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분재] 곽만연 동아대 교수

Ⅰ. 들어가는 말

불교는 자비와 보시의 윤리를 강조하는 종교이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하여 각막·신장·심장·다리뼈와 관절 등 거의 모든 인간신체를 다른 필요한 사람에게 이식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 불자 중에는 흔히 자기자신의 장기는 자신의 인격의 일부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신체를 그 일부로서 가지고 있는 그러한 인격은 칸트(I. Kant)가 말한 바와 같은 참된 인격, 즉 신체성을 초월한 진실된 자기가 아니라, 신체성과 동일한 차원의 하나의 “에고(ego)”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를 불교적인 입장에서 말한다면, 자기자신의 장기는 결코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자아중심의 사상으로서 불교에서는 그것을 부정한다.

나의 얼굴에 붙어 있다고 해서 내 눈은 나의 소유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자신의 장기는 모두가 부처로부터 베풀어 받은 것이라고 해야 한다. 우주로부터 베풀어 받은 것이 잠시 동안 나 자신에게 맡겨진 것일 뿐이다. 그것을 나의 것임으로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고 그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불교사상의 근본에서 벗어나는 사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들의 불교지도자들은 자기자신이 죽음 다음에 자기의 시신을 소중하게 장례 치르기를 당부한 분은 없었던 것으로 듣고 있다. 어떤 분은 자기자신의 시신을 버려서 다른 생물에 공양하라는 뜻을 말한 분도 있었다는 말도 듣고 있다. 자기자신이 지금까지 살아 왔다는 것은 삼라만상의 모든 생물의 은혜를 입었음으로 그들에게 자기의 시신이나마 보은의 뜻으로 공양하겠다는 거룩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들 인간이란 제아무리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아니하려고 조심해도 다른 생명의 희생 없이는 자기의 생명을 보존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깊은 죄업, 즉 숙업(宿業)이라고 할 것이다.

오늘날 의학의 발달로 뇌사상태인 사람의 장기를 다른 사람에게 공양함으로써 귀중한 생명을 살릴 수가 있다면 그러한 의료에 협력한다는 것은 결코 불교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으로 권장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협력을 모든 불자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것은 잘못하면 전체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기 쉬운 위험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기제공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장기를 제공하고자 원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의 환경이 아직도 사회적인 합의가 도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써 주저하게 만든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뇌사나 장기이식의 문제가 불교의 근본정신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게 밝히는 일은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불교계에서는 아직도, 어떤 의미에서는 지나치게 신체에 집착하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기에 아직도 장기이식이나 뇌사에 관해서는 불자로서의 명확한 연구나 발언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우리의 생각들은, 그 뿌리에는 여전히 옛날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애니미즘’이라던가 ‘샤머니즘’이라던가 아니면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유교적 윤리도덕의 관념이 불교의 가르침보다도 일상 생활면에서 우선하고 있는 탓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문제는 우리들이 불자로서 그러한 샤머니즘이나 애니미즘이나, 또는 예부터 이어 내려온 낡은 사회도덕율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또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자로서의 확고한 신념을 피력하기 위한 바탕으로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불교의 걸림없는 죽음관에 관하여 다시 한번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오늘날의 뇌사나 장기이식이라는 인류의 새로운 생명의 과제에 대하여, 참된 종교의 입장에서 그리고 불교도로서 떳떳하게 발언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교계(敎界)에서는 아직도 지나치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심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라고 하겠다.

 

Ⅱ. 불교의 생명윤리 사상

1. 뇌사란 무엇인가

1) 뇌사의 개념
과학기술과 서양 현대의학의 급속한 발전에 의해 인공호흡기가 발명되었다. 인공호흡기가 발명되기 이전의 인간의 죽음은 심장 박동이 정지하고부터 뇌의 기능이 정지하기까지의 시간차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의사의 사망확인은 가족에게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공호흡기라는 기계가 개입함으로써 인간의 생명기능 정지에 대한 시간의 차이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죽음이란 세 가지 징후, 즉 ‘심장박동의 정지·자발적인 호흡정지·동공의 고정화’를 죽음의 판단기준으로 삼았다. 이 세 가지의 기준은 시간의 차이가 없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에 의해 인공호흡기라는 것이 인간의 죽음에 인위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뇌사’라는 새로운 문제점을 초래하였다.

뇌사1)라는 것은 뇌의 기능 작용이 정지하고, 호흡의 정지가 일어나지만, 인공호흡기에 의해 인공적으로 호흡이 유지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심장의 박동, 폐호흡을 자신이 유지할 수 없지만 기계로써 유지되는 상태’이다. 1) ‘뇌’는 대뇌·소뇌·중뇌·연수·뇌교·척수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 중뇌·뇌교·연수를 뇌간이라고 한다. 뇌간은 호흡, 순환 등의 생명에 직결하는 기능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뇌간의 기능을 상실하면 생명유지에 가장 중요한 호흡이 정지하여 죽음의 상태가 된다.

종래의 인간에 대한 죽음의 징후는 동공의 고정화, 즉 뇌간기능의 정지가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죽음의 단계였지만, ‘뇌사’에서는 ‘뇌사의 기능정지, 즉 동공의 고정화’가 먼저 생기고, 심장의 맥박, 자발적인 호흡은 기계로서 유지되는 것이다. 기계에 의해 심장박동이나 호흡이 유지된다고 하지만, 호흡과 심장박동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가족들의 경우 좀처럼 죽음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이다.

특히 뇌사는 현대의학적인 관점으로는 죽음의 영역에 속한다고 정의할 수 있지만, 인공호흡기를 멈추게 하는 것은 역시 인간의 인위적인 행위가 개입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의 죽음에 인위적으로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안고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심폐사(심장사)’와 ‘뇌사’라는 두 가지의 죽음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런데 뇌사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그 세 가지 유형이란 다음과 같다.

  • ① 대뇌·소뇌·척수의 모든 부분이 본래로 되돌아갈 수 없는 상태의 기능정지로, 이른바 모든 중추신경의 기능정지이다.
    ② 전뇌사, 즉 대뇌·소뇌·뇌간이 기능정지한 상태.
    ③ 뇌간사, 즉 뇌간(중뇌·연수·뇌교)의 기능정지 상태.

미국 대통령위원회(1981), 일본의 의사회생명윤리간담회(1981)·후생성 연구반(1985)에서는 뇌사의 정의를 “뇌간을 포함한 전뇌기능이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올 수 없는 기능정지 상태”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의 영국왕립의학회연합총회(영국규약, 1979)와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뇌간의 영구적인 죽음’을 뇌사로 규정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전자의 입장이 널리 지지를 받고 있다.

