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의 개방성과 친화력에 관한 새로운 실험 ―

이제부터 다루어 보고자 하는 과제는 ‘서구에서의 불교의 미래’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과문함과 여러 가지 제한사항으로 인해 유럽을 포함한 서구사회 전체를 논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 글은 주로 미국사회에서의 불교에 한정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물론 미국이 서구 전체를 대표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미국사회가 서구의 다른 사회를 가늠해 보는 좋은 척도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불교를 놓고 볼 때 미국은 서구에서 가장 대표적인 불교 전파 지역이고, 또한 그 활동도 가장 활발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제와 관련한 좋은 사례연구(case study)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은 불교나 동양학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사람들보다는 일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있는 만큼 가급적 전문적 용어들은 피할 것이며, 또한 특정한 이슈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보다는 개괄적인 접근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미국사회에서의 불교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윤곽을 제공해 보고자 한다.

또한 글의 형식에 있어서도 불교와 미국사회의 상호작용(interaction)을 시대별로 나누어 몽타주 형식으로 서술하려 한다. 이는 글 전체를 서론·본론·결론으로 나누는 일반적인 논문 형식이 갖는 글쓰기의 딱딱함을 지양하고, 보다 자유롭게 미국사회와 불교의 상호작용을 관찰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독립적인 소주제들로 진행해 보고자 한다.

① 문명간의 만남 혹은 충돌
② 폴 캐러스와 스즈키 다이세츠의 만남: 미국불교의 시작
③ 미국불교(1960년대∼1990년대): 불교의 개방성과 친화력에 관한 새로운 실험

이러한 세 가지 주제들은 역사적 전개에 따른 구분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사실은 각각 독립된 주제를 가지고 있는 독립된 글들로서 일종의 옴니버스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각 글의 주제에 따라 제목에 함축된 시대에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넘나들며 서술하게 될 것이다.

1. 문명간의 만남 혹은 충돌

서로 다른 문명이 만나면 충돌하는가?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 교수는 그의 저서 《문명의 충돌》에서,1) 21세기에는 ‘문명간 충돌’(clash of civilization)에 의한 새로운 세계질서가 형성될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이는 지난 20세기가 ‘이념간 충돌’의 세기였음을 다분히 염두에 두고서 예견한 내용이다. 동구권의 경제적 몰락과 구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이념에 의한 냉전체제가 일단락된 지금에 있어서 그의 이러한 직관력은 제법 설득력 있게 보인다. 1) 이 책의 원제는 《문명간의 만남과 새로운 세계질서(Clash of Civilization and Remaking of World Order)》이다.

더구나 냉전 이후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분쟁들, 그리고 1960년대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또 다른 세계대전의 불씨를 계속해서 안고 있는 중동 지역의 분쟁상황을 살펴보면, ‘문명간 충돌’은 단순한 직관적 수준의 예견을 넘어서는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헌팅턴 교수의 예견은 그 설득력만큼이나 오해의 위험 또한 크다. 마치 서로 다른 이념이 공존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로 이어졌듯이, 서로 다른 문명 또한 대립과 충돌로 이어질 것이라고 하는 문명에 관한 일반론처럼 오해되기 쉽기 때문인데, 실제로도 그러한 오해가 많이 발생하는 것 같다. 헌팅턴 교수 자신도 ‘문명간 충돌’이란 말을 상당히 제한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그 자신 또한 서로 다른 문명은 공존과 상생보다는 충돌과 대립이 불가피하다는 ‘충돌’의 역사인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문명 또한 이념과 마찬가지로 자기 충족적이고 배타적·독점적 성격이 있으며, 따라서 서로 다른 문명간의 공존 가능성이나 상생을 위한 스스로의 변화와 동화의 가능성을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20세기 백 년 동안의 이념간 대립이 그랬듯이, 문명 또한 항상 상호 대립적이며, 타자의 긍정은 곧 자기부정으로 이어진다는 대립적 구조의 패러다임이 그의 예견에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충돌’과 대립의 역사인식은 유대-기독교(Judeo-Christian)의 유일신 전통을 가진 서구 문명사의 산물일 뿐, 인류 문명사 전체를 포괄하는 보편적 역사 인식일 수는 없다.

지금의 인터넷이 각 지역 간의 정보를 교환하는 수단이 듯이, 고대에 있어 동서 교류를 가능케 한 것은 바로 실크로드였다. 이 길은 바로 동서문화가 만나는 길이었다. 이 길을 따라 인류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적인 문명 간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바로 인도문명의 산물인 불교와 중국문명의 만남이었다. 불교가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인도문명과 유교, 도교 등으로 대표되는 중국문명은 도저히 그 공통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상호 이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철저하게 현세적이면서 개인보다는 가족이 사회구성의 기초 단위라 할 수 있는 중국문명은 내세적이며 개인적 명상체험을 중시하고, 출가가 제도화되어 있던 인도문명과는 매우 이질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윤회론을 바탕으로 한 인도인들의 내세관을 살펴보면, 현세의 가족구조가 내세에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중국인들의 내세관과 대화 가능한 어떠한 접점도 찾을 수 없다.

중국의 도가사상이 비교적 불교사상과 가깝기 때문에 초기에는 불교와 중국적 사유체계 혹은 문명과의 접점(interface)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사실 두 체계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전통 사상의 하나인 유교의 사유체계에도 영향을 미쳐, 후세에 중국의 가장 완성된 철학체계 중 하나인 성리학을 성립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불교 자체도 중국적 사유체계와의 교섭 속에서 동화·변화함으로써 가장 동아시아적인 사유체계라고 할 수 있는 선불교를 성립시키기까지 하였다.

사유체계 면에서나 사회구조 면에서나 가장 대립적이라야 할 두 문명(인도문명과 중국문명)이 만나 ‘충돌’이 없었다고 하는 점, 그리고 상호 영향을 미쳐 일정한 동화과정을 겪으면서도 뒤섞여 잡탕이 되어 버리는 일 없이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시사해주고 있다. 인도문명의 토양에서 나온 불교가 중국문명이라고 하는 전혀 다른 토양에 뿌리를 내리는 데는 적어도 사오백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것은 수용과 동화, 그리고 중국적 변용이라고 하는 단계적이고도 점진적인 과정을 통한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이제 서구사회에 조금씩 뿌리를 내려가는 불교의 미래에 대해 어떤 전망을 얻고자 함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가 중국에 공식적으로 소개되는 시기를 대략 기원 1세기 중반 경으로 보는 데는 큰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중국 일부 지역의 무덤 등에서 발견되고 있는 부장품들을 살펴보면 중국인들과 불교의 접촉은 사료상의 그것보다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훨씬 일찍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인도나 중앙아시아 승려들에 의한 본격적인 전법에 앞서, 불교는 실크로드를 따라 교역하는 상인들에 의해 이미 중국인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당시의 무덤 등에서 발견되는 부장품들을 살펴보면 중국인들의 토속신의 모습과 붓다의 모습이 기묘하게 조합된 형태가 있는가 하면, 토속신의 모습에 단순히 불교적 모티프가 조금 가미된 정도의 것들도 존재한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승려들에 의한 본격적인 전법 이전에 불교를 접했던 중국인들의 최초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중국불교의 시작을 소개하는 여러 저서들을 살펴보면 한족(漢族)과 비(非)한족이 불교에 대해 서로 다르게 반응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왕조사적 관점에서 중국사를 보게 되면 중국사는 한족과 비한족 간의 끊임없는 왕조 교체의 역사였다. 다소 부정확할 수도 있지만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한족’이라고 하면, 이들은 중국의 한자문명을 이룬 주역들로서, 흔히 ‘중국문명’이라고 하면 바로 이들의 문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반면 ‘비한족’이란 소위 ‘오랑캐’(Barbarian)로서, 일찍부터 정착·농경사회를 이룩한 한족과는 달리 생활 근거지를 옮겨 다니는 변방의 유목부족들(nomadic tribes)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불교에 대해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바로 이들 비한족들이었다. 비한족들이 불교에 관심을 보인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우선 이미 상당히 세련된 문화체계를 갖추고 있던 한족과는 달리, 비한족들은 유동적 사회구조 속에 살고 있었으므로 타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훨씬 덜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타문화를 단순히 용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데로 나아간 데는 한족의 고급 문화에 대한 그들의 문화적 열등감이 내적 동기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었던 듯하다. 비한족들의 열등감 중 하나는 바로 ‘왕권의 정당성’ 문제였다. 한족들의 왕인 천자(天子)는 문자 그대로 ‘하늘의 아들’로서 하늘의 명(命)을 받았다는 초세속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유목부족간 연합에 의한 국가 형태를 가지고 있던 비한족들의 왕은 부족장들간에 ‘선출’된 왕이었기에 초세속적 권위를 가지진 못했다.

