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선 동국대 강사

1.들어가며

조선시대 불교를 논의하기에 앞서 서두의 집필을 주저하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고충은 아닐 것이다. 조선은 불교의 왕조가 아니었다. 오히려 전 왕조가 보여준 불교계의 폐해에 대한 반동으로 주자학을 굳건히 뿌리내리게 하고 불교는 허무적멸의 이단으로 치부하였던 유교국가였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의 불교사상은 대개 여말불교의 학풍을 계승한 함허당과 권력의 비호를 받았던 보우당, 그리고 임란의 의승 사명당 등의 승려와, 반석반유의 삶을 산 김시습이나 박학다식한 김정희 등을 언급하는 것으로 600년을 갈무리해왔던 것이 학계의 현실이다.

그런데 새삼 조선시대의 불교, 그것도 유학자들의 불교를 거론하려는 필자는 조심스러움과 함께 설렘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의 승려는 신분상 천민층에 속하는 소외계층이었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체계적인 교육의 기회가 닿지 않았다.1) 1) 조선후기에 염불, 참선, 교학의 교육과정이 일반화되고, 총림에는 강원, 선원, 염불원이 갖추어졌으며, 이곳에서의 승려교육과정인 ‘이력(履歷)’이 확립되었다(정병삼, 〈진경시대의 불교의 진흥〉, 《간송문화》50, 한국민족미술연구소, 1996)고는 하나, 남아 있는 저작의 수준으로 보아 아직까지 승려교육이 확고히 자리 잡거나 보편화되지는 못한 듯하다.

또 대부분의 승려들이 선종에 몸담았던 까닭에 많은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승려들과 동시대에, 탄탄한 학문적 역량을 바탕으로 불교교리를 습득하고 향유했으며, 나아가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몇몇의 유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윤휴와 박세당이 주자의 학설에 저촉되는 경전해석으로 사문난적에 몰리고, 승니(僧尼)와 사찰에 대한 탄압이 여전히 지속되던 시기의 식자층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

본고에서는 먼저 이들이 등장하게 된 조선 후기의 사상적 분위기와 불교수용의 주된 배경이 되는 유·석교유의 모습을 짚어본 뒤, 그들의 불교수용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조선 후기의 사상적 흐름

당시 조선 지배질서의 축이었던 성리학은 역사적 변화에 신축성 있게 대응하지 못하고 편협한 가치관으로 변질되어 사회모순을 심화시키고 있었다. 그 결과 양명학과 실학적 학풍으로부터 도전을 받기에 이른 성리학의 일각에서는 학파의 정립과 이론의 분화, 인물성동이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쟁점의 제기가 시도된다. 이런 동향과 연관지어 볼 사항으로, 노론에 의한 대보단 설치 움직임이나 18세기를 전후해 활발해지기 시작한 김시습 포양사업을 들 수 있다.

얼핏 무관해 보이는 두 사건이지만, 명분을 내세운 왕실과 서인 정권이 호란의 패배를 통해 심각한 자기불안에 빠졌고 이를 해소하고 신분적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에서 나온 결과이다. 즉 서원과 사우, 가묘의 설치와 제향이 바로 자기모색이 현실화된 양상이며, 그 예로 대명의리를 표방하는 대보단을 설치하고 김시습 역시 제향의 대상으로 선택된다.

성리학계 내부의 움직임으로는 윤휴·박세당·이익 등에 의한 탈주자학적 경학 연구가 있으며, 보다 적극적인 움직임은 양명학의 연구로 나타났다. 이미 16세기 말 《전습록》이 읽혀졌으나 그때에는 성리학의 열기로 연구가 뚜렷하지 않았다. 그런데 성리학이 현실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일부학자들은 양명학의 의미에 심취하게 되었다.

즉 이수광·허균에서 비롯된 양명학은 17세기 초 장유·신흠·최명길에게서 확인되며, 17세기 후반에는 최명길의 손자 최석정을 비롯한 소론계 학자 간에 논의되었고, 18세기 초 정제두에 이르러 저간의 흐름들이 집결되어 하나의 체계를 갖춘 단계로 발전하였다. 이때 유입된 양명학에는 명나라 말의 공안파와 왕학좌파의 영향이 컸으며, 본고에서 언급한 유학자들도 이미 그들의 최신 저작까지 열람한 기록이 있다.

양명학과 함께 이단시되었던 불교는 조선왕조 성립 이후 억불숭유에 의해 지속적으로 통제되었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주로 왕실과 양반 부녀자층의 비호를 받아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였고, 조선 후기의 동요 속에서 일정하게 민심에 영합하며 교세를 신장시켰다. 17·8세기에는 조선정부가 승역의 중요성을 인식되었고, 임란에서 보인 승군의 활약과 전후 남·북한산성의 축조 등이 지배층에게 불교인식을 재고케 하였다. 한편 불교계 내부에서도 교계 정비에 나서게 되는데 먼저 승려들은 염불·참선·교학의 교육과정을 일반화시키고, 총림에는 강원·선원·염불원이 갖추어졌다.

