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漢岩) 찬(撰), 〈일생패궐〉 발견 전말

근대의 고승 한암(漢岩, 1876∼1951) 스님이 짓고 그의 제자 탄허(呑虛, 1913∼1983) 스님이 필사한 것으로 추측되는 한암의 자전적(自傳的) 구도 만행기 〈일생패궐(一生敗闕)〉은 한암의 오도(悟道) 과정을 그리고 있는 새로운 자료로서 최근(2001)에 발견되었다. ‘일생패궐’이라는 특이한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 속에는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 글은 그의 전법제자 탄허 스님이 1945년∼1950년 사이에 스승 한암의 자필본에서 필사한 가로 120cm×세로 20cm 가량의 두루마리본으로 약 1,280자 정도가 수록되어 있다.

한지에 만년필로 필사된 이 글은 어떤 경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필사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탄허 스님의 유품이나 소장품에는 없고 동문수학한 사형(?) 보문 스님이 소장하고 있었다.

1956년 4월 6일(음) 보문 스님이 입적하자 그(보문)의 유품 가운데 책은 당시 그를 모시고 있던 초우 스님(草雨, 전 통도사 주지)이 소장하게 되었고, 최근(2001년) 초우 스님이 우연히 보문 스님의 옛 책들을 열람하다가 《어선어록(御選語錄)》 속에 섞여 있는 〈일생패궐〉을 발견하게 되었다. 현재 이 자료는 초우 스님이 문도들에게 기증하여 월정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글은 우선 ‘일생패궐’이라는 제목부터가 많은 함축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한암은 이 글 속에서 자신이 교(敎)에서 선(禪)으로 전향하게 된 동기와 구도 과정, 그리고 4차에 걸쳐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비교적 섬세한 필치로 가식 없이 솔직 담백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는 많은 선사들이 자신의 구도과정과 깨달음의 세계를 사실 이상으로 지나치게 과장 윤색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이다.

〈일생패궐〉은 한암의 개인적 ‘구도이야기’이지만 그 한 사람에게 한정된 글만은 아니다. 오늘날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수행자들은 진정으로 마음 속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할 글이다.

그는 스승 경허와의 문답에서 ‘방(棒)’과 ‘할(喝)’이 오가는 살불살조(殺佛殺祖) 식의 선문답(법거량)보다는 조주풍(趙州風)의 대화식 문답을 통해서 깨달음의 세계와 화두선의 여러 단계를 점검하고 있다. 한암은 이 글에서 자신이 탐구하고 있는 세계,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의문사를 던지고 있다. 그는 이러한 과정―자신에 대한 점검―을 통하여 깨달음의 세계를 더욱더 철저하게 확인, 점검하고 있다.

또한 이 글은 한암의 생애와 사상 일단(一段)은 물론 스승 경허와의 반가운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삼수갑산으로 떠난 경허를 다시 만나 보지 못하게 됨을 매우 애석해 하고 있다(거의 탄식조에 가까운 필치로 서술하고 있다). ‘일생패궐’이라는 이상한 뉘앙스를 풍기는 제목 속에는 어쩌면 당시 유일하게 법담을 나눌 수 있었던 지음자(知音者)이자 스승이었던 경허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이 베어 있는지도 모른다. 또 이 글은 페허가 된 한국 선불교의 상황의 일면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그가 경허에게 던진 “화두(話頭)도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는 어떻게 합니까?”라는 질문은 수행자 모두가 한 번씩은 겪었던 의단(疑端)의 관문이었다.

이 글은 그가 입산한 지 2년 만인 24세(옛 나이 기준, 1899년) 때부터 37세(1912) 때까지 약 13년 간의 구도과정을 기록한 것으로 대략 그의 나이 37세 되던 해 가을쯤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13년 동안 그는 고독하게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갖고 화두를 참구했다. 이 기간은 또 선승의 최고 이상이었던 일대사인연을 마치는 시기였기도 하다.

다음은 ‘일생패궐(一生敗闕)’이라는 제목이 갖는 함축미이다. 한암은 무슨 의미로 하필 ‘패궐(敗闕)’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패궐은 ‘패착(敗着)’ 또는 ‘자신의 삶을 잘못 살았다’는 의미 정도일 것이다. 그는 정말 이런 의미에서 쓴 것일까? 혹 독자 가운데 한암 스님 스스로가 자신의 삶에 대하여 후회한 것으로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참으로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다.

