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경 동국대 불교학과 박사과정

다른 사람이 나를 ‘불자(佛子)’라고 부를 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그대로 행(行)하고자 다짐을 하여 불(佛)·법(法)·승(僧) 삼보에 귀의(歸依)하였을 때이다. 조금 더 나아가면 부처님과 같은 서원(誓願)을 세우고,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도 이롭게 하는 보살과 같은 마음으로 행하는 신행(信行)의 실천자일 때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아름다운 실천이란 무엇인가? 과연 부처님과 닮은 행(行)은 어떤 모습인가? 해야 할 행(行)이란 무엇인가?

팔만 가지 경전 중 어디에 있단 말인가? ……

이 많은 의문에 대하여 ‘행(行)은 이런 것이오.’ 하고 속시원하게 답을 주는 것은 해인사 장경각 현판에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불교는 불교인들의 독점물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다. 조용하기를 좋아한다면 예쁜 겉 표지가 되어 있는 책을 통해서, 기계문명에 익숙하다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키보드판 위에서, 그저 간단하게 마음만 먹으면 밤과 낮을 상관하지 않고 찾아갈 수 있다. 지구 위에 있는 구석 구석까지 단 몇 번의 손놀림과 몇 번의 조작으로 단박에 날아간다.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이 너무나도 쉬워서일까? 결과가 바로 보여서인지 사람마다 행동도 즉각적이고 사려가 깊지 못하다.

그러나 1,600년의 한국불교 역사 속에서 한 때는 온 국민의 사표로 추앙되기도 했으며, 어떤 때는 바람에 흔들리는 등불과도 같은 암울한 시기도 있었다. 그 어느 때이든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우리의 마음 속 저 바닥에는 불교를 통하여 사색한다는 공통점은 가지고 있었다. 옛 사대부들은 행동하기 전에 세 번 생각하기를 강조했으며, 불교에서는 항상 자신의 마음을 붙들어 바로 보는 연습을 한다. 우리는 이것을 선(禪)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를 바로 볼 때 진심에서 우러나는 참회(懺悔)를 한다. 현재의 나의 모습을 보고 과거의 나의 행(行)에 대하여, 미래의 나의 모습을 보고 현재의 나의 행(行)에 대하여 참회한다. 그래서 나의 현재 행이 바른 행이 되도록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이 모습은 행이 나의 몸밖으로 나타나는 모습들이다. 행은 몸과 입과 마음의 세 곳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실제로 근본은 마음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에 대해서는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서 잘못인 원인까지 참회하여야 진실한 참회이다. 이 이참(理懺)은 오직 마음을 돌림으로서 이루어진다(唯心廻轉).

마음 속 깊이 불선(不善)의 과보를 잘 알게 되어 돌린 마음에는 지(智)가 자리잡게 된다. 이 지는 대비심의 원(願)을 일으킨다. 대비심은 선(善)을 행하고 지니도록 하는 선을 관(觀)하여 거듭하여 선의 행을 닦아 나아간다. 이것은 자기 스스로가 짓는 선행(善行)이다.

이 선행이 다른 이를 위할 때는, 제일 먼저 다른 사람이 가지는 고(苦)의 인과를 잘 아는 지(智)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지에 의지하여 다른 이가 스스로 선을 닦도록 하는 원을 일으키고, 원에 의지하여 서원하는 것과 같이 닦도록 하는 행을 일으킨다. 이 서원은 비(悲)의 근본을 익히게 하여 자비를 쌓도록 한다. 이를 집(集)이라고 하며, 자비에 의지하여 행이 바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집과(集果)라고 한다.