영국의 뇌사 규정인 ‘뇌간사’를 자세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뇌간은 생명유지에 불가결한 호흡, 체온을 유지시키는 중추가 있고, 의식부분을 조절하는 기능이 있다. 뇌간에 장애가 일어나면 의식은 혼수상태가 되고 호흡이나 체온 조절 등의 생명유지에 필요한 기능이 정지한다. 따라서 뇌간은 죽음으로 다가가며, 결국 전뇌의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것을 ‘뇌간사’라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뇌간을 포함한 전뇌(대뇌·소뇌·뇌간)의 죽음’을 뇌사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뇌사의 원인으로서는 보통 자동차 사고에 의한 뇌출혈 등의 뇌가 손상되는 경우와 일산화탄소 중독, 약물중독에 의한 원인이 가장 비율이 높다고 한다.

2) 뇌사와 식물상태의 차이점
식물상태란 대뇌의 중요기능이 완전히 상실되었거나, 또는 거의 기능상실에 가까운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자발적인 호흡 기능을 유지시키거나, 심장박동, 갖가지의 반사작용 등의 작용을 담당하는 뇌간의 기능은 살아 있으므로 뇌간사, 전뇌사, 식물상태는 구별된다.

다시 말해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인 호흡기능, 순환계의 조절은 정상, 또는 정상에 가까운 상태이다. 그러나 뇌간사, 또는 전뇌사의 상태는 이와 같은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식물상태에서는 자발적으로 미세한 호흡이 가능하므로 인공호흡기를 사용하지 않고 영양분만 공급하면 살아갈 수 있다. 의식상태는 혼수상태이지만, 호흡기능이 남아 있다. 따라서 뇌사와 식물상태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3) 뇌사의 판정
현재 뇌사에 대한 판단기준은 세계적으로 통일된 것은 없다. 그리고 뇌사 판별에 있어서도 몇 가지의 예외 조항도 존재하지만2) 가장 일반적인 규정으로는 다음과 같다.2) 예를 들어 일본의 후생성 기준에는 “6세 이하의 어린이는 적용되지 않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① 심한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 혼수상태
② 뇌간의 기능인 자발호흡이 완전히 정지한 상태
③ 동공이 고정된 상태
④ 뇌간의 모든 기능이 상실된 상태
⑤ 뇌파가 평단한 상태3)3) T. 샤논·J. 디지아코모 저, 황경식·김상득 역, 《生醫倫理學이란》(서울: 서광사, 1989), pp. 63∼75 참고.

위의 조항 중에서 뇌간사의 입장을 취하는 영국만(1976) 5번의 조항을 불필요하다고 제외시키고 있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위의 다섯 가지 규정을 채용하고 있다.

2. 불교의 죽음관

1) 원시불교의 죽음관

가. 죽음
독일의 한 철학자는 인간을 형이상학적 동물이라고 불렀다 한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먼저 해결해야 될 것은 의식주의 확보라 하겠지만, 동물과 달리 인간은 주어진 삶 자체가 지닌 형이상학적인 문제성을 더욱 크게 의식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여기에 있는가? 왜 나는 살아야 하는가? 나는 무엇인가? 왜 나는 결코 죽어야 하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죽은 뒤는 어떻게 되는가? 사실 우리들은 언젠가는 이렇게 물으면서 고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의문들 중에서 보다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죽음의 문제일 것이다. 나는 이미 태어나서 여기에 살고 있지만 죽음은 이제 닥쳐올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무엇이며,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이 의문이야말로 인간이 던지는 형이상학적 질문 중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 될 것이며 나아가 인간이 지닌 문제 중 가장 고뇌스러운 문제라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대개 두 가지의 기본적인 견해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죽음이란 마음이 몸을 떠나는 것으로 죽어도 마음만은 불멸해서 사후 존재가 지속된다는 영혼불멸론(靈魂不滅論)이다. 이에 반해 또 하나의 죽음이란 몸을 이루는 물질 요소의 흩어짐인데 마음이라는 것이 물질에 종속된 현상에 지나지 않아, 죽고 나면 흩어지는 물질만 남을 뿐 사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멸론(斷滅論)이 그것이다.

이러한 두 견해는 역사적으로 면면히 맥을 이어오고 있는 사상들로서 피차간에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정립되어 있다. 그런데 그 근거들은 역으로 서로 서로에게 치명적인 모순점을 일깨우고 있어 그 어느 견해도 완벽한 진리라고 볼 수 없음이 죽음을 중심으로 마음과 물질을 연구하는 현대철학의 결론이라고 한다.

사실 아함(阿含)도 삼법인설(三法印說)과 삼세윤회설(三世輪廻說)을 통해 두 견해를 일단 부정하고 지양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것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나. 윤회와 무상·고·무아
아함에 설해진 여러 교설 중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 먼저 우리의 관심을 모으는 것은 업인과보(業因果報)의 삼세윤회설이다. 이 교설은 현재의 삶이 고통이든 즐거움이든 그것은 과거 및 현재에 자신이 지은 업의 과보임을 깨닫게 한다. 그리하여 주어진 현실을 긍정하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꾸준히 선업을 지음으로써 다가올 미래에도 적극적인 희망을 가지게 한다.

그런데 이 교설은 업보가 전개되는 범위로 숙세·현세와 더불어 내세를 설정하고 있어서 죽음을 문제삼는 우리에게 큰 암시를 던지고 있다.

그것은 삼세윤회설을 뒷받침하는 다음과 같은 핵심적인 경문을 하나 살펴봄으로써도 알 수 있다.

만일 고의로 업을 지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 보를 받나니 혹은 현세에 받고 혹은 내세에 받는다.4)4) 中阿含 卷3, 《思經》

여기에서 현세와 내세는 죽음으로 갈라진다. 그러므로 이 경문은 죽은 뒤 내세에서는 어떤 방식에 의해서든 과보를 받을 존재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할 것이다.

결국 아함은 사후 존재를 일단 긍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삼세윤회설을 통해 아함이 죽음에 대해 지닌 기본입장이 단멸론이 아님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삼세윤회설을 통해 단멸론적인 견해를 지양한 아함은 삼법인을 누누이 설함으로써 이번에는 영혼불멸론적인 입장이 아님도 강조하고 있다. 사후에 영속하는 불멸의 마음이란 일체의 육체적 작용을 통어하고 모든 인식작용을 종합하는 하나의 주체로서 대개들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주체를 나(我)라고 부른다.
그런데 아함은 그러한 주체를 열두 포섭처 가운데에 의지(manas)에다 포섭하고 있다.

여기서 그 의지는 눈·귀·코·혀·몸과 함께 덧없고(無常), 괴로우며(苦), 무아(無我)라고 단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5) 5) 雜阿含 卷13.

그러한 의지는 영속성이 없으며 또한 주재성(主宰性)도 결여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불멸의 마음이란 잘못된 견해임을 현실의 관찰로부터 자명한 사실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아함은 삼법인을 설하면서 죽음에 대한 영혼불멸론적인 견해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업보의 삼세윤회설과 삼법인설이 죽음과 사후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아함의 기본입장을 나타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과 사후의 실상을 알기 위해서 더 나아가 죽음의 근원적인 극복을 위해서 아함에 설해진 새로운 차원의 교설을 다시 면밀히 음미해야 할 것이다.

