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본 논문은 중국 선종사에서 대혜종고(大慧宗┳, 1089∼1163)가 간화선(看話禪)을 제출한 주된 원인과 간화선에서 핵심적인 사안 가운데 하나로 판단되는 지각(知)1)의 문제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1) 주지하다시피 지(知)는 공적영지(空寂靈知) 등 중국 선사상과 관련된 논의에서 핵심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그 중요성만큼이나 연구자들의 이해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견고하여 섣불리 번역하기 어렵다. 여러 가지 이견이 있을 줄로 알지만, 논의의 진행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 번역을 해야겠기에 일단 지각으로 번역했다. 다만, 굳이 현대어의 지각(知覺, perception)이라는 개념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려는 의도는 없다

연구자는 일단 공안선(公案禪)과 간화선의 관계라는 큰 틀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간화선은 널리 알려져 있는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의미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 특정한 선수행법이나 종파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공안선 혹은 화두선(話頭禪)이라는 개념과 혼용되기도 한다. 공안선과 간화선의 관계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개념들의 의미가 분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연구자는 먼저 간화선이 출현한 때가 중국 지성계의 급격한 변화가 있었던 당송 변혁기에 해당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당시 지성계의 경향과 이와 관련된 대혜종고의 입장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성계의 변화가 간화선의 출현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규명함으로써 간화선이 제출된 원인과 그 핵심적 의도를 밝히고자 한다. 또 활구(活句)라는 개념을 통해 공안선과 대비된 간화선의 철학적 특징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지각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간화선, 특히 대혜종고가 어떤 입장에 서 있었는지를 규명하는 데 주안점을 두도록 한다. 여기서는 특히 지각 중심의 선이론을 제출한 ‘신회-종밀’라인으로 이어지는 선사상에 대한 대혜의 입장을 살펴보게 될 것인데, 이를 통해 흔히 대척(對蹠)관계로 알려져 있는 대혜와 종밀의 선사상을 어떤 견지에서 봐야 할 것인지 판단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대혜 이후 간화선은 어떤 변모를 거치게 되었는지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2. 공안선 대 간화선

1) 주지주의적 학문경향과 공안선 비판
일찍이 공자는 ‘사문(斯文)’이라는 말 속에 찬란했던 중국문화의 원형의 이미지를 담았고, 그 자신은 이 문화의 충실한 계승자라 자부했다. 그에게 있어서 문(文)은 단순한 옛 기록의 집적이 아니라 회복해야 할 이상적 문화 전반을 일컫는 것이었다. 또 이 문화와 관련된 자신의 역할을 천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당대(唐代)에 이르러 사문이라는 말은 경전적 전통(textual tradition)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게 되는데, 구체적으로는 글쓰기나 정치행위 그리고 몸가짐 양식의 전통이라는 의미까지 포괄하기에 이른다.2) 2) 주희(朱熹) 역시 “문은 도가 겉으로 드러난 것이며 예악제도를 일컫는다(道之顯者謂之文, 蓋禮樂制度之謂).”고 말하고 있다. 《論語集注》 9, 5.

그리고 당시 지식인들은 이와 같은 전통이 중국 고대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공자가 그것을 세련되게 하여 유학의 경전 속에 보존했다고 믿었다.3)3) Peter K. Bol, “This Culture of Ours”: Intellectual traditions in T?ang and Sung China, Stanford, California: Stanford Univ. Press, pp.1∼3 참조. 저자는 《논어》의 사문(斯文) 이라는 말에 주목하여 당송대의 지성사를 밀도 있게 조명한 대표적인 학자이다. 중국 지성사의 변화와 관련된 본 논문의 기술 내용 역시 위 저술의 내용에 힘입은 바 크다.

이러한 훈고학적 분위기는 당대는 물론이고 북송대까지도 그대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4) 북송대의 학자들은 여전히 경전에 기록된 전통을 습득하고, 그렇게 습득된 것을 실제적인 행동양식으로 모방했으며, 자신들의 학문적 그리고 문학적 글쓰기를 통해 이 전통을 계승하고 보다 좀더 정교화하는 방식으로 사문의 전통에 참여했다. 그런데 당말 이후 중국은 분열과 이민족에 의한 수난시대를 겪으면서 결국에는 굴욕적인 천도를 단행하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사회적 위기상황은 기존의 문화 전반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었는데 고문부흥운동 역시 이러한 기조 가운데 있었다. 4) 북송 무렵까지도 당제국의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당대 귀족 가문의 여러 가지 특징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Ed. Patricia

대혜 역시 고문운동의 주역들처럼 이 시기에 한족(漢族)이 겪게 된 위기의 원인을 자내(自內)에서 찾았다. 송대 한족사회의 위기는 문치(文治)에 치중한 북송대 정치노선에서 비롯된 국방력의 쇠퇴와 이민족의 강성에 그 직접적 원인이 있었지만, 대혜는 위기의 본질이 당시의 중국 지성계의 한계상황에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오늘날 도(道)를 배우는 이들은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두 가지 심각한 병에 걸려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남의] 말과 글귀를 많이 배워서는 그 속에서 온갖 기묘한 상념을 일삼는 병”5)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는 이민족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난 한족 지식인들에게서 사문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과 이로 인해 질곡화된 지성의 한계를 목도하고 있었던 것이다.5) 今時學道人, 不問僧俗, 皆有二種大病. 一種多學言句, 於言句中, 作奇特想. 〈示眞如道人〉, 《大慧普覺禪師語錄》, 大正新脩大藏經 第47冊, 895쪽 中段(이하 ‘대정47, 895b’ 형식으로 기술함).

필자는 대혜가 느낀 송대 중국 지성계의 위기상황을 ‘사문의 질곡화’라고 이름붙이고자 한다. 사문의 질곡화란 과거가 현재를 발목 잡는 형국을 뜻하는데, 문화적 유산(文)에 대한 맹목적 신봉에서 비롯된 현실감각의 둔화와 텍스트에 대한 기존의 해석이 지닌 지나친 권위로 인한 주체적 해석의 가능성 차단 등의 문제점을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 한다.6) 이러한 경향에 대한 대혜의 비판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6) 이러한 학문방법이 주류가 된 데는 유학이 한대(漢代) 이후로 관학화되고, 당대(唐代, 618∼907)에 이르러서는 과거제의 시행과 더불어 관료로 진출하는 데 필수적인 교과목으로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특히 “과거제도가 요구한 시험내용은 당시의 지식인 혹은 사대부의 모든 문화적 측면을 규정하였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유학을 비롯한 학문의 영역과 문학 창작 두 부분에 과거제도가 미친 영향이 엄청나게 컸다는 것이다.” 하원수, 〈宋代 士大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평생 동안 낡은 종이만을 뚫기라도 하려는 듯 연구하는 데, 이러한 공부는 오직 잡다한 책들을 이것저것 살피는 지식을 요체로 한다. 그래서 공자는 어떻고, 맹자는 어떻고, 장자는 어떻고, 주역에서는 어떻고, 또 고금의 다스림이 어떠하다는 거창한 얘기만 늘어놓는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공부는] 언어에 끄달려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거꾸러지고 만다. [이들은] 남들이 제자백가의 한 글자라도 거론하면 곧 책을 통째로 떠올리면서 하나라도 알지 못하면 부끄러워하면서도 정작 자기 집안 일을 물으면 아는 사람이 없다. 종일토록 남의 보물을 세면서 정작 자기는 반 전의 돈푼도 없는 셈이라고 하겠다.7)7) 措大家一生鑽故紙, 是事要知博覽群書. 高談闊論, 孔子又如何, 孟子又如何, 莊子又如何, 周易又如何, 古今治亂又如何. 被這些言語使得來, 七顚八倒. 諸子百家, ?聞人擧著一字, 便成卷念將去. 以一事不知爲恥, 及乎問著他自家屋裏事, 툢無一人知者. 可謂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 《大慧普覺禪師語錄》, 대정47, 930b.