이와 함께 17세기 중엽부터는 《화엄경》을 중심으로 한 강학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여 18세기에는 강학이 발달하면서 자연히 사기(私記) 형식의 주석서가 다수 편찬되었다. 또한 설봉(雪峯)·백암(栢菴)·월저(月渚) 등 당시의 고승들이 남긴 문집들이 조선 전기와는 구분되는 모습을 확인케 한다. 이러한 현상은 서산 이후 대부분의 승려들이 선(禪)을 표방하면서도 선종의 편벽성을 탈피하고자 교종을 아우르려고 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불교계의 학풍 진작은 다음에 살펴볼 사대부와의 교유에도 기폭제가 되었다. 결국 조선 후기는 주자학 내부의 동요와 불교계의 교풍 혁신이 진행되는 시기라는 사상사적 의미를 지닌다.

3. 유학자들의 불교수용 배경―유·석 교유

유학자들의 불교를 수용할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는 불서의 입수와 승려들과의 교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때의 불서 역시 집안의 장서로 전해오거나, 유학자들 간에 주고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체로 승려들을 통해 입수한 것이다. 따라서 유학자들의 불교수용은 승려들과 나누는 법담이나 서신왕래 등의 교유에 힘입은 바 크다. 이러한 유·석 교유는 고려조부터 시작된 일이나, 조선시대로 오면 승려들의 지위 격하와 지배층의 배척으로 인하여 완전히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다시 양란 이후 승군의 활약과 승역의 효용성으로 말미암아, 지배층은 승려들을 양역부과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불교계에서도 교풍 진작으로 제고된 승려의 역량은, 박학적 성향을 띤 유자층과의 교유를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사대부와 승려의 교유 실태에 대해서는 연구가 되지 않은 실정이다. 따라서 유학자들의 문집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 유·석 교유의 특징을 살펴보자.

첫 번째로 유·석 교유의 계기가 되는 시대적 여건과 배경에 대해 살펴보겠다. 17세기 이후 사대부들의 기행문학과 실경화 창작이 빈번했으며 이와 상승작용을 일으킨 산수유람의 유행으로 금강, 설악, 오대 등 관동의 산이나 관서, 영·호남의 명산절승을 유람하는 사대부들이 많아졌다. 또한 잦은 환국의 결과 사대부들의 유배와 퇴·은거가 이어졌고 그들의 은거지 주변 명승의 유람이나, 은거지 방문객들의 유람 역시 관례화되었다.

예를 들어 김창흡의 숙부 김수증은 실제로 평생을 곡운에 은거하였고 조부인 김상헌이나 부친 김수항도 관료로 한양에서 생활하면서도 어지러운 정치현실을 떠나 북한강 일대에서의 은거를 소망하는 언급들이 문집에 빈번하게 드러나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사대부들의 산수 유람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이들이 산수의 절경을 감상하기 위한 숙소나 모임의 장소로 활용한 곳이 바로 사찰이었다.

한편 명산대찰의 대부분은 왕실의 원당화되어 군왕의 위판이나 영정이 봉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대부들은 순수하게 명찰순례의 목적으로 사찰을 찾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사대부들의 사찰왕래는 끊이지 않았고 사찰공간에서 승려와의 접촉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두 번째로 사대부가 교유한 승려집단의 성격을 살펴보겠다. 승려 가운데에는 남여승, 탁발승, 잡역승이나 혹은 사판승으로 사찰의 살림에 종사하는 승려가 있는 반면, 선교(禪敎)수행에 전념하는 승려나 또는 불교를 넘어 유학은 물론 노장학에까지 관심이 미쳤던 승려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2)2) 송파각민은 무주 구천동으로 임성 대사를 찾아가 7년 동안 머물며 유불선 3교의 깊은 뜻을 강구하여 《해의(解疑)》라는 책을 썼다고 하고, 유명한 학승 연담유일 역시 유교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임하록》 하권 권1의 〈상한릉주필수장서(上韓綾州必壽長書)〉(《한국불교전서》 10권, 280면, 동국대출판부)에는 유학자들의 배불론에 대한 변론이 실려 있다. 이외에도 김원행의 문집에서 유일하게 발견되는 승려관련 문건인 아래의 시의 서문만 보아도 ‘절의 주지인 혜신과 함께 밤늦도록 이야기하는 중에 유교와 불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논의한 것’으로 되어있다.(觀性大師約來宿內院, 至夕果至, 同菴主慧信, 懸燈而語, 往往及儒佛同異, 臨別賦贈, 不知他日何處復相見道此否.) 이러한 유·석의 교유장면이 《삼연집》이나 《담헌집》에 공통되게 재연되고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지식 있는 승려와 사대부 간에는 종종 유·불관계의 담론이 벌어졌던 것을 짐작할수 있다.(<미호집> 권 1,24면.<한국문집총간>참조)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로는,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에 이미 승가의 이력과정이 확립되어 있었던 점과 인쇄술의 발달로 활자본 출판이 널리 보급되어 불교서적들이 활발하게 편찬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조선조 제지의 과반을 승려층이 담당했다는 것과 당시의 정황을 미루어보아 당시 사찰에는 강원이나 선원의 기본 교재가 되는 불교서적들이 비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세 번째로 승려와 교유한 사대부들의 성향에 대해 살펴보겠다. 정국의 혼란으로 사대부들의 문학작품에는 귀거래를 노래하는 경향이 두드러졌고 실제 환로에서 물러나거나 관직을 거부한 이들은 개인의 기질과 여건에 따라 성리학에의 경도나 박학에의 탐닉 등 학문을 추구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 중 박학을 지향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타 학문의 영역을 인정하는 개방적 의식의 편에 섰기 때문에, 이들이 백과사전식 저작을 남기거나 노장, 불교 등 다방면에 걸쳐 관심을 보인 학자층과 교집합을 이루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리학에 경도된 학자들은 성리관계 서적에 몰두하거나 저술에 공을 들였기 때문에, 타학문에 심취한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숙종 후반 노론 내부의 인물성동이 논쟁에 직접 가담하거나 연루된 이들은 논쟁의 논거확보를 위해 고심하여 자신의 주장과 다른 학설을 이단으로 몰아붙일 뿐 아니라 타학문을 이단시하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불교 관련 언급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권상하(權尙夏), 이간(李柬), 이재(李裁), 한원진(韓元震)에서 김원행(金元行)에 이르는 이른바 호락논쟁 전면에 부각되는 이들에게는 공통된 현상인 것이다. 이들 문집에 등장하는 사찰은 다만 모임의 장소나 경유지로서의 원(院), 또는 유적지로서의 의미만을 지니고 있어 승려와 유연한 관계를 가졌던 사대부들의 그것과는 구분된다.