다. 계층을 지닌 존재
앞서 예시한 두 견해는 죽음과 사후를 설명하는 전제로서 마음의 본질을 세심히 살피고 있다. 그래서 마음이란 몸을 이루는 물질과는 전혀 다른 실체라는 견해를 가진 것이 영혼불멸론이고, 마음을 물질의 종속적 현상으로 본 것이 단멸론이었다.

이와 같이 두 견해는 마음의 본질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몸을 이루는 물질에 대해서는 거의 비슷한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두 견해가 물질에 대해서 서로 비슷하게 이해한 내용은 한 마디로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물질이란 공간을 채우는 것이다.”라는 입장이다. 이것을 ‘주어진 장소를 차지하는 존재’라는 정도로 두 견해의 물질에 대한 파악이 끝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물질이 그렇게 간단한 것일까? 물질을 깊이 연구한 현대의 자연과학은 “물질이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기술하는 편리한 공식”으로 설명한다고 한다. 꽤 까다로운 설명이지만 ‘장소를 차지하는 것’이란 관점과는 자못 다름을 직감할 수 있다.

그런데 위에서 본 현대물리학의 물질관도 현재 개척중인 첨단이론에 입각한 것이어서 계속적인 연구와 수정은 불가피하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죽음과 사후를 설명하는 전제로서 마음의 본질을 살피는 것은 물론 필수적이지만 그와 함께 물질에 대한 정확한 파악도 선결될 것이 절실히 요청된다.

그래서 아함에서는 마음과 함께 물질의 고찰도 결코 등한시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마음과 물질의 본질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그들을 따로따로 살피기보다는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마음과 물질을 동시에 고찰한다. 바로 이러한 미분(未分)적 고찰에 의해 물질과 마음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견해를 갖도록 한다.

그런데 앞에서도 살폈듯이 정신과 물질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모습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열두 포섭처(十二處)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열두 포섭처란 정신과 물질 등 일체 존재를 분류, 포섭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함은 열두 포섭처 전체를 고찰대상으로 삼아 새로운 시각에서 살핌으로써 마음과 물질의 본질에 대해 정확한 견해를 제시한다. 여기서 ‘새로운 시각’이란 열두 포섭처의 ‘질적인 변화’에 주의함을 말한다. 즉 앞서 우리가 열두 포섭처를 살필 때는 ‘형태적인 변화’에 주의하였다. 예를 들어 사람이 돌을 밀면 돌을 민만큼 밀린다고 할 때 우리는 형태적인 변화를 관찰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나 돌 자체는 변함이 없이 그들이 존재했던 위치 등의 외적 상태의 변화만 관찰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두 포섭처는 형태적 변화뿐 아니라 질적인 변화를 언젠가는 보인다. 예를 들면 사람의 성장 및 노쇠과정이 그것이며 우유나 낙(酪, 버터)이 되고 수(, 치즈)가 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러한 열두 포섭처의 질적인 변화를 세심히 고찰한다는 것이 바로 새로운 시각이다. 그리고 이런 시각에서 출발하여 아함은 마음과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의 본래적인 구조를 밝혀내고 죽음으로 야기된 여러 문제의 해결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간단히 소개한 현대물리학의 물질관에 대한 이해가 까다로운 것 이상으로 아함이 밝히는 존재의 본래적 구조도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다. 아울러 그런 구조에 이르는 과정도 쉽게 납득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아함에 정연히 전개되어 있는 과정과 결과들을 간단히 언급함으로써 죽음의 근원적인 극복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존재의 질적 변화의 일례로서 우유가 낙으로 변할 때를 살펴보자. 우유가 낙으로 변할 때 우리는 낙을 우유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다르게 아는 것’을 아함은 식별(識, vijn쁝칗a)이라고 부른다. 식별은 다시 여섯 가지로 세분되며,6) 그 뜻은 보다 포괄적이지만 핵심적인 뜻은 열두 포섭처의 질적인 변화를 설명하는 데 있다. 그런데 낙이 우유와 질적으로 다르다면 낙은 생하였고 우유는 멸했다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변화 후 주어진 공간에서는 우유는 사라지고 오로지 낙만 존재하기 때문이다.6) 이른바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의 六識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낙의 발생에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만 한다. 첫째는 온도나 압력과 같은 외부의 인위적인 작용이 주어지는 것이며, 둘째는 우유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낙은 변화의 결과로써 여섯 식별에 해당하며, 외부의 인위적 작용은 변화의 동력인으로서 여섯 감관(六根)에 포섭되며 우유란 변화의 질료인으로서 여섯 대상(육경)에 들어간다. 그래서 아함에서는 낙이라는 결과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를 의존해야 된다는 뜻으로 “여섯 감관과 여섯 대상에 연(緣)하여 여섯 식별이 생한다.”7)고 종합적으로 설하고 있다. 여기서 ‘연한다’라는 술어가 바로 ‘의존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7) 雜阿含 卷8.

결과적으로 아함은 생멸하는 전후의 두 존재 곧 여섯 식별과 여섯 감관 및 여섯 대상의 사이에서 성립하는 ‘의존관계’를 발견하고 있다. 그런데 의존관계는 현실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의존하는 것’과 ‘의존되는 것’이 동시에 갖춰져야 성립할 수 있다. 낙이 발생하기 위해 우유 등에 의존한다면 의존하는 낙과 의존되는 우유는 동시에 존재해야 할 것이 강력히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요청에 의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가졌던 생멸의 개념을 수정하게 된다. 즉 낙이 생(生)했다 할 때 낙은 완전한 무(無)로부터 생했다기보다는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가 현상계로 ‘올라왔다’고 보게 된다. 또 우유가 멸했다 할 때도 우유는 완전한 무로 사라졌다기보다는 현상계로부터 ‘내려갔다’라고 보게 된다. 이와 같이 생멸의 개념을 수정함으로써 우유와 낙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둘 사이의 의존관계는 원만히 성립하게 된다.

그래서 아함은 다른 차원의 두 세계를 오르내리며 의존관계를 맺고 있는 여섯 식별과, 여섯 감관 및 여섯 대상을 열여덟 계층의 교설(十八界說)로 그리고 있다.

열여덟 계층이 있느니라. 곧 여섯 감관의 계층(六根界)·여섯 대상의 계층(六境界)·여섯 식별의 계층(六識界)이 그것이니라.8)8) 雜阿含 卷16.

