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학탐구

1. 서론

불교는 중국에 전래돼 전파되는 과정에서 중국 고유의 전통사상과 사유 방식을 흡수, 중국 사회의 정치·경제·문화 수요에 부응하며 발전하는 가운데서 중국적인 언어와 사고 체계를 통해 교의(敎義)를 표현하는 창의적인 혁신을 했다.

불교 선종은 중국사상과 인도사상이 결합함으로써 기존의 중국 전통 사상과 다르고 인도 불교사상과도 다른 독특한 중국화된 불교사상을 형성했다. 따라서 선종(선불교)을 일반적인 의미의 불교로 보거나 노장(老莊)사상의 아류처럼 보는 견해는 타당치 않다.

선은 마음(불교)·자연(도교)·도(유교)를 하나로 통일한 삼자불이(三者不二) 사상을 통해 천연자방(天然自放)하면서 세속에 구애받지 않고 진리를 스스로 터득한 인격적 매력을 가진 자를 부처·조사·군자·명사·진인(眞人)이라는 이름으로 추앙했고 궁극적인 해탈의 실현으로 간주했다.

규봉종밀(780∼641)은 《선원제전집도서》에서 한국불교 ‘9산선문’ 법맥 형성의 주류를 이루었던 마조선의 특징으로 “사물의 본래적인 운행 질서를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해탈(任運自在 方名解脫)이라고 한다”는 점을 제시했다. 6조 혜능-마조-임제로 이어진 돈오 남종선과 불가분의 관련을 갖는 한국 선불교 또한 이처럼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인생 철학이 중요 선지(禪旨)다.

한국의 선불교는 중국 선종과 전적으로 같은 맥락이다. 한국 불교는 전래 과정부터가 인도로부터 직접 받아들인 게 아니고 한국보다 300여 년 앞서 불교를 받아들여 중국화시킨 중국의 한문 경전을 통해 불교를 수용했다. 선종의 경우는 중국에 유학, 중국 선승들 문하에서 수학하고 법을 인가 받은 스님들이 돌아와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을 개산했다.

냉혹하게 말한다면 한국 선불교는 중국 선종의 사상과 종풍에 일자 일획도 더 보탠 게 없다. 지금도 한국 선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선풍을 자칭 타칭 ‘임제종풍(臨濟宗風)’이라 하지 않는가. 또 오늘날 한국 선방의 학인들이 들고 참구하는 화두도 100% 중국 선종에서 개발된 것들이다. 임제종은 널리 알려진 대로 중국 선종의 한 분파다.

한국 선불교의 주류는 전래 과정부터 현재까지 선종 제6대 조사 조계혜능(曹溪慧能, 638∼713) 대사를 창시자로 하는 돈오 남종선이다. 그렇다면 과연 돈오 남종선의 지취(旨趣)는 무엇이며, 그러한 선취가 형성되는 과정은 어떠했는가? 이러한 선의 문화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한국 선불교의 본래면목과 풍격(風格)을 새삼 조명해 보는 회광반조의 마당이 될 수도 있다.

공(空: 공적)·담(淡: 담박)·원(遠: 유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선취는 당 중엽 이후 한·중 문인 사대부들의 인생철학과 선화(禪畵)의 수묵 산수, 선시 등에서 체현되고 있는 선의 구체적 의미였다. 이러한 선취(禪趣) 형성에는 도가(노장)·유가는 물론 열자(列子) 등과 같은 중국 전통 사상이 크게 작용했다. 선은 이 같은 전통 사상들을 흡수, 승화시켜 풍부한 선문화를 창조해냈다.

선사상에는 노장사상, 특히 위진남북조 시대에 노장학을 한층 심화 발전시킨 현학(玄學)사상이 많이 녹아 들어가 있다. 유가의 전통적인 심성론과 입세관(入世觀) 등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전통 사상들이 불가의 반야공관 사상과 열반 불성론 등에 흡수돼 인도불교와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중국 불교, 이른바 선불교(선종)가 탄생했다.

이번 담론에서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중심으로 선문화 형성의 문화사적 배경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심성론―풍번문답(風幡問答)

돈오 남종선의 개창자인 선종 제6대 조사 조계혜능이 당 의봉 원년(676) 광주 법성사(현 광효사)에 나타났다. 5조 홍인 대사로부터 선법을 전수한 후 산 속에 들어가 사냥꾼으로 살던 은둔 생활(3년 설부터 16년 설까지 다양함)을 마치고 세상에 나와 돈오선법을 널리 펴고자 해서였다.

당시 법성사는 주지인 인종(印宗) 스님이 학인들에게 《열반경》을 강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바람이 불어 깃발이 펄럭였는데 한 스님이 “바람이 움직인다.”고 하자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했다. 논쟁은 옆의 스님들까지 합세해 그치지 않고 계속됐다. 이를 지켜보던 혜능이 학인들 앞으로 나가서 “그것은 바람이,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일 뿐이다.”고 했다. 대중들이 모두 놀라 쳐다보고만 있자 인종 스님이 혜능을 상석으로 모셔 앉히고 그 깊은 뜻을 물었다.