그 왕권의 정당성은 하늘의 명에 의한다는 천자에 비하면 형편없이 떨어지는 것이었고, 한족들은 바로 이 점을 조롱하곤 하였다. 당시 중앙아시아에 정착하기 시작한 불교는 바로 이러한 비한족들의 오랜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었다.

불교의 업설(業說)은 ‘선출’된 왕에게 초세속적 권위와 도덕적 정당성을 보장해 주었는데, 특히 불교의 전륜성왕(轉輪聖王)이란 개념은 만리장성 이남에 대한 그들의 끊임없는 침략을 정당화해 줄 수도 있었다. 즉 선출된 왕의 도덕성과 권위를 바로 ‘전생에 쌓은 선업(善業)’이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또한 불교의 전륜성왕 개념은 중국 영토의 정복에도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해 줄 수 있었다.

따라서 비한족들의 불교는 그 시초부터 왕권에 의해 비호를 받는 동시에 왕권을 위하는, 이른바 ‘호국불교’였던 것이다.2) 2) 한국의 호국불교 전통은 바로 이러한 비한족 불교의 영향이라고 생각된다. 한반도에 불교를 전해준 것도 바로 이들 비한족 국가의 왕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북위(北魏) 등의 비한족 왕조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던 붓다가 역사상 실존했던 석가불이 아니라 미래불인 미륵불이었던 이유도 바로 이 문제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불교가 중앙아시아로 전파될 당시에 이미 전륜성왕과 미륵불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3) 당시 비한족 국가들에서의 승려의 역할을 살펴보면 이러한 호국불교의 경향은 더욱 뚜렷해진다. 3) 여기에는 두 가지 대표적인 유형이 있다. ‘전륜성왕이 곧 미륵불의 현신’이라고 하는 전통이 그 중 하나이고, ‘전륜성왕과 미륵불은 서로 다른 인물이며, 전륜성왕이 세상을 평정하면 그때 미륵불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전통이 또 다른 하나이다. 어쨌든 그 즈음의 불교 전통에

초기 전법에 등장하는 승려들의 전기를 보면, 당시 승려들의 주요 역할 중 하나는 왕의 고문 역할이었다. 인접 국가들과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왕들로서는 인접 지역의 기후, 지리, 정세 그리고 언어에 능통한 승려들의 자문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필수적이었으며, 또한 승려들로 상징되는 도덕적 정당성은 일종의 부적과도 같이 승리를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때로는 소위 고승이라고 하는 인물을 서로 모셔 가려는(?) 납치경쟁마저 빈번히 발생하곤 했을 정도이다. 고승이 자국 영토 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왕의 도덕적 우위는 보장되었고, 신하들과 국민들의 사기는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이다.

한편 불교에 대한 한족들의 최초 반응은 소극적이었고, 어떤 경우엔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우선 불교의 출가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불교의 윤회설 또한 그들의 내세관과는 상충되는 것이었다. “죽어서 오대산에 가면 다시금 조상을 만나 현세의 가족관계가 사후에도 그대로 유지된다.”고 믿었던 그들에게, “지금의 부모는 전생의 원수였을 수도 있고, 또 내 남편, 내 아내였을 수도 있다.”고 하는 윤회설은 출가주의와 함께 한족들의 가족 관념을 그 밑바닥부터 흔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던 한족들이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그들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져 버리는 경험을 한 이후의 일이다. 318년 비한족들의 침공으로 서진이 몰락하고 한족들은 양자강 이남으로 쫓겨 간다. 조상의 무덤도 그대로 둔 채 가족 사당의 위패도 가져오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피난 중에 죽은 부모, 혹은 자식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그 전까지 한족들의 삶과 죽음의 질서에 지침을 마련해 주고 있던 유교는 이러한 경우에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했다.

무덤이 없으니 어떻게 제사를 지내며, 시신도 거두지 못했는데 어떻게 죽은 자에 대한 예를 다 할 수 있겠는가? 양자강 이남에서 발굴된 당시의 무덤에서 우리는 당시 한족들의 이러한 고민을 엿볼 수 있다. 혼병(魂甁)이 바로 그것이다. 혼병은 죽은 자의 혼을 담는 병으로 원래 양자강 이남에 살던 토착민들의 풍습이었다. 시신이 없이 죽은 자에 대해 예(禮)를 다해야 하는 한족들에게 혼병은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이 때 불교가 또 다른 해결책이 될 수 있었다.

영혼 및 내세와 관련된 불교의 교리는 또 다른 대안을 그들에게 제시해 줄 수 있었고, 불교의 승려들은 그들의 조상과 죽은 가족들의 영혼을 평안히 천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고도의 윤리관을 가진 불교사상과 명상적 사색을 요구하는 불교의 수행은 한족 엘리트들에게도 새로운 사상적 세계를 열어주기에 충분했다. 불교는 그제서야 한족들의 종교로, 또 철학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불교는 수와 당을 거치면서 명실상부한 중국인의 종교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한족의 왕조에서는 전 국가적으로 혹은 왕실의 적극적 비호 가운데서도 불교가 한 번도 ‘국가종교’(State Religion)로 역할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비한족 왕조에서의 불교와 구별되는 점이다. 비한족 왕조에서는 짧게나마 불교가 국가종교로서의 특권을 누리는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한족 왕조에서는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불교가 가장 성했던 시기로 볼 수 있는 당나라 시대에조차 국가와 사회의 체제이념은 어디까지나 유교였고, 불교는 개인적 차원 내지는 구원적 기능으로서의 제한된 역할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점은 바로 불교를 받아들일 당시의 한족들의 내적 동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부터 불교는 유교를 대체하는 기능보다는 보완하는 기능으로서 한족들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며, 이 점은 그 이후에도 계속 된다.

