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
저 멀리 어둠 속에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야옹!”
“야옹!”

그 울음소리를 따라 다른 고양이들이 화답을 한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고양이들끼리 어울려 다니며 서로 핥고 물어뜯는 소리가 한 밤을 적신다. 가출한 고양이들의 놀이는 집 고양이들의 재롱과는 판이하다. 서로 뒤엉켜 가지각색의 놀이를 한다. 장난치는 놈들, 사랑을 나누는 녀석들, 뒤엉켜 울부짖는 녀석들, 어지럽게 엉킨 고양이들은 도시의 한 밤이 결코 조용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도시의 난장판은 고양이들에게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풍경은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을지로나 서울역의 지하도에만 가 봐도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노숙자들이 눈에 띈다. 노숙자들만이 아니다. 비디오방이나 노래방, 영화관에는 술꾼들이 넘쳐나고 술 냄새로 습한 골목에는 밤을 잊은 연인들이 팔짱을 낀 채 집을 찾지 못하고 있다. 곳곳에는 이혼한 이들이 넘쳐나고 사생아가 아무데서나 집을 기웃거린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우리 시대를 변태의 시대이니 신유목민의 시대이니 중세이니 하면서 가치관이 부재한 시대에 대해서 그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그 동안의 모든 가치가 부정되고 생활 패턴이 급격하게 서구화되면서 공동체 의식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에서 새로운 형태의 유목민처럼 하나의 가치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거나 고양이처럼 변덕이 모자이크로 얼룩진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현실에 카멜레온처럼 적응해 가면서 홀로 살아가려는 모습은 유목민이라기보다는 고양이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고양이라는 동물은 변태와 요염, 그리고 남의 영혼까지도 빼앗을 수 있는 날렵한 짐승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며 변태적으로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가장 자본주의적이며 도시적인 존재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고양이에 대한 이미지를 자아화하는 것도 이러한 고양이의 특징을 우리시대가 그대로 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혼을 믿으며 홀로 살아가는 고양이는 표범과는 달리 도시의 뒷골목을 떠돌고, 하이에나와는 달리 요염한 기품을 갖고 있다. 그래서 속도에 잘 적응할 뿐만 아니라 변화에도 잘 맞추는 가장 자본주의적이며 개인주의적인 동물이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늘 외롭다. 벼랑의 끝에 선 생명처럼 필사의 혼을 갖고 있는 그는 날이 궂거나 어두울 때면 홀로 하늘 높이 자신의 혼을 쏘아올리는 울음을 토한다. 그 울음은 편하게 잠든 모든 생명들의 영혼을 울리고 땅을 울린다.

그는 홀로 이 지상을 걸어가지만 이 지상에서 가장 깊은 곳에서 울음을 건져 올릴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며 시인들의 혼보다 훨씬 강한 푯대를 세울 수 있는 혼을 지녔다. 그러므로 그는 홀로 도시라는 광야를 걸어갈 수 있는 것이며 부드러움과 무서움을 동시에 지닌 영물인 것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의 삶의 방식이 이러하다. 그들은 가족이나 민족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 없으며 직업에 대한 책임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혼 하나만을 의지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가 낳은 인간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백날 기존이 가치관에 대해 떠들어 봐야 무의미하다. 새로 쓰는 역사의 시대에 새로운 인간형의 탄생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지금부터 고민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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