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기복불교 논쟁에 대한 검토

‘기복불교 논쟁’은 《불교평론》 2001년 여름호 특집을 통해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루면서 공론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같은 호에 홍사성 주간이 “불설과 비불설을 결택하자”는 제하의 권두언에 기복불교의 대표적 지탄대상인 ‘우란분절 조상천도의식’의 근거가 되고 있는 《우란분경》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위배되는 대표적 위경이라고 분명하게 드러내어 주장한 것이 논쟁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불교포럼은 2002년 9월 “기복불교의 대안을 찾자”는 주제로 진행되어, 이 자리에서는 건국대학교 성태용 교수는 작복을 위한 ‘복채점표’를 만들자고 주장한 바 있다. 특히 토론 과정에서 기복과 구복/작복은 엄연히 다른 것임에도 용어의 정의를 분명히 해서 쓰고있지 않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논쟁은 〈법보신문〉에 홍사성 주간의 글에 대한 반론이 실리면서 더욱 대중화되었다. 물론 주간지라는 특성상 한정된 지면에서 이루어진 반론과 재반론이었기 때문에 심층적인 논의로 진척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그러나 ‘기복불교’ 문제에 대한 다양한 위치와 영역에 있는 불자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드러내는 긍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에는 틀림없다.

2002년 격월간 《참여불교》는 “복을 빌면 복은 오는가” 하는 특집기사에서 기도에 관한 조사를 싣고 있다. 이에 의하면 이른바 ‘기복불교’의 중심에 있는 일반(특히 중년여성)불자들의 설문결과 대부분 가족과 관련된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기존의 기복불교 논쟁의 쟁점은 무엇이었을까?

한 갈래는 악인(惡因)을 짓고 선과(善果)를 기대할 수 있는가 하는 논쟁으로 요약된다. 즉 인과문제이다. 이 문제는 기도의 효능에 대한 인식이 어떤가에 대한 것도 포함된다.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는 변경될 수 없는 분명한 법칙이다.

그런데 문제는 선인(善因)이 되는 선업(善業)에 ‘불·보살에게 세속적인 행복을 비는 행위’ 그 자체도 포함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홍사성 주간은 “연못에 빠진 바위를 많은 사람이 축원한다고 떠오르지 않는다”는 《가미니경》을 예로 들어 ‘개인이 지은 업이란 누가 대신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철저한 가르침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망자의 천도, 자녀의 학업성취 등을 간절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위신력에 기대어 비는 과정에서, 그 간절한 마음으로 인해 선업이 된다는 주장 또한 강하게 존재하고 있다.

또 한 갈래는 기복(祈福)을 작복(作福) 혹은 구복(求福)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처방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논자들은 이타행 등의 실천을 통해 복을 지어(作福) 복을 받도록 유도하여 하여야 한다는데 이론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의 경우

기독교의 경우도 기복신앙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진행된 바 있다. 가장 최근의 뜨거운 기독교 교리논쟁으로는 순복음교회의 ‘삼박자구원론’에 대한 논쟁이었다. 기독교방송(CBS)의 교계 시사 프로그램 CBS저널이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구원론’(예수를 믿으면 영혼, 육체, 물질 모든 면에서 구원과 축복을 얻게 된다는 주장)과 관련해서 답을 찾기 위해 지난 1월 10일 토론회를 개최한바 있다. 보도된 내용 중에서 필요한 부분만 뽑아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해설기사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 6장 33절]라는 말씀을 생각하여 세상 복을 많이 받기 위해 열심히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과 “주여 저를 부자되게 하여주소서, 저에게 만사형통 하는 일마다 잘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사람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김삼환 목사(순복음국제신학원 원장) : 하나님께서 베푸신 영혼 구원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사람 구원이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와 생활이 유기적으로 구성된 존재다. 영혼 구원을 받게 되면 물질 축복과 건강의 복을 받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이다. 영지주의자는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고, 영혼만이 선한 것이며 영혼만 구원받으면 된다고 한다. 기독교의 정통 구원관은 이런 영지주의를 반대한다. 삼중구원관은 이러한 정통구원관과 상통하는 것이다.

