진여의 불가사의함을 인정하면서도 진리의 확정성을 옹호하였으며 부처와 중생과 마음이 하나임을 알면서도 인간 중심의 사유를 전개한다. 이분법, 진리의 확정성, 인간중심주의 등은 근대성을 형성하는 원리들이다. 이는 만해가 단순히 근대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수용한 계몽주의자가 아니라 근대적 세계관을 굳게 형성하고 있었던 근대적 지식인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럼 불교적 세계관과 서양의 근대적 세계관이 서로 착종된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무엇보다도 한국적 근대화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 전혀 자생적인 근대화의 맹아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본격적인 근대화는 일제 식민통치를 통해 단행된다. 식민지적 근대화는 철저히 일본의 필요에 따라 강제적으로 수행된 것이기에 한국 사회는 일본에 의해 왜색화한 근대, 중세와 근대가 공존하는 착종된 가운데 남아 있는 우리의 것이 열등한 것으로 소외되고 주변화하는 특성을 보인다. 만해 또한 이런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 있었기에 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동안 불교의 사유를 행한 승려가 이와 맞서는 이분법, 진리의 확정성, 인간중심주의를 추구한 것은 진속불이(眞俗不二)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空相이 또한 공하다”라 한 것은 ‘공상’이 바로 俗諦를 버리고 眞諦의 평등한 상을 나타낸 것이요, “또한 공하다”란 곧 진제를 융합하여 속제로 삼은 “空空”의 의미이니, 순금을 녹여 장엄구를 만드는 것과 같다. …… “또한 공하다”라 한 것은 이 속제를 다시 융합하여 진제로 삼은 것이니, 이것은 장엄구를 녹여 다시 금덩이로 환원시키는 것과 같다. …… 또 처음의 門에서 “속제를 버려서 나타낸 진제”와 제2의 공 가운데 ‘속제를 융합하여 나타낸 진제’인 이 2문의 진제는 오직 하나요 둘이 아니며, 진제의 오직 한 가지로 圓成實性이다. 그러므로 버리고 융합하여 나타낸 진제는 오직 하나이다.8) 8) 元曉, 《金剛》, 〈入實際品〉, 《韓佛全》 제1책, 639하·640상. “空相亦空者 空相卽是遣俗顯眞 平等之相 亦空卽是融眞爲俗 空空之義 如銷眞金作莊嚴具 …… 亦空還是融俗爲眞也 如銷嚴具 還爲金린 ……又初門內 遣俗所顯之眞 第二空中 融俗所顯之眞 此二門眞 唯一無二 眞唯一種 圓成實性 所

석가모니는 《금강경》에서 “만약 보살이 아상(我相)이나 인상(人相)이나 중생상(衆生相)이나 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구원의 주체인 나나 대상인 타인이 있다는 생각, 중생이든 다른 존재이든 이보다 위에 서서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보살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의 대상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어서, 그들보다 높이 깨달아서, 그들보다 시간이 많아서, 그들보다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베푸는 것이 아니다.

보살행은 내가 그보다 높이 서서 나의 불성(佛性)을 그들에게 불어넣어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부처님과 같은 성품을 지녔다. 유리창만 닦으면 하늘이 다시 청정함을 드러내듯, 무명(無明)만 없애면 본래 청정한 중생 속의 불성이 스스로 드러나니 그 먼지만 닦아내면 된다. 그러니 중생과 깨달은 자가 따로 있지 않다.

화쟁의 목표는 한 마디로 말하여 일심(一心)의 본원(本源)으로 돌아가 중생을 풍요롭고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이다(歸一心之源 饒益衆生). 원효는 이를 위하여 진과 속이 하나가 아니라는 진속불이(眞俗不二)를 외친다. 우리 미천한 인간들이 속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끊임없이 수행 정진하여야 완성된 인격(眞)에 이를 수 있고, 또 이에 이른 사람은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들을 이끌어야 비로소 깨달음이 완성될 수 있다. 높은 깨달음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열반에 머물지 않고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을 구제해야 비로소 깨달음의 완성에 이른다. 이것이 진속일여(眞俗一如)이다.

