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전쟁 참여 사례를 중심으로―

1.들어가는 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상에서 전쟁이 없었던 때는 없었다. 전쟁은 살생을 부추기고, 평화를 깨뜨린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삶 전체를 뒤흔든다. 모든 전쟁은 그래서 악일 수밖에 없다. 또한 종교의 이상에 비추어 볼 때 전쟁에 대한 대응으로서 행해지는 이차적 전쟁도 마찬가지다. 모두들 정당방위로서의 전쟁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나 그것은 또 다른 이름의 악일 뿐이다.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평화적으로 합법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된다. 더구나 폭력의 사용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오는 악순환을 초래하게 된다. 전쟁에는 여러 이름의 전쟁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것은 종교전쟁이다.

미국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전쟁 가운데 90% 정도가 종교와 관련된 전쟁이라고 한다. 돈이나 석유,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종교 때문에 전쟁을 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역사가들이 지적했듯이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의 사망자보다도 종교분쟁과 종교전쟁 때문에 희생된 사망자가 훨씬 더 많다는 한 가지 사실만 보아도 종교전쟁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십자군 전쟁에서 첨예화되기 시작한 가톨릭과 이슬람의 극한 대립에서 시작하여,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종교의 이름으로 일어난 유혈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미국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테러공격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중동 분쟁에서 빚어진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세력과 아랍권 이슬람 세력의 대치 상황이 극단으로 치달은 결과다.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주고 지원하는 미국과 서유럽 일부 국가에 대한 증오가 이슬람의 극단적인 원리주의자들(?)에게서 테러라는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다.1) 1) 여기에서 ‘테러공격’이란 표현을 사용했지만, ‘9·11사건’의 경우에는 아직도 테러의 당사자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테러의 주체가 이슬람 세력이 아니고, 이슬람 세력이 범인으로 지목되었을 뿐이라고 해도, 미국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세력과 아랍권 이슬람 세력의 충돌이 극단으로 치달은 결과이거나 그 갈등상황이 이용당한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사실은 다음의 진술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슬람의 테러조직 단체인 알 카에다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받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이나 영국의 노벨상 수장작가 살만 루시디는, 아프간 전쟁의 본질은 ‘종교전쟁’이라며, 그 전쟁이 종교와 무관하다는 미국 쪽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빈 라덴은 2001년 11월 3일 아랍의 위성방송 알 자지라를 통해 방영된 비디오 녹화연설을 통해 “이번 전쟁은 조지 부시나 토니 블레어가 주장해온 ‘테러와의 전쟁’이 아니라 종교 및 이념 문제가 직결된 ‘종교전쟁’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예언자 모하메드 시대 이후 가장 격렬한 성전(聖戰, jihad)을 맞아 아프간 형제들을 지키기 위해 무슬림(이슬람교도)들이 나서야 한다.”라고 하며 성전을 재차 촉구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도 2002년 1월 29일 연초 국정연설에서 기독교적 선과 악의 관념에 기초해 미국과 반 테러세력을 ‘선(善)’으로, 테러집단과 테러지원세력을 ‘악’으로 부르며 이란과 이라크, 그리고 북한2)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였다.2)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에 포함시킨 발언은 치밀하게 계산된 것 같다. 테러를 자행하거나 후원하는 국가로서 회교 국가들만을 지목하면 부시 대통령은 반이슬람 친이스라엘의 이미지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회교 국가가 아닌 북한을 악의 축에 포함시킴으로써 부시나 미국이 무슬림을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테러분자들과 테러 가능성을 수반하는

그런데 누구나 전쟁 그 자체가 악이라는 사실에는 쉽게 동의하면서도 테러/악에 대한 전쟁은 악에 대한 선의 전쟁으로서 그 정당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려되는 것은 미국을 비롯한 일부 서방세계 지도자들의 의식 속에는 테러가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반성은 없고, 단지 테러에 대한 보복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라는 생각이 공유되어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폭력을 폭력으로 갚는 악순환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보복전쟁은 테러보다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아 왔듯이 종교전쟁은 무자비한 학살과 보복이 되풀이되고, 더 심각한 문제는 그 비극이 오래오래 지속된다는 데 있다. 세계의 많은 지식인들과 종교인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반전(No War)’이라는 피켓을 들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였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보편 종교라면 사랑과 자비, 평화를 자기의 이념으로 추구하기 때문에 종교가 종교임을 포기하기 전에는 종교와 전쟁은 본질적으로 양립될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현실적으로 종교가 테러/전쟁의 악순환 속에 매몰되어 그 같은 전쟁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데 있다. 적어도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테러/전쟁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해 주지 않고, 테러는 테러이고, 전쟁은 전쟁일 뿐이라는 것을 지적해줄 수만 있다면 전쟁의 악순환을 낳는 악의 고리를 끊고 평화가 정착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전쟁은 대부분 유일신론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종교에 의해서 촉발되어 왔다. 하지만 유일신론적 종교가 아닌 경우에도 방어적 전쟁에서까지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불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방어적 전쟁이라고 해도 그 본질이 폭력/전쟁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불살생이라는 불교 본연의 입장과 대치된다. 이 글에서 불살생(평화)이라는 불교 본연의 이상과 전쟁 참여라는 역사적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문제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교로서 불교는 역사적으로 폭력이 폭력을 낳고 전쟁이 전쟁을 낳는 악의 고리를 끊는 데 얼마나 역할을 하였을까?