김동호 목사(높은뜻 숭의교회) : 예수 잘 믿으면 건강하고 부유해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 중에는 약한 사람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다. 그것은 세상이 왜곡됐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세상이라면, 예수 잘 믿으면 건강해지고 부자가 되는 것이 정상이다. 문제는 ‘건강과 부가 복이고 구원인가’ 하는 것이다. 건강과 부유함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추구하는 복과 같다고 얘기하는 것은 지나치다. 삼박자구원론이 건강과 부를 긍정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긍정이 지나쳐서 복과 구원으로까지 가져간 것이 문제이다.

김삼환 목사 : 복음전파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치료다.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약이다. 60·70년대 뿐 아니라 21세기에도 사람들은 절망에 처해 있다. 소망의 메시지는 계속돼야 하고, 희망을 주는 전인구원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현대신학자 몰트만도 ‘희망의 신학’을 얘기하고 있지 않나. 특히 삼중구원은 다양한 문제를 직면한 사람에게 광범위하고 효과적으로 증거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김동호 목사 : 아무리 절대 절망의 순간에도 진실한 것을 소망으로 가르쳐야 된다. 돈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돈으로 사람에게 소망을 주겠다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누구나 건강한 것을 좋아한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에게 예수 믿으면 건강해진다고 하면 다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정직한 것이 아니다. 그걸 소망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을 속이는 일이다. 예수는 병을 고치시고 난 다음에 아무에게도 가서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병 고쳐주는 것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오해할까봐 염려했기 때문이다.

불교인들이 대개 타력신앙의 전형으로서 기독교를 말한다. 필자는 기독교에 대한 이러한 불교인들의 생각이 기독교에 대한 일종의 오해와 편견에서 나온 생각이라고 본다. 불교인인 필자가 이해하기에 기독교인의 ‘하나님’이 ‘진리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를 불교의 ‘법신’, 즉 ‘진리의 몸이신 부처님’이라고 불교식대로 이해할 수도 있다고 본다. 이 문제는 접어두고 위의 토론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사랑, 인내, 의, 용서 등의 실천’을 통해서 복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기복신앙을 비판하는 기독교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는 그 동안 전개되어온 기복불교 논쟁은 한두 논자를 제외하고는 위의 논쟁 내용에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필자가 왜 그럴까 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는데, 필자는 그 이유가 종교적 심성(일반적인 용어로는 ‘영성’)에 철저히 기반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고통에 대한 이해

상식적인 것이겠지만 불교는 ‘고통’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그리고 현실의 문제에 대한 모든 처방 또한 ‘고통’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고통은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실존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고통이 삶의 일부라는 것을 깊이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그러한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탐구하고 체득해 가는 것이다. 고통의 뿌리는 ‘무명으로 인한 탐·진·치 삼독심’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부처님께서 깊이 살피고 체득해서 내린 결론이다. 그러니 우리도 고통의 뿌리가 탐·진·치 삼독심에 있다는 흔들리지 않는 결론에 도달하고, 그것이 어떻게 부정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나는가를 세심히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부처님께서 그러한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거친 그분의 삶의 경로를 쫓아가는 방법 밖에는 없다.

다행히 그 답을 알고 있으니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그것을 살펴가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고통을 발생시키는 원인에는 매우 여러 가지가 있다는 점을 상기하고, 그 원인 하나 하나를 캐물어 사유하다보면 부처님께서 도달하신 결론, 고통의 그 뿌리에 닿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 우리는 어떻게 고통을 극복하고 행복해 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침반으로 삼아야 하겠지만 직접 길을 찾아가는 것은 자기자신이며, 그 길은 부처님이 살며 보여주신 역사적 삶의 상황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실천의 현실성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처한 구체적인 상황들과 똑같은 상황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유사한 상황들을 갈래지어 보편적인 상황으로 설명하는 것은 인간 사유 발전의 산물이므로 당연히 보편적인 상황이란 것도 특수한 상황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고통을 극복하고 행복해지기 위해 가져야 할 보편적인 종교적 심성이 있다. 그것은 자비, 관용, 이해, 인내, 정직, 용서, 친절, 선함, 관심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달라이 라마는 ‘기본적인 영성(심성)’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기본적인 영성은 24시간 실천할 수 있는 영성이라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그 처방(방편)에 대한 정직성

필자는 이상과 같은 생각에 따라 기존의 기복불교 논쟁이 ‘종교적 심성’에 철저히 기반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은 게 아닌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보았다. 필자는 한국불교의 병폐로 지목되고 있는 ‘기복불교’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미니경》이나 《목건련경》보다 다음과 같은 《잡비유경》을 먼저 음미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길지만 여기에 전문을 인용한다.