돈오 남종선의 심성론과 불성론을 대표하는 ‘풍번문답’이다. ‘풍번문답’ 고사는 문헌상으론 사천선계(四川禪系)의 선종 사서인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에 최초로 등장하는데 《조계대사별전(曹溪大師別傳)》, 돈황본을 제외한 기타본 《단경(壇經)》 등에도 실려 있다. 현존하는 《단경》들 중 가장 고본(古本)인 돈황본과 왕유(王維)의 〈육조능선사비명〉에 이 고사가 없는 점은 아쉬움이 있긴 하나 현재 선학계는 대체로 ‘풍번문답’의 역사적 사실성을 긍정한다.

혜능선의 ‘풍번문답’은 전혀 새로운 창작의 심성설이었을까? 아니다. 많은 다른 선문답들처럼 혜능의 ‘풍번문답’ 역시 전고(典故)를 해보면 그 모델이 이미 중국 전통 사상 속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편에 이런 고사가 나온다.

공자가 동쪽으로 유력을 떠났을 때, 두 아이가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내용인 즉, 한 아이는 “나는 해에 가까워지려고 해가 뜰 때 그 쪽 가까이에 있는 마을로 갔더니 한낮이 되니 그만 해로부터 멀어지더라.”고 했다. 다른 아이는 “나는 해가 뜰 때 해와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더니 한낮이 되니 해에 가까워지더라.”고 했다.

논쟁은 계속됐다.

한 아이가 “해가 멀리서 처음 뜰 때는 마차지붕처럼 크더니 정오가 돼 가까이 오니 쟁반만 하게 작아지더라. 이는 멀면 작게 보이고 가까우면 크게 보인다는 일반의 상식과는 전혀 어긋나는 게 아닌가?”라고 했다. 그러자 다른 아이는 “해가 처음 솟을 때는 서늘했는데 한낮이 되니 아주 뜨거웠다. 이는 불로부터 가까우면 덥고 멀면 서늘하다는 상식과 일치하는 게 아닌가?”라고 반박했다.

공자는 이 아이들의 논쟁에 결정적인 정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자 두 아이는 공자를 비웃으면서 “당신께서 많이 아신다고요?”라며 조롱했다. 두 아이가 벌인 해가 사람으로부터 멀고 가까울 때 생기는 현상에 대한 논쟁은 관측 시각에 따라 상반된 결론이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이를 생각해 내지 못해 두 아이의 논쟁에 시비 판정을 내려줄 수 없었다. 아이들의 논제는 극히 경험적이고 상식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공자는 철학적 사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급기야는 어린아이들로부터 조소를 당하고 말았다.

‘풍번문답’과 《열자》의 ‘태양논전’ 고사는 논쟁의 구조와 의미가 전적으로 같은 것이다. ‘풍번문답’에서 혜능이 내린 결론은 통상의 경험과 상식을 뛰어넘은 “인자심동(仁者心動: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이었다. 즉 모든 존재의 문제는 ‘찰나적(當下的)’이라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 깃발이 움직이는 것은 객관 세계의 이 같은 찰나적인 문제일 뿐이며 순전한 시각상의 직관에 의해 파악된 제행무상의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경계(境界)는 마음의 유전을 따라 명멸하고 만다는 유심론적 사로(思路)를 설파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마음(본성)이라는 본체와 깃발·바람의 움직임이라는 현상(작용)을 다 같이 수용하는 체용일여(體用一如)의 선리를 놓쳐서는 안 된다. 혜능선은 본체만 진리고 작용은 허깨비라고 버려버리는 게 아니라 ‘현상’도 불성의 체현으로 보고 동등한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즉사이진(卽事而眞)’의 현성공안(現成公案)들을 쏟아냈고 “두두물물이 부처 아님이 없다.”는 범신론적 냄새가 풍기는 대법문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풍번문답’이라는 혜능의 공안은 돈오 남종선의 심미 경험을 정형화한 기조(基調)가 됐다. 선수행이란 미학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심미 체험이다. 선이 추구하는 심미 경계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공(空)·담(淡)·원(遠)이다.

위산영우 선사(771∼853)가 밭에서 일을 하던 중 제자 앙산혜적에게 수기 설문을 했다.
위산: (밭을 가리키며) 저 밭의 구릉이 어떤 곳은 높고 어떤 곳은 낮구나.
앙산: 어데가 높고 어데가 낮단 말입니까?
위산: 만약 네가 못 믿겠다면 밭 한가운데로 가 서서 양쪽을 쳐다보아라.
앙산: 중간에 가서 설 필요도, 양쪽 둔덕에 올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위산: 고랑에 물을 대보면 물은 능히 평형을 잡아 높고 낮은 곳을 구별해 줄 것이다.
앙산: 물 또한 일정한 정형(定型)이 없습니다. 그저 높은 곳은 높을 뿐이고 낮은 곳은 낮을 뿐입니다.
위산은 앙산의 마지막 대답을 듣고는 크게 만족해 하며 문답을 거두었다.