불교의 첫 번째 목표는 평화(s큑칗ti)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불교라는 종교의 이름으로 한 번도 전쟁을 일으키거나 폭력을 사용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전쟁은 불교가 공격적인 일차적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만 쓰는 말인지, 아니면 공격적인 전쟁에 대한 방어적인 이차적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것까지 포함한 것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논의를 전개하면 밝혀지게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논자는 원칙적으로 공격적인 전쟁은 물론이고, 공격적인 전쟁에 대한 대응으로서 행해지는 방어적인 이차 전쟁 또한 악이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초기불교 승가의 규정에 따르면 출가수행자는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을 보아서도 안 된다고 하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라도 2∼3일 동안 군대 안에 머물 수는 있지만, 그때에도 군대의 정렬·배치·열병식 등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을 정도다. 그리고 국왕에게 전쟁을 포기하도록 권한다. 더 나아가서 《자타카》에서는 국왕의 무저항주의를 찬탄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세속적인 국가권력에 대해 전쟁을 멈추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그 한 가지 예로서, 코살라 국 비두다바(Vid.u칍.abha, 혹은 Vid.u칍.akha, 琉璃) 왕이 카필라 성을 여러 차례 침략하자 목건련이 무력으로 대항하자고 했으나 부처님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 카필라 국은 그대로 망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세속적 권력자가 무력으로 탄압할 때, 또는 집권자가 무력으로 불법(佛法)을 파멸시키려고 들 때 불교는 어떻게 했을까? 그때 불교에서는 무력으로 대항했는가? 아니면 수수방관했는가? 만약 무력에 의한 정당방위를 허용한다면 어느 선에서 자기 방위를 위해 무기 사용 또는 전쟁을 허용했는가? 그리고 세속적 권력자들이 불교교단에 전쟁 참여를 종용할 때 교단에서는 어떻게 했는가?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논의 순서는 먼저 불교에서는 전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크게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누어 볼 것이다. 다음으로는 혹시 역사적으로 앞의 문제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한국불교를 중심으로 교단과 승려들의 입장과 그 대응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불교에서는 전쟁을 어떻게 보는가

1) 초기불교
부처님은 태자 시절에 사람들이 서로 싸움질하는 것을 보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바로 모든 다툼이 종식되고 평화로 나아가는 길을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출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이 불화를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데 의문을 가졌다. 왜냐하면 폭력은 미워하는 자나 미움 받는 자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부처님은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지 폭력의 증세를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근원 그 자체를 제거시키는 방법을 지향하였다. 부처님은 폭력이나 증오 등은 모두 자기 본위(自愛)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자기 본위는 모든 싸움, 불화, 분쟁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남들이 설사 나에게 위해(危害)를 가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들에게 해를 주어선 안 된다고 자신에게 타일러야 한다고 말한다.

불만을 품는 것은 평화를 이룩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복수와 보복, 반목과 적대감만 조장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나를 욕하고 때리고 패배시키고 내 것을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악의를 품게 되어 그들 사이에는 원한이 끝나지 않는다. 그가 나를 욕하고 때리고 패배시키고 내 것을 빼앗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악의를 품지 않아 그들 사이에는 원한이 끝나게 된다.”3) 3) 부처님 재세 때, 코살라 국의 비두다바 왕이 왕자 시절 카필라 국에서 당했던 모욕에 대한 보복을 하기 위해 카필라 국을 세 번이나 쳐들어가 결국 멸망시킨 것에서 볼 수 있다. 대정신수대장경(이하 대정장)2,

또한 《상윳타 니카야(Sam?utta-Nika칪a)》에 보면, 언젠가 부처님이 사위성으로 들어가 탁발하던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어떤 난폭한 사람이 부처님에게 욕설을 하며 다가와 흙을 집어 던졌다. 그때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흙먼지가 던진 사람의 얼굴을 뒤덮었다.

부처님은 흙먼지를 터는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만약 이유도 없이 나쁜 말을 하고 욕설을 퍼부어 다른 이를 더럽히고자 한다면 마치 흙을 집어 그 사람에게 던지지만 바람이 거꾸로 불어 오히려 자신을 더럽히듯이 그 악은 오히려 자신에게 되돌아오리라.’”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경우에도 폭력의 사용을 허용하지 않는다.4) 심지어는 일반인들조차 무기를 만들거나 거래하는 일, 독약의 제조, 술이나 마약의 제조, 동물의 도살까지도 하지 말도록 하는데 어떻게 대량살상을 낳는 전쟁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4) 예컨대 코살라 국의 침략을 받은 석가족의 청년들이 계율을 지키기 위해 화살을 허공으로만 날리다가 몰살당한 예에서 보듯이 설사 나라를 위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폭력은 안 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뜻이다. 대정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의 밑바닥에는 지혜와 자비의 메시지가 있는데 그 핵심은 비폭력과 연기와 공(空)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비폭력(ahim?a, 불살생), 곧 평화(s큑칗ti)다.

비폭력이란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 비폭력의 핵심은 자비심이 밖으로 드러난 것으로, 자비심이 없다면 진정한 의미의 비폭력을 실천할 수 없다. 그러면 왜 비폭력을 실천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세상의 모든 것이 인연으로 이어져 있는 연기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 이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한다.”라고 하는 연기법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과 ‘저것’이 동시에 서로 존재하게 하는 필수 조건이 된다. 다시 말하면 나의 미래는 다른 사람의 미래와 뗄 수 없는 깊은 관계가 있다. 내가 행복해지려면 남의 행복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비폭력이 가장 중요하다. 또한 불교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을 잘 간직하고 있는 빠알리 경전의 어디를 찾아보아도 불자의 덕목 가운데 첫 번째인 ‘불살생계’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특수 상황을 용인하고 있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맛지마 니카야(Majjima-Nika칪a)》 〈톱의 비유경〉에서는 “악당들이 어떤 사람의 손발을 자르더라도 그때 그 사람이 노여운 마음을 품는다면 그는 나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고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원한을 품는 것마저도 나쁘다고 가르치는 데서 어떤 종류이건 폭력이 용납되고 전쟁이 용납될 수 있겠는가.

