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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국강점과 불교* / 최병헌
최병헌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17호] 2003년 12월 10일 (수) 최병헌 shilrim9@snu.ac.kr
* 이 논문은 2003년 4월 9∼13일 이태리의 Frascati, University La Sapienza에서 개최된 21st AKSE CONFERENCE에서 발표한 글인데, 약간의 내용수정과 보완을 하였다.

1. 머리말

구미 열강의 끈질긴 개항(開港) 요구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 쇄국(鎖國)을 고집하던 조선은 무력 위압을 배경으로 한 일본의 강요에 굴복하여 1876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체결함으로써 마침내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조선을 개국시키는 데 성공한 일본은 군사력을 앞세운 정치적·경제적 침략과 아울러 종교를 첨병으로 하는 정신적·문화적 침투를 시도하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조선을 전면적으로 종속화시키려고 하였다. 일본정부가 대외침략을 시작하는 처음 단계부터 정치와 종교는 ‘새의 두 날개’ 또는 ‘수레의 두 바퀴’ 같은 관계라고 하면서 함께 한반도로의 진출을 모색하였던 것은, 서구 열강이 식민지 침탈에 필수적으로 기독교의 선교사를 선행시킨 전례에 따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가 이러한 역할을 담당할 종교로서 선택한 것은 불교였는데, 한국침략의 첨병으로서 불교만이 에도막부(江戶幕府) 시기 이래의 강렬한 국가주의적 성격이나 역량으로 보아 신뢰할 수 있었으며, 또한 조선의 불교도 표면상으로는 침체되어 무력하게 보이지만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으며, 사회의 저변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서 불교를 앞세우면 한국의 인심을 쉽게 포섭하여 침략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진호국가(鎭護國家)’ ‘흥선호국(興禪護國)’ ‘왕법위본(王法爲本)’ ‘입정안국(立正安國)’ 등의 교리를 가진 일본불교가 국가주의의 고양과 식민지 개척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나온 것은 당연하였다. 물론 메이지 불교가 예외 없이 국가주의화의 노선을 취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국가주의화에 반대하여 국가를 초월하는 불교의 보편적 가치를 역설한 비판적인 불교인들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극히 소수에 그친 그들의 미약한 주장이 메이지 시기 불교계의 주류를 형성할 수는 없었다. 주류는 국가주의를 지상의 과제로 떠받들던 불교에 의해서 형성되고 주도되었다. 그리하여 일본 불교계에서는 각 종파가 경쟁적으로 정부의 요청에 부응하여 호법(護法)과 호국(護國)의 일치(또는 防邪를 포함하여 삼위일체라고도 함)를 표방하면서 대외진출에서 첨병의 역할을 자임하였다.

일본불교의 각 종파는 조선의 개항 초기 단계부터 한반도로의 진출을 추진하여 정치적·경제적 침략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동시에 한국불교를 전면적으로 장악하여 자신의 종파로서 국교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불교의 각 종파는 정치적인 침략의 단계마다 예외 없이 개입하여 종교담당 관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정치적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종파로서 한국불교를 장악하려는 노력을 경쟁적으로 전개하였다. 주요한 정치적 사건과 관련된 일본불교의 종파와 승려들의 이름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1877년 부산항의 개항과 정토진종(淨土眞宗) 대곡파(大谷派)의 별원(別院)의 설치.
② 1884년 갑신정변과 정토진종 대곡파의 승려 오꾸무라엔싱(奧村圓心)의 지원.
③ 1894년 청일전쟁과 정토진종 본파(本派)를 비롯한 일본 각 불교종파의 종군활동.
④ 1895년 4월 승려의 도성출입금지 해제조치와 일련종(日蓮宗)의 승려 사노젠레(佐野前勵)의 주선.
⑤ 1895년 10월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와 조동종(曹洞宗)의 승려 다케다한시(武田範之)의 가담.
⑥ 1904년 러일전쟁과 일련종을 비롯한 일본 각 불교종파의 종군활동.
⑦ 1906년 2월 불교연구회의 창립과 정토종(淨土宗)의 개교사 이노우에(井上玄眞)의 영향.
⑧ 1906년 10월 통감부 설립과 정토진종 본파의 개교총감(開敎總監)의 내한.
⑨ 1908년 원종 종무원의 설립과 조동종의 승려 다케다한시의 참여.
⑩ 1909년∼1910년 일진회 등의 합방책동과 다케다한시의 활약.
⑪ 1910년 10월 원종 종무원과 조동종의 합병조약 체결.

이상은 주요한 사례들을 적기하여 본 것에 불과한데, 이로써도 일본불교의 각 종파는 일본의 한국침략이 시작되는 1876년부터 한국의 강점이 일단락되는 1910년까지 정치적인 침략에 발맞추어 한국승려와 신도를 포섭하는 등의 종교적인 침략활동을 치밀하게 진행시켜 왔으며, 때로는 정치적인 침략에 직접 가담하는 활동도 서슴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제의 한국침략사 연구는 정치적·경제적 측면의 침략 못지않게 종교적·문화적 측면의 침략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그런데 일제는 일단 한국을 강점하는 데 성공하여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게 되자, 한국침략에 일본불교를 앞세우던 이전의 종교정책을 변경하여 식민통치에 있어서 일본불교를 배제하고 한국불교를 전면에 내세우려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종교적 침략의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필자는 일찍부터 일본의 불교를 앞세운 정신적·문화적 침략에 대한 연구를 추진해 오고 있는데, 앞서 정토진종(淨土眞宗) 대곡파(大谷派)와 일련종(日蓮宗)의 침투 문제를 정리해 본 바 있다. 본 논문은 그러한 연구의 일환으로서 1910년 한국병합 과정에서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역할과 1911년 사찰령 반포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강점을 전후한 시기 일제의 불교정책 변화의 근본적 의도와 역사적 성격을 밝혀 보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일제침략사와 근대불교사의 종합적이며 체계적인 이해를 위한 기초적인 작업으로서의 의의를 가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 학계의 현 실정은 이 문제에 대한 연구가 대단히 부진할 뿐만 아니라 아직 자료의 수집·정리조차도 거의 안 되어 있는 상태이다. 역사학계에서는 아직까지 편협하게 일제의 경제적 침략 측면만을 중시하는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불교학계에서는 일본불교의 침략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는 역사의식의 부재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의 정신적·문화적 침략사와 근대불교사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는 먼 훗날에나 기대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2. 일본불교의 침략과 한국 불교계의 반응