물리적 관점에서 보면 밭 구릉의 높고 낮음은 정확한 측량이 가능하다. 그러나 위산은 《열자》의 ‘태양 논전’에서처럼 고의적으로 상식적인 문제를 가지고 질문을 던져 선리를 상량(商量)했다. 앙산의 대답 중 “양쪽 둔덕에도 올라갈 필요가 없다.”는 대목은 아집(我執)·법집(法執) 모두가 필요없다는 설파다.

만법(불법)은 본래가 평등한 것이고 둘이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선리(禪理)를 깨친 앙산이 끝내 어떠한 상(相)에도 집착치 않는 무심(무념)의 경지를 펼쳐 보인데 대해 위산이 만족감을 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혜능의 ‘풍번문답’도 뒤이어 계속된 인종 스님과의 문답에서 “불법불이(佛法不二)”라는 결론으로 끝을 맺고 있다.

《열자》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는 혜능의 ‘풍번문답’은 위산-앙산의 ‘자두고나두저(這頭高那頭低)’ 등 수많은 선사들의 화두들이 뒤를 이으면서 학인들에게 참구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중국 전통사상의 심성론을 흡수해 정립한 혜능의 주관적 유심주의는 명·청대에는 왕양명(王陽明)의 심학 성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심학의 ‘양지(良知)’는 혜능의 ‘본래면목(평상심)’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래서 왕양명의 심학을 일명 ‘양명선(陽明禪)’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처럼 돈오 남종선은 중국의 전통사상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아 성립한 또 하나의 전통 사상으로 자리를 굳힌 후 후발적인 문화사상 형성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받고 주는 식’의 순환을 했다.

3. 선취와 승복―치의(緇衣)

과연 선불교가 풍기는 냄새는 어떤 것인가? 느끼는 사람에 따라 각양 각색의 답변이 나올 법하다. 즉흥성·민중성·혁명성·간이성(단순성)·신속성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선불교의 특징을 아우르는 밑바탕은 담박·심원·공적(空寂)이다.

담박함은 시각상, 감각상으론 허(虛)·무(無)와 상통한다. 허와 무의 본고장은 도가(노장)이다. 담박(淡泊)을 대표하는 선가의 평상심은 도가의 자연관을 발전시킨 것이다.

유원(幽遠)함 역시 무한·허·무를 추구하는 노장의 심미 경계를 더욱 심화시킨 선미(禪味)다. 선의 유원함은 고원(高遠)·심원(深遠)·평원(平遠)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고원은 선화의 산수색에서는 ‘청명’으로 나타나고, 인물에서는 ‘명료’함으로 구체화된다. 심원은 선문답의 모호성과 선화·선시 등의 아득한 몽롱성, 즉 언어 문자로는 표현키 어려운 알듯 말듯한 심오한 시정화의(詩情畵意)로 나타나 상외지의(象外之意)를 느끼는 심미감을 제공해준다. 평원은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수묵(水墨) 선화와 성질이 밝고 깨끗한 인격의 충담(?淡)으로 구체화돼 선미를 풍겨준다.

선미의 공적함은 고적하고 조용한 허정(虛靜)의 생활태도로 구체화된다. ‘정(靜)’이나 ‘적(寂)’은 마음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는 조용하고 한가로운 생활환경과 심리상태를 뜻한다. 공·담·원은 서로가 유기체적인 역동성을 가지고 유심청원(幽深淸遠)한 선종 의경(意境)을 만들어낸다.

선가의 생활관은 간략하고 민첩한 간이성(簡易性)과 입의성(즉흥성)을 중시한다. 이 모든 선미와 선종 의경은 노장사상을 그 모태로 하고 있다. 단 선가의 기질이 호방하면서도 문아(文雅)를 결코 상실함이 없는 도가와는 달리 광기 넘치는 광방(狂放)과 조잡하고 세속적인 것도 결코 피하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우선 흔히 ‘먹물 옷’이라고도 부르는 승복의 빛깔이 노장의 현색(玄色)에 근원하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선과 노장의 밀접한 관련을 말해준다. 스님들이 입는 옷을 치의(緇衣), 또는 분소의(糞掃衣)라고도 하는데 그 빛깔은 먹물빛으로 구체화된 ‘현색’에 근원하고 있다. 원래 인도 승려들의 승복은 적색이었는데 중국 불교에서 승복 색깔이 먹물색으로 변했다.