어쩌면 이것은 겸사(謙辭)일 것이다. 역설적인 발상일지는 몰라도 겸사를 쓸 때에는 이미 그는 피안의 세계에 가 있는 것이 아닐까? 혹 이 속에는 자신을 깨달음의 길로 이끈 스승이자 동시에 유일한 지음자였던 경허, 그가 가고 없는 조선불교에서 한암은 누구를 붙잡고 깨달음의 세계를 논해(법거량) 볼까? 이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당시 선불교의 황량한 모습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글에는 이것말고도 구체적으로 고찰해야 할 부분이 꽤 있다. 우선 경허와 한암이 주고받은 선문답, 법거량에 대한 분석이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의리적인 사구식(死句式) 분석이겠지만 그들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 모두의 관심사(깨달음의 세계)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또 이 글은 한암의 자필본을 그의 제자 탄허가 1945∼1950년 사이에 필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1959년 탄허 스님이 지은 〈한암비(碑)〉(오대산 상원사에 있음)와는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다. 또 이 글의 원본, 즉 탄허 필사본의 저본이라고 할 수 있는 한암 친필의 〈일생패궐〉은 시기적으로 보아 충분히 남아 있을 법도 한데 현재는 전해 오지도 않고 또 그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기록도 없다. 마지막으로 탄허 필사본이 어째서 탄허 스님 자신의 수중에는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고 동문수학한 보문 스님이 소장하게 되었는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이 정도로 간단히 자료의 발견 경위와 해제, 그리고 근대 한국 선불교에서 이 자료가 갖고 있는 의의(意義) 등을 소개하고 구체적인 분석과 고찰은 다음의 과제로 남겨 둔다(참고로 脫草와 현토 번역과정에서 석지현 스님과 추만호 선생의 도움이 있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약간의 보충어를 넣었다).

한암중원(漢岩重遠) 찬(撰), 〈일생패궐〉 번역

내가 스물네 살 되던 기해년(1899) 7월 어느 날 금강산 신계사 보운강회(보운강원)에 있을 적에 우연히 보조 국사의 〈수심결〉을 읽다가,

‘만약 마음 밖에 별도로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진리)이 있다.’는 생각에 굳게 집착하여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비록 이 겁(劫)이 다하도록 몸을 태우고 팔을 태우며 (云云), 또 모든 경전을 줄줄 읽고 갖가지 고행을 닦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모래를 가지고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한갓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

라고 하는 대목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떨리면서 커다란 후회(大恨) 같은 것이 들이닥쳤다. 게다가 장안사 해운암이 하룻밤 사이에 전소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더 무상한 것이 타는 불과 같았다. 그리하여 모든 일(계획)이 다 몽환처럼 느껴졌다.

신계사에서 하안거를 지낸 뒤에 도반 함해 선사와 함께 짐을 꾸려서 행각 길에 올라 점점 남쪽으로 내려가 성주 청암사 수도암에 이르렀다. 그 날 경허 화상의 설법 가운데,

    모든 존재는 다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존재가 실존하는 것이 아님을 간파한다면 곧바로 여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고 하는 대목에 이르러 문득 안광(眼光, 혜안의 광명)이 열리면서 삼천대천세계를 덮어 다하니 만나는 것마다 모두가 다 자기 자신 아님이 없었다(한암의 첫 번째 깨달음, 1899년).

청암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경허 화상을 따라서 합천 해인사로 가는 도중에 화상께서 문득 이렇게 물으시었다.

“옛 사람(동산양개)이 이런 말을 하였네. ‘사람이 다리 위를 지나 가네. 다리만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내가 답하였다.

“물은 진(眞)이요, 다리는 망(妄)입니다. 망은 흘러도 진(眞)은 흐르지 않습니다.”

경허 화상께서 말씀하셨다.

“이치로 보면 참으로 그와 같지만, 그러나 물은 밤낮으로 흘러도 흐르지 않는 이치가 있고 다리는 밤낮으로 서 있어도 서 있지 않는 이치가 있는 것이네.”

내가 여쭈었다.

“일체 만물은 다 시작(始)과 끝(終), 본(本)과 말(末)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본래 마음은 탁 트여서 시작과 끝, 본과 말이 없습니다. 그 이치가 결국은 어떠한 것입니까?”

