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고메즈 지음 / 최은영 옮김

이 글은 Chung-Hwa Buddhist Journal No.6(1993, 7)에 실렸던 글로 원제는 “Talking about Precepts and Practicing Precepts”이다. 쭝화 포어쉬에 옌지우수어(中華佛學硏究所) 부옌지우위엔(副硏究員) 쩡쩐후앙(鄭振煌)의 중국어 번역을 참조하여 번역하였다. 이하의 각주 번호는 역자주.

불교는 윤리적인 신조(codes)와 규범(rules)을 매우 강조해 왔다. 도덕 또는 윤리는 불교의 숭고한 목적에 있어서 예비적 실천수행(prelimi-naries)과 본격적 수행에 들어가기 위한 중요한 기초이다. 윤리신학(moral theology)과 같이 세밀한 구별을 통해서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초윤리적 가치를 호소하는 것으로, 불교는 자신의 윤리적인 이념을 새로운 문화적 상황에 적응시켜 왔다. 그것은 ① (진제(眞諦)와 출세간의 형식으로) 초월성을 긍정하는 것과 ② 불교의 보다 큰 보편적인 수증론적(修證論的) 원칙을 호소하는 것에 의한 것이다.

전통적인 불교계율은 오늘날 불교윤리가 처해 있는 위기에 결코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다. 만약 계율(Vinaya)에 대해서 의미있는 재검토를 하려고 하면, 불교윤리적 사상의 기존 개념 내용과 기초를 재점검해야만 한다. 결코 불교의 결점을 부인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시대에 직면하여 의미있는 불교윤리를 갖추려면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을 구비해야 한다.

①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것과 전통적인 불교담론에 뿌리를 둔 것이어야 한다.
② 사회와 개인의 현재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③ 불교의 목적에 맞으면서도 불교 윤리적 담론에서 가능한 한 신비적인 요소와 화려한 수식을 줄여야 한다.
④ 사회적 현실뿐만 아니라 개인을 고려해야 하며, 그것은 한 개인과 모든 사람을 위한 신조가 되어야 한다.

우리들은 고대의 어떤 신비적인 것에 대해서 비판을 할 필요가 있으며, 불교의 윤리적 생활을 지지하는 신화와 상징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창조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종교적 경외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계율(Vinaya)’에 대한 공동 관심에서 우리들은 함께 이 자리에 모이고 이러한 성대한 회의에 참가하였다. 우리들 대부분은 불교의 의식(儀式)과 그런 의식의 사회학적 배경, 불교 전승의 역사와 절차에 깊이 매혹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특히 인류의 행위를 충분히 윤리적일 수 있게 만드는 불교의 이념(ideals)을 존경한다. 바꾸어 말하면 계율에 대해 흥미를 느낀다는 것은 윤리, 미덕,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자아의 수행이라는 광대한 문제에 흥미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들은 불교의 윤리적 이념들에 대해서 숭고한 존경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것들의 미래, 그것들의 생존, 그 의미의 보존과 정화에 관심을 가지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 때문에 나는 이 대회에 여러분들을 초청하여 계율문헌에 드러난 이상과 그 역사적 의의를 함께 사색하고자 하였다.

어떤 면에서 말하면 2천 년 동안 승단의 윤리적 신조들은 이미 인류의 미덕과 인류의 이상이 될 수 있는 모형을 제공해 왔다. 불교승려의 ‘미덕’에 대해서 서양인은 이미 몇 세기 동안 익숙하게 들어왔다. 5백 년 전 마르코폴로는 비록 그가 불교를 일종의 ‘미신’1)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도의 모범생활을 언급했었다. 서양사람들이 불교를 점점 더 이해하게 됨에 따라 더욱 존경하게 되었고 그들은 더욱더 불교와 불교도를 고도의 윤리적 종교와 종교인으로 여기게 되었다. 사실 오늘날 우리들은 여전히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불교의 ‘미덕’(virtue) 또는 ‘도덕’(morality)은 매우 특별하며 어떤 서양의 도덕 체계와 비교해도 훨씬 불가사의하다.”

1913년 리스 데이비스(Carolyn Rhys-Davids)는 팔리어의 실라(S┓la)라는 단어에 대해서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드러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 단어가 영어의 “도덕(morals)”이라고 번역되는 것은 그 뜻을 드러내기에 부족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아름다운 팔리어 실라(S┓la)의 원래 글자를 보류하고 싶었기 때문에 영어의 ‘도덕’ 등의 단어를 쓰지 않았다. ‘미덕(Virtue)’이라는 단어는 우아하지만 도리어 모호한 점이 있다. 실라(S┓la)는 도덕습관, 습관으로서의 선, 또는 도덕적 행위로써 조금이라도 다른 어떤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 부적절한 성관계를 갖지 않는 것, 성실할 것, 부드럽고 조화로운 언어활동을 할 것,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다.(C.A.F. Rhys-Davids, 1913: 269, n.2)

오계(五戒)는 마치 일체의 문제를 다 해결한 것 같다. 그녀는 “그것은 완벽하다.”고 덧붙였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오계는 분명히 완전한 아름다움(至善)을 갖추었다. 현대에 《불교윤리학》을 지은 저자들은 모두 기꺼이 리스 데이비스의 이러한 설명을 가지고 계(戒)의 정의와 가설을 확장한다.2) 일반적으로 모든 불교 경전의 범위 안에서 계(S┓la)는 인류의 행위와 자아실현을 위한 중심 역할을 한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도덕 또는 윤리를 인정하는 것은 단지 불교의 숭고한 목적을 위한 계를 예비적 실천수행이라고 보는 것이다. 불교의 예비적 실천수행이 전인류의 자아실현을 위한 도덕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현대 서구세계를 흡인할 수 있는 최상의 요소이다. 리스 데이비스는 상술한 자료 속에서 또한 “이러한 종류의 행위는 다만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중요한 기초이다.”라고 범주적으로 말했고,3) 또 “붓다의 계법(戒法)은 도살을 직업으로 하는 자에게 설한 것이지 비구에게 설한 것이 아니다.”라고 매우 계시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는 다만 수행의 기초로 인정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불교의 근본원리와도 연결되어 있다. 대략 100년 전 토마스 헉슬리(Thomas H. Huxley)는 전형적인 빅토리아시대의 관점에서 매우 부러운 듯이 ‘고타마(Gautama)’가 내린 결론을 ‘형이상학적인 걸작’이라고 언급하였다. “정연한 우주 속에서 항상하여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마음과 사물은 모두 실체가 없다.” “개체로서의 인간은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환상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들뿐만 아니라 세간의 만물과 현상은 모두 무궁무진한 우주의 변화 가운데에서 모두 꿈이나 환상, 물거품이나 그림자일 뿐이다.”(Huxley, 1893/1989: 124-125)

헉슬리는, 고타마가 그의 선구자들과 같이 그의 형이상학으로부터 ‘오직 하나의 행위의 준칙’(122)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헉슬리는 “고타마는 그의 선구자들과는 달리 윤회가 불교수행의 목적인 해탈을 잘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개아(Atman)이던지 범아(Brahma)이던지 상관없이 실체가 다시 있지 않으며 불멸할 때, 결국 한 사람이 다시 꿈꾸지 않기를 꿈꿀 때 윤회는 반드시 벗어날 수 있다.”(125-126)라고 생각했다.

