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 시적(詩的)·생태적 공간, 그 다양한 연상과 상상 속으로

내가 ‘늪’이라는 말을 꺼내면 어떤 사람은 “…… 가려진 커텐 틈 사이로 처음 그댈 보았지. 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했고 가슴엔 사랑이……. 꿈이라도 좋겠어 느낄 수만 있다면……”이라는 가사로 귀에 익숙한 조관우의 〈늪〉이란 노래를 연상하곤 한다.

《백과사전》에서는 늪(swamp)을 “수심 3m 이하로 호수와 비슷한 개흙이 많은 물웅덩이”라 하고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1)1) http://kr.encycl.yahoo.com/final.html?id=40924&from=enc

얕기 때문에 햇볕이 늪의 바닥까지 충분히 내리쬐므로 순채·검정말·새우말·물수세미 등의 침수식물(沈水植物)이 바닥 전면에 무성한 것이 보통이다. 또 바닥에는 생물의 시체 등 유기물이 퇴적되어 있고, 산호는 볼 수 없다. 수심이 얕아 바람에 의해서 물이 교란되기 때문에 여름철에도 물이 정체되는 일이 거의 없다.

저생동물(底生動物)로는 실지렁이 등이 풍부하여 부영양형(富營養型)에 속한다. 호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습을 바꾸어 간다. 그 변화는 아주 완만하며 주요한 작용은 호수의 매적(埋積)에 의한다. 즉 호수 → 늪 → 소택지(沼澤地)로 변화해서 결국 습지에서 초원으로 바뀐다. 소택지는 이 변화과정에서 개수면(開水面)이 있는 최후의 단계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늪은 호수의 변천과정에서 보면 노령기의 것으로 간주된다.

또한 《국어사전》에서는 늪을 “호수보다는 작으나 못보다는 크게 땅바닥이 저절로 둘러빠지고, 진흙 바닥에 많은 물이 깊지 않게 늘 괴어 있어 물속 식물이 무성한 곳”이라고 정의하고 있다.2)2) 한글학회, 《우리말큰사전》 1(어문각, 1991), 885쪽.

그런데 우리들은 보통 늪이라고 하면 ‘발을 헛디디면 빠져 들어가는 위험한 물웅덩이’를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늪지대에 들어서고 말았다’ ‘늪에 빠졌다’의 늪은 ‘궁지에 몰리거나 난관에 봉착한 경우’를 지칭한다. 이처럼 늪이란 말은 우리의 일상적 언어 습관에서 보면 긍정적인 면에서보다도 부정적인 면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나는 바로 이 늪을 나의 인문학함, 철학함의 문맥에서 다시 읽어내어 나의 글쓰기의 상징과 은유로서 특허(特許)하여 사용하고자 한다.3)3) 이러한 시도는 이미 최재목, 《시인이 된 철학자》(수원: 청계, 2000)에서 논의된 바 있다. 그리고 최근 《크로스오버 인문학-젊은 철학자의 ‘늪의 글쓰기’-》(서울: 장승, 2003)에서도 밝힌 바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온몸으로 글쓰기’ ‘심신일체적 글쓰기’라고 하는, 삶의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이른바 홀리스틱(holistic) 글쓰기의 이념을 전제한 ‘늪의 글쓰기’를 생각해 왔던 것이다.

어느 글에서 나는 “‘단선적 사고에서 전방위적(全方位的) 사고로’ ‘따로 따로에서 공생과 온몸으로’를 주장할 때 우리는 지금 ‘늪’의 사고를 신중히 고려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4)라고 밝힌 적이 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4) 최재목, 《시인이 된 철학자》(수원: 청계, 2000), 111쪽. 약간 내용을 고쳤음.

인문학자나 철학자들은 계몽이라는 오만한 허구의식에서 벗어나 오만 잡것과의 섞임과 화해의 길을 모색해 가야 한다. 화광동진(和光同塵) 혹은 화쟁(和諍)적인 어우러짐을 지향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늪’의 사고로 표현하고 싶다. 늪은 지구의 숨통(허파)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부서져 가는 자연의 생태환경을 복원해 주는 역할을 한다.

답답한 지구에 인간다운 삶의 공간을 만들어 주는 늪. 그것은 문명의 주변지대에 위치하면서 도시와 과학 기술, 자본주의가 쏟아내는 오만 잡것들을 받아들여 정화하며, 지하-지상, 생물-무생물-동물, 자연-인간 등의 삶의 건강한 생태 공간을 만들어 가는 바로 그것5)에서 사람의 무늬가 만드는 삶의 즐거움과 보람과 같은, 인문적 지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5) 이에 대해서는 최재목, 〈體認之學의 현대적 가능성〉, 《시인이 된 철학자》(수원: 청계, 2000)을 참조 바람.

늪의 사고는 혼돈과 질서를 겸비한 삶의 방식을 말하며, 뒤에서 말할 사유 →← 글쓰기 →← 담론 →← 생활하기라는 인문학하기, 철학하기의 새로운 틀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늪의 사고는 세속의 지평에서 세속에 동참 연대(親民)하여 함께 자신이 철학하고(eigenes Philosophieren), 자신이 사색해(eigenes Denken)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이것은 “자생하는 풀숲과 진흙의 발을 서로 딛고 오르내리는 물의 음계(音階), 늪의 지성(知性), 온몸을 부비며, 아름다운 화음(和音)으로 연대한 공생과 자치의 터”라는 시적 표현6)도 가능하다.6) 최재목, 〈體認之學의 현대적 가능성〉, 《시인이 된 철학자》(수원: 청계, 2000), 180∼181쪽. 시 전체는 같은 책, 180쪽을 참조 바람.

