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법보신문 기자

기존 연구 무시한 고은의 ’악의적’ 만해 왜곡

지난 며칠 동안 고은 씨의 눈을 통해 나는 만해 한용운(1879∼1944)을 만날 수 있었다. 만해의 입적 60주기를 맞이해 고은 씨가 지난 75년 썼던 《한용운 평전》을 최근 ‘향연’에서 다시 펴낸 책을 통해서였다. 《화엄경》이나 《선(禪)》 등 고은 씨의 책을 예전에 몇 권 읽어본 적이 있었던 까닭에 고은 씨의 이번 《한용운 평전》을 대하는 마음 또한 어느 정도 작은 설렘이 없지 않았다.

사실 만해 스님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이루어진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만해를 주제로 석·박사학위논문을 쓴 사람만도 100명에 가깝고 단편 논문이나 기고문, 관련 서적들을 합치면 천수백 편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들 학자들이 쓴 전기류의 책들도 많지만 고은 씨가 훨씬 잘 쓸 것이라고 기대한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고은 씨는 현대 한국을 대표하는 인정받는 문인으로 10여 년간 출가생활을 했고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위해서도 노력했던, 그래서 어느 정도 만해의 삶의 궤적과 조금은 닮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히 학문으로서만 아니라 실제 만해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그가 직접 만날 수 있었을 것이고, 이를 토대로 평전을 썼다면 말 그대로 만해의 숨결이 느껴지는 생생한 글일 것이라고 믿었던 탓이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면서 이러한 기대는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오히려 고은 씨가 ‘평전’이라는 이름 아래 만해의 불교정신과 독립운동과 문학세계를 사정없이 짓이기고 있음에 분노를 느껴야 했다. 고은 씨의 눈을 통해 비춰지는 만해는 시종일관 편협하고 이기주의적이며 최남선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영웅주의의 표본에 불과했다.

고은 씨에 따르면 만해가 시베리아와 만주를 주유했던 것은 “허영”에 불과하며,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탁월한 저서로 평가받는 《조선불교유신론》도 고은 씨의 눈에는 현실인식이 부족한 치기어린 작품일 따름이다. 특히 만해가 온 힘을 기울였던 《유심》에 대해서는 “공허한 배설물인 논설과 수필”이라고 최악의 평가를 내리고 있으며, ‘공약삼장’은 최남선에 대한 시기심에 불과한 것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고은 씨가 왜 이리 혹독한 만해상(像)을 그리고 있는지 따지기에 앞서 그가 이 책에서 만해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부터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해의) 이런 유학과 모험의 실패가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천재 최남선에 대한 원한이 엉겨진 것이다. 그래서 한용운은 독립선언서도 그 자신이 쓰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최린의 권유로 그 운동의 대표자들이 공인하고 있는 서울의 중인계층 최남선에게 돌아간 것이다. 한용운은 그 때문에 공약삼장이라도 추가해야 했던 것이다.(289쪽)

한용운은 최남선의 (기미년 독립)선언서 원안을 싫어했다. 그것은 명백한 시기심 때문이었다.(249쪽)

참 어이없는 해석이다. 그에 의하면 공약삼장을 쓰겠다고 한 것도 문학활동을 했던 것도 최남선에 대한 질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고은 씨 말대로 당시 최남선은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했음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속내야 어쨌든 자신은 정치와는 거리가 있는 선비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린은 민족의 거사를 위해 최남선을 끝까지 설득했다. 그 결과 최남선은 결국 자의반 타의반 찬성하게 되고 이 글을 쓰게 됐다. 고은 씨의 말대로 이것을 지켜본 만해가 분노했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원인은 질투심에서 찾아야 할 것이 아니라 이 일이 중차대한 민족적인 거사라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3·1운동이 당시 조선백성들의 생명과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음에도 이런 미지근한 태도로 일관했던 최남선이 심히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이는 만해가 처음부터 자신이 선언서를 쓰겠다고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최남선이 써 온 선언문은 화려한 미사어구로 대의명문을 밝히고 있지만 정작 이날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실천 강령은 쏙 빠져 있었다. 이것을 본 만해가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등의 공약삼장을 추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은 씨는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와 연구결과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만해는 열등감 소유자이며 순수하지 못한 승려였다(?)