앞서 서술한 항목들을 종합해 유·석의 교유양상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사상적 깊이가 있는 고승들이 존재했고 사대부들은 이들과의 만남을 기대했으며 그러한 만남이 이루어지면 불교사상의 담론이나 유·불에 관련된 사상적 담론이 이뤄졌다. 비단 학문적 담론 외에도 서로 시를 주고받았고, 사대부들은 승려의 요청3) 혹은 자발적으로 사찰의 제문, 기문 그리고 승려들을 위한 비문, 서발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승려들은 정의적인 징표나 사대부의 요구에 응해서 불교서적을 선사하는 것이 의례화되었던 것 같다.4) 3) 정관재 이단상의 문집에서 찾아볼 수 있는 승려와 연관된 기록은, 유일하게 화엄종장 풍담의심(楓潭義諶)의 비문을 요청하는 승려와의 일화에 남아있는데 이 일화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 내용은, 풍담의 제자들이 찾아와 휴정과 편양의 비문을 각각 정관재의 조부와 선부가 써 준 사실을 들어, 그들의 직계인 정관재가 휴정의 법손이 되는 풍담의 비문을 써야 하는 당위성을 들어 간곡히 부탁하였고, 이러한 부탁에 문사를 멀리하는 정관재는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지어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자료는 상당한 문도를 형성한 고승의 사후에, 당대 문망이 있거나 면식이 있는 사대부들에게 비명 혹은 문집 서·발을 부탁하는 것이 관례화되었음을 확인하게 해 준다. “先生專意硏究, 罕作應副文字, 金剛僧一如三큷, 來乞其師義諶號楓潭者碑文. 盖義諶之師曰彦機, 彦機之師曰休靜, 兩釋碑文皆月沙白洲公所撰, 故欲受先生文, 以完世好. 先生未能堅辭, 乃引韓文公馬少監而爲說, 文成付一如輩. 兩僧擎置其文于堂上첆案, 自庭下合掌再拜, 先生팼然曰, “僧輩於師門, 乃能致敬如此”云.”(《정관재집》, 〈속집〉 권9, 482면, 《한국문집총간》 130권 참조).
4) 사대부들이 불교서적을 접하게 되는 것은 대대로 가장된 것도 있겠으나 대개는 승려로부터 직접 받았으며 이에 대해 사례하는 내용이 <삼연집><담헌집><서당사재><동계집>에서 산견된다.

요컨대 학문적 역량이 고양된 승려들과의 교유와 개방적 학문태도를 바탕으로 하여, 유학자들은 보다 심도 있게 불교사상에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숙종∼영조대 유학자들의 불교수용

먼저 불교계 소설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1637∼1692)은 주자가 ‘《원각경》의 언설이 《열자》와 유사한 것을 보고 불경은 《장자》와 《열자》에서 나왔다’고 간주한 데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였다.5) 5) 《서포집》, 《서포만필》(한국문집총간148).