일단 불교가 한족들에게 받아들여지자, 불교에 대한 교학적 연구뿐 아니라 모든 방면에 걸쳐 급속한 발전과정을 밟게 된다. 우선 역경사업이 국가적 차원에서 대규모로 진행된다. 이것은 일단 받아들인 이상 철저히 한다는 한족 엘리트들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또한 여러 다른 계통의 경전들이 번역되면서 새로운 분류의 필요성도 생겨났고, 다양한 불교전통만큼이나 다양한 해석들도 생겨났다. 당나라 시대의 수많은 불교학파가 바로 그것이다.4) 4) 일본의 학자들이 중국불교를 연구하면서, 일본불교의 종파적 경향을 그대로 중국의 경우에 투사하여 중국불교 또한 종파적으로 연구하던 경향을 한국의 중국불교 연구도 지금까지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다양한 전통은 경전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거의 모든 경전이 일단 한문으로 번역되었다고 생각되자,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불교 이해에 대해 일종의 자신감을 가지고 중국적 불교를 탄생시킨다. 바로 선불교의 탄생이다. 모든 경전의 가르침을 ‘없을 무(無)’ 혹은 ‘마음 심(心)’ 한 자로 귀결시켜 버린 것이다. 불교가 전래되어 육조 혜능에 이르는 약 육백여 년 만의 일이다. 필자는 이 일이 중국 문명사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사건일 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사적으로도 가장 큰 사건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문명이 다른 문명을 받아들여 그 본질을 훼손함 없이도 가장 자기답게 변용시켜 버린 거의 유일한 예가 아닌가 한다. 헌팅턴의 ‘문명간 충돌’에 대한 비판으로 이 글을 시작한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서구사회에서의 불교의 미래를 논하는 마당에 먼저 중국불교사를 개관한 연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중국문명이 인도의 불교를 받아들여 가장 중국적이면서도 가장 불교적인 선불교를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21세기 지구인들의 화두가 된 ‘문명간 충돌’에 중요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불교와 중국문명 사이의 상호작용을 유형별로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중국불교사를 공시적으로 볼 때 불교가 중국문명에 기여한 점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우선 명상이다. 물론 명상의 전통은 불교 이전의 중국 전통 사상인 도가사상에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교의 보다 체계적이고 세련된 명상법이 도가의 명상법을 몇 단계 끌어 올렸음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불로장생’ 등의 양생법을 위주로 한 도가의 명상법을 철학적·종교적으로 보다 고도화시킴으로써 영적인 자유와 지적 통찰력을 목적으로 한 철학적·종교적 명상법으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불교의 공헌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운(運)과 명(命)에 대한 관념은 불공평할 수밖에 없는 현실 세계에 대한 하나의 설명은 되었지만, 윤리적·도덕적 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교의 ‘업설’은 중국인들에게 ‘운’과 ‘명’에 대한 충분한 도덕적·윤리적 기반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업설은 사회적 공덕과 자비심에 대한 강력한 내적 동기도 제공해 줄 수 있었다.

물론 유교와 다른 중국의 전통사상들 또한 사회적·공공적 선(善)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 준 것도 사실이지만, 보다 전 사회적으로, 남녀노소 상하귀천 모두에게 보다 직접적이고 강한 동기를 부여해 줄 수 있었던 것은 윤회의 내세관을 바탕으로 한 불교의 업설이었다. 또한 불교는 중국인들의 삶에 ‘구원’이라는 관념, 즉 ‘종교성’을 제공해 주었다. 물론 유교도 일정한 종교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정토신앙과 같이 내세를 보장할 수 있는 구원적 종교성이 희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불교는 중국문명에 대해 일방적인 영향만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쌍방향적 동화와 수용의 상호작용이었다. 한편으로 불교는 중국사회의 문명에는 ‘없는’ 새로운 것을 가져다 줌으로써 중국사회를 변화시키는 한편, 불교 또한 중국문명에의 동화과정을 겪는다. 바로 이 점이 유대-기독교(Judeo-Christian) 전통의 종교와는 다른 불교만의 특징이다.

불교가 원래의 사상적·문화적 토양인 인도문명의 틀을 깨지 못하고 계속 인도적인 것만을 고집했다면, 남는 것은 대립과 충돌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의 십자군 원정이 그러하였고, “코란이냐 칼이냐” 양자택일을 강요했던 이슬람의 폭력에 의한 전교 또한 그러하였다. ‘문명간의 접촉’은 ‘충돌’이 될 수도 있고 ‘만남’이 될 수도 있다. 충돌이 아닌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호 동화의 정신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상대방을 부정하는 데서 ‘만남’은 있을 수 없다. 과거 아시아 및 아프리카 지역에 있어서 기독교의 선교는 기독교적 ‘보편주의’에 입각한 토착문화(local culture)에 대한 철저하고도 전면적인 부정이었다. 굳이 세세한 예를 들지 않더라도 최근의 일부 기독교인들에 의한 훼불사건이나 단군상 철거 시비 등은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이 토착문화를 부정하던 그러한 정신의 유산이다.

흔히 불교의 타종교에 대한 관용을 ‘인도문명’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종교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인도에서 많은 종교가 발생했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사실이고 보면 이러한 말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한다면 이 말은 정확한 말이 아니다. 우선 역사적 사건 하나만을 보더라도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아쇼카 왕의 굽타왕조가 끝나고 푸샤미트라의 숭가왕조가 들어섰을 때, 불교가 받은 탄압은 그야말로 ‘인도의 분서갱유’라고 할 만큼 수많은 불교의 승려들이 처형되고 불교사찰과 경전들이 불태워지는 등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즉 인도문명의 토양이 곧 종교적 관용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필자는 불교가 중국적 토양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토착문명과의 완전한 습합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불교적 진리관에 근거한 불교 특유의 종교적 관용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흔히 종교적 관용이란 다른 종교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정신이라고 말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종교적’이란 제한적 수식어조차도 필요로 하지 않는 민주사회에서는 매우 기본적 원리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가 ‘종교적’이란 수식어를 붙일 때는 좀더 다른 의미가 있어야만 한다.

물론 이런 포괄적이고 가장 기초적 의미의 종교적 관용조차 없는 사람들이 아직도 일부 존재하는 한국사회를 두고 생각할 때는 다소 사치스러운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는 ‘불교적인 종교적 관용’이란 ‘진리에 대한 조심스럽고 겸허한 태도’를 말한다. 또한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를 말한다. 이 후자의 말이 전자와 모순되게 비추어질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보다 더 중요한 태도이다.

비타협이 곧 폭력으로 이어져온 것을 많이 보았던 우리들로서는 ‘종교적 관용’을 말하면서 ‘비타협’을 말하는 것이 모순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리가 아닌 것에 타협하지 않는 것이 어찌 종교적 태도일 수 있으며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의 태도에서 나온 ‘평화(?) 공존’의 삶이 또 어찌 종교적 태도라 할 수 있겠는가? 붓다 당시의 불교를 보라. 외도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을 하고 있지 않는가? 외도가 설 자리는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있지 않는가?5) 5) 단 외도의 구원 가능성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렇다고 해서 붓다의 말만이 진리라고 하는 도그마적 태도를 보인 적이 있던가?

불교가 진리가 아닌 것에 관한 한 ‘비타협적’이란 말은 ‘자기부정’도 포함하고 있다. 경전의 권위를, 또 말씀의 권위를 유일무오(唯一無誤)한 것으로 인정치 않고, 그 또한 진리를 언표하는 데 언어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은 곧 진리에 대한 조심스러운 태도이자 비타협의 태도이다.

이러한 비타협적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불교 경구의 하나가 바로 “살불살조(殺佛殺祖)”이다. 이는 단순한 수사법(rhetoric)이 아니다. 또한 흔히 이야기하듯 진리에 관한 실용주의적 태도는 더더욱 아니다. 이는 부처나 조사(祖師)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는 선언이다.

진리는 자신의 한 몸으로 체득하는 것일진대 부처든 조사든 그 길에 방해가 된다면 부정해야 한다는 진리에 대한 엄정하고 분명한 선언이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불교의 진리관이 곧 타문명·타종교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 준다. 흔히 이야기하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은 종교적 관용의 태도가 아니라 사이비 관용일 뿐이다.