여기서 계층(界, dha칣u)은 층·요소 등을 뜻하는 술어로서 그 뜻을 여섯 감관 및 여섯 대상이 이루는 중층적 구조를 잘 설명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이러한 열여덟 계층의 교설에서 아함은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즉 좀더 관찰을 진행하면 여섯 식별과 여섯 감관 및 여섯 대상이 모두 몇 개의 기본적인 물질원소가 결합해서 이뤄진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아함은 당시 인도의 사대설(四大說)을 받아들여 지·수·화·풍의 4원소를 기본원소로 잡고 있다. 그런데 이를 4원소의 입장에서 열여덟 계층을 재조명하게 되면 열여덟 계층은 땅의 계층·불의 계층·물의 계층·바람의 계층·공간의 계층·식별의 계층으로 구성된 여섯 계층(六界)으로 파악된다고 한다.9)9) 中阿含, 《多界經》.

결국 열여덟 계층과 여섯 계층을 설하면서 아함은 마음과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의 본래적인 모습에 대해 하나의 귀결에 도달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존재는 이제 주어진 공간을 메우는 단순한 개체로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질적인 변화에 참여한 전후의 두 존재가 의존관계를 중심으로 차원을 달리하며 이루고 있는 층과 같은 구조 속에서 파악해야 된다. 여기에 더하여 기본적인 원소들이 동일한 차원의 공간 속에서 서로 결합과 분리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존재에 대해 정당한 견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존재의 본래적인 모습을 이렇게 파악할 때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철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러한 존재관(存在觀)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시 한 번 살핌으로써 우리는 죽음이란 어떤 것이며, 죽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보다 타당하고 진리로운 답변을 얻게 될 것이다.

라. 인간존재의 성립
생명의 유한성은 인간을 불안한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깊은 불안은 인간에게 역으로 생명과 죽음의 정체를 규명하게 만든다. 내적 불안과 함께 생사의 정체를 추적하였던 역대의 사상가들은 먼저 마음과 몸을 세밀히 관찰함으로써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얻고자 한다.

그러나 모두들 현상의 관찰에만 그치고 배후에 숨은 원리를 파악하는데는 좀 미흡한 감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몸을 이루는 물질 일반에 대한 각 사상가들의 견해가 너무 피상적임을 보아도 드러난다. 이 점에서 불교는 독특한 접근을 보여준다. 아함은 죽음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마음과 물질을 포함하는 일체 존재의 본래적인 모습을 밝히고 있다.

본래의 모습이란 존재의 질적인 변화를 고찰대상으로 삼아 철저하고 정연한 논리적 성찰을 행할 때 누구나 반드시 이르게 되는 동일한 구조를 말한다. 이러한 존재의 본래적인 구조를 아함은 일단 여섯 계층의 교설(六界說)로 그려낸다. 앞서 살폈듯이 여섯 계층의 교설의 내용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상·하로 두 종류의 공간이 있다. 그리고 지·수·화·풍으로 대표되는 기본존재들이 무수히 있다. 기본존재들은 앞서 밝힌 두 공간의 상·하에 하나씩 배열되어 중층 구조를 이룬다. 중층구조를 이루는 존재들은 자유로이 상·하의 위치를 바꾸며 오르내린다.

그런데 존재의 본래모습이 이와 같다고 할 때 현실에서 보는 존재의 모습과는 매우 다름을 우리는 직감하게 된다. 우리에게 인식되는 현실은 두 개의 공간도 없을 뿐더러 존재들도 단지 주어진 공간을 채우는 거대한 덩어리의 단일구조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구조상의 차이는 마침내 존재란 본래는 중층구조를 이루는데 현실적으로는 단일구조로 관찰되는 묘한 것임을 드러낸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본래의 중층적인 구조가 현실에서는 단일구조를 갖게 되었는가를 물으면서 인간 및 자연에 대해 전혀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게 된다. 아울러 이 물음에 대해 아함이 내리는 답을 심사숙고함으로써 인간개체 형성에 대한 매우 새로운 관점을 경험하게 된다.

아함은 존재의 중층적인 구조와 현실의 단일구조 사이의 간격을 다섯 근간의 교설(五蘊說)을 설하면서 반듯하게 연결한다.

앞서 약술한 여섯 계층은 상·하의 두 공간에 배열된 존재들이 자유로이 아래 위로 위치를 바꾸며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보통 오르내리는 기본존재들이 어느 순간 차분히 정지할 때도 있게 된다. 바로 이런 상황에 집착이 가해지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즉 한 때 멈추게 된 존재들이 이루는 일시적인 ‘형체’를 ‘나(我)’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집은 현실에서 내가 나에 대해 가지는 고집과 맥을 같이한다. 여기서 아집이 가해진 형체는 상·하의 공간에 걸쳐 있다. 따라서 위·아래의 존재 중 어느 층의 존재를 중심으로 나는 존재한다는 ‘느낌’을 일단 갖게 된다. 실제 인식이 영위되는 것이 위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래층의 존재라 해도 자기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아래층의 존재와 위층의 존재를 중심으로 합하여 하나의 존재라는 판단 즉 ‘생각’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아집이 가해진 ‘형체’는 실은 상·하의 공간에서 층을 만들며 오르내리던 두 존재가 일순간 멈추는 데서 이뤄진 것이다. 따라서 성격상 다시 오르내리려 한다. 그러자 오르내리려는 경향은 곧 그 ‘형체’에게 불안함을 일으킬 것이다. 왜냐하면 오르내림이 수행되면 집착된 ‘형체’는 여지없이 붕괴될 것이므로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붕괴될 것 같은 불안을 없애기 위해 불안의 원인인 오르내림이 불가능하도록 상·하의 두 존재를 하나의 개체로 붙여야 된다는 의도가 이어서 일어나게 된다.

붙이려는 의도가 있게 되면 자연히 ‘결합(結合)’이 일어난다. 즉 실제로 아래층의 존재를 위의 존재에게 ‘결합’시키는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결합’이 마무리되면 두 존재는 하나의 개체가 된다. 그런데 그 개체는 이전과는 모습이 다른 데가 있다. 두 존재가 떨어져 있는 경우와 하나의 개체로 결합된 형상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다르다고 파악하는 ‘식별’이 있게 된다.

이리하여 최후로 ‘식별’된 개체는 이미 두 종류의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일한 공간에서 단일구조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단일해진 개체는 역시 주위의 숱한 존재들에 싸여 있고 그들과의 작용·반작용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주위 존재의 자유로운 변동이 계속되는 한 끊임없이 붕괴의 위협을 받는다.