오늘날 한국 스님들이 입는 승복 색깔도 먹물 빛깔의 담묵(淡墨)이다.

노장을 본고장으로 하는 현색은 흔히 흑색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래서 승복을 검은 색을 뜻하는 ‘치(緇)’ 자를 붙여 치의라 하고 불교 강원의 사미과 과정을 ‘치문(緇門)’이라 한다. 노장에서 도(진리)를 빛깔로 형용할 때 ‘현(玄)’이라 한다. 현색은 흑색에 적색을 더한 혼합색이다. 현색의 구체적 사례로는 천공색(天空色)이 예시됐는데 천공색을 ‘심청(深靑)’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심청을 영어로 옮기면 dark-blue다. 현색 또는 심청색은 고원(高遠)하고 아득한 유원(幽遠)을 상징한다.

그래서 노장에다 유가의 경학을 결합해 발전시킨 위진 시기에 성행했던 노장학을 ‘현학’이라 했다. 현학은 명확히 설명키 어려운 심오한 형이상학이라는 뜻으로 노장사상의 심오난명(深奧難明)함을 표방한 것이었다. 총 5천 글자인 《노자》에는 “현지우현(玄之又玄: 현묘하고 현묘하며)”을 비롯 ‘현’ 자가 11번이나 등장한다. 《장자》 〈천지〉편에도 심오난명의 불가(不可) 언설적 도를 “유기현주(遺其玄珠)”로 형용하고 있다. 이처럼 노장의 ‘현’은 영원불변의 존재, 즉 도를 뜻하는 그 철학사상의 핵이다.

이 같은 ‘현(玄)’의 의미는 위진남북조 때부터 현학과 불학이 합류하면서 불경 번역과 선학 저술에 ‘현’ 자를 사용했고 승려들의 법호에도 현고(玄高)·현장(玄?)·현랑(玄朗) 등 ‘현’ 자를 즐겨 붙였다. 한국과 중국 승려들의 복색은 전적으로 도가의 현색에서 비롯했다. 중국도 불교 전래 초기의 승복은 적색이었으나 동진(東晋) 시기에는 이미 승려를 ‘치의’·‘치류(緇流)’라고 칭해 승복의 빛깔이 흑색으로 변해 있었다. 치색(흑색)은 검은 색을 바탕으로 하고 그 위에다 적색을 더한 현색에 가까운 ‘현(玄)’의 형이하학적인 구체적 색깔이다. 따라서 현색과 치색은 같은 색깔이라 할 수 있다.

송의 찬녕(贊寧)이 저술한 《대송승사략(大宋僧史略)》은 《고공기(考工記)》를 인용, 치의의 색깔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문: 치의의 색은 어떤 모양인가?
답: 자색에 잔잔한 흑색을 더한 색깔인데 정색(正色)이 아니다.

불교 계율은 원래 순색을 금지하고 잡색, 즉 괴색(壞色)을 사용토록 하고 있다. 현색과 치색은 모두가 순색이 아니고 흑색+적색, 자색+흑색의 잡색이다. 이 점에서도 현색과 치색은 비슷한 색깔이다. 혹자는 현색과 치색은 모두가 흑색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도 한다. 노장의 현색과 선가의 치색이 선화에서는 먹물빛으로 구체화돼 수묵 산수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승려들의 옷감으로는 먹물을 들인 천이 사용됐다. 먹물옷이 승복으로 보편화되면서 ‘치의’는 사문을 일컫는 대명사가 됐고 치의와 백의는 곧 승속을 구분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현색·치색·심청색·흑색은 표현이 다를 뿐 다같이 도가와 선가가 언어문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유원한 진리를 상징하는 개념의 색깔로 통용하면서 자연을 가장 잘 드러내는 색깔, 즉 자연색(自然色)으로 정착됐다. 원대 석념상(釋念常)의 저술인 《불조통재(佛祖通載)》에는 “혜림(慧琳)이라는 승려가 황제의 신임을 받아 정사를 주도하자 당시 사람들은 그를 흑의재상(黑衣宰相)이라 했다”는 일화를 기록하고 있다. 흑색은 오도(悟道)의 경지를, 백색은 미오(迷悟)를 각각 뜻하기도 한다.

마조가 한 학인으로부터 “번잡한 설명과 지루한 논리를 떠나 불법의 요체를 간단 명료하게 설명해 달라”는 질문을 받고, “내 오늘 기분이 좋지 않으니 내 제자 서당지장 선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으라”고 보냈다.
학인이 서당에게 가니 “내 오늘 두통이 심해 말해줄 수 없다”며 벽장회해 형한테 가보라고 권했다. 학인이 회해에게 가서 같은 질문을 하자 회해는 “난 모르겠다”고 했다. 학인으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마조는 “장백해흑(藏白海黑: 지장의 머리는 희고 회해의 머리는 검다)”이라고 평했다.