이 책의 주된 골격 중 하나는 만해가 최남선을 지독하게 질투했고, 그의 삶의 과제는 최남선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고은 씨의 확고한 입장이다. 그럼 고은 씨는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을까? 일본, 시베리아, 만주 등을 주유한 만해의 여행은 실패했지만 ‘최남선은 일본유학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왔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말도 안 되는 논리는 수백 쪽에 걸친 만해 비판의 근거로 활용된다. 예를 들어 “그에게는 애국심이나 문학이나 사업이나 늘 최남선 극복에 목적을 둔 사실이 한용운의 비밀로서 감추어지고 있다.”(238쪽)는 식이다. 그의 기발한 문학적인 상상력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이렇게 ‘만해의 깊은 비밀’을 알고 있는 고은 씨는 먼저 만해의 독립정신에 대해 비꼬기 시작한다. 그가 3·1운동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에 대해 “한용운은 그의 30대 후반기에 있어서 생애 최고의 행복감에 잠겼다. 그 행복이란 그가 그렇게도 민족의 전위자가 되고 싶어하던 바람이 완벽하게 실현된 행복”(250쪽)이라고 말한다. 국권을 상실하고 민중이 처참하게 죽어가던 시대에 분연히 일어선 만해의 뜻이 고은 씨 앞에서는 단지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었던 하나의 계기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심지어 고은 씨는 감옥에 있는 만해나 최남선을 대하는 만해의 마음까지도 읽어내는 비상한 재주를 발휘하기도 한다.

투옥 3년의 시간은 한용운의 삶에 있어서 최대의 행복으로 차 있었다. 그는 그러한 감방에서 그러한 역경에서 그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위에 비벼대면서 피를 흘리는 위대한 자학의 주체였던 것이다.(270쪽)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 일제의 단의정권이 서자 건국대학이 설립되어서 최남선은 그곳의 변절 교수가 되었다. 한용운은 오랫동안 질투의 대상이자 항상 적의를 품고 있던 그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감을 그때 누렸다. (329쪽)

역시 우리나라 문학계를 거머쥐고 있는 문인답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고은 씨도 때론 하해와 같이 관대한 마음을 발휘하기도 한다. 물론 만해가 아니라 최남선을 비롯한 손병희 등에 한해서다. 최남선 등 16인이 33인과 다르게 서명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손병희 등이 각각 그들의 장래를 참작하거나, 교단의 임무를 배려했기 때문이라며 동등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너그럽게 이해하고 있다.

고은 씨의 논리대로 하자면 만해 등 서명을 했던 인물들은 장래가 없는 사람이나 교단의 임무가 없던 사람들이다. 심지어 만해가 감옥 안에서 사식을 거부한 것과 관련해 “손병희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그의 덕량(德量)의 풍류로서 정인(情人)의 면회가 있었으나 한용운에게는 그런 풍류가 없었다.”(262쪽)고 강조한다. 이러한 고은 식 ‘풍류’는 한 마디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적 사고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고은 씨의 만해에 대한 비판은 비단 독립운동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만해의 불교계 활동이나 태도에 대해서는 섬뜩할 정도로 난도질하고 있다.

“만약 한용운이 이기적인 성정, 늘 원한이 살아 있는 감정적인 품성이 (사찰의) 그런 덕망의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하루도 견디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좀더 악랄하게 말한다면 한용운은 이런 너그러운 품을 가진 어머니로서의 사원을 제 마음대로 짓밟은 가시 돋힌 자의 횡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사랑을 가진 일이 없다. 그는 대중을 이용했으며 그런 대중을 극단적으로 모멸했다.”(227∼228쪽)며 망발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또 동국대 전신인 불교전수학교의 첫 졸업생들이 만해를 적극 따랐다는 것을 소개하며 기막힌 추리를 하고 있다. “여기에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한용운의 지배자적인 종(縱) 관계의 심리다.…… 요컨대 그에게는 어떤 사람보다도 지배 본능이 강함으로써 그 본능에 주체의 욕망이 첨가되었을 때 가장 변절하기 좋은 시대에 거의 의로운 지조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336∼337쪽)라고 단정한다.

그러면 이렇게 고은 씨가 주장하는 근거가 있을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물론 있다. 여기에도 고은 씨만이 아는 비장의 무기, ‘비밀’의 무기가 작용하고 있다.