  • 옛날에 어떤 노모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병들어 죽자 시체를 묘지 안에 멈추어 두고 매우 슬퍼하여, “그 애 하나를 믿고 노경(老境)을 보내려 했는데, 이제 나를 버리고 죽었으니 나도 같이 죽으리라.” 하고 4∼5일 동안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이를 가엾이 여긴 부처님께서 묘지에 이르사 노모에게 말씀하셨다.
    “왜 묘지에 와 있는가?”
    노모가 여쭈었다.
    “하나뿐인 자식이 저를 버리고 죽었습니다. 애정을 끊을 길 없기에 함께 죽고자 하나이다.”
    “아들을 다시 살리고 싶으냐?”
    노모가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
    “물론이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한 번도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에서 좋은 향화(香火)를 구해오면, 내가 아들을 살려 주리라.”
    좋아한 노모는 향을 구하러 나섰다.
    그리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물었다.
    “당신네 집에 죽은 사람이 있으십니까, 없으십니까?”
    사람들은 한결같이 대답했다.
    “조상들이 다 돌아가셨습니다.”
    이같이 수십 집을 찾아다녔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여서, 향을 얻는 데 실패한 노모는 부처님 계신 곳에 돌아와 여쭈었다.
    “널리 다니면서 향을 구했사오나, 사람이 안 죽은 집이 없는 까닭에 헛되이 돌아왔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산 사람치고 죽지 않은 예는 한번도 없었으니, 어찌 미혹하여 아들을 따라 죽으려 하느냐?”
    이에 노모는 무상의 도리를 깨닫고 불도에 들어갔다.1) 1) 《불교대전》, 만해 한용운 편찬, 현암사, 1997, pp.353∼354.

이 경전에서 우리가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은 존재의 고통에 대한 부처님의 정직한 태도이다. 그리고 고통에 빠진 존재를 고통으로부터 헤어나게 하기 위해 취하신 분명하고도 정직한 처방이다. 우리가 진리에 대한 정직함, 진리를 깨닫는 방법(처방)에 대한 정직함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기복불교에 대한 온갖 논쟁은 현실성을 잃은 논쟁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기복의 뿌리는 무엇인가?

《불교평론》에 실린 〈기복불교의 실태와 문제점〉을 보면 복을 비는 불자들이 어떤 복을 바라는지 잘 드러나 있다. 간추리자면 대학입시합격, 사업번창, 자손번창, 질병치유 같은 것이다. 부적이나 점, 천도재나 생전예수재 또한 이런 복들을 얻는데 도움을 얻기 위한 수단의 일종이다. 대부분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참다운 행복은 물질적인 것에 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불자의 상식이다. 참다운 행복은 최소한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복을 뜻한다. 그것은 정신적 풍요로움과 영적인 성장을 동반하는 행복을 뜻한다. 또한 그것은 나와 더불어 있는 모든 존재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에서 오는 행복을 뜻한다.

기복불교의 사례로 중점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대학입시합격, 사업번창, 자손번창, 질병치유라고 하는 열망이 달성된다고 해서 행복이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성취했다고 해서 이러한 열망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 삶에서의 불안감, 두려움, 불만족, 절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타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기복의 뿌리는 삶의 불안, 두려움, 불만족, 절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복불교의 확대재생산의 원인은 불교지도자들이 이러한 고통의 뿌리에 정직하게 대면하고 그 극복을 위한 정직한 불교적 실천방법들을 가르치는데 혼신의 노력을 하지 않고, 너무나 의례적으로 너무나 가볍게, 너무나 손쉬운 처방을 내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필자는 불교지도자들이 중생의 다양한 고통을 이해하고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며, 물질적 행복이 아닌 도덕적이고 영적인 삶에 따른 행복이 진정하고 영원한 행복이라는 깊은 실천적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단편적으로 말해 중생들을 가르치는 불교지도자들은 그 삶이 너무 풍요롭고 그러한 물질적, 외형적 성공에 스스로도 지나친 가치를 둔다는 느낌이다.

