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교생태학을 위하여

생태학(ecology)이라는 단어를 핵켈(Haeckel)이 1866년 《일반형태학》이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사용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다윈의 《종의 기원》에 나온 ‘자연의 경제학’이라는 개념이었다.

자연의 경제학이란 ‘동물과 그 주변의 유기적이고 무기적인 환경과의 총체적 관계에 대한 연구’라고 정의된다. 이런 자연의 경제학으로서의 생태학을 달리 말하면 ‘일정한 환경 내에서 생물군 또는 생물군 집단의 풍부성·분포 그리고 그 상호연관성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좀더 간단히 말하면 ‘생명체와 주변 환경과의 상호관계를 연구하는 학문’ 또는 ‘생태계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학문’이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생태학이 상관성이나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성립된 학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상호의존성으로 인해 생태학의 학문 성격도 상당히 종합적이고 학제적인 특징을 갖게 된다.

이 때 생태계란 생물과 환경간의 상호작용 체계를 뜻하며, 이 생태계는 상호의존성에 기초한 순환성과 항상성을 그 구조적 본질로 한다. 그런데 불교 사상의 본질 역시 비실체적(空) 상호의존(緣起)과 그로 인한 상호존중(慈悲)에 있는 바, 그런 상호의존성을 통해 조화롭게 성립된 세계를 법계(法界)라고 부른다.

이처럼 상호의존으로 인한 상호존중이기에, 불교는 일체 중생에 대한 비폭력(不殺生)과 생명해방(放生)을 지향한다. 따라서 불교생태학(Buddhist Ecology, Budh-Ecology, Eco-Buddhism)이란, “상호의존과 상호존중이라는 연생(緣生)과 상생(相生)의 불교정신에 입각해 제반 학문들 사이의 연계를 도모하여, 생태계의 구조와 기능을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생태계의 조화와 생명해방을 구현할 수 있는 실천 방안들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불교생태학은 생태계 위기의 궁극적 원인인 실체론적 사고 방식을 불교적 통찰에 의해 깊이 반성하고 해소하기 위해서, 또한 학문들 간의 통합적인 학제 연구를 통해 지나치게 세분화된 분과 학문들을 창발적으로 조화시켜 새로운 차원의 학문 지평을 열어나가기 위해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데, 이것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티의 사유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왜냐하면 생태 파괴적인 모더니티에 대한 비판은 실체론적 사고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고, 이런 반성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는 것이 비실체적 상호의존과 상호존중에 기반한 불교생태학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생태계의 구조와 원리 및 생태계 파괴의 실상과 원인에 대한 탐색을 통해서 불교생태학이 어떻게 심층적 포스트모더니티의 사유와 연결될 수 있는지를 해명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2. 생태계란 무엇인가 ?

생태계(ecosystem)란 에코와 시스템이 합쳐진 말로서, 에코의 그리스 어원 오이코스(oikos)는 집, 가정, 거주지 혹은 넓은 의미에서 ‘삶의 터전’을 가리킨다. 흔히 우리는 환경의 지속가능한 보전을 지향하는 생태학과 환경의 개발로 인한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학을 도저히 조화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다시 말해 경제학은 인간사, 즉 시장의 재화와 용역을 다루는 반면 생태학은 비시장적인 자연환경을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태학(ecology)과 경제학(economy)이 모두 에코, 즉 오이코스에 관한 학문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자는 보다 나은 ‘삶의 터전’을 가꾸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상호 보완되어야 하는 것들이라고 하겠다.

또한 우리는 시스템이라는 말에서 단순히 체계나 조직을 떠올리지만, 현대의 과학에서 시스템은 복잡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질서를 지닌 어떤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복잡하다는 것은 풀지 못한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위 차원에서는 도저히 예견할 수 없었던 것이 상위 차원에서 급격하고도 새롭게 출현하여, 일면적 단순성(simplicity)만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다면적 복잡성(complexity)을 띠는 현상을 가리킨다.

창발(創發, emergence)이라고도 불리우는 이런 돌발적 출현 현상을 우리는 단백질과 세포, 신경세포와 뇌, 개별 생물과 생태계 사이의 관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세포와 뇌와 생태계라는 상위 차원은 각각의 하위 차원을 구성하는 부분적 요소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조화로운 통합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포 내에서 자체적으로 소화하고 분열하는 생활체의 현상은 단백질에 담긴 고분자 화합물이라는 물질적 성질들 그 이상의 것이 되고, 뇌의 심리 현상 전체에서 일어나는 전일적(全一的) 조화는 개별 신경세포가 지닌 전기 화학적 성질들 그 이상의 것이 되며, 생태계 전체에서 이루어지는 환경과의 자기조절적인 조화는 대사와 생식으로 작동하는 개별 생명체들의 유기체적 생사 현상 그 이상의 것이 된다.