일본정부의 한국침략에 불교를 앞세워 진출하려는 종교정책은 개항 초기부터 기획·추진되었다. 일본불교의 여러 종파 가운데 가장 먼저 해외 식민지 개척에 편승하여 해외포교의 의지를 갖고 한반도에 진출한 것은 정토진종(淨土眞宗) 대곡파(大谷派)였다. 대곡파는 메이지 초기부터 홋카이도(北海島)와 천도(千島)의 식민 개척, 중국과 조선의 해외 포교를 가장 일찍 전개하여 식산흥업(殖産興業)과 국위선양에 교단을 바쳐 전면적으로 정부정책에 호응하였다.

1877년 9월 부산의 개항과 함께 일본정부의 요청에 의하여 정토진종 대곡파는 호국(護國)·호법(護法)의 일치를 표방하면서 포교를 개시하였는데, 식민지 개척사업의 일환으로서 불교의 포교사업을 추진한 것이었다. 대곡파의 오꾸무라엔싱(奧村圓心)은 부산에 별원(別院)을 세우고 일본 승려들에게 한국어를 학습시키고 한국의 승려와 신도를 포섭하는 등의 종교적 침략활동을 전개함과 함께 개화당(開化黨)의 지식인들과도 연결하여 1884년 갑신정변을 지원함으로써 정토진종을 조선의 국교로 삼으려 하였다. 대곡파 본원사 조선개교감독부에서 편찬한 《조선개교오십년지(朝鮮開敎五十年誌)》는 정토진종의 이러한 의도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우리 본원사는 비록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종교는 곧 정치와 서로 상보적이기 때문에 국운의 진전발양과 국민의 활동을 기도해야 할 것을 신조로 하고 있다. 메이지 정부가 유신의 대업을 완성하고 점차 중국, 조선 등의 여러 외국을 향하여 발전하는 때를 맞이하여, 본원사도 역시 홋카이도의 개척을 위시하여 중국, 조선의 개교를 계획하여 본원사에 해외 포교국을 설치한 것이다.(《조선개교오십년지》, 1927)

당시 본원사의 계획은 우선 부산(釜山)에 별원(別院)을 창설하고, 국위의 진전 여부에 따라 남보다 앞서 전 조선의 중요한 지역에 별원 및 포교소를 건설하여 재류 일본인의 포교 전도는 물론 교육과 사회 개선에 종사하는 한편 조선 동포의 개교를 시도하였던 것이다.(《조선개교오십년지》, 1927)

그런데 개화당에 의한 갑신정변이 실패함으로써 정토진종의 국교화 목표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으나, 그 뒤에도 한반도에 진출하려는 노력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1894년에 이르러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불교의 각 종파는 앞다투어 한국에 진출을 기도하여 일본군대에 종군승(從軍僧)을 파견하여 군대를 위문하고 한국인을 선무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일본불교의 한국 진출은 정치적·군사적 색채를 더욱 농후하게 띠게 되었다. 당시 청일전쟁에 종군승을 파견한 종파 가운데는 앞서부터 진출하여 왔던 대곡파 동본원사와 일련종 이외에도 본파(本派) 서본원사(西本願寺)와 정토종(淨土宗) 등이 새로 참여함으로써 일본 종파 사이에 경쟁적인 상황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청일전쟁 직후 일본불교의 한국침투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일련종의 사노젠레(佐野前勵)의 주선에 의해 이루어진 승려의 도성출입금지령의 해제 조치였다. 일련종의 관장대리의 자격으로 한국에 온 사노젠레는 일본 공사관의 후원을 받으면서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김홍집(金弘集) 등의 정부 요인들을 설득하여 1895년 4월 승려의 도성출입금지령을 해제하게 하였다.