그래서 스스로 주위의 존재들을 자신에게 병합시킴으로써 가능한 한 붕괴의 위험을 감소해 간다. 그런 과정에서 개체는 횡적으로 부피가 증대해 가고 필요에 따라 감각기관 등의 생물학적 기관을 갖추게 되어 일반적으로 생물이 탄생하게 된다. 인간이란 그렇게 성립된 생물의 한 부류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형성에 무엇보다 근원적인 것은 일시적으로 집착된 물질적 ‘형체’와 그를 지속하기 위해 연이어 발생한 ‘느낌’, ‘생각’, ‘결합’, ‘식별’ 등의 성립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불교의 다섯 근간의 교설(五蘊說)은 바로 이러한 내면적 소식을 전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섯 근간이 있느니라. 곧 형체(色, ru쁯a)·느낌(受, vedana?·생각(想, sam?n쁝?·결합(行, sam?kara)·식별(識, vijn쁝칗a)이 그것이니라.10)10) 相應部 卷2.

아함은 이상과 같이 설하고 있다. 더욱이 온(蘊)이라고 흔히 번역되었던 이 술어가 ‘근원적인 부분’ 또는 ‘근간적인 부분’이란 뜻을 지닌 범어 ‘skandha’의 번역임을 생각해 보자. 그러면 ‘형체’ 등의 다섯 가지가 인간존재의 ‘근간’을 이룬다고 살펴왔던 앞의 견해는 바로 다섯 근간의 교설 내용으로 적확함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여섯 계층의 교설(六界說)과 다섯 근간의 교설(五蘊說)을 통하여 인간존재 성립에 대해 축약적인 이해를 시도해 보았다. 그런 개략적인 설명 가운데서 죽음의 이해를 위해 우리가 특히 관심을 보여야 할 부분은 ‘결합’작용이다. ‘결합’에 주의하면서 죽음에 대한 구조적인 해명을 시도해 보자.

마. 죽음의 형태
신비롭기 그지없던 인간존재의 형성은 불행히도 일시적인 ‘형체’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한순간 성립된 어떤 ‘형체’ 위에 가해진 아집과 그것을 유지하려는 ‘느낌’·‘생각’·‘경합’·‘식별’ 등의 일련의 작용이 덩달아 일어남으로써 인간개체의 시원적인 부분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상·하로 분리된 존재를 붙이는 종적인 결합에 이어서 좌·우 존재를 자기에게 병합하는 횡적인 결합이 일어난 끝에 현실과 같은 커다란 덩어리를 이루게 된 것이다. 즉 인간존재란 상·하·좌·우로 오르내리고 흩어지려는 기본존재들을 한 곳에 결합하고 있는 구조물이며, 이 구조물을 이루는 핵심적인 원동력은 바로 ‘결합(行, sam?kara)’ 작용임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개체의 ‘결합력’이란 기본존재들이 보이는 분리의 성향을 언제까지나 막고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결합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존재들은 주위존재들과 민감한 작용·반응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주위존재들은 수적인 면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존재의 합보다 월등히 많다. 작용력의 면에서도 인간존재의 결합력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막강하다. 여기서 만약 주위 존재들의 작용이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존재들에 상응하는 방향으로 주어지면 별문제이다. 하지만 주위의 작용은 언제나 인간에게 반하는 방향으로 가해진다. 그리하여 인간개체를 유지하는 근간적인 결합력과 주위존재의 반대작용이 서로 대치되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조성된다.

여기에 주위존재들의 세력이 월등히 강하므로, 인간의 결합력은 견딜 수 있는 데까지 지탱하다 끝내 한계에 이르고 붕괴해 버리고 만다. 이러한 결합작용의 종식과 동시에 인간을 구성하던 무수한 기본존재들도 상·하·좌·우의 본래적인 위치로 주위존재의 작용에 따라 오르내리고 흩어지기 시작한다.
이와 같이 결합력의 종식과 함께 큰 덩어리를 이루던 기본 요소들이 본래의 자리로 흩어지는 것이 죽음의 구조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흩어진 기본존재들은 다시 여섯 계층(六界)의 모습을 띠게 되고, 여섯 계층의 한 ‘형체’ 위에는 아집이 더해진다. 아울러 ‘형체’를 지속하려는 ‘느낌’·‘생각’·‘결합’·‘식별’의 작용이 진행되고 마침내 또 하나의 인간개체가 형성된다. 인간존재는 주위 존재와의 대치를 견디지 못해 언젠가 또다시 붕괴되고 만다.

이렇게 생각하여 생사는 바퀴가 구르듯 돌고 돈다. 이것을 생사윤회(生死輪廻)라고 한다.

2) 부파불교의 죽음관
부파불교에서는 명근(命根)이라는 원리를 세운다. ‘명근(j┓vita-indriya)’이란 인간의 생명을 유지·보존시키는 힘(능력)이라는 의미로, 《구사론(俱舍論)》에서는 14개의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중의 하나이고, 실유(實有)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명근의 본질은 수이고, 능히 난과 식을 가진다.(구사론)” “명근은 삼계의 수이다.(발지론)”라고 하여 육도윤회를 거듭하는 인간의 생명의 본질이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난과 식을 지탱하고 있다. 그러나 명근이 끊어지면 식과 난의 움직임은 없어진다. 즉 인간의 죽음을 의미한다.

또한 5세기경의 대주석가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는 《청정도론(淸淨道論)》 제8장 수념업처 중의 사념에 대한 설명 중에서 죽음을 “하나의 존재에 있어 명근의 단절”로 정의하고 있다.11) 11) 죽음의 종류에 대해 복(福)과 수(壽), 또는 양쪽 전부가 떨어졌을 경우의 시사(時死)와 지금까지의 업(業)을 단절한 별도의 업에 의한 비시사(非時死)로 구분하였다. 복(福)이 다 떨어진 경우의 죽음이란 생명을 존속시키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도, 다음의 생(生)을 초래할 업의 결과에 의해 일어나는 죽음이다. 시대·음식·지역에 의해 백살의 수명이 다하는 것에 의한 죽음이 수(壽)가 다 떨어지는 것에 의한 죽음이다. 어떤 장소에서 죽는 결과를 초래한 업 때문에 칼에 찔려 죽는 것이 비시사(非時死)이다. 〈팔리불교와 생명윤리〉, 《인도학불교학연구》 제48권 제2호.

따라서 부파불교에서는 생명의 근원체를 명근으로 삼았다. 부파불교에서는 명근의 기능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고, 명근이 기능을 상실할 때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고 볼 수 있다.