부처님이 볼 때 폭력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정당한 이유란 성립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정당한 이유란 언제나 자기 쪽에서 붙인 변명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은 《잡아함경》 권13에 나오는 부처님과 설법제일의 제자 부루나와의 대화에서 볼 수 있다.

부루나가 하루는 부처님을 찾아뵙고 자신의 뜻을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늙고 기력이 다했습니다. 이제는 저를 낳아 준 고향 수나파란타카(Suna칛arantaka) 국으로 돌아가 그곳에 불법을 전하고 진리의 씨를 뿌렸으면 합니다. 원하옵건대 저의 청을 들어 주시고, 그곳에서 제가 어떻게 행동하면 스승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진리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부루나여, 그 지방 사람들은 성질이 사납고 흉악한데, 만일 그 사람들이 그대를 사람들 앞에서 비난하고 비방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때는 그들이 지팡이나 돌멩이로 저를 때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혹은 발길로 저를 차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들이 좋은 성품을 가졌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돌이나 지팡이를 가지고 그대를 때린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때에는 칼을 가지고 저를 해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훌륭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 부처님의 법을 배울 만하다고 생각하며 참고 견디며 법을 전하겠습니다.”
“부루나여, 만일 그들이 칼을 가지고 그대를 죽이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때는 저는 이렇게 생각하겠습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고뇌를 빨리 끝내고 극락세계로 가려고 스스로 목숨 끊는 번거로움을 덜어주는 고맙고 친절한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다가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는 폭력에 대해서 폭력으로 갚지 않고 끝까지 인욕할 것을 보이고 있다. 부처님은 데바닷다(Devadatta)의 폭력 앞에서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의연히 당신의 길을 걸었다.5)5) 《근본유부율》 권10에 데바닷타는 궁중에서 걸식을 마치고 나오는 연화색 비구니를 주먹으로 때려 죽였다. 또한 그의 악심은 극에 이르러서 그의 열 손톱에 독을 바른 뒤 부처님께 다가가 부처님의 다리를 할퀴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다리는 바위처럼 단단하기에 오히려 그의 손가락이 부러져, 마침내 그는 그 독으로 인해 죽고 말았다고 한다.

또한 초기불교 시대의 왕들도 국내적으로는 온화한 정책을 펴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국제관계에서도 결코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고 평화를 지키는 것을 첫 번째 이상으로 삼았다. 《대승대집지장십륜경》 권5에서는 국왕의 임무에 대해 “모든 국토의 백성들을 어루만져 돌보며, 자국을 수호하고 타국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국왕은 다른 나라와 수교에 힘써야 하며, 복과 은혜를 펼쳐 만민에게 환영받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율장에서 ‘몽둥이, 활, 칼, 창, 검 등과 같은 무기를 지닌 자에게 법을 설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듯이6) 마찬가지로 부파불교의 입장도 이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6) 이들은 100식차가라니법(Sikhakaraniya) 가운데 제96∼99조에 해당한다. 《사분율》 권21, 대정장22, p.713c. 李智冠, 《南北傳六部律藏比較硏究》, 大覺會出版部, 1982, pp.351∼353 참조.

2) 대승불교
대승불교에서도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책동은 계율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범망경》 제11 통국사명계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서로 다투고 수많은 중생을 살해하지 말라. 더구나 보살은 군대 안에 들어가 왕래조차 하지 말라.”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국제관계에서 침략전쟁을 인정하지 않고 평화를 지키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한편으로 대승불교에서는 섭수(攝受)와 절복(折伏)의 이름 아래 섭수할 것은 섭수하고, 절복할 것은 절복하라고 하고 있다. 곧 극악한 죄를 범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오만한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서는 압력을 넣어 강한 힘으로 꺾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 사소한 동기에서 악을 저지른 심약한 사람에게는 도리로써 깨우쳐 주어야 한다고 하고 있다. 4세기에 성립된 《승만경》에 “내가 힘을 얻었을 때 마땅히 절복할 것은 절복하고, 섭수할 것은 섭수하리라. 왜냐하면 절복과 섭수로써 정법을 오래 머물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7)라고 설해져 있다. 7) 대정장16, p.217c.

이를 주석한 가상대사 길장은 《승만보굴》에서 “강한 것은 꺾어야 하나니, 꺾어서 악으로부터 떠나게 해야 한다. 유연한 것은 포섭해야 하나니, 포섭하여 선으로 들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절복과 섭수라 이른다.”8)라고 하여 더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중국의 천태대사 지의는 《마하지관》 권10에서 “불법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섭수요 둘째는 절복이다.”라고 하면서, 섭수의 보기로는 《법화경》 권5 〈안락행품〉 제14의 “다른 사람의 좋아함과 싫어함, 장점과 단점을 말하지 말라.”9)를 들고 있다. 또 절복의 보기로는 대승의 《대반열반경》 권3 〈금강신품〉의 “정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기를 써도 좋다. 그것은 계율에 위배되지 않는다.”라고 한 말을 들어, “무기를 들고, 심지어 목을 베기까지 하는 것이 절복의 뜻이다.”라고 해설하였다.10)8) 대정장37, p.24a. 9) 대정장9, p.38a. 10) 田村蒡郞 著, 이원섭 역, 《열반경의 세계》, 서울, 현암사, 1993, pp.215∼216.