이 도성출입금지령을 해제한 것은 조선시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불교탄압의 상징적인 조치가 철폐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한국승려들에게는 대단히 고무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져 대환영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가 한국 불교계의 자각과 노력에 의해 달성된 것이 아니고, 일본승려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또 그 일련종의 배후에는 주한 일본공사관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불교 침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한국 불교계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환영받았던 해제 조치가 한국불교 발전의 계기가 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친일적인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일본불교로의 예속화의 단서를 열었다는 점에서 불행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사노젠레에 의한 한국불교의 장악 기도는 일본 일련종의 종단 내의 사정으로 인하여 좌절되었지만, 그해 10월 일본공사관과 일본 낭인(浪人)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에 사노젠레를 도와 도성출입금지령을 해제하는 데 참여하였던 일련종 승려 시부다니(澁谷文英)가 관여함으로써 일련종은 조선 침략의 첨병 역할을 유감없이 보여 주기도 하였다. 일련종은 일본의 메이지 불교 가운데서도 국가주의적인 성격이 가장 강하였던 종파였는데, 특히 한국 진출에 끈질긴 집착을 보여 주었던 시부다니는 일련종의 문화(종교)적 제국주의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최신(最新)으로서 최극(最極)인 일본의 불법을 가지고 돌이켜 순로와 같이 조선·만주·중국·샴·인도에 최선의 문명의 광화를 보급시켜, 일찍이 세계 문명의 원천지로서의 고대 인도문명이 하나는 종교적 선전자에 의해, 다른 하나는 정치적 정복자에 의해서 금일의 동서 문명의 원천이 되었던 것과 같이, 일본의 불법, 즉 성일련(聖日蓮)의 종교가 전세계에 방광하여 인류를 구제하고, 그 최후의 귀착처, 최종의 의지처, 최극의 안락을 얻게 할 것을 약속한다.(澁谷文英, 《日蓮敎と朝鮮》, 1919)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일련종의 포교를 위하여 다시 한국에 온 시부다니의 상기와 같은 주장은 정치적인 정복을 통하여 아시아, 나아가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욕에 발맞추어 일본불교인 일련종의 전도를 통해서 전세계의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제국주의적인 내용으로서, 허황된 주장 같지만 불과 10여 년 뒤 일본의 제국주의가 대동아공영권(東亞一宇)의 건설과 세계정복(八紘一宇)을 위한 침략전쟁의 도발로 구체화시켰던 사실을 고려하면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침략전쟁에서의 일련종의 국가주의적인 의식과 선도적인 역할을 유감없이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아니할 수 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불교의 각 종파는 종군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함과 아울러 한국의 불교계에 대한 침투활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앞서부터 진출하여 왔던 대곡파본원사·본파본원사·정토종·일련종 등의 여러 종파는 더욱 열심히 침투노력을 경주함과 함께 새로이 진언종(眞言宗)·조동종(曹洞宗)·임제종(臨濟宗) 등도 한국 진출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일본은 러일전쟁을 계기로 하여 제국주의적인 침략을 더욱 본격적으로 전개하게 되었고, 마침내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하여 한국의 지배권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정치상의 이른바 보호병합의 기운이 무르익어 가게 되었던 것인데, 불교계에서도 그에 상응하여 한국불교 장악의 기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일본불교의 각 종파는 경쟁적으로 한국침투를 모색하는 가운데 각기 그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새로운 사찰이나 포교소를 세우는 것보다 한국의 기존 사찰을 장악하고 승려들을 포섭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한국불교를 포섭하려고 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일본승려들로 하여금 더욱 이러한 경향을 부추기게 한 데에는 한국의 승려들에게도 책임이 전연 없지는 않았다. 당시 한국승려들은 대부분이 천대받던 현재의 불운한 처지를 벗어나고 양반관료나 지방토호들의 침탈을 면하기 위해서는 일본불교의 보호를 받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을 앞세우고 있었다.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지속된 유교지상주의의 사상정책은 불교인들로 하여금 국가와 민족을 의식하기에 앞서 승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켜 주고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일본불교에 쉽게 순응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당시 한국승려들의 열등한 자질과 식견의 부족은 세계정세의 동향이나 사회변화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수 없게 하였으며, 또한 제국주의 침략세력의 정체나 일본불교의 본질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게 하였기 때문에 치밀하게 침략활동을 전개하는 일본불교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쉽게 조성될 수 있었다.

일본불교 종파에 의한 한국사찰의 장악은 이른바 ‘관리청원(管理請願)’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관리청원은 곧 일본불교 특정 종파와의 연합, 또는 그 말사로 가입하는 것을 의미하는 일본식 표현이었다. 통도사의 예와 같이 사찰에 따라서는 일본불교 측의 말사 가입 공작을 단호하게 거부한 경우도 없지는 않았으나, 상당수의 사찰들이 일본불교 각 종파의 말사로 쉽게 편입되어 갔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일본 당국에서도 좌시하거나 방치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일본승려 가운데 일제의 위세를 업고 부당한 포교활동을 하거나, 무리하게 강압적으로 한국사찰을 강탈하려고 하는 일이 발생하게 됨으로써 일제의 한국병합 계획에 차질을 빚을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한국통감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일본불교의 각 종파에 의한 한국사찰의 장악을 추진하게 하면서 동시에 일본 불교인들을 통제하기 위한 조치를 내리게 되었다.

1906년 11월의 〈종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통감부령 제45호)은 바로 한국에서 활동하는 신도(神道)·불교 및 기타의 종교에 속하는 교종파의 일본인 포교자만을 대상으로 하여 내놓은 것이었다. 제1·2조는 일본종교의 관장(管長) 등이 선정하는 각 교종파의 포교관리자를 한국통감이 인가하여 감독할 것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제3조는 포교의 방법이나 종교시설의 설립에 대한 통감의 인가 권리를 규정하였다.

또 제4조에서는 교종파의 관리자, 또는 제2조의 포교자 기타 제국의 신민으로서 한국사원 관리의 위촉에 응하려고 할 경우는 통감의 인가를 받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인 포교자에 의한 한국사찰의 관리를 통감이 인가하는 것이 명기됨으로써 일본불교에 의한 한국사찰의 관리를 통하여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시키는 것이 공식적으로 허가되었으며, 동시에 통감의 감독에 의해서 한국병합에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통감부의 이상과 같은 사찰관리 규칙이 발표되자, 통감부의 협력에 힘입어 일본불교 각 종파들은 경쟁적으로 한국사찰을 병합하려는 노력을 더욱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의 불교계에 ‘사원관리청원(寺院管理請願)’이 유행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전국 대부분의 사찰들이 일본 각 종파에 예속되어 갔다. 당시의 불교계 상황을 직접 목격하였던 일본인 아오야나기(靑柳南冥)는 《조선종교사》(1911)에서 “대곡파 본원사에서는 이미 23사를 헤아리고, 그 가운데는 해인사·범어사·화엄사·쌍계사 등의 큰 사찰까지 포함되어 있으며, 본파 본원사에는 현재 말사대장에 등록된 것이 약 100개 사찰에 달하며, 현재 출원 중인 것도 매우 많다.”고 일본불교의 침투상황을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일본불교의 여러 종파에 한국사찰들이 예속되어 가는 사태에 대해서는 당시 한국인들도 여러 곳에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몇 개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권상로의 증언) 어시에 국정의 압륵과 속상의 빈척을 수하여 암혈로써 일구낙계를 삼고 잠거 포도하여 망세 소요하던 조선승려는 이목이 현황하고 감상이 자격될 뿐만 아니라 사원의 재산을 간혹 학교에 이속하는 일이 있음으로 승려계의 일변은 바람을 흡인하고 일변은 습관을 고집하고, 혹은 세력을 희모하여 외호도 의뢰코자 하며, 혹은 분개를 포하여 자립으로 유지코자 하는 자도 있으나, 그 대부분은 내지하종(內地何宗)과 연락하여 교세를 인상코자 하는 까닭으로 정토종의 이노우에(井上玄眞)와 호상 체결하여 연구회를 설립하고 경향 사원이 일시 분효하더니 정미정변(1907)을 인하여 폐지되니라.(권상로, 《조선불교략사》, 1917)