어쩌면 진정한 인문학함의 사고는 이러한 시적(詩的)·생태적인 삶을 지향하는 열망 같은 것에서 싹터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람, 동물, 식물만의 아픔뿐만 아니라 돌, 물, 그리고 모래알의 말없는 아픔도 함께 느낄”7) 수 있듯이 늪도 그러한 자비심을 지니고 있다. 사람됨, 사람다움을 추구하는 노력에서 톱니화된 답답한 우리의 삶에 숨통을 틔워줄 것이다. 늪의 정신에서 나는 그것을 바라보고자 한다.8)7) 박이문, 《慈悲의 倫理學》(철학과 현실사, 1996), 2판, 214쪽.8) 최재목, 《시인이 된 철학자》(수원: 청계, 2000), 143∼144쪽.

나에게 글쓰기는 이미 그 자체로서 내 사색의 과정의 전면적인 드러냄이다. 이런 정직한 과정의 드러냄은 나 자신 속에서 느껴지고 일어나는 일을 있는 그대로 ‘관(觀)’하고 ‘기술(記述)’하는 일이다.9)9)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관(觀)’하는 것은 불교의 위빠사나(vipas큮ana?의 수행론 즉 신(身)·수(受)·심(心)·법(法)의 네 가지를 관하는 사념처관(四念處觀)과 흡사하다.(이에 대해서는 《대념처경(大念處經)》과 그 주석서를 번역한 각묵 스님 옮김, 《네 가지 마음 챙기는 공부》(서울: 초기불전연구원, 2003)를 참조 바람.)

이렇게 나를 있는 그대로 관하는 것, 기술하는 것은 내 심신의 상처와 고통을 하나하나 풀어헤쳐 그것을 끝까지 응시하면서 치유·극복하는 의학적인 측면을 갖는다. 그렇다면 늪의 글쓰기는 글을 쓰는 내가 곧 나 자신의 의사(healer)인 동시에 자신의 삶과 세계를 바라보고 교정해 주는 철학자(philosopher)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늪의 글쓰기는 ‘치유(therapy)로서의 글쓰기’10) ‘철학으로서의 글쓰기’라는 말로 환치할 수 있다.10) 이 말은 《길은 가끔 산으로도 접어든다》(서울: 포엠토피아, 2003)의

늪―무기(無記), 보르헤스(Borges)의 미로와 백과사전, 법계도(法界圖)

위의 사전적 정의에서 밝힌 대로, 늪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면서 ‘물속 식물이 무성한 곳’이다. 일면 ‘나눔과 쪼갬의 장소’이기도 하면서 전체적으로 보면 ‘어울림과 더부살이의 공간’이다. 숱한 개체적·자생적 생명체들의 공생처(共生處)이다. 이 공생처에는 나뉘고 쪼개져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나눔과 쪼갬[二/分]이 없다(無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하나[一/合]만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不守一).11)11) 최재목, 《시인이 된 철학자》(수원: 청계, 2000), 111쪽 참조.

늪에는 분명 단순성과 복잡성,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오욕(汚辱)과 정화(淨化), 예토(穢土)와 정토(淨土)가 공존해 있다. 이것을 화쟁(和諍)과 원융(圓融)의 상징체라 말해도 좋다. 더욱이 늪은 농촌적·생태적 심성·상상력을 지님과 동시에 도시적·과학기술문명적 잔해·잔여에 대한 포용력·자정력(自淨力)을 가졌다. 이것은 나의 ‘늪’이란 시(詩)에 잘 드러나 있다.12)12) ‘늪’의 사색에 대한 시적(詩的) 표현의 일단은 최재목의 시 〈거대한 노래〉, 《나는 폐차가 되고 싶다》(시와반시사, 1996), 14∼15쪽을 참조

온갖 잡것들과 함께 지낸다, 슬픔에서도 물러나 기쁨에서도 물러나, 늪은 노래한다, 이 기막히고도 알 수 없는 일들이 물밑에서 아니 물위에서, 자라다 쓰러지고 쓰러지다 일어서서 노래하는 그곳, 일렁거리다, 인간도, 벌레도, 미래도, 희망도 저 속에 잠들 것이다, 상처투성이의 푸른 땅의 자궁, 개구리들의 모성(母性)이 보이고, 벌레들의 정액, 풀들의 교미가 보이고, 뼈와 흙과, 돌과 풀과, 사람과 함께 늪은 고뇌한다, 도시가 흘러 들어오고, 기술의 나사 튕겨 나오고 과학의 잔재들, 폐차들 쌓여 썩는다, 이성(理性)의 고름과 눈물, 퇴적한 인간들의 명패, 물은 온갖 쇠붙이에 달라붙어 살을 뜯어먹는다,

지극히 합리적인 그대들의 시간들, 우둔하고 흐리게 잊혀진다. 온갖 잡것들, 진보한다 그리고 퇴보한다, 아니다 그런 것은 없다, 이것도 저것도, 저것도 이것도 아니다, 아닌 것도 아니다, 또 아니다, 아닐까, 그럴까 하면서, 드디어 늪은 맑은 노래 흘러 보낸다, 우 우 우, 갈 숲의 건반을 두드리며 새들이 몰려올 때 낮아지거나 높아지거나 혹은 숨으면서 노래하는 늪, 풀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 악보를, 자생하는 풀숲과 진흙의 발을 서로 딛고 오르내리는 물의 음계, 늪의 지성(知性), 온몸을 부비며, 아름다운 화음(和音)으로 연대한 공생과 자치의 터.