그런데 단순히 무지하여 악한 사람이나 국가는 섭수의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으나 정법을 파괴하는 사람이나 국가는 절복을 해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절복은 잘못을 꺾어서 항복시키는 강제적인 수단이고, 섭수는 감싸 안고 용서해 보살피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절복이다. 왜냐하면 절복은 정법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공격적 전쟁은 아니더라도 방어적 전쟁은 용인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11) 11) 불교에서 쓰이는 절복의 진실한 의미는 미움·시기·증오가 아니고 사랑의 채찍이다. 공격도 침략도 아니고 정복하는 것도 아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포악 무도한 자를 눈뜨게 하여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대비심이 발로된 것을 뜻한다.

이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진술은 《대반열반경》 권3 〈금강신품〉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가섭은 어떻게 하면 금강불괴의 법신, 곧 현실사회에서 정법을 확립할 수 있는지를 부처님에게 물으니,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정법을 잘 수호한 인연으로 금강신을 성취할 수 있다. 정법을 수호하는 사람은 5계를 받지 않고 위의를 닦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칼·검·활·화살·창 등을 들고 계를 지키는 청정한 비구를 수호해야 한다.12)

이 구문의 의미는 정법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법을 수호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 때로는 무기를 사용하는 일도 허용된다고 한다. 그리고 정법 수호를 강조하면서 재가신도들은 정법 수호를 위해 무기를 사용하여도 계를 깨뜨리는 것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는 마땅히 정법을 수호해야 할 것이다. 정법을 수호한 과보는 한없이 크고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선남자! 그러므로 정법을 수호하는 신도들은 무기를 가지고 비구를 옹호해야 한다. 설사 5계를 받아 지니더라도 대승불교도라 할 수 없지만, 정법을 수호하기 위해서 5계를 지키지 않더라도 대승불교도라고 한다.13)13) 대정장12, p.624a.

앞에서 보았듯이 율장에서는 무기를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는 법을 설하는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 이에 견주면 비구가 무기를 지닌 재가신도들을 옆에 두는 것은 계를 깨뜨리는 것으로 간주해야 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서 가섭이 부처님에게 “비구가 무기를 지닌 신도들을 동무로 옆에 두는 것은 파계가 아닙니까?”14)라고 질문하니, 부처님은 “파계가 아니다. 무기를 지닌 재가신도들과 함께 있는 것이 허용된다.14) 대정장12, p.624a.

또 국왕·대신·신도들이 법을 수호하기 위해 무기를 지닌다고 해도 계율을 준수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무기를 지니더라도 남의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15)라고 하여, 출가자 스스로 무기를 지녀서는 안 되지만 정법을 수호하기 위해서 무기를 든 재가신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제1의 계율인 불살생계는 지키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정법을 수호하는 정당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살생계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찬탄한다. 15) 대정장12, p.624ab.

그때 계를 지키는 한 비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각덕(Buddhadatta)이라 한다. 많은 무리·권속들에게 둘러싸여 능히 사자후를 하고 9부 경전을 반포하여 널리 설하며, 모든 비구들에게 노비·소·양 그리고 비법(非法)의 물건을 소유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때 많은 파계 비구들이 이런 말을 듣고 모든 악심을 일으켜 칼과 몽둥이와 같은 무기를 들고 이 법사를 핍박하였다.

이때 국왕 유덕(Bhavadatta)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이 일을 듣고 정법을 보호하기 위해 곧바로 정법을 설한 자의 처소로 가서, 계를 깨뜨린 나쁜 비구들과 싸워 법을 설하는 자가 위해를 입지 않도록 하였다. 왕은 이때 칼과 검, 화살과 창에 찔려 온 몸에 겨자씨만큼도 온전한 곳이 없었다. 그때 각덕 비구가 왕을 깊이 찬탄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합니다. 왕께서는 이제 진실로 정법을 옹호하는 자이십니다. 내세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법기(法器)가 될 것입니다.”16)16) 대정장12, 623c.

그런데 이처럼 청정 비구교단을 수호하기 위해서 재가 신도들은 5계, 좁게는 불살생계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이러한 사상은 그 뒤 중국과 한국불교에서 국가권력과 타협한 승가의 이론가들이 시대상황에 따라 재가신도들뿐만 아니라 승가교단에도 ‘호법을 위한 호국전쟁 참여’의 논리를 정당화 해주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3. 한국불교에서 승려들의 전쟁에 대한 입장과 참여 사례

앞에서 보았듯이 불교의 불살생 정신에 입각할 때 승가교단이 전쟁에 직접 참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대 인도의 풍습에서 보면 전쟁은 오로지 크샤트리야 계급의 몫이었으며,17) 브라흐만과 같은 성직자의 참전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처럼 불교도의 초세속적인 태도와 정치와 전쟁에서의 중립성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었다.18) 17) “왕은 동등한 힘을 가지거나 우월한 힘을 가지거나 혹은 더 적은 힘을 가진 자들에게 도전을 받지만 그 인민을 지키고, 크샤트리야로서의 의무를 상기하여 전쟁을 피해서는 안 된다.” 이재숙·이광수 옮김, 《마누법전》, 서울, 한길사, 1999, p.281. 또 “이와 같이 정당하고 영원한 크샤트리야의 의무는 이미 세상에 공포된 것이다. 크샤트리야는 이 의무에 의거해서 전쟁에서 적을 죽이는 일을 기피해서는 안 된다.” 같은 책, p.282.18) 中村元 著, 차차석 역, 《불교정치사회학》, 불교시대사, 1993, p.82 참고.