헉슬리는 불교철학과 해탈이론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한 후에, 또 적극적으로 그가 이해한 불교윤리학과 사회적 실천을 칭송하였다.(126-127)

욕념과 정욕은 간단하게 육체를 절복하고 단련해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반드시 근본적으로 다스려야 하고, 또 이것을 꾸준히 배양하여 상반된 심리가 반복되는 습관을 극복해야만 한다. 다른 방법은 만물 일체에 대한 인자한 마음(慈悲)과 원한을 은혜로 갚는 것에 의한다. ……결론적으로는 완전히 우주진화 과정의 정수인 자아에 대한 긍정을 버리는 것이다.

불교의 놀라운 성공은 바로 이러한 윤리적 특성에 의한 것이다. 이와 같은 불교의 체계는 인간에게 영혼이 있음을 부인한다. 불멸에 대한 믿음과 영생에 대한 희망은 일종의 죄악이라고 여긴다. 기도와 제사가 어떠한 효용이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인간들은 다만 자기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불교의 원시적인 모습에서는 인간의 복종에 대한 맹세를 요구하지 않는다.

세속적인 도움을 깊이 구하려고 하지 않으며 편협하고 치우침을 거부한다. 그런데 이러한 불교는 놀랄 만한 속도로 고대의 상당한 지역에 전파되었다. 사실 오늘날의 불교는 전파된 나라의 미신이 내포되어 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인류의 주요한 신앙이다.

헉슬리의 찬사는 불교 경전과 역사에 대한 인식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또한 추상적 관념으로 학자로서의 비판력이 결여된 신념을 드러내고 있다. 만약 100년 동안 다양한 종교인식에 대한 학술연구와 100년 동안의 여러 불교연구를 유리한 면에서 본다면, 다시 불교에 희망을 걸어볼 수는 있을 것이다. 헉슬리의 평가는 만약 너무 순진한 것이 아니라면 다소 이상화된 것이다.

‘전파된 나라의 미신이 포함되어 들어갔다’는 류의 생각은 현대학자들은 거의 하지 않지만, 헉슬리가 해결하려 한 문제와 오늘날의 관심은 결코 다르지 않다. 진화론과 윤리 속에서 헉슬리도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곧 만약 자아가 없으며 영원한 생명도 없으며, 하느님이 없다면 도덕적 책임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이것은 헛소리나 난해한 학술적 변론이 아니다. 만약 자아가 없다면 불교도는 어떻게 업(karma)을 믿을 수 있는가? 이것은 윤리를 세우기 위해 형이상학적인 바탕의 철학적인 질문을 구성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초월이 아닌 세계 속에서 윤리의 의미와 공능과 성질을 생각하려는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들과 같이, 그리고 어쩌면 붓다 본인과 같이 헉슬리는 그가 ‘무아론’(doctrine of no-self)을 알기 훨씬 오래 전부터 자신의 자아를 상실했다는 사실에 부딪쳤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의 상실은 단지 한 개체로서의 인간의 의미와 목적 영역을 새롭게 건설하는 것보다 많은 의미와 결과를 가질 수 있었다.(Huxley, 1989)

어쩌면 고대의 인도에서와 같이 서양에서는 사회적인 자아의 상실은 모두 존재론적인 자아의 상실을 이끌어 냈을 것이다. 그러나 서양에서 이러한 상실은 일반적으로 전혀 유쾌하지 않은 공허함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 보여졌다. 과거 서양사상의 주류는 부정으로부터 단지 실망과 절망만을, 실체적 원인이 없음(groundlessness)으로부터 다만 허무(nihilism)와 텅빔(空無: nothingness)만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4)

이와 반대로 불교전통은 도리어 이러한 자아의 상실을 해탈의 가능성이라고 보았고, 또한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원인이지 결코 실망과 슬픔의 원인이 아니라고 보았다. 불교도의 입장에서 말하면 금욕은 황량하며 돌아갈 곳 없는 땅이다. 그렇지만 이 금욕이 우리를 극락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헉슬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차이를 관찰하였다. “우주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실체적 근원이 있다는 담보를 무너뜨리는 것은 서양에서는 실망만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행복한 탈출을 이끌어낸 것 같았다.” 그러나 의외인 점은 헉슬리는 비록 이처럼 전혀 거리낌없이 불교를 칭찬했지만, 그는 도리어 불교의 집착을 벗어나는 태도를 비판했다는 것이다. 헉슬리는 무아에 대한 불교의 통찰을 고전이론인 진화론과 비슷하게 보았고, 진화론과 유사한 통찰로부터 파생된 윤리 원칙은 결점이 있다고 믿었다. 희랍인은 지나치게 인류의 완전성을 믿게 하였다. 한편 스토아학파에서는 벗어남과 절망을 암시하였다.

인도는 고타마에게서 이미 보다 완벽한 물러남(withdrawal)의 형식을 갖추었다. 그러나 물러남은 단지 절반의 답일 뿐이다. 완전한 절망과 완전한 물러남 사이에서 헉슬리는 미래의 윤리를 보았고, 이미 인간의 유한성을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또한 그것을 바로잡아 가려고 노력할 수 있었다. 그는 “인간은 지나치게 젊음을 자신하는 것과 나이 들면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에 실망하는 두 가지를 멀리 던져버려야 한다.”(144)라고 하였다.

헉슬리는 순박한 낭만주의자가 아니며, 그의 논문은 한 때 어리석은 사람을 각성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형성한 가치와 자아의 불안함을 예측할 때마다 헉슬리가 제시한 문제제기를 통해 그의 천재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의 불교에 대한 인식은 빅토리아시대 영국인들의 불교와 ‘동양’에 대한 기대와 바람을 반영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서양의 지식인들은 그들 자신의 제도에 대해서 믿음을 상실한 나머지 공무(空無)라는 외래적인 이상을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진화론의 지식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철학’이기도 한 불교에 대해, 헉슬리가 다음과 같이 서술한 것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불멸에 대한 믿음과 영생에 대한 희망은 일종의 죄악이라고 여긴다. 기도와 제사가 어떠한 효용이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인간들은 다만 자기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불교의 원시적인 모습은 인간의 복종에 대한 맹세를 요구하지 않는다. 편협하게 치우침을 거부하며, 세속적인 도움을 깊이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이러한 서술은 놀랍게도 서양 지식인들의 희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만약 누군가 불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들은 계속해서 윤리적인 신조(codes)와 규범을 강조하며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 설사 ‘순종’(obedience)이라는 단어가 가장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헉슬리가 서술했던 벗어남의 불교(disembodied Buddhism)를 지지하기 위해 우리들은 여전히 어쩔 수 없이 역사적 증거를 찾지 않을 수 없다. 불교는 이미 분명히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지녔었고, 또한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현실을 조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불교도 이미 자기의 윤리적 이념을 형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그 방향은 단순히 무아를 긍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금욕의 심리학과 사회생물학적 인식대상에 대한 헉슬리의 깊이 있는 통찰은 불교윤리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믿었던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의 불교에 대한 인상은 여전히 지금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다.