늪은 어느 한 부분만 떼어내 볼 수 없는 유기적이고 전우주적이며, 공생적(共生的)·자치적(自治的)·연대적(連帶的)인 생태공간이다. 한편으론 혼돈스럽고 또 한편으론 질서가 있는 곳, 화쟁(和諍)하면서 서로서로 걸림이 없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공간, 바로 그곳, 늪은 그야말로 “도시가 흘러 들어오고, 기술의 나사 튕겨 나오고 과학의 잔재들, 폐차들 쌓여 썩는다, 이성(理性)의 고름과 눈물, 퇴적한 인간들의 명패, 물은 온갖 쇠붙이에 달라붙어 살을 뜯어먹는다, 지극히 합리적인 그대들의 시간들, 우둔하고 흐리게 잊혀진다. 온갖 잡것들, 진보한다 그리고 퇴보한다, 아니다 그런 것은 없다, 이것도 저것도, 저것도 이것도 아니다, 아닌 것도 아니다, 또 아니다, 아닐까, 그럴까 하면서, 드디어 늪은 맑은 노래 흘러 보낸다”는 곳이다.

늪은 ‘생성과 소멸[生滅]’을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줄거나 더하거나 하지 않는다(不增不減). ‘있는 그대로[眞如]’일 뿐이다. 이것은 나의 시 〈거대한 노래〉13) 일부에서도 비유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13) 최재목, 《나는 폐차가 되고 싶다》(시와반시사, 1998), 14∼15쪽.

  • (생략)

    아파트를 나와 함창 부근 낙동강변 늪지대로 간다 여기저기
    허리 굽혀 조개를 줍는다 손을 넣어 진흙을 긁어 대면 밤알만 하거나
    손바닥만한 조개가 혀를 빼물고 수도 없이 잡혀 나온다
    썩은 신발 깡통이나 판자, 세월 지난 지갑들, 컴퓨터 디스켓, 여자 속옷도 나오는 늪지대엔
    이념도 썩고 종교도 죽었다 새들이 찾아오고 조개를 쪼러 걸어가다 지쳐 발자욱도 남겨 둔다

    (생략)

    혼자 가기에는 어려운 길, 물어 물어 눈에 보이는 북망산천
    사람들아, 위대한 세월은 없다 역사는 가진 자의 것도 가지지 않은 자의 것도 아니다 강가에서 보면 새가 남긴 발자욱, 그 뒤로 들리는 새 부리에 찢겨 살결 아파하다 말라죽는 조개들의 소리, 모래로 물 스미는 소리, 물에 물다가드는 소리, 물에 흙 섞이고 흙에 물 섞이는 소리, 물 부딪히는 소리, 갈 숲 부딪히는 소리, 고기 튀어 오르다 허리 꺾이는 소리, 그러다 그러다가 비늘 떨어지는 소리,

    거대한 노래가 되는 이곳 이곳은 아름다운 북망, 북망산천이기를.
    (밑줄은 인용자)

또한 늪은 침묵한다. 그러나 그 침묵은 바로 큰 웅변이자 음악이다. 늪의 음(音), 즉 멜로디(melody)나 리듬(rhythm)은 하나 하나의 단순한 소리[聲=단일음=단음]가 모여서 조화를 이룬 것이다. 그런데 대음(大音), 즉 큰 음악으로서 조화를 이루었을 때 하나 하나의 소리(개별자=개체의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게 된다(大音希聲). 늪의 음악은 바로 그런 곳이다. 늪은 그 자체로 큰 음악이면서도 개별적인 것들의 소리는 침묵에 가깝게 조정되는 곳이다.14)14) 현행본 《노자(老子)》 ‘2장’에는 “음성상화(音聲相和)”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근래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백서(帛書) 《노자(老子)》― 1973년 11월부터 1974년 초에 이르는 시기에 중국 호남성(湖南省) 마왕퇴(馬王堆)라는 한묘(漢墓)에서 비단(帛=백)에 글을 쓴 책(書)(기원전 168년)의 《노자》가 발견된 것을 말함―에는 ‘46장’에 배당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음성상화(音聲相和)”가 “음, 성지상화야(音, 聲之相和也)”로 되어 있다. 풀이하면 음(音), 즉 멜로디(melody)나 리듬(rhythm)은 하나 하나의 단순한 소리[聲=단일음=단음]가 모여서 조화를 이룬 것이라는 말이다. 이때의 멜로디나 리듬이 바로 가곡(歌曲)으로서 단음=성(聲)의 문채·문장(方/文)인 것이다. 그리고 현행본 《노자》(41장. 백서본은 3장)에는 “대음희성(大音希聲)”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 뜻은 큰 음악이 연주되는 경우에, 악기(樂器)와 성악(聲樂)을 겸한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관악기·현악기와 같은 각종 악기나 사람의 목소리 하나 하나가 모두 성(聲)인데, 그것이 “대음(大音), 즉 큰 음악으로서 조화를 이루었을 때는 하나 하나의 소리