한용운의 비밀은 그가 승려이기 전에 행동자이며 지도자였던 것이다. 그런 행동이 당대사적인 구속을 받고 있을 때 그는 교활하게도 헌신짝처럼 내버린 불교계로 돌아가는 불가피성을 확보한다. 그는 교활했다. 버린 여자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가장 진부한 비정치집단인 불교계에 정치적 선동기능을 가진 그가 나타났을 때 그는 거의 안하무인의 자유를 누린 것이다.(367∼368쪽)

고은 씨는 만해를 순수한 승려로 보고 있지 않을 뿐더러 정치적인 선동가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1932년 2월, 스님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선불교 대표인물 투표에서 방한암 18표, 박한영 13표 등에 비해 만해는 422표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많은 스님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도 고은 씨에게는 비판의 재료가 되고 있다.

물론 이런 사실로 불교 지도자가 되는 것도 아니며 그것으로 도(道)의 수준이 말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다. 법위(法位)의 깊이로는 박한영을 따르지 못하고 선취(禪趣)로는 방한암의 돈오점성(頓悟漸成)에 이르지 못하고 만행에는 송만공을 따르지 못하고 계덕(戒德)은 송종헌에 미치지 못한다. 또한 단월(檀越)의 신행관계는 백용성을 넘을 수 없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는 한용운은 순수 승려가 아니다.(338쪽)

대단한 해석이지 않은가! 고은 씨의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에 비판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럼에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면 30∼40년대 불교계 상황에 대한 고은 씨의 의도적인 외면이다. 고은 씨는 만해가 당시 불교계 지도자를 왜 그토록 비판했는지를 얘기하기 위해서는 당시 불교계의 친일행위에 대해 반드시 언급해야만 했다.

한쪽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이나 혹은 아무런 죄 없이 죽어가고 있을 때 불교계는 황은(皇恩)에 보답하자며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데 앞장섰고 돈을 걷어 전투기를 헌납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불상이나 범종 등을 녹여 총칼을 만들도록 하는 짓도 자행했다. 그러나 만해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 끝없이 비판한다. 이것을 만해는 성격이 삐뚤어지고 이기주의 때문이라고 매도하고 오히려 불교계는 ‘비정치집단’으로 옹호하는 고은 씨가 오히려 제정신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만해가 애국반상회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호통을 친 것, 일장기를 게양하라는 말에 철퇴를 가한 것, 배급을 타가라는 말에 노기가 충천했던 것, 조선 총독에게 호통을 쳤던 것 등은 “그런 정도의 것이야말로 그 자신의 정신에는 불쾌한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366쪽)고 혹평하고 있다.

고은, “님의 침묵은 요설 …유심은 공허한 배설물” 폄훼

고은 씨의 만해 깔아뭉개기는 만해의 문학에 대한 평가에서 극치를 이룬다. 만해의 신체시 〈심(心)〉에 대해 ‘비속한 해설’ ‘붓장난’ ‘승려들이 걸핏하면 지껄이는 정도의 사어(死語)’라고 단정 짓는다. 심지어 “《십현담주해》나 《채근담강의》는 심심하게 뒹굴다가 문득 시작했을 것”(308쪽)이라고 평가하며, 《님의 침묵》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극단적인 말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시집 《님의 침묵》은 어떤 의미에서는 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설명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설명문조차도 모든 암시의 힘을 믿지 않는 사설체의 요설로 넘쳐 흐르고 있다.(301쪽)《님의 침묵》을 연구했던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 성과와 그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단 한 칼에 보낸다. 여기에 대하여 《님의 침묵》을 간행할 때 만해가 다른 이의 서문과 발문을 받지 않은 것도 꼬투리를 잡으며 예의 그 ‘비범한’ 타심통(他心通)을 선보이며 지독한 폄하를 시도하고 있다.

그가 (님의 침묵의) 서문과 발문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최남선이 받은 글의 필자 이외에는 없었다. 여기서 그는 ‘에라! 나는 내 글만으로 꾸미기로 하자’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최남선의 재능, 최남선의 끈덕진 불교, 최남선의 공공연한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님의 침묵》을 이루었다.(293쪽)

그리고 자기의 이러한 주장이 진실을 밝힌 용기 있는 행위라는 주장을 설득시키려 무진 애를 쓴다. “만약 이런 비평이 없다면 끝내 그는 오해의 여울에 떠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303쪽) “근대 한국문화에 있어서 가장 추악한 편견은 늘 민족주의적 폐쇄체제에 귀의하는 일만 허용한다.”(305쪽) “후진국 사회의 비과학적 전단(專斷)이 문화형태를 얼마나 왜곡시키는가를 우리는 비단 근대 한국의 사회에서만 보아온 것은 아니다.”(310쪽)라는 등 한심하다 못해 가여울 정도로 수십 쪽에 걸쳐 지루하게 독자들에게 애걸한다.