경허 화상께서 답하셨다.

“그것이 바로 원각경계이네. 《경(원각경)》에 이르기를 ‘사유심으로 여래의 원각경계를 헤아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마치 반딧불로써 수미산을 태우려고 하는 것과 같아서 끝내는 태울 수 없다.’고 하였네.”

내가 또 여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깨달을 수 있습니까?”

화상께서 답하셨다.

“화두를 들어서 계속 참구해 가면 끝내는 깨닫게 되는 것이네.”

내가 또 여쭈었다.

“만약 화두도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화상께서 답하셨다.

“화두도 진실이 아니라고 알았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네. 그러므로 그 자리(잘못된 그곳)에서 즉시 ‘무(無)’자 화두를 참구하게.”

해인사 선원에서 동안거 중 하루는 게송을 하나 지었다.

    다리 아래는 푸른 하늘 머리 위는 산봉우리
    쾌활한 남아가 여기에 이른다면
    절름발이도 걷고 눈먼 자도 보리
    북산(北山)은 말없이 남산(南山)을 대하고 있네.

경허 화상께서 이 게송을 보시고서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각하청천(脚下靑天)과 북산무어(北山無語) 두 구(句)는 옳지만 쾌활남아(快活男兒)와 파자능행(跛者能行) 두 구는 아니다.”

해인사에서 동안거를 지내고 화상께서는 만행길에 올라 통도사와 범어사로 떠나셨지만, 나는 그대로 해인사 선원에 남아 있다가 우연찬게도 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다. 하안거를 지낸 뒤에 곧바로 만행길에 올라 통도사 백운암에 이르러 몇 달 머물렀다. 하루는 참선 도중 죽비치는 소리를 듣고 또다시 개오처가 있었다(한암의 두 번째 깨달음).

동행하는 스님에게 이끌려 범어사 안양암에서 동안거를 지낸 후 다음 해 봄에 다시 백운암으로 와서 하안거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 경허 화상께서는 청암사 조실로 계셨는데, 급히 편지를 보내 나를 부르셨다. 나는 행장을 꾸려 가지고 청암사로 가서 화상을 뵙고 거기서 하안거를 지낸 다음 가을에 또 해인사 선원으로 왔다.(왜 급히 불렀는지는 알 수 없음, 혹 그것도 격외소식인가?)

계묘년(1903) 여름이 되자 사중(寺中, 해인사)에서 화상을 모시고자 청하였다. 화상께서는 그때 범어사에 계시다가 해인사로 오셔서 선원의 대중 20여 명과 함께 하안거 결제를 하셨다.

하루는 차를 마시다가 어떤 수좌가 《선요(禪要)》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무엇이 실참실구(實參實究)의 소식입니까?”

화상께서 답하셨다.

“남산(南山)에는 구름이 일어나고 북산(北山)에는 비가 내리도다.”

그 수좌가 여쭈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화상께서 답하셨다.

“비유한다면 그것은 마치 한 자 되는 자벌레가 한 자를 가고자 한다면 완전히 한 바퀴 굴러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선어 가운데 一轉語와 같다. 즉 妄에서 眞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한마디―역자 주) 그러시고는 대중들에게 묻기를 “이것이 무슨 도리인고?” 하셨다.

내가 답하였다.

“창문을 열고 앉으니 담장이 앞에 있습니다.”

화상께서 다음날 법상에 올라 대중들을 돌아보면서 말씀하셨다.

“원선화(한암중원)의 공부가 개심(開心)의 경지를 넘었구나. 그러나 비록 그 경지가 이와 같지만 아직도 무엇이 체(體)고 무엇이 용(用)인지는 모르는구나.” (이윽고 동산 화상의 법어 가운데 한 대목을 인용하셨다.)

“동산 화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늦여름 초가을(해제)에 형제들이 각자 흩어지되 일만 리 풀 한 포기 없는 곳으로 가라.’고 하셨으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 나라면 ‘늦여름 초가을 형제들이 각각 흩어져 가되 길 위의 잡초를 하나하나 밟고 가야 된다.’고 말하리니, 이 말이 동산의 말과 같은가 다른가.”

대중들이 아무 말이 없자 화상께서 말씀하셨다.