이것은 전체는 부분들의 합 그 이상이며, 이처럼 그 이상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창발성에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렇게 자연의 생명 계열이 창발적 복잡성에서 이루어지는 이상, 부분들의 집합이 곧 전체라고 간주하여 부품들의 환원적 조작을 통해 전체를 조작하려는 근대의 기계론적 발상은 더 이상 자연과 생명을 올바로 이해하는 관점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생명의 계열이 그토록 복잡하면서도 전체적으로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며 연결되고 있는 것은, 그런 조화가 성립하고 있는 계열에 속한 수많은 조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의존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생명의 세계에서 그 본질은 이런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에 있으며, ‘생태계’란 이 상호의존성을 바탕으로 적합한 삶의 터전을 이루고자 생물과 그 환경 간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체계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생태계의 본질로서의 이 ‘상호의존성’을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그것이 바로 연기(緣起)이다. 연기(prat┓tyasamutpa칍a)란 세상의 모든 것은 무수한 조건(prat┓tya)들이 서로 화합(sam)하여 발생(utpa칍a)한다는 것을 가리키며, 그러기에 영어로는 interdependence(상호의존성)라고 옮긴다. 그리고 이처럼 ‘여러 조건들이 화합하여 생기한다’는 뜻의 중연화합생기(衆緣和合生起) 속에 이미 상호의존성으로서의 연기와 중생(衆生)이 포함되어 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불교에서는 이런 상호의존성에 의하여 성립된 생명체를 중생이라고 부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세계는 시작도 끝고 없는(無始無終) 직·간접의 조건들(因緣)의 연쇄적 그물망(因陀羅網)으로 표상되며, 길가의 이름없는 풀 안 포기에도 전 우주의 역사가 함장되어 있듯이, 모든 것에는 모든 것이 층층이 겹쳐 융섭하는 것(重重無盡緣起)이 마치 연씨가 서로 겹치는 것과도 같으므로 우주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라고 표현된다.

또한 이런 인드라의 그물망이나 중중무진의 연화장세계를 이루게 하는 원리가 연기이고, 이 연기야말로 삼라만상의 근본 이치로서의 다르마(Dharma), 즉 법(法)이므로, 연기에 의해 성립된 온 생명의 큰 바다를 법계(法界)라고 부른다. 즉 연기라는 원리에 의해 관류되어 있는 세계, 상호의존하여 이루어진 모든 존재자로서의 일체법이 법계(法界, dharma-dha칣u)이고, 이런 연기한 제법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성격, 또는 연기한 모든 존재자를 그렇게 존재하게 하는 원리로서의 연생성(緣生性, prat┓tyasamut-pannatva)은 법성(法性, dharmata?이다.

그리고 이런 법성의 법계를 자연(自然)이라는 한자식 표현에 맞추어 볼 경우 법연(法然)이 된다. 불교적 의미에서 자연은 법연이고, 자연계는 법계이며, 그런 자연의 본성은 연기성으로서의 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인에게서 자연의 본성이 제작성(고대)과 창조성(중세)과 기계적 인과성(근대)이고, 도가에서는 무위자연성(無爲自然性)인 데 비해, 불교에서는 무상성(無常性, anityata?과 무아성(無我性, ana칣matva)과 공성(空性, s큨칗yata?을 특징으로 하는 상호의존성, 즉 연생성이 자연의 본성(법성)인 것이다. 이러한 연생성으로서의 법성이야말로 모든 존재자의 있는 그대로의 실태를 보여주는 것이므로 제법실상(諸法實相, dharmata?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하나의 일치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생태계와 법계가 그 본질을 상호의존성과 연기성으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의 종합 과학으로서 생태학이 발견한 세계인 생태계는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한마디로 법계이다. 생태계가 곧 법계라는 것은 현대의 절박한 화두인 생태계의 파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불교가 기대 이상의 바람직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아울러 불교와 생태학이 각자의 영역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공유함으로써, 생산적 만남을 향한 건전한 출발점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고 볼 수 있다.

3. 생태계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

생태계란 생물과 그 환경 간의 상호작용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생태계는 ‘생물’이라는 생물학적 구조와 생물을 제외한 ‘환경’이라는 무생물학적 구조로 구성되는데, 무생물학적인 ‘환경’은 물이나 흙이나 공기 중에 들어 있는 각종의 원소들과 온도변화나 습도나 태양광선 등의 기상학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생물’은 식물과 동물과 미생물로 나누어지며, 이것들은 다시 생태계 내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따라 생산자와 소비자와 분해자로 나뉜다.

여기서 생산자(producer)란 광합성 작용을 하는 식물들을 가리킨다. 식물은 광합성 작용을 통해 태양에너지를 이용하여 무기물로부터 유기물을 만들어내고, 호흡작용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한다. 이처럼 유기물과 산소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식물을 일러 ‘생산자’라 하는 것이며, 식물이 생산한 유기물과 산소는 동물이나 미생물의 중요한 에너지원이 된다. 식물이 이렇게 생산자인데 비해, 동물은 그런 생산물을 사용하는 ‘소비자’(consumer)이다.