결론적으로 불자들이 엄연한 인과(因果)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고통에 정직하게 대면하고 고통을 극복하고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려는 의지가 굳세지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싶다.

‘기복의례’의 극복을 위해

이런 의지를 굳세게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들을 제공해서 스스로 실천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기복불교’의 문제는 현상적으로 ‘기복의례’의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종교적 체험이 의례화, 관습화되고 그것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이 사제화, 제사장화되고 있으므로써 불자대중이 종교적 실천과 체험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한가지 징표이다.

따라서 당연히 ‘기복의례’를 바꾸어야 한다. 우선 이미 실행되고 있는 ‘기복의례’에 내용과 형식의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우선 기도와 염불의 의미에 대해 시각을 교정해야 한다. 만해 한용운은 말한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중생들의 거짓 염불을 폐지하고 참다운 염불을 닦게 하자는 취지에서 발언한 것이다. 그러면 거짓 염불이란 무엇인가? 지금의 이르는 바 염불을 말함이니,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이것이다. 참다운 염불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마음을 염하여 나도 이것을 마음으로 하고, 부처님의 배움을 염하여 나도 이를 배우고, 부처님의 행을 염하여 나도 이것을 행해서, 비록 일어·일묵·일정·일동이라도 염하지 않음이 없어서, 그 진가(眞假)와 권실(權實)을 가려 내가 참으로 소유한다면 이것이 참다운 염불인 것이다.2) 2) 《한국근대사상가선집① 한용운》, 안병직 편, 한길사, 1979, p.116.

달라이 라마는 말한다.

기도는 단순히 마음 깊이 간직한 원칙과 신념을 자신에게 날마다 깨우쳐주는 행위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난 매일 아침 일정한 불경구절을 암송합니다. 그 구절은 언뜻 보기에 기도문처럼 보이지만, 사실 난 그것을 암송하면서 어떤 것을 떠올립니다. 그 구절들은 다른 사람들은 상대하고 그들에게 말하는 방법과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 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내가 하는 수행은 대부분 마음속으로 떠올리는 것입니다. 자비와 용서 같은 것들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것이지요.3)3) 《달라이라마의 행복론》, 달라이 라마·하워드 커틀러 지음, 류시화 옮김, 김영사, 2001, p.329.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인 수행이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면 수행을 위해 하루 24시간을 모두 이용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영성은 마음자세로써, 당신은 그것을 어디서든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사람에게 모욕을 주는 행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즉시 조심스런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자제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화가 날 만한 상황과 마주친다해도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안 돼, 이건 올바른 방법이 아니야.” 사실 이것이 진정한 영적인 수행입니다.4) 4)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달라이 라마·하워드 커틀러 지음, 류시화 옮김, 김영사, 2001, p.330.

기도와 염불이 불·보살에게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불·보살의 삶의 궤적을 이해하고 그것을 따라 실천하겠다고 하는 신념을 확인하고 굳세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기복의례에서 반드시 관법수행을 넣어야 한다.

특히 존재의 고통에 대해, 어떤 고통들이 존재하고 있는지 기도할 때마다 낱낱이 스스로 명상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을 내가 경험하고 있다면 그 고통을 대신 받고 모든 다른 존재들이 행복해 지기를 염원하는 명상을 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기존의 기복의례의 내용과 형식을 개선하는 것과 함께 새로운 신행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침 따로, 생활(삶) 따로’하는 식의 신행이 극복되고 어떻게 하면 가르침과 생활(삶)이 일치될 수 있도록 할 수 있겠는가 하는데 대해 깊은 연구와 사색이 필요하다.

