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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 그리고 호국불교의 가능성 / 김근호
[17호] 2003년 12월 10일 (수) 김근호 kgsmv@hanmail.net

1. 쇠망하는 조선의 불교

조선이 건국되면서 표방한 정치이념은 성리학(性理學)이었고 이것을 기반으로 고려의 모든 문물제도는 새롭게 개혁되기 시작하였다. 이 개혁은 고려 쇠망의 원인들을 파악하고 그 원인들을 제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는데, 그 개혁 대상의 중심부에 불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고려 말기의 불교가 정책적 지원을 통해 지나치게 번창하면서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승려들은 세금이나 군역의 면제를 받았고, 불교사원은 토지와 노비 등의 경제적 토대를 거대화시키면서 국가경제 기반을 흔드는 한 요인이 되었다.

고려 말 불교의 현실적 말폐가 곧 개혁의 대상이 되면서 불교 자체도 조선 신흥 정치세력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곧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나타나면서 사찰의 축소, 면세, 면역 등의 폐지라는 불교의 현실적 기반의 무력화뿐만 아니라 사상적 토대의 약화로 전개되었다. 그 한 예가 신흥 정치세력의 핵심이었던 정도전(鄭道傳)이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하여 이단(異端)으로써 불교를 규정하여 배척할 수 있는 이론적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의 불교 비판은 불교사상 자체를 비판하기보다 성리학적 입장에서의 선택적 비판으로 주로 출세간적 성격과 현실적 폐단의 비판이었다. 사실 현실 지향적인 성리학이 국가이념으로 채택되면서 출세간적 성격을 지닌 불교에 대한 개혁은 이미 예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세종(世宗)에서 중종(中宗) 대를 거치면서 불교는 승려의 도성출입 제한, 과거제도였던 승과(僧科)의 폐지, 그리고 모든 종파가 선교(禪敎)로 통합되다가 결국 종단조차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는 등 그야말로 불교 자체의 존망조차 가늠하기 힘든 상황으로 변해 갔다.

16세기를 거치면서 전국적으로 향약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것은 윤리 도덕이 규범화된 예가 백성들의 생활 속으로 깊숙이 자리잡는 시기였다. 이러한 유교적 예속화에도 불구하고 명종(明宗) 대에 보우(普雨)가 문정왕후(文定王后)를 통해 선(禪)·교(敎)의 종단제도를 되살리고, 승과제도 또한 부활시켰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문정왕후의 죽음과 동시에 억불(抑佛) 정책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보우는 《일정론(一正論)》을 통해 유교와 불교를 회통시키면서 불교의 현실적 위기들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지만, 결국 피살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현실적 노력들은 서산 대사를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며 불교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불씨로 자랐다.

2. 서산 대사의 삶

서산 대사(西山大師)라는 말은 묘향산에 오랫동안 머물며 수양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서산 대사의 본래 성은 완산(完山) 최씨이며, 속명은 여신(汝信), 호는 청허(淸虛), 법명은 휴정(休靜)이다.

서산 대사는 중종 15년(1520) 3월에 평안도 안주(安州)에서 기자묘(箕子廟)의 참봉을 지내던 부친 최세창(崔世昌)과 모친 김씨(金氏)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불행히도 9세 되던 해에 모친을 잃고, 10세에 부친을 잃었다. 이때 안주 목사 이사증(李思曾)이 시를 짓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양자로 삼아, 12세 때 성균관에 입학시켰다.

이후 15세 때에 숭인 장로(崇仁長老)를 만나 불교수행의 계기를 갖게 되면서 18세 때 본격적으로 수행을 시작하였다. 당시 그는 “차라리 평생 바보가 될지언정 다시 문자 법사는 되지 않으리라(寧爲一生癡햿漢, 更不作文字法師也).” 하면서 속세의 과거 공부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벗어버렸다. 경성일선(慶聖一禪) 선사를 수계사(授戒師)로, 부용영관(芙蓉靈觀) 대사를 전법사(傳法師)로, 숭인 장로를 교육사(敎育師)로 하여 철저한 불교수행을 정진하였다. 5년 후 그는 오도송(悟道頌) 두 수를 지었다.