소비자인 동물은 스스로 유기물을 합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필요한 영양분을 외부로부터 섭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즉 일차 소비자인 초식동물은 식물을 뜯어 먹음으로써, 이차 소비자인 육식동물은 다른 동물들을 잡아 먹음으로써, 그리고 최종소비자인 잡식성 인간은 동물과 식물을 모두 먹음으로써 유기물 등을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소비자의 이런 섭취 구조는 동물이 지닌 일종의 생물학적 업보(業報)라고 할 수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 이외의 제삼의 요소가 ‘분해자’(decomposer)이다. 분해자에는 세균이나 곰팡이나 바이러스 등의 미생물이 속한다. 이들은 생산자인 식물과 소비자인 동물의 사체를 분해하여 유기물질을 무기물로 되돌려 놓는다. 이런 분해자의 역할을 통해 식물은 다시 광합성을 할 수 있는 원료를 마련하여 유기물을 또다시 생산해낸다.

이렇게 볼 경우, 생산자와 소비자와 분해자 각각이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때 생물군집이라는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며, 생물학적 요소들이 생산-소비-분해의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생태계의 모든 물질은 결코 고정되지 않고 순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산자에 의해 흡수 동화된 무기물은 유기물로 합성된 다음, 소비자에 의해 영양 단계별로 이용되고, 그렇게 축적된 유기물은 분해자에 의해 무기물로 환원된 후 다시 생산자에게 흡수되는 것이다.

이것은 생태계의 구조가 생산자-소비자-분해자 사이의 물질적 ‘순환성’과 각 단계 서로간의 ‘상호의존성’으로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분해되지 않으면 생산될 수 없고 생산되지 않으면 소비될 수 없다는 사실 속에 담긴 순환성과 상호의존성이 생태계의 구조적 원리인 것이다.

생태계의 구조 속에 담긴 상호의존성의 원리는 생물이 환경과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지구상에 생물이 살기 좋도록 스스로 안정된 체계를 이루어왔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지구 탄생 초기의 원시 대기에는 이산화탄소가 98%를 차지하고 있었고 산소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으나, 현재의 대기 중 이산화탄소는 0.03%로 급격하게 줄어든 반면 산소는 21%로 크게 늘어났다.

이런 엄청난 변화는 대륙의 형성과 아울러 생겨난 석회암층이 이산화탄소를 가두어 두었고, 바다 속의 원시미생물이 산호초를 형성함으로써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식물이 탄생하여 광합성 작용과 호흡작용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하는 일 등을 계속해 왔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약 6억 년 전에 형성된 현재의 산소 농도 21%는 그 후 약 1억 9천만 년 전에 포유동물이 출현하고, 그 후 약 10만 년 전에 현대인과 유사한 네안데르탈인이 나온 뒤에도 흔들림 없이 균형을 유지해 오고 있다. 이것은 생물이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의 형성을 위해 자기를 조절하여 항상성(homeostasis)을 유지해온 결과이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생태계의 구조적 원리가 순환성과 항상성에 있고, 이 양자는 상호의존성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 즉 생명 과정들 상호간의 의존성이야말로 모든 생태적 관계의 본질이다. 생태적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생명의 그물(web of life)이라고 하는 거대하고 복잡한 관계들의 연결망(network) 속에서 상호 관련되어 있다.

그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본질 자체를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획득한다. 다시 말해 한 개체의 고유한 본질이란 원래부터 타고난 자기만의 불변적인 어떤 것(essence)이 아니라, 전체 네트워크상의 함수(function) 관계 속에서 시공적 인연에 따라 설정되는 잠정적인 어떤 것(prajn쁝pti, 假施設)이다. 따라서 개체 속에 전체가 반영되어 있고, 전체 속에서 개체는 각각의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즉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여럿 가운데 하나가 있는 것이다.(一中一切多中一) 이처럼 상호의존성에 입각해 부분과 전체가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생태계이다.

그런데 상호의존성이므로 순환성과 항상성이 된다는 원리를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연기(緣起)이므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는 것이 된다. 즉 모든 것은 무수한 조건들이 서로 의존 화합하여 성립하는 것이므로, 전혀 새로운 것이 생겨나거나 완전히 사라져 없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반복 순환하는 것이며, 더 늘어나거나 더 줄어듦 없이 그 관계의 그물망 전체는 언제나 평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을 《반야심경》에서는 “이 모든 사물의 형상이 공하니 생겨나지도 소멸하지도 않으며,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增不減)고 표현한다. 이에 대해 《반야심경주해》에서는 “제법의 당체가 곧 진공실상임을 알았으니…… 생멸이 없거늘 …… 어찌 증감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무자성(無自性)의 공이어서 불생불멸이고 부증불감이라는 것, 즉 비실체성이기에 순환성과 항상성이 성립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일체법에는 고정된 자성이 없어(無自性) 공(空)하다고 하는데, 이는 불변적 실체성에 대한 부정임(破邪)과 동시에 상관적 연계성에 대한 긍정(顯正)이다. 이처럼 연기와 공이기에, 즉 상호의존성과 비실체성이기에 순환성과 항상성이 생태계의 구조적 본성을 이루며, 생태계를 불교적으로 표현하여 법계(法界)라고 하는 것이다.