대혜가 보기에 맹목적인 사문주의는 죽은 말귀[死句]에 집착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무런 계발성도 담고 있지 못한 죽은 언어에 대한 천착이고, 현실 속에서 행위주체의 자각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를 의미하는 이른바 활발발(活潑潑)을 결코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북송 성리학을 대표하면서 대혜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던 유학자 장구성(張九成, 1092∼1159) 역시, 만일 학자인 관료들이 텍스트와 언어의 장을 초월하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천하와 국가에 실제적인 쓰임[用]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이론적인 텍스트와 언어를 넘어설 수 있을 때만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효과[用]를 발휘할 수 있다고 봤다.8) 이러한 장구성의 입장은 대혜의 문제제기와 궤를 같이하는 것인데, 이것이 대혜뿐만 아니라 당시의 지성계의 공통적인 문제의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8) Ari Borrell, “Ko-wu or Kung-an?: Practice, Realization, and Teaching in the Thought of Chang Chiu-ch?eng”(Peter N. Gregory and Daniel A.

대혜는 특히 사대부들 사이에 주지주의적 학문방식이 팽배해 있는 사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사대부들이 선왕(先王)의 도를 배움에 있어서는 마음 씀씀이[心術]를 바르게 하는 데서 그칠 뿐이다. [왜냐하면] 마음 씀씀이가 바르면 삿된 것과 옳지 못한 것들이 제 스스로 간섭하지 않으며, 이것들이 간섭하지 않으면 일상이 그대로 자연스럽게 분명하고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음 씀씀이는 뿌리이고 문장과 학문은 끄트머리이다. [그런데] 지금의 학자는 대부분 뿌리를 버리고 끄트머리를 좇아서, 장구(章句)를 따오고 교묘한 언사를 배워서 제가 낫다고 하면서 성인의 경술(經術)을 쓸모 없는 말로만 여기니, 어찌 슬퍼하지 않겠는가.9)9) 士大夫學先王之道, 止是正心術而已. 心術旣正, 則邪非自不相干, 邪非旣不相干, 則日用應緣處, 自然頭頭上明, 物物上顯. 心術是本, 文章學問是末. 近代學者, 多棄本逐末, 尋章摘句, 學華言巧語以相勝, 而以聖人經術, 爲無用之言, 可不悲夫. 《大慧普覺禪師語錄》, 대정47, 898a.

대혜는 마음 씀씀이[心術]를 수행의 핵심적인 기준으로 삼고, 선학의 해석을 익히는 것이나 문장력 배양은 말단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여기에는 글[文]은 도(道)를 싣고 있어야 한다는 고문부흥운동의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으며, 당시 지성계가 공유하고 있었던 주지주의적 경향에 대한 냉철한 비판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이와 같은 비판 의식이 유학에서는 도학의 출현을 가져왔고, 불학(佛學)에서는 공안선 비판과 간화선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대혜의 주지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불교 내부적으로 공안선 비판으로 나타났다. 공안선이란 고덕(古德)의 공안과 그 공안에 대한 염고(拈古), 송고(頌古), 평창(評唱)을 실질적인 입도(入道)의 방편으로 여기는 선수행 체계10)를 말하는데, 이러한 수행법은 깨달음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공안의 해석이라는 매개(mediacy)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점수(漸修)의 선법에 가깝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고, 대혜가 《벽암록》을 소각한 것 역시 이러한 문제점을 제기한 것이다.11) 10) 공안선이라는 개념이 갖는 의미의 내용과 범주는 별로 명료하지 않다. 선에 대한 논의가 허우적거리거나 오해를 유발하게 되는 경우 대부분은 바로 이와 같은 개념의 불명료성에서 비롯되는 수가 많다. 본 논문에서는 조사선의 분열 양상 가운데 각종 선문답을 문자화하여 문제은행식으로 축적하며 공안(公案)이라는 형식으로 객관화 하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연구, 분석, 주석, 암송, 활용하는 시스템을 기본적인 수행체계로 구축한 선불교 경향을 공안선으로 규정한다. 시기적으로 보면 임제종의 오조법연(五祖法演, ?∼1104)이 간화선의 단초를 열기 전까지가 해당된다.11) 何國銓, 《中國禪學思想硏究: 宗密禪敎一致理論與判攝問題之探討》, 臺北: 文津出版社, 1987, pp.300∼304 참조.

대혜는 그 자신의 사상적 배경이기도 했던 공안선이 사선화(邪禪化)할 가능성이 있고 그 가능성이 현실 속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음을 목격했다.12)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스승이었던 원오극근(?悟克勤, 1063∼1135)의 저술인 《벽암록》을 파기할 수밖에 없었던 데서 이러한 비판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12) 대혜의 염려대로 공안선은 대혜 당시에는 물론이고 그 이후까지도 선가의 수행법으로 널리 행해졌고 그 폐단이 어떠했었는지는 명대(明代)의 대표적 선승인 천목중봉(天目中峰, 1263∼1323)의 다음과 같은 얘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요즈음 선을 한다는 인물들은 그저 큰 책상머리에나 기대어 이리저리 연구하여 되지도 않는 소리나 지껄이면서, 여러 사람들이 말한 요점을 간추려 기록하여 보관하고, 온갖 사람들의 잡다한 이야기도 모아 이것들을 얘깃거리로 삼는 자이니, 이런 자들은 입으로 선을 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해서는] 다른 사람의 속박을 풀어 주기는커녕, 자신의 진면목조차 잃고 자신의 도안(道眼)마저 해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망령되게 수행하면서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추종하고 숭상하기도 하니 이미 조정(祖庭)의 기대를 저버린 마당에 어찌 총림을 세우고 불법을 위한 결사를 흥하게 할 수 있겠는가.(今之禪流, 將欲據大牀, 揮塵尾, 首取諸家語要, 揀擇記持, 及漁獵百氏之雜說, 以資談柄者, 是說禪之師也. 不惟不能與人解?去縛, 而亦自失本眞, 喪壞道眼. 如此妄習, 互相趨尙, 旣失祖庭之重望, 又安有所謂起叢林興法社之理哉.)” 《天目中峯和尙廣錄》 11卷, 佛敎大藏經 第73卷, 佛敎書局編, 부산: 古典讀書會, 1982, 영인본, p.915. 《산방야화》, 선림고경총서 2, 장경각, pp.26∼27. 천목은 이른바 1,700개의 공안을 내용으로 하는 공안선이라는 선수행 시스템이 대혜의 비판 이후에도 점차 굳어지는 현실을 목격하고 “나는 잘 모르겠다. 이와 같이 한 것이 본래 눈밝은 종사들의 본 뜻인지…(不識古人之意果爾否…)”라고 말꼬리를 흐리고 있다.(《天目中峯和尙廣錄》, p.920) 또 “참선을 그저 말

공안선은 일시적이고 상황적이며 철저하게 개인적인 기연(機緣)에 기반을 두고 있던 전통적인 선수행의 전제(專制)와 독단을 방지하는 일종의 객관적 기준으로 기능한다. 공안집류의 등장 이후 선가의 화두는 문제은행에 보관된 시험문제처럼 되어 버렸다.

그리고 선가의 수행자들은 경전을 읽고 배우는 대신에 기행과 일탈로 점철된 조사들의 전기를 읽고 되풀이하는 이미테이션(imitation)의 천재들이 되어 갔다. 또 선문답은 공안으로 문헌화되면서 판례법처럼 기능한다. 깨달음의 정체성과 수행의 숙성도는 오직 공안을 통해 보증되며, 이런 점에서 공안은 다분히 폐쇄적이고 권위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처럼 공안선 수행법은 지나치게 주지주의적이라는 문제점 외에도, 공안에 대한 특정인의 이해와 해석인 어록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폐쇄적이고 배제적일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라고 하겠다. 특정 어록의 편찬과 학습 그리고 교육으로 이어지는 시스템은 곧 그 어록을 중심으로 하는 일군이 형성되었음을 뜻한다. 또 그 일군은 집단의식(collective mind)을 공유하고, 공유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일군과는 병행 내지는 대립하는 구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대혜가 자신의 스승인 원오의 《벽암록》조차 소각한 행위는 공안선의 주지주의적 수행방식이 낳는 폐해에 대한 지적인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부터 내 종파성을 과감하게 포기하겠다는 대외적 선언의 위상을 갖는 것이었다.

