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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밥상의 아름다움 / 이승환
이승환 고려대 철학과 교수
[17호] 2003년 12월 10일 (수) 이승환 고려대 철학과 교수

지난 연말에는 조류 독감과 광우병 파동으로 TV를 비롯한 언론매체가 떠들썩했었다. 심지어 어떤 대학의 면접시험에는 농장에서 오리를 수천마리나 생매장한 일과 관련하여 동물의 권리에 대하여 논하라는 문제가 나오기도 하였다. 가축을 사육하는 농장이나 음식점이 입은 타격이 가장 컸겠지만, 닭고기나 소고기를 즐겨먹던 사람들도 갑자기 먹거리가 없어져 버렸다.

점심시간이면 항상 붐비던 설렁탕집도 찾는 사람이 없어 썰렁하기만 하고, 저녁에 회식하기 위해 가끔 들리던 치킨집이나 갈비집도 아예 텅 비어 버렸다. 조류독감과 광우병 파동은 소비자들이 택할 수 있는 음식 선택의 폭을 대폭 축소시켜버린 것이다.

닭고기와 소고기는 언제부터 우리 식단에 주요 메뉴로 등장하게 되었는가? 사실 내가 어릴 적 만해도 닭고기나 소고기는 대단히 귀한 음식 재료였다. 내가 옛날에 소고기를 먹어본 기억이 있다면 설날에 떡국에 집어넣었던 고기 몇 점과 할아버지 환갑잔치나 조상님 제사상에 올려놓았던 고기 산적이 전부였던 것 같다. 우리 집이 과히 못사는 처지가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닭고기도 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더운 여름 말복이나 되면 커다란 솥에 닭 한 마리를 넣고 물을 듬뿍 부어 백숙을 끓여 여덟아홉이나 되는 식구들이 나누어 먹었다. 우리 집에서는 닭을 서너마리나 키웠지만, 닭이 알을 낳아도 내차지가 된 적은 별로 없었다. 아침 밥상에 앉으면 언제나 아버지 밥그릇 속에 숨겨져 있는 계란을 선망하였고, 몸이 약해서 가끔은 계란을 얻어먹을 수 있는 동생의 처지가 부럽기도 하였다.

우리가 가축을 대량으로 사육하여 일상적으로 식용하게 된 것은 근대화가 달성된 이후의 일이다. 축산 기술과 사료의 개발로 인하여 대규모의 가축 사육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러한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우리의 입맛은 자연스럽게 채식위주에서 육식위주의 식단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입맛의 변천은 단순히 기술 발전의 결과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자본주의와 서구화의 영향 또한 적지 않게 개입되어있다. 서구 문화를 동경하는 청소년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 상업광고의 영향으로 이제 젊은 사람들은 전통음식 대신에 햄버거와 같은 인스턴트 식품을 선호한다. 음식을 씹는 횟수나 강도가 줄어들면서 광대뼈와 턱뼈는 갸름해지고 얼굴형태는 서구형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 집 아이들도 전에는 한국 음식보다 햄버거나 피자와 같은 인스턴트 식품을 선호했다. 행여 생일이라도 될라치면 엄마를 졸라 친구들과 피자 파티를 열게 해달라고 졸라대고, 밥상머리에 앉으면 햄이나 소시지로 젓가락을 보내지 나물이나 된장으로는 아예 눈길도 안 돌렸다. 하지만 아이들이 커가면서 인스턴트 식품이 초래하는 문제점과 우리 음식의 장점에 대해 설명해주고, 엄마가 아이와 함께 뜰에서 직접 뜯은 나물로 반찬을 해 먹으면서 음식습관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한국의 전통 음식은 다이어트에 알맞은 건강식품이다. 다양한 채소와 나물 그리고 탕과 국을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가끔씩 생선이나 고기 요리를 하나 더 얹은 것이 우리의 전통 식탁이다. 배가 어느 정도 부를 정도 먹어도 곧 소화가 되고, 여기에 더하여 약초 성분과 비타민이 듬뿍 함유되어 있으니, 지방질 투성이인 햄버거와 어찌 비교할 수 있으랴?