불교는 중국문명과 만나 가장 비인도(非印度)적으로 변모하면서도 불교의 본질적인 모습을 잃지 않았고, 또 가장 중국적인 모습을 갖춰 중국문명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하는 소위 진리에 대한 ‘실용주의적 태도’에서 기인한 것도 아니고, “너도 옳고 나도 옳다”고 하는 식의 ‘사이비 종교적 관용’의 태도는 더더욱 아니었다.

말씀, 경전, 언어, 관습, 문화 등등은 진리를 읽는 하나의 문법일 뿐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는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진리에 대한 조심스러운 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상호적인 동화와 수용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흔히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불교를 이것저것 이질적인 것들이 합쳐진 ‘종합적 불교’(Syncretic Buddhism)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만일 ‘종합’이란 말이 모든 것을 뭉뚱그려 놓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러한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비록 중국에서의 불교가 그 원산지인 인도와는 다른 많은 이질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 본래의 것을 잃고 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의 진리관을 이야기할 때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달과 손가락’의 비유는 매우 적절할 것 같다. 달을 가리키고 있는 한 몇 번째 손가락이라도 좋고 막대기라도 상관없다. 그것이 기독교일 수도, 유교일 수도, 또 어떤 다른 종교라도 좋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달’이란 것도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언어적 표현일 뿐이란 점이다. 불교의 이러한 진리관은 불교가 타종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무한한 친화력과 개방성을 가질 수 있게 한다. 불교의 이러한 면모는 이미 이천 년 전 중국을 비롯한 여러 아시아 나라들의 경우를 통해 입증되었으며 이제 서구에서, 특히 미국에서 그 새로운 실험이 진행 중이다.

불교가 미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대략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회의(World Parliament of Religions)’와 그 이후 폴 캐러스(Paul Carus, 1852∼1919)가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를 비롯한 일본 불교인들을 미국에 초청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약 백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고 볼 수 있다. 불교가 중국문명과 접촉한 이래 그 완전한 수용과 동화의 시기까지 약 50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보면, 미국에서의 불교는 이제 막 시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대중매체의 발달과 현대 사회의 역동성을 감안한다면, 현대의 100년은 과거의 500년 기간보다 훨씬 더 길면 길었지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앞서 살펴본 중국의 예에 비추어, 불교가 미국사회의 문화적 패러다임 속에 어떻게 수용되고 있으며, 또 불교 자체가 미국 문화 속에서 어떠한 변모를 겪고 있는지, 그리고 그 전망은 어떠한지를 살펴보는 것이 결코 성급한 일은 아닐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미국에서의 불교를 앞서 살펴본 중국에서의 경우와 대비하여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2. 폴 캐러스와 스즈키 다이세츠의 만남: 미국불교의 시작

미국에서의 불교를 유형별로 나누어 보면, 우선 크게 이민자들의 불교와 백인을 위주로 한 미국인들의 불교,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이민자들의 불교란 주로 중국, 일본, 한국 그리고 태국, 베트남, 티벳 등에서 온 아시아계 이민들이 ‘이민 보따리’ 속에 함께 가져 온 불교를 말한다. 이 유형은 주로 이민 1세대를 주축으로 하지만,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2세 혹은 3세들의 참여도 늘어가는 추세이다.

그러나 아시아계 이민 2세 및 3세들의 불교는 그 유형으로 보아 ‘미국불교’에 속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 ‘미국불교’란 아직 그 일정한 정형이 없는 만큼, 일반적으로 아시아계 이민들의 공동체(community)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유형의 불교를 통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온 숭산 스님이나 삼우 스님의 불교는 대체로 그 전법대상이 미국인들이라는 점에서 ‘미국불교’에 속한다.

그리고 베트남의 틱낫한이나 티벳의 달라이 라마의 경우는 한편으로는 자국계 이민들의 정신적 리더라는 점에서 이민자 불교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두 사람의 영향력이나 전법대상이 이미 자국계 이민 공동체를 넘어 미국인들에게 직접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불교’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보다 현실에 가깝다. 다시 말해 ‘이민자 불교’냐 ‘미국불교’냐 하는 구분은 그 지도자가 누구냐, 어디에서 왔느냐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사찰이나 종교활동의 근거지와 대상이 누구냐에 따른 구분이다.

한편 ‘미국불교’는 아시아에서 온 승려들의 영향력을 직접 받지 않는 유형의 불교이다. 소위 미국 중산층의 엘리트 불교로서 자생적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아시아계 공동체와는 직접 관련을 맺고 있지 않으며 특정한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다분히 범 교파적인 불교이다. 미국불교의 특징을 이야기하고 그 미래에 대한 전망을 이야기할 때는 바로 이 엘리트 불교가 문제가 된다. 이는 약 칠백만에 달한다고 하는 미국의 불교도 가운데 이러한 유형의 불교에 속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비록 미미한 소수에 불과할지라도 이러한 유형의 불교가 바로 ‘아시아불교’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미국불교’이기 때문이다.

이 유형의 ‘미국불교’의 한 특징은 ‘엘리트 불교’라는 점이다. 대체로 그들은 대학교육 이상을 받은 사람들로서 지식인, 예술인 또는 유명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불교에 나타나는 이러한 엘리트 중심적 경향은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무력에 의한 강제적 개종이나 전교를 빼고서 자연스런 방식으로 새로운 종교나 문화를 전하고자 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계층이 그 사회의 엘리트라는 것은 대체로 당연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불교가 그랬고 천주교의 경우도 그랬으며, 또 20세기 초 개신교를 받아들인 이들도 당시의 전통적 종교나 이념의 문제점과 시대적 한계를 절감한 엘리트들이었다. 중국에 불교가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도안, 승조 등은 당시의 사상적 전통에 정통한 당대의 엘리트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두 문명의 가교로서 이민자들의 역할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중국의 경우 중앙아시아 이민자, 혹은 그 후손들이 번역작업 등을 통해 본토의 엘리트들과 사상적·언어적 가교 역할을 하였듯이, 미국의 경우도 그러한 아시아인 이민들의 노력이 있었음은 불문가지이다.

흔히 그렇듯이 어떤 역사적 사건에 있어서, 특히 그 사건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일 때는 반드시 어떤 뚜렷한 기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편의상 한 사람 혹은 한 사건을 그 역사적 사건의 기점 혹은 계기로 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불교의 대중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대개 폴 캐러스(Paul Carus, 1852∼1919)라는 인물이 활동하던 시기로 잡기도 하고, 또는 그의 활동이 구체적이고 활발하게 된 계기인 시카고 “세계종교회의”(World Parliament of Religions)가 열린 1893년을 그 시작으로 삼기도 한다. 물론 폴 캐러스 이전에 불교사상을 소개하고 불교에 관한 저서를 출판한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불교의 대중화를 위한 지속적이며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폴 캐러스의 개인적 관심과 열정만으로 불교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미국사회에서 갑자기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당시 서구사회가 가지고 있던 ‘시대적 고민과 관심’의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캐러스는 이런 점에서 당시 서구사회의 진지한 지식인의 한 전형이라 볼 수 있다. 19세기 말은 지성사적으로 볼 때 합리적 이성과 과학이 진리의 가장 확실한 척도가 되는 소위 모더니즘의 한 정점이었다. 그런 만큼 ‘사실’, ‘이성’ 그리고 ‘물질’로 대표되는 ‘과학’, ‘가치’, ‘믿음’ 그리고 ‘정신’으로 대표되는 ‘종교’ 사이에 벌어진 갈등과 간격을 어떻게 해소하고 메우느냐 하는 것이 당시 지식인들의 시대적 고민이었다.