이는 선적인 기봉이 회해가 지장보다 훨씬 낫다는 평이다. 그래서 선림에서는 ‘모른다’는 답이야말로 심오한 진리는 말과 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겸허한 자세이며 불법·진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무지(無知)의 지(知)’를 나타내는 명답이라고 찬양한다.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는 인도의 라즈니쉬 화상 같은 사람은 달마로부터 비롯한 ‘모른다’는 대답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명답’이라고 역설한다. 바보는 자신이 바보임을 모를 때 더욱 바보가 되고 만다. 그러나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의 ‘모른다’는 고백이야말로 진정한 앎이 아닐 수 없다.

선가의 먹물색은 승복에서뿐만 아니라 선화에서는 수묵 산수화를 성립시킨 사상적 배경과 당시의 사회 심미심리, 심오한 산수 자연의 비밀을 상징하는 자연색의 바탕색으로서 부동의 자리를 굳혀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승복의 색깔이 치색을 선택하게 된 현실적인 배경으로는 흑색인 도가 도사의 복장을 모방했을 가능성과 당시 조정의 관복이 흑색이었던 데서 영향을 받았다는 추정 등이 제기되기도 한다. 중국 최초의 사찰인 낙양 백마사(白馬寺)가 원래는 관서(官署)였던 것을 사찰로 한 것이라는 점과 ‘사(寺)’의 본래 뜻이 관사(官舍)를 뜻한다는 점 등도 이런 추정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어떤 문헌 자료도 없다.

어쨌든 선승들의 승복 색깔이 여러 차례 변화하고 심지어는 일부에서 백의를 입는 예도 없진 않았지만 기조적인 바탕색은 흑색을 벗어나지 않았고 선종이 노장의 현색과 같은 개념의 흑색을 숭상해 오고 있다는 사실 또한 변함이 없다.

도가사상을 가리키는 대명사의 하나인 ‘현(玄)’이 점점 그 의미를 확대하면서 선사상에 흡수돼 도사(道士)·관리의 복장이던 치의가 선승의 승복이 된 것은 아주 실감나는 선종 형성 과정에 미친 노장의 영향이다. 선화가 수묵을 자연색으로 선택한 것도 도가의 자연사상과 일치한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먼 곳의 산수를 바라보면서 산봉우리와 구름·비·푸르고 짙은 녹음 등의 갖가지 색깔이 뒤엉켜 딱히 무슨 색이라고 말할 수 없는 몽롱한 ‘현색(玄色)’을 이루는 정경을 쉽게 체험한다. 그와 같은 색깔은 결코 인공적인 색이 아니다. 그래서 수묵 산수화에서는 현색을 “5색(자연계의 색깔)의 어머니”라 한다. 이는 전적으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를 추구하는 노장의 ‘현(玄)’과 궤를 같이 하는 선가의 자연사상이며 의경(意境)이다.

선취(禪趣)의 저류를 이루는 공·담·원도 노장의 허·무 사상을 한층 심미화한 것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선이 추구하는 해탈 경계는 장자의 심재(心齋)·좌망(坐忘)을 심화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미(禪味)를 대표하는 공적·담박·심원은 노장을 그 근원으로 한다. 따라서 선의 이 같은 지취(旨趣)는 현불(玄佛) 융합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노자》 16장은 “마음 비우기를 극진히 하고, 고요함 지키기를 독실히 하면 온갖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더라도 나는 결국 그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致虛極 守靜篤 萬物倂作 吾以觀其復)”고 설파한다. 노자는 허(虛)와 정(靜)을 만물의 근원인 도의 기본적 표현으로 보고 있다.

《장자》 〈경상초〉편도 “평정하면 고요하고, 고요하면 밝고, 밝으면 비고, 비면 곧 무위로서 만사를 해내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正則靜 靜則明 明則虛 虛則無爲而無不爲)”라고 설파하고 있다. 허(虛)는 외재하는 주체적 도(道)가 이상 인격으로 향해 가는 과도적 과정이다. 즉 허(虛)는 대상화된 자기, 육체적인 자아를 버린 마음의 비움을 뜻하며 이것이 곧 심재고 좌망이다. 이 상태에 도달하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고 어떤 일을 해낸다는 의식 없이도 모든 일을 물아일체의 경계에서 편히 다 해낼 수가 있는 ‘무위이무불위’의 해탈 경계가 된다.

선학은 물론 교학의 한문 불교 경전들에도 ‘무(無)’자가 수없이 나온다. 무심·무념·무상·무주·무불 등에서 보듯이 마치 ‘무(無)’자는 불교의 전매특허 용어인 듯이 빈번하게 사용된다. 사실상 불교는 ‘무’자와 ‘공’자를 빼면 교리를 설명할 수 없을 지경이다.