오늘 우리들은, 우리들이 이미 빅토리아시대의 담론 범위를 뛰어넘었다고 믿고 싶다. 우리들의 학술연구는 이미 약간의 진보를 이루었고, 불교에 대한 헉슬리의 인식은 가장 심하게 이상화된 추상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들은 분명하게 긍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인은 오히려 헉슬리와 똑같이 알고 있다.

정서(ethos)로서의 윤리적 이상과 불교 존재론 사이에는 분명하고도 논리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관계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는 정서적인 형식이거나 혹은 분명한 모종의 윤리이론의 반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역사적 사실이거나 변증을 통해서거나 불교는 의식주의와 법통주의, 그리고 정치적 흥미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적 증거 앞에서 이러한 모든 주장은 날아가 버리고, 단지 변증적인 부분에 있어서만 약간 성공한 것 같았다.

이것은 전혀 현대적인 개종정책(proselytizing strategy)이 아니지만, ‘벗어남의 종교’(Disembodied religion)는 변증론에서 상용되는 방법이다. ‘나의 종교’는 항상 옳으며, 그것은 그 종교의 사상에 의해 한계가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종교는 항상 현실에 대한 인류의 잘못된 이해가 된다. 한때 이것은 일종의 유효한 변증법이었으며, 지난 100년의 어떤 범주 내에서 이러한 변증법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나는 이러한 성공이 우담발화가 1000년에 한 번 피는 것과 같다고 믿지만,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으로서 불교가 가진 건전한 영향력까지 제한한 점은 잘못된 것이다.

더욱이 강제적인 수단이 아니라 인류의 이상을 뛰어넘는 사회적 여론을 찾는 힘을 이끌어낼 수 있는 불교에 큰 영향을 준다. 만약 구체적 행동의 규범과 그것이 형성되어간 제도적 역사가 있는 의식전통에 대한 언급이 없이, 다만 이상적인 ‘벗어남의 실체’라는 불교의 관념을 말한다면, 필연적으로 불교의 진리(또는 불교의 정직성)를 해칠 것이며, 또한 불교가 인류 지혜의 보물창고가 되는 데 손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행위도식의 체계가 아니라 최고의 지혜와 벗어남의 이론으로서 불교를 보는 경향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유럽, 인도와 중국의 사회사가 근본적으로 매우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바가 없는 것이며, 이것은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바라문교와 불교 상호간의 면밀한 연구는 불교의 윤리적 담론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본 논문 가운데에서 우리들은 다만 불교 자체의 윤리적 담론과 그 미래의 변화가능성만을 이야기하기로 한다.

불교가 그 윤리적 사상을 새로운 문화적 환경에 적응시키는 것은 윤리신학과 같이 세밀한 구분을 통해서 추론해 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이미 정해져 있었던 초윤리적 가치를 호소하였던 것 같다. ①(인식론적으로 이제(二諦)의 형식으로 표현하며, 윤리학적으로 세간과 출세간의 형식으로 표현하여) 그 초월성을 긍정하는 것. ②여러 가지 비교적 광범위한 수증론적 원칙을 호소하는 것(목적론적 윤리학).5) 이러한 두 가지 방법은 불교를 일종의 종교의식의 형태가 되도록 할 수 있으며, 또한 승가(僧伽: monasticism)를 일종의 불교의 자아존속의 기구가 되게 할 수 있다. 서양의 기독교도 유사한 종교의식과 수도원이 있었다.

이러한 윤리의 유효성을 드러내는 해석 방식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역설적으로 각지의 도덕적 습속을 가지고 재가 불교신자의 윤리의 범위를 정함으로써 윤리를 제한시킬 수 있다. 다른 한 편 그러한 해석방식은 또한 승단의 윤리적 이상을 분리시키도록 이끈다. 리스 데이비스의 말을 빌리면 윤리는 다만 재가 대중에 대해 설할 때에만 윤리이고 출가 대중에 대해서 설할 때는 다만 예비적 실천수행이라는 출발점에 불과할 따름이다.

어쨌든 오늘날 우리들은 불교의 윤리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전통불교의 계율은 결코 이러한 위기에 대해서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다. 이러한 위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며 헉슬리가 일찍부터 따끔하게 지적한 것이었다. 이러한 도덕적 위기는 단순하게 사람들의 도덕적 결심이 갈수록 박약해져 가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전통적인 윤리의 기초는 사회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를 막론하고 이미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만일 새로운 불교의 윤리적 담론, 확장해서 계율에 대해서 의미있는 재검토를 하려면 반드시 불교의 윤리적 이념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과 기초가 되는 것들을 수정해야 한다. 또한 반드시 불교의 광범위한 원칙을 형성하는 것에 대해 재고해야 하며, 아울러 이러한 광범위한 원칙의 시각으로부터 특수한 규범을 살펴보아야 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주장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곧 불교가 곧 답안이며 ‘진정한’ 답안은 어딘가 다른 세계, 해탈계에 존재한다. ……오직 해탈자의 시각으로부터 윤리학이 의미가 있다거나 무의미하게 된다.

이것은 특별히 어떤 불교도나 역사 속의 어떤 시기의 불교적 결점을 지적하고 나아가 불교의 전통적인 교조적 체계를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미 가정되어 있는 이상적 기초 위에서 논의하거나 혹은 원시불교의 입장으로부터 논의하거나 붓다가 어떠 어떠해야 한다고 계율을 정한 입장에서 토론하거나 한다. ……혹은 심지어 붓다가 실제로 이미 잘못을 범한 뒤 계율을 정한 입장으로부터 논의하는 것은 모두 불충분한 것이다.

불교가 해결방안이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한 것이 아니며, 설사 불교가 해결방안의 하나라고 말한다고 해도 불충분한 것이다. 우리들은 반드시 불교가 어떻게 해서 해결방안을 제공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고 아울러 불교전통이 어떤 해결방안을 제공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또는 어쩌면 ‘해답’이라고 불릴 수 없는 어떤 것을 제공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현대 불교도를 위한 보편적인 윤리의 내용과 형식의 기본 요구에 최소한 부합할 수 있는 해결방안을 제시해야만 한다.