햄버거와 같은 인스턴트 식품은 건강과 환경 모두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친다. 최근에 나온 한 보고서에 의하면 현대인에게 질병을 초래하는 여러가지 원인 중 절반 이상은 지나친 지방질과 설탕 그리고 부족한 섬유질의 식사법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지구 한쪽에서는 수천만의 인간이 식량부족으로 굶주리고 있을 때,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은 생산되는 곡물의 절반 이상을 가축에게 먹이고 거기서 나온 육가공 식품을 즐기다가 결국 성인병으로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인스턴트 식품을 선호하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해 생활이 바빠지고 여유가 없어지게 된 데에도 원인이 있지만, 외국자본의 무차별적 유입과 이에 무비판적으로 세뇌당하는 젊은이들의 태도에도 원인이 있다. 외국의 것이라면 무조건 세련된 것으로 생각하고 한국 것이라면 무조건 촌스러운 것이라고 여기는 태도는 우리의 음식 습관에도 짙게 배어있는 것이다.

나는 얼마 전 근무하던 대학으로부터 안식년 휴가를 얻어 지리산 기슭에 있는 한 선원(禪院)에서 몇 달간 생활한 적이 있다. 복잡한 인간관계와 숨통을 옥죄이는 일 독촉에서 벗어나 내 생애 처음으로 조용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기회를 만끽할 수 있었다. 산에서 새롭게 배우고 느끼는 일은 무척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값지게 느꼈던 것은 단순하고 소박한 삶의 아름다움이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섬세하게 해준다. 텔레비전이나 자동차 소리와 같은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난 귀는 작은 벌레의 울음소리와 나뭇잎 속삭이는 소리에까지 민감하게 반응한다. 현란한 전광판의 자극에서 벗어난 눈은 봄날 나날이 부드러워지는 흙과 그 아래서 쑥쑥 밀고 올라오는 새싹의 움직임도 놓치지 않고 읽어낸다. 육식(肉食)과 인공 감미료의 독한 맛에서 벗어난 혀는 양념하지 않은 나물과 야채 본래의 맛을 하나하나 가려내며 음미한다.

감각기관이 제 기능을 찾으면서, 마음의 움직임은 더없이 섬세해진다. 속세의 온갖 유혹과 자극 그리고 압박과 구속에서 벗어나서, 마음은 격의없이 사물에게 대응한다. 마치 파랑이 일지 않는 잔잔한 호수처럼, 다가오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것이다. 이해타산과 성취욕, 거짓말과 속임수, 분한 생각과 억울함 등 온갖 분별심에서 벗어난 마음은 타인에게 대할 때도 절로 여유와 자비를 내보이게 한다.

산사에서 식사는 참선(參禪)의 일부다. 스님들은 빳빳하게 풀먹인 승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가부좌하고 앉아 죽비 소리와 함께 식사를 시작한다. 잡담은 물론, 그릇이나 수저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입안에서 우적우적 씹는 소리도 일체 들을 수 없다. 여기서 먹는 일은 쾌락이 아니다.

만물을 낳고 길러준 자연에 대한 감사, 곡식을 가꾸고 다듬어준 농부에 대한 감사, 한끼 식사를 보시해 준 이름모를 은인에 대한 감사, 그리고 이 한 그릇을 먹음으로써 한걸음 다가가게 되는 죽음의 의미에 대한 통찰……. 이 모든 것들이 한 끼의 식사 안에서 묵묵하게 이루어진다.