유럽 속담에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Speech is silver, silence is gold)”라는 말이 있듯이, 마치 비행기가 갑자기 고도를 낮추는 에어포켓(air pocket)처럼, 붓다도 때때로 침묵을 지켰다.15) 말이 있다가 갑자기 멈추는 곳. 그 움푹 꺼지고 텅 빈 곳, 바로 그곳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붓다가 침묵을 지킨 기존의 10가지 형이상학적 명제들을 요약하여 십무기(十無記)라고 한다.

무기(無記, aviyaka칣a)란 ‘기술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칸트(Kant, Immanuel, 1724∼1804)가 안티노미(antinomy, 二律背反)라고 부른 것과 동일한 성격의 것이다. 즉 하나의 사태에 대하여 상반되는 두 개의 판단이 동시에 성립할 때 그것은 우리의 지식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붓다도 이러한 안티노미를 해결하는 것을 자신의 철학적 과제로 삼지 않았다.

그 자체로 웅변이면서도 침묵하는 공간인 늪. 바로 이 늪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기적 작가 보르헤스(Borges, Jorge Luis, 1899∼1986)의 작품에 나오는 〈미로정원(迷路庭園)〉16)과 흡사하다. 문학평론가 이남호는 《보르헤스 만나러 가는 길》을 썼다. 이것은 보르헤스의 소설집 《픽션들》에 실린 8편의 단편을 번역하면서, 그 한편 한편에 대해서 저자의 해설을 붙인 책이다. 16) 이남호, 《보르헤스 만나러 가는 길》(서울: 민음사, 1994), 245쪽.

김호성은 《책 안의 불교 책 밖의 불교》라는 자신의 책 속의 〈보르헤스 읽기, 의상스님 읽기〉라는 글에서 “이남호 교수의 《보르헤스 만나러 가는 길》을 읽게 되었다. 문학평론가인 저자의 보르헤스 읽기를 다시 읽음으로써 나는 다소나마 보르헤스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되었으며, 아울러 깨닫게 되었다. 보르헤스 만나러 가는 길은 의상(義相) 스님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것을”17)(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김호성은 또 이렇게 말한다.17) 김호성, 〈보르헤스 읽기, 의상스님 읽기〉, 《책 안의 불교 책 밖의 불교》(서울: 시공사, 1996), 111쪽.

보르헤스의 소설에는 미로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또 시를 통해서도 직접적으로 미로의 상상력을 내보이고 있다. 민용태 교수는 “미궁”의 1연을 이렇게 번역했다.18) “결코 문은 없다. 너는 안에 있다/성곽은 우주를 포괄한다/안도 밖도 없다/겉의 벽도 은밀한 중앙도 없다/끈질기게 두 갈래로 갈라져 나가는,/끈질기게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보르헤스는 끈질기게 두 갈래로 갈라지는 미로를 만들고 있다. 단편 〈미로정원〉이 그것이다. …보르헤스의 미로는 ‘상징적 미궁’이며, ‘우주의 그림’이다. 18) 민용태, 《로르까에서 네루다까지》(서울: 창작과 비평사, 1995), 214쪽.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즉 미로(혹은 미궁)는 우주와 우리 삶의 은유이다. 뭐가 뭔지 모르는, 그러나 그 속에 질서를 숨기고 있는 세상(혹은 마음). 다만 보르헤스는 인간은 그 질서와 법칙을 알 수가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나는 머리를 쳤다. 그렇다. 의상의 그림 그 자체―(법계도)라 부르기 이전에―는 미로가 아니고 무엇인가. 실제 불교를 모르는 사람에게 (법계도)를 보여 주며 물었을 때, 나는 들을 수 있었다. “미로 아니에요?” 법계(法界)는 중생들의 삶의 세계로도 해석될 수 있고, 진리(깨침)의 세계로도 해석될 수 있다.

어느 쪽이 옳을까? 이 두 세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정답이다. 즉 중생들의 삶의 세계 그 자체가 진리의 세계라는 것이(화엄경)의 대답이다. 이를 의상은 54개의 굴곡을 가진 하나의 그림[法界圖]으로 나타냈던 것이다. 굴곡은 혼돈이고 우연이며, 굴곡을 그리면서도 끝내 이루는 하나의 선(線)은 질서이며 필연이다. 그러니까 보르헤스와 의상의 미로는 모두 우연 속의 필연, 혼돈 속의 질서를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산다는 건 무엇일까? 미로를 헤매는 일[輪廻]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윤회의 여로는 또 길찾기[巡禮]가 아닌가. 성스러운 사람에 대한, 진리에 대한 순례인 것이다.”19)(강조는 인용자. 이하 같음) 19) 김호성, 〈보르헤스 읽기, 의상스님 읽기〉, 《책 안의 불교 책 밖의 불교》(서울: 시공사, 1996), 113∼115쪽.