그런데 불교적 도덕적인 논리에 기반을 둔 화합과 정법에 의한 통치 등의 정치사상을 통일 제국 이념으로 채택한 마우리아 왕조 아쇼카 왕 이후로는 불교교단도 전륜성왕론에 따라 국가 권력과 보다 가까운 관계를 지향하기 시작하였다.19)19) 위의 책, pp.116∼120, pp.150∼155.

그리고 불교가 중국에 전해질 때부터 승려들은 인과응보, 업설 등을 근거로 불살생계와 같은 생명존중의 보편적인 윤리적 가치관을 도입하여 살벌한 시대들의 사회적 분위기를 상당히 순화하고 정화하면서도 동시에 국왕의 신성성(神聖性) 개념이나 국가 우위주의 등의 기존 사회정치 체제에 적응해야만 했다. 결국 원칙상 폭력을 부정하고 죄악시하는 중국 승려들이 국가가 수행하는 전쟁들을 인정하여 나름대로 협조해야 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북조 시대의 불도징(佛圖澄, 232∼348)은 박학다식하여 경전의 깊은 뜻에 막힘이 없었고, 개인적으로는 술을 입에 대지도 않고 오후불식을 지키는 등 계율정신이 뛰어난 승려로서 불교의 근본정신에 충실하여 폭력을 당연히 부인하였다. 북조의 이름 높은 폭군이었던 석호가 그에게 부처님의 법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을 때 그는 “부처님의 법이란 살생하지 않는 것이다.”20)라고 하였다.20) 《양고승전》 권9 ‘神異上’(대정장50, p.385a).

그러나 현실 정치에서 불도징은 교화해서 안 될 악인들은 국가 권력이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다만 죽여야 할 사람과 죽이지 말아야 할 사람을 제대로 구분할 줄 아는 것이 군주의 현실적 자비라고 덧붙였다.21) 21) 같은 책, p.385b.

이렇게 불도징은 불교적 차원에서 계율과 자비·인욕 개념에 의한 비폭력 이념을 제시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위정자에 의한 폭력이 때로는 불가피함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불도징의 사상은 한국에서 정치와 종교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패러다임을 제시해 주었다고 생각된다.22)22) 박노자, 〈사명대사 의거의 의의와 인간적 종교적 비극성: 韓·中에서의 僧團과 國家的 暴力의 관계를 중심으로〉.

1) 삼국시대
주지하듯이 불교는 한반도에 전래된 이래 국가/국왕의 공인을 받아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불교가 이 땅에 뿌리내리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승가에 의한 호국과 국왕에 의한 불교 외호’라는 패러다임 속에서 최소한의 국가적 전쟁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예를 들면, 7∼8세기의 의적은 살생 도구를 보관하는 것조차 금지하는 《범망경》 제10 불축살생구계에 대해서 “왕·왕자 등의 귀인들은 외환을 방지하기 위해서 무기를 지녀도 되고, 평민들도 법을 보호하기 위해서 무기를 지녀도 되지만 살생만은 삼가야 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신라의 통일 전쟁을 목격한 의적이야말로 일단 살생 도구를 갖춘 국가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대반열반경》 〈금강신품〉의 내용을 근거로 정법 수호라는 명분 아래 폭력적 전쟁을 용인하고 있다.

태현의 입장도 근본적인 면에서는 의적과 다르지 않다. 그는 《범망경》 제10 불축살생구계를 설명하면서 “가벼운 죄를 범한 자라도 정법을 수호하기 위해서 재가신도가 무기를 지녀도 죄가 되는 바 없다.”라고 하고, 또 제11 통국사명계를 설명하면서도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쟁터에 나아가 살생하면 안 되지만, 싸움을 조복하고 중지시키기 위해서 나라의 일을 맡는 것은 죄가 없다.”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통일 전쟁을 ‘백성을 위한 전쟁’임을 선전하였던 세속적 왕권에 굴복해 ‘정법 수호와 전쟁 중지를 위하여’라는 미명 아래 무기를 드는 것을 인정하는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과거의 통일 전쟁에 대한 합리화이자 왕법과의 이론적인 타협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타협의 골격은 일찍이 국왕이 〈걸사표(乞師表)〉를 작성하게 한 것에 대한 원광 법사의 대답에서 벌써 발견된다. 원광은 “남을 살해하게 만드는 일종의 사신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 사문이 할 짓이 아니지만 대왕의 국토에서 살면서 수초를 먹고 사는 이상 명령을 어길 수 없다.”라고 하여 출가사문으로서 해야 할 짓은 아니지만 왕권국가에 살면서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음을 말해, 그 전례를 남기고 있다.23) 23)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평왕 30년조.

이처럼 국가 권력과 타협한 승가의 이론가들은 재가보살들에게는 ‘호법을 위한 호국 전쟁’에 참여하도록 전쟁에 내몰면서도 자신과 같은 출가보살은 불살생계를 범한다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으려고 출구를 마련해 두고 있었다.24)24) 박노자, 앞의 글.

하지만 통일 신라 하대에 들어서면 승려들도 스스로 무기를 들게 된다. 진성여왕 때(887∼897)에 지방 호족과 농민군의 봉기가 잦아지면서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큰 사찰들은 더 이상 국가의 보호에 의존할 수 없게 되자 삼보정재(三寶淨財)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속인으로 구성된 일종의 사찰방위대(승군)를 편성하게 이른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승려들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고 있지는 않다.