‘무(無)’는 선학과 현학(노장학)을 잇는 교량이다. 혜능선은 “무념을 종지로 삼고, 무상을 체로 삼으며, 무주를 본으로 삼는다.(無念爲宗 無相爲體 無住爲本)”는 종통(宗統)을 선언하고 있다. 뭐니 뭐니해도 돈오 남종선의 핵심은 ‘무(無)’다. 선림의 학인들은 이 ‘무’자 관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자성을 볼 수 있고 선의 도리를 체험할 수가 있다. 그래서 한국 선방의 학인들은 오늘도 조주(趙州)의 ‘무(無)’ 자 화두를 들고 정진한다. 무자관(無字關)의 통과가 곧 견성이고 해탈이다. 선승들은 무자관을 통해 주관적 인식의 변화를 일으켜 유무·생사·색공을 초월한 열반의 경계로 진입하고 열반(空)에 조차도 머물지 않는 당당한 주체적 인간, 곧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진인이 된다.

노장의 ‘무(無)’와 선가의 ‘공(空)’의 연계성을 잠시 살펴보자. 위진 시기에 성행했던 불학의 반야성공(般若性空) 사상과 현학의 ‘무위위본(無爲爲本)’이 합류할 때 ‘무’가 ‘공’으로 해석됐다. 선종이 흥성하면서 ‘무(無)’는 오도를 뜻하게 됐고 ‘공(空)’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그 실천구조로 구체화시켰다. 보다 긍정적이고 현실적인 의미로는 개체 생명의 활력을 북돋우는 것이다.

혜능이 말한 ‘무념’이란 마음이 존재치 않는 것이 아니라 보되 보지 않고, 듣되 듣지 않는 무집착의 인생태도다. 결코 공심정좌(空心靜坐)하고 백무소사(百無所思)하는 사선(死禪)이나 장좌불와를 무슨 금덩이처럼 받드는 고목선(枯木禪)이 아니다. 생동하는 삶을 살면서 어떠한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무심이고 무념이다. 마음이 한 생각에도 머물지 않으면 행·주·좌·와가 모두 선이고 우물물을 길어 나르고 밥을 먹는 일 또한 선도(禪道)다. 선에서는 그래서 무심을 평상심(平常心: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본래적인 청정한 마음)이라 하기도 한다.

혜능의 무념(무심)을 평상심으로 발전시킨 마조 이후의 선은 ‘즉사이진(卽事而眞)’·‘촉목보리(觸目菩提)’라는 선학 명제를 제시해 일상 생활 중 부닥치는 개별 사상(事象)에서 선법의 자성과 공을 체득하고 실천했다. 이런 관점에서는 선화(禪畵) 속의 수묵 산수도 곧 ‘사(事)’이고 참선 오도의 법문이 된다.

선은 ‘공(空)’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법문을 ‘본래무일물’이라는 표현으로 설한다. 이는 ‘어떤 물건도 없다(無一物)’는 뜻이 아니라 ‘마음을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게 하라는 것’이다. 마음이 어떠한 것에도 머물거나 집착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공(空)’이고 ‘무념’이다. ‘공(空)’을 ‘무일물’로 보는 것은 곧 ‘공’에 대한 또 하나의 새로운 집착이 되며 그러한 ‘공’은 진정으로 깨친 경계가 아니다.

선학은 이처럼 반야공관 사상에 노장의 ‘무(無)’를 덧씌워 한층 승화된 인생철학과 심미관을 창작했다. 그래서 혹자는 “선은 노장학의 재향상”이라고도 말한다.

선취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담박’은 감각적으로는 노장의 허·무와 통하고, 사상적으로는 노장의 ‘현(玄)’에서 유래했지만 한 단계 올라선 ‘무(無)’로 진전, 보다 심미화했다. 《장자》 〈선성〉편은 “옛날 임금은 혼망한 가운데 살면서도 천하와 더불어 ‘담박’의 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제갈량은 《계자서(戒子書)》에서 “담박하지 못하면 뜻을 밝히지 못하고, 편안하고 고요하지 않으면 멀리 이를 수 없다.(非淡泊無以明志 非寧靜無以致遠)”고 일렀다.

장자나 제갈량의 담박은 시각상으로 보면 선가의 허·무와 상통한다. 욕심을 버리는 것, 즉 담(淡)은 무념·무심의 전제 조건이다. 따라서 담(淡)은 도가사상이 선가사상으로 변혁되는 과정이며 선이 노장의 영향을 받은 단적인 예의 하나다. 선은 흔히 만법을 포용하는 진공(眞空)의 우주의식(universal mind)을 ‘허공’으로 곧장 비유한다. 허공의 허(虛)와 정(靜)은 노장이 설파하는 현묘하고 또 현묘한 도의 본래 모습이기도 하다.
4. 선미(禪味)와 노장의 오물철학

조주종심 선사(778∼897)가 어느 날 수좌 문원스님과 이긴 사람이 참깨떡을 사는 내기 선문답을 했다.