    머리는 희지만 마음은 늙지 않는다. 髮白非心白
    옛 사람이 일찍이 말했네. 古人曾漏洩
    닭 우는 소리 듣는 순간 今聽一聲鷄
    장부의 할 일 다 마치었네. 丈夫能事畢

    홀연히 본래의 내 집에 돌아오니 忽得自家底
    모든 것이 다 이것뿐이구나. 頭頭只此爾
    팔만 사천의 대장경도 萬千金寶藏
    본래 이 하나의 빈 종이일 뿐이로다. 元是一空紙

서산 대사는 문자 법사의 수준이 아닌 진실로 깨우침을 얻었다. 그가 30세 되던 해 보우가 문정왕후의 힘을 빌어 승과제도를 부활시키면서 서산 대사 또한 주위의 권유로 응시했다. 그는 도 장원으로 합격한 후 교종판사도대사(敎宗判事都大師), 선종판사도대사(禪宗判事都大師)를 겸하게 된다. 그러나 38세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 금강산, 지리산, 태백산, 오대산 등을 돌며 지내다가 마지막으로 묘향산에서 여생을 보낸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산 대사는 어명을 받아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란 직책을 맡고, 전국 승방에 격문을 띄워 의승군(義僧軍)을 창설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임진왜란 동안 평양과 개성에서 큰 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공적을 높이 치하하여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總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존호를 내리고 또한 정2품 당상직을 제수하였지만 그는 사양하였다.

서산 대사는 이후 다시 묘향산에 돌아와 산내의 대중들에게 설법을 하였다. 하루는 자신의 초상화를 들고 “80년 전에는 그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그로구나.”라는 원적송(圓寂頌)을 남기고는 그 자리에서 가부좌로 입적하였다. 세수는 85세(1604년), 법랍은 67년이었다.

3. 회통을 위한 유가사상

서산 대사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과거시험을 보았는데, 이것은 그가 유학, 특히 성리학을 정규과정을 통해 배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학적 소양은 《삼가귀감(三家龜鑑)》의 〈유가귀감〉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이 글은 유가사상을 불교사상과 회통시키려 했던 보우보다 좀더 사상적인 측면에서 정합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

1) 회통의 전제
서산 대사는 유학에서 공자와 동중서, 채침 그리고 주렴계(周濂溪)의 말들을 인용하며 도(道)의 근원으로서 천(天)을 제시한다. 이때 인용되는 구절은 천(天)이라는 표현의 단순한 단장취의가 아니다.

〈유가귀감(儒家龜鑑)〉에 “공자는 말했다. ‘천이 무어라 말하던가?’ 동중서는 말했다. ‘도의 큰 근원은 천에서 나왔다.’ 채침은 말했다. ‘천이라는 것은 삼가는 그 마음이 저절로 나오는 곳이다.’ 이것을 주렴계가 ‘무극이면서 태극’이라 말한 것이다.”라고 인용하였다. 이 문장들의 내용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논어(論語)》에서는, 말로서만 성인을 알고자 했던 자공에게 공자는 사계절의 순행과 만물의 생함 속에 천리가 발현되고 유행하는 실체가 아닌 것이 없음을 일깨워 주고자 하는 대화를 인용한다. 여기서 자공에 대한 공자의 가르침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언어에 너무 얽매여 자연의 이치를 직접 보지 못하는 자공을 깨우쳐 직접 그 천도를 보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휴정의 교종과 선종에 나타난 언급에서도 유사한 면을 볼 수 있다. 말 없음으로써 말이 없는 데에 직접 이르는 것을 선이라고 하고 말로써 말이 없는 데에 이르게 하는 것을 교라고 한다면, 교는 다시 선을 거쳐야만 그 말 없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도의 근원을 천에 두고 있는 동중서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동중서의 이러한 견해는 그의 저술인 《춘추번로(春秋繁露)》의 여러 곳에서 인간이 천으로부터 행해야 할 당위로서의 도, 즉 일종의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때의 도는 천의 도를 따라 자신의 몸을 수양하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로 채침은 〈서경집전서(書經集傳序)〉에서 천의 삼가는 특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서산 대사는 이것을 인용하고 있다. 이것을 인간의 측면에서 보면, 인간이 삼가는 경(敬)의 마음을 발하게 되는 근거 또한 천으로부터 나옴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공자의 말을 통해 천의 무위함을 언급하고, 동중서의 말을 통해 천으로부터 인간이 인간의 존재이유와 행위의 준칙 내지 존재의 목적을 부여받았음을 언급하였으며, 채침의 말을 통해 천의 삼가는 그 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인용문들을 통해 유학에서 인도(人道)의 근원은 바로 천으로 규정될 수 있으며, 그 천은 자연 그대로 무위함을 가진 존재임을 서산 대사는 말하고 있다. 그는 이 세 인용문을 다시 주렴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결론 짓고 있다.