아무도 답하는 사람이 없으니 내 스스로 답하겠다.” 하시고는 아무런 답도 없이 마침내 법상에서 내려 오시어 방장실로 돌아가셨다.(無言, 이것이 대답인가?―역자 주)

하안거를 지낸 뒤 화상께서는 범어사로 떠나셨다. 대중들도 모두 흩어졌으나 나는 병이 나서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하루는 《전등록》을 보다가 약산 화상이 석두 화상에게 설한 법어 중에 “한 물건도 작용하지 않는다(一物不爲).”고 하는 대목에 이르러 문득 심로(心路)가 끊어지는 것이 물통 밑이 확 빠지는 것 같았다(한암의 세 번째 깨달음).

그 해(1903∼1904) 겨울, 화상께서는 북쪽(갑산)으로 가셔서 잠적하셨다. 그 뒤로는 더 이상 화상을 뵐 수가 없었다.

갑진년(1904) 통도사에서 지내던 중 마침 돈이 생겨 병을 치료했지만 고치지 못했다. 그럭저럭 6년 세월이 흘렀다. 경술년(1910) 봄, 묘향산으로 가 내원암에서 여름철(하안거)을 지낸 뒤 가을엔 금선대로 가서 겨울과 여름 두 철을 지내고 가을(1911)엔 맹산 우두암에서 겨울을 지냈다.

다음해(1912) 봄이 왔다. 함께 살던 도반(사리)은 식량을 구하러 밖으로 나가고 나만 혼자 부엌에 앉아서 아궁이에 불을 붙이다가 홀연히 깨달았다. 그런데 그 깨달은 소식이 처음 수도암에서 개오할 때와 더불어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한 줄기 활구 소식이 부딪히는 곳마다 분명했다(한암의 네 번째 깨달음, 확철대오).
그리하여 ‘아!’ 하고는 다음과 같은 연구(聯句)의 게송을 읊었다.

하지만 당시는 말세인지라 불법이 매우 쇠미하여 명안종사의 인증(印證)을 받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리고 화상께서도 머리를 기르고 유생의 옷을 입고서 갑산, 강계 등지를 왔다 갔다 하다가 이 해(1912)에 입적하시니 참으로 탄식할 만한 일이다.

그래서 이 한 토막 글을 써서 스스로 꾸짖고 스스로 맹서하노니 한 소식 분명하기를 기약하노라.

    돌!

    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부엌에서 불붙이다 홀연히 눈이 열렸네
    이로부터 옛 길(祖師意)은 인연따라 맑았네.
    만일 누가 나에게 달마 서래의를 묻는다면
    ‘바위 아래 흐르는 물, 그 소리 젖지 않는다’ 말하리.
    삽살개는 나그네가 수상쩍어 짖어대고
    산새는 사람을 조롱하듯 우짖고 있네.
    만고의 빛 마음 달이여
    하루 아침에 번뇌망상 쓸어 버렸네.

《一生敗闕》 原文

余二十四歲 己亥七月日에 在金剛山神溪寺普雲講會에서 偶閱普照國師修心訣타가 至若言心外有佛이요 性外有法이라 하야 堅執此情하야 欲求佛道者댄 縱經盡劫토록 燒身煉臂(云云)하고 乃至 轉讀一大藏敎하며 修種種苦行이라도 如蒸沙作飯하야 只益自勞處라 하야는 不覺身心悚然하야 如大恨當頭라. 又聞長安寺海雲庵이 一夜燒盡하야는 尤覺無常如火하야 一切事業이 皆是夢幻이라.

解夏後에 與同志含海禪師로 束裝登程하야 漸次南行하야 至星州靑岩寺修道庵하야 參聽鏡虛和尙이 說, 凡所有相 皆是虛妄이니 若見諸相非相이면 卽見如來라 하야는 眼光忽開하여 盖盡三千界하니 拈來物物이 無非自己라. 留一宿하고 隨和尙하야 陜川海印寺路中에 問余曰, 古云호대 人從橋上過에 橋流水不流라하니 是甚큯意志오. 余答云호대 水是眞이요 橋是妄이니 妄則流而眞不流也니이다. 鏡虛和尙이 曰, 理固如是也나 然이나 水是日夜流而有不流之理요 橋是日夜立而有不立之理라 하시다. 余問호대 一切萬物은 皆有終始本末이로되 而我此本心은 廓然하야 無始終本末이니 其理畢竟如何닛고. 和尙이 答云, 此是圓覺境界라 經云호대 以思惟心으로 測度如來圓覺境界댄 如取螢火로 燒須彌山하야 終不能着이라 하시다. 又問, 然則如何得入이닛고. 答호대 擧話頭究之하면 畢竟得入이니라. (又問호대) 若知是話頭亦妄이면 如何오. 答호대 若知話頭亦妄이면 忽地失脚이니 其處卽是仍看無字話하라.