만일 무감하거나 냉소적인 시대가 아니라면 우리들은 미망을 벗어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들은 학자와 수행인이 미망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인류가 이전보다 더 냉담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자아와 가치가 포함되어 사회적인 배경으로 완성된, 기초적인 윤리감각을 빠르게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며, 현대에 이르러서 우리들은 자기에게 충실하다는 변명을 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이기심을 양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의 의견과 행위가 포함된 사회적 배경이 결여된, 이 시대의 이기심이라는 이상은 더 이상 정신적인 이상을 지지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또한 불교가 과거에 생활행위의 체계로서 실행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되었던 행위규범의 형식도 더 이상 지지하지 않는다.

매킨타이어(Alasdair Maclntyre)가 《덕의 상실(After Virtue)》에서 밝힌 것처럼, 불교는 대중적 가치의 침식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10년 전에 쓰여진 이 책에서 작자는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환상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다만 우리가 사는 시대를 로마제국의 말년에 비유한다.(Maclntyre, 1981: 244) 로마제국의 도덕적인 공동의식이 사라졌을 때, ‘미덕’은 소수의 새로운 신도와 수행인의 전문영역으로 변해 버렸다. 매킨타이어는 오늘날 우리들도 또한 작은 공동체사회에 지지기반을 둔 도덕생활을 요구한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도덕적 생활이 지탱될 수 있는 범위에서 새로운 사회형식을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장래 야만과 어두운 시대가 도래했을 때 도덕과 예의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지 않게 할 수 있다. ……(244)

(그러나) 이 때 야만인들은 변방에서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며 그들은 이미 한참 동안 우리들을 통치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이러한 도덕의식의 결여는 우리의 환경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기다리는 것은 결코 ‘우리가 기다리는 고도’(Godot)가 아니라 틀림없이 매우 다른 성 베네딕트(Benedict)일 것이다.(245)

우리들은 확실히 하나의 성 베네딕트(또는 훨씬 많은 성 베네딕트)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행단체의 새로운 창시자는 분명히 성 베네딕트와 ‘매우 다를 것’이며, 더 보충해서 말한다면 고타마와 총카파, 도겐(道元)과도 매우 다를 것이 틀림없다.

예언자 역할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그리고 당연히 이것은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살았는가에 달려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는 충분히 혼란스러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모험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설사 미래의 50년 후나 어쩌면 20년 후에 공업화된 세계 속에서 핵심적 도덕과 정신적인 제도로 승단이 새롭게 되살아날 것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과거의 승단과 달라질 것이며, 과거의 계율과 달라질 것이다. (나는 우리들이 그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들이 이곳에 모인 까닭을 설명해 보자. 우리들 혹은 우리들을 이곳에 불러온 어떤 불특정한 단체는 승단의 새로운 정의와 그 지도원칙을 탐구하고자 한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계율에 따르는 어떠한 엄숙한 반성도 그 목적은 승단의 새로운 정의와 그 지도원칙을 탐구하는 데 있다.

이러한 탐구 가운데에서 우리들은 반드시 수많은 과거의 가설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현대윤리와 세속적인 도덕의 도전에 마주하여 우리들은 대중들이 익숙하게 알아왔던 승단의 계율 조목과 풍속의 자세한 절차를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마땅히 더 많은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반드시 자문해야 한다. “왜 우리들이 일반적인 윤리가 아니라 ‘불교윤리’를 지켜야 하는가? 왜 우리들은 불교전통 안에서 무엇을 찾기를 원하며 무엇을 찾을 수 있다고 희망하는가? …… 아울러 이러한 매우 다른 분기점들이 대치되어 있는 문화적인 영역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윤리적 이상을 구성하고 이끌어내고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승단의 이상은 승려가 아닌 일반 사람들에게 무엇을 제공하는가?”

이 모든 것은 복잡다단한 문제들이다. 오늘 나는 다만 새로운 윤리와 새로운 계율의 어떤 일반적이고 형식적인 필요조건의 영역을 여러분과 함께 탐색해 보고자 한다. 우리시대에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불교윤리학을 위한 조건들을 몇 가지 상호 중첩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1) 모순된 것 같지만, 어떤 이상적인 불교행위에 대해서도 새롭게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것과 전통적인 불교 담론에 뿌리를 둔 것이어야만 한다. 어떤 유효한 윤리도 반드시 과거와 이어져 있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다만 철학적인 윤리학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실천윤리와 종교윤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선조들과의 상징적이며 역사적인 관계는 일반적으로 윤리행위(특히 종교윤리)의 기초이며 또한 그 의미라고 생각한다. 연속성과 동질성의 느낌은 철학적인 설득력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들은 또한 반드시 과거와 단절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는 어떻게든 과거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거가 유사-역사적(quasi-historical) 과거 또는 여러 요소를 포함한 이상적인 과거라고 해도 우리들 모두 과거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우리들은 반드시 ‘윤리적 의미’의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이러한 윤리적 의미를 세우고 유지할 것인가? 문화의 지식화와 대중들 상호간의 행위의 딜레마, 내재적 동질성에 대한 사적인 딜레마로부터 윤리적 상징이 되는 계통(이상들, 신화들, 윤리적 신조들과 의식들)을 이해하고 새롭게 정화할 때에야 비로소 윤리의 의미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명확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조화(concord)’이지 동의(agreement)가 아니다. 종교담론이 세속의 대중담론처럼 격렬해지거나 혹은 비평가로서의 행동이 되려면 사실상 불일치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의미(meaning)는 결코 ‘진리’(truth)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의하라. 또한 의미는 불교의 ‘진실이며 본래적인’ 가치의 발현 혹은 회복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며, ‘몇 세대를 이어가면서 문화적 인습이 된 것을 벗어난’ 가치로부터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문화를 떠난 윤리는 있을 수 없다. 종교적 전통이라는 것은 비록 우리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행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과거 세대로부터의 문화적 인습이다.

