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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권장하는 사회, 삶의 의미를 잃은 개인
김도공 원불교사상연구원 상임연구원
[17호] 2003년 12월 10일 (수) 김도공 원불교사상연구원 상임연구원

요즘 시청률 50%대를 기록하며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MBC 드라마 〈대장금〉의 제작진이 극중 중요한 역할을 해온 한상궁의 죽음을 당초 계획했던 참수형 대신 옥에서 문초를 받다 죽는다는 내용으로 바꾸기로 전격 결정했다고 한다. 이처럼 제작진이 갑자기 그 설정을 바꾼 것은 ‘참수형만은 안 된다’는 드라마 열성팬들의 적극적인 호소 때문이다. 드라마 팬들의 열정이 이미 정해졌던 작품의 내용까지 바꾸는 드문 일이 발생한 것이다.

열정적인 팬들의 성원에 의해서 드라마의 내용이 수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런 팬들을 확보할 정도로 성공한 드라마에 박수를 보내지만 한편으로 느껴지는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애초 드라마의 극적인 장면을 확보하기 위해서 도입하려 했던 장면설정이 참수형일 것이다. 참수형! 생각만 해도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그런 끔찍한 형벌이다. 이 장면이 드라마를 통해서 각각의 가정에 그대로 혹은 간접 방식으로라도 전달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극적인 장면에만 관심을 갖는 시청자들도 문제라고 하지만, 꼭 공공기관이 제작하는 드라마에서 이 잔혹한 죽음을 보일 필요가 있을까?

요즘 드라마를 보면 대개의 주인공들은 항상 백혈병, 암, 교통사고 등등의 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의 장면만이 아니라 드라마 내용도 마찬가지이다. 배신, 이혼, 불륜 등의 내용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그렇지만 꼭 우리 사회에 그런 극적인 죽음이 그렇게 많던가? 과연 배신과 불륜으로 가득 찬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가? 반문하고 싶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범한 생활 속에서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소담스럽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공공매체에서는 꼭 그 같은 극적인 부분만이 부각되는가?

온 국민이 지켜보는 뉴스도 마찬가지다. 아침에 일어나 텔레비전을 틀어보면 온통 강도, 도둑에 대한 뉴스와 사건, 사고 뉴스밖에 안 나온다. 아침 일찍 일어나 뉴스를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인데, 날마다 그런 뉴스만 접하게 되면 은연중에 그 사고 뉴스 속에서 잔혹함에 서서히 중독될 것이다. 혹시 그런 중독현상이 이런 자살 관련 뉴스로 나타나게 되는 것을 아닐까 싶다.

“공사 대금 못 받자 건축업자 자살” “카드빚 고민 주부 자살” “인터넷 이용료 꾸중듣고 초등생 자살” “50대 미결수 구치소서 자살” “육군 사병 구타 적발 고민, 총기 자살 추정” “명문대 출신 시간강사 자살” “생활고 비관 가족 동반 자살” “70대 할머니 지하철 투신 자살” “고시 낙방 비관 자살” “수능 보던 여고생 수험도중 투신자살” 자살, 자살, 자살, ……. 요즘 부쩍이나 늘어난 자살 뉴스로 필자의 기억에 대충 스쳐가는 내용만으로도 이렇게 많다.

자살로 인한 사망자가 지난 10년 사이 두 배 가량 늘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람 수를 처음으로 넘어섰다고 한다. 통계청은 25일 “2002년 사망원인 통계결과”에서 “지난해 자살한 사람은 8,631명으로, 인구 10만 명당 19.13명 꼴이었다.”면서 “이는 지난해 교통사고 사망률(10만 명당 19.12명)을 앞선 것”이라고 발표했다. 지난 1992년에는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가 9.7명으로, 교통사고 사망자(34.4명)의 3분의 1 이하였으나 10년 사이 약 2배로 늘어났다고 통계청은 밝히고 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그 수치가 더 늘어나는데, 한국의 연간 자살자 수는 지난 91년 6,593명에서 96년 8,632명, 98년 1만 2,458명, 2001년 1만 2,274명, 2002년 1만 3,055명으로 10여 년 새 2배 가까이 늘어났다고 한다. 최근에는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숫자가 IMF 사태 당시의 98년에 못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미디어의 영향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은연중에 자살을 권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뉴스는 연일 자살과 폭력을 뿜어내고 있다. TV 프로그램 중에 상당히 높은 고정 시청률을 가지고 있는 뉴스에서 픽션이 아닌 실제상황으로서의 자살과 폭력이 여과 없이 대중에게 전달된다. 연일 계속되는 이런 뉴스는 미디어의 선정주의와 시청률지상주의 속에서 자살자와 폭력사건들을 극적으로 포장하여 방송한다. 이런 잔혹한 현상들이 왜 일어나는 지에 대한 차분하고 냉정한 분석은 찾아보기 어렵고, 대안은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방송을 들으면서 대중들은 서서히 잔혹함과 난폭함에 마취되어, 우리 사회가 자살과 폭력이 만연한 사회라고 당연히 인정해 버린다.