조주: 나는 당나귀다.
문원: 저는 당나귀 안장에 매는 끈입니다.
조주: 나는 당나귀 똥이다.
문원: 저는 당나귀 똥 속의 벌레입니다.
조주: 그래 너는 당나귀 똥 속에서 어쩌자는 거냐.
문원: 저는 그 속에서 하안거나 지내겠습니다.
조주: 자아! 네가 이겼으니 참깨떡을 사오렴.

선어록들을 보면 똥·오줌 냄새가 진동을 한다. 똥덩어리·마른 똥막대기·똥독의 구더기 같은 용어들이 난무하고 부처와 조사를 똥막대기라고 꾸짖는 선사들의 가불매조(呵佛罵祖)가 넘쳐난다. 선림에 풍미해 오고 있는 이 같은 오물의 철학과 광풍(狂風) 또한 오물을 빌어 도의 편재론(遍在論)을 설파한 노장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승려들이 입는 옷을 ‘분소의(糞掃衣)’라 한 것도 오물의 철학이다. 원래 똥을 닦아낸 천을 주워다 기워 입었다고 해서 ‘분소의’라 했지만, 그 밑바탕에는 도의 편재성을 설파하는 오물의 철학이 깔려 있는 것이다.

조주·임제·덕산·운문 선사 등이 상당 법문이나 선문답을 통해 설파한 “부처란 똥막대기다.”라는 법문은 이미 《장자》 〈지북유〉편에 그 전형이 나와 있다.

동곽자(東郭子)가 장자에게 물었다.
“이른바 도란 어디에 있습니까?”
“없는 곳이 없습니다.”
“분명히 가르쳐 주십시오.”
“땅강아지나 개미에게도 있소.”
“어째서 그렇게 낮은 것에도 도가 있습니까?”
“기와나 벽돌에도 있소.”
“왜 그렇게 점점 더 심하게 내려갑니까?”
“똥이나 오줌에도 있소.”
(동곽자는 말문이 막혀 더 이상은 묻질 않았다.)

《노자》(제34장)는 “도란 널리 어디에나 있는 것. 대도(大道)는 만물에 내재해 있으며 좌로도 우로도 마음대로다. 만물은 이 도에 의해 생겨나지만 그 도는 이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도는 공(功)을 이루고서도 그 공을 내 것이라 하지 않는다.”고 설파했다.

선가는 노장이 설파한 이 같은 도의 편재론을 이어받아 도와 일체가 되어 그 본성을 공유한 진인은 도(道)처럼 만물과 함께 하면서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며 결과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사물의 진정한 본성(도)에 작용을 가함으로써 현상계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사자후를 토한다. 도와 만물 사이에는 체용(體用)의 연속성이 존재하는데 부처 또는 진인이 가지는 초자연적인 힘은 바로 이러한 도에서 나온다.

임제의 ‘진인(眞人)’도 원래 《장자》에 나오는 용어다. 장자와 선사들은 똥을 배설하는 대장(大腸) 운동이 단순한 대뇌 운동, 즉 사고가 가지지 못하는 우주적 가치(직관력)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선가가 외쳐대는 “부처는 똥독의 구더기”이고 “진인이란 마른 똥막대기다.”라는 법문의 선리(禪理)다. 선은 단순하고 쉽다. 그저 우리의 깊은 내면에 내재하고 있는 사량분별에 빠지지 않는 ‘보편 이성(불성·자성·평상심)’을 우리 의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할 뿐이다. 자기 내면의 자아를 붙들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 쓸모 없는 똥막대기가 되고 만다. 보편 이성이 가지고 있는 직관 관조 능력을 십분 발휘하면 바로 부처가 된다. 혜능선은 이를 ‘명심견성(明心見性)’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해 제시했다.

선사상의 저류를 이루는 오물의 철학과 광풍의 철학은 오늘을 사는 인류에게 새삼 충격을 주면서 구미 선진국에서도 선에 대한 열풍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노장, 특히 현학이 돈오 남종선 형성에 미친 영향은 여러 측면에서 폭넓게 조명되고 있다. 유의할 점은 갖가지 전통 사상을 흡수한 선불교의 사상과 철학이 단순한 모방이나 계승에 그치지 않고 창의적인 진전을 통해 나름의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5. 유가 입세주의와 재가 불교

만약 수행을 하고자 한다면 집에서도 가능하다. 수행을 위해 꼭 절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若欲修行 在家亦得 不由在寺)

돈황본 《단경》(36절)에 나오는 혜능선의 재가 불교·거사 불교·생활 불교를 강조한 구절이다. 돈오 남종선이 펼쳐보이는 선종 의경(意境)은 고요하고 한가로운 정조(情調)를 터전으로 하는 생활 불교 속에서 ‘고원간직(高遠簡直)’하고 ‘자유청진(自由淸眞)’한 삶을 사는 것이다.