2) 활구(活句)와 사구(死句)
선문답에 불과했던 초기 공안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특정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루어졌던 다이얼로직(dialogic)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일체의 모방행위를 허용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 일회적인 사건이어서 정보로 축적되지 않았고 그렇게 되는 것을 오히려 경계했다. 그런데 “당(唐)에서 주창한 제자의 유도(誘導)와 편달을 위한 단순한 공안은, 송에서는 ‘화려한 언구’로 가미된 백칙(百則)의 공안이 되어 납자들은 도리어 안일하게 사량복탁(思量卜度)에 빠지는 우려성을 갖게 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13)13) 강혜원, 〈禪宗史에서의 看話禪의 위치〉, 《보조사상》 13, 보조사상연구원 편, 2000, p.167. 특히 《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이나 《건중정국속등록(建中靖國續燈錄)》 등이 편찬될 때 나타난 공안은 더욱더 공식적이고 전통적인 권위를 나타냈으며, 당시 관료불교로서의 성격이 한층 강해짐에 따라 선원에서의 일상생활도 공식화되고 거기서 행해지는 선문답도 지식화가 됨을 볼 수 있다.(p.161.)

또 ‘공안’이라는 명칭에는 이미 제도화된 규정이나 법령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공안은 관청의 문서에 비유될 수 있다. ……공이란 뜻은 개개인의 주관적인 주장을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며, 안이란 뜻은 기필코 불조(佛祖)의 깨달음과 동일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14) 이처럼 표준화되고 텍스트화되고 지식화된 공안이 수행 시스템으로 정착된 공안선은, 처음의 그것과는 달리 오히려 이미테이션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내포하는 것이기도 했다. 14) 公案乃喩乎公府之案牘也. …… 公者防其己解, 案者必期與佛祖契同也.

간화선에서 기존의 공안선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개진하면서 들고 나온 개념이 활구(活句)이다. 활구는 공안이 표준화되고 텍스트화됨으로써 본래의 활발발(活潑潑)을 상실한 ‘죽은 말귀’[死句]가 되고 말았다는 비판적 문제의식에서 배태된 것이다. 간화선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활구를 참구하고 사구는 참구하지 말라.”15)는 경구는 송대 선지식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하고 있었던 이러한 문제의식을 표현한 것이었다. 대혜는 이렇게 말한다.15) 夫參學者, 須參活句, 莫參死句. 活句下薦得, 永劫不忘, 死句下薦得, 自救不了. 《大慧普覺禪師語錄》, 대정47, 870b.

문자를 찾아 인증하고, 어지럽게 헤아려서 주석하고 해석하는 일을 절실하게 꺼려야 한다. 비록 그렇게 주석하고 해석하여 분명해지고 설명하여 딱 맞아떨어진다고 해도 이 모두가 죽은 사람의 살림살이에 불과하다.16)16) 切忌尋文字引證, 胡亂量註解. 縱然註解得分明, 說得有下落, 盡是鬼家活計. 《大慧普覺禪師語錄》, 대정47, 930b.

대혜는 공안선을 선에 대한 일종의 주지주의적 접근방식으로 파악했다. 이는 이미 당말 고문학파의 도마 위에 올랐던 훈고학(訓?學)과 주소학(註疏學)을 근간으로 하는 공부방식의 불교적 변형이다. 대혜는 바로 이와 같은 학문 전통을 죽은 사람의 살림살이로 보고 있는 것이다. 대혜가 오조법연 이후의 임제종의 수행법인 무(無)자 중심의 간화 수행을 계승하여 사구에 참구하지 말고 활구를 참구할 것을 특히 강조한 것 역시 문자언어와 지해(知解)의 작용을 배척하기 위한 것이었다.17)17) 洪修平, 《中國禪學思想史綱》, 南京: 南京大學出版社, 1994, pp.228∼229.

송대 문자선(文字禪)을 대표하는 혜홍각범(慧洪覺範, 1071∼1128)은 “말 속에 말이 있는 것을 사구라 하고 말 속에 말이 없는 것을 활구라 한다.”18)고 했다. 여기서 사구와 활구를 나누는 핵심적인 단어는 어중유어(語中有語)과 어중무어(語中無語)이다. 앞의 ‘말(語)’이 언표인데 비해서, 뒤의 ‘말’은 언표 속에 내포되어(혹은 약속되어) 있는 의미이다. 그런데 의미 역시 말에 불과하다.18) “夫語中有語 名爲死句 語中無語 名爲活句”라는 문장은 혜홍이 지은 《선림승보전》(卍續藏經 137, 台北: 新文豊出版公司, 1976∼1977)에는 두 번 보이는데, 한 번은 혜홍 자신의 말로 나타나고(493b) 또 한번은 동산수초(洞山守初)의 법문 가운데서 나타난다.(475b∼476a) 또 그의 《임간록(林間錄)》 가운데 동산수초를 소개하는 부분(卍續藏經 148, 597b)에서도 역시 발견된다.

따라서 사구가 어중유어라는 표현은, 말 속에 또 말이 있는 끝없는 말들의 잔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활구는 말 속에 또 다른 말이 없다. 기표 속에 숨겨진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결국 “수참활구 막참사구”라는 경구는, 주지주의적 학문방식에 대한 비판의식 혹은 약속된 의미찾기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활구와 사구의 경계는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활구가 부유하는 공안이라면, 사구는 정박(碇泊)하고 있는 공안이다. 더 이상 떠돌지 않으면 죽은 공안이요, 쉼 없이 떠돌아야 살아 있는 공안, 곧 활구가 된다. 하지만 활구에 속하는 공안과 사구에 속하는 공안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똑같은 공안이라도 한 때는 활구였다가 사구가 되곤 한다. 조주를 찾아갔던 어떤 수행자에게 뜰앞의 ‘잣나무’가 활구였다면, 《조주록(趙州錄)》을 펼치는 또 다른 수행자에게 ‘뜰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는 사구이다. 그렇다고 해서 맨 처음, 시원(始原)만 활구의 가치를 담보하란 법은 없다. 정전백수자가 조주를 찾아갔던 어떤 수행자의 눈에 비친 잣나무처럼 그렇게 다가올 때, 그것은 여전히 활구이다.

선불교에서 공안이 사용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진리를 말하거나 지시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전통적인 불교의 관점을 넘어서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안의 사용은 경전에 대한 수사학적 관점으로의 이동을 의미하며, ‘떠도는’ 진리의 생산을 목적으로 하게 된 것으로 해석된다.19) 19) Bernard Faure, Chan Insights and OverSights: An Epistemological Critique of The Chan Tradition, Princeton Univ. Press, 1993, p.145.

활구를 근간으로 하는 간화 수행은 사구화된 공안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조사선의 생동감을 되살려 내려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특정 공안을 둘러싸고 있는 결정적인 조건들을 무화해야 한다.

공안에서 중요한 점은 ‘텍스트의 상대적 자율성’이다.20) 공안이라는 특수한 언어가 갖는 이와 같은 수행적(performative) 기능을 함축한 표현이 바로 활구라는 개념이며, 이는 또 의사소통적 기능에 주안점을 두는 사구와 비교된다.21) 활구란 글자 그대로 죽은 공안이 아니라 활발발한 공안이다. 활구는 그것도 어차피 글(句)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는 지적(知的)이다. 하지만 그것은 약속된 의미 찾기에 머물러 있는 주지주의적 학문경향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다.20) “우리는 텍스트를 단지 결정적인 조건들(저자, 영향관계, 컨텍스트)의 네트워크 속에 놓아둠으로써, 그 텍스트가 생성되기까지의 모든 조건들에서 벗어나 지금 읽고 있는 독자와 함께할 뿐이라는 사실을 잊곤 한다. …… 우리는 어떤 선 텍스트라 할지라도 최종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고 다양한 독해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상정해야 한다.” Bernard Faure 위의 책, p.136.

