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담 강원도 평창 지암정사

몇년 전부터 다만 시기와 명분만 문제였지,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리라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 거기에 불을 붙여준 것이 이른바 9·11 테러에 이은 미국 부시 행정부의 거리낄 것 없는 배짱(?)이었으니, 미국 입장에서야 역설적이게도, 9·11이 구세주였던 셈이 되었다고 하면 산 속에 사는 사람의 너무 지나친 추측일까?

전쟁을 일으킨 미국이나 늘 그와 한 편이 되어 ‘힘’을 쓰는 영국은 그렇다 치고, 그저 ‘알아서 말을 잘 듣는 한국’이 함께 ‘힘을 쓰지 않으면 곤란하게 되었다’는 상황을 접하며 착잡한 기분이 드는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니리라.

‘사대주의’로 쉽게 평가절하하는 과거 조선시대의 중국 관계에서도 오히려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차라리 그 때에는 “대국의 부탁이라 거절할 수 없다.”고 하기라도 하지, 요즈음은 “국익을 위해서”라면서 우리가 ‘자주적임’을 억지로 내세운다.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있겠구나.” 하고 이해를 해보려고 애를 쓰지만, 다른 문제와 달리 전쟁터에 사람을 보내어 누군가에게 총을 겨누게 만들어 결국 사람을 죽이게 하고 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니 내가 누구를 이해하고 하지 않고로 끝날 일이 아니다.

이라크에 추가로 우리 군인들을 보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분위기를 대하면서 부처님이 이 자리에 계시다면 우리에게 어떻게 조언을 하실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눈이 소복이 쌓여 온 천지를 하얗게 장식한 데다 보름달이 환하게 밝아 일찍 잠 들지 못하던 날, 가슴에 다가오는 부처님 말씀을 따로 적어 놓았던 오래된 노트를 뒤적였다.

몽둥이 앞에서는 모두가 떨고/ 모두들 죽음을 두려워하네.―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네./다른 사람과 자신을 견주어 본다면,/남을 때리거나 때리게 해서는 안되네.

모두가 자기의 행복을 원하는데/그런 이들을 해쳐서/자신의 행복을 구하는 사람은/내세에는 행복을 얻지 못하리라.(《법구경》)

원수와 원수끼리는 이러니저러니 온갖 구실로 서로에게 해를 끼친다. 또한 원한을 품은 자는 원한을 품은 자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해를 입힌다.

마음으로 곳곳을 찾아다녀도 어디에도 자신보다 사랑스러운 것을 만날 수 없다. 자신이 성스럽다는 이치는 다른 이에게서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대들이 고통을 꺼린다면 사람이 보고 있든 보고 있지 않든 악한 일을 하지 말아라. 만약 악한 일을 하거나 그에 앞서 악한 일을 하고자 마음먹는다면 마치 허공을 날며 몸을 숨기려 하는 것처럼 그대들은 고통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으리라.(《우다나(自說經)》)

죽음이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에게 주먹을 불끈 쥐고 때리러 가야 한다고, 그것도 ‘국가 이익’을 명분으로.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해치러 간다고, 그래서 더 잘 살고 싶다고.
우리와 똑같이 자신이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짓밟으러 가야 한다고, 그것도 힘센 사람들의 강제에 못 이겨서.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그대들 또한 고통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고.
실은 부처님께서는 2,500년 전에 우리에게 이미 대답을 해주셨는데 부처님 제자라고 하는 출가사문인 나도 늘 잊고 지내온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로 자처하는 불교 신자가 천 만이 넘는다고 자랑하는 나라, “왼 뺨을 때리거든 오른 뺨을 내밀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도 천 만이 넘는 나라. 그런데 어떻게 “우리에게 경제적 이득이 있을 것이니 군대를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쉽게 나오고 먹혀들까?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의 불교 신자, 기독교 신자는 모두 엉터리였단 말인가? 《금강경》식 표현으로 이름만 불교도, 기독교도였고 명실상부한 종교인은 없었단 말인가?

어디 그뿐인가? 아시아 여러 나라 중에서도 공자님 말씀을 따라 조상님 제사를 열심히 지내는 사람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인데, 왜 공자님·맹자님 가르침은 거들떠보지도 않는가? 공자님은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고 하였고, 맹자는 “어떻게 우리 나라를 이롭게 해주시겠습니까?”라는 말에 “하필이면 이로움만을 말하느냐?”며 질책했는데 그 공맹(孔孟)의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혹 전쟁이 미국의 의도대로 일찍 끝나서, 우리가 ‘국가 이익’을 일부 얻어 ‘전후 복구 사업’에 참여하고 ‘외환 보유고’를 조금 높인다고 하자. 그런데 우리와 원수가 된 사람들은 어쩔 것인가? 우리에게 원한을 품게 될 사람들과 그 후손들, 또 그 원혼들은 어쩔 것인가? 우리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의 후손들이 겪어야 될 후유증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내생은 말하지도 말자.

그 악순환의 고리가 너무 무섭다.
‘국익’을 내세워 우리 군인을 멀고 먼 전쟁터에 보내는 것은, 부처님과 다른 성인들의 말씀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소중하기 때문에” “내 가족이 사랑스럽기 때문에”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스스로가 소중하고, 그들에게는 그 가족들이 사랑스러움을 알기 때문에” 안 된다. 탐욕과 증오심과 어리석음에 흠뻑 젖어 ‘힘센 영웅’이 되고 싶은 한 사람과 그 집단의 야욕을 충족시켜주는 일에 동원되어 악업을 짓는 일은 더더욱 안 된다.

죽음 앞에서 벌벌 떨고 있을 사람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기를, 주먹을 휘두르며 세상을 힘들게 하는 저 불쌍한 중생들이 더 이상 악업을 짓지 않기를, 원한과 증오로 앙갚음을 하려는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 자비심을 갖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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