더 이상 기독교는 ‘진리’의 척도가 아니었고, 이제 과학이 그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폴 캐러스는 ‘과학적 종교(Religions of Science)’를 제안하였다. 그는 인간의 미래는 지식과 진보의 유일한 열쇠인 과학과 종교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불교가 바로 그 해답이라고 보았다.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회의’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각 종교·종파를 대표하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이 때 스리랑카에서 온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arika Dharmapala, 1864∼1933)와 일본 대표인 샤쿠 쇼엔(1859∼1919)이라는 두 사람과 폴 캐러스의 만남은 미국의 불교 대중화에 있어서 중요한 한 계기가 되었다.

상좌부불교를 대표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나 선불교를 대표한 샤쿠 쇼엔이나 두 사람 모두 당시 서구사회의 문제점인 기독교와 과학의 갈등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두 대표는 약속이나 한 듯이 불교와 과학은 아무런 ‘갈등’이 없음을 강조하였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불교의 업(業)은 인과의 법칙으로서 다윈의 진화론과도 아무런 모순이 없음을 강조하였고, 샤쿠 쇼엔 또한 불교의 업설은 자연세계의 인과율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폴 캐러스 또한 1893년 시카고 종교회의 의장이었던 존 헨리 바로우(John Henry Barrow) 목사가 〈시카고 트리뷴〉 지(誌)에 기고한 불교에 대한 비판적 기사를 비평하면서, “붓다의 가르침은 현대과학의 가르침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라고까지 하였다.6) 6) Martin Verhoeven, “Carus and Transformation of Asian Thought”, The Faces of Buddhism in America, ed., Charles Prebish and Kennth Tanaka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 p.214.

이후 폴 캐러스는 샤쿠 쇼엔의 제자 스즈키 다이세츠를 미국으로 초청하여, 불교에 대한 스즈키의 저술 및 번역 활동과 함께 미국에서의 활동을 도와주게 된다.

아마도 다른 불교전통에 비해 선불교, 특히 일본의 선불교가 미국에서 지금까지도 가장 활발하고 대중적인 이유는 바로 이 두 사람의 의기투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치 중국불교가 그 초기에 노장철학을 통한 격의불교로서 중국 지식인들에게 이해됨과 동시에 오해되었듯이, 스즈키가 소개한 불교 또한 폴 캐러스의 과학적 종교관에 바탕을 둔 ‘무신론적 일원론’을 통한 일종의 격의불교였다고 할 수도 있다.

스즈키는 폴 캐러스와 또 동시대 미국 지식인들이 듣고 싶어하는 불교를 잘 간파하였고, 불교 교리나 사상을 소개하는 데 기독교적 교리와의 무비판적 유비 또한 주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법신(法身)을 기독교의 신에 비유한다든지, 심지어 무아설(無我說)을 법신불(法身佛)에의 절대적 복종이라고 한 것들은 많은 예들 중 일부에 불과하다.

폴 캐러스는 불교가 기독교와는 달리 ‘지방문화(Local Culture)’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그 지방의 토착적 문화와 성공적으로 동화되어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899년 그는 ‘미국적 붓다’의 정착 필요성을 역설하는 한 편지에서 중국인, 몽고인, 일본인들이 ‘붓다의 이상(理想)’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석과 개념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였다.7) 7) Martin Verhoeven, Ibid., p.217.

이어서 그는 미국에서의 이상적 붓다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활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이미지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분명히 그는 동양에서 붓다의 이미지가 다소 은둔적이며 너무 명상적이어서 미국적 이상으로서는 걸맞지 않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스즈키의 불교문헌 영역 작업에 대해 언급하면서, 때로 스즈키가 자신의 철학적 개념이나 용어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아서 동양사상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하면서도, 서구의 독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다.8) 8) Martin Verhoeven, Ibid., p.210.

이러한 점은 동양에서 온 스즈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당시의 동양은 서양의 사조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불교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많은 동양의 지식인들이 그랬듯이 스즈키 또한 동양의 사상이 ‘현대’에, 특히 서구사회에 적절히 접목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해석과 이해가 필수적이라 보았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방법은 과학적·이성적 사고라고 보았다. 그는 불교의 “업설은 말하자면 ‘에너지 불변의 법칙’을 우리의 윤리적 영역에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고, 또 더 나아가 불교의 “법(法)의 일반적 개념이 과학적으로 증명된다는 것은 더 이상 재론할 필요가 없다.”9)고까지 하여, 업(業)이나 법(法)의 개념이 ‘깨달음’보다는 과학에 의해 증명될 수 있는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9) Martin Verhoeven, “Carus and Transformation of Asian Thought”, Ibid., p.218.

스즈키는 종교적 진리가 과학과 모순될 수 없으며, 인간 영혼에 관한 것뿐 아니라 자연의 영역에 있어서조차도 진리는 과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10)

하지만 종교 또한 과학적 근거에 의존해야 한다는 그의 젊을 때의 견해가 잘못된 것임은 만년에 스스로 밝혔다. 그는 과거 폴 캐러스와 함께 일할 때 가졌던 “종교 또한 과학적이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너무나도 신화적이고도 비과학적 근거에 의존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던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였던 것이다.

지금 내가 그들(폴 캐러스와 그의 스승 샤쿠 쇼엔: 역주)과 다시 대화할 수 있다면, 내 생각이 그때와는 다소 바뀌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지금 나는 종교가 과학에 근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우리 모두는 과학의 이름으로 폐기될 수 없는 어떤 ‘신화적’인 요소들을 (우리의 종교적 심성으로) 가지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얻은 나의 확고한 신념이다.11) 11) Martin Verhoeven, Ibid., p.223.

그러나 이러한 스즈키의 만년의 결론은 단순히 한 개인의 종교적·사상적 변화라고만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이것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중반의 서구사회의 지적 환경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가 폴 캐러스와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와 그 이후 견해의 변화까지에는 약 50년 정도의 짧은 세월이었지만 과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한계가 무엇인지를 아는 데는 충분한 세월이었다.

과학이 우리에게 드러내 주리라 기대했던 진리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과학이 스스로 진리에 대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과학이 표방하던 객관적 진리탐구라는 것은 결국 자기모순이며 진리에 대한 ‘불확정성’이 오히려 과학의 정직한 답변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토마스 쿤의 과학 발달사에 관한 패러다임적 시각은 과학적·객관적 진리에 관한 우리의 기대가 또 다른 신화에 불과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 주었다.

과학에 관한 서구 지성의 새로운 불신과 자각은 20세기 중반 이후 계속되었으며, 따라서 불교에 대한 미국인들의 시각 또한 바뀌게 되었다. 이제 불교는 미국인들에게 그들의 과학만능과 이성만능주의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기독교의 교회중심주의에 대한 회의, 다원적 개인주의 사회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심리적 병리현상에 대한 치료제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명상이 미국인들의 생활 속에서 일상화되고 있고, 또한 일종의 대체치료로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3. 미국불교(1960년대∼1990년대): 불교의 개방성과 친화력에 관한 새로운 실험12) 12) 이 부분의 초고는 1997년 《대중불교》에 실렸던 것으로, 그 후 수정을 가하여 다시 여기에 첨가하였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Times)》은 1997년 10월 13일자에서 〈미국의 불교에 대한 관심(America뭩 Fascination with Buddhism)〉이란 기사를 커버스토리로 다루었다. 이 기사는 점점 늘어만 가는 불교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함께 유명 연예인 및 스포츠인들의 불교로의 개종과 관심을 독자들에게 소개하였다. 영화배우 리차드 기어(Richard Gere), 스티븐 시걸(Steven Seagal), 가수 티나 터너(Tina Turner) 등이 독실한 불교도라는 것을 소개하였고, 펑크 랩 그룹 비스티 보이즈(Beastie Boys)의 싱어 아담 요크(Adam Yauch)가 매일 참선을 하는 모습을 다루었으며, 프로 농구 명문 팀인 시카고 불즈의 코치 필 잭슨(Phil Jackson)이 마이클 죠단(Michael Jordan)을 비롯한 농구 선수들의 트레이닝에 선(禪)을 도입하고 있다는 것도 소개하였다.