장황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말한다면, 행은 신행(信行)과 법행(法行)으로 나눌 수 있지만 둘은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삼업을 참회하며 스스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과를 믿고 나만을 위한 행을 하였을 때를 신행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비행을 했을 때를 법행이라고 한다. 이 때 행하는 실천의 주체자를 보살이라고 부른다. 위와 같이 불교는 초자연적인 절대자를 숭배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탕으로 하여 성찰하는 것이 기본이 된다. 그리고 부처님의 뜻과 같은 행을 실천하는 것을 법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쯤되면 우리들의 행동을 점검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사시사철 산사를 찾는 불자들은 내 아들·딸이 대학입시에 합격하고, 내 남편은 사업이 잘되고, 나에게 많은 복을 달라는 발원의 발걸음을 한다. 부처님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부처님이 가지고 계신 복으로 원하는 대로 들어준다면, 다른 집 아들·딸은 대학에 떨어지고, 다른 집 남편은 사업에 망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욕심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욕심만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불자님들은 출가한 스님들에게는 참선만을 최고의 수행으로 여기는 선(禪)병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오직 출가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요즈음 큰 사찰에서는 시민 선방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용한다. 여기는 시간과 신분에 제약없이 원하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심지어는 다른 종교인에게도 열려 있다. 그러나 소임자들은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조금 지저분하거나 힘든 일에는 자원자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절집에 들어가면 누구나 소임을 하나씩 맞게 되는데, 누가 지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선택하여 자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설악산 봉정암에 오르면 허기진 배를 누그러뜨리는 작은 공양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식기는 본인이 직접 씻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개수대 앞에서 닦는 보살님의 얼굴을 보고는 슬쩍 밀어 놓고 닦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보시 중에 가장 큰 보시는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경전을 보시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를 가진다. 그러다 보니 절에 오시는 불자님들은 각 사찰에서 보시용으로 만든 독송용 책들을 받게 된다. 이 중에 가장 많은 것이 《천수경》과 《금강경》이 아닌가 한다. 지금 각 사찰마다 의식 집전용으로 쓰이고 있는 《천수경》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라시대부터 사용된 흔적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경전은 불교교리의 내용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수행자에게도 지침서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주문을 처음 들어서는 초심자들에게조차 전문인들이 사용하는 교재가 마구 뿌려지고 있다.

우리는 7살이 되면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1학년 때는 학교 안에는 어떤 건물이 어디에 있으며, 그곳은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알게 되고, 선생님에 대한 예절을 배운다. 그리고 평생 사용하게 되는 ㄱㄴㄷㄹㅁ……, ㅏㅣㅜㅔㅗ……, 12345…… 등을 익힌다. 1학년 때 익힌 기본적인 철자법은 고등학교·대학교 심지어는 죽어서도 쓰게 된다. 사망신고를 해야 하니까! 그러니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러주고 바르게 배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불자로서 지녀야 하는 법행(法行)의 법을 이렇게 생각한다.

우선 삼보[佛·法·僧]에 귀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저 절이 좋고 풍경소리가 좋아 찾아온 사람에게 ‘삼보에 귀의해야 합니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받아들여질 것인가. 우리가 남의 집을 방문했을 때, 주인은 손님을 맞이하는 예의가 있고, 손님은 객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 주인은 즐거운 마음으로 정중히 맞이하고 객은 가능한 방문하는 집의 풍습을 따르고자 노력해야 한다.

일주문을 지나 조용히 법당에 올라가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다른 방문자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도량을 돌아보며 부처님의 숨결을 느낀다. 전각에 오르고 내릴 때는 층계 한쪽 옆을 사용하며, 법당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는다. 그리고 부처님으로부터 먼쪽의 문지방을 넘어 들어가서 두발을 모으고 조용히 합장 반배한다. 만약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사람이 있으면 일어날 때를 기다려 지나간다. 두 무릎을 꿇고 단정하게, 독송하는 사람 앞을 지날 때에는 경책을 넘지 말며, 부처님 바로 정면에는 서지 않는다. 도량에서 스님이나 다른 도반을 만났을 때에는 공손하게 합장하고 지나간다.

아! 이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아는 것이야! 그렇지만 참으로 남을 배려하고 남을 공경하는 여법한 모습은 보기 어렵다. 부처님께 경배하는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서 나도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 싶다는 소리가 들려야 한다.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에서 같이 기도하는 도반이 되고 싶다는 소리가 들려야 한다.

그리고 스님들이여! 우리는 일주문을 넘는 모든 이들에게 안온함을 맛보도록 해야 한다. 안온(安穩)이란 편안하고 즐거워서 마치 열반의 적정과 같은 것이며, 선업이며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도(道)를 말한다. 우리는 오는 한사람 한사람에게 얼마만큼의 안온함을 제공하였던가? 신라 이후로 높은 법당에 자리잡고 않아 선법만을 강요하지 않았는지? 나의 아상(我相)만을 키우지는 않았는지?

스님이란 모든 이들에게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서비스업을 하는 것이다. 서비스란 받는 이가 편안해야 한다. 또 한번 부처님을 만나보고 싶어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삼보에 귀의하게 하는 것이며, 우리 불자들의 법행(法行)이 아닌가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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