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비

1. 머리말

1999년 발표된 매트릭스 1편은 정보화 사회로 중심이동을 하고 있는 우리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과학 테크놀로지의 영향력이 급증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삶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며, 나는 누구인가’1)라는 질문을 던져줬기 때문이다. 1)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이것은 선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화두이기도 하다. 그 중 하나가 바로 “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이라는 화두이다. 옛날 위산영우 문하에 향엄지한이라는 학인이 있었다. 하루는 위산 화상이 향엄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평소 경전을 읽었거나 누구에게 들어서 아는 지식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다. 그런 것이라면 젊은 자네가 나보다 더 나을 것이다.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자네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기 이전, 아직 동서도 가리지 못하던 때의 너의 모습은 어떠했

매트릭스 1편에서 모피어스와 트리니티는 ‘매트릭스는 통제다’ ‘매트릭스는 시스템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허구의 가상현실이며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허구라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시스템 속에 사로잡혀 있다는 매트릭스 시리즈의 전언은, ‘그럼 나는 누구인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우리들 스스로 던지게 함으로써 철학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매트릭스는 이렇게 관객에게 인간 실존과 자아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하여 구원을 모색해 나간다. 이것이 이 시리즈2)를 철학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출발점이 된다. 즉 무수히 많은 주제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이 영화를 통해 어떤 논변이 가능하게끔 서로 모순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그토록 많은 논의를 낳았던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영화는 ‘열린 텍스트’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매트릭스 관련 비평들은 주로 기독교적 의미를 파헤치는 데에 유독 많은 부분을 할애해왔다. 2) 〈매트릭스(The Matrix, 1999)〉, 〈매트릭스 2 : 리로디드(The Matrix : Reloaded , 2003)〉, 〈매트릭스 3 : 레볼루션(The Matrix : evolutions, 2003)〉를 합쳐 보통 “the Matrix Trilogy”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1편과 2편 사이에 출시되었던 외전격인 〈애니매트릭스(Animatrix, 2003)〉까지를 포함하여 매트릭스 시리즈라고 부르기로 한

매트릭스와 불교와의 관련성에 대하여 지적하는 글들은 그 수가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매트릭스 시리즈에 끊임없이 나오는 너무나 명백한 불교적 상징들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교가 매트릭스에 끼친 영향력을 겨우 ‘일체유심조’ 한 구절 정도로만 축소하여 생각하는 점에 대해서는 안타까움마저 느껴진다. 따라서 이 글의 첫 번째 목표는 매트릭스 시리즈 내에 나타나는 불교적 상징들을 찾아보고, 그것이 영화 내에 어떠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에 두었다.

서구의 전통적인 세계관이 갖는 한계를 타파하고 방향성을 모색하는 방법으로 이 영화가 불교적인 사상을 차용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는 그것이 비불교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대중 영화인 동시에 지극히 불교적인 세계관을 함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므로 매트릭스에 나타난 이러한 상징성을 바탕으로 서구세계가 갖는 불교적 관심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가를 알아내는 것에 이 글의 두 번째 목적이 있다.

그들이 정확히 영화의 어느 부분에서 ‘쿨하다’라고 느낄만한 경험을 하는지, 어느 부분에서 가려움을 긁어주는 듯한 통쾌함을 느끼는지, 그리고 그들이 이 새로운 사고방식의 어느 부분에서 매력을 느끼는지 그 포인트를 되짚어 보는 작업은 앞으로의 불교포교에도 적잖은 도움을 줄 것이다. 이 작업의 일환으로 우리는 본문의 마지막 장에서 특별히 ‘매트릭스가 지닌 불교적 은유의 한계’를 살펴볼 것이다.

2. There is no spoon : 매트릭스에서 차용한 불교적 사상들

1999년 인터뷰에서 시나리오를 쓴 워쇼스키 형제는 불교가 그들의 사상과 시나리오에 큰 영향을 끼쳤느냐는 질문을 받고 “예스!”라고 대답했다. “불교와 수학, 특히 양자물리학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고 그 둘이 접합하는 지점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둘 다 오래 전부터 불교에 매혹되었습니다.” 많은 매트릭스 팬이 이 점을 놓치는 것은 안타깝다.3)3) “‘매트릭스 광’ 현각 스님 〈매트릭스-리로디드〉 관람기”, 〈한겨레신문〉

매트릭스란 무엇인가? 그것은 네오가 살고 있는 20세기말의 세계이며, 이미 멸망한 세계를 대체하는 가상현실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상현실 세계는 주인공이 일상적으로 ‘이것이 현실’이라고 믿게끔 만드는 사물로부터의 정보를 교란하여 자신이 ‘그 체제(매트릭스) 안에 사로잡혀 있음’을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모피어스: 정말 뭔지 알고 싶나? 매트릭스는 사방에 있네. 우리를 전부 둘러싸고 있지. 심지어 지금 이 방안에서도. 창문을 통해서나 TV에서도 볼 수 있지. 일하러 갈 때나 교회 갈 때, 세금을 내러 갈 때도 느낄 수가 있어. 매트릭스는 바로 진실을 볼 수 없도록 우리 눈을 가려온 세계라네.

네오: 무슨 진실 말입니까?

모피어스: 네가 노예라는 진실이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보거나 감촉을 느낄 수도 없는 노예 상태로 정신만을 위한 감옥에서 태어났단 말일세.