(이능화의 증언) 상현(필자주: 이능화)은 말한다. 그 처음에 당하여 조선승려는 그 종지에 있어서 마땅히 따를 바가 없어서 정토를 칭호하여도 또한 한마디 말도 없었고, 원종을 설립하여도 또한 모두 동사하였다. 임제종에 부속하여도 또한 스스로 좌관하였고, (정토)진종에 귀의하여도 또한 많이 그림자처럼 따랐으며, 조동종과 (연합을) 체결하여도 또한 그 운동에 맡기었다. 그런즉 정토를 칭호하거나, 진종에 귀의하거나, 원종을 설립하거나, 조동종과 체결하거나, 임제종에 부속하거나 간에 혹은 수성부화하고, 혹은 동사운동하였으니, 요컨대 세력에 붙어 의지하려고 하지 않음이 없었다.(이능화, 《조선불교통사》 하편, 1918)

(박은식의 증언) 불교는 쇠퇴한 지 오래되었다. 이제 일본승려들이 빈틈을 타고 들어와 국내의 유명하고 큰 사찰들은 모두 점거하고 교권을 장악하였다.(박은식, 《한국통사》, 1915)

3. 조동종 다케다한시와 한국불교 장악

1) 조동종 다케다한시와 한국병합
일본통감부의 사찰관리규칙이 반포된 이후 일본불교의 각 종파들이 경쟁적으로 한국사찰을 장악하려고 얼마나 소란을 떨었던지는 일본불교의 정치적·종교적 침략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다케다한시(武田範之, 1863∼1911)의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전년 통감부의 초기에 종교선포령을 발함에 그 조목 가운데 말하기를, ‘일본승이 한국사찰을 관리하려고 하면 연서 상청하여 마땅히 통감부의 윤허를 받아야 함’이라 하니, 이에 일본의 각 종파가 다투어 포교승을 파견하여 그 관리권을 획득하고자 다투고 있으며, 혹은 한국승려들의 어리석음을 이용하여 몰래 사사로운 약조를 맺는 자까지 생기고 있음이 마치 외교절충을 하는 듯하였다. 당시의 논주(필자주: 다케다한시)가 경성에 머무르고 있어 마음속으로 우리 일본승려들의 뜻을 비루하게 여겨 탄식하여 말하기를 ‘우리 포교승이 조선민족을 불쌍히 여겨 와서 소생시키기 위함인가, 아니면 조선의 가람을 뺏기 위하여 와서 엿보고 있는 것인가.(다케다한시, 《원종육제론(圓宗六諦論)》, 1911)

이렇게 일본승려들에 의한 한국사찰의 강압적인 탈취행위를 비난하고 있던 다케다한시는, 그 자신 머지않아 한국불교 원종의 고문이 되어 원종의 대종정 이회광과 야합해서 한국불교를 통째로 일본 조동종에 예속시키려고 한 장본인이었다. 일본승려 자신을 비난하는 글을 싣고 있는 《원종육제론》도 한국불교를 하나로 통합시켜 조동종에 예속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집필한 것이었다.

그러한 인물이 이같이 일본승려들을 비난한 것은 선종에 속하는 승려의 입장에서 정토신앙을 종지로 하는 정토진종과 정토종의 활발한 움직임에 대하여 개인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으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무계획적으로 설치는 일본승려들의 불법적인 행위로 인하여 한국불교를 통째로 장악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다케다한시는 한국불교 전체를 통합시켜 일본불교에 합병시키는 것만이 ‘신라 고려의 밝은 시대(羅麗昭代)의 영광을 빛나게 할 것’이라고 믿고, 일본 조동종에 병합시키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다케다는 한국불교 원종과의 병합만이 아니라 조선낭인 우찌다료헤이(內田良平)와 함께 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의 일진회(一進會)와 제휴하여 한국강점을 추진함으로써 뒷날 낭인의 총원체(總元締)인 두산만(頭山滿)으로 하여금 ‘낭인(浪人)의 백미(白眉)’로 호칭하게까지 한 인물이었다. 다케다는 조동종의 승려로서 3차에 걸쳐 한국에 왔었는데, 그의 한국에서의 활동은 불교적인 문제보다는 동양의 평화는 바로 한국문제의 해결 여하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정치적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다케다는 1883년 조동종 사찰인 현성사(顯聖寺)에서 승려가 된 다음에, ‘(나에게는) 오직 종교와 식민(植民)만이 있다. 능히 황국을 위하여 원훈을 세우자.’고 결심하고 1892년 부산에 건너와 전라도 여수의 금오도(金鰲島)에서 이주회(李周會, 豊榮)와 함께 어업에 종사하다가 실패하고, 부산에 나와 다른 일본낭인들과 함께 건달생활을 하면서 해적의 흉내까지 내기도 하였다. (이주회는 대원군의 비호하에 입신한 인물로 뒤에 김옥균 등과 함께 친일을 통한 정치개혁을 희망하였으며, 뒤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에 일본인 낭인들을 대신하여 사형당하였다.)

다케다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현양사(玄洋社)의 동료 낭인들과 천우협(天佑俠)을 조직하고, ‘금일의 계책은 청일 양국으로 하여금 전쟁의 단서를 열게 하는 데 있다’고 하여 ‘동학도에 들어가 한 가닥의 도화선이 되어 전쟁의 단서를 뽑아낼 것을 기도하여’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순창으로 가서 동학의 지도부(다케다 등의 주장은 전봉준)와 접촉하였으나, 실패하고 검거를 피하여 귀국, 현성사로 들어갔다.