그렇다. 이남호가 지적하고 있는 대로 “보르헤스가 발견한 세상은 혼돈이고 미궁이고 무한하게 보이지만, 거기에는 숨은 질서와 법칙이 있다. 인간은 그 질서와 법칙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20) 보르헤스가 발견한 세상처럼 ‘늪’은 혼돈과 미궁이면서 또한 질서와 법칙을 숨기고 있다. 20) 이남호, 《보르헤스 만나러 가는 길》(서울: 민음사, 1994), 188쪽.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백과사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책장을 들어 본문을 펼치면 수많은 문자의 늪, 필요한 항목을 찾아서 읽어 들어가면 도 다시 마주치는 개념들, 그 개념들을 찾아서 읽어 가다보면 또 다시 마주치는 수많은 문자와 개념들, 이러한 개념과 개념을 ‘클릭’ ‘클릭’하다가 보면 어느새 수많은 글자들이 이어주는 거대한 문자의 늪. 그 늪의 밑에는 미세하게 그려진, 언어로 수놓은 길과 길이 이어져 우주적 사고와 논리를 이룬다. 바로 혼돈처럼 보이는 곳에서 우주적 질서와 법칙이 숨어 있다.

송병선은 〈보르헤스, 백과사전과 글쓰기〉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보르헤스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좋아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그리 연구되지 않고 있다. 수차에 걸쳐 그는 어렸을 때의 ‘무한한 영어 책들로 가득 찬’ 아버지의 서재에 관해 언급한다. 그리고 가족이 유럽으로 여행을 가면서 아버지가 소장하고 있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팔아버린 후, 보르헤스는 매일 밤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도서관의 참고열람실로 가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아무 곳이나 펼쳐 그의 관심을 끄는 글들을 읽곤 했다.21) 21) 결혼에 실패하고 술과 담배도 못했던 보르헤스의 유일한 취미는 백과사전을 뒤적거리는 일이었다고 한다. 악성(樂聖) 베토벤이 귀가 먹었듯이, 그는 집안의 유전병과 과도한 독서로 인하여 눈이 멀게 된다. 그러나 실명이 그의 육체적 눈을 가릴 수는 있었지만 그의 심안(心眼)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그의 상상력의 날개는 암흑 속에서 더욱 높고 멀리 날아갔다.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던 보르헤스는 자신을 모델로 단편 〈기억왕 푸네스〉를 썼다. 푸네스는 하루를 기억해 내는 데 꼬박 하루가 걸리는 초기억력자이다. 보르헤스는 이미 외워 버린 백과 사전과 많은 책들을 자신의 소우주 속에서 반추하고 또 반추했다. 그 결과 그는 독특한 관점을 지닌 심안을 얻게 되었고, 자신이 속한 시간과 공간을 꿰뚫어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단편 〈알레프〉의 머리말로 인용했던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호두껍질 속에서 무한한 우주의 주인이 되는 것을 체험했던 것이다. 그 체험의 핵심은 역시 ‘여기, 지금’ 속에 모든 시간과 공간이 수렴되는 화엄적(華嚴的)인 것이었다. 이러

그는 로널드 크라이스트에게 ‘그걸 읽곤 했지요. 그건 한편의 논문이기도 했고, 짧은 책이기도 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그에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단순한 백과사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과사전이라는 ‘알파벳의 무질서’ 속에서 글쓰기/읽기라는 우주의 질서를 가르쳐주는 도구이기도 했다.”22)22) 송병선, 〈보르헤스, 백과사전과 글쓰기〉, 《보르헤스의 미로에 빠지기》(서울: 책이 있는 마을, 2002), 77쪽.

그렇다. 백과사전의 편집 내용은 그냥 펼쳐보는 한 그 글쓰기는 ‘글자(알파벳 등등)의 무질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속에서 관련되는 항목을 차근차근 읽어가다 보면 백과사전은 우주의 질서를 가르쳐주게 된다. 따라서 백과사전은 ‘글쓰기/읽기라는 우주의 질서를 가르쳐주는 도구’가 된다. 마치 논두렁 밭두렁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따라가다가 보면 너른 들판을 만나듯이 말이다.

이 ‘들판’은 바로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지금·여기’이다. ‘지금·여기’라는 들판 속에서 ‘길 찾기의 체험’을 통해 나는 주인공이 되고 있는 것이다. 들판에서 내가 밟은 논두렁 밭두렁 어느 한곳이든 모두 시간과 공간이 수렴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화엄적(華嚴的)인 체험은 바로 문자와 정보, 사고와 논리의 늪인 백과사전의 글쓰기/읽기라는 방식에서 가능하다.

백과사전이라는 언어와 개념의 ‘늪’은 언어 그 자체의 증감(增減)은 없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언어가 지칭하는 개념 내용들 사이의 생멸(生滅), 즉 생성(生成)·소멸(消滅), 상쇄(相殺)·상생(相生)이 공존하는 곳이다. ‘백과사전’, 그리고 내가 글쓰기에서 사용하는 ‘늪’이란 말을 나는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 625∼702)이 만든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이하 《법계도》)에 비유하고자 한다.