사실 기사의 내용은 그간에 알려진 사실들을 종합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미국의 대표적 저널인 《타임》이 표지기사로 이 문제를 다루었으며, 유명 연예인들과 스포츠인들을 대거 예로 들면서 미국의 불교를 소개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한 것이다.

한국사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에서 연예인들과 스포츠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한 《타임》에서 이를 표지기사로 다룬다는 것은 미국인들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미국 주류사회(main stream)의 커다란 한 흐름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하다.

미국사회에서 불교는 더 이상 동양에서 온 신비하고 비의(秘意)적인 종교가 아니며, 아시아계 이민들과 함께 태평양을 건너 온 이민들만의 종교가 아니다. 불교인구가 약 칠백만을 헤아린다는 최근의 미국에서 일어나는 불교 붐은 미국 주류사회의 중요한 현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의 주말 판에서 소개하는 베스트셀러 리스트에는 반드시 불교 교리나 불교의 명상법을 소개하는 책이 한두 권쯤은 꼭 끼어 있다. 최근의 한 예로 베트남 출신의 승려 틱낫한의 《살아 있는 붓다, 살아 있는 그리스도(Living Buddha, Living Christ)》는 그 판매 부수가 백만 권에 달하는 이른바 밀리언셀러이다. 니르바나(nirvana, 涅槃), 다르마(dharma, 法), 카르마(karma, 業), 삼사라(sam.sara, 輪廻), 코안(koan: 공안의 일본식 발음) 등은 신문·잡지 등의 기사 속에서 곧잘 등장할 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의 일상적 대화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말들이 되었다.

일본의 선불교를 중심으로 불교가 미국사회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이후 약 백여 년 만의 일로, 이제 불교는 미국 대중사회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특히 최근 10여 년 간의 미국의 불교 발전은 참으로 놀라울 정도이다.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동양계 이민들의 불교 사원이 아닌, 영어로 불교 교리나 수행을 지도하는 불교센터 및 사원의 숫자는 1988년의 429개에서 1997년에는 1,062개 이상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대중사회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미국 대학들 역시 종교학 혹은 아시아 관련 학과의 전공 과목 및 교양필수 과목의 일부로 불교학을 가르치고 있다. 필자가 근무했던 스토니 부룩 뉴욕 주립 대학의 경우에도 매 학기 불교와 관련된 과목을 개설하고 있는데, 필자의 강의에도 80명이 넘는 학생들이 수강하곤 하였다. 수강인원을 가급적 60명으로 제한하고 있는 학교 강의 방침이 없었다면, 아마도 학생 수는 100명이 훨씬 넘었을 것이다.

이러한 미국에서의 불교 붐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이들은 물질문명의 폐해를 경험한 미국인들이 불교에서 정신적·영적 위안을 찾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기독교의 유일신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에서 벗어나려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 현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혹은 동양, 특히 일본을 위시한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 극동의 급속한 경제성장에 자극 받은 미국인들이 이들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이 점점 불교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라고도 말한다.

사실 불교에 대한 미국인들의 급증하는 관심은 이들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물론 이들 사회적 요인들 외에 또 다른 중요한 요인도 있다. 또한 틱낫한과 달라이 라마 같은 종교적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이들은 불교가 단순히 동양계 이민들을 위한 이민종교가 아닌 인류 공동의 선을 지향하는 보편적 종교임을 미국 대중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이들은 현대사회에 대해 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우려들, 이를테면 물질주의, 핵전쟁, 가족파괴, 환경오염 등을 직시하고, 이에 대한 불교적 해결책을 시의적절하게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 미국에서의 불교는 몇 가지 뚜렷한 발전단계와 특징들을 보이고 있다. 미국인들이 불교에 대해 대중적 관심을 보이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베트남 승려들의 집단적인 분신자살 사건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3년, 쾅뚝 스님(Thich Quang Duc)을 비롯한 일단의 승려들이 독재자 디엠 정권에 항거하는 표시로 한낮의 사이공 시내에서 집단 분신자살을 했는데, 이 모습이 텔레비전과 신문을 통해 미국의 각 가정에 소개되었다.

당시 젊은 승려였던 틱낫한이 후일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언급했듯이, 대부분의 미국 언론들은 이 집단 분신자살을 독재와 전쟁에 대한 ‘격렬한 분노’의 표현 정도로 이해했다. 아마도 적극적 표현방식에 익숙한 대부분의 미국인들로서는 독재자에 대해 아무런 분노나 적개심도 직접적으로 드러냄이 없이, 베트남 민중들을 대신해 엄숙한 정적 속에서 자신의 몸을 불태워 버린 불교 승려들의 내면 세계를 이해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해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미국 대중사회는 불교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70년대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미국에서 반전·평화운동의 중요한 철학적·이념적 기반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기성 문화에 대한 반(反)문화로서 기능했다. 70년대 대중가수의 노랫말에서부터 뉴욕의 소호(Soho), 그리니치 빌리지 등을 풍미하던 전위예술 운동에 이르기까지, 선(禪)은 이미 ‘새로운 자유정신’, ‘무한한 내적 자유에의 추구’ 등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되었다.

미국 서부의 샌프란시스코, 버클리, 시애틀, 덴버 등은 70년대를 통해 반전·평화운동과 반문명 운동의 중심 지역들임과 동시에, 선불교, 티벳불교 등 여러 불교의 중심 지역들이었는데, 이들 지역이 지금도 미국에서 가장 불교가 활발한 지역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당시까지 미국사회에서 거의 유일한 종교라 할 수 있었던 기독교는 진보적 젊은이들을 실망시켰다. 그들이 보기에 교회는 이미 예수의 박애 이념을 잃었으며, 오히려 억압적이며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한 가부장적인 권위의 대표처럼 여겨졌다.

그들은 당시 기독교 교회에서는 기대할 수 없던 것을 불교에서 찾아내었다. 그들은 불교에서 ‘평화’, ‘자연’ 혹은 ‘반문명’, ‘모성’ 혹은 ‘여성’의 이미지들로 상징되는 새로운 문화와 삶의 양식을 발견하였다. 기독교로 대표되던 기성 문화의 ‘규범적 도덕’ 대신에 그들은 ‘내면적 자유’를 추구했으며, 불교의 ‘해탈’과 ‘열반’의 이상을 통해 이를 실현하려 하였다. ‘반문화’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미국에서의 불교는 어떤 점에서 보면 초기불교와도 상통되는 면이 있다.

불교가 발생했던 기원전 5∼6세기 당시 인도에서도 불교는 그 시대의 반문화였다. 당시 인도사회는 엄격한 제식주의에 입각한 브라흐마니즘적 사회였는데, 사문(sramana)이란 말은 바로 당시 기존의 사회적 문화를 거부한 반문화적 젊은이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사제계급인 브라흐만의 종교적 권위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영적 자유를 찾기 위해 기성 사회를 벗어나 걸식과 유행(流行)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다.