특히 연기는 곧 무아이고 무자성의 공이라 하여 상호의존성을 비실체성의 관점에서 해명하는 것은 상호의존성이라는 원리를 매개로 하여 불교와 생태학을 만날 수 있게 해줌과 아울러, 상호의존성의 원리를 비실체적 사유(→ 空觀)라고 하는 현대철학의 주류 경향 속에서 심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생태계는 얼마나 파괴되었는가?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 사물을 구성하는 궁극적 요소들로 흙·물·불·공기의 네 가지를 들었다. 만물의 아르케(arche? 原質)라는 개념으로 비로소 신화(mythos)의 시대에서 이성(logos)의 시대의 길을 연 그리스인들 중에서 탈레스(Thales)는 그 아르케를 물로,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그것을 공기로,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는 그것을 불로, 엠페도클레스(Empedokles)는 그것을 물·공기·불·흙의 4원소로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인들과 언어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상당한 친연성을 지닌 인도 아리아인들도 이들 네 가지 원소를 만물의 구성 요소로 삼았으며, 인도에서 출현한 불교에서는 그 네 가지를 사대(四大)라고 표현하였다. 단단함(堅)을 본질로 하는 지대(地大)는 만물을 떠받치고, 축축함(濕)을 본질로 하는 수대(水大)는 만물을 포용하며, 따뜻함(煖)을 본질로 하는 화대(火大)는 만물을 타오르게 하거나 무르익게 하고, 움직임(動)을 본질로 하는 풍대(風大)는 만물을 생장시킨다. 이처럼 자연계의 생장·유지·소멸 등이 사대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런 자연계의 오염이나 파괴 역시 사대 요소와 관련하여 분석해 볼 수 있다.

지대(地大)와 관련한 자연 생태계의 파괴는 토양오염으로 나타난다. 토양오염이란 토양에 중금속과 화학물질이 축적되어 생물의 생장에 피해를 주는 것, 또는 토양이 산성화·침식·사막화됨으로써 물리·화학적으로 변화하는 것 등을 말한다. 토양은 중금속을 고정시키는 특성이 강해 중금속이 일단 유입되면 그것을 축적시키고, 그렇게 축적된 중금속은 식물에 쉽게 흡수되어 식물 세포의 기능을 저하시키며 그런 식물을 섭취한 인체에도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또한 대기 중의 산성비는 토양내의 수소 이온의 농도를 증가시켜 대지를 척박하게 만들고, 산림의 벌채로 인한 홍수의 유발과 경작용 화학 비료의 남용은 토양의 구조를 약화시켜 표토의 침식을 가속화시킨다. 아울러 과다 방목으로 인한 초원의 상실은 건조 기후 지대의 토지를 사막화시키고, 이 때 발생한 흙먼지는 황사라는 형태로 광대한 주변 지역의 대기를 오염시킨다.

수대(水大)와 관련된 자연 생태계의 파괴는 수질오염으로 나타난다. 바다와 육지를 포함하여 지구상 총 물의 양은 14억km3이고, 이 중 인간이 개발하여 사용가능한 하천수의 양은 약 9,000km3이다. 이것은 비록 지구 표면상 물 총량의 0.0006%에 불과하지만, 최소한 200억 명 이상의 인류가 사용해도 충분할 정도로 많은 양이다. 그러나 물의 분포와 인구의 분포가 세계적으로 고르지 못하기 때문에, 일일 평균 물사용량이 미국은 7,200리터인 반면 인도는 25리터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수자원에서도 심한 빈부의 격차가 일어나게 된다.

게다가 급속한 산업화와 인구의 증가는 물 부족을 심화시킴과 동시에 수질을 악화시킨다. 생활용수와 농업용수와 산업용수로 공급된 물은 거꾸로 하수와 폐수가 되어 수자원의 질을 심각하게 떨어뜨린다. 또한 처리되지 않은 하수의 배출과 선박에 의한 기름의 유출은 해안선을 더럽히고, 해양동물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기도 한다.

풍대(風大)와 관련한 자연 생태계의 파괴는 대기오염으로 나타난다. 대기오염의 주범은 스모그와 산성비이다. 화력발전소나 공장 등에서 배출된 황산화물과 자동차 배기가스로 배출된 질소화합물 등이 원인이 되어 형성된 스모그는 호흡기 질환을 유발시켜 사람들을 사망에까지 이르게 한다. 또한 석탄이나 석유의 연소로 배출되는 아황산가스는 대기 중에서 산소나 수증기와 작용하여 황산으로 변하며, 이것이 빗물을 산성으로 만드는데, 이런 산성비는 토양과 하천을 산성화시켜 숲을 황폐케 하고 물고기를 폐사시킬 뿐만 아니라 교량과 같은 금속 구조물들의 부식을 가속화하는 폐해를 낳는다.

화대(火大)와 관련된 자연생태계의 파괴는 지구온난화로 드러난다. 지구온난화란 온실효과로 인해 지구 표면의 온도가 상승함으로써 기후의 변화 등을 초래하는 것을 말한다. 지구의 대기는 흡수되는 태양복사열은 모두 통과시키는 반면, 반사되어 방출되는 복사열은 일부를 붙잡아 지구에 가두어 놓는데,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을 온실효과가스라 하고, 이런 가스에는 이산화탄소나 염화불화탄소나 메탄가스 등이 있다.