간화라는 말에는 사구를 활구화하고자 하는 대혜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대혜의 비판의식은 당대 유학을 딛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던 주희(朱熹)에게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주희는 대혜와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대유(大儒)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다. 주희가 전하는 대혜의 선사상을 먼저 살펴보자.

도(道)의 체(體)와 용(用)은 온 세상에 가득 차 있다. 옛날의 성인은 [이와 같은 이치를] 이미 깊이 터득하였으나 뒷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까 근심하였다.

[그래서] 주장을 수립하고 가르침을 내리되 근본적인 데서부터 세세한 데까지 이르니, 후인들을 일깨우고 가르치는 데 부족함이 없다. [따라서] 배우는 사람들은 그 책을 숙독하고 그 의미를 정밀히 궁구하며(熟讀其書 精求其義) [자신의] 마음에 비추어 참실함을 확인하고 사물에 적용해서 그 [가르침의] 타당성을 검증해야 한다.

이렇게 일상에서 [성인의 가르침을] 외고 생각하며 마음에 두고서 직분에 임하거나 일상적인 일을 처리하면, 모든 일이 다 자신에게 절실할 것이다. …… 책을 읽되 글의 뜻을 탐구하지 않고, 깊이 고찰하되 [자신의] 의견이 없는 것(讀書不求文義, 玩索都無意見)은, 바로 요즘 불가에서 말하는 화두를 본다(看話頭)는 것이다.22)22) 夫道之體用, 盈於天地之間. 古先聖人, 旣深得之, 而慮後世之不能以達此. 於是立言垂敎, 自本至末, 所以提옜誨飭於後人者, 無所不備. 學者正當熟讀其書, 精求其義, 考之吾心, 以求其實, 參之事物, 以驗其歸. 則日用之間, 諷頌思存, 應務接物, 無一事之不切於己矣. … 夫讀書不求文義, 玩索都無意見, 此正近年釋氏所謂看話頭者. 〈答許生〉, 《朱熹集》, 四川敎育, 1997, p.3089.

주지하다시피 주희는 유학 전통에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킨 사람이다. 주희의 말 가운데 “책을 숙독하고 그 의미를 정밀히 궁구하며”까지가 바로 그 이전의 훈고학적 학문방법론을 한마디로 설명한 것이다. 물론 주희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마음에 비추어 참실함을 확인하고 사물에 적용해서 그 [가르침의] 타당성을 검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주자학을 의리지학이라고 칭하는 근거가 된다.23)23) 대혜에 대한 주희의 평가가 갖는 타당성이나 주자학에 대한 대혜의 영향은 논외로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대 유학이 주희의 의리학으로 발전하는 도상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대혜라는 점이다. 아마도 주희는 유학의 근간인 ‘熟讀其書, 精求其義’의 노선을 기초로 하면서 ‘讀書不求文義, 玩索都無意見’에 함축된 긍정적인 의미를 성공적으로 포섭해 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어서 그는 간화에 대해 “책을 읽되 글의 뜻을 탐구하지 않고, 깊이 고찰하되 [자신의] 의견이 없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는 분명 주지주의적 학문방법론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간화의 학문적 경향을 “책을 읽되 뜻을 탐구하지 않고, 깊이 고찰하되 [자신의] 의견이 없는 것”으로 파악했던 주희의 판단은 상당히 적확한 것으로 보인다. 주희의 말은 대혜가 제출한 간화선법이 공안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간화는 일단 각종 공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있다느니(有), 없다느니(無) 하는 문자상의 의미치를 따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울러 그 공안에 대해 내 생각은 이러이러하다는 식으로 진도를 나가서도 안 된다. 적어도 이 두 가지 태도를 견지하고 있어야 화두를 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첫 번째 태도이다. 두 번째 태도는 첫 번째 것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글자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 되는가. 선어(禪語)는 본래 의미 없는 말(無義語)24)이고, 무의어는 선어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남송 말엽의 중봉명본(重峯明本, 1263∼1323)은 《천목중봉화상어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25) 世所謂語言者, 動乎其心, 而達乎其口, 卽情想之昭著, 未有無其義者 … 所謂義者, 乃情想之所適, 意識之所主, 而言以宣之也. 蓋語言皆模寫情識所緣之義, 曲盡其巧. … 凡若有情, 一動其聲, 必有所主之義, 但人莫之曉耳. 安有語言音聲, 而無其義者乎? 惟吾佛祖之道, 則異於是. … 自祖道之東, 而兩宗五派, 星分棋布, 遍入?區. 逮쯳其言則 須彌山·是甚큯 … 等語, ??不絶, 如長江大河, 莫之所止. … 旣不可以語默會, 尤不可以智識通, 及與天地鬼神, 咸莫能測, 所以目之爲無義語也. 夫無義者, 超乎喜怒哀樂之外, 脫乎情識意想之表. 又豈容以經書文字, 聖凡名相而和會哉? … 不知一涉意根, 俱成有義矣? 使佛祖之道, 果止於是, 則將何以斷, 他生死情妄之根乎? 誠所謂聚螢火以燎須彌, 持곽量而測滄海

세상에서 쓰이는 말(語言)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 입 밖으로 나온 것이니, 곧 [말한 사람의] 감정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므로 의미 없는 말은 결코 있을 수 없다. …… 뜻(義)은 [먼저] 감정의 움직임이 있은 다음에 [그것을] 의식이 주재하여 언어로 펼쳐 놓은 것이다.

[이와 같이] 대체로 말은 모두 감정과 의식이 화합된 뜻을 본떠서 재주를 부린 것이다. …… 무릇 감정이 있는 것들은 [모두] 한 번 소리를 지르면 그 속에는 반드시 주장하려는 뜻이 들어 있게 마련인데, 단지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말과 말소리가 있는데 어찌 [그 말에 담긴] 뜻이 없겠는가? 그러나 우리 부처와 조사들의 도(道)는 이와 다르다. …… 조사의 도가 동쪽으로 건너와 양종과 오파로 [분할되어] 하늘의 별과 바둑판 위의 돌처럼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말을 살펴보면, ‘수미산(須彌山)’이나 ‘시심마(是甚큯)’ …… 등의 말들이 떠들썩하니 이어져 마치 장강대하(長江大河)와 같아 도저히 막을 수 없게 되었다. …… 이미 말과 침묵으로도 알 수 없으니 지식으로는 더더욱 알 수 없으며, 뭇 귀신들조차도 어찌 할 수 없으므로 이것을 가리켜 의미 없는 말(無義語)이라 한다.

의미 없는 말은 희노애락의 범주를 초월하였고, 알음알이의 범주를 벗어났으니, 또 어떻게 경전의 문자와 나아가 성인이니 범부이니 하는 이름과 겉모습 따위로 알 수 있겠는가? …… 의미를 찾는 마음(意根)에 한발짝 들여 놓으면 모두가 의미 있는 말(有義語)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가령 부처와 조사의 도가 이것(의미 있는 말)에 불과하다면 장차 어떻게 생사망정(生死妄情)의 뿌리를 끊을 수 있겠는가? 이는 반딧불을 모아서 수미산을 밝히고, 표주박을 들고 바닷물을 헤아려 보겠다고 덤비는 것이라 하겠다.25)

중봉은 세간의 말과 선어(禪語)를 ‘의미 있는 말’과 ‘의미 없는 말’로 구분하고 있다. 여기서 의미라는 것은 기표가 내포되어 있는 발언자의 감정과 주장 같은 것들이다. 따라서 유의어란 발언자의 감정과 주장이 내포된 기표이다. 따라서 이 유의어에서 중요한 것은 발언자가 언표 속에 담은 뜻을 파악하는 것, 즉 앞서 주자가 말했던 ‘의미를 구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유의어의 한계는 인용문의 말미에서 드러난다. 이 비유에서 수미산과 바닷물은 숨겨진 의미를 가리키고 반딧불과 표주박은 그것에 대한 갖가지 파악, 즉 해석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유의어로서의 기표를 아무리 집적하고 고찰해도 대상은 결코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문제가 바로 중봉이 간화선의 관점에서 지적하는 유의어의 한계인 것이다.