고은 씨는 이런 글을 평전이랍시고 펴내고 내심 흐뭇해 한다. 최근 다시 출간된 책에서는 빠져 있지만 고려원에서 펴낸 《한용운 평전》(2000. 8)의 서문에서는 “어느덧 사람들은 나에게 시인이라는 이름 말고 평전작가의 첫 사람이라는 이름을 달아주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은 평전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고은 씨의 지독한 독설일 뿐이다. 또 만해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글이다.

예를 들어 그는 이 책에서 상좌 춘성 스님과 이기영 박사 등 여러 사람의 말들을 인용하며 자신의 주장을 풀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얘기들이 어디서 나온 얘기인지, 자신이 직접 들은 것인지 아니면 간접적으로 들은 것인지, 그도 아니면 어디에서 인용한 것인지 등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물론 등장인물들이 말하는 이야기의 맥락도 알 길이 없다. 한 마디로 자기가 한 말이면 권위가 있다는 듯한 참으로 안하무인의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을 평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한 사람의 일대기를 객관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기존의 연구성과들을 반영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그 동안 주류를 이루었던 설들에 대해 논리적인 비판이 있어야 함에도 그런 것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한 술 더 떠 고은 씨는 평전이 소설인 줄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3·1운동 전날 만해의 찬 방에 학생들이 불을 넣었다.”며 “이런 더운 방에 있으면 장차 날이 밝으면 큰 일을 할 사람의 정신이 혼미해질 터인데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라고 그는 학생들을 혼내었다.”

252쪽)고 한다. 평전이 가져야 할 객관성보다는 소설가식의 상상력에 근거하고 있다. 또 만해가 만주를 방랑하던 시절 만났던 독립운동가 김동삼이 형무소에서 죽었을 때 그의 시체를 목숨을 걸고 인수한 것과 관련해 “그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 아무도 일으킬 수 없는 용기의 일에 그가 잠들지 않았다는 증거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모험으로 뛰어든 것이다.”(365쪽)고 해석한다. 찢어질 듯 가난한 집안 형편에 빚을 져가면서도 5일장을 마련해주고 만해가 식음을 전폐한 채 내내 통곡으로 지새운 것도 고은 씨의 눈에는 단지 남을 의식한 행위로 비치고 있는 것이다.

평전 아닌 ‘소설’ 전락 … 만해 아닌 고은의 자화상

그럼 고은 씨는 왜 이렇게 평전이라는 이름 아래 만해를 철저히 짓밟고 있는 것일까? 아마 그것은 고은 씨의 만해에 대한 콤플렉스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만해의 삶은 고은 씨가 걸어온 삶과 비슷한 점이 있다. 고은 씨는 1951년 해인사로 입산해 약 11년간 출가자의 길을 걸었다. 또 50년대 불교 언론의 창립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서정주와 조지훈의 도움으로 문단에 등단하고, 이후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을 접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1983년 14세 연하 이상화(중앙대 교수) 씨와 결혼식을 올려 단란한 가정을 꾸리기도 한다. 90년대 이후 그의 작품들이 일본어, 독일어, 영어 등으로 번역되면서 호평을 받고 하버드대 등 세계 여러 나라와 대학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문학 강의를 하기도 했다. 특히 몇 년 전부터는 김지하 씨 등과 더불어 가능성 있는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듯 어느 단계까지 고은 씨의 행적은 만해와 닮아 있다. 출가했었다는 점도 그렇고, 문학을 했다는 점도 그렇고, 독립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주력했다는 것도 비슷하다. 거기에 때늦은 결혼도 유사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한 사람은 한 때의 고통이 문화권력을 쥐는 계기가, 한 사람은 일평생 고난의 세월을 걷다가 영양실조로 죽는다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아마 고은 씨에게 만해는 처음엔 동경의 대상이었으나 나중엔 극복의 대상이 됐던 것 같다. 또 70년대 치기어린 글이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2000년 ‘고려원’에서 펴낼 때나 이번 ‘향연’에 펴낼 때는 어느 정도 수정과 보완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재발간을 욕심내서는 안 됐다. 이는 어쩌면 일종의 치졸한 질투심의 발로로, 천하의 고은 씨가 자신의 작품이 30∼40대 만해가 썼던 작품에 못미친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2001년 미당 서정주가 타계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고은 씨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미당의 친일문제를 끄집어내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문학평론가인 이남호 고려대 교수는 “욕설보다 더한 악담으로 미당을 터무니없이 폄하하며 자신을 세우려는 비열함을 보이고 있다.”(〈동아일보〉 2001년 5월 21일 19면)고 질책했다.