지금 우리들이 이곳에서 말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뿐만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어려움은 한편으로는 신화식의 과거를 보존해야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의미와 운용방식을 생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미 우리들 자신을 형성시킨 정화된 신화와 똑같다고 말해질 수 없으며, 또한 현재의 시사적 흥미(actualities)와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윤리의 전통적 지식에 대한 담론에 있어서, 한편으로 우리들은 반드시 과거와 같은 기호(token)로부터 대안을 찾아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 오히려 현재의 우리와 그 연계를 보존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기본적 교리들로 일상적인 고전과 현대 변증론자에 의해 늘 쓰여질 두 가지 교리를 생각한다. 불교도는 도대체 불교의 궁극적 목표를 윤리행위의 기초로 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비의 원칙을 윤리행위의 기초로 하는 것인가? 어쩌면 우리들은 몇 가지 방식으로 이러한 원칙을 인용하여 같은 주제에 대해 단순하게 변주를 반복하는 데 빠지지 않고 진일보된 반성을 계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원칙의 첫째는, 기본적인 윤리원칙에 쓰여지지는 않을 것 같지만, 윤리원칙의 비윤리적 기초에 쓰여진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윤리를 이끌어내는가? 이것이 전혀 분명하지 않다. 전통적 불교윤리 담론에서는 모두 ‘궁극적 목표’6)가 아니라 윤회의 우주론적 계층에 초점을 맞추었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를 도덕행위의 기초로 삼는 입장은 가장 미약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고대 아시아와 서양의 현대불교도 가운데에서 이러한 입론방식은 대부분 상당히 의심스러운 추측을 낳았다. 열반을 불교가 닦고 지켜야 할 기초로 보는 것은 이미 대승에 의해 비판을 받았지만 대승도 아직 고쳐야 할 것이 매우 많다. 서양에서는 서양에서 형성된 자체의 목적론이 있으며, 그 속에서 윤리철학자들은 이미 도덕 기초의 다른 개념을 찾아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그는 가장 먼저 “도덕은 만들어지지 않는 형식이며…… 목적이며…… 행위 자체와 분별되지 않는 것이며, 선한 것이며 그것 자체로 목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Frankena, 1980: 31) 대승철학자들은 초기불교도와 달리 다시 엄격한 목적론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상의 수증론적(soteriological) 목표인 열반은, 대승이 윤리와 신화에 대한 반성을 하는 가운데에서 현세 윤리의 내재적인 여러 요소들로 모호해져 버렸다.7)

그러나 문제는 도덕의 목적론적 정의 또는 입론의 기초를 비형식화하거나 선험화하거나 이치에 맞지 않게 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열반의 특수개념으로부터 이끌어낸 도덕이 어떠한 성질을 갖추고 있는가에 있다.
의심할 바 없이 도덕과 종교사상 가운데에서 이끌어내는 것은 언제나 온화한 것이며, 또한 항상 추측성의 공리원칙 밖에 있는 가치, 사고와 입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열반을 완전한 아름다움(至善)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두 가지 모순된 개념일 수 있다.8) 그 가운데 하나의 모델은 열반의 초월을 설하는 것이며, 문자상으로 우리들의 현재 생존상태와 완전히 무관한 정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세친의 열반에 대한 검토는 이러한 개념(conception)의 한 예이다.

두 번째 모델은 하나의 비유로 열반은 일종의 심경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해탈자는 존재들 가운데에 위치하여 다른 사람과 함께 있지만, 상황의 인식에 있어서 일반사람과 매우 다르다. 우리들은 중관(中觀)의 어떤 저술 속에서 이러한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결코 분명하지 않은 설명이지만, 두 번째 모델은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려고 상상하는 경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

분명히 어떤 모순적 관념이 여전히 존재하며 이것은 대승의 윤리적 문헌 속에서, 미덕의 층차 가운데에서, 뗏목의 비유(the Parable of Raft)와 ‘무상계’(無相戒: formless precepts)의 담론 가운데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승의 영향을 받아서 열반의 정의가 변화한 것은 사실상 일종의 불교적 입론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곧 초월성의 윤리로부터 현세성의 윤리로 변한 것이다. 대승도 또한 일찍부터 고행주의와 염세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대승도 결국 하나의 승단 위주의 종교였다.9) 그러나 최소한 의식차원에 있어서 이미 중대한 전환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전변과 불교윤리의 두 번째 전통원칙인 자비의 발생은 밀접한 상관을 지니고 전개된다.

‘자비’(Compassion)는 결코 하나의 윤리적 행위의 입론을 지지하지 않으며 광범위하고 특이하며 모호한 말로서 하나의 미덕을 대표한다. 그것은 선량한 정감과 선량한 행위를 모두 포괄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담론 안에서 ‘동체대비’(同體大悲: Universal Compassion) 자체는 기본적 윤리원칙을 가진다. 전통적으로 자비의 담론은 동체대비를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 같았으며 아마 궁극적으로 이와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기본규범과의 관계에서라면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 못했다.10) 예를 들어 그러한 자비를 최고의 또는 기본적 역할이라고 주장하는 (예를 들면 연화계(蓮華戒: Kamalas뇹칕a)와 같은) 사람들조차 그것을 일종의 예비적 실천수행, 특히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수행과는 관련이 있지만 윤리규범의 세세한 조목과는 무관하다고 보았다.11)

계율에 대한 고대의 설법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필요성은 다만 새로운 계율을 확립하기 위한 표면적인 두 번째 필요조건일 따름이다.

2) 승속(僧俗) 두 집단의 현대의 윤리적 신조인 현대윤리는 결과적으로 반드시 현재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사회의 현대적 시공(時空)은 당연히 개인의 현대적 시공을 포괄한다.

탄력성 있는 방식을 갖춘 어떤 한 가지를 찾아내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다. 그것은 일체의 연속감과 안정감을 상실하지 않고 사회환경과 문화적 관습에 적응하기에 충분히 탄력성 있는 방식이어야 한다. 또한 사회 비평가로서의 종교적 공능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방면에서 불교가 마주한 중요한 도전은 재가 대중의 역할이 변화한 것이다.

그것은 특히 매우 빠르게 진화한 인류의 세속적 개념으로 한계지어진 것이다. 이 새로운 개념 속에서 인류는 생물학적 실체로 정의되고 그들의 인간적 정체성은 결코 살아 있는 유기체의 맹목적인 추진력과 한계성과 연약함을 벗어나서 성립될 수 없다.

더 심각한 것은 인류의 정체성과 사상을 토론할 때 두뇌의 생리적 특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인류는 최소한의 부분으로서도 이러한 생리적 특성을 타고났다. 그러므로 개체의 인류로서의 개인은 나아가 정치적 혹은 정신적 계층은 별문제로 하고라도 유전상의 가치에서 볼 때 진일보하였다. 만일 진화된 인류개체가 다만 하나의 이상, 하나의 지적 작용과 하나의 정밀하고도 강력하고 주요한 신화라고 인정하게 되면, 이러한 신화는 윤리라는 것은 금욕적 억제와 완전한 아름다움의 개념이라고만 생각하게 할 것이며, 이것은 고전적인 (그리고 동시대의) 불교윤리에서 담론했던 표현과는 매우 다를 것이다.

어쨌든 불교의 도덕사상의 (신화적, 구세적 혹은 철학적) 기초들과 더불어 아마 아직도 (출가자와 속인의) 조직적 기초들은 필요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격렬한 역사적 변화에 부합해야 한다. 사회정의의 발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이미 정신상의 높은 단계와 정신의식의 형식을 제창한 사람들을 수상쩍게 여기게 되었으며, 이들이 그러한 정신적인 것들을 억제와 착취의 도구로 제공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과거에 마음이라고 했던 것이 잠재의식과 정서생물학 등의 과학분야에서 두뇌로 발견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이미 미덕을 일종의 염막이라고 생각하지 더이상 그것이 정신상의 숭고한 동기를 추구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러한 두 가지 중요한 전변은 가치와 도덕의 높은 층차적 관념, 그리고 미덕을 제한적인 도덕이라고 여겼던 전통불교의 두 개의 도덕적 지주를 위협한다.