이들 가스는 우주로의 열손실을 막아주는 비닐하우스의 역할을 함으로써 생명활동에 대단히 중요한 기여를 한다. 만약 이런 온실효과가 없다면 지구는 달처럼 표면 온도가 영하 18℃가 되어, 현재의 영상 15℃에 비해 약 33℃나 낮아졌을 것이고, 생명의 출현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급속히 산업화된 오늘날 이산화탄소 등의 대기 중 농도가 급격히 증대되어, 온실효과가 자연적 수준 이상으로 강화됨으로써 각종의 기상 이변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현재의 속도로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이 증가한다면, 2030년경에는 평균 기온이 1.8℃ 상승하고 해수면은 18㎝가 높아져 세계 인구의 1/3이 그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지대 수대 풍대 화대가 결합하여 색신(色身) 또는 유기체로서의 생명체를 형성하는데, 이와 관련된 자연생태계의 파괴는 생물종 다양성의 감소로 나타난다. 지구상의 생명체들은 35억 년 이상 지속된 진화의 소중한 산물들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지구상의 생물종의 수만도 약 175만 종이며, 일부 과학자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생물종의 수가 1,300만 종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하기도 한다.

진화의 역사를 통해서 많은 종들이 사라지고 생겨나기도 하지만, 현재 생물종은 정상적인 속도에 비해 50∼100배 정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현대 34,000여의 식물종과 5,200여의 동물종 그리고 전 세계 조류의 1/8이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으며, 더욱이 생물종의 보고인 지구 원시림의 45%와 가장 풍요로운 생태계의 하나인 산호초의 10%가 파괴되고 있다.

열대우림은 지구 육지 면적의 6%에 불과하지만, 지구 생물의 1/2이상이 집중적으로 서식하고 있으며, 지구 전체 산소량의 1/4을 생산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산업용 벌목이나 원주민의 경작으로 인해 지구 전체 열대림의 1%에 해당하는 76,000km2가 매년 사라지고 있고, 그 결과 생물종의 감소뿐만 아니라 지구의 온난화도 가속되고 있다.

우리가 이런 파괴를 억제하고 생물종의 다양성을 높여야 하는 이유는, 인류가 다양한 생물종으로부터 이익을 취할 수 있다거나, 종 다양성이 국가의 전략 자원이기에 보존되어야 한다거나, 풍요한 자연이 우리에게 심미적·정서적으로 가치를 지닌다고 하는 등의 인간중심적 관점 때문만이 아니다.

진정한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우선 생태계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일례로 공중 질소를 고정시키는 뿌리혹박테리아를 지닌 식물이 사라진다면, 지구 전체의 질소 균형이 깨질 것이고, 광합성 작용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식물종들이 감소한다면, 이산화탄소의 소비 둔화로 인해 온실효과가스층의 역할이 강화됨으로써 지구온난화를 가져와 생태계의 평형을 깨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생물종의 감소를 방지해야 하는 참다운 이유는, 모든 생물이 그 자체의 존재 이유를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나무가 도덕적 지위를 갖는가? 나무는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이것은 권리(right)란 ‘침해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법적 주장’을 의미하고 따라서 자기 주장을 펼 수 있는 능력(이성)을 지닌 자만이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으므로, 이성을 갖지 않은 식물 등은 보호받을 권리도 없다는 주장과 관련된 물음이다.

그렇지만 한 생물의 존재 이유는, 그것이 이성의 권리를 지닌다거나 신의 피조물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인간중심주의나 신중심주의라고 하는 특정한 중심을 전제해 놓은 발상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생명체는 수많은 조건들 간의 수억 년에 걸친 상호의존성의 산물로서, 이렇게 역사성과 상관성을 띤 그 고유한 산물을 그 누구도 현 찰나의 자기만의 입장에서 침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상호의존이기에 상호존중해야 한다는 것이고,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연기이므로 자비이고 그래서 불살생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상에서본 것처럼, 사대(四大)가 화합하여 색신(色身)을 이루듯, 사대적 요소가 상호작용하여 자연 생태계를 이루는 것이지만, 산업화와 인구증가 그리고 그로 인한 욕망의 증폭으로 인해 사대의 요소 각각이 오염됨으로써 생태계 전체의 안정이 위협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생태계는 왜 파괴되었는가?