주렴계의 이 구절은 성리학에 있어서 본체론의 출발이 되는 중요한 언명이다. 이 구절의 무극과 태극의 관계를 두고 유학 내에서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희와 양명학의 효시인 육상산이 논쟁하기도 하였다. 주희는 무극을 함께 말하지 않으면 태극이 어떠한 사물이 되므로 만물 변화의 근본이 될 수 없게 되고, 태극을 함께 말하지 않으면 무극이 공적(空寂)에 흐르게 되므로 이 또한 만물 변화의 근본이 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이에 반해 육상산은 주렴계의 《염계전》의 ‘자무극이위태극(自無極而爲太極)’이라는 구절을 논거로 하여 무극으로부터 태극이 나온다고 설명하였다.

서산 대사는 이 구절을 조선 성리학에서 주류가 되었던 주자학에 근거하여 해석하고 있다.

《중용(中庸)》의 마지막 구절에도 인용되었던 주나라를 세운 문왕의 공을 기리는 《시경(詩經)》의 시구를 통해 “문왕의 시에 ‘소리도 냄새도 없는’ 천(天)이라 하였고, 자사 또한 이를 인용하여 중용의 뜻을 맺고 있다. 아, 나의 혼연한 미발의 중이다. 이것은 주렴계가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라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것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천의 초감각적 속성을 말하고 있다.

이 인용문에서도 보이듯이 천에 대한 초감각적 속성을 주렴계의 말을 통해 결론 짓고 있는 것을 볼 때 서산 대사가 주희의 우주론을 택하여 천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자명하다. 이것은 주렴계의 《태극도설》 첫 구절에 대한 주희의 주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천은 소리도 냄새도 없고 진실로 온갖 조화의 추구이며, 온갖 사물의 근본임을 말하여 ‘무극이 태극’이라고 주희는 해석하며 태극의 밖에 다시 무극을 상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극과 태극의 관계를 서산 대사는 분명히 주자학의 맥락과 같은 유학의 정통적 입장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천을 다시 태극으로 바꾸어 설명하는 측면에서는 서산 대사의 인용문들은 유학 내에서의 천의 개념 변천을 단적으로 잘 보여 주고 있다.

서산 대사의 말 중에서 동중서의 “도의 큰 근원은 천으로부터 나온다.”는 말과 “나의 혼연한 미발(未發)의 중(中)이다.”라는 말은 상호 연관성을 지닌다. 동중서의 도란 인간의 도를 의미하고 미발의 중 또한 인간의 심(心)을 말한다. 이것은 ‘무극이태극’과 ‘태극본무극(太極本無極)’이란 구절을 통해 천을 말하면서 인간과의 관계 설정을 미리 제시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천으로부터 인간의 도가 근원한다면 그 도 또한 본원의 태극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태극은 다시 본체와 현상의 측면에서 통체인 하나의 태극과 각 개체에게 부여되는 각각의 태극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게 된다.

유학에서 이러한 본체론과 심성론이 연결되는 구체적 논의는 주희의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로 전개되어진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주희가 “불교에서 하나의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비치고 모든 물에 비친 달은 하나의 달로 통섭된다는 것은 불교가 이러한 도리를 엿보고 있다.”고 말하며 불교의 관점을 긍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산 대사에게도 이 점은 유학과 불교의 회통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매개가 될 것이다.

천으로부터 태극을 품부받은 인간은 모두 도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고 그 도의 실현에 대한 필연성을 갖는다. 즉 인간은 천으로부터 성으로서의 태극을 부여받고, 그 본성에 따라 도를 밝혀야 할 실존적 책임과 당위로서의 사명을 인간 내적으로 이미 품부받았다는 점에서 불교와 유교는 회통의 가능성을 갖게 된다. 이때의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의 태극은 인간 본원의 도로서 불교의 일심(一心)과 회통될 수 있다.