즉 노·장과 불가는 모두 정신을 중시하고 물질을 버리기 때문에 입언한 뜻의 바탕이 유사하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인도의 불경을 번역하면서 대의가 같은 것을 보고 《열자》에서 말한 것과 비슷하게 말하게 되었고 또 그 문법을 모방해 썼던 것이지, 불교사상이 애초부터 《열자》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변석하고 있다. 또한 도곡 이의현(李宜顯, 1669∼1745)은 《도협총설(陶峽叢說)》에서 《노자》에 비견되는 천하의 문장으로 《능엄경》을 거론하고 있다.6) 6) 《도곡집》, 《도협총설》17則(한국문집총간181).

김춘택(金春澤, 1670∼1717) 역시, 이단에 포용적인 사대부였다. 그는 부친 김만중의 《서포만필》이 불가에 근사하다고 비난받자, 정자와 주자 그리고 주자의 초년과 만년의 변화를 예로 들면서 객체를 인식하는 주체의 시각에는 차이가 생길 수 있으며, 그것은 학문적 경향을 공유하는 사제간에도 그럴 수 있고 주체의 역량이 성장함에 따라서도 차이가 날 수 있다는 말로 옹호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의 사람들이 선입견에 의해 무조건 불가를 배척하는 편협한 작태를 비판하였으며 천박한 식견을 그 이유로 지적하였다. 그리고 주자의 불가에 대한 평을 예시하면서 주장의 타당성을 확보하였다.7)7) 《북헌집》권16 , 223면 〈수해록(囚海錄)〉.

〈제자통선서(諸子通選序)〉8)에서는 이단의 학설이라 할지라도 유가의 설과 비슷하거나, 혹은 유가의 설에 위배된다고 할지라도 구도의 측면에서 잘 이용하였다면, 오히려 그러한 글에서 도를 체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단에 유연했던 김춘택은 또한 실경을 강조하고 천기를 말하는 당시의 사상적 분위기와 맥을 같이하는 인물이다.8) 《북헌집》권17 , 229면 〈취산록(鷲山錄)〉.

이 밖에 당시 불교를 수용한 유학자들을 간략히 언급해 보면, 김창흡(金昌翕, 1653∼1722)에게는 당쟁으로 인한 가화(家禍)와 죽음을 목격하면서 몰입하게 된 공관적(空觀的) 세계인식과 그것에 바탕을 두고 나아간 불이(不二)사상에 대한 깨달음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단지 공관적 세계에 함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현실세계와의 적극적인 화해 국면을 보이고 있다.

최창대(崔昌大, 1669∼1720)는 유학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유불회통의 면모를 보이는데, 여기에는 숙종 말 노론세력에 의해 열세에 몰렸던 소론 수뇌부가 가진 정치적 곤란과 이로 인한 심적 고뇌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탈속에의 갈망이 엿보인다. 이하곤(李夏坤, 1677∼1724)에게서는 자신의 습기(習氣)에 대한 참회와 불교사상 수용에 열의가 보이며, 윤회설에 바탕한 불교적 생사관이 산견된다.

다음은 불교수용의 대표적인 유학자 이덕수와 조귀명을 집중 조명해 보는 것으로 4장을 정리하고자 한다. 이덕수(李德壽, 1673∼1744)9)는 영조대에 수년간 대제학으로서 문형을 잡으면서 나라의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자신의 문집 《서당사재(西堂私載)》 12권을 남긴 학자이다. 음직으로 지내다 40대의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다독과 박학으로 영조의 곁에서 탕평론과 경세론을 폈던 온건한 문신이었다.9) 이덕수의 자는 인로(仁老) 호는 벽계(蘗溪) 또는 서당(西堂)이며 참판 이징명(李徵明)의 아들이다. 1696년(숙종22) 진사가 되고 대제학을 지냈으며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규상의 《병세재언록》 〈문원록〉에 등기되어 있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이 이단시되던 시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연과 소대의 자리에서 영조에게 불교의 장점과 선학(禪學)의 깊이를 서슴지 않고 진설하였다. “연소했을 때는 신선술을 좋아하였고 중년에 불어(佛語)를 가까이 했으며 말년에는 사서와 이경(二經)으로 돌아와 여러 번 주독했고 노년에 이르러 《역경》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60대에 이미 만 권의 서적을 읽었다”는 방대한 독서량과 학불(學佛)에 대한 자술은 뒷장에서 살펴볼 그의 학불적 면모를 입증하는 사료이다.

즉 그는 이해하지 못한 불경이나 선어록에 있어서 부단한 회의와 고심을 거쳐 알아내는 진지한 학불태도를 보인다. 사관은 “이덕수가 귓병을 앓아 총명이 내심에 전일했기 때문에 널리 관통하여 제가의 책을 두루 읽었고, 그 가운데 노불에 조예가 깊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사관은 이덕수의 친불교적인 면을 거부감 없이 인정하고 있다. 또한 “이록에 담박하였고 고인의 풍도가 있었으며 말은 질박하여 임금도 흔연히 예우했다”는 서술에서 이덕수에 대한 대외적인 평가를 알 수 있다.