지구의 생태계가 심하게 파괴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여기서 생태계의 파괴란 사대(四大) 중 지(地)와 관련해서는 토양오염으로, 수(水)와 관련해서는 수질오염으로, 풍(風)과 관련해서는 대기오염으로, 화(火)와 관련해서는 지구온난화로, 색신(色身)과 관련해서는 생물종 다양성의 감소 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생태계의 파괴를 그 기능면에서 보면, 상호의존성에 의한 순환성과 항상성이라는 생태계의 본질적 기능이 흔들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태계가 파괴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생태학에서는 그 주원인이 산업화에 있다고 본다.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여파는 19세기 중엽이 되면 서유럽 대부분의 국가로 퍼져가게 된다. 그리고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는 이런 산업화의 누적된 힘을 바탕으로 서구의 제국주의가 비서구의 지역들을 식민지로 삼게 되자, 이들 지역은 다시는 종속의 굴레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산업화를 국가의 최우선적 목표로 추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오늘날 서구나 비서구를 막론하고 산업화는 국가 발전의 선·후진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산업화에는 인구의 증가와 도시화라는 문제가 수반되고, 이들 현상은 서로 상승작용을 하면서 오염물질의 배출을 극대화한다는 점이다.

산업화가 인구의 증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은 산업혁명을 전후한 시기의 인구의 변화에서 확인된다. 1650년 당시 5억 명이던 세계인구는 서유럽에서 산업혁명의 기운이 절정을 고하던 1850년에는 그 배인 10억 명이 되었고, 산업혁명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인 1930년에는 20억 명, 1975년에는 40억 명에 이르렀다. 이것은 5억 명이 10억 명과 20억 명 등 매번 배가 될 때마다 걸린 시간이 각각 200년과 80년과 45년 등으로 급속도로 단축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인구의 이런 급속한 증가는 개인당 자연재의 소비량을 증대시켜 처리곤란한 폐기물의 양을 증폭시킴으로써 각종의 수질오염과 토양오염을 가져오며, 늘어난 인구를 먹여 살릴 경작지의 확보를 위해 산림을 벌채함으로써 토양의 침식과 아울러 결과적으로 이산화탄소량의 증가를 유발했다.

또한 산업화는 생산 현장에 노동자를 쉽게 공급하고 소비 시장에 좀더 용이하게 접근하기 위해 도시로의 인구 집중을 불러오는데, 도시의 이런 비대화는 상·하수도 및 쓰레기 등 환경비용을 증가시키며, 도시와 공장의 기본 에너지인 화석연료를 연소시킬 때 나오는 이산화탄소와 아황산가스 등은 대기를 오염시키고 지구의 온난화를 가속화시켰다.

도시화로 인한 비용 증가에 관해서는 소위 연결망 법칙(network law)에 의해 잘 밝혀진다. 이 법칙에 따르면 도시 개발의 규모가 두 배가 되었을 때, 그 유지 비용은 네 배로 증가하게 된다. 다시 말해 산업화로 인해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이미 개발된 것을 유지하기 위해, 즉 높은 에너지계에서 나타나는 무질서를 몰아내기 위해, 사회봉사부문(상·하수도, 교통, 치안, 보건)이 더욱더 많은 에너지와 비용을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산업화가 환경오염의 주범이라는 말인데, 모든 것이 그러하듯 산업화도 역시 인간의 일이고 보면, 생태계 위기의 보다 심층적인 원인은 산업화 자체보다는 그런 산업화를 낳은 인간의 사고방식이나 인간 사회의 구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생태계 위기의 원인을 보는 시각의 차이에 따라, 기존의 서구 생태사상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심층생태론(deep ecology)에서는 생태 위기의 원인이 근대 산업문명의 세계관이나 형이상학에 있다고 보아, 오염과 자원 고갈이라는 국민 이익의 관점에서 환경 보호를 주장하는 피상적 생태론(shallow ecology)과 자신을 엄격하게 구별한다. 심층생태론은 인간중심주의와 환원주의와 기계론과 개체주의와 진보사관 등을 비판하면서, 탈인간중심주의와 생명중심주의와 관계론과 전체론과 다양성 등을 적극적으로 강조한다.

심층생태론이 상당히 철학적인 입론인데 비해, 사회생태론과 생태여성론은 인간 사회의 구조, 즉 ‘지배’라는 사회적 유형에 주목한다.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라는 관념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에 뿌리를 둔다.”는 북친(Bookchin)의 말을 기본 신조로 하는 사회생태론(social ecology)은 지배의 주요 유형으로 자본주의와 관료주의와 국가주의와 인종주의 등을 꼽는다.