석가 역시 집을 뛰쳐나와 걸식과 유행을 통해 정신적·영적 자유를 추구하던 많은 사문들 중 한 사람이었다. 붓다가 제자들을 ‘사문’이라 일컬었고, 또 ‘선남자’, ‘선여인’이라 한 것의 의미는 기성 문화에 의문을 가지고 도전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젊은이들’이란 말에 다름 아니었다. 60년대와 70년대 미국에서의 ‘반문화’는 이처럼 초기불교의 기본 성격과 맥을 같이 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60년대와 70년대 미국에서의 반문화 운동과 같이 등장한 불교의 경우에는 부정적인 면이 뒤따르게 되었다. 즉 반문화적인 것과 퇴폐적인 것과의 구분이 모호하게 되어 불교의 미국적 전개에도 적지 않은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반문화의 생명력은 ‘건강함’에 있다. 기성 문화의 수혜자들이 기존의 문화를 유지하고 반문화를 위협적으로 여기는 이유는, 바로 반문화가 가지고 있는 ‘건강한 생명력’ 때문이다.

반문화가 그 건강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기성 문화를 극복하여, 기성 문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문화로 등장할 때 그 사회는 새로운 생명력으로 거듭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전운동, 히피운동 등과 함께 등장한 반문화의 부분이었던 미국불교는, 초기의 건강성을 잃고 일부 사람들만의 반문화로서밖에 역할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전후 베이비 붐 세대들이 사회 각 방면에서 활약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불교는 미국인들 사이에 새로운 대중적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미국의 사회학자들이 흔히 지적하듯, 베이비 붐 세대들은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그 이전의 세대들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정형화된 틀을 고집하지 않는 ‘자유분방함’이다. 또 그들은 60∼70년대 동안 반문화가 부르짖은 ‘새로운 자유에의 추구’라는 세례도 경험하였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에게는 ‘교회’란 ‘결혼식장’이란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기독교가 성장한 나라인 한국의 유학생들은 미국에 건너와서 우선 이들 때문에 놀라게 된다.

일요일이면 불문율처럼 교회에 참석하고, 식사 때마다 기도를 올리던 그들로서는, 침체한 미국 교회의 모습은 경악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주일예배 때는 노인들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식사 전에 기도를 올리는 미국인 가정은 잘 찾아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 기독교를 전한 것이 주로 미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미국인들은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80년대를 통해, 그리고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물론 90년대 초의 걸프전 직후, 그리고 최근에는 ‘프라미스 키퍼스(promise keepers) 운동’13) 등을 통해 미국인들의 교회에 대한 관심이 남부나 중서부를 중심으로 일시적으로 반짝하는 경우는 있어도, 대체적인 경향은 교회에의 관심이 감소하는 추세에 있고 그러한 경향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교회에 대한 관심의 감소와는 달리 불교에 대한 관심은 계속해서 늘고 있는 추세이다. 13) 미국의 보수기독교 단체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복음운동으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며 살자.”와 같은 구호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4∼5세기 중국이나 한반도에서처럼 전 국가적 차원의 불교로의 집단개종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는 현대사회, 특히 탈산업사회가 본격적으로 전개될 21세기에 종교가 가진 제한적 역할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미국인들, 특히 베이비 붐 세대의 독특한 불교에 대한 수용 태도와 관련이 있다.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불교는 종교라기보다 ‘문화’ 혹은 ‘철학’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60년대와 70년대 동안, 불교에 대한 젊은이들의 관심이 기성 문화에 도전하는 반문화적 성격을 지녔던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였으며, 이러한 기능적·선택적 성격의 불교관은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미국불교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되고 있다.불교라는 종교를 구성하는 세 가지 축은 삼보(三寶), 즉 붓다(佛), 붓다의 가르침(法), 그리고 승단(僧)이라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역사적으로, 교리사적으로 서로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빼고서는 종교로서의 불교라고 부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 불교를 추종하는 이들은 ‘붓다의 가르침’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붓다라든지, 승단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붓다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곧 붓다에 대한 관심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붓다에 대한 관심이란 것은 붓다에 대한 신심(信心)을 말한다. 불교도 종교인 이상 신심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의 불교에 대한 관심을 살펴보면, 심지어 매일 참선하고 계를 충실히 지키는 사람들 중에서조차 ‘신심’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소위 ‘과학적’, ‘이성적’ 불교도(?)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수천 개에 달하는 미국의 ‘선센터(Zen Center)’나 ‘비파사나 명상센터(Vipassana Meditation Center)’ 중에는, 아예 간판이나 선전문구에 “종교로서의 불교와는 상관이 없다.”는 문구를 넣고 있는 센터들도 많이 있다. 즉 건강과 마음의 평온 등을 위해서 불교의 명상수행을 하기는 해도 반드시 불교도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소위 스스로를 ‘불교적 기독교인(Buddhist Christian)’이라든지, ‘불교적 천주교인(Buddhist Catholic)’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많이 생겨났다. 말하자면 기독교인으로서 교회에 참석하되, 방법론적으로는 참선 등의 불교적 수행을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뉴욕 타임즈〉에 소개된 프로농구팀, 시카고 불스(Chicago Bulls)의 코치인 필 잭슨(Phil Jackson) 역시 그러한 사람들 중 하나이다.

불교에 대한 관심의 이러한 ‘선택적’ 혹은 ‘기능적’ 태도는, 한편으로는 달라이 라마나 틱낫한 같은 승려들이 불교 명상이나, 사념처 수행 등을 일반인들에게 소개하는 과정에서 불교의 신앙적 의미나 성격을 탈색시켜 버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미국인들의 실용주의적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 점은 바로 미국에서 불교 붐이 일어나긴 했어도, 정작 승려가 되기 위해 출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이유를 말해준다.

미국인들로서는 불상에 예배하고 스님들을 공경하고 하는 것이 결국은 수행의 일부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 한다. 불교 국가에서 온 승려들이나, 출가하여 아시아의 어느 국가에 가서 수행하고 돌아온 미국인 승려들이 부닥치는 문제도 바로 이러한 문제이다. 미국인 재가불자들이 이해하기로는 승단의 엄격함이나 수직적 계층구조는 오히려 비불교적이라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미국불교는 승려가 없는 재가 중심의 불교단체가 많고, 혹은 신심은 없이 참선만 하는 ‘선센터’가 많다. 바로 이러한 점을 들어 콜럼비아 대학의 불교학 교수이며 정열적인 티벳불교인인 로버트 서먼(Robert Thurman) 교수는, 일반적인 불교 붐에도 불구하고 엄밀한 의미에서 미국에는 아직도 불교가 뿌리내리지 못했다고 단언한다. 그는 특히 재가자들의 보시로 운영되는 승단이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고 신심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 한 가지 미국에서의 불교의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비종파적 성격’이다. 알려진 대로 미국에는 거의 모든 종류의 불교가 들어와 있다. 상좌, 대승, 선, 밀교는 물론이고 일본의 현대 신흥불교인 창가학회(創價學會), 영우회(靈友會) 등도 들어와 있다.