원효는 열반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부주열반(不住涅槃)을 추구하였고 이를 몸소 실천하고자 중생 속으로 내려갔다. 원효의 표현대로 금을 녹여 장엄구로 만들듯 진제(眞諦)를 녹여 속제(俗諦)를 만들며, 다시 장엄구를 녹여 금덩이로 환원시키듯 속제를 녹여 진제로 만든다. 금덩이를 녹여 금반지를 만들고 금반지를 녹여 다시 금덩이를 만들지만 둘은 모두 금으로 하나이다. 그러니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圓成實性), 부처와 중생,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 엘리트와 대중이 둘이 아니요 하나이다.

진여문(眞如門)에서 보면 승려인 만해는 중도의 사유를 행하고 진여에 이르러야 하며 중생의 불성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나 생멸문(生滅門)에서 보면 만해는 한국 불교의 현실을 개혁하여야 하는 근대적 지식인이다. 이의 개혁은 이분법의 사유, 진리의 확정성, 인간중심주의의 입장에 서야 가능한 것이다. 선(禪)이 언어도단(言語道斷)임에도 언어로 된 화두를 방편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이분법 등 근대적 사유는 불교를 개혁하여 부처를 올바로 세우는 방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불교적 세계관을 지향하면서도 불교 개혁의 방편으로 이분법 등 근대적 사유와 실천을 행한 것이 《조선불교유신론》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6. 맺음말

《조선불교유신론》을 한 편의 텍스트로 놓고 그 텍스트에 근대성의 지엽적인 현상이 아니라 근대적 세계관과 이를 형성하는 원리가 나타나는가 분석하였다.

그 결과 만해는 중도의 사유를 하면서도 이분법적 사유를 하고 승려로서 진여의 불가사의함을 인정하면서도 진리의 확정성을 옹호하였으며 부처와 중생과 마음이 하나임을 알면서도 인간 중심의 사유를 전개한다. 이분법, 진리의 확정성, 인간중심주의 등은 근대성을 형성하는 원리들이다. 이는 만해가 단순히 근대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수용한 계몽주의자가 아니라 근대적 세계관을 굳게 형성하고 있었던 근대적 지식인이었음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불교적 세계관을 지향하면서도 불교 개혁의 방편으로 이분법 등 근대적 사유와 실천을 행한 것이 《조선불교유신론》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럼 탈현대를 주장하는 21세기에 이런 점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조선불교유신론》의 현재성을 재조명하는 것이다. 90년 전에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제시한 한국 불교계의 모순 가운데 아직 극복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이 책은 현재성을 갖는다.

이 텍스트를 탈현대의 관점에서 전혀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 근대를 성찰하고자 하는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이항대립의 야만을 극복하고자 퍼지의 사유를 하고 진리를 확정짓는 대신 열어두고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생태론적 사고를 한다.

20세기까지는 근대적 대안만으로 그칠 수 있으나 21세기인 오늘 한국의 현실에 맞게 불교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대안과 근대적 세계관에서 추출된 대안을 종합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다만 우리의 현실을 떠난 추상적 담론의 양산이나 서구중심주의에 매몰된 근대성, 탈근대성의 논의로 기울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조선불교유신론》의 가장 큰 의의는 우리가 맞고 있는 현실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이다. 근대에 대한 진정한 성찰이 되려면,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현실을 바탕으로 서구의 근대와 동아시아의 근대, 한국의 근대 모두를 성찰하고 비전을 모색하는 길을 택해야 하리라. ■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현재 한겨레문화비평학교 담임강사, 의상만해연구원 연학실장, 계간 《문학과 경제》 주간,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문화변동과 인간, 그리고 문화연구》(공저) 《생명에 관한 아홉 가지 에세이》(공저) 《기호학과 철학, 그리고 예술》(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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