다음해인 1895년 미우라고로(三浦梧樓)가 주한공사로 부임하게 되자 천우협 시절의 동료 낭인들과 함께 불려와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하였다가 소환되어 히로시마(廣島)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얼마 아니 되어 증거불충분의 이유로 석방되어 다시 현성사에 들어갔다. 1901년 현성사의 31대 주지가 되어 조동종의 쇄신운동을 일으켜 말파(末派)의 총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04년에는 조동종의 한국포교사로 임명되었는데, 한국에 직접 나왔었는지는 불분명이다. 1906년 이또히로부미가 조선통감이 될 때 통감부의 촉탁으로 부임하게 된 흑룡회(黑龍會)의 주간 우찌다료헤이(內田良平)의 요구로 다시 한국에 오게 되었다.

다케다는 우찌다의 소개로 이용구의 시천교 고문과 일진회의 상담역이 되었는데, 그는 이용구의 비서겸 종교고문이라고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으면서 합방운동과 관련된 거의 대부분의 문서 작성에 관계하였다.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양위한 뒤 일본 황태자의 한국 방문시 일진회를 동원하여 성대한 환영식을 준비하고 이용구를 대신하여 환영사를 작성(《영서비부(靈瑞秘符)》에서 우담바라의 꽃이 피는 영광에 비유)하였으며, 시천교의 기본경전이 되는 《항해경(沆瀣經)》을 집필하였다.

또한 1908년에는 한국13도불사총회의 고문에 취임하였으며, 일본 조동종의 한국포교관리가 되어 필동에 조계사를 설립하였다가 1909년에는 용산에 서룡사(瑞龍寺)를 건립하여 조동종의 포교 근거지로 삼았다. 그러나 곧 이어 조동종포교관리의 직을 사임하고 합방 추진에 전력하였다. 그는 한국병합이 이루어지고 일진회가 해산까지 한국침략에서의 역할을 완수한 뒤, 1910년 10월 7일 일본에 돌아가 다음해 6월 23일 후두암으로 49세에 사망하였다.

2) 다케다한시와 원종
서울의 성안에는 이미 외국의 선교사와 일본 각 종파의 승려들이 들어와 각기 전도와 포교에 힘을 기울이고 있을 때에도 한국정부는 여전히 자국의 불교에 대한 척불적인 정책의 고삐를 늦출 줄 모르다가 가까스로 시대적 추세를 깨닫게 된 것은 갑오개혁 이후인 1895년에 와서였다. 승려의 도성출입금지령의 해제 조처가 그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조치가 일본인 승려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은 불행이었다. 한국 불교계에 친일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에서도 뒤늦게나마 자각하여 불교배척과 무관심에서 벗어나 국가적인 관리를 꾀하기에 이르렀으며, 이와 아울러 교단에서도 전국 사사(寺社)의 통일적인 조직을 마련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던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1902년, 정부에서는 궁내부 소속으로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를 설치하여 오랫동안 방치하여 왔던 불교교단에 대한 국가 관리의 의지를 나타내게 되었다.

이에 관리서에서는 사사관리세칙, 즉 사찰령 36조를 발포하고, 전국 사찰 및 승려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맡아보게 하였다. 이리하여 관리서에서는 대법산(大法山)과 중법산(中法山) 제도를 실시하여 전국 사찰을 통괄하게 하였다. 그리고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창건하여 전국의 수사찰인 대법산으로 정하고, 각도의 대사찰 16곳을 중법산으로 지정하면서 승직을 임명하고 일원적인 통제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1904년 폐지되고 말았다. 당시의 정치적인 혼란과 불교계의 의식 부족으로 인하여 제대로 실행되지 못한 결과였다.

관리서가 폐지된 뒤 1906년 2월, 봉원사(奉元寺)의 승려 이보담(李寶潭)과 화계사(華溪寺)의 승려 홍월초(洪月初) 등이 주축이 되어 원흥사에 불교연구회(佛敎硏究會)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또한 원흥사에 최초의 근대식 불교학교인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 불교연구회는 한국승려의 순수한 자각적인 발의에 의해 설립된 것이 아니고, 일본불교, 특히 일본 정토종의 승려 이노우에(井上玄眞)의 영향으로 세워진 것이었으며, 실제 정토종을 종지로 하였다.

그 결과 한국불교와 정토종의 합병이 획책되기에 이르렀으며, 이에 대한 찬반 논의가 격화되었다. 이때 제일의 부자 사찰인 통도사의 실권을 쥔 정토종 승려인 일본인 교사가 통도사를 일본 정토종의 말사로 편입하려다가 그 계략이 실패하여 추방된 사건이 일어나는 등 반대운동이 승리함으로써 일본 정토종으로의 합병은 유야무야되었다. 이듬해인 1907년 6월, 각 도의 사찰 대표자 50여 명이 총회를 열었을 때, 선종을 자처하는 다수 승려들의 반대로 이보담 등이 불교연구회장과 명진학교장의 직을 사임하고, 해인사 주지인 이회광(李晦光)이 후임으로 선임되었다.

1908년 3월, 이회광은 전국의 승려 대표 52명을 원흥사에 모아 회의하고, 원종 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하고 대종정으로 선임되었다. 원종이라는 종명을 붙이게 된 이유로는 전국의 모든 대표들이 회의하여 함께 세웠으므로 그 원융무애(圓融無碍)의 뜻을 취하였을 것이라는 설(李能和), 중국 영명사(永明寺) 연수(延壽)의 《종경록(宗鏡錄)》에서 따온 것으로 선교겸수(禪敎兼修)의 종문임을 표방한 것이라는 설(李晦光, 高橋亨), 당시의 불교가 참선(參禪)·간경(看經)·염불(念佛) 등을 두루 원수(圓修)한다는 뜻으로 원종이라고 하였다는 설(金包光) 등의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어느 견해가 옳은지는 분명하지 못하다.