2) 회통의 요체
서산 대사는 유학의 이제(二帝) 삼왕(三王)에서 공자, 맹자로 이어지는 유학의 기본적인 도통설을 인정하고 있다. 이때 유학의 도통설을 인정하는 근거는 바로 심법(心法)이다. 이것에 관해서 그는 채침의 〈서경집전서〉를 인용하여, 유학의 본체론에서 중요시되었던 태극이 인간에게 부여됨으로써 다시 그 내재된 마음을 온전히 실현하고 전하는 것이 바로 유학의 도통이라고 보고 있다.

유학의 도통론에서 지속적으로 전해져 오던 요체가 심법임을 확신한 그는 정일집중(精一執中), 건중건극(建中建極), 성(性), 도(道), 교(敎) 등의 모든 개념은 다만 그 명칭을 달리 할 뿐 실체는 하나라고 말한 채침의 말을 인용한다. 여기서 그는 도와 인간의 본성, 그리고 그 실현을 위한 교의 의미를 유학의 기본 명제가 되는 중용의 첫 세 구절을 그대로 수용하여 〈유가귀감〉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도는 성(性)으로 말미암아 나오니 도를 말하면서 성을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도의 본원을 알지 못하게 된다. 도는 교(敎)로 말미암아 밝혀지니 도를 말하면서 교를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도의 공용(功用)을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도라는 한 글자는 성(性)과 교(敎)를 포함한다. 그 본원을 미루어 보면 반드시 천명에로 돌아간다. 《대학(大學)》의 삼강령 팔조목도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성은 천으로부터 부여받은 도의 본원으로서 그 존재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교는 그 성의 실현을 위한 가치론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도와 성, 교의 관계 설정을 말하고 있지만 여기서의 중요한 핵심은 심법이라는 도이다.

유가에서 전해주는 도란 곧 마음의 수양론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불교의 수행론과 직접 회통될 수 있는 고리가 된다. 즉 유학 공부의 요체는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귀결시킬 수 있다. 이미 천을 통해 설명되었듯이 심의 실재성은 천으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에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결코 있다가 없어지거나 없었던 것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심을 실현하는 방법을 유학의 전통 속에서 전승되어 갔던 것이지 어떠한 객관적 실체를 전수했던 것이 아니다. 동중서에게서 이론적으로 설정된 천인관계에서 언급되었듯이 자연의 원리나 법칙은 바로 내 마음 안에 동일하게 존재하므로 이것을 깨우쳐 주고 실현하는 것이 바로 심법이 된다. 이것을 서산 대사는 선(禪)과 회통될 수 있는 결정적 요체라고 본 것이다.

〈선가귀감(禪家龜鑑)〉 첫 장의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생하지도 않았고 멸하지도 않았으니, 이름지을 수도 없고 모양지을 수도 없다.”라는 ‘일물(一物)’에 대한 언명은 이러한 그의 의도를 쉽게 짐작케 해 준다. 생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그것이 바로 일물이다. 본래부터 있었던 것으로 밝고 묘하기 때문에 규정된 어떠한 틀로 이름짓거나 형상화할 수 없다.

그래서 한 물건(一物)이라고 잠시 부르는 것이다. 이 일물은 밝고 신령스러운 것이면서도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므로 누구나 알 수 있다. 이 일물이 바로 유가에서 말하는 심법의 심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선가귀감〉의 송(頌)에서 “유가, 불가, 도가의 성인이 이 글귀에서 나왔으니 누가 거량하겠는가. 눈썹이 빠질까 조심하라.”라고 읊으며, 이 점을 곧바로 나타내고 있다.

〈선가귀감〉의 일물과 〈유가귀감〉의 심은 동일한 것으로 이것이 선(禪)의 요체이며 수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육조 스님과 신회 선사, 회양 선사에 대한 선종 중심의 이야기를 통해 일물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불교와 유교의 관계가 아닌 불교 내의 선종과 교종의 입장에서 보면 유가의 심은 그에게서 교종의 맥락으로 통일되고 있다.

교문(敎門)에서 바라보는 일심이 바로 유가의 심법과 심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하게 바라볼 수 있다. 즉 유학의 끊임없는 역사적 전개는 불교의 교종과 그 궁극적 경지에 있어서 심이라는 동일한 토대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서산 대사가 불교 내에서 교종과 선종을 통합한 것은 교종을 통해 유교와의 회통을 모색할 수 있는 교량을 만든 셈이다.