영조 16년(1741) 이덕수는 물의의 소지가 있는 문제적 발언을 하고 있다. 즉 《주자어류》를 진강하는 자리에서 영조는 정자의 문하생들이 선학에 유입된 것을 이상히 여겨 묻게 된다. 이덕수는 ‘불학의 영롱하고 투철함을 성대하게 이야기한’ 뒤 “정자 문하의 고명한 선비들은 간묘하고 조예가 깊은 논의를 즐겨하므로 선학에 물든 사람이 있었고 자신도 선학에 물들었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대한 영조의 대답과 사관의 평은 다음과 같다.

  • “이단의 폐해는 주색보다 더 심한 것이다. 이런 것으로 유자들을 속이는 경우가 많다.”하였다. 이덕수는 평소 불학을 좋아하였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말이 이단에 관계됨을 깨닫지 못하였다. (중략) 그의 형모가 시세에 맞지 않았으나, 말은 질박하였다. 임금이 하순할 것이 있으면 번번이 사관에게 써서 보이게 하는 등 권대가 자못 두터웠으나, 이덕수가 성현의 뜻으로 임금의 마음을 열어드리지 못한 채 불로를 이야기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싫어하지 않고 친절히 설명하였으므로, 식자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영조 16년 11월 21일, 무자)

주자학 논의의 심화가 진행되었던 당시에 이러한 발언을 한 것은 이덕수의 나이 67세 때 일이다. 또한 그는 위의 자료에서 ‘중년에 불어(佛語)를 좋아했다’고 했지만, 불교에 대한 경도는 말년에까지 계속 이어졌음을 알게 한다. 이덕수의 문제적 답변에 대해 영조가 오히려 ‘이단의 폐해가 주색보다 심하다’는 경계를 하고 있다.

성리서를 강하는 자리에서 동지경연사가 남송의 학풍을 비판하고 선학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는,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사관의 말을 통해 이덕수가 ‘평소 불학을 좋아하고’, ‘불노에 관한 이야기를 친절히 설명했다’는 것과 그것을 단점으로 지적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덕수는 《능엄경》의 주석서로 정평이 나있는 계환의 주로 만족하지 않고 5가의 주를 참고 했을 정도로 《능엄경》에 천착했던 것이다. 비단 《능엄경》뿐 아니라 《금강경》 《대승기신론》 《전등록》 등 각종 불교서적을 외울 정도였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다음의 시는 시서(詩序)에 보이듯 서울로 자신을 찾아온 연초상인에게 평소 의문을 가져왔던 육조혜능의 법문을 묻고 그것이 해결되자 기뻐하며 지은 것이다.

  • 연초상인(演初上人)은 영남 통도사에 머물었는데 이번 가을, 일 때문에 경사에 이르러 성 남쪽 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용모가 온화하고 언변이 있어 얻은 것이 있는 듯하였다. 내가 옛 조사의 언구를 대략 두루 섭렵하였는데 오직 육조대사가 말한 ‘사대(四大)가 모이고 흩어짐은 유생(有生)이 의탁하는 바요, 정족과 신족이 묘용을 낳고 이것이 곧 진아(眞我)’라는 말을, 평소 도가의 보형보신의 방술이지 본래무물의 취지에 어긋나는 듯하다고 의심하였다.

    지금 이에 대해 스님께 물어보니 스님이 웃으며 말하기를 “진아는 허깨비와 같은 육신을 떠나지 않는다. 지금 선비께서 환(幻)을 떠나 진(眞)을 구하고자 하니 또한 거리가 멀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이 떨어지자 깨달음이 있었다. 비록 스님이 한 말이 과연 조계의 본지를 투득했는지 온전히 알지 못하겠지만 그가 선의 이치에 깊이 계합한 것을 사랑하여 이별에 임해 시 한 수를 드리다.10) 10) 《서당사재》 권2, 162면.

    妙用寧資聚沫身 묘용이 어찌 거품과 같은 몸에 의지하는지
    曹溪言句惹疑頻 조계의 언구가 자주 의심을 일으켰네
    吾師聽說??笑 스님이 이 내 말을 듣고서 껄껄 웃었으니
    幻外無眞幻卽眞 허깨비 밖에는 진여가 없으니 허깨비가 바로 진여로다

‘지·수·화·풍이 인과 연에 따라 모였다가 흩어지는 연기적인 모습은 윤회에 의지해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고, 정족(精足)과 신족(神足)의 묘용을 낳음이 곧 진아’라고 한 육조의 언구가 분별이라고 의심하였던 것이다. 이덕수의 의문은 윤회하는 육체와 신통묘용을 이분해서 생각하는 것은 육조가 천명한 본래무물의 취지와 괴리가 있고 오히려 형체와 정신의 양생을 도모하는 도가의 논리에 가깝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연초상인은 다음과 같은 여유 있는 대답을 해주게 된다.

참된 불성은 허깨비와 같은 육신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즉 사대는 영원히 환일뿐이어서 진과 양립할 수 없고 따라서 진이 다른 곳에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연초상인의 말을 들은 이덕수는 의심을 씻고 조계선의 본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와 동일한 고민의 흔적이 〈파조록〉에 보인다.11) 11) 《서당선생문집》, 〈파조록〉 하권, 801면.