한편 다케다한시는 우찌다료헤이의 소개로 먼저 이용구의 시천교 고문이 되었는데, 1907년 3월 12일에 이용구에게 〈여이봉암권불교재흥서(與李鳳庵勸佛敎再興書)〉라는 글을 써 주어 한국불교 부흥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는 등 한국불교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이회광에 의해 원종 종무원이 설립되자, 이용구의 추천으로 원종의 고문이 됨으로써 한국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통합시키려는 의지를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다케다한시는 “한국의 전체 사찰을 하나로 통합하여 일본불교의 침탈을 벗어나기 위하여 원종을 구성하고 일본의 조동종과 통합할 것”을 권고하였고, 이회광도 정토종 계열의 일본 정토종이나 정토진종과는 거리를 두고 한국불교와 같은 선종 계통인 조동종이나 임제종과 통합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0년 일제에 의한 한국병합이 이루어진 뒤에 그 계획은 마침내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회광은 다케다한시와 책모하고 한국의 원종과 일본의 조동종의 합병을 기도하여, 1910년 9월에 72개 사찰의 위임장을 얻어내어 일본에 건너가서 조동종의 관장인 이시가와(石川素童)와 교섭하였다. 이회광은 연합을 고집하였지만 이시가와는 한국불교의 수준이 낮아 부속종(附屬宗)으로 하지 않으면 무리라고 하였는데, 연합위임장은 받았지만 부속하는 위임장은 받지 않았다고 거부하는 이회광에게 조동종 종무원은 주무성(主務省)의 내락을 받아 연합에 동의하였다.

마침내 10월 6일, 원종 종무원 대승정 이회광과 조동종 종무대표 고신(弘津悅三) 사이에 이른바 연합조약이 체결되었다. 7개 조로 이루어진 이 조약은 표면상으로는 대등한 형식을 갖추었으나, 실제적 내용으로는 원종을 조동종에 예속시키는 것이었다. 제2조에서 조동종에 의한 인가 취득을 규정한 것은 원종의 종속을 의미하고, 제4조는 조동종으로부터만 고문을 받아들이고 그 반대의 경우는 없으며, 제5조는 일반 포교 및 청년 승려의 교육은 조동종의 지시에 따라 종사한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이회광이 대등한 연합을 고수하였다고 말하였지만, 조문의 내용을 보면 완전히 일본불교에 종속화되는 내용이었다. 8월 22일 한국병합의 체결로부터 45일만에 조인한 것으로서 국가의 정치적 병합에 이어 한국불교도 일본의 특정 종파에 완전히 병합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이 조약의 내용이 국내에 알려지자 한국 불교계 일부에서는 “임제종을 법통으로 하는 한국 선종을 일본 조동종에 팔아버렸다(賣宗易祖).”고 하여 한용운·박한영 등의 맹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원종과 임제종의 대립이 전개되는 가운데 일본 조동종은 와가세이(若生國榮)를 조선총독부에 파견하여 원종 종무원의 설립인가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인가도 기각도 하지 않고 계속 유보한 채 조용히 다음 해까지 불교계의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이에 다케다는 병상에서 《원종육제론》을 지어서 1911년 3월 20일, 조선총독 데라우찌(寺內正毅)에게 편지와 함께 보내어 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조선의 불교를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에 따르게 하려는 취지임을 설명하였다. 또한 송병준과 조동종의 수뇌 등 각계의 요로에 널리 그 책을 배포하여 일본 당국과 불교계의 여론을 움직이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그의 병세는 악화되어 연합 인가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6월 23일 도쿄에서 숨을 거뒀다. 그러나 그의 바람도 헛되이 사망하기 20일 전인 6월 3일, 조선총독부에 의해 사찰령(寺刹令)이 반포됨으로써 한국의 모든 사원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직접 통제되는 직할체제가 되었으며, 일본불교와의 연결이나 본말사 관계는 일체 배제되었다. 이 결과 원종도, 그에 반대하던 임제종도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4.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과 식민지 불교

조선총독부는 한국병합이 일단락되자, 이제 더 이상 일본불교를 이용할 필요성을 갖지 않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통치에 있어서 일본승려보다 한국승려를 직접 내세우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원종을 인정하지 않은 이유도 조선총독부에서 일본불교의 특정 종파가 한국불교에 간여하는 것을 원하지 않은 결과였다. 사찰령과 동 시행규칙에 의한 30본산체제(뒤에는 31본산체제)는 바로 한국의 불교교단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직할체제로의 편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30본산체제는 일본불교의 본말사제도와 사법의 인가제를 도입한 것으로서, 한국불교의 사정을 고려했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조선총독부 당국의 통제상의 편리성을 위주로 하여 편제된 것이었다. 그리고 사법 제정에 있어서도 형식적으로는 각 본사에서 자주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되었으나, 실제는 조선총독부의 종교과 주임(와타나베)이 작성한 초안에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요컨대 조선총독부는 사찰령과 본말사제를 통하여 한국의 불교교단을 조직적으로 편제하여, 전국의 사찰을 30본사로 분할하여 그 힘을 분산시키고 주지선임과 재산관리를 조선총독의 인허가제로 묶음으로써 불교계의 종무행정과 불교재산 관리를 통제하고, 나아가 주지의 신분과 권한을 크게 확대하여 자발적인 친일성을 발휘케 함으로써 구조적으로 한국불교를 조선총독부에 예속시켜 식민지 통치의 전면에 내세우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사찰의 인사와 재정 등의 종무행정의 통제라는 소극적인 정책에 그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불교교단에 대한 통제 차원에서 한 발짝 나아가 더욱 적극적으로 친일적인 불교로의 변화와 한국 불교인들의 자발적인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불교의 종지(宗旨)와 의식(儀式) 등의 문제까지도 간섭하고 규제함으로써 한국불교의 내용과 성격을 크게 변질시키고 있었다.