그리고 고도의 위계가 존재하는 사회가 자연을 학대하고 파괴할 가능성도 그만큼 높다고 본다. 생태여성론(eco-feminism) 역시 ‘지배’라는 사회적 유형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지배의 주요 유형은 여성의 억압이다. 그들은 여성의 억압과 자연의 억압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 관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관계의 기본 모델이 지배의 모델인 사회에서는 여성의 해방도 생태 문제의 해결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마치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와 같은 것이므로, 여성은 자연의 대변자로서 돌봄의 윤리(ethics of care)의 주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산업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고방식과 인간 사회의 구조 유형은 ‘심층형태론’과 ‘사회생태론-생태여성론’ 간의 차이처럼 그렇게 괴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인간이 산업에 의해서 생산성의 증대를 가장 잘 보장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신조를 산업주의(Industrialism)라고 한다. 이런 산업주의의 사고방식에서는 생산성의 증대를 최상의 가치로 여기며, 인간이 중심에 서서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것을 당연한 소명으로 간주한다. 생산성의 증대를 무한히 추구한다는 것은 고효율의 생산성을 통해 확보된 재화를 소유함으로써 욕망의 충족을 끝없이 보장받으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산업주의의 시대에 행복의 달성은 소유와 욕망의 무한증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식의 행복은 인간의 뛰어난 계산적 사유능력인 이성의 발휘에 의한 것이므로, 산업주의적 행복을 더욱 잘 보장받기 위해서도 이성을 지닌 인간이야말로 세상의 중심이라는 인간중심주의의 신화는 더욱 강화되고, 그런 이성의 위력 앞에 자연은 자신의 모든 것을 제공해야 한다는 오만한 지배의식은 더욱더 힘을 얻는다. 그리하여 산업주의적 사고방식은 이성을 통해 지배를 조장함으로써 산업사회의 구조를 지배를 위한 위계(hierarchy)의 구조로 고착화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이성은 실제로는 서구의 백인 남성의 것이었으므로, 자연과 더불어 비서구와 유색인과 여성도 착취와 지배의 대상이 되는 총체적 제국주의가 문명의 표징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총체적 제국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고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해야 한다는 믿음을 전혀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인다는 점에서는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생산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을 개인적으로 소유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으로 공유할 것인가에서 달라지는 것으로서, 단지 생산성의 실현방식에서만 차이나는 것, 따라서 생산성의 증대를 목적으로 하는 산업주의의 이란성 쌍생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6. 포스트모더니티로서의 불교생태학?

이렇게 소유와 욕망의 무한증대를 갈구하는 탐욕,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양분을 조장하는 분별심, 서양과 백인과 남성이 중심에 서서 지배해야 한다는 왜곡된 인간중심주의의 아집 등이야말로 이른바 근대성의 대표적인 특징들이다. 근대성(modernity), 즉 ‘근대라는 시대의 본질’은 이성을 척도로 하여 인간과 자연, 남성과 여성, 주체와 객체, 지배와 종속, 중심과 주변 등을 나누는 소위 ‘합리적 구분 도식’(rational division schemata)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런 근대의 기본 도식은 서구의 생태사상에서 주장하듯이 생태계 위기의 최종 근원이 아니라, 실체론적 사고(substantial thinking)라고 하는 서양적 사유의 좀더 뿌리깊은 근원에서 나온 파생물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서양철학은 가변(可變)과 가멸(可滅)과 가사(可死)의 현상 세계를 넘어 불변(不變)과 불멸(不滅)과 불사(不死)의 본체 세계로의 초월 충동[eros]이다. 이런 초월 작용을 logos[신의 말씀, 인간의 이성, 자연의 법칙]의 파악을 통해 수행한 후, 그 로고스를 무기로 삼아 거꾸로 현상의 세계를 지배 관리함으로써 유한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고자 하는 장치가 바로 실체(substantia, ousia)이다.

실체는 자기 존재와 지속 존재를 함축한다. 전자는 개체의 독립성을 통해 분리가능성을, 후자는 본질의 영속성을 통해 불변성을 각각 확보한다. 이제 불변적 본질을 사유할 줄 아는 능력[이성]을 지닌 인간[남성, 백인]이 ‘중심’과 ‘주체’가 되어, 그렇지 못한 인간[여성, 유색인]과 자연을 ‘주변’의 ‘객체’로 삼아 지배하고 종속화시킨다. 아울러 이렇게 타자화된 객체를 더욱더 효과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인간은 개인으로 자연은 원자로 분할된다.

그리하여 인간과 자연은 각각 분할되고 분열되어, 인간은 소외되고 자연은 파괴된다. 이처럼 신의 이념을 향한 목적론적 통합에 의해서가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기계론적 분할에 의해서 지배와 장악을 기획하고,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이성적 인간이 주인으로서의 주체가 되어 그런 지배를 수행하는 것이 곧 중세성에서 벗어나고자 한 근대성의 핵심이다.