즉 육조가 《반야경후서》에서 한 말이 도가에서 수양하는 뜻과 같다고 의심하여 여러 노숙들에게 물어보았으나 모두 대답하지 못했는데, 최근에야 그 뜻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른바 ‘원적할 때의 진아’란 말은, 반드시 혈기와 정신을 빌린 뒤에야 바야흐로 그 묘용을 움직여 세간법에 응수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일 뿐이며 진아가 이것을 얻어야만 ‘진아’가 된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고, “비록 사대를 의탁하여 형체를 가지고 있지만 모두 내가 빌린 것이다”라고 한 말도 망령되다고 생각했는데 시초에서 벗어나지 않는 말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덕수가 깨달았다고 한 ‘조계의 본지’는 분별망상의 타파이다. 환과 진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이분된 사고는 우주에 대한 분별을 뜻하고 그러한 분별은 수많은 망상의 가지를 분기시킬 뿐이다. 정견과 돈오를 방해하는 분별의 타파가 바로 선의 이치이며, 이 시 마지막 구의 ‘환즉진(幻卽眞)’의 깨달음이야말로 조계선의 제1명제인 셈이다. 이덕수는 자술한 것처럼 조사들의 어록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의심나는 구절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 철저함에서 당시의 일반적인 유자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고 하겠다.

다음은 조귀명(趙龜命, 1693∼1737)이 태우(泰宇) 선사에게 보내는 서간으로 불교사상의 본말이 전도된 것, 즉 권교가 실교를 가리고 혼재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아울러 출가자가 지니는 계율의 허상까지 언급하고 있다.

  • 평생 총림에 참례하면서 만난 선지식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자긍하는 방과 할도, 저에겐 성에 차지 않을 뿐이었습니다. 지금 반복해서 일깨워주시고 곧장 본근(本根)의 전체를 지적해 주시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천성이 성글고 머뭇거려 알아서 깨달은 바가 없었는데 영산의 돈교에 나아가니 이와 같이 삼가 감응할 따름입니다. 공경하며 찬탄해마지 않습니다.

    다만 구구하게 둔하고 막혀서 오히려 전날의 미혹된 구름이 아직 가시지 않고 의심덩어리가 다시 맺혀 있으니 부득불 속마음을 털어내 드려야 대지(大旨)를 깨우쳐 주실 것 같군요. (중략) 대개 세 가지 의심이 있으니 그 첫 번째는 성을 뛰어나와 출가하고 삭발하며 승복을 입은 것을 불가에서는 표지로 삼아 망령된 습기를 제거합니다. 불가에서 처자를 기르지 않는 것은 처자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처자로 인한 속박이 그의 성품을 훼손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이요, 술 마시고 고기 먹지 않는 것은 그것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술과 고기의 맛 때문에 그 욕망을 쫓는 것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다만 그 성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처자를 기르는 법에 족하고, 그 욕망을 쫓지 않으면서도 술과 고기를 먹는 법에 족하다면, 어찌 그 지엽을 근심하여 뿌리를 제거해 버리고 그 말단에 화가 나서 그 근원을 끊어버리는 데 이르겠습니까?12)12) 《동계집》 권8, 170면 〈答泰宇禪師書〉.

 

위의 편지 서두는 조귀명의 불교 습득의 이력과 구법의 열정을 가늠할 수 있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평생 총림에 참례하면서 만난 선지식이 한 둘이 아니었다는’ 표현도 특이하거니와 만났던 선지식들이 방과 할을 사용했다는 데서 주로 선종계열의 승려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선사들은 조귀명의 가려움증, 의심나는 것들을 제대로 해결해 주지 못했던 것이다.

이 글은 조귀명이 일생을 통해 여러 사찰을 참방하고 여러 고승들과 담론했던 사실과 함께 그가 알고자 희구했던 부분이 깨달음의 문제였음을 짐작케 한다. 태우의 도움으로 영산의 돈교를 접하게 되어 어느 정도의 도움은 받았으나 예전의 의심들이 가시지 않는다고 하면서 세 가지 의심을 제기하고 있다. 다른 서간과 논제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연속해서 왕복했던 편지로 보인다.

위 편지의 첫 번째 의심은 앞의 편지에서 말한 불교사상의 최종 목표, 즉 ‘깨달음’이 중요한 것이지 반드시 출가하여 출가승의 계율을 지킬 필요가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는 승가집단의 존망에 대한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불성을 훼손하지 않고 욕망에 따르지 않는 일인데 그렇게 될까를 두려워하여 미리부터 처자와 술, 고기를 끊는 것은 지엽을 근심하여 뿌리까지 제거해 버리는 격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그럴 듯하며 실제로 《삼국유사》의 광덕·엄장설화나 원효의 막행막식, 방거사나 유마거사 등 재가불자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출가승의 계율을 부정하는 것은 승가집단의 존속을 부정하고 위협하는 것이다.