이제 회통을 위한 토대로서 심이 설정되면 다시 그 공부 방법론이 문제가 된다. 이연평(李延平)의 미발기상체인법(未發氣象體認法)과 장남헌(張南軒)의 이발찰식단예법(已發察識端倪法)을 직접 체득해 가면서 이 두 공부 방법론을 통합했던 주희의 문제들은 유학을 설명하는 서산 대사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수양의 방법론상에서 미발한 본체를 직접 체오하는가 아니면 이미 발하는 그 단초를 살펴 체득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유가귀감〉에서 그는 미발 전 공부와 이발시의 공부라는 표현을 통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미 마음이 발할 때의 공부와 아직 발하기 전의 공부를 함께 말하면서 서산 대사는 미발 공부는 인식을 통해 이를 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미발의 상태를 이미 인식하는 순간 이것은 이미 이발의 상태가 되기 때문에 올바른 중(中)의 상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그가 이발공부에 대한 필요성을 말하고 있긴 하지만 미발공부를 근본적인 공부라고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그가 교종과 선종의 통합에 있어서 선종의 입장을 중시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이때 미발의 공부인 계구(戒懼)와 이발의 공부인 근독(謹篤) 중에서 자연히 계구가 근본 공부가 됨은 당연하다.

수양의 근본이 바로 천리를 실현하는 데 있으므로, 자연 그 천리의 체득이 선행되고 체득을 통한 현실적 구현이 그 다음이 된다. 이러한 공부론 또한 선주교종(禪主敎從)의 연장선상에 있다. 단박에 깨치고 점차 닦는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이 공부의 시작과 끝이라고 볼 때 공부의 시작이 바로 미발시로부터 출발되며, 결코 그 깨침만으로 성불의 단계에 이를 수는 없음을 전제할 때 끊임없는 이발시의 공부 또한 최종 지향점에 이룰 수 있는 필연적 과정이다.

결국 유학에서의 미발공부와 이발공부를 모두 말하면서도 미발공부에 대한 중시는 서산 대사에게 불교와 회통되는 수행방법이 된다.

3) 회통의 의도
유학의 궁극적 인간, 이상적 인간은 천인합일된 성인이다. 성인은 천으로부터 부여된 천리(天理), 즉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어 천지의 덕과 합한 인간이다. 유학자들이 이러한 성인이 되고자 할 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 본성이다. 만물의 영장으로서 지니고 있는 인간 본성에 관한 인식과 그에 따른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송대 성리학에 이르면 이 본성과 본성이 내재된 인간의 마음을 중심으로 한 논의가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다.

송대 성리학을 받아들인 조선의 성리학은 중국과 다르게 심성론에 관한 대단히 심도 있는 논의들을 전개시켰다. 사단칠정론, 인물성동이론 등이 그 대표적 논쟁들이다. 당대 조선 성리학을 성균관에서 직접 배웠고 과거까지 치렀던 서산 대사의 행적을 볼 때, 이것이 그에게 불교와 유교 회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한 단초를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당시 이황과 고봉의 사단칠정론을 시작으로 계속된 조선 성리학의 심성론 중심의 논쟁들은 그 심성 수양의 측면에서 불교와 교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이러한 유교와의 회통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고려는 국교인 불교의 현실적 부패로 인해 패망의 길을 걸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고려의 패망에 대한 반성을 통해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이며 정치적, 이론적 배척과 비판을 불교에 가했다. 이에 대해 불교는 새로운 현실적 모색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조선 초 고승으로 알려진 함허당(涵虛堂) 득통기화(得通己和)는 《현정론(顯正論)》과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에서 유학과의 근본적 회통점과 차이점을 서술하였다. 보우는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을 불교의 논리 속에 끌어들여 종합·합일을 모색하는 일정론을 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서 유학과의 종합 내지 회통은 서산 대사에게도 요구된 그리고 필요한 현실적 방편임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정치이념으로서의 불교의 대응이 유학과의 회통에 담긴 소극적 의미라 볼 수 있다.

다른 한 가지는 불교 수행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생기는 중생구제에 대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일물인 법은 현실적으로 불변하는 체(體)와 연(緣)에 따른 용(用)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중생인 인간 대부분은 돈오(頓悟)하여 점수(漸修)하는 기질을 타고난다. 이 때문에 불교는 문자와 언어로 설법을 베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가 염불(念佛)로 윤회의 질곡에서 벗어나고 극락세계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하는 것도 중생을 위한 방편이다. 그리고 이 방편을 통한 중생 제도는 선각자들의 당연한 몫이기 때문이다.