3) 유식사상에서의 생명과 죽음관
부파불교에서는 생명유지의 근원을 명근으로 삼았지만, 유식에서는 ‘아라야식’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였다. 우선 아라야식에 대해 세친(Vasubandhu)의 《유식삼십송》12)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12) 산스크리트어 제목은 Trim.s큛ka?vijn쁝pti-ka칞ika?인식작용(識)에 관한 三十詩句)이다. 《유식삼십송》은 산스크리트어본·티베트어역·한역이 현존하고, 그 저자는 세친(世親 또는 天親, Vasubandhu, 400∼480)이다. 한역본은 현장(玄?, 600∼664)이 번역하였다. 《유식삼십송》은 제1송부터 제16송까지는 아라야식(a칕aya-vijn쁝칗a)을 중심으로 마나스(manas, klis.t.a-manas, 말나식), 제육의식(vis.ayasya vijn쁝ptir)을 설명하고 있고, 제17송부터 제19송까지는 유식무경(vijn쁝ptima칣ra)의 논증, 제20송에서 제25송까지는 삼성설(tri-svabha칥a) 및 삼무자성(三無自性), 제26송부터 제30송까지는 유식의 실천과정을 밝히고 있다. 현재 《유식삼십송》에 대한 1차 자료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산스크리트어본: Trim.s큛ka?vijn쁝pti-ka칞ika?by S. Le큩i, Pari, 1925. 2. 티베트역본: 북경판 113-231,1-3b1 3. 한역본: 《고려대장경》 17-484, 《대정신수대장경(이하 대정장)》 31-60

그 중에서 변화적 성숙태(異熟)라고 하는 것은 아라야라고 불리우는 인식작용이고,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종자(種子)를 가지고 있다.

그것에 있어서 ‘내재적인’ 소재(素材)에 관한 인과관계와 ‘외래적인’ 장소의 인식을 명확히 감지할 수가 없다.13)13) ‘소연(所緣)’은 불가지(不可知)의 집수(執受, 종자·유근신)와 不可知의 處(기세간)이다. ‘능연(能緣)’은 不可知의 요별(了別)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1)‘대상과의’ 접촉, (2)‘대상으로의’ 지향(志向), (3)‘대상의’ 감수, (4)‘대상의’ 표상, (5)‘대상에 대한’ 심적인 움직임을 동반한다.

다만, 그곳에 있는 (3) 대상의 감수는 ‘감성적으로 즐거움도 아니고, 괴로움도 아닌’ 무기(無記)이다. 또한 이것은 궁극적인 이상의 실현을 방해하지 않는 ‘무복무기(無覆無記)’이다. 똑같이, ‘이것 이외의’ (1) 대상과의 접촉 등에도 적용된다. 그리고 그것은(아라야) 강의 급류와 같이 변화를 계속한다. 그것(아라야식)은 아라한에 도달했을 때, ‘그’ 기능을 잃는다.14)14) 산스크리트어
tatra칕aya칔hyam. vijn쁝칗am. vipa칔ah. sarvab┓jakam//2cd//asam.viditaka-upa칍i-stha칗avijn쁝ptikam. ca tat/sada?spars큑-manaska칞a-vit-sam.jn쁝?cetana칗vitam//3abcd//upeks.a?vedana?tatra-anivr.ta칔hya칔r.tam. ca tat/tatha?spars큑칍ayas tac ca vartate srotasaughavat//4abcd//tasya vya칥r.tir arhatve(5a)

《유식삼십송》에서의 아라야식에 대한 정의를 필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① 아라야식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종자(b┓ja)가 머무르는 곳이고, 일체의 종자를 가진 것이므로 일체종자식(sarva-b┓jan. vijn쁝칗am)이라고도 한다.② 아라야식은 과거세의 행위(업)에 의한 훈습(va칢ana?을 받지만,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고 무기(無記)이므로 이숙(vipaka)이라고도 한다.③ 인간의 생존의 근저에 있으면서 매 순간마다 작용하여 식의 흐름을 형성한다. 따라서 윤회적인 생존은 이렇게 부단히 흐르는 아라야식을 근거로 한다(윤회의 주체).④ 아라야식은 드러나지 않은 상태로서 찰나마다 상속을 지속하므로 잠재의식 또는 심층의식이라고도 부른다. 반대로 마나식(자아의식)과 육식은 현세적인 식(pravr.tti-vijn쁝칗a)이라고 한다. 과거의 행위에 의해 아라야식에 훈습이 남겨져 그 잠재력이 즉, 그 힘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현세적으로 나타난 것이 마나식과 육식이다.

현세화된 육식과 마나식은 기능함과 동시에 그 훈습(여습)을 아라야식 중에 남긴다. 이렇게 하여 아라야식과 현세적인 마나식과 육식은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는 관계를 이룬다.

그런데 아라야식의 설명 중에 인간의 생존과 죽음에 대한 언급이 있다. 제3 게송의 ‘불가지집수처(不可知執受處)(3ab)’15)이다. 15) asam.viditaka-upa칍i-stha칗a(3ab)

여기서는 아뢰야식의 대상은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아라야식의 대상은 집수(執受, upa칍i 또는 upa칍a칗a)와 처(處, stha칗a, 세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인식작용은 반드시 대상을 가지고 대상에 작용한다.

인식작용이 존재한다는 것은 동시에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각각의 인식작용에 의해 다르다. 예를 들어 안식(眼識)의 대상은 색경(色境)이지, 그 이외의 것은 아니다. 붓다의 경지에서는 모든 감각기관이 서로 작용하여 인식작용과 대상 사이에 자유로운 관계가 인정된다.16)16) 유식사상에서는 이를 ‘諸根互用’이라고 한다.

그러나 평범한 인간의 단계에서는 각각의 인식작용과 대상과의 관계는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아뢰야식의 대상은 무엇인가? 어떠한 심층적인 의식이라도 아뢰야식이 하나의 인식작용인 한, 역시 대상은 정해져 있다.

아뢰야식의 대상은 ‘집수(執受)’와 ‘처(處)’이다. 집수에 대해 《성유식론술기》에서는 ‘집섭(執攝)’ ‘집지(執持)’라고 하였다.17)17) 《대정장》 43, p.315c10-11

‘집(執)’이라는 것은 아뢰야식이 종자를 ‘간수하다’ 하고, 종자를 ‘보존하다’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아뢰야식의 대상이 된다. ‘수(受)’라는 것은 ‘수령(受領)’·’각수(覺受)’의 의미라고 하였다.18) 18) 1. 집(執) : 아라야식은 종자를 유지·보존하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종자가 아라야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2. 수(受) : 受領한다는 의미이다. 아라야식은 有根身(신체)을 수령하고, 그것을 대상으로 하여, 신체에 感覺이나 마음의 움직임을 일으

종자와 신체를 수령하여 그것을 대상으로 하고, 유근신(身體)에 감각이나 마음의 움직임을 일으킨다. 간단히 말하면 아라야식의 대상은 ‘종자’와 ‘유근신’이다.

‘종자’는 ‘선험적인 소질·능력·기근(機根)의 본유종자’와 ‘성장의 과정 속에 학습하고 몸에 붙은 신훈종자’로 구분한다. 이것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것과 관계한다는 것이다. 관계한다는 것은 동시에 집착한다는 의미로도 해석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심저(心底)에서 자신의 소질에 집착하고, 자신의 경험, 즉 과거에 계속해서 구애받는 존재라는 인간 인식에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소질이나 경험에 바탕을 둔 인생의 확립을 나타내기도 하였지만, 반면 자신의 인생의 한계에 대한 자각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 유근신은 신체이다. 인간은 심저에서 자신의 신체를 내면으로부터 감지하고, 그것에 관계하면서 살아간다.