계율은 외물과 ‘심(心)’의 팽팽하면서 적정한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처방이 되기 때문에 계율까지 부정하고 오직 마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논조는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것으로 주장했다기보다 조귀명의 유심론적 성향에서 비롯된 비난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말의 전도와 계율이 갖는 허식을 비판하고, 불교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여 무게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 지를 밝히려 했다는 점에서 불교사상의 본질에 접근했다고 볼 수 있다. 조귀명은 자아의 각성과 자심(自心)에 대한 확신에서 우러나온 유심론적 불교관을 그의 글들에 거침없이 피력하고 있다.

5. 정조∼순조대 유학자들의 불교수용

사상계는 18세기에 이르면 더욱 다양한 분야로 그 관심의 폭을 넓히게 된다. 18세기 중엽, 청나라가 건륭성세를 구가하게 되자 조선도 관념화된 대명의리론과 비현실적인 북벌론을 새로운 논리로 바꾸어 인식하려고 하였다. 홍대용은 ‘화(華)’와 ‘이(夷)’를 대등한 주체로 인식하면서 조선문화의 개성을 인식하였고, 박제가 등은 발달한 청대의 문물과 조선의 문화를 비교하면서 북학론을 전개했다.

기존 사상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사상의 유입에 따라 사상계는 음성적으로 행해왔던 불학, 서학, 양명학 등의 사상연구를 가시화하기에 이른다. 예컨대 홍대용은 이미 젊은 시절 《능엄경》과 《원각경》 등 여러 경을 읽고 불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불서는 사람의 마음을 논함에 있어 그 말 만듦이 기이하고 놀라워 반성하고 깨닫는데 용이하다.”13)라고 그 효용성을 인정하였고 “이단의 학문이 비록 여러 가지 있으나 마음을 맑게 하고 세상을 구제하여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데는 한 가지인 것이니 나에게 있어서는 나를 좋아하는 바를 따르고 저들에게 있어서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허여한다면 무엇이 손상되겠습니까? 13) 《담헌서》 〈내집〉 권2, ‘桂坊日記’, 을미년 8월 26일.

가지런히 하기 어려운 것은 물(物)이요 그중에서도 마음이 가장 심하니 사람마다 각각 좋아하여 숭상하는 것이 따로 있거늘 뉘라서 능히 이것을 통일하겠습니까? 그런 즉 각각 그 선을 닦고 각각 그 능한 장점을 다하여 사욕을 버리고 선량하게 하기를 목적으로 한다면 대동(大同)하는 데 있어서 무엇이 해롭겠습니까?14)”라는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인식을 갖는 홍대용은 시강원에서 세손 시절의 정조와 함께, 주자를 비롯한 고명한 사람들이 불도의 영향을 받은 것에 대해 토론할 정도로, 관심을 표시하고 불서를 존봉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였다.15)14) 《담헌서》 〈외집〉 권1.

정조 역시 도교나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면서도 유교와 함께 이들이 ‘화속여세(化俗勵世)’하는 큰 공을 인정하였고,16) 김근순(金近淳)이 〈우산장(牛山章)〉을 토론하면서 “자신은 불가와 양명의 시를 좋아하는데 이 시들의 뜻이 맹자가 말한 야기(夜氣)의 뜻을 잘 담고 있으므로 이단이라 해서 배척하고 양명이라고 해서 달갑게 여기지 않을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의견을 피력하자 정조는 문장가를 위해 필요하다고 옹호해 주고 있다. 15) 《담헌서》 〈내집〉 권2, ‘계방일기’, 을미년 8월 26일.16) 《홍재전서》 권163, 〈일득록〉 ‘문장’.

또한 《부모은중경》의 내용이 너무나도 적절하고 중생을 인도하여 극락으로 가게 함이 유학의 보본독륜(報本督倫)의 뜻보다 뛰어나다고 높이 평가하며, 《부모은중경》을 널리 나누어 주라는 데서 그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이밖에도 용주사를 창건하고 용주사의 기복게를 음각으로 인쇄하여 작첩한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 총 31첩이 1795년 간행되었다.17) 17) 《홍재전서》 권55, 〈잡저〉.

또한 부처의 은혜에 감사하는 석왕사의 비문18)을 짓는 등 호불적 성향을 보이면서 불경에 대한 상당한 식견을 과시하고 있다. 18) 《홍재전서》 권15, 〈안변설봉산석왕사비〉.

또한 용주사 상량문은 채제공19)에게, 권선문과 주련은 이덕무에게 짓게 하였던 것이다. 한편 실학의 대성자인 정약용도 강진에 유배되어 《만덕사지》 《대둔사지》 《만일암지》 《대동선교고》등의 불교사 관계의 저술을 남기게 된다. 정약용에게 영향을 주었던 승려로는 연담유일, 아암혜장 등이 있다.19) 채제공은 어린시절부터 승려들의 비문을 지어주었다. 예컨대 해월대사, 봉암대사, 문곡대사, 상월대사, 설파대사 등의 부도비명을 썼다.