〈도가귀감(道家龜鑑)〉에서 “군자는 뭇 선을 널리 구하여 그 자신의 수양을 돕는다. 글은 반드시 공자의 말일 필요는 없고 약은 반드시 편작의 처방일 필요는 없다. 뜻이 합하는 것은 따르고,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라는 말처럼. 다양한 인간의 병과 동일한 병의 다양한 증상에 대한 각양각색의 현실적 처방이 모두 병의 치유를 목적으로 한다면 반드시 한 명의 명의에 의한 처방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궁극적 경지에 대한 삼교의 목적이 회통되고 일치하는 것이라면 반드시 불교의 수행방법만을 절대적 위치로 자리매김할 수 없다. 유학도 수행을 위한 또 하나의 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다양한 처방도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면 다만 다양한 처방에 따른 완급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불교 내에서 이러한 방편으로서의 적극적 중생제도는 서산 대사에게 있어서 선종과 교종의 통합뿐 아니라 유교와 도교까지의 회통을 가능하게 하였다. 즉 서산 대사의 삼교회통사상은 천인합일의 성인을 목적으로 하는 유학이나 열반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불교나 그 궁극의 경지는 같으며 다만 수행의 길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 전제는 유학을 향해 불교의 문을 개방시킬 수 있는 교량을 만든 셈이다.

유학은 바뀔 수 없는 천륜을 기반으로 가정과 사회, 국가, 천하로 그 질서를 확대·적용하였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바로 바뀔 수 없는 절대적 인간의 질서였으며 이것이 사회와 국가로 확대되면서 삼강오륜이라는 현실적 윤리·도덕 질서를 만들었다. 이러한 현실적 윤리·도덕 의식은 자연 사회와 국가를 유지하는 힘이 되었고 당시 조선사회의 정치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유학과 불교에 회통의 문을 개방시켰던 서산 대사에게도 유학의 윤리·도덕 질서는 자연스럽게 수용되었다. 그가 참선자에게 일상생활 속에서 늘 부모와 왕, 스승에 대한 깊고 두터운 은혜를 돌이켜 알아야 할 도리로서 말하고 있음이 그 증거이다. 이것은 유학을 불교와 회통시키고 그 회통된 문을 통해 불교가 현세에 대한 적극적 실천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유학, 특히 성리학에 기반한 조선의 사회질서는 서산 대사에게도 현실에 대한 적극적 실천의 장소가 되었다.

4) 회통사상의 문제점
이러한 유교와 불교의 회통을 전제한 서산 대사의 유학 이해에는 몇 가지 의문점들이 노정되어 있다.
먼저 회통의 전제가 되는 천(天)을 이해할 때 한 가지 독특한 점이 드러난다. 서산 대사가 천에서 다시 태극으로 개념이 바뀌는 유학의 우주론의 맥을 짚어가며 태극과 무극의 관계 설정을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희의 입장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태극에서 다시 이를 말하지 않고 있으며, 이에 대한 송대 정주학에 대한 인용이나 언급을 전혀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채침이 주희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인용된 글은 송대 정주학에서 중심 논의의 틀이 되는 이기론에 해당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유학의 도통론을 이제삼왕에서 공자, 맹자까지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 정주로 이어지는 송대 성리학도 함께 도통론의 맥락에서 인정하고 있다. 또한 이미 당시 성리학이 정도전, 퇴계 이황, 율곡 이이를 통해 상당한 이론적 성숙을 이루었고 서산 대사는 그들과 교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가귀감〉 전편에 걸쳐 이들의 이론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런 점은 성리학에 대한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당대에 풍미하던 불교는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송대 성리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송대 성리학이 불교에 대한 비판적 대응을 통해 이론을 정립해 가며 현실 정치적 입장에서 불교와 많은 대립적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에서도 극렬한 양상을 띠게 된다. 불교교리에 대한 이론적 비판을 표명한 정도전에게서 쉽게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성리학이 지녔던 불교 비판적 특징으로 인해 불교와 유교의 회통을 모색하는 서산 대사에게 송대 정주학에 대한 언명들의 수용은 많은 문제점들을 내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불교와 유교의 회통을 모색할 때 성리학 논의의 핵심인 이기론의 틀 속에 들어가지 않고 그 이전의 본원 유학을 통해 불교의 측면에서 수양을 위한 유교로의 문만을 개방시키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선가귀감〉의 핵심인 일물(一物) 또는 일심(一心)은 어떤 언어 속에 들어와 규정되거나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을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서산 대사의 일심이 성리학의 이기론 틀 속에서는 설명이 더욱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유학에서 천인합일된 성인의 경지인 본원으로서의 천과 태극, 그리고 도의 오묘한 작용을 말할 수는 있지만 결코 이(理)를 통해 직접 지칭하여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이 서산 대사가 송대 성리학의 인용문을 쓰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서산 대사가 바라본 유학의 본체론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그 이해 자체에 대한 몇 가지 문제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가 인용한 공자의 천은 원시적 형태의 상제천 개념은 퇴색되면서 만물을 생성하고 운행하는 자연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주재천(主宰天)으로서의 천의 개념이 아니라 자연 자체와 자연법칙의 의미로 천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을 태극과 연관시켜 바라보면 서산 대사는 공자의 천을 유학의 본체론적 모습으로 상정하고 있다.