개체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관념의 변화로 말미암아 심지어 아시아에서도 이미 불교 조직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계율에 대한 반성과 불교윤리에 대한 반성은 일반적으로 몇 가지 충실하면서도 비판적인 면모를 직시해야만 한다. 그것은 여성의 전통적인 입장과 공개적인 경멸, 아래에 서술할 윤리문제에 있어서 보다 모호한 입장을 가지는 것에 대한 것이다. 곧 전쟁과 평화, 동성애, (단지 노예와 하인에 대해서 인자하게 대할 것을 권하는 것과는 대조를 이루는) 사회정의와 같은 윤리문제에 대한 입장이다.

새로운 계율은 반드시 과거의 윤리원칙으로부터 파생하여 건립되어야 한다. 사회를 지배하는 도덕법칙은 반드시 사회의 모든 성원이 공동으로 준수하는 미덕의 목표 또는 정의에서 건립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의 완성은 세속생활의 승단화(혹은 만일 승단이 지속되어갈 것이라는 예측이 맞다면 승단생활의 세속화)에 의지할 수 없다. 그것은 새로운 금욕적 억제의 개념을 건립해야 하며, 현대인은 인류의 생물로서의 본성(왜 솔직하게 동물성이라고 할 수 없는가?)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곧 헉슬리가 보았던 당시의 새로운 생물학적 도전이며 오늘날 우리들이 당면한 도전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적인 불교 윤리사상가들이 가장 견지하려고 했던 어떤 개념을 위협할 수 있을 것이다. 승단의 가장 높은 계층의 입장에서 이러한 변화는 높은 계 혹은 무상계(無相戒)의 특권적 적용과 심지어 그들의 윤리적인 실행 가능성에 대해 도전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또한 재가 대중의 도덕적 차등지위에 대해 도전한다. 도덕 심리학의 측면에서 이러한 변화는 출가를 통해 세속적인 거부의 길로 들어선다는 초월의 관념에 도전하는 것이다. 사실상 그것은 출가의 가능성에 대한 도전이며 말할 것도 없이 완전하게 제거하려고 하는 성적 본능에 대한 도전이다.

그러므로 불교도덕은 반드시 진정한 인간에서 건립해야 하며, 그들의 정신성을 그들의 동물성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같은 것이 아니라면) 정신성과 동물성이 병존한다는 사실에 대면할 수 있어야 한다. 헉슬리는 19세기 과학혁명이 가져온 많은 도전 가운데에서 오직 지적이며 정신적인 실체는 생물학적 실체로 변형될 수 없으며 생물학적 실체 가운데 이러한 정신적인 실체는 없어서는 안 될 일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이런 정신적인 실체가 사회 조직, 대중과학, 특히 자아실현의 심리치료법에 의해 조장된 가치를 세속화시키고 이기심을 고취시켰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 담론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담론들을 가리고 보존할 수도 있으며 드러내거나 밝히고 도전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이러한 두 종류의 공능은 모두 필수적이며 양자는 불확실한 평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계산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에너지를 가리우고 보존하는 쪽으로만 쓰는 것을 걱정한다. 이렇게 한다면 불교의 윤리적 담론은 이 세계에 적응하고 활동하는 데 유효하게 기여하려는 목적을 실현할 수 없다. 이러한 공능은 내가 세 번째 ‘필요조건’ 안에 포함하였다.

3) 불교의 윤리적 담론은 반드시 효과적(efficacious)이고 유능하며(effective) 능률적(efficient)이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반드시 불교의 윤리적 목적에 맞아야 하고 반드시 충분히 목적을 달성해야 하며 아울러 또한 가능한 한 신비적인 색채와 과장된 수식을 줄여야 한다. 이것은 곧 어떤 윤리적 신조를 필수적인 것으로 만드는 환경을 인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윤리적인 신조를 필수적으로 만드는 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현실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 헛되이 현실을 비관하거나 멸시하는 것에 의해서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다.

불교의 윤리적 신조를 만들어 내는 현실은 바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인류의 열정이다. 보시와 지족(知足)을 제창하거나 규제하는 윤리규범은 어쩌면 이상적인 도식상에서 건립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가장 고무시키는 것은 다음과 같은 현실이다. 곧 우리들이 어떤 것을 원한다고 해서 바로 그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월급은 다른 동료처럼 그렇게 높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욕심내어 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규범과 미덕은 모두 먼저 남의 것을 탐내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만일 이상적인 규범과 미덕이 효과적으로 되려면 반드시 이상에 도달하려고 몸부림치는 인류의 열정적인 현실이 부합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윤리적 담론은 ① 반드시 설복의 방식을 취해야 하며 강압적인 방식이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은 그것들이 분명하거나 잠재적이나 결코 두려움, 위기와 공포를 가리거나 혹은 폭력을 간과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또한 ② 반드시 잘못을 범한 사람은 잘못과 결함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며, 이러한 사람들이 범부이거나 성인이거나 비천한 신도 또는 좌선의 공력이 높은 노승이거나 마찬가지이다.

바꾸어 말하면 새로운 윤리의 구조는 반드시 인류라는 척도에 의하여 건립되어야 한다. 이것이 네 번째 ‘필요조건’(requirement)이다.

4) 윤리적 신조는 개체와 그 사회의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모든 개인과 어떤 사람이라도 준수해야 하는 전인류적인 신조이다.

이 네 번째 조건은 우리들이 윤리적 담론에서 늘상 범하는, (이미 정해진(signed)) 규범과 (제한적으로 규정된(signified)) 인류환경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불완전하게 조화하기 때문에 발생한 자연적인 혼란상태에 기반을 둔, 두 가지 잘못된 논의에 떨어지지 않게 경계심을 갖게 한다.

첫 번째 잘못된 논의는, 인간의 인식이 불완전하다는 것으로부터 문제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두 번째 잘못된 논의는, 규범이 억측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불완전하다는 것으로부터 문제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본질(nature)을 담지하는 도덕적인 언어는 반드시 이러한 두 가지 결여에서 균형을 잡은 것으로 본질을 삼아야 한다. 진상들(Gens)의 윤리적 언명은 반드시 개체의 환경과 감각, 개체의 인식, 개체의 열정을 인식해야 하며 진실하게 이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도원칙이 되려면 반드시 개인의 기대심리와 편애를 뛰어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우리들은 반드시 판단의 기준으로부터 지도 원칙의 기준을 이끌어내야 하며, 내면적인 감각의 준거(準據)로부터 사회행위의 준거를 판단해 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들은 반드시 인간이 두 개의 극단 사이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하나의 극단은 보편적용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권위이며, 다른 하나는 욕망의 변덕이다. 한 극단은 보편 상황을 강화하려는 절대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의 극단은 개인상황이 예측되지 않으므로 불안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 문제에 있어서 비교적 구체적인 하나의 예를 들 수도 있다. 매우 적은 숫자의 사람들만이 자아검토와 자아발로에 대해서 반성하는 공부를 한다. 공덕과 참회의 의식으로 회향하는 것은 불교의식 가운데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우리들은 아직 수행도상에 있는 수행자의 입장에 서서 현대의 윤리적 반성을 하지는 않는다. 참회와 자아발로와 윤리적 이상 사이에서 어떤 경계면에 이르면 그 반성은 더욱 적어진다. 이러한 의식을 ‘예비적 실천수행’이라고 하는 진부한 해석을 제외하고, 현대의 윤리학자들은 결코 그것들의 중요성을 해석하려고 하지 않는다.