이제 공공의 매체인 언론은 상업주의와 선정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해야 하며, 사회적 책임감을 가진 언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살과 폭력과 같은 경우에도 그것을 개인적 차원으로 끌어내려 보도하고 개인의 잘못된 선택을 질타만 할 게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진단과 처방을 추구하는 언론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자살이 급증하는 현상을 사회적 책임으로만 돌려버리는 것은 오히려 자살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것을 외면하기 위해 문제 해결방안을 공중에 흩어 뿌려 버리는 것과 같다.

‘자살에 대한 사회적 책임론’은 정부의 정책, 사회제도나 사회집단의 문제를 비판하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자살을 예방 가능한 목표’로 보고 적극적인 범사회적 대책 수립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뿌리내리는 데는 오히려 장애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자살 연구의 효시가 된 《자살론》의 저자 에밀 뒤르캥은 개인이 사회집단과의 결속에서 끊겨 나온 결과 생기는 사회 심리적 고립 현상을 ‘아노미(anomie)’라 하고, ‘아노미’가 현대사회에서의 자살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자살이 경제불황 때 증가한다는 보고 외에 실증적인 여러 연구에서 ‘자살의 책임이 사회에 있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사회가 바뀌지 않으면 자살을 예방할 수 없는가. 그렇다면 비교적 안정된 서구사회에서 오히려 자살율이 높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민생안정, 사회갈등 해소, 사회구조 개혁, 사회 안전망 구축 등의 사회정책이 저절로 자살율을 낮추어 줄 것이라는 기대는, 자살의 책임을 사회로 돌리는 태도와 마찬가지이다.

앞으로 경기침체, 사회적 변화와 갈등, 가정붕괴, 경쟁심화 등 여러 요인으로 사회 심리적 고립을 경험하는 개인이 계속 늘어날 것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어려움에 처한 모든 사람이 자살하는 것도 아니며, 모든 자살을 예방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제는 ‘자살의 책임’이 사회에 있다기보다는 ‘자살을 예방할 책임’이, 사회보장 정책과는 독립된 별도의 ‘자살예방프로그램’이 필요한 때다. 자살에 대한 사례분석 통계를 통해서 자살 동기 및 원인이 여러 가지로 분석되고 있는데, 그 분석가들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요소가 있다. 경제적 궁핍, 신병비관, 성적비관 등등으로 자살한다는 다양한 원인이 분석되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인 것이다.

단순한 자살원인 분석만으로 자살예방프로그램을 만들어서는 제대로 된 예방프로그램이 될 수 없다. 자살예방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있어서 꼭 중요한 주체로 참여해야 할 주체가 바로 종교이다.
그들이 성적 때문에 돈 때문에 살기가 힘들 것 같아서 그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자살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적이나 경제적 비관 그 사실보다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고통이 조금도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절망이며, 이 절망이 그들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잃게 만드는 것이다. 극단적 선택을 앞둔 사람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불교가 가진 업, 윤회, 해탈의 신념체계는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데 아주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게 만들어주고, 고통 속에서 치유의 기쁨을 찾게 해주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다. 그 속에서 개인들은 삶의 의미를 다시금 음미하고 삶의 활력을 재충전 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도 자기 종교의 교리선전이나 포교에만 관심을 두고서는 이런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각 종교의 신념에 바탕한 인생관 세계관을 통해 인간 삶의 진정한 의미를 전하고자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서 생을 마감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고통의 끝이 아니라 더 깊은 나락이라는 사실을 간절히 전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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