동중서의 천은 본래 천과 인을 동류로 여긴 천인상감설을 바탕으로 재이설(災異說)을 말할 때의 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여겨지기도 하지만, 서산 대사가 보고 있는 동중서의 천은 단지 인도(人道)의 근원으로서 말하여지고 있다. 채침에게 나타난 천도 그 공덕을 나타내면서도 심(心)의 근원으로서 말하여지고 있다. 이것은 모두 유학의 본체론적 설명들을 입론하면서 유학과 불교의 관심사가 만나는 심(心)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서산 대사가 다루는 유학에서의 천은 인간, 그리고 천하의 온갖 만물의 관계를 설정하게 되는 근간으로 성리학의 중요한 입론이 된다. 존재론적 가치론적 의미의 근원인 천은 객관화된 태극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이(理)라는 형식으로 인간에게 부여되어 성(性)으로서 자리하게 되고 인간은 다시 이 성을 통해 천과 합일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합일해야 하는 당위적 목적성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궁극적 성인의 경지를 천인합일에 두고 이를 끊임없이 지향하여 왔다.

그러나 유학과는 달리 불교는 객관화된 대상으로서의 천의 의미에 대한 파악이 아닌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일심 자체에 논의의 초점이 놓여져 있다. 다만 심 자체에 대한 시각과 그 수양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다르다. 유가 특히 성리학에서 심은 주체이며 그 주체의 수양공부를 통해 객체의 대상세계를 알고, 윤리도덕의 세계를 객관적 기준(禮)에 의해 조절하고자 하는 데 반해 불교는 근본적으로 심을 주체와 객체라는 구도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첫 출발부터 서산 대사의 불교와 유교의 회통이라는 의도를 어긋나게 만들고 있다. 보편적 실체로서 불성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객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선종의 전통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천으로부터 부여받는 성(性)에 대한 함축성에 있다. 천을 통해 부여된 인간의 본성은 결코 천(天)을 벗어나서 생각할 수 없다. 결국 천이 부여하는 모든 세계의 질서를 벗어난 초월적 인간 내지 세계를 상정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서산 대사는 회통을 목적으로 한 〈유가귀감〉의 기술에 중요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교 특히 선종에서 수행자는 개인의 주체적 체득을 통해 삼라만상의 현세적 삶과 그 윤회의 과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초세간에 궁극적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서산 대사의 입장에서 추론해 본다면 그가 현세적 유교관의 근본적 출발점과 그 출발점에서의 개인의 수양에 회통의 실마리를 두고 있다는 전제에서 이러한 유학의 천과 인간의 관계는 단순히 불성으로서의 일심 자체의 존재론적 당위성의 부여일 뿐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천에 의해 부여된 이로서 유학은 끊임없이 이상사회의 가능성이 인간에게 있음을 정당화시키고 그 실현을 이루려고 하였다. 이때 이 가능성과 실현의 주체는 그 이를 담지하고 있는 인간의 심에 있기 때문이다. 즉 현실에 대한 윤리도덕의 세계를 구축하여 인간세를 좀더 이상적 유토피아로 만들려는 노력의 주체는 대승불교의 궁극적 이상세계로의 지향에서 드러나는 인간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4. 호국불교의 이론적·실천적 가능성