조건 3)과 4)는 내가 마음에 그리는 윤리적 담론의 형식이 여전히 전통적 불교설법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 최후의 두 가지 조건은 불교의 윤리적 주장에서 가장 잘 인용하는 자비와 방편이라는 두 가지 원칙을 생각하게 한다. 나는 불교의 변증적 계통에서 이 두 가지 용어를 자주 인용하는 것에 반대한다. 자비와 방편 개념의 내재적 가치는 단지 이해와 행위의 원칙이라는 진지한 제한 조건 아래에서만 쓰일 수 있다. 그런데 오히려 이 두 용어가 우리들의 언어 속에서 내화되어 쓰여지는 (혹은 남용되는) 것으로부터 문제가 발생하였다. 또한 이전부터 성실하게 발전, 수정과 (가장 중요한) 비판을 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란스러워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까지 계속 단지 두 편의 중요한 논문(Nakayama와 Pye)에서 이러한 주제를 탐구하였지만 모두 철학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깊이 생각할 문제이다.

불행하게도 이 두 용어는 다만 그것들이 가진 모호함과 혼돈됨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최상의 변증력을 발휘할 수 있다. 자비와 방편은 예리한 검토를 하지 않는다. 이 두 개념에 대한 날카로운 검토는 불교 신조(symbols)의 발전과 정련을 위해 비옥한 기반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방편(Upa칪a)은 다만 말하기만 하고 비판할 것은 허용하지 않는 면허만은 아니어야 하며, 자비도 단지 어쩔 수 없이 행동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결과를 보호하는 주문만은 아니어야 한다.

대자비의 신화는 사회적 행동의 언어로 바뀔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 자비를 일종의 정서적인 미덕으로 배양해야 할 것으로 삼으며, 특히 자아를 관상(觀想)하는 것과 함께 운용할 때 도덕적 가치와 인류의 정체성 사이의 관계에서 이러한 반성은 유용한 신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특히 전통적인 서양의 자아관념과 충돌하는 오늘날 시기적절하다.(Taylor, Dennett)

‘임기응변으로서의 방편’(skillful means)의 개념은 의미의 교섭이라는 현대적 개념 속에서 울림을 얻었다. 이 때문에 발전된 방편(upa칪a)의 개념은 불교의 의미의 윤리학과 윤리학의 의미론으로 시기적절하게 이론적인 접근을 할 수 있었다.

여러 측면에서 자못 의심스러우며 변증적으로 사용될 용도를 제외하고, ‘임기응변으로서의 방편’은 또한 도(道)의 이론(Path theory)이며, 도덕상에서 그것은 도에 집착하지 않는 교리이며 또한 공성(空性: the emptiness) 혹은 공(空: emptiness)에 대한 처방이며, 인식론적으로 그것은 의미의 동력학적인 교리이다. 최후의 한 종류의 의미에서 방편은 ‘의미가 바로 행하는 것’이라는 이론을 내함하고 있으며 또한 ‘진리가 바로 의미와 교섭하는 것’이라는 이론을 내함하고 있다.12)

불교의 제도와 윤리적 이상 가운데에서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으며 발생할 변화를 개념화할 방식을 구하는 것으로서의 이러한 방편은 우리에게 가장 유용한 것이다. 문화적 적응을 위해서 교리적 혹은 이론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현대적인 ‘임기응변으로서의 방편’이라는 인식은, 비록 방편의 응용이 본래적인 것을 잃을 만큼 멀어졌다고 할지라도 결코 잘못 인식된 것은 아니다.

‘임기응변으로서의 방편’의 교리와 그와 밀접한 상관이 있는 공은 양날의 칼이다. 그것들을 써서 불교의 어떤 진술도 정당화할 수 있다. 또한 그것들은 불교 자체의 토대를 해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류현실의 구조적 성질에서 볼 때 직관에서 건립된 비판적인 도구로서는 최상의 것이다. 그것들은 반드시 구성한 경험 속에서 우리를 도우려고 하지 않는다.(똑같은 상황에서 열반도 우리에게 어떤 윤리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경험을 구성하는 현실적인 과정에서 방편과 공은 일종의 비판적 관점을 준다. 그것들은 불교교리 자체인 연기론의 확장에 있어서 최상의 것이다.

방편은 개인적 동기인 ‘의도’에서 나오는 불교를 성립시키는 무수한 방식을 이끌어내며, 매우 비슷한 언어적 실재(rearlity)를 써서 고통(苦)으로 시작되는 세계를 건립한다. 방편은 비판적인 사상을 무장해제 시키지도 않고, 또한 모든 ‘진리들’을 의미없게(혹은 의미있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다른 어떤 도덕적 사상을 무력화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참됨’(true), ‘완전함’(good), 혹은 ‘옳음’(right)이 결코 우리들의 정서적이며 사회적인 것과 언어적인 생활현실 밖에 독립되어 있는 원시적, 본래적, 순수한 현실 가운데에서 발견될 수 없음을 내함한다. ‘옳음’은 개인성장의 과정을 통해서 발현되는 것으로 이것이 도(道)이며 의미의 교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의 과정 중에서 우리들은 하나의 세계를 받아들이며 이 하나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우리들은 또한 그것을 변화시킨다. 받아들여진 세계는 정감, 기억, 교리와 의식들의 우주적 총체이며 정형화된 것이 아니고 무의식적인 것이다. (마땅히 변형되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 변형된 세계는 이미 이전에 증득한 목표가 아니며 또한 증득할 수 있는 목표도 아닌 생활의 도이다. 줄곧 실체적 자성이 없다는 것(無自性)과 궁극적이며 실체적 원인이 없다(groundlessness)는 철학을 선양한 불교도가 이러한 윤리적 진리와 일반적 진리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제롬 브루너(Jerome Bruner)는 전통적인 서양의 근본주의에 도전하는데 있어서 다음의 문장에서 ‘진리’개념을 매우 훌륭하게 서술하였다.