의상의 《법계도》는 광대무변한 화엄사상(華嚴思想)의 요지를 7언 30구, 즉 210자의 게송(偈頌)으로 압축한 도인(圖印)이다. 법(法)=진리의 세계를 도인 혹은 문양(文樣)으로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다.23) 《법계도》는 54각이 있는 도인에 합쳐서 만든 것으로 “가지가지의 꽃으로 장엄한 일승의 진리로운 세계의 모습”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지극히 조직적인 《법계도》의 게송은 중앙에서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의 ‘법’자로 시작해서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처럼 ‘불(佛)’자로 끝맺고 있다. 《법계도》의 근본정신은 바로 《화엄경》의 근본정신이기도 하다. 의상은 《법계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23) 난 최근 ‘의상이 무엇에서 힌트를 얻어 이 《법계도》를 만들었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이를 증거할 다양한 문양과 자료를 찾고 있는 중이다. 다만 여기서 말해도 좋을 것은 《법계도》 자체가 이미 장르를 넘나드는 문양(文樣)임에 틀림없다는 점이다.

법성의 상은 무엇인가. 무분별로써 상을 삼는다. 그러므로 일체 평상의 도리가 중도에 그름도 없고 분별도 없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문장 첫 시(文首詩)에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이 본래 없고)’ 내지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 억만 겁에 부동한 것 그 이름이 부처일세)’이라고 하였다. 시(詩)에 의지한 까닭은 허망한데 나아가서(=허구에 입각해서) 실상을 나타내려는 것이다(所以依詩卽虛顯實). 그러므로 《일승법계도》의 글자와 뜻을 보고 듣고 수집해서 이 선근 공덕으로써 일체중생에게 회향하고 널리 중생계를 다하여 일시에 성불하기를 서원한다.24)24) 法性以何爲相, 以無分別爲相, 是故一切尋常在中道, 無非無分別, 以此義故, 文首詩, 法性圓融無二相, 乃至 舊來不動名爲佛, 所以依詩卽虛顯實, 故誓願見聞修集一乘法名字及義, 以斯善根廻施一切衆生, 普重修盡衆生界, 一時成佛, 法界圖章.(義湘, 《華嚴一乘法界圖》, 韓國佛敎全書 第二冊(서울: 東國大學校 出版部, 1979年), 2∼8쪽.)

《법계도》는 어쩌면 신화적인 상징으로서 뱀[蛇] 또는 용(龍)이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미분화(未分化)·전분별적(前分別的)·혼돈(混沌)의 상태를 말하는 우로보로스(Ouroboros)일지도 모른다. 제 꼬리를 물고 있는 글은 결국 모든 장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상징한다. 백과사전이 그렇다. 늪은 그 상징인지도 모른다.

문자의 꼬리를 물고 있는 문자, 글에 서로 기대어 있는 글, 의언진여(依言眞如)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법(法)과 불(佛)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법의 본래모습에는 분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화엄일승법계도》가 ‘시(詩)’에 의지한 것은 “시라는 허구에 입각해서(즉 시에 기대서) 실상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위의 오른쪽 그림에 주목해보자. 글자를 따라가지 않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바퀴를 돌 수가 없다.

말(문자)을 통하지 않고서 말 사이의 빈 전체 공간에 들어서거나 또는 다른 공간으로 넘어들어가 설 수가 없다. 이처럼 늪의 글쓰기는 문자에 즉해서(기대면서) 모든 장르들이 만나는 이른바 ‘의언진여(依言眞如)’의 글쓰기이다. 각 장르가 서로 만나는, 바로 그 하나되는 세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초월적인 세계, 즉 ‘이언진여(離言眞如)’이지만 이렇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마저도 우리는 “말에 의해서(기대서) 말을 버리는(因言遣言)”25) 노력으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25) 元曉, 《大乘起信論別記》 권2 참조.

한 장르가 다른 장르와 관계(關係), 관련(關聯), 침투(浸透), 융합(融合), 소통(疏通), 포괄(包括), 포섭(包攝)으로 융즉(融卽)하는 것은 결국 말에 의지한 것이다. 말을 벗어나서는 각 장르가 함께 만날 수 없다. 각 장르가 서로 만나기 위해서는 말을 통한 대화와 상호이해의 노력이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단일한 사안, 사물에 불변하는 진리를 인정하고 그것의 독립적(고립적) 특성에만 집착하는 이른바 실체적(實體的) 글쓰기(이러한 글쓰기는 고정화된, 정형화된, 그래서 본질의, 불변적 정의(定義)를 지닌다)를 벗어나 인간의 모든 사고·행위의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글을 써는 ‘관계적(關係的) 글쓰기’를 지향한다. 이러한 무한한 관계망, 즉 연기성(緣起性)은 하나의 거대한 글쓰기의 세트, 사고와 언어 편집술(編輯術)의 모범을 보여준다. 이것을 나는 물적(物的) 글쓰기에 대해서 ‘사적(事的) 글쓰기’라 표현하고 싶다.26)26)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논술하기로 한다.

연기적 글쓰기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이 모든 법은 공상이다. 생겨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다.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 불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다(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滅)”는 것 바로 그런 실천이다. 또한 연기적 글쓰기는 《법성게》에서 말한 “하나 안에 일체요 많음 안에 하나이다. 하나가 곧 일체요 많음이 곧 하나이다. 한 티끌 속에 시방을 머금는다. 일체의 티끌 속 또한 이와 같다(一中一切多中一, 一 卽一切多卽一,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는 경지를 지향한다.