따라서 인간은 아라야식이 신체를 대상삼아 집수할 때만이 인간은 생명을 유지한다. 반면 아뢰야식이 신체를 대상으로 삼지 않을 경우에는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성유식론》 권319)에서는 여러 가지 각도로 아뢰야식에 대한 논증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일반적인 상식의 논리(理證)로서 아라야식을 논증하는 것 중에서 4번째의 논증은 “선업에 이끌여 무기인 제팔식(아라야식)이 근원이 되어 우리들의 신체는 감각, 지각 등의 활동을 한다.”20)고 하였고, 5번째 논증에서는 “수·난·식은 서로를 의지하며, 상속하고 지속한다. 19) 《대정장》 31, pp.14a∼17b.20) 《대정장》 31, p.16b20-c5.

그리고 수와 난를 가지고 끊어짐이 없이 지속시키는 것이 식(아라야식)이다.”21)고 하여 우리들의 신체를 유지시키는 것을 아라야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아라야식의 6번째 논증 중에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21) 《대정장》 31, p.16c6-23.

또한 죽음을 맞이할 때는 선악(善惡)의 업에 말미암아 하반신부터 상반신에 냉촉이 점차로 일어난다.22)
또한 《유가사지론》 권1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22) “又將死時由善惡業 下上身分冷觸漸起 若無此識彼事不成…….”(《대정장》 31, p.17a, 13-14).

장차 임종을 맞이할 때 악업을 짓은 자는 (中略) 상체는 점차로 냉촉(冷觸)이 일어난다.23)23) “將終時 作惡業者 識於所衣從上分捨. 卽從上分冷觸隨起.”

《섭대승론》에서도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

악업을 짓고 선업을 짓어 장차 죽음을 맞이할 때, 혹은 하체(下體), 혹은 상체(上體)의 소의가 점차로 차가워진다.24)24) “將沒時造善造惡. 或下或上所衣漸冷.”

그리고 《섭대승론》을 주석한 무성25)과 세친26)의 양주석서(兩註釋書)에서도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주석하고 있다. 25) “將沒時者 謂將死時 若造業者. 卽於其身下分漸冷.”(《섭대승론석》 권3, 無性 著)26) “將捨命時造善造惡. 或下或上身分漸冷.”(《섭대승론석》 권3, 세친 著)

이와 같이 유식논서의 대부분은 인간의 육체가 죽어 갈 때는 상체와 하체가 차갑게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 인간이 죽음을 맞이할 때 신체가 차갑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계속해서 《성유식론》 권3에서는

오직 이숙심(아라야식)만이 먼저의 업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두루 상속하여 신체를 집수한다. 집수(執受)를 버린 처(處)에 냉촉이 생기한다. 수·난·식의 세가지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이하생략)27)27) “唯異熟心 由先業力 恒遍相續執受身分 捨執受處冷觸便生 壽煖識三不

라고 하여 아라야식이 신체를 집수하면 신체를 유지하지만, 아라야식이 신체를 집수하지 않을 때는 처(處-감각기관)가 차갑게 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유식사상 입장에서의 인간의 죽음은 아라야식이 신체의 집수를 버릴 때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아라야식으로부터 집수를 받지 못하여 냉촉이 일어나면 인간의 신체는 다음과 같이 된다고 《성유식론》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즉, “냉촉이 일어난 처(處, 신체)는 비정(非情)이 된다. 아라야식이 변연(變緣)한 것이지만, ‘아라야식이’ 집수하지 않은 것이다.”28)고 하여 신체가 차가워진 상태는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또한 아라야식으로부터 변현한 것이지만 아라야식으로부터 집수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28) “冷觸起處 卽是非情 雖變亦緣而不執受.”(《대정장》 31, p.17a19-20).

유식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을 포함한 세계는 아라야식의 변현이다. 그러나 인간과 기세계(器世界, 세계)의 차이점이 있다. 인간도 세계도 아라야식으로부터 변현된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세계는 아라야식에 집수되지 않지만, 우리들의 신체는 아라야식에 집수된다는 것이다. 아라야식의 집수에 의해 우리들의 신체는 체온을 유지하여 차갑게 되지 않는다. 즉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라야식이 신체의 집수를 포기하는 순간, 인간으로서의 개체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4) 티베트불교의 죽음관
티베트의 밀교승들은 죽음의 세계까지도 분석하였다. 그것은 이집트 사람을 제외하면 유일한 본격적인 분석이었다.

인간이란 살아가며 죽어가고, 죽어가며 살아가는 이중적 존재이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로만 본다면 우리는 자칫 쾌락주의에 빠지기 쉬울 것이며, 죽어가는 존재로만 본다면 우리는 염세주의로 빠지기 쉬울 것이다. 쾌락주의도 염세주의도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손등과 손바닥을 함께 볼 때 손의 본질을 보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삶과 죽음을 함께 생각하고 볼 때 우리의 인생의 본질을 알게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엠페도클레스가 시실리섬 시민들의 생활을 비판한,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내일 죽을 것처럼 사치스럽게 생활하고 있다. 또한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집을 짓고 있다.”라는 것에 우리는 귀기울여야 한다. 우리 주위에 넘치는 저 사치풍조는 우리가 어떻게 잘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만 집착했기에 전개되는 문제가 아닌가.

티베트밀교는 우리에게 “죽음을 배워라. 그러면 삶까지도 배우게 될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티베트밀교에 의한 죽음의 세계를 탐구한 《사자(死者)의 서(書)(Book of Dead)》29)는 수천 년 동안 티베트에 비밀로 전해오다가 서양의 학계에 소개되어 커다란 충격을 주었는데, 그 충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29) 티베트의 《사자의 서》는 불교적 시간관에 기초를 둔 것이지만, 사람이 죽은 후 49일 동안의 의례(儀禮)를 통하여 처음에는 사자(死者)가 생(生)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열반에 들도록 도와주고, 후에는 좋은 곳에 태어나도록 돕는 책이다. 파드마삼바바가 지었으며, 1927년 에반스 웬즈에 의하여 옥스포드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되어 서구에 큰 충격을 주었다. 국내에서는 두 가지 번역본이 있다.백봉호 <티베트 사자의 서>경서원 1984. 류시화<티베트 사자의 서>정신세계사

《티베트 사자의 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중음천도밀법〉은 일천 수백 년 동안 전해져 온 진언밀교의 성전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임종, 그리고 재탄생까지 49일간의 모습이 선명한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다.
영혼이 육체의 모습을 가지고 태어나고, 영혼이 육체의 모습을 갖지 않은 상태인 죽음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닌 하나의 것이고 다만 영혼의 무한한 여행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갓난아기가 이 세상에 눈을 떠서 이 세계를 배우지 않으면 안되듯 죽은 자는 사후세계에 눈을 떠서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W·Y·웬즈 박사는 다음과 같이 격찬하고 있다.