조선시대의 승려들은 큰 왜란이 있을 때마다 승군을 일으켜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며 그들이 살고 있는 조선을 지키는 데 놀랄 만한 공적들을 세웠다. 특히 임진왜란 동안 자발적으로 승군을 조직하여 직접 전장에 참가했던 서산 대사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 사명 대사의 행적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 불교가 개인의 깨달음만을 중시한 개인 위주의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케 해 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한국불교의 성격을 규정할 때 ‘호국’이라는 수식어가 통상 병행됨을 알 수 있다. 이때의 호국이라는 개념은 천재지변이나 외침 등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것으로 살인의 행위까지도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렇게 볼 때, 한국불교의 특징으로서 규정된 ‘호국불교’라는 특징은 두 단어 사이에 병립하기 힘든 모순점을 지니고 있다. 불교는 개인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 시·공간적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 부처의 경지인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것에 궁극적 목표가 있다. 이에 반해 ‘호국’이라는 수식어는 현세 인간들의 실존적 거처인 국가를 보호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 두 단어의 결합은 불교가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영역에서 국가를 보호하여 결국 생로병사라는 굴레와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인왕호국반야경》에서의 ‘국토’와 같이 형이상학적 개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호국이라는 수식어가 병행된 불교는 전쟁에 자발적으로 직접 참여함으로써 부처의 49년 설법 중 오계(五戒)의 첫 계율인 살생의 금함을 범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호국’의 실천이 고려의 인왕회(仁王會)나 팔만대장경의 판각 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좀더 적극적으로 외침에 대항하여 창과 방패를 들고 싸우는 행위까지를 포함한다고 할 때, 이것은 심각한 종교상의 모순을 드러낸다. 살생의 계율이 상황논리에 따라 바뀔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계율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며, 그 종교 자체도 존립의 위험 요소를 안게 된다.

이렇듯 호국불교라는 역사적 평가는 불교의 종교적 이상과 이와 상반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참여라는 모순을 안고 있다. 이러한 모순에서 생기는 의문들은 불교학자들의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에 신라 법흥왕의 불교 유입 이후 한국불교사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불교 교리를 통한 규명은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이유로 이론적 측면에서의 접근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호국사상의 근거로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등을 언급하고 있지만, 살생에 대한 긍정을 설명하고 있지는 못하다.

살생까지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호국의 개념을 불교라는 교리 내에서 바라보기보다는 호국이라는 역사적 특성이 어떻게 불교에 접합되었는지를 보아야 할 것같다. 즉 호국이라는 특성을 불교교리 내에서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 내에서 호국이 가능하게 된 단초를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조선 초 정치이념으로 채택된 성리학으로 인해 시작된 숭유억불 정책은 불교계에 큰 위기의식과 함께 현실적 대안이라는 숙제를 안겨 주었다. 득통기화(得通己和)는 유학의 윤리·도덕들을 불교의 교리들과 상치시키며 불교의 현실적 측면을 부각시켰고 보우는 성리학의 이론적 개념들을 불교의 이론과 합치시키며 불교의 사회적 비판에 대응해 갔다. 이러한 이론적 노력들은 왜란을 당해 승군을 조직하여 활약하는 실천적 모습으로도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모아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면서 호국을 실천하였고 저술을 통해 이론적으로 다른 사상과 회통시키고자 했던 서산 대사를 호국불교의 가능성으로서 지목할 수 있다. 이때 서산 대사에게서 주목해 볼 것은 그의 유학적 소양과 유학에 대한 회통사상이다. 호국이라는 특성은 불교사상에 근접하기보다는 당시 조선의 정치이념이었던 성리학에 맞닿아 있다. 성리학은 현실 정치를 우선시 하면서 살생에 대해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 이론 내에서 살생까지를 적극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호국의 개념을 찾기보다는 이러한 실천까지도 가능했던 서산 대사의 삶과 그의 회통사상을 통해 호국이라는 한국불교의 성격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

김근호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철학과 석사 졸업, 박사 수료. 현재 고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원 및 안동대 강사. 논문으로 〈동무 이제마의 사상론 연구〉, 〈태극, 우주의 근원〉 Hyujong’s Syncretic Approach to Buddhism and Confucianism as a philosophical framework of State-Protection Buddhism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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