선어가 무의어라는 것은 이와 같은 유의어적 인식방법에 대한 반성과 재고를 의미한다. 공안은 물론 기표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애초부터 의미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도록 기안된 기표이다. 공안에는 발굴해야 할 의미가 묻혀 있지 않다. 개(犬)에게 불성이 있다는 말이나 없다는 말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어차피 처음부터 어떤 의미를 담고 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에게 불성이 있다’는 말을 들어도 화두가 되고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말을 들어도 화두가 된다. 심지어 앞부분은 몽땅 빼 버리고 그냥 ‘없다(無)’고만 해도 화두로서 손색이 없다. 그런데 이런 화두가 다시 유의어(有義語)로 변질된 것, 즉 사구화된 것이 이른바 공안선이다. 공안선은 발언자가 선문답 속에 함축했을는지도 모르는 의미찾기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의식 하에서 제출된 간화선은 유의어로 변질된 기존의 공안을 무의어로 되돌려 놓고자 한다. 예컨대 조주가 ‘뜰 앞의 잣나무’를 말하면서 생각했던 의미치와 그 선문답을 두고 있어 왔던 각종 주석들을 기각함으로써, 수행자로 하여금 생전 처음 보는, 아무런 의미도 내포하지 않은, 낯선 ‘뜰 앞의 잣나무’와 직접 마주보도록 하는 것이 바로 간화선이다.

간화에는 봄(看)이라는 ‘지금 여기’의 직접성과 현재성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간(看)은 공안선 수행법이 내포하고 있는 주지주의적 경향의 공부방식에 대한 안티테제였다. 그렇다면 간화선에서는 지각작용을 어떻게 취급하는가.

3. 간화와 지각[知]

1) 지(知)와 부지(不知) 사이의 균형
선에서 지각[知]은 뜨거운 감자 같은 주제이다. 지각은 알음알이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진속불이(眞俗不二)를 통해 다시 고개를 든다. 공적(空寂)과 영지(靈知)라는 애매한 개념의 조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지각은 불교전통 속에서 포섭도 배제도 할 수 없는 그런 대상이다. 지각을 선 수행의 핵심내용으로 본격적으로 거론한 최초의 인물로 하택신회(荷澤神會, 670∼762)를 들어도 좋을 듯 싶다.

신회의 선사상은 널리 알려진 ‘지지일자 중묘지문(知之一字 衆妙之門)’과 견성(見性)이라는 개념 속에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이 개념들에는 북종 신수(神秀, 606∼706)의 선사상에 대한 그의 견제 의식이 강하게 배어 있다.26) 26) 이 가운데서도 최근에는 특히 지(知)보다는 견성이라는 개념에 주목하고 있다. ‘견성’이 신회의 사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들을 참조. 인경, 〈見性에 관한 하택신회의 해명〉, 《보조사상》 18, 보조사상연구원 편, 2002. 舟雲華, 〈禪宗 ‘見性’思想的發展與定型〉, 《中華佛學學報》 8, 臺北: 中華佛學硏究所, 1995, pp.59∼73. 樓宇烈, 〈神會의 頓悟說〉, 《白蓮佛敎論集》 3, 백련불교문화재단 편, 1993. 특히 樓宇烈은 무념(無念)이 부정적인 맥락에서 표출된 신회의 사상이라면, 긍정적인 맥락에서 표출된 것은 견성(見性)이라고 보고 있다.(p.267.)

신회는 신수의 사상을, “마음을 모아 선정에 들고, 마음을 머무르게 하여 깨끗함으로 보고, 마음을 일으켜 밖을 비추고, 마음을 수습하여 안으로 증득한다”27)는 네 구절로 압축하여 공략했다. 27) “凝心入定 住心看淨, 起心外照, 攝心內證.” 神會, 〈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 楊曾文編校, 《神會和尙禪話錄》, 中華書局, 1996, p.29.

이 네 구절을 통해 볼 때, 그는 신수의 사상에서 가장 큰 맹점으로 정(定)을 위주로 한 반주지주의 혹은 ‘과도한 적정주의’를 꼽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8) 적정주의에서 볼 때 일체의 지각작용은 모두 미망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하지만 신회는 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지각을 끌어 올려 불성의 작용으로 격상시켰다.29)28) “정(定)과 혜(慧), 양자의 불가분성 및 평등성에 기반을 둠에도 불구하고, 정보다 혜의 작용에 중점을 두는 것이 《단경》의 사상적 특징이다. 신회가 신수의 선사상으로 요약한 네 구절은 정혜쌍수(定慧雙修)에 근거하여 좌선중심의 입정(入定)의 폐단을 비판한 것이다.” 김영욱, 〈《壇經》의 北宗批判〉, 《백련불교논집》 4, 백련불교문화재단 편, 1994, pp.127∼128.29) 숭원 법사가 물었다. “선사께서는 불성을 보셨습니까?” 신회 화상이 대답했다. “보았소.” “비량으로 보셨습니까, 현량으로 보셨습니까?” “비량으로 보았소.” 다시 숭원법사가 추궁하듯 물었다. “무엇이 비(比)이고, 무엇이 양(量)입니까?” “비라고 하는 것은 [석가모니를 최후로 공양했던 인물인] 순타(純陀)에 비견되는 것이고, 양이라고 하는 것은 순타와 동등한 것이오.” “선사께서는 정말로 [불성을] 보셨습니까?” “정말로 보았다지 않소.” “어떻게 보셨습니까?” “보는 데 어떻게라는 것은 있을 수 없소.”(遠法師問: “禪師見佛性不?” 和尙答言: “見.” 遠法師問: “爲是非量見, 爲是現量見?” 和尙答: “比量見.” 又責(問): “何者是比, 何者是量?” 和尙答: “所言比者, 比於純陀. 所言量者, 量等純陀.” 遠法師言: “禪是定見不?” 和尙答: “定見.” 遠法師問: “作勿生見?” 和尙答: “見無作勿生.”) 〈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 p.25. 여기서 신회는 견성을, 감각기관의 직접적인 경험(현량)과 이에 근거한 추론(비량)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견성은 결코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제3의 인식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어떻게 보았는지를 묻는 숭원의 질문은 바로 견성을 어떤 제3의 인식방법으로 전제하고 있는 질문이며, “보는 데 어떻게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신회의 대답은 숭원의 이런 전제가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성을 보는 것이든 자성을 보는 것이든, 견성은 견문각지(見聞覺知)에서 출발한다.

본체는 공적한데, [바로 이] 공적함에서 지각(知)을 일으켜 세간의 색깔들을 구별하는 것이 지혜(慧)이다.30) 그리고 구별하지 않는 것을 선정(定)이라 한다. [신수처럼] “마음을 모아 선정에 들기”만 하는 것은 무기공에 떨어진 경우인데, [여기서는] 선정에서 벗어난 이후에 마음을 일으켜 세간의 모든 지어진 것들(有爲)을 분별하는 이것을 지혜라고 부른다. [하지만] 불경에서는 [이러한 경우를] 망심(妄心)이라고 했다. 이들의 [입장에] 따르게 되면 지혜가 작용하는 동안에는 선정이 없고, 선정인 동안에는 지혜가 없게 된다. 이처럼 이해하는 것은 모두 번뇌와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마음을 머무르게 하여 깨끗함으로 보고, 마음을 일으켜 밖을 비추고, 마음을 수습하여 안으로 증득하는 것”도 해탈한 마음이 아니라 불법(佛法)에 얽매인 마음이므로 옳지 않다.31)30) 여기서 ‘정(定)’은 수행을 통해 의식의 흐름을 끊은 모습으로 흔히 삼매(三昧, sama칍hi)라고 한다. 그리고 ‘혜(慧)’는 흔히 지혜라고 번역

신회는 신수의 선 수행법이 정(定)에 너무 치우쳐 있어서 정과 혜(慧)를 같은 연장선상에서 읽지 못하는 문제점을 낳게 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혜는 정에 근거하지 못해 망심(妄心)이 되고, 정은 혜로 연결되지 못해 무기(無記)가 되고 만다는 것이 신회의 문제제기이다. 그리고 신회는 정과 혜의 균형잡기를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구도는 종밀의 선사상에서 공적영지의 형태로 계승되었다.