우리들은 매우 많은 현실들(realities)을 건립하였다. 그것은 서로 다른 의도에서 건립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단순한 이론13)으로부터 그것을 건립한 것이 아니며 우리들이 구성한 경험 속의 무수한 방식으로부터 건립한 것이다. 그것들이 감관의 경험이던지 아니던지……, 우리들은 우리의 사회세계가 상호적으로 작용함을 통해서 얻은 가장 고도의 상징적으로 기호화된 경험을 통하던지, 또는 우리들이 열심히 책을 읽는 것으로부터 얻은 대리적인 경험을 통해서 (현실을 건립한 것이다.)…… 마음(혹은 문학의 의미)의 구조주의 철학이 결코 존재론이나 윤리적인 면에서 한 개인을 무장해제 시키는 것은 아니다.

책이나 세계경험의 해석은 모두 그것들의 정당성으로부터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정당성은 그것들이 피안의 원시적 진실세계와 상응하기 때문에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진실세계’는 인식론적으로 모호한 것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앙의 행위조차도 헛된 것이다. 반대로 의미(혹은 ‘현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이 두 가지는 끝내는 분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는 인류의 의도를 반영하는 모험적인 기획이며 인류의도와 그것의 정당성을 벗어나서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세계창조’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선험적 세계라고 생각되는 것에서 비롯되어 우리가 재창조하기 시작한 세계 차원의 본질에 의해 강요된 것이다. ……만약 이 세상(혹은 우리들이 쓰기 시작한 세계라는 텍스트 속에서)에서 의미들이 ‘구현되면’(incarnate), 우리들은 곧 행위 속에서 그것들을 받아들여서 우리들을 위하여 이미 변형된 세계를 다시 변형하며 그렇게 변형된 세계는 다른 사람이 시작할 세계가 된다. ……

그러므로 우리들이 불교계율을 반성할 때, 불교윤리를 새롭게 건립할 때 우리들 자신을 다시 건립하는 것에 의해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으며, 나아가 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도전을 완성하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과정이 일반적인 윤리적 원리, 진술, 명제, 금지와 관련된 진상들(Gens)을 연구하고 수정하며, 그리고 생성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단순히 이론적인) 규범과는 무관한 것이며 행위와 행위의 의미에 관계되는 것이다. 규범은 도덕적 선택과 행동을 이끄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지닌 의미를 이끌어내는 기준이다.

그러나 의미라는 것은 하나의 언어와 사회의 사실이기 때문에 단순히 심리적 동기를 창조하거나 윤리적 담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계율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곧 문화적 (그리고 역사적) 현실을 토론하는 것이지 이미 해체된 이성의 원리를 토론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의 공통언어와 하나의 의미를 생산하는 공통의 방식, 하나의 공통의 이야기를 찾는다. 의미의 생산이라는 개념은 미셀 로살도(Michelle Rosaldo)가 이미 적절하게 서술하였다.(1984: 140)

의미는 공적 생활의 사실들이다. ……문화적 패턴들(사회적 사실들)은 모든 인류의 행동, 성장과 이해의 규준을 제공한다. 그렇게 해석된 문화는…… 명제, 규범, 계획 혹은 믿음이라는 것이지, 그것이 사람들에게 이성적으로 관계지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연상(聯想)의 연결고리에 의해 떠오르는 인상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행위자의 세계 속에서 연관성, 가능성과 의미의 성질을 설명할 수 있는 집합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은 명료하게 문화적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문화는 민족지 학자의 서술에 기록된 특징보다 항상 풍부하다. 왜냐하면 그 진실의 정황이 결코 일상생활의 의식(儀式)에서 명확하게 드러난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일상 행위에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행동 가운데에서 저절로 자기의 신분과 동료들의 움직임을 드러내게 된다.

만약 우리들이 “문화는 민족지 학자의 서술에 기록된 특징보다 항상 풍부하다.”는 말을 “윤리적 경험과 실천은 승단의 규범과 철학자가 추정하여 제정한 규범보다 항상 풍부하다.”는 말로 바꾼다면, 로살도의 문화에 대한 진술은 내가 이 안에 표현하고자 한 입장의 정수를 요약한 것이다. 규범과 관념은 모두 서로 역동적인 구조의 일부분이며 이러한 구조는 그렇게 이성적이거나 논리적 또는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은 대인관계와 언어의 산물이다.

이 구조는 종교적 의식과 이야기 속에서 가장 잘 표현되고 보존되며 변형되어 있다.14)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의식(儀式)과 인간 상호간의 역동적인 텍스트를 쓰는 것이 아니며, 전체적인 해석을 가할 필요도 없으며, 지식과 이성으로 이해한 층차상으로서의 ‘표현’도 필요 없다. 오늘 우리들이 이러한 회의에 출석하여 많은 증거를 들며 설명할 필요도 없다. 우리들이 생존하는 이러한 사회 속에서 이성적인 탐구는 의미를 생산하는 상호적인 과정의 주요한 부분이다. 학자들과 학파는 일종의 제도들이며 의미의 협상을 위한 일종의 ‘공개 토론회’이다.

오늘 우리들은 새롭게 불교적 계율의 의미를 협상하기 위하여 혹은 가장 잘 말하면 새로운 협상의 과정을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들이 부정확한 대화의 기초, 의미의 다양성과 긴장, 그리고 문화의 유동성을 일종의 위협이라고 본다면, 어떠한 다른 협상과 같이 이러한 유형의 협상은 진행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들은 결코 우리들 세계의 불확정성을 재난이라고 볼 필요가 없다. 우리들은 반드시 우리 세계의 불확정성을 극복하기 어려운 위험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서 광범위하게 윤리적 수요에 반응하는 불교윤리학을 재협상하기 위한 기회가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위험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들은 고대의 어떤 신비적인 것에 대해 비판을 하고 그것을 검증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은 더욱 새로운 어떠한 불교윤리생활의 신화와 신조를 지지할 신화를 새롭게 창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종교적 경외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고대적인 체계의 붕괴를 이해하는 것은 결코 아름다움과 경외의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 대니엘 대닛(Daniel Dennett)은 《설명된 의식(Consciousness explained)》에서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초기 당혹감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스스로 되돌아보자. 우리는 궁금증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불가사의함을 일찍부터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인식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우주의 복잡함에 대해 더 빛나는 비전들과 심오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초기 관점에서 ‘마술’은 상상에 대한 솔직한 실패를 감추기 위해 그것을 인조신(人造神)에 대한 개념으로 바꾸어 마음에 간직하도록 만들었던 따분한 속임수였다.

하늘을 가로지르며 황금마차를 모는 불의 신들은, 동시대의 우주학에 대한 황홀한 기묘함과 슈퍼맨의 가공할 만한 크립토싸이트 에너지만큼 흥미로운 엘란 바이탈(Elan Vital)을 만드는 DNA 재생산 기술의 반복적인 복잡함에 비교하면 단순한 만화책 속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더 이상 신비가 존재하지 않을 때 사물은 다르게 변화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아름다움이 계속 존재할 것이고 공포를 위한 것보다 더 많은 여분이 존재할 것이다. ■

최은영
고려대 한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天台大師 智확의 佛身觀 硏究>로 박사학위 취득. 현재 고려대학교 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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