2)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들어서면 불교교단에 대한 국가 통제는 광종 때에 완비된 승록사(僧錄司)·승과(僧科)·승계(僧階) 등의 국가제도를 중심으로 체계화된다. 승려들은 형법상 그리고 실제적으로도 엄격하게 국법을 지켜야 되는 국가관료 체제 아래 놓인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중앙 관료적인 면과 귀족적 면이 혼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각종 귀족 세력의 후원을 받는 여러 종단들은 귀족 파벌간의 투쟁에 개입한다. 신라시대보다도 국가 귀족과 더욱 긴밀해진 고려시대의 불교교단은 지배자에 의한 제도적 살생과 전쟁에 대해서는 더욱더 관대해졌다.

수미산파에 속한 이엄(利嚴, 870∼936)은 불교의 자비 정신과 친국가적·타협적인 태도가 혼합된 살생관을 보이고 있다. ‘죄가 있는 무리’에 대한 살육을 불교가 허용함으로써 국가의 ‘합법적 폭력’, 곧 전쟁을 전면적으로 합리화하고 있다. 이처럼 승가가 왕권에 의한 ‘정당한(?)’ 전쟁을 전적으로 인정해 줌으로써 국가적 초비상일 경우에는 국가가 승병(僧兵)을 모집하여 전쟁에 참가할 수 있도록 방기해 버렸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11세기에 이르면 마침내 승려들이 살생이 수반되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에 이른다.

한국에서 승군을 최초로 징발하는 사례는 1010년에 고려가 거란의 두 번째 침략을 받을 때였다. 지채문(智蔡文) 장군이 승려 법언(法言)과 함께 9천 명의 병사를 이끌어 적군을 공격하여 3천 명을 죽였다. 이 전투에서 법언은 전사하였는데, 이것은 승려가 전쟁에 직접 참여한 첫 사례이다.

1010년의 승병 동원은 현지 사령관인 지채문에 의한 일이었지만 오래지 않아 국가에 의해 정규적인 승병 조직이 편성되어, 1104년 윤관의 여진 정벌 때는 승려와 그 부속인으로 구성된 항마군이 별무반의 한 축으로 편성되었다.

승병 제도의 완비에 따라서 승려가 전쟁에 참여하는 범위도 넓어졌다. 예를 들면 1135년에 김부식의 군대가 묘청의 난을 진압할 때 승병의 참여는 매우 활발하였다. “갑옷을 입은 승려 관선이 반란군 수십 명을 도끼로 죽임으로써 관군의 사기를 고무시켰다.”라고 하는 일이나, “승려 상숭이 도끼로 십여 명을 죽여 관군의 역전을 이끌었다.”라고 하여25) 승려들의 직접적인 살생과 폭력 행위를 당연시하게 이르렀다.25) 《고려사》 열전11, 김부식전.

승려가 무장하고 전쟁에 참전하는 사태는 대몽 항쟁 때 절정을 이루었다. 특히 몽고군에게 쫓겨 오는 거란의 침입(1215∼1219)으로 시작되는 대몽 항쟁기에는 승병이 자기 사찰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서 관군과 함께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는 일도 매우 흔해졌다. 1232년 승려 출신 김윤후가 몽고의 명장 살리타이(Salitai)를 활을 쏘아 사살하였다고 한다.26) 26) 《고려사》 열전16, 김윤후조.

또 1254년 황령사 승려 홍지는 백발명중의 실력으로 적장을 사살하여 적군의 사기를 꺾어 그 전투에서 적군의 과반수가 전사했다고 한다.27)27) 승려들의 전쟁에 참여한 사례는 하나 둘이 아니다. 하지만 크게 대내적인 것과 대외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대내적인 경우는 이의방·최충헌과 무신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리고 묘청·망이·죽동 등을 제압하기 위해 전쟁에 가담한다. 대외적인 경우는 거란·몽고·일본 등이 침입했을 때 직접 무기를 들고 참여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것은 김덕수 편, 《임진왜란과 불교의 승군》, 육군본

국가의 제도화되고 합법화된 전쟁에의 참여가 정권에 예속된 불교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일부 승려의 전쟁관은 불살생 정신의 범위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승려로 진정국사 천책(天?)을 들 수 있다. 그는 불교의 근본정신에 충실한 면도 없지 않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적군에 대한 적극적인 살상과 폭력 행위를 고무시키기도 하였다.

《호산록》 권4의, 1237년 전라도 지방에서 일어난 이언년(1237)의 난을 무력으로 진압한 김경손(?∼1251)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천책은 불법(佛法)과 왕법(王法)을 완전히 일치시켜 왕권의 정치적 반대자를 ‘오역의 무리’로 몰아 ‘그들이 더 이상 악업을 짓지 못하도록’ 그들을 죽이는 것을 ‘보살의 자비행’으로 적극 찬탄하며 일종의 성전(聖戰)으로 합리화하고 있다.

결국 고려 말에 이르면 승병이 전쟁에 가담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천책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승려들은 종교적 차원에서는 불살생을 중요시하긴 했지만 현실적 차원에서는 국가에 의한 전쟁을 공공연히 인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는 결국 불교교단의 도덕적 권위를 떨어뜨려 종교적 공동체로서 승가의 정체성을 상당히 약화시키고 말았다.

이와 같은 초기불교의 무소유 정신을 짓밟는 교단의 치부 행각, 청정승가라는 이상에 전적으로 위반되는 정교결탁(政敎結託), 그리고 근본 5계 가운데서도 첫 번째인 불살생계를 무색케 하는 전쟁에 대한 적극적인 인정과 직접 참여,28) 이 세 가지는 고려불교가 퇴락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다음 조선시대의 승려 위상과도 맞물려 있다. 28) 박노자, 앞의 글.