노장적인 심산유곡 동굴의 은둔을 동경하던 문인 사대부들의 심미 심리는 인생 철학과 심미 정취가 물씬한 선불교의 몽환(이상)과 융합해 조용하고 편안하면서 담박한 낙토(樂土)를 추구하는 선종 의경을 만들어냈다. 이 같은 의경은 실은 유가의 정통적 입세철학(入世哲學)의 환화(幻化)이었던 것이다.

선종은 유가의 입세철학을 재가 불교·생활 불교로 흡수하면서 무겁고 딱딱한 고담준론을 즐기던 심미 정취의 표준을 조용하고 담박하며 맑고 텅빈 유원(幽遠)한 곡조로 변화시켰다. 선종 의경 형성에는 유가의 정통적인 입세주의를 따르면서도 먼지투성이의 속세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문인 사대부들의 양면적인 심리가 큰 몫을 했다.

입신양명을 추구하는 사대부들도 내심의 한편에서는 산천초목과 한담냉월(寒潭冷月)에 기탁해 감정과 상상을 토로하면서 공적무인(空寂無人)의 조용한 대자연을 동경했다. 공자의 유명한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仁者樂山 智者樂水)”는 명언도 이 같은 사대부들의 양면 심리를 잘 드러내 보여준다. 이러한 사대부들의 대자연 동경이 환화돼 선종의 의경을 형성했다. 그들은 자연과 동화되면서 얻는 유열과 안정감에다 내심의 정감과 인생 추구를 투사했고 이를 수용한 것이 선종의 의경이다.

중당 이후 많은 불교 종파가 화려한 종지를 전개했지만 사대부들의 이런 요구가 수용 가능한 불교 종파는 간정청묘(簡靜淸妙)한 선어록 등을 쏟아내는 선종의 종지와 의경 밖에는 없었다.

혜능은 《단경》(종보, 덕이본)에서 “불법은 세간 안에 있나니 세간을 떠나지 말고 깨쳐야 한다. 세간을 떠나 보리를 찾고자 함은 마치 토끼에게서 뿔을 얻고자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佛法在世間, 不離世間覺. 離世覓菩提, 恰如求兎覺)”고 설파했다. 세속을 떠나서는 불법을 구할 수 없고, 보지도 찾을 수도 없다는 얘기다.

또 그는 “마음이 곧으면 어찌 계가 필요하며, 행이 곧으면 선을 닦아 무엇하랴.(心平何勞持戒 行直何用修禪)”고 했다.(덕이본 《단경》 〈의문품〉)

성불을 위한 수행의 핵심은 명심견성에 있지 좌선 여부에 있지 않다는 설법이다. 숙연정좌하고 지계에 철저하던 초기 선종의 종풍이 이처럼 세속화, 사회화하면서 크게 개방되는 선종의 근본적인 일대 변화에는 전통 유가 문화의 영향이 중요한 배경이었다. 혜능의 《단경》 설법은 《논어》의 ‘직도(直道)’를 ‘행직(行直)’으로 바꾸어 표현했다. 또 혜능의 ‘불리세간각(不離世間覺)’ 사상은 유가의 ‘효’를 강조하는 예교(禮敎)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6. 결어

돈오 남종선의 선문화 형성에는 도가·유가의 전통 사상이 크게 영향을 미쳤음은 《단경》을 비롯한 많은 선어록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남북조 시기 고승이었던 혜원(慧遠)이 《만불영명(萬佛影銘)》에서 제시한 법성론이 선종에서 “푸른 대나무가 모두 부처의 법신이고, 울긋불긋 피어 있는 들꽃도 모두 반야다.(靑靑翠竹盡是法身 郁郁黃花無非般若)”라는 설법으로 발전하는 데는 노장의 자연관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선화에서는 이러한 선종의 설법이 “부처는 정신으로서 도를 그려내고, 산수는 모양으로서 도를 그려낸다.(佛以神法道 山水以形媚道)”는 화론(畵論)을 제시하기도 했다.

부처의 정신적 도에 감응해서 생겨난 산수의 모양(形)은 ‘부처의 정신적 도(불성)가 체현된 것으로서 ‘사(事)’이면서 곧 ‘이(理)’이고, 색이면서 곧 공이라는 얘기다.

선문화와 선종 의경 형성에 중국 전통 문화가 미친 영향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선학 탐구의 중요 과제다. 따라서 본격적인 선학 연구에는 노장학과 현학·유학 등의 천착을 필수로 한다. 한국 선학의 연구에도 이 같은 명제는 분명히 적용된다. 많은 선학도들의 선문화 성립에 대한 다양하고 깊은 연구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이번 담론을 마치고자 한다. ■

이은윤
전〈중앙일보〉 국장·종교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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