이러한 고민을 진전시키기 위해 필자는 가정, 직장, 종교생활의 현장에서 어떻게 불교적인 심성을 고양하고 실천할 것인가 하는데 대해 깊이 있고 구체적인 사색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인의 삶의 1/3 이상은 생계활동에 쓰인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직장생활은 생계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사회를 위한 헌신과 봉사의 수단이기도 하며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는 팔정도의 정명생활을 좀더 폭넓고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정명생활을 바른 직업을 선택하는 문제를 뛰어 넘어 바른 직업적 사명을 가지고 직업활동에 임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이러한 직업활동의 자세는 현대사회의 직업윤리에도 알맞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가정교화에 매우 시급하고 비중 있는 고민을 해야 한다. 부부, 노인, 자녀문제는 이미 우리 사회의 매우 근본적이고도 비중 있는 사회문제가 되었다. 가족공동체의 문제를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건강한 가족생활이 영위될 수 있도록 깊이 있는 상담과 실천 방법들이 제출되어야 한다.

끝으로 종교생활의 공동체성을 강화해야 한다. 지금의 종교활동 조직들을 실질적으로 공동체 성원들이 종교적 체험을 나누고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조직체들로 촘촘하게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최대한 생활적인 단위(지역적 고려)가 되어야 한다. 사찰과 사찰의 법회 및 의례는 이와 같은 작은 조직체들의 활동을 돕고, 중요한 경험들을 총화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사회현상과 과학적 성과에 민감하기

기복불교의 극복을 위해서 교계 차원에서 반드시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현상에 대해 매우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진단하기 위한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심리학(정신과학), 의학을 비롯한 제반 과학적 성과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바르게 수용하기 위한 체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육체적 안락과 물질적 풍요가 영원한 행복이 될 수 없으며,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의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다양한 사회현상들을 들어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발전된 과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구체적 사실에 대한 구체적 설득력이 없는 가르침은 이미 화석화된 교의의 동어반복 밖에는 되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는 “과학이 불교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 다른 사실들을 증명해낸다면 불교는 (과학의 발견에 맞게) 달라져야 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2002년 우리나라에서 자살로 죽은 사람의 숫자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자살률은 10년 만에 두배 이상으로 늘어나 사망자 1백 명 중 4명(3.5%)이 자살로 숨지고 있다. 자살로 죽는 비율이 교통사고로 죽는 경우보다 많아졌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 회원국 중 4위로 올라갔다.

0만 명당 사망자를 따지는 사망률로 보면 지난해 자살은 19.13명으로 92년(9.7명)보다 두배 이상 늘었으며, 특히 교통사고 사망(19.12명)보다 처음으로 많아졌다. 20대와 30대는 자살 사망이 많아 사망원인 2위를 차지했다. 10년 전 30대 자살은 사망원인 5위였으나 지난해엔 2위로 올랐다. 국제적으로 따져도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높다. OECD 회원국 중 우리보다 자살률이 높은 곳은 헝가리, 핀란드, 일본뿐이다. 그리스는 10만 명당 자살자가 3.2명 밖에 안된다. 멕시코(3.8명), 폴란드(4.5명)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낮다.

콤튼전자백과사전(Compton’s Encyclopedia Online) 1998년 자료에 의하면 미국 인구의 16∼25%가 250종류가 훨씬 넘는 수많은 형태의 정신병(Mental Illness)을 앓고 있다. 그러나 이 수치조차도 신고되어 밝혀진 숫자에 불과하다. 실제 정신병을 앓는 숫자는 공식수치보다 훨씬 높다고 한다. 또한 미국의 경우 ‘졸루푸트’라는 우울증 치료제가 한국의 ‘우루사’나 ‘훼스탈’만큼 유명하고, 일반적인 약품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겪고 있는 정신질환은 매우 폭넓다는 것을 말해준다.

미국의 한 제약업체에 따르면 “전세계에서 신경정신계통의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인구는 약 15억명”이라고 밝힌 적도 있다. 또한 신경정신과 전문의들은 점술 맹신이 일종의 정신병이며 지속될 경우 중독성을 띤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런 사회현상들은 경제적 풍요가 곧바로 인간을 행복으로 이끌지 않으며, 그러한 경제적인 풍요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았을 때에 오히려 그로 인해 불행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한국불교 내에서 공공연히 허용되고 있는 점술에 대해서도 선진국에서는 점술맹신을 이미 정신병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점도 기복불교를 치유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더불어 명상과 남을 돕고 이해하는 행동이 건강지수와 행복지수를 높인다는 수많은 임상실험과 연구결과들도 나오고 있다. 이런 사회현상과 정신의학 등의 성과들은 구체적인 증거들로서 기복불교를 치유하고 참다운 행복으로 인도하는데 훌륭한 사례들로 대중교화에 설득력을 더해 줄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 편의 게송