장르의 공생, 크로스오버, 삶의 논두렁 밭두렁, 소아(小我)와 대아(大我)/공(空)

늪의 글쓰기에서는 모든 장르들이 걸림없이 만나 대화한다. 장르(genre)란 ‘공통의 특징을 지닌 사물의 무리’이다. 그래서 생물학상 용어로서는 종(種) 다음에 오는 ‘속(屬)’의 뜻이고 문학·예술 분야에서는 부문·양식·형(型)을 뜻한다. 각 장르들은 인간의 삶을 엮어주는 논두렁 밭두렁이다. 이러한 논두렁 밭두렁의 연기성(緣起性), 즉 상의상존성(相依相存性)이 삶의 ‘들판’을 풍요롭게 만들어 간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이미 모든 것과 관계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분적인 글쓰기/읽기 또한 모든 글쓰기/읽기와 관계한다. 하나의 장르는 전체의 장르와 관련하고, 전체의 장르는 하나의 장르와 연관된다. 나는 앞서서 보르헤스의 백과사전적 글쓰기/읽기는 의상의 《법계도》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보았다. 글의 바다, 장르의 바다에서 하나의 글이 나왔다가 다시 그 바다로 돌아간다.

이러한 틀은 마치 북송(北宋)의 기철학자(氣哲學者) 장횡거(張橫渠, 1020∼1077)가 우주의 만유(萬有)는 기(氣)의 집산에 따라 생멸·변화하는 것이며 이 기의 본체는 태허(太虛)로서 태허가 곧 기라고 설명한 데 비길 수도 있다. 즉 그가 기가 모이면 사물이 되고 사물이 흩어지면 다시 태허(太虛, 기의 바다)로 돌아간다고 것은 장르간의 교차와 대화에도 응용이 가능하다. 결국 사물이라는 것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칠 줄 모르는 운동과 에너지의 율동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동적이고 순간적인 것이다.

사물은 허(虛)의 순간적인 드러남인 것이다.27) 이 세계는 시적(詩的) 상상력에 의해 접근 가능하다. 어느 한 장르라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세계’에서 일탈·소외됨으로써 그 고유한 영역을 확보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하나의 커다란 세계’와 호흡하는 형태로 존립하고 있다. 각 장르들은 각각의 ‘아(我)’(=小我), 즉 선취(Vorhabe), 선견(Vorsicht), 선파악(Vorgriff)을 갖기 마련이다.28) 27) 프리초프 카프라, 이성범·김용정 옮김,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서울: 범양사, 1995), 237쪽. 28) 이것을 도시(圖示)하면 다음과 같다.

그래서 ‘분별(分別)’과 ‘담쌓기’가 생겨난다. 선취, 선견, 선파악은 각 장르가 안고 있는 업보(業報)이다. 그러나 아집(我執), 집착(執着)은 타자와의 ‘만남을 위한 토대’이다. 이러한 아집, 집착에서 상호이해와 공존의 지평도 열린다. ‘번뇌가 곧 보리’(煩惱卽菩提)인 것이다. 번뇌가 없으면 보리도 없다. 번뇌를 토대로 보리의 지평도 열린다.

장르들의 자유로운 만남은 아(我)에서 무아(無我)를 지향함으로써 가능하다. ‘아에서 무아로’라는 자기 수행 없이는, 각각의 장르가 갖는 업보를 떨쳐냄 없이는 하나되는 장르의 만남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실제 장르의 만남에서는 ‘아에서 무아로’라는 자기 수행은 자신의 고유한 장르의 특성 파기를 통해서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A는 A인 채로, B는 B인 채로 만날 수밖에 없다. 글쓰기(또는 읽기)에서 장르를 초월하고 학문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나의 인문학의 방향과 전략은 바로 이 ‘크로스오버’라는 용어를 통해서만이 잘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크로스오버(crossover)’란 다른 장르가 교차한다는 뜻의 음악용어이다. 이것은 원래 클래식 주자들이 민요나 팝 음악을 노래하거나 연주하는 현상을 표현하는 용어였는데, 이후에 같은 대중 음악 장르 간의 교차는 물론 음악 이외의 다른 영역에서까지도 폭넓게 차용되고 있다. 장르 간의 교차와 대화(크로스 오버)는 글쓰기의 연기적 실상을 보여주며, 이 점에서 나의 늪의 글쓰기는 ‘공(空)’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장르 간의 교차와 대화를 통한 공생은 소아(小我)를 벗어나 대아(大我)를 구축해 가는 것이다.29)29) 이것을 도시(圖示)하면 다음과 같다.

장르 넘나들기에 대한 ‘우려’, 미완과 시행착오로서의 ‘인문학의 길’

하나의 장르도 옳게 수행하지 못하면서 무슨 장르를 넘나드느냐? 전문성(專門性)도 없으면서 무슨 학제적(學際的) 학제간(學際間) 운운하느냐? 분과학문의 성벽 허물기와 학제적인 것의 추구, 무슨 각종 통합이론 운운한들 실제로 재미를 보고, 실효를 거둔 적이 있느냐?