나라별로 보면 한국, 일본, 대만, 티벳, 태국, 스리랑카, 미얀마 등 온갖 나라에서 온 승려들이 자국의 전통 불교를 통해 활발한 전법활동을 하고 있으며, 미국인 승려나 재가 지도자들이 이끄는 불교단체들도 많이 있다. 특히 재가신자들이 이끄는 불교단체들은 두드러진 특정 전통을 따름이 없이, 한두 가지 이상의 수행법이나 의례들을 그야말로 ‘주문형으로 제작(customize)’해서 실천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불교도라 자처하는 미국인들은 대부분 이들 중 어느 하나와 관련을 맺고 있으나 한 가지 전통이나 수행법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그때 그때의 인연, 즉 친구의 권유나 지리적 원근, 혹은 수행 지도자 등에 따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쉽게 옮기기도 하며, 수행법 역시 어느 한 전통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로버트 서먼의 지적처럼 이러한 미국불교는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했는가? 아직 뿌리를 못 내렸다면 장차 뿌리를 내릴 만한 가능성이 미국사회에 존재하는가?

필자는 로버트 서먼보다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불교는 그 오랜 역사와 광범위한 지역으로의 전파과정에서 끊임없이 변해 왔다. 불교는 5∼6세기 인도에서 발생한 이후, 그 역사가 바뀜에 따라 그리고 전개되는 지역이 바뀜에 따라 부단히 변해 왔다. 즉 시공의 변화에 따라 계속해서 변해 온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소위 ‘정통’에 대한 시비는 없었다. 부파(部派)가 나뉘어지고 대·소승이 나뉘어지는 등 교리를 둘러싼 갈등도 있었지만, 그것 또한 역사적·공간적 변화에 따른 서로 다른 불교 ‘해석’의 문제였다. 불교는 중국에 가면 중국불교가 되었고 한국에 가면 한국불교가 되었다.

중국불교, 한국불교, 태국불교, 일본불교라고 하는 특정 지역문화 컨텍스트를 떠나면, 별도로 ‘불교’라는 것은 있을 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어떤 정형화된 수행이나 신앙 형태를 전제하는 ‘단수형’으로서의 불교는 없고, 복수형으로서의 ‘불교들’이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불교는 기존의 ‘불교들’과는 다른 불교, 즉 ‘미국적인 불교’ 더 나아가 ‘미국불교’의 등장을 의미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미국불교가 좋다든지, 그것이 좋지 않은 변질된 불교라든지 하는 판단은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새로운 형태의 불교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만은 언급하고 싶다.

사실 7세기 티벳에의 불교 전법 이래, 다른 문화권으로의 대규모적인 불교 전법은 19세기 말부터 전개되고 있는 미국에서의 전법이 처음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과거 1∼2세기나 4∼5세기에 있었던 것과 같은 형태의 불교 수용을 오늘날에 기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일 뿐 아니라, 불교 전법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오히려 비불교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역 문화의 수용과 지역 문화으로의 동화는 불교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이며, 기독교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점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그 선교의 과정에서, 특히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서 기독교를 보다 보편적이며, 지역 문화보다 상위 개념의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지역 문화와 끊임없는 갈등을 빚어 왔다. 그러나 불교는 지역 문화를 수용하고 자신이 지역 문화 속으로 동화되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선불교에서 볼 수 있듯이 철저한 지역 문화와의 동화를 통해서 가장 불교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지역을 초월한 그 어떤 ‘불교’도 존재하지 않듯이, 구체적인 ‘역사적 시점’을 초월한 불교의 수용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미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은 불교의 미국적 동화(同化)일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불교 동화의 한 예라고 보여진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오랜 전통에도 불구하고,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정체됨으로써 불교의 현대화 작업이 시급한 국가들에게는 하나의 모델적 사례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모델이라는 말이 반드시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특정 종교가 한 사회나 종교의 가치체계나 삶의 양식에 대한 유일한 담론이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 서구사회의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개인과 사회에 대해 종교가 그 영향력을 더욱 더 축소해 가는 것은 현대 사회가 가진 특징 중 하나이다.

서구사회에서, 특히 미국에서 불교가 붐을 일으킨다고 해서 그것이 곧 기독교를 대체할 것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결론인 것 같다. 서구사회에 있어서 불교는 기독교의 대체종교라기보다는 보완적 종교라 할 수 있고, 현대 문명이 우리에게 주는 ‘해독제(antidote)’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가 서구인들에 주는 매력은 어떤 면에서는 불교의 비종교성 때문이 아닌가 한다. 불교가 비종교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기독교의 종교성이 갖는 폐쇄성과는 다른 개방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불교는 여타 다른 제 문화와의 친화성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를 주도하는 자연과학 등과도 친화성을 가지고 있고, 나아가 미래와 관련하여 요즈음 가장 관심을 끄는 분야 중 하나인 환경 문제와도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가치체계와 삶의 양식, 그리고 무엇보다 다종교 사회, 또 탈종교적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오늘날, 불교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개방성과 친화성은 불교야말로 현대에 가장 알맞는 종교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불교는 그 어떤 체계와도 결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와 미래의 서구에서 불교가 대안이 될 수 있느냐 아니냐 하는 질문은 무의미할 수도 있다.

인도에서 건너 온 불교가 중국문화 속에서 가장 중국적인 것으로 변하여 선불교라는 새로운 불교를 낳았듯이, 지금 미국에서의 불교는 미국과 현대라는 풍토 속에서 가장 미국적이며, 그래서 가장 불교적인 새로운 탈바꿈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기독교를 대체하는 종교로가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를 더욱더 잘 이해하고 믿기 위한 보완적인 ‘수단’으로서 불교에 관심을 갖고 참선·명상 등의 불교수행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존재를 사이비 불교인이라든지 하는 편협한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들 또한 넓은 의미에 있어서 불교인이라 할 수 있으며, 장차 ‘미국불교’라 불릴 만한 것의 커다란 특징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이나 중국불교의 전통에도 그러한 것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 ‘도교적 불교도(Taoist Buddhist)’, ‘유교적 불교도(Confucian Buddhist)’, ‘무속적 불교도(Shamanistic Buddhist)’, 혹은 거꾸로 ‘불교적 도교도(Buddhist Taoist)’, ‘불교적 유교도(Buddhist Confucian)’ 등은 전통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신앙 형태들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한 전통은 계속되고 있다.

이제 기독교가 전파된 지 200년이 넘은 지금의 한국에서도, 스스로 ‘불교적 기독교인(Buddhist Christian)’이라 자처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나와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내가 미국에서 만난 한국인 기독교도들 중에는 스스로 ‘불교적 기독교인’, ‘유교적 기독교인’이라 부르는 분들이 많다. 그들은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의 깊이를 더욱더 심화하고 기독교의 의미를 확대한다고 믿고 있다.

불교처럼 다른 체계와―종교를 포함한 여러 다른 문화분야와―무한한 결합 가능성을 지닌 친화성을 가진 종교는 없다. 이러한 불교의 개방성은 불교 교리에 내재적인 것일 뿐 아니라, 이천 오백여 년의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실현되어 온 것이다. 21세기 사회를 생각할 때 불교의 개방성과 친화성은 가장 소중한 인류의 유산이다. 사회를 보다 살만한 사회로 만들 수 있는 희망과 가능성은 이러한 개방성과 친화성을 어떻게 확대·심화시켜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

조성택
고려대 영문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졸업(석사: 인도철학). 미국 UC 버클리 대학원 졸업(박사: 불교학). 전 스토니 부룩 뉴욕주립대 교수. 현재 고려대 철학과 교수 및 본지 편집주간. 논문으로 〈현대불교학의 합리주의적 경향: 재평가(Rationalist Tendency of Modern Buddhist Scholarship: A Revaluation)〉, 〈무아: 불교의 정의관을 향하여(Selflessness: Toward a Buddhist Vision of Justice)〉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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