연담유일은 대둔사 12종사의 한 사람으로 정조대 화엄경 강경의 대표적 인물로 유명하며, 정약용이 연담에게 보낸 시 〈지리산승가시유일(智異山僧歌示有一)〉과 〈제연담시(題蓮潭詩)〉나 만덕사 주지 혜장에게 보내는 10여 수의 시에서 승려와의 깊은 관계를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19세기로 들어오면서 보다 심화된다. 유자들은 불교사상에 대해 보다 우호적이고 관대한 태도를 보이게 되고 유불 상호간의 회통적 면모가 빈번히 발견된다.

연담의 법손 가운데 초의의순(1786∼1866)은 정약용에게서 유학을 배우고 신위, 홍석주, 김정희 등 당대의 대표적 지성과 교유를 가졌다. 그러한 영향으로 작품에도 유가적인 것과 불가적인 것이 공존하였고 사상의 자유와 폭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동다송〉과 〈다신전〉을 저작하였고, 백파긍선(1767∼1852)이 전통적인 입장에서의 선을 해석한 《선문수경》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면서 순조 불교계에 선논쟁이 활발히 일어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김정희는 〈제천송금강경후(題川頌金剛經後)〉, 〈제불설사십이장경후(題佛說四十二章經後)〉, 〈서시백파(書示白坡)〉, 〈정게증초의사(靜偈贈艸衣師)〉 등 허다한 불교관계 작품을 남기고 있고, 초의와는 40년 지기로 〈여초의(與艸衣)〉 38통의 편지가 그들의 돈독한 관계를 입증해 준다. 김정희는 스스로 사경공덕을 쌓고 화엄사를 중수하였으며, 만년에 봉은사에 머물면서 발우공양과 자화(刺火) 참회를 행하는 등 신행생활을 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위의 편지 서두는 조귀명의 불교 습득의 이력과 구법의 열정을 가늠할 수 있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평생 총림에 참례하면서 만난 선지식이 한 둘이 아니었다는’ 표현도 특이하거니와 만났던 선지식들이 방과 할을 사용했다는 데서 주로 선종계열의 승려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선사들은 조귀명의 가려움증, 의심나는 것들을 제대로 해결해 주지 못했던 것이다.

이 글은 조귀명이 일생을 통해 여러 사찰을 참방하고 여러 고승들과 담론했던 사실과 함께 그가 알고자 희구했던 부분이 깨달음의 문제였음을 짐작케 한다. 태우의 도움으로 영산의 돈교를 접하게 되어 어느 정도의 도움은 받았으나 예전의 의심들이 가시지 않는다고 하면서 세 가지 의심을 제기하고 있다. 다른 서간과 논제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연속해서 왕복했던 편지로 보인다.

위 편지의 첫 번째 의심은 앞의 편지에서 말한 불교사상의 최종 목표, 즉 ‘깨달음’이 중요한 것이지 반드시 출가하여 출가승의 계율을 지킬 필요가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는 승가집단의 존망에 대한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불성을 훼손하지 않고 욕망에 따르지 않는 일인데 그렇게 될까를 두려워하여 미리부터 처자와 술, 고기를 끊는 것은 지엽을 근심하여 뿌리까지 제거해 버리는 격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그럴 듯하며 실제로 《삼국유사》의 광덕·엄장설화나 원효의 막행막식, 방거사나 유마거사 등 재가불자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출가승의 계율을 부정하는 것은 승가집단의 존속을 부정하고 위협하는 것이다. 계율은 외물과 ‘심(心)’의 팽팽하면서 적정한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처방이 되기 때문에 계율까지 부정하고 오직 마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논조는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것으로 주장했다기보다 조귀명의 유심론적 성향에서 비롯된 비난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말의 전도와 계율이 갖는 허식을 비판하고, 불교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여 무게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 지를 밝히려 했다는 점에서 불교사상의 본질에 접근했다고 볼 수 있다. 조귀명은 자아의 각성과 자심(自心)에 대한 확신에서 우러나온 유심론적 불교관을 그의 글들에 거침없이 피력하고 있다.

6. 나가며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조선 후기 사상계에서 유학자들의 불교수용은 전대에 비해 파격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는 이전 시기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승려와 사대부들의 교유를 계승하였던 것이면서도 당시 사상계의 다양한 움직임의 영향으로 보다 적극적인 모습을 띤 것이다.

이들이 흡수한 불교사상은 유학자 자신의 내적 욕구에 촉발되어 접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상적 깊이에 있어서도 진지한 울림을 가지고 있다. 이는 민족의 사상사를 면면히 이어온 불교사상을 통해 주자학이 지닌 모순을 극복하고 소위 근대적 자아관 및 세계관에 접근하려고 했던 하나의 몸짓으로서, 자아각성 내지 개성의 자각이 보이기 시작하는 개화기의 선구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

유호선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학부 및 대학원 박사. 민족문화추진회 연수부와 중앙승가대학교 부설 불전국역연수원 졸업. 현재 고려대·동국대 강사이며, 동국대학교 BK21불교문화사상사교육연구단 post-doc 연구원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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