종밀의 지 역시 이중적인 성격을 가진다. 본성(혹은 體)으로서의 측면과 작용(用)으로서의 측면이 그것이다. 앞의 성격을 가리키는 말이 공적(空寂)이고, 뒤의 성격을 수식하는 말이 신령함(靈)이다. 종밀은 공적영지라는 개념을 통해 이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불교 내부의 근본주의적 경향을 견제함으로써 당시에 급격히 나타나고 있던 선교 갈등을 극복하려는 지극히 현실적인 맥락을 타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면 대혜는 지각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가? 그는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이 자신을 찾아 온 조주종심(趙州從픹, 778∼897)에게 했다고 전해지는 말, 즉 “도(道)는 지(知)에도 부지(不知)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말을 빌려 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조주종심이 물었다. “[시비의] 다툼이 있는 지각(知)을 흉내내지 않은 것이 도입니까?” 남전이 대답했다. “도는 지각에도 지각하지 않는 것(不知)에도 속하지 않는다. 지각은 망령된 깨달음(妄覺)이요, 지각하지 않는 것은 무기(無記)에 불과하다. 만약 진실로 더 이상 의심이 없는 도에 도달하게 된다면 태허처럼 그렇게 경계가 없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어찌 시비를 굳힐 수 있겠는가?”32) 32) 남전의 이 대답은 《진심직설(眞心直說)》 서문의 첫 구절로도 인용되어 있다. 或曰: “祖師妙道可得知乎?” 曰: “古不云乎, ‘道不屬知, 不屬不知, 知是妄想, 不知是無計.’ 若眞達不疑之地, 猶如太虛寬廓, 豈可强是非耶?” 보조사상연구원 편, 《普照全書》, 불일출판사, 1989, p.47.

조주는 이 한마디에 바로 깨달았다. 도는 지각에도 지각하지 않는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남전의 말을 가리켜, 규봉은 영지(靈知)라고 했고, 하택은 지(知)라는 한 글자가 중묘(衆妙)의 문이라고 했다. 반면에 황룡사심은 “지라는 한 글자가 온갖 허물의 문”이라고 했다. 규봉과 하택의 입장을 핵심적으로 살펴보면 쉽지만(易), 사심의 경우는 핵심적으로 살펴봐도 어렵다(難). 여기서는 방편을 뛰어넘는 안목을 갖추어야 하니, 다른 사람에게 말하거나 전해 줄 수도 없다. 원오 선사께서 “조주의 선이 그저 말로 되는 것이라면 무에 어려울 게 있겠는가?”라고 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33)33) 州云: “不擬爭知是道?” 泉云: “道不屬知, 不屬不知, 知是妄覺, 不知是無記. 若眞達不疑之道, 猶如太虛廓然蕩豁, 豈可於中彊是非耶.” 趙州於言下, 千了百當. 南泉道不屬知不屬不知, 圭峰謂之靈知, 荷澤謂之知之一字衆妙之門. 黃龍死心云, 知之一字衆禍之門. 要見圭峰荷澤則易, 要見死心則難. 到這裏, 須是具超方眼, 說似人不得, 傳與人不得. 所以?悟先師說, 趙州禪只在口脣皮上, 難奈他何. 《大慧普覺禪師語錄》, 대정
34) 有靈知焉, 有眞知焉, 有妄知焉. 夫靈知之謂道, 眞知之謂悟, 妄知之謂解. 言所知則一也, 謂靈謂眞謂妄, 則日劫相倍矣. 學者不?其理, 泛於所知, 妄生執著, 引起是非, 不惟汨喪道源, 而亦沈埋自己. 如裵公謂: “血氣之屬必有知, 凡有知者必同體”, 此言靈知之知, 此知於聖凡迷悟無所間然, 心體本具, 了無加損者也. 《天目中峯和尙廣錄》, p.932(《산방야

위의 인용문에서 지각에 대한 대혜의 입장은 물론이고, 선불교 내에서 지각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신회-종밀’의 라인에 대한 대혜의 평가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문맥의 파악이 만만치 않다.

대혜는 먼저 “도는 지(知)에도 부지(不知)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남전의 입장을 먼저 소개하고, 이것이 종밀이나 신회의 선사상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규봉과 하택이 ‘남전의 말을 가리켜(謂之)’ 영지(靈知)와 중묘지문(衆妙之門)이라고 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룡의 경우가 분명치 않다.

황룡은 신회와는 반대로 중화지문(衆禍之門)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남전의 말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인지 다른 맥락에 있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 다만, 황룡의 말을 소개할 때는 규봉과 하택의 경우와는 달리 ‘남전의 말을 가리켜(謂之)’라는 표현이 없는 것으로 봐서 서로 다른 맥락에 서 있는 것으로 봤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만 확인하기로 한다.

그리고 말미에서 ‘신회-종밀’과 황룡사심을 쉬움(易)과 어려움(難)으로 구분한 것도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문맥을 좀더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 대혜의 법을 이은 좀 후대의 인물인 천목중봉(天目中峯)의 자료를 통해 간화선에서 지각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개괄적 이해를 도모해 보기로 하자.

[지각에는] 신령한 지각(靈知)도 있고 참된 지각(眞知)도 있고 망령된 지각(妄知)도 있다. 신령한 지각은 도(道)이고, 참된 지각은 오(悟)이며, 망령된 지각은 해(解)이다. 지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셋이] 모두 같지만, 영지와 진지와 망지로 [각각 나누어] 부르는 측면에서 보면 하루와 영겁처럼 차이가 난다. 배우는 이들이 이러한 이치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각자 아는 바에 따라서만 부질없이 집착을 내고 시비를 일으켜 도의 근원을 흐려 놓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매몰시켜 버리곤 한다.

배휴(裴休, 797∼870)는 “혈기가 있는 것들은 반드시 지각이 있는 법이니, 지각이 있는 것들은 반드시 그 바탕이 똑같다.”고 했는데, 이것은 신령한 지각의 견지에서 말한 것이다. 이 지각은 범부와 성인, 미혹과 깨달음에 무관하게 조금의 차이도 없이 마음의 바탕에 본래 갖추어져 있어 더하거나 덜어낼 수 없는 것이다.34)

마음(心)에는 참된(眞) 작용과 망련된(妄) 작용이 있다. 참됨은 신령한 지각의 본체로서 오묘하게 깨닫지 않고서는 추측이 불가능하다. 망령됨은 감정과 의식이 허깨비처럼 작용한 것으로, 외물을 쫓는 자는 그것을 따라 움직인다. 이때 어리석은 자는 이것들을 모두 마음이라고만 할 뿐, 참됨과 망령됨이 하늘과 땅의 차이인 줄을 모른다.35)35) 心有二焉, 曰眞曰妄, 眞者卽靈知之至體, 此非妙悟不可得而逆測也. 妄者卽情識之幻用, 乃逐物者由之也. 昧者?稱之爲心, 不知眞之與妄, 實푑壤之不탢. 《天目中峯和尙廣錄》, p.1028(《동어서화》, 선림고경총서 3,

천목의 말에 따르면, 앎에는 영지(靈知)와 진지(眞知)와 망지(妄知)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그런데 이 셋은 단순히 세 가지 지각작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우선 현상적으로 볼 때 지각작용은 망지와 진지 두 가지로 파악되는데, 망지는 언어를 기초로 하는 일상적인 지각작용을 의미하고, 진지는 깨달은 상태의 지각작용이다.

그래서 중봉은 오(悟)라고 말한다. 문제는 영지인데, 영지는 진지보다 뛰어난 또 다른 형태의 지각작용이 아니라, 망지와 진지를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지각작용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각작용은 망지에서는 도대체 불가능하고 진지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진심이 영지의 본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남전이 말한 지각과 지각하지 않음은 각각 천목이 말한 망령된 지각과 참된 지각에 해당된다. 그래서 남전은 지각함과 지각하지 않음을 다시 망령된 지각과 무기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각(知)=망령된 지각(妄知)=망령된 깨달음(妄覺)’, ‘지각하지 않음(不知)=참된 지각(眞知)=무기(無記)’가 된다.