쓸데없는 짓거리로 멀쩡한 건물과 다리가 무너지듯이 ‘부실공사’ 하지 말고 “분과학문 극복과 학제성을 주장하기 전에 우리는 지금까지 분과학문이 자신의 성(城) 안을 풍요하게 하면서 성곽을 쌓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학문­간(間)’ 연구를 하려면, 각 ‘학문’이 우선 내실 있게 존재해야 한다. 이에 전문성과 학제성의 문제가 부각한다.”30)는 말(비판/경고)에 우리는 일단 귀를 기울여야 한다. 30) 김용석, 〈세로지르기: ‘혼합의 시대’를 사는 지혜〉, 《에머지》 2002년 10월호(중앙일보, 2002)(http://emerge.joins.com /200110/200110_01.asp)로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살아 생동하는 것을 벌겨벗겨 ‘죽인’ 것이다. 새로운 이성(raison cre큑trice, raison relationnelle) 개념의 필요성에 대한 보다 구체적 논의는 졸고, 〈앙리 베르그송의 ‘있는 바 그대로의 것’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시도〉(《대동철학》 제15집, 2001), pp.25∼32 참조.외 지음, 이운경 옮김, 한문화, 2003), 《철학으로 매트릭스 읽기》(이정우 외 지음, 이룸, 2003) 참조.

실제로 나 자신도 앞의 비판에 대한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특정 시기에 적어도 어느 한 분야나 영역에 대해 체계적이며 집중적으로 배우도록 한 곳이 우리 나라 대학의 ‘학과’였다. 이른바 ‘학부제’라는 것이 지금 이런 매력 있던 학과를 다 먹어치우고는 있지만, 실제 학과의 이념조차 우리 사회에서 옳게 실현되었는지는 의문스럽다”31)라고 지적한 적도 있다. 31) 本體空寂, 從空寂體上起知, 善分別世間靑黃赤白, 是慧. 不隨分別起, 是定. 祇如‘凝心入定’, 墮無記空, 出定已後, 起心分別一切世間有爲, 喚此爲慧. 經中名爲妄心. 此則慧時則無定, 定時則無慧. 如是解者 皆不離煩惱, ‘住心看淨, 起心外照, 攝心內證’ 非解脫心, 法縛心, 不中用. 神會, 〈南陽和上頓敎解脫禪門直了性壇語〉, 《神會和尙禪話錄》, pp.9∼10.

장르 넘나들기는 자칫하면 ‘빛 좋은 개살구’이거나 ‘꿸 수도 없는 구슬 서말’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영역(분과학문, 장르)이든 완전한 그래서 지선(至善)한 경지에 도달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목표이고 이상이지 현실이 아니다. 인문학은 불완전/미완인 채로 시행착오를 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완전한 결과획득, 완벽한 목적달성 뒤에 다음 단계로’라는 슬로건이나 논리적 절차가 과연 인문학이라는 차원에서 얼마나 가능이 한 것일까? 인문 학술에 ‘최선(最善)’이란 없다.

우리에겐 언제나 차선(次善)만이 있다. 완성은 늘 또 다른 출발을 의미한다. 마치 《주역(周易)》에서 ‘어려운 일이 다 끝났음(모두 해결되었음)’이란 의미의 (63)‘기제괘(旣濟卦)’() 다음에 ‘하나도 해결 된 것이 없음’이란 의미의 (64)‘미제괘(未濟卦)’()가 오는 것과 같다. 시종(始終)[始→終]이 아니라 종시(終始)[終→始]이다. 장르 넘나들기는 정확히 말하면 ‘이론’으로서 존재해야 할 것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표현되어야만 한다. 선언과 주장이 아니라 실천과 표현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장르 넘나들기에 대한 ‘우려’는, 인문학은 결국 미완과 시행착오의 과정에서만이 존재한다는 말로써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인문학자 각자가 드러내 보이는 방안, 대안만이 인문학의 늘 새로운 시작인 셈이다. ■

최재목
1961년 경북 상주(尙州)에서 태어남. 영남대 철학과 졸업. 쯔꾸바(筑波)대학원 철학사상연구과졸업(문학석사·문학박사). 동경대 객원 연구원(1996). Harvard大 연구교수(Visiting Scholar)(1998-1999) 역임. 현재 영남대 철학과 인문학부(철학전공) 교수.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1987. 시인). 저서로 《동아시아의 양명학》(1996), 《나의 유교 읽기》(1997), 《양명학과 공생·동심·교육의 이념》(1999),《시인이 된 철학자》(2000), 《동양의 지혜》(2002), 《내 마음이 등불이다》(2003) 등이 있으며, 공저로 《실학사상과 근대성》(1998), 《한말 영남 유학계의 동향》(1998), 《한국문화사상사대계》(2001), 공동번역으로 《논쟁으로 본 일본사상》(2001), 시집으로 《나는 폐차가 되고 싶다》(1999), 《길은 가끔 산으로도 접어든다》(2003) 등이 있다. 논문으로 〈동아시아에 있어서 양명학의 전개〉(1991.3 博士學位論文) 〈하곡 양명학사상의 동아시아적 위치〉 〈공허의 실학: 태허사상의 양명학적 굴절〉 외 60여 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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