過寒際於海印寺禪社라가 一日作一偈云호대 脚下靑天頭上巒하니 快活男兒到此間이면 跛者能行盲者見이리라 北山無語對南山이라. 和尙이 見而笑曰, 脚下靑天與北山無語句는 是나 而快活男兒與跛者能行句는 非也라 하시다. 過寒際後에 和尙發行하여 向通梵等寺나 余則仍留라가 而偶得病하여 幾死僅生이라. 過夏後에 卽發程하야 到通度寺白雲庵하야 留數朔이라가 一日入禪次에 打竹벤에 又有開悟處하다. 而爲同行所牽하야 往梵魚寺安養庵하야 過冬하다. 翌春에 又到白雲庵하야 過夏次에 和尙住錫於靑岩寺祖堂할새 馳書招余어늘 余卽束裝하야 進謁하여 過一夏하고 秋에 又來海印寺禪院하야 至癸卯夏에 自寺中으로 請邀和尙할새 和尙은 時在梵魚寺라가 來到하여 而禪衆二十餘人과 同結夏矣라.

一日喫茶次에 有僧이 擧禪要云호대 如何是實參實悟底消息이닛고. 答호대 南山起雲北山下雨니라. (有僧이) 問호대 是甚큯意旨오. 和尙이 答호대 譬如尺??一尺之行一轉이라 하시고 仍問大衆호대 此是甚큯道理오 하시다. 余答호대 開?而坐하니 瓦墻在前이니다. 和尙이 翌日에 陞座하야 顧大衆曰, 遠禪和의 工夫가 過於開心이라. 然雖如是나 尙未知何者爲體하고 何者爲用이니라. 又擧洞山云호대 夏末秋初에 兄弟家가 各自散去하야 向萬里無寸草處去라 하나 余則不然하야 夏末秋初에 兄弟家가 各自散去할새 路上雜草를 一一踏着라야 始得다 하리니 與洞山語로 是同가 是別가. 衆皆無對할새 和尙云호대 衆旣無對하니 余自對去하리라 하고는 遂下堂하야 歸方丈하시다.

解夏後에 和尙은 過梵魚寺하고 衆皆散去로되 而余病하야 不能適他라. 一日에 看傳燈錄타가 至藥山對石竇云, 一物不爲處라 하야는 驀然心路忽絶이 如桶底脫相似라. 而其冬에 和尙이 入北地하야 潛跡하시니 更不拜謁矣라.

甲辰坐通度寺하야 得錢治病이로대 而病亦不愈라 隨緣度了六年光陰하고 而庚戌春에 入妙香山하야 過熱際於內院(庵)하다. 秋에 往金仙臺하야 過熱寒二際하고 而秋來孟山牛頭庵하야 過寒際하고 而翌年春에 同居?梨가 包粮次出去로대 余獨在廚中着火타가 忽然發悟하니 與修道開悟時와 少無差異라. 而一條活路가 觸處分明이라. 鳴呼라 톺吟聯句하다.

時當末葉하야 佛法衰廢之甚하야 難得明師印證이라. 而和尙은 長髮服儒하야 來往於甲山江界等地라가 是歲入寂하시니 餘恨可짿로다. 故로 書這一絡索葛藤하야 自責自誓하노라 期其一着子明白하노라 칗. 是何言歟아.

着火廚中眼忽明하니 從玆古路隨緣淸이라
若人問我西來意하면 岩下泉鳴不濕聲이라 하리라
村尨亂吠常疑客하고 山鳥別鳴似嘲人이라
萬古光明心上月이여 一朝掃盡世間風이로다. ■

윤창화
해인강원 졸업. 민추 국역연수부 졸업. 대한출판문화협회 및 출판연구소 이사. 불교학술 전문출판사 민족사 대표. 논문으로 〈해방 이후 역경의 성격과 의의〉 〈탄허의 불전 역경과 그 의의〉가 있다. 현재 〈법보신문〉에 “근현대 한국불교를 움직인 명저 50선”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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