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곳은 절집과 바로 이웃해 있다. 매일 이른 아침이면 신자들이 찾아와 정성스레 기도를 하고 가는 모습이 창 밖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있어 ‘불교’는 무엇일까? 간절히 소원을 빌면 들어주고 자신과 가족의 평안을 지켜주는 온화한 모습의 ‘부처님’을 모셔놓은 곳, 그러하기에 찾아오면 마음의 평안과 정서적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곳, 그러한 곳이 ‘절’일 것이고 그곳에서 스님네가 말하는 것이 곧 ‘불교’일 것이다.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불교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선한 마음을 가지라고 하고, 불살생(不殺生)·불투도(不偸盜)·불사음(不邪?)·불망어(不妄語)·불음주(不飮酒)의 계를 지키며 살아가라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만이 불교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인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너무도 다양하고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켜 있다. 우리는 이 속에서 수없이 많은 문제적 상황에 직면한다. 작게는 개인의 윤리적 판단의 문제에서부터 크게는 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특정한 입장의 선택을 강요받는 데 이르기까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문제적 상황의 연속이고 선택과 결단의 연속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불교’는 단지 잠시 쉬어가는 ‘마음의 휴식처’ 외에 다른 기능은 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오랜 세월동안 불교는 그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극히 실용적 태도로 일관하여, 전파된 곳의 사회 문화적 관습과 융화되어 그 스스로의 교리와 체제마저도 변화시켜왔고,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충족시키려 노력해 왔다. 이는 불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깨달음’이라는 목표 역시도 그 시대와 장소의 사회적 요구에 따라서 내용과 성격이 변화해 왔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때문에 최근에 있어서도 사회구조의 개혁을 위해서, 혹은 자비와 평화의 가치, 생명존중의 이념을 전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최근에 새만금 갯벌을 파괴하는 방조제 건설을 막기 위해 진행된 ‘삼보일배’는 이러한 움직임의 감동적인 일례였다. 종교의 차이를 넘어 ‘생명’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일깨우기 위해 아주 천천히 전진해온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새만금 갯벌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다시 삼보일배를 하겠다고 나서게 된 이유가 되고 있는 부안 핵폐기장 백지화 문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각양의 이해가 개입된 오늘의 문제는 너무도 복잡하여 어느 누구의 손을 들고 편이 되어주기가 곤란하다. ‘보편적 가치’ 하나로는 그 모두를 설득하기가 힘들어져버린 것이다.

아무리 ‘보편적 가치’가 중요하다해도 당장의 지원금을 비롯한 경제적 지원을 외면하라고 강요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겠는가? 평생을 고단하게 오지에서 생계를 유지해온 그들에게 일확천금의 기회, 안락한 삶으로 편입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려야 한다고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설득의 어렵고 쉬움 이전에,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판단하기조차 힘들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 했다. 이 둘의 관계는 선후가 없고 경중이 없어야 한다. 이미 중생의 삶은 이 사회의 현실적 문제들에 얽히고 설켜, 그들의 ‘고(苦)’라는 것은 더 이상 개인적 차원의 것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물론 깨닫고 나면 그 모든 ‘고(苦)’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하면 할말은 없지만, 그렇다고 중생들 삶의 일차적 문제들을 도외시 해버린다면 이는 너무도 무책임한 것 아닌가?

상식적으로 당장 눈앞에 진행되는 전쟁의 와중에서, 혹은 눈앞에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이 도사리고 있고 당장 그 속으로 뛰어들지 못하면 도태되어버리고 마는 현실 속에서 깨달음을 위해 수행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불교가 그 소수만을 위한 것이 아닌, 보다 많은 중생을 위한 종교라면 이러한 현실적 문제들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른바 ‘깨달음과 현실 참여’는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문제는 어떤 ‘현실 참여’인가이다. 붓다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깨달음을 전하는 그곳의 말로 법을 전하라고 하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말로 된 ‘법’이다. 변화된 사회와 변화된 우리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그리고 우리가 요구하는 새로운 ‘방편’으로 무장된 것이어야 한다. 불교의 가르침이 현재를 사는 우리의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해석되어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재구성은 매우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허황되게 오늘날의 이야기가 불교에 다 들어있다고 떠들 일이 아니다. 어설픈 견강부회로 불교적 가르침을 현재의 문제해결을 위한 ‘만병통치약’쯤으로 만들어서도 안될 일이다. 흔히 범하게 되는, 불교 자체의 좋은 말들과 윤리적 명제들을 끌어다가, 그것이 애초의 전체 맥락 속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한 반성 없이 마구잡이로 섞어서 대안이랍시고 제시하는 일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현실에 대한 면밀한 고려와 불교 자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섣불리 조악한 체계를 구성한다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할 것이다.

분명 모든 현실의 문제에 ‘불교’라는 이름으로 대안과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다. 불교의 가르침은 이 사회의 구조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과 비판도 아니고, 과학적 지식과 통계를 바탕으로 한 것도 아니다. 또한 수행자가 아닌 범인에게 있어 불교의 진리라는 것은, 불교 자체가 아무리 철저한 인과율에 기초해 있고 반형이상학적이라 하더라도, 수행 속에서 획득된 초감각적 지각을 통한 깨달음이나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는 한 그것은 여전히 증명될 수 없는 가설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지난날에 있어 불교가 잘못된 ‘현실 참여’의 길을 갔던 예는 너무도 많다. 그러한 사례들로 비추어 본다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칼 마르크스의 이야기는 오히려 온건한 비판이다. 이는 아마도 그만큼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이들이 의지했던 것이기에 더욱 그러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인류 역사의 오랜 세월동안 발전해 왔고, 아직도 그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사상에 대한 이해와 실천은 오늘날의 문제 해결에 단서(그것이 문제의 원인에 대한 것이든, 해결책에 관한 것이든)를 제공해 줄 것이다. 게다가 종교가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종교를 만들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종교이고, 특정한 계급과 지역의 차별 없이 모든 이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종교라면, 그리고 인간 스스로가 그 ‘깨달음’의 길을 찾을 것을 강조하는 종교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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