참다운 행복은 어떻게 달성될 수 있는 것인지, 고통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인지 깊이 사유해보자. 기복불교의 극복은 기복불교 행위를 한다고 지목되고 있는 불자들이 어떤 삶의 상황에 처해 있는가 하는데 대한 주의 깊은 탐구와 사유를 통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신념이다. 어떤 경전 하나를 위경이라고 지목하여 퇴출시킨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기복의례 행위에 대해 종교적 양심에서 볼 때 갖가지 부정직한 언설로 이를 변호한다고 해서 나아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를 염두에 두고, 여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류의 두 성인의 게송으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 부처님께서는 수행을 통하여 부처님을 이루시는 순간 다음 게송 두 편을 읊으시었다.

    “한량없는 생사윤회 속에서
    집을 짓는 자5)가 누구인지 알려고
    찾다 헤매다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태어났나니 이는 둑카였네.6) 5) 집을 짓는 자 : 집은 인간을 구성하는 네 가지 원소, 즉 지·수·화·풍의 사대와 오온을 가리킨다. 그리고 집을 짓는 자, 즉 목수는 욕망·갈망·애착·집착 따위를 비유하신 것이다. 6) 둑카 : 고(苦), 고통.

    아, 집을 짓는 자여! 나는 이제 너를 보았노라!7)
    너는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8)
    이제 모든 서까래9)는 부서졌고,
    대들보10)는 산산이 조각났으며,
    나의 마음은 닙바나11)에 이르렀고,
    모든 욕망은 파괴되어 버렸느니라.”7) 집을 짓는 자를 봄 : 내적 현상의 관찰을 통하여 모든 고통의 원인이 욕망과 갈망임을 봄. 8) 집을 짓지 못함 : 윤회의 원인이 되는 갈망을 쉬었으므로 깜마(업)가 남지 않아 다시는 사대 오온의 몸과 마음을 받지 않는다.9) 서까래 : 번뇌를 가리킴.10) 대들보 : 근원적인 어리석음(無明)을 가리킴.11) 닙바나 : 니르바나, 열반.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 때, 외도 수행자 악기땃따와 관련하여 게송 188∼192번을 설법하시었다.

    “위험과 두려움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산이나 나무, 숲이나
    성스럽다는 수도원 따위를 찾아가
    그곳을 의지처로 삼으려 한다.

    그런 곳은 안전한 의지처가 아니다.
    그런 곳은 으뜸가는 의지처가 아니다.
    설사 그런 곳을 의지처로 삼더라도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누구든지 붓다(佛)와 담마(法)와
    그리고 상가를 의지처12)로 삼으면
    맑고 올바른 지혜로써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보게 된다.12) 의지처 : 위의 세 가지를 삼보(三寶)라 한다. 그러나 이 의지처가 최후의 의지처는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160번 게송(진정 자기야말로 자기의 의지처 / 어떻게 남을 자기의 의지처로 삼으랴? / 자기를 잘 단련시킴으로써만 / 자기를 의지처로 만들 수 있는 것. / 이는 실로 성취하기 어렵다)에서 보듯이 진정 자기야말로 자기의 의지처인데 달리 누구를 의지할 수 있으랴 하시었다.

    둑카의 현존의 진리
    둑카의 원인의 진리
    둑카의 완전한 소멸의 진리
    둑카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의 진리.

    이것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의지처
    이것이야말로 가장 으뜸가는 의지처
    이것을 의지처로 삼았을 때
    비로소 그는 모든 둑카로부터 해탈하리.”

    마태복음 5 : 3-10 , 여덟 가지 행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해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基業)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
    긍휼(矜恤)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13)13) 《빅라이프성경》, 빅라이프성경편찬위원회, 기독지혜사(주), 1998.

 

윤남진동국대 졸업. 1994년 실천불교승가회 간사, 1995년 전국불교운동연합 사무처장, 1997년부터 1999년까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에서 종무원 역임. 현재 참여불교재가연대에서 기획실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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