우리는 3·1운동 이전의 식민통치 방식을 헌병 경찰을 앞세운 무단통치였다고 하지만은 불교에 대한 정책은 대단히 교묘하고 고차원적인 수준의 것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불교계에서는 일제시기 불교의 변질 내용으로 흔히 대처육식(帶妻肉食)만을 문제삼고 있지만 실제 변질된 내용은 제도나 정신면을 포함하는 훨씬 광범위하고 더욱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선 조선총독부 당국은 한국불교의 종지에 있어서 원종과 임제종을 모두 부인하는 대신에, 《경국대전》의 불교 관계 규정을 내세워 “조선왕조 초기의 선교양종(禪敎兩宗)을 겸수(兼修)하고, 불법 본지의 실현을 기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선교양종의 겸수라고 하는 한국불교의 고유한 전통을 계승·발전시켜 주겠다는 취지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한국 불교계의 자발적인 협조를 얻어내어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교묘한 언어의 마술에 지나지 않은 유인책동에 불과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실제 조선총독부에서 강요한 불교의 내용은 일본의 황도(皇道)사상과 신도(神道)의 요소를 크게 받아들임으로써 일본적인 불교로 크게 변질시킨 것이었다.

실제 본사에서 거행하는 법식 내용을 보면 일본의 천황에 관한 것, 일본의 건국신화에 관한 것, 일본의 국민적·민속적 습속에 관한 것이 대폭 포함되어 있으며, 그러한 요소가 불교 본래적인 것보다도 우선하는 것이었다. 즉 사방배(四方拜)·기원절(紀元節)·천장절(天長節)·신상제(新嘗祭)를 축리법식일(祝釐法式日)로 하고(뒤에 천장절축일 추가), 원시제(元始祭)·춘계황령제(春季皇靈祭)·추계황령제(秋季皇靈祭)·신무천황제(神武天皇祭)·효명천황제(孝明天皇祭, 뒤에는 明治天皇祭)·신상제(神嘗祭)를 보본법식일(報恩法式日)로 규정하여 앞세우고, 그 다음에 부처의 열반·탄생·성도일을 보본법식일(報本法式日)로 하고, 역대 조사의 기일을 존조법식일(尊祖法式日)로, 그리고 결제·해제일을 안거법식일(安居法式日)로 규정하여 뒤에 붙였다. 또한 천황폐하성수만세의 존패(尊牌)를 본존(本尊) 앞에 봉안하여 매일 축수와 찬가에 힘쓰도록 규정함으로써 철저하게 황국신민화정책의 구현에 봉사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한국불교는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의해 일본불교의 특정 종파에 예속되는 것은 면하였으며, 그리고 선교양종의 겸수라는 조선 초기의 종지(宗旨)를 지킬 수는 있었지만, 불교의 실제적인 내용이나 성격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친일적이고 어용적이며, 나아가 일본의 신도와 결합된 일본불교화로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한국 불교계는 불행하게도 조선총독부의 의도나 불교정책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일본 조동종과 합병조약을 체결한 원종의 인가를 보류함으로써 일본의 특정 종파에 예속되는 것을 막아주고, 조선 초기의 선교양종 겸수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주겠다는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크게 고무되어 환영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다시 말하면 오랫동안 억압받아 왔던 한국불교를 보호 육성한다는 미명하에 불교를 친일화·어용화하여 식민통치의 목적에 활용하려는 의도에서 제정 반포된 사찰령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고 조선총독의 선의로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우세하였다. 김지순(金之淳)과 최취허(崔就虛) 등 일부 지각 없는 승려들은 사찰령을 반포한 조선총독 데라우찌를 한국불교의 은인으로 찬양하며 일본 천황의 성은에 감격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 본사의 주지로서 대표적인 사판승이었던 이회광(李晦光), 강대련(姜大蓮), 김구하(金九河) 등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주지승들은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호응하여 경쟁적으로 친일에 앞장서게 되었다. 문명아(文明兒)·성은(聖恩)·특은(特恩)·선정(善政)·외호(外護) 등 당시 불교계에서 흔히 들을 수 있었던 말들이 불교계의 조선총독에 대한 감사와 친일적인 분위기를 단적으로 증언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대표적인 엘리트 승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능화(李能和)가 《조선불교통사》를 편찬하면서 사찰령을 비롯한 불교 관계 법령을 모아 놓고 그 항목의 이름을 〈찰령반포과몽외호(刹令頒布果蒙外護)〉라고 붙이어 사찰령 반포를 조선총독의 커다란 은혜라고 표현함도 그러한 불교계의 분위기를 전해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불교계에서는 조선총독에 대한 감사의 분위기와 함께 조선총독부의 지원에 의한 불교발전의 기대감에 부풀게 되었다. 당시 한국 승려 가운데는 사찰령의 반포와 30본사제도의 시행을 불교중흥의 계기로 인식하고 오랜 기간의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나오게 되었다. 당시 한용운과 함께 대표적인 불교혁신론자로 평가되었던 권상로는 1913년에 간행한 《조선불교혁신론(朝鮮佛敎革新論)》에서 당시의 불교계에 개량(改良)·발달(發達)·확장(擴張)·유신(維新)이라는 기치를 내건 각종의 개혁론이 활발하다고 서술하고 있었다. 당시 불교의 개혁론자들은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계몽적 성격의 불교잡지들을 발간하였는데, 〈조선불교월보〉 〈해동불교〉 〈불교진흥회월보〉 〈조선불교계〉 〈조선불교총보〉 〈유심〉 등 6종에 이르며, 그 잡지의 편집겸 발행인은 권상로, 박한영, 이능화, 한용운 등 젊은 엘리트 불교인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불교개혁을 남 먼저 부르짖었고, 과격한 주장을 서슴지 않았던 대표적인 인물이 한용운이었다.

1910년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은 제1장 서론에서 당시 사회의 각 분야에 모두 유신의 기운이 팽배하고 있는데 불교만이 낙후한 현실에 안주하여 개혁을 외면하고 있음을 통절하게 비판하면서 시급한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이어 제2장 불교의 성질에서는 생존과 진화의 자본인 희망을 주는 것이 종교의 본령이라고 전제하고, 장래 부단히 진보해 나갈 인류의 문명에 적합하지 않을 때는 종교의 존재 의의가 없다고 하는 문제제기로서 개혁론의 출발점을 삼고 있다.