3)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이르면 숭유억불 정책으로 승가의 사회적 위치는 천민으로 격하되어 일반민과 같이 병역뿐만 아니라 모든 부역을 져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 시대에 승가는 승병으로서 일반민의 부담을 나누기 위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건국 초기부터 승려들은 의무적으로 승군으로 동원되어 토목·수리공사 등에 참여하게 된다. 그래도 초기에는 공사에 참여하는, 이른바 공병(工兵)과 같은 일을 담당하는 데 그쳤지만, 1555년(명종10) 5월의 을묘왜변을 계기로 승려들이 국가의 동원에 의해 전장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승군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다. 그것도 동원이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의승군(義僧軍)’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하게 된다.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은 선조의 부름을 받고 왕 앞에서 “전국 승려 가운데 늙고 병든 자들은 이미 각자 있는 곳에서 기도를 올리게 하였고, 나머지는 모두들 종군하겠나이다. 성은(聖恩)을 갚기 위해 어찌 죽음을 아끼겠나이까.”(《대동야록》 권36)라고 하여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러한 휴정의 격문에 따라 전국 각 사찰에서 승려들이 전국 도처에서 홀로 또는 무리를 지어 일어났다.

공주 갑사 청련암 승려 영규는 청주 수복작전에서 참전하면서 “우리들은 나라의 명령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우리를 따르지 말라.”(《선조실록》 25년 8월 계축조)고 하니, 처음에 300명이던 것이 800명까지 늘었고, 금산전투에서는 2,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담양 옥천사 승려 인준(引俊)나 남원에서 일어난 두인(斗仁) 등 전라도에서 젊고 건강한 승려들이 모두 일어나 전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 해남 대흥사 승려 처영(處英)도 1천 명의 승려로 조직된 승군을 거느리고 행주산성 싸움에 참여하였다.

승려들의 전쟁 참여는 조선조에 절정에 이르렀다. 승려들이 전쟁에 참여한 것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다음의 글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난중잡록》(임진 10월조)에 보면, 당시 강원도 도순찰사의 종사관이던 홍린상(洪麟祥)이 병사들의 모집을 호소하면서 “중들조차 의분을 일으켜 떨치며 일어나 죽음을 맹세하고 왜적을 쳐부수고 있거늘 하물며 우리들 유생에 있어서야.” 하고 있다.

그러나 승려들은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쟁 참여를 독려하거나, 적군 안으로 들어가 정보를 얻어내는 역할에도 빠지지 않았다. 법견(法堅)은 무기를 조달키 위해 권선문을 지어 널리 호소하였다. 중흥사 승려 행사(行思)는 평양이 왜적의 수중에 들어가니 평양성을 뚫고 들어가 일본군을 정탐하였다. 또 서울 근교의 정토사 승려들은 일본군 4명을 유인하여 펄펄 끓는 물을 얼굴에 퍼부어 죽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때 승병 하면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을 서슴없이 첫 손에 꼽는다. 〈청허당휴정대사비명〉에 보면, 그는 순안 법흥사에서 의엄과 함께 승병들에게 전술훈련을 시켰으며, 평양탈환 싸움에서 그가 이끄는 승군은 수많은 적의 목을 베거나 사로잡기도 하였는데, 이때 천연(天淵)이 지휘하는 한 부대에서는 수인(守仁) 등 몇몇 승려들이 그들이 벤 적의 목 세 급을 어깨에 둘러매고 다녔다고 한다. 또 유정은 승군을 이끌고 관군을 도와 노원평(蘆原坪)과 우관동(牛貫洞) 수락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는데 이때 적의 목 47급을 벴다고 한다.

또한 평양을 탈환한 뒤에 평안도와 황해도의 일부 승군은 해산되었으나 다시 소집되어 군량미를 수송하거나 전투에 참여하였다. 또 《난중일기》(계사 2월 22일)에 보면, 경상도 웅천에서 삼혜(三惠)와 의능(義能)은 경상도의 여러 장수들과 함께 웅천 앞 바다 가까이 배를 대고 속임수로 상륙한 척하여 적이 갈팡질팡하는 틈을 타서 그곳에 모여 있던 적을 섬멸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선조실록》(26년조)에 의하면, 선조는 전쟁에 참여하여 적의 목을 벤 승려들에게 승과(僧科) 급제증(及第證)을 주도록 한다. 이에 따라 유정은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로 임명되고 당상관(堂上官, 정3품 이상 관리)이 되며, 왜병 44명의 목을 벤 법정 등, 그리고 10여 명을 죽인 천우(天祐)와 일순(一諄) 등에게도 선과 급제증을 주었다. 그것은 다음에라도 다시 이런 위난이 닥쳐오면 승려들에게 전쟁에 적극 참여하라는 의도 아래 포상적 차원에서 주어졌다.

《선조실록》(26년 임자조)의 “적의 목을 벤 승려들에게 선과 급제증을 주려는 것은 선교 양종을 다시 두려는 뜻이 아니라 적을 무찌르기 위한 장려책이다.”고 하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한편 이렇게 승려들에게 승과 급제증을 주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앞으로 승군을 보다 효과적으로 동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8도에 각각 2명씩 총섭(總攝), 모두 16총섭을 두게 된다. 한마디로 조선대에 승려는 이미 수행자가 아니라 군역을 담당하는 일반민의 한 부류로 전락한 것이다.