이러한 이남호의 질책은 《한용운 평전》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그는 만해의 불교관, 인생관, 문학세계의 꼭대기에 있다는 듯한 태도로 초지일관 자신의 구미에 맞춰 만해를 난도질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만해를 희생양 삼아 그의 사상과 문학세계를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은 씨의 만해는 객관화된 만해가 아니라 만해라는 인물을 통해 투영되고 있는 철저한 고은 씨의 모습일 뿐이다. 고은 씨가 문학을 바라보는 수준, 민주화를 바라보는 수준, 불교계를 바라보는 수준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이문열이 만약 ‘고은 평전’을 쓴다면?

고은 씨가 만해의 일대기를 썼던 ‘격자(格子)’로 고은 씨의 일생을 엮어보면 어떨까? 이것은 상상에서 그치지 않고 재미있는 상상일 뿐더러 이것이 실제 시도된 바 있다. 바로 ‘홍위병’ 발언으로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문열 씨에 의해서다.

지난 1994년 이문열 씨는 《아우와의 만남》(둥지출판사)이라는 중·단편 모음집을 펴냈다. 여기서 한동안 문제가 됐던 것이 바로 〈사로잡힌 악령〉이다. 고은 씨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그’라는 화자를 통해 이문열씨는 고은 씨를 연상케 하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그’는 유명한 스님(고은 씨의 경우 효봉 스님) 밑에 상좌로 들어가 명사(名士) 사냥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진 후 신분의 혜택에 힘입어 문단으로 적을 옮긴다. 그 후 추악한 짓과 교묘하게 시대적인 흐름에 편승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욕구와 야망을 채운다. 색주가인 그는 민주화 운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시대에 편승함으로써 언제부터인가 민중시인이자 저항시인으로 탈바꿈한다.

물론 시국사건에의 연루, 투옥, 고문, 재판, 중형으로 이어지는 수난의 이미지는 대중적인 지명도를 전국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그가 편승한 대의는 지식인 사회에서까지 그 명성의 실질을 보장해 주었다고 말한다. 계속 이어지는 글에서 이문열 씨는 ‘그’는 어떤 일간지의 지면을 빌어 자서전을 연재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은 씨가 신문에 연재했던 〈나 고은〉을 빗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까닭에 〈사로잡힌 악령〉은 초판 이후 시비가 불거지면서 《아우와의 만남》에서 삭제된다. 이것을 안 고은 씨는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히지 않았지만 아마 크게 분노했을 것은 뻔하다.

고은 씨의 《한용운 평전》을 새삼 비판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다. 첫째는 만해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만해의 본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점이다. 만해에 관해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고은 씨의 글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에 대해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은’이라는 명성에 힘입어 만해를 이해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은 만해를 형편없이 편협하고 이기주의자이며 열등감에 시달린 인물로 기억할 것이다. 즉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만해가 고은 씨로 인하여 많은 이들의 삶의 이정표가 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어이없게도 가장 큰 문학행사 중 하나인 만해축전의 대회장을 아직도 고은 씨가 맡고 있는 것이다. 알다시피 만해축전은 만해의 사상과 민족운동사, 문학세계를 알리고 이를 본받자는 취지에서 열리는 행사다. 그런데 어떻게 만해문학을 ‘허접 쓰레기’로 보는 고은 씨가 대회장을 맡을 수 있는 것일까. 그가 만해문학상과 만해대상을 받은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만해사상을 선양하겠다고 그를 대회장에 앉힌 주최측도 어이없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무튼 고은 씨는 단지 시인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리고 행여 앞으로 신채호, 조지훈, 서정주 등에 대한 평전을 쓰지 않기 바란다. 고은 씨의 그 굴절된 눈으로는 오직 고은 씨만 있을 뿐 정작 그 사람들의 실상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더 부탁을 한다면 고은 씨가 부처님 일대기를 부디 쓰지 않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다. 만해를 쓰는 식으로 고은 씨가 필봉을 휘두른다면 불자들에게 그 이상의 비극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

이재형
동국대 인도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사학과 석사과정 수료. 현재 법보신문 편집국 차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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