이 논문에서 한용운의 불교개혁론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분석할 여유는 없기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루지 않을 수 없으나, 그의 불교개혁론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회적 진화론이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논리에 입각한 사회적 진화론이 제국주의의 식민지 개척의 당위성을 제공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용운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의 본질에 대해서는 아직 소박한 이해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진화론이라는 제국주의의 논리를 가지고 일본의 한국침략에 대응하려는 한용운을 비롯한 계몽적 지식인들의 의식은 근본적으로 한계성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한용운은 한국불교가 일본불교의 특정 종파에 예속되는 것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인식하였으면서도 한국불교의 개혁에는 일제 당국의 불교정책에 상당히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그의 정책에 기대하고 의지하려는 한계성을 나타내 주기도 하였다. 시대적인 변화에 상응하여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고, 승려의 사회적 지위향상을 강력하게 주장한 당대의 걸출한 선각자의 면모와 함께 당시 불교계가 갖고 있던 시대적 한계를 동시에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에 의한 식민지 통치가 진전됨에 따라 한용운은 일제의 침략과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나갔으며, 마침내 3·1운동을 계기로 하여 민족의식의 커다란 성장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국주의의 논거가 되었던 진화론을 버리고 인도주의에 입각하여 일제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교운동에 있어서도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고 사찰령과 30본사제도의 폐지를 요구하는 등의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용운과 함께 당시의 젊은 엘리트 승려로 평가되는 권상로와 이능화 등은 불교개혁을 주장하면서도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을 찬양하거나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였으며,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진전됨에 따라 한국의 불교계가 전반적으로 더욱 친일화·어용화의 경향을 강화시켜 나갔던 것에 발맞추어 황국신민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친일화로 치닫게 되고 말았다. 식민지 불교가 초래한 불행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5. 맺는 말

원래부터 체질적으로 강렬한 국가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일본불교는 한국침략에 첨병으로 활용하려는 일본정부의 정책에 호응하여 한국침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일본불교의 각 종파는 한국을 침략하는 처음 단계부터 종교적인 침략활동을 주도면밀하게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정치적인 사건에 직접 개입하는 등의 정치적인 침략행위도 주저하지 않았다.

일본불교의 종교적인 침략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국불교를 완전히 장악하여 자신의 종파로서 국교화(國敎化)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한국 불교인들의 열등한 자질과 식견의 부족이 일본불교인들의 이러한 야욕을 더욱 고무시킨 측면도 없지 않았다. 이리하여 일본불교 각 종파는 각기 한국불교를 장악하려는 책동을 경쟁적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침략에 가장 적극적인 활동을 보여주었던 종파로는 정토진종 대곡파와 본파, 일련종, 정토종, 조동종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종파는 모두 가마꾸라신불교(鎌倉新佛敎)의 계열이었음이 주목된다. 이들 일본불교 종파들의 한국불교 장악 기도는 일제가 한국을 완전히 강점하는 1910년 이후까지도 집요하게 추진되었는데, 최후에 한국불교를 장악하는 이른바 불교합병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한 종파는 조동종이었다.

그러나 조동종의 한국불교 장악 기도는 어이없게도 일제 당국에 의해 좌절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총독부의 초대 총독 데라우찌의 새로운 불교정책으로 말미암아 조동종의 한국불교 장악 기도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국을 강점하기까지의 일제 당국의 불교정책은 일본불교를 통한 한국인들의 포섭과 선무(宣撫)를 추진케 함으로써 한국침략의 첨병으로 활용하여 한국침략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을 강점하는 데 성공한 이후의 조선총독부에 의한 새로운 불교정책은 일본불교를 배제하고, 그 대신 한국불교를 직접 식민통치에 앞세우는 방법에 의해 황국신민화라고 하는 식민지 정책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한국강점 이전의 한국침략 과정에서는 일본 불교인들이 첨병으로서 이용되었던 것에 반하여, 강점 이후의 식민통치에는 일본 불교인 대신에 한국 불교인들이 직접 동원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불교의 각 종파들의 경쟁적인 한국불교의 장악 기도는 역설적으로 일본의 조선총독부 당국에 의해서 실패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불교 특정 종파의 입장에서는 한국불교 장악이라는 그 종파 자체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비록 실패한 것이었으나, 일본의 한국침략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각기 그 역할을 충분히 다한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한국불교의 입장에서는 조선총독부의 새로운 불교정책으로 인하여 일본불교의 특정 종파에 예속되는 것은 면할 수 있게 되어 한국불교로서의 존속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한국 지배에 순응·협조하는 어용적이며, 친일적인 성격의 식민지 불교를 형성하게 됨으로써 일본불교의 특정 종파에 예속되는 불행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변질과 왜곡이라는 시련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은 일본불교에 의한 한국불교 장악을 막고, 한국불교를 독자적으로 진흥시킨다는 미명하에 추진됨으로써 한국 불교인들의 적극적인 호응과 협조를 받아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물론 한국 불교인들 가운데도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을 비판하여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고, 사찰령과 본말사제도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으나, 불교계의 주류를 형성하지 못한 그들의 주장이 영향력을 가질 수는 없었다. 한국불교의 주류는 본사의 주지를 중심으로 하는 친일적인 인물들에 의해서 형성되었던 것이며, 그들 친일적인 승려들이 일제의 강점 기간 내내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그 결과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친일적이며 어용적인 불교의 성격은 승려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닌, 불교교단의 구조적인 모순으로 심화되기에 이르렀다.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에 체질화된 식민지 불교의 성격은 해방 뒤에까지도 좀처럼 청산하기 어려운 불행한 유산으로 남아 이어지게 되었는데, 한국불교가 겪은 최대의 불행한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

최병헌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 한국불교사 전공. 논저로는 〈신라하대 선종9산파의 성립〉 〈지눌의 수행과정과 정혜결사〉 《사료로 본 한국문화사 고대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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