사찰에서 음식 남기는 일은 죄악이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그릇에 숭늉을 부어 김치쪼각으로 대충 부셔서 그 물까지 죄다 마셔야 한다. 여럿이 같이 먹는 음식에 손댈 때는 단 한번의 젓가락질로 먹을 양을 정확하게 가늠하여 집어 날라야 한다. 같이 먹는 음식을 젓가락으로 헤적이거나 맛있는 부분을 고르는 일은 이기적이기도 하려니와 불결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한손으로는 승복의 커다란 소맷자락을 받쳐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단 한번의 젓가락질로 적당량의 음식을 실수없이 집어나르는 선승(禪僧)들의 몸동작은 참으로 미학적이다.

선(線)의 단순함
절제되고 명백한 동작
번복없는 선택
타인에 대한 숨은 배려
식탐(食貪)으로부터의 초연함
뒤처리의 정갈함

밥먹는 사람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껴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서울의 일류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정장을 차려입고 높은 분들과 함께 번쩍이는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를 해봤지만 한번도 그 자리를 아름답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음식은 비싼 재료와 고기가 많아야 맛있는 것이 아니고, 종류가 많고 화려해야 맛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칼로리는 그다지 많지 않다. 적은 양, 소박한 재료, 정갈한 상차림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하게 먹을 수 있다. 먹는 사람에게 미학적 자세만 갖춰져 있다면. 그리고 감사의 마음만 갖춰져 있다면.

먹을 것을 탐하는 인간은 참으로 추하게 보인다. 돼지의 탐욕은 생리적인 본능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생리적인 것이 아니라 ‘소유를 위한 소유’ 그리고 ‘욕망을 위한 욕망’이라는 마음의 병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돼지의 욕망을 단순한 ‘욕(欲)’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욕망은 ‘욕(欲)’자에 마음 ‘심(心)’이 하나 더 붙은 ‘욕(慾)’이다.

매년 새 생명이 움트는 봄이 되면 우리 집 딸아이와 엄마는 어김없이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여러 집이 모여사는 빌라촌이건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나물을 뜯기 위해 뜰과 정원을 구석구석 찾아 헤매는 것이다. 빌라의 뜰이라 그렇게 넓은 면적도 아니건만, 그래도 자세히 살펴보면 제법 여러 끼 밥상에 올릴 수 있을 정도의 나물은 끊이지 않고 발견된다.

햇볕이 따사하게 비치는 둔덕이라면 어김없이 쑥과 돋나물이 솟아나 있고, 온갖 나무와 화초 사이로 더덕과 머웃대가 얼굴을 숨기고 있다. 그리고 담벼락 밑 손바닥만하게 일군 텃밭에서는 여린 채소의 새싹이 자라고 있다. 동네의 젊은 주부들은 뜰을 헤매고 다니는 우리 가족을 향하여 묻는다. “아니 거기서 무얼 뜯고 계세요?” 그것이 쑥과 돋나물이라고 알려주면, 그들은 새삼스럽게 놀란다.

 “아! 우리 동네에도 그런 나물이 나네요?” 요즘 젊은 주부들은 채소와 나물은 꼭 비닐 하우스에서 생산되어 시장에서나 사다 먹어야 하는 것으로 안다. 그리고 채소와 나물뿐 아니라 심지어 김치나 다른 반찬마저도 시장에서 사다먹는 사람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신선한 재료를 구해서 가족들과 함께 직접 요리해 먹는 즐거움은 사라져가고, 대신에 획일화된 입맛과 인스턴트화된 식품이 우리의 식습관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적 근대화는 우리한테서 감사하는 마음을 앗아갔다. 성장의 신화는 우리한테서 절제의 미학을 빼앗아갔다. “더많이” “더빨리” “세계최대” “1등” 등의 구호는 우리로부터 삶의 의미에 대해 성찰해볼 기회조차 앗아갔다. 이제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과 더 많이 먹으려는 탐욕 대신, 이미 누리고 있는 소박한 일상 안에서 멋과 깊이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작고 하찮은 존재에서도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소박한 삶에서도 웃음과 여유를 찾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보다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고려말에 살았던 나옹선사(懶翁禪師)는 우리가 잊고 지내던 소박한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는다.

청산(靑山)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蒼空)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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