그리고 영지와 ‘지지일자 중묘지문(知之一字 衆妙之門)’은, 이 두 가지를 모두 포섭하는 구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도는 지각에도 지각하지 않음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남전의 말이나 영지와 ‘지지일자 중묘지문’이라는 개념이 내포하는 뜻은 동일한 것이 된다. 이렇게 쉽게 이해되기 때문에 규봉과 하택은 쉽다(易)고 한 것이다.

그런데 황룡사심은 “지라는 한 글자가 온갖 허물의 문”이라는 ‘신회-종밀’ 라인과는 대척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지각은 망각(妄覺)에 불과하다는 남전의 말을 염두에 둘 때, 결코 잘못된 주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남전의 말과의 접점을 찾기는 어렵다.

그래서 대혜는 황룡의 입장을 알기 어렵다(難)고 입장을 유보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두 입장을 동시에 놓고서 대혜는, 더 이상의 설명은 곤란하니 수행자 각자가 방편을 뛰어넘는 안목을 갖추는 수밖에 없다고 말을 맺는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의견제시만으로도 대혜의 입장을 파악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다.

‘지=망지=망각’과 ‘부지=진지=무기’, 우리는 이 두 가지가 각각 독립된 인식과정과 내용임을 알고 있다. 전자를 중심으로 하는 인식방법을 주지주의적이라고 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반주지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혜가 도는 지각에도 지각하지 않음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남전의 말을 긍정적으로 수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이 두 가지 노선 사이의 균형잡기를 시도했다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36)36) 인경 스님 역시 대혜의 입장이 신회-종밀의 라인과 황룡파의 입장 모두에서 벗어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大慧는 神會와 宗密의 입장과 이를 비판하고 懷讓을 옹립하는 黃龍派의 입장, 모두에서 벗어난 안목을 갖추도록 요청한다. 이 점은 분명하게 北宋의 黃龍派와는 다른 시각으로, 敎外別傳에 의한 師資相承의 선명성에 있어서 경쟁관계에 있었던, 南宋 楊岐派의 인식을 보여준 점에서 의의가 있다. 바로 이런 점들이 楊岐派에 의해서 성립된, 看話禪思想의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생각된다.” 인경, 〈宋代 臨濟宗에서의 宗密 批判: 宗密에 대한 覺範의 비판을 중심으로〉, 《한국선학》 3, 2002, p.98.

2) 별전(別傳)의 형이상학
본 연구자는 선교일치를 근간으로 하는 중국 선불교의 주지주의(intellectualism)적 경향과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을 표방하는 반주지주의(anti-intellectualism)적 경향의 경계에 서 있는 것이 바로 간화선이라고 짐작한다. 주지주의와 반주지주의에 상응하는 선불교 수행형태를 각각 신회는 정(定)과 혜(慧)라고 했고 종밀은 공적(空寂)과 영지(靈知)라고 했다.

이 두 사람은 ‘지지일자 중묘지문’과 공적영지라는 개념을 통해 이 둘 사이의 균형잡기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혜 역시 지각작용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자체 내의 적멸성(이것을 종밀은 空寂이라고 했다)을 담지하고 있지 못한 것을 문제 삼았을 뿐이다.37)37) “큰 지혜를 지닌 인사들은 모두 지해(知解)를 반려와 방편으로 삼아서, 지해 위에서 평등의 자비를 행하고 지해 위에서 여러 불사(佛事)를 행하였다. …… [그들이 지해를] 끝내 번뇌로 여기지 않는 까닭은 지해가 일어나는 곳을 알기 때문이다. 이미 [지해가] 일어나는 곳을 알고 있으므로 이 지해가 곧 해탈의 장이며, 생사를 벗어난 곳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해탈의 장에서 이미 생사를 벗어났으므로, 지이든 해이든 당체가 적멸한 것이다. 지이든 해이든 이미 적멸하므로 지해를 아는 사람 역시 적멸하지 않을 수 없고, 보리와 열반 그리고 진여와 불성도 적멸한 것이다. [이와 같은데] 다시 무엇이 장애가 될 것이며, 어디를 향해 깨달아 들어갈 것인가.(從上大智慧之士, 莫不皆以知解爲?侶, 以知解爲方便, 於知解上, 行平等慈, 於知解上, 作諸佛事. … 終不以此爲惱, 只爲他識得知解起處. 旣識得起處, 卽此知解, 便是解

지각에 대한 대혜의 입장을 살펴볼 때, 당시까지만 해도 ‘신회-종밀’ 라인이 선맥의 서얼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신회와 종밀의 사상이 조사선의 선맥에서 볼 때 서얼에 해당된다는 것은, 송대 이후의 선불교가 교외별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반주지주의적 경향이 정통으로 굳어지면서 소급 적용하여 내려진 평가이다.

대혜가 신회와 종밀을 조사선의 이단아로 봤다는 분명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대혜의 간화선 수행법과 지각에 대한 입장은 신회와 종밀의 지각이론에 근접해 보인다. ‘신회-종밀’ 라인에 대한 문제제기는 대혜 당시에 본격화되었고 남송과 원대를 거치면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굳어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간화선 역시 반주지주의적 경향을 대표하는 선 수행법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송대 선불교는 기본적으로 체제지향적인 성격을 내포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당말의 고문운동을 주도했던 지식인들이 제기했던 핵심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가 “불교는 우리에게 무엇인가”였고, 당시 불교계는 자신의 이단성을 변명해야만 하는 시대적인 과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현안을 맨먼저 온 몸으로 감내한 인물이 바로 《송고승전(宋高僧傳)》의 저자 찬영(贊寧, 919∼1002)이었다.

그는 철저히 실용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중국문화 전통 속에서 불교의 위상을 역설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불교를 중국문화의 한 부분으로 떳떳이 자리매김하는 데는 적지않은 기여를 했지만, 선불교를 포함한 불교의 정체성을 내부의 논리 속에서 설득해 내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38)38) 혜홍각범이 《선림승보전(禪林僧寶傳)》을 저술한 배경 가운데 하나가 찬영에 대한 못마땅함이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대량(戴良)은 서문에서 혜홍이 《선림승보전》을 저술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찬영은 박학하였으나 그 식견이 어두워 마치 호구조사처럼 책을 지어 놓아 계속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이에 비분강개하여 글을 짓기로 하였다.(贊寧博於學, 而識幾于暗, 其於爲書, 往往如戶昏按ㅾ, 不可以屬讀. 乃慨然有志於論述.)” 卍續藏經137, 439a. 또 혜홍은 《임간록》에서 다음과 같이 성토하고 있다. “찬영이 《송고승전》에서 승려의 등급을 십과(十科)로 나누면서 의학(義學)을 맨 처음에 실은 것을 두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다.(贊寧作大宋高僧傳, 用十科爲品流, 以義學冠之, 已可笑)” 卍續藏經 148, 587b.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찬영의 사후 이 현안에 대한 해결방식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서 《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으로 이어지는 전등류 선적들에서 보이는 태도로 전환되었다.39) 39) Albert Welter, “A Buddhist Response to the Confucian Revival: Tsan-ning and the Debate over Wen in the Sung”(Peter N. Gregory and Daniel A. Getz, Jr., Buddhism in the Sung, Hawaii: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pp.21∼49).

전등류 선적들의 기조는 선불교 내부의 종파적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식이었다. 각 종파와 문중은 자신들의 법맥의 정통성을 사실적(事實的 그리고 史實的)으로 역설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전등류 선적을 발간했고, 경쟁적 관계에 있는 상대편을 흠집내기도 했다.