그래서 현대의 생태사상가들은 자연과 인간의 이런 분화를 극복하고자 생태과학이 제시하는 상호연관성의 사례들을 수집하는 데 열을 올린다. 그러나 그들은 생태계 위기의 진정한 근원이 인간과 자연의 근대적 분리보다 더 깊은 곳[실체론적 사고의 전통]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더욱이 자신들이 신봉하는 상호연관성의 원리가 비실체적 사유를 통해서만 철학적으로 확립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중관 불교가 연기를 무자성의 공으로 해석한 이래로, 상호의존성(緣起)이 실체(自性)의 부정(空)을 전제한다는 것은 거의 모든 불교 사상의 상식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그렇지가 못했다. 아직까지도 서양에서는 생태과학의 상호연관성 개념과 현대 철학의 실체 비판적 경향이 공동의 장에서 논의되는 융화의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연기와 공의 입장에서 보자면, 실체란 경험이라는 단일의 사건을 분리된 별개의 실재물로 간주하는 데서 생겨난 것이고, 본질이란 자기만의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의 총체적 관계 속에서만 주어지는 가립태에 불과하다. 이렇게 실체와 본질이 무력화되는 곳에서는 어느 것도 중심임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그 어떤 이분적 대립의 도식도 성립함 없이, 부분과 부분이 전체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이처럼 연기와 공에 입각해 전체를 조화로운 하나로 보는 관점[全一觀, 一心]이야말로 실체론적 사고에서 나온 분할과 지배의 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참다운 생태학적 지혜인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생태사상이 제시하는 위기의 근원을 더욱 심화시켜, 일체를 실체화하는 이성적 사고를 넘어서 비실체론적인 생태학적 지혜(eco-sophia, eco-prajn쁝?를 창출하는 생태철학이 필요한데, 이렇게 일종의 ‘심층 생태철학’(deep eco-philosophy)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바로 불교생태학이다. 왜냐하면 연기와 무아와 공을 기본 가르침으로 하는 불교는 비실체론적 사유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것이고, 그렇다면 불교 사상이야말로 상호연관성이라는 생태 과학의 중추 개념을 비실체론이라는 철학적 맥락으로 심화시켜 논의할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대안이 되며, 심층 생태철학의 정립은 바로 이런 불교생태학의 수립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실체론적인 생태 지혜의 창출로서의 불교생태학은 포스트모더니티에 관한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post-modernity에서 post는 보통 ‘후기’나 ‘탈’(脫)의 의미로 읽힌다. ‘후기-근대성’은 근대성의 연속을, ‘탈-근대성’은 근대성으로부터의 단절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두 의미는 상당히 상반적이다. 그러나 ‘후기’와 ‘이탈’은 모두 전 시대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포스트의 근원적 의미는 ‘반성’으로 독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럴 경우 포스트모더니티는 근대 철학의 구조 내지 전체 서양 철학의 구조에 대한 반성이 되며, 서양적 사유의 근본 구조가 실체론적 사고에 있는 이상, 실체론적 사고에 대한 통절한 비판으로서의 불교생태학은 근대성 혹은 서양성의 반성으로서의 ‘심층적 포스트모더니티’(deep post-modernity)의 선도적 작업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심층적 포스트모더니티는 단순한 탈근대성을 넘어선다. 소위 탈근대성(post-modernity)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은 근대적 주체의 횡포와 그런 주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동일성(identity)의 이데올로기를 공격하면서, 주체의 죽음을 선언함과 아울러 차이성(difference)의 철학을 복권하고자 한다. 그러나 동일성은 지속 존재의 불변성의 산물이고, 차이성은 자기 존재의 개별성의 산물로서, 모두 실체성의 두 계기에 포함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탈근대론이란 실체성 내에서의 중심 이동에 불과하며, 서양적 사유의 근간인 실체론적 사고의 사정권 속에서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성과 서양성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려면, 실체론적 사고 자체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며, 바로 이 대목에서 비실체론적 사유로서의 불교생태학이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 탈근대론자의 세련된 논변을 더 이상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근대론과 탈근대론 모두를 서양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안목에서 성찰하는 과제가 불교에 요구된다고 하겠다.

심층적 포스트모더니티와 불교생태학에서 공통의 극복 대상이 되는 실체론적 사고는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무명(無明)의 소산이다. 무명이란 세상의 실상과 이치인 다르마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 다시말해 연기(緣起)이므로 무상(無常) 무아(無我)이고 무자성(無自性)의 공(空)이어서 자비(慈悲)이다는 것, 즉 일체가 무수한 조건들에 의해 상호의존하여 성립하므로 영원 불변한 것도 동일하게 남아 있는 자아도 없고 고정된 ‘실체성’도 결여한 것이어서 자기만의 장벽을 허물고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 그것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

그런데 무명에 의해 망각되는 다르마의 실상이 이와 같다면, 자연은 소유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과 배려의 대상이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도 분별과 대립이 아니라 상보와 공존의 관계이고, 시대의 기조도 자기 중심의 배타적 고수가 아니라 어떤 것도 중심임을 강변하지 않음으로써 모두가 중심이 되는 것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불교가 분별을 망상이라 하여 그토록 경계한 것은, 분별은 차별로 이어져 지배와 종속을 낳고 그런 지배를 향한 집착은 진정한 생명성을 갉아먹는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근대적 산업주의에서 이루어지는 분별과 대립과 지배의 사고방식이 자연계와 인간세계의 뭇 생명들을 뿌리째 위협하는 오늘날이야말로 불교의 그런 확신이 지닌 위력을 절감하게 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체의 생명이 위협받는 위기의 원인을 산업화나 근대화가 아니라 실체론적 사고라는 인간의 근본 무명에서 찾는 것이야말로 그런 위력을 평화를 위한 각성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진정한 힘이 될 것이다. 바로 이런 힘을 낳는 진원지에 불교생태학과 심층적 포스트모더니티의 사유가 있다. ■

김종욱
동국대 불교학과 및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동국대 불교학과 연구교수. 논문으로 〈존재론적 차이와 형이상학의 문제〉 등이 있고, 저서로는 《하이데거와 철학자들》 《불교에서 보는 철학 철학에서 보는 불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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