그런데 종교적으로 불교에 기울어 있는 사람들은 여기서 불교교단의 회생에 대한 한 가닥의 희망을 찾으려고 한다. 이것은 남의 귀중한 생명을 자신들의 조그마한 안위 내지 영달과 맞바꾸려는 탐욕에 지나지 않는다. 출가한 승려에게 세속적인 관직인 당상관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이 영광스러운 것이라면 차라리 법복을 벗고 나가야 한다. 최소한 신라시대 도옥처럼 말이다.29)29) 《삼국유사》(권47 취도전)에 따르면 도옥은 “나야말로 겉모양만 승려일 뿐이지 아직 이렇다 할 한 가지 선행도 한 일이 없으니 전쟁에 참여하여 몸을 나라에 바치는 것이 오히려 낫다.”하면서 이름도 취도(驟徒)라 고치고 스스로 군복으로 갈아입고 전쟁에 참여하여 큰 전과를 세우

4. 나오는 글

불교가 말하고 있는 불살생, 곧 평화는 모든 생명을 하나로 보는 연기론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 불교는 전쟁이 있는 곳에 평화를, 갈등과 원한이 있는 곳에 화해를, 증오가 있는 곳에 자비의 마음을 지니라고 가르친다. 증오 때문에 갈등하고 원한을 가지며, 갈등과 원한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다. 증오하는 사람의 눈에는 진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증오는 부메랑과 같아서 더 큰 증오로 되돌아와서, 마침내 자기 자신을 파멸시킨다. 증오심이 없다면 갈등과 원한도 없고, 폭력과 전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초기불교에서는 전쟁을 어느 경우에든 인정하지 않았다. 불교의 첫 번째 이상인 불살생, 곧 평화에 충실하였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코살라국 유리왕이 석가족을 멸망시키기 위해 쳐들어갔을 때 부처님은 목건련이 방어적 폭력을 사용하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그대로 멸망하도록 버려두었던 것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일부 경전에 이르면 부처님의 정신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되게 이른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대반열반경》 〈금강신품〉에서는 “정법을 수호하는 신도들은 무기를 가지고 비구를 옹호해야 한다. 설사 5계를 받아 지니더라도 대승불교도라 할 수 없지만, 정법을 수호하기 위해서 5계를 지키지 않더라도 대승불교도라고 한다.”라고 하여 정법을 수호하기 위해서 재가신도들이 무기를 들어도 괜찮다고 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무기를 들고 살생을 하는 것도 찬탄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그 뒤 중국과 한국불교에서 국가권력과 타협한 승가의 이론가들이 시대상황에 따라 재가신도들뿐만 아니라 승가교단에도 ‘호법을 위한 호국전쟁 참여’의 논리를 정당화 해주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신라시대에 국가 권력과 타협한 승가의 이론가들은 재가보살들에게 ‘호법을 위한 호국 전쟁 참여’를 용인하였다. 더 나아가 삼보정재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사찰재산을 지키기 위해 속인들로 하여금 사찰방위대를 조직하여 살생과 폭력적 전장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유사한 사례들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훨씬 빈번해졌다.

고려시대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승가가 왕권의 ‘정당한(?)’ 전쟁을 전적으로 인정해 줌으로써 ‘왕권 수호가 정법 수호’라는 논리로 국가가 승병(僧兵)을 모집하여 전쟁에 참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승려들이 직접적인 살생과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대몽 항쟁기에는 승려가 무장하고 전쟁에 참여하여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다.

조선시대에는 그 이전 시대와 달리 승려들은 건국 초부터 승군이라는 이름으로 일반민의 부담을 나누기 위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리고 승군은 승려 자체로만 조직되었다. 이것은 그 이전 시대 불교가 지은 업보라 아니할 수 없다.

승려가 전쟁에 참여하는 것(그것도 자발적으로 승군을 구성해서 악의 축을 제거한다는 논리로)은 이러한 현실적인 한계 때문에, 승단의 존립을 위해 방편으로 어쩔 수 없었다고 할지 모른다. 그리고 본심은 우국충정이고 애민이며, 더 나아가 어려움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전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 속내의 한켠에는 도첩증이나 승과 급제증을 받기 위해서 남의 목숨을 담보하였다는 구린내가 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유야 어떻든 그것은 진정한 출가사문으로서 불교의 제1 덕목인 불살생계, 더 나아가서 불망어계를 어겼다는 것은 면하기 어렵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적으로 불교가 전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하고 있지만, 그것은 아마도 불법의 포교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뜻이지, 승려들이 불살생계를 어기면서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불교가 세속화되면서 세속적인 권력과 결탁을 통해 불법을 보호한다는 명분에서 비롯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한국불교의 가장 큰 특징이 호국불교(護國佛敎), 아니 호권불교(護權佛敎)30)라는 오명을 얻었다. 또한 오늘날 한국불교계가 위정자들의 눈치를 보고, 불교 집안의 일을 세속적인 법에 의지해서 해결하려는 생각을 갖게 하며, 또한 승가 안에서 난무하는 승려들의 폭력도 이러한 한국불교의 어두운 면을 불식시키지 못한 숙업(宿業)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30) 물론 여기서 호국불교가 모두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호국불교가 호민불교(護民佛敎), 호법불교(護法佛敎)라면 그것은 어느 정도 용인될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일부 출가사문이 그것을 교묘히 이용해서 권력에 붙어서 자신의 사리사욕이나 문중을 지키기 위한 통로로 사용하는

 문을식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논저서로 〈가우다빠다의 불살생과 용수의 중도설〉 〈마야설의 불이일원론적 이해〉 《인도의 사상과 문화》, 역서로 《힌두교 입문》 《인도철학의 자아사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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