참다운 과학적, 요가적 방법에 의한 인간이라고 하는 그 알지 못할 존재에 대한 탐구야말로, 지구 밖의 세계를 탐험한다고 자랑스러워하는 그런 차원과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인간의 육체가 달 또는 금성 그리고 그 어떤 천체 위에 서 본다는 것은 아마 인간의 지식에 보탬이야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수롭지 못한 지식을 좀더 걷는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이 책에서의 현인(guru)의 가르침처럼 사물을 넘어선 초월, 바로 그것이다.

《티베트 사자의 서》에는 인간이 사후 다른 생을 얻기까지 49일 동안 흔히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상징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요한 부분을 현대적 언어로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너희 인간들에게 가르친다. 모든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임종 때, 호흡이 끊어지면 영혼은 육체의 중추에서 떠나가는 것이다.

육체로부터 떠나간 영혼은 처음에 희미한 어둠 속에 떠 있는 것 같이 생각한다. 그러나 대개는 곧 밝고 맑은 빛을 느끼게 된다. 이로 인하여 영혼은 아픔으로부터 해방된 매우 평온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 굉장한 소리가 들린다.

많은 영혼은 그것을 겁낼 것이다. 즉, 영혼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육체는 죽었지만 새로운 몸이 생겼다고 많은 영혼은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몸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투명하게 무게가 없으며 공중에 떠서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중에는 육체의 죽음을 알고 절망하거나, 혹은 육체가 죽은 것을 잘 모르고 죽은 곳에서 헤매고 있는 영혼도 있다.

그러나 많은 영혼은 빛 속을 더욱 날아가서 전에 죽은 육친과 친구들의 영혼을 만나는 것이다. 그들은 말없이 의사를 소통하는 것이다.
그 후 영혼은 이상한 거울도 보게 될 것이다. 이 거울에는 생전에 그 사람이 행한 행위와 생각의 모든 것이 비쳐진다. 좋은 행위와 좋은 생각이 비쳐질 때 영혼은 편안해진다. 그러나 나쁜 행위와 나쁜 생각이 비쳐질 때 영혼은 고통을 받을 것이다.

이 시련을 불에 데는 것처럼 느끼는 영혼도 있다. 견딜 수 없는 목마름과 무서운 한랭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또한 더욱 밝은 빛 속으로 날아가는 영혼도 있다.

이 여행은 길다. 혹은 짧다. 도중에 암흑과 빛이 번갈아 나타난다. 그리고 조만간 많은 영혼이 무한한 하늘을 빠져나가 마지막 어두운 길에 들어가게 된다. 그 길은 좁고, 괴롭고, 길고, 혹은 짧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둡고 좁은 그 길의 저 쪽에 다시금 빛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영혼의 세계의 빛이 아니라 다시금 이 세상의 빛이다. 많은 영혼은 이렇게 하여 다시금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나 전에 살고 있었던 것과 같은 곳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많은 영혼이 아주 다른 곳에 닿는다. 그리고 다시금 어둡거나 혹은 밝고, 길거나 혹은 짧은 육체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에 표현된 밝음·어둠·길·거울·번갯불 등은 모두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데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한 생을 마치고 다음 생을 받기 위하여 생전에 자기 자신이 지은 업(業, Karma), 즉 카르마의 환각을 체험하며 49일간의 중음계를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49일간의 하루하루는 자기 자신의 의식구조 속에 고여 있던 이 세상에서의 업이 가시적 환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인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살아서 이웃에게 베풀고 착하게 산 사람은 역시 죽어서도 고통을 당하지 않고, 악하게 산 사람은 그 업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 자기심판의 세계가 전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자의 서》에 있어서는 궁극적인 목적은 중음계를 여행하는 사자에게 일어나는 현상들이 모두 환각임을 자각시키는 일이다. 더불어 그 어느 환각에도 휩쓸리지 않는 생명의 비밀을 깨달아서 지혜를 얻자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서구에서는 인간의 초심리 현상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로 나온 보고서를 보면 《사자의 서》와 통하는 부분이 많은 것이다. 이 점이 서구인들을 경탄케 하고 있다.
아래와 같은 구절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풍요 속에서 살면서도 빈곤을 느끼는 현대인에게 어머니의 자장가와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다시 태어날 자여, 연속되는 환각으로 하여 슬픔과 기쁨의 소용돌이에서 너는 길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감정에도 물들게 하지 말자. 네가 보다 높은 세계에 태어날 운명이라면 그 세계의 ‘비전’이 네 앞에 나타날 것이다.

다시 태어날 자여, 네가 이 세상에 남기고 온 재물들과 소지품들이 타인의 손에 넘어감을 보고 너는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분노는 너를 어둠과 괴로움의 세계로 끌고 갈 뿐이다. 설령 너에게 속계의 재물을 준다 해도 너는 가질 수 없다. 집착을 버려라. ……

결론적으로 여러 불교의 죽음관을 검토해 본 결과 정확하게 판결된 뇌사상태는 죽음으로 보아야만 한다. 이런 뜻에서 불교의 죽음관은 뇌사를 죽음으로 봄으로써 장기이식의 길을 열게 될 것이다. 불교에서의 죽음은 뇌사를 인정하는 데도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뇌가 죽은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 존재는 이생을 위해서도 다음 생을 위해서도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게 된다. 인위적으로 호흡을 시키면서 심장의 박동을 작동시킨다 해도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 육체’와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관계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뇌가 더 이상 기능을 할 수 없을 때 우리들의 식을 발생시키는 기관의 기능은 마비되어 버리고, 식이 발생할 수 없게 되면 행, 즉 의지작용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의지작용이 발생되지 않으면 업은 만들어지지 않게 된다. 업이 만들어지지 않게 될 때 우리는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경전의 표현대로 ‘무덤에 버려진 나무토막’과 같은 것이다. 의지작용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을 때는 이미 만들어 놓은 자신의 업에도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없지만, 미래의 생존을 위한 여하한 업도 더 이상 만들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장기가 누구에게 주어져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에게는 공덕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의식이 있었을 때 자의에 의해서 사후에 자신의 장기를 다른 사람에게 기증하겠다는 마음을 내었을 경우여야만이 선업이 만들어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뇌사가 된 상태의 우리의 장기를 누가 잘라 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음 생의 우리의 운명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된다.(다음호에 계속)

곽만연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동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동국대, 한양대, 인하대에서 강의하였고, 현재 동아대학교 인문학부 교수이다. 논문에 〈불교의 직업관〉, 〈불교윤리사상이 신라사회에 끼친 영향〉, 〈불교의 죽음관의 전개와 한국문화에 끼친 영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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