당시 이 노선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마조(馬祖)와 황벽(黃檗)의 근본주의적 입장40)을 고수한 임제종 황룡파의 인물들이 다수를 이루는데, 그 가운데서도 혜홍각범(慧洪覺範, 1071∼1128)은 단연 돋보인다. 반주지주의적 성향을 띤 전등류 선적들은 대체로 정통성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그 의지에 상응하는만큼의 배타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다. 40) 종밀의 저술에 비해서 마조와 황벽의 근본주의적 노선을 견지한 선적(禪籍)이 바로 황벽희운의 《전심법요(傳心法要)》이다. 《전심법요》는 종밀의 저술과는 현격히 다른 문건으로, 송대 선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전심법요》는 교(敎)와 구별되는 심(心)의 차별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거의 최초의 문건이다. 이 책의 내용으로 볼 때, 황

주지하다시피 혜홍의 대표적 저술인 《선림승보전》이 황룡 문하의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책의 전신격에 해당되는 책이 《임간록》인데, 이 책에서 눈여겨 봐야 할 내용 가운데 하나가 종밀에 대한 혜홍의 평가이다. 혜홍은 여기서 종밀을 세 번에 걸쳐 다루고 있는데, 이 가운데 두 부분에서 종밀에 대한 혜홍의 평가를 엿볼 수 있다. 먼저 혜홍은 종밀이 마조와 북종의 신수, 그리고 우두를 평가절하하고 신회만을 높이 평가한 내용을 심각하게 문제삼고 있다.

종밀은 마조의 가르침이 구슬이 까맣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마조가] 망(妄)에서 바로 진(眞)을 밝힌다고 한 것이 방편일 뿐이라는 것은, 불교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다. …… [종밀은] 또 우두의 가르침이 모든 것을 꿈처럼 여겨 진과 망이 모두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크게 잘못된 것이다. …… 북종 신수의 도리가 돈점(頓漸)의 이치임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치에 대해 논할 때에는, [그가] 무슨 마음에서 그런 얘기를 했는지를 마땅히 말해야 한다. 신수는 오조 홍인 선사의 수제자로서 돈종(頓宗)의 직계이다. 비록 근기가 미치지는 못했지만, [홍인의 문하에서] 충분히 보고 들었으며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는데 어찌 스스로 점종(漸宗)의 무리가 되는 것을 달게 여겼겠는가?41)41) 密以馬祖之道, 如珠之黑, 是大不然. 卽妄明眞, 方便語耳, 略知敎乘者皆了之. …… 又以牛頭之道, 一切如夢, 眞妄俱無者, 是大不然. …… 至如北秀之道, 頓漸之理, 三尺童子知之, 所論當論其用心. 秀公爲黃梅上首, 頓宗直指. 縱曰機器不逮, 然亦헺聞飽參矣, 豈自甘爲漸宗徒耶? 慧洪, 《林間錄》, 卍續藏經 148, 592b∼593a.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혜홍은, 유명한 종밀의 선분류에 대해 전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반박 논리가 좀 빈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혜홍은 ‘방편’과 ‘말한 사람의 본 마음’이라는, 근거로서의 자격이 별로 없는 근거를 토대로 종밀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또 다른 곳에서는 점수(漸修)의 입장이 피력된 종밀의 주장을 보여주고, 이어서 돈수(頓修)의 입장이 피력된 황룡파 회당조심(晦堂祖心)의 말을 소개하면서, “이 두 사람의 입장은 방편에 따른 것이므로 각각 의미가 있어 우열이 없다.”고 대체로 객관적인 입장의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어서 “규봉이 대답한 말은 한종고라는 사람의 질문을 바로잡는 [차원의] 것이었고, 그 말이 종지를 잃지 않아서 올바른 견해를 열어 보였다. [하지만 종밀과 회당의 말을] 자세히 비교해 보면 회당의 얻은 바가 많다.”42)고 결론지음으로써 일방적으로 회당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42) 二老古今之宗師也, 其隨宜方便, 自有意味, 初無優劣. 然圭峰所答之詞, 正韓公所問之意, 而語不失宗, 開廓正見. 以密較之, 晦堂所得多矣. 慧洪, 《林間錄》, 卍續藏經 148, 613a.

종밀에 대한 송대 임제종 황룡파의 이해는 객관적인 의미에서 ‘사실적인 판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파의 입장을 강화시키기 위한 ‘가치론적인 평가’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선종사에 있어서 송대의 신회와 종밀에 대한 이와 같은 평가는 동북아시아, 특히 임제종의 종풍을 그대로 계승하려고 했던 고려 후기와 조선의 선종사 인식에까지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선불교라고 하면 대번에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을 떠올리지만, 당대(唐代)와 육조(六朝) 시대까지만 해도 교외별전의 배타성은 생각만큼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았다.43) 43) 교외별전이라는 말이 최초로 발견되는 곳은 10세기에 출간된 《조당집》이다. 하지만 《조당집》에서는 아직까지 선종 4구의 형태가 아닌 “삼승교외별전(三乘敎外別傳)”이라는 구절로 나타난다(《祖堂集》, 中州古籍出版社, 2001, p.233). 중국 선불교사에서 교외별전이 불립문자와 함께 붓다의 말로 귀속된 것은 12세기 말경이다. T. Griffith Foulk, “Sung Controversies Concerning the ‘seperate Transmission’ of Ch?an”(Peter N. Gregory and Daniel A. Getz, Jr., 앞의 책, p.222 참조) ‘별전(別傳)의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는 교외별전을 슬로건으로 한 선종의 배타적 정체성은 12세기경에 이르러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이전까지 주지주의와 반주지주의 노선 간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발전해 왔던 선불교는, 당송 변혁기를 거치면서 홍주종의 선사상을 계승한 반주지주의 노선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대혜의 간화선 역시 승리자의 논리 속에서 다시 이해되고 해석되고 전달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대혜의 간화선은 ‘임제선’이라는 반주지주의 측의 슬로건 아래 포섭되었던 것이다.

4. 맺음말

간화선은 불교판 고문운동이고, 송대 성리학, 즉 도학(道學)과도 그 배경을 같이한다. 고문운동의 기조가 훈고학과 사장학적 학문 분위기를 일소하고 글은 도를 싣고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 듯이, 간화선 역시 화두의 문자적인 해석에 치우친 공안선을 비판하고 화두 본연의 기능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간화선은 고문부흥운동과 그 결실인 송대 성리학이 발생하게 된 주된 원인인 주지주의적 학문경향에 대한 비판이라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이 내포된 핵심적 개념이 바로 ‘활구’이다.

선재(先在)된 의미를 찾도록 유도하는 유의어(有義語)가 바로 우리가 상식적인 수준에서 얘기하는 언어이다. 그런데 원래 공안은 이와 같은 일상적인 말이 사용되는 맥락과는 다른 것이었는데, 마치 일상어처럼 치부되었고 이렇게 변질된 공안이 바로 사구(死句)이다. 사구는 세속화된 공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활구는 이렇게 죽어버린 말귀를 다시 살려낸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활구는 무의어(無義語)임을 강조함으로써 의미의 선재성을 포기하는 대신에 공안이라는 텍스트의 상대적 자율성을 고양하여 그것의 수행적(performative) 기능을 최대한 보장한다.

그런데 간화선의 이와 같은 입장은 반주지주의적 입장 일색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잦다. 특히 교외별전(敎外別傳)과 직지인심(直指人心) 등의 어구가 선가의 대명사처럼 등장하면서부터 이러한 색체는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간화선이 반주지주의적 선사상으로 굳어진 데는 어떤 특별한 시점에 모종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작업은 임제종 황룡파가 주도한 혐의가 짙으며, 작업의 주된 내용은 조사선의 정통성, 즉 임제종의 종지를 반주지주의적인 것으로 몰아가는 데 있었다.

흔히 알려진 바와는 달리 대혜의 선사상에서 ‘신회-종밀’ 라인으로 이어지는 지(知) 중심의 선사상이 배제되어 있다는 뚜렷한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서 이 두 사람을 지해종도라고 낙인찍은 부류가 간화선 측인 것은 분명한데, 간화선의 종주라고 해도 무방할 대혜종고가 정작 이들의 선사상에 맞선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오히려 대혜는 묵조선을 축으로 하는 반주지주의 입장과 공안선을 축으로 하는 주지주의적 입장의 사이에서 균형잡기를 시도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

 

 

 

박재현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서울대·경희대 강사. 논저서로 〈선불교의 정통성에 대한 의지〉 《無를 향해 기어가는 달팽이》 《깨달음의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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