매트릭스는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 눈을 가린다는 점에서 불교의 삼사라(Sam?a칞a, 윤회)와 같다. 불교와 우파니샤드가 태동되었던 고대 인도에서는,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영원히 재생과 소멸을 반복한다는 윤회설이 세계관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생명을 가진 뭇 존재들은 자신이 욕망해서 지은 현재의 업(業)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결과를 받게 되고, 그 과정 속에서 고통을 느끼면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붓다는 인간의 생존자체가 고통이 되는 것은 마음의 깊은 곳에 갈애(tan?a: 渴愛)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은 모든 욕망의 근저를 이루는 인간의 불만을 조성해가는 욕망이다. 이것을 ‘갈애’라고 한 것은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을 때의 강렬한 욕구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갈애’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계속해서 욕망에 기반을 둔 행동을 하게 되고, 결과(業)를 초래한다. 따라서 이것을 ‘재생의 원인이 되는 것’이라 하고, ‘기쁨과 욕심을 동반하며 끝없이 만족을 구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항구적이지 않은 욕망에 기반을 둔 행동이 초래하는 상황을 삼사라라고 하기 때문에, 윤회 속에 이끌려 다니는 한 이 세계는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사바세계(娑婆世界)라고 부르고,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거대한 체제 자체를 그렇게 본다. 모피어스와 트리니티는 말했다―그것이 바로 매트릭스의 본질이라고.

모피어스: 네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무언가를 알기 때문이야. 무얼 아는지는 설명을 못해도 느끼고는 있지. 네가 사는 동안 내내 느껴왔지. 세상이 뭔가 잘못돼 있다는 걸. 뭔지는 몰라도 그게 네 마음속 날카로운 유리 파편들처럼 괴롭히고 미치게 만들었겠지.

그렇다면 태초의 무엇이 우리를 삼사라에 가두었는가. 붓다가 깨달은 바에 의하면,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 우리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때, 우리는 외부로부터의 경험에 의존해서 스스로를 자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어느 틈엔가 변질되어 버린다. 오도된 현실은 자아(自我)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내’가 재구성한 세계를 만들고는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여 버린다.

아상가 시대의 밀교승 사라하(Saraha)4)는 실체를 보지 못하고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들의 모습을 ‘거울을 보는 어리석은 자’를 대입시켜 간략하지만 명쾌하게 노래한 바 있다.4) 사라하의 생멸시기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다음 웹사이트에 있다. http://www.sejon.or.kr/ohm/c_oh/milkyohak
/milkyohak_08.shtml.

어리석은 자여 거울을 볼 때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반사체(反射體)가 아니라 실체(實體)의 제 얼굴로 착각하네
이와 같구나, 진리를 거절해 버린 마음이여
진리 아닌 것(反射體)을 진리(眞實)라고 굳게 믿고 있네5)5) 사라하 작시, 라즈니쉬 강의, , 석지현 편저, 〈사라하의 노래〉(http://yeonmiso.com.ne. kr/tibet/tantrasa.htm).

1편에서 네오가 빨간 알약을 먹고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매트릭스가 주입하고 있던 가상현실 감각이 빨간약에 의해 말소되자, 네오는 자신과 자신이 건드린 거울이 함께 동화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으로 보고 느끼는 실제 지각을 이용한 것이다. 마치 거울의 갈라진 틈처럼 네오의 실제 지각은 퍼져나가고, 모피어스는 새로운 경험을 하는 네오에게 현실과 가상현실의 차이점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모피어스: 꿈을 꿔본 적 있나, 네오? 현실이라고 확신했던 꿈 말일세.
네오: 이럴수가…….
모피어스: 뭐 말인가, 현실이 되는 것?
모피어스: 만일 꿈에서 깨어날 수 없다면 어쩌겠나, 네오? 그럼 꿈 세계와 현실 세계를 어떻게 구분하지?

모피어스가 지적했듯이,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한 채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는 종종 꿈을 꿀 때에 비교되곤 한다. 그러나 꿈을 꾸고 있을 때는 자신이 꿈속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도 의식이 깨어 있을 때는 자신이 현실에 있음을 분명히 자각할 수 있다. 우리는 꿈을 깨듯이 본질을 명확하게 볼 수 있을 때 삼사라를 벗어날 수 있다.

3. ‘매트릭스’를 탈출하는 방법

모든 불교도의 최종적인 목표는, 재생과 소멸을 부단히 계속하는 이 쳇바퀴 같은 삼사라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에 있다. 최종 목표인 열반은 범어로 nirva칗a, 즉 ‘(욕망의)불길이 불어서 꺼진 상태’를 의미하며, 자유·해방·해탈 등 다양하게 번역된다. 인과 관계의 사슬이 부서지지 않는 한 출생, 죽음, 재생의 과정에 구속된 영혼의 굴레는 계속된다. 이런 범주에서 깨달음이란 모든 불교인들의 사고를 지배하는 근본적인 전제 조건이 된다. 불교인들은 결코 끝나지 않는 삶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붓다께서 말씀하시기를, 원인을 가진 것은 생성된 것이므로 유한한 것이며, 없어질 수 있는 것이라 하셨다. 3편에서 오라클도 말하듯이,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또한 원인이 제거되면 결과도 제거된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삼사라를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해방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는 것이 불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앞서 우리는 불교의 윤회에 대입하여 매트릭스를 이야기 하였다. 독실한 불교도와 마찬가지로 영화 속에 나오는 매트릭스 안에 갇힌 사람들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매트릭스를 자각하고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며 그 모습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6)6) 워쇼스키 형제들이 〈매트릭스〉가 ‘실제같은 가상공간’이란 점을 관객들에게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해 장 보들리야르의 이론을 차용한 것은 유명하다. 〈매트릭스〉 초반에 네오가 자신의 불법소프트웨어를 보관해두는 장소로 등장하는 책이 바로 장 보들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이다. 또한 감독들은 배우에게도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트릭스〉는 보들리야르의 이론을 활용은 하되 비관론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매트릭스〉는 이 시뮬라시옹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보들리야르는 해결책이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은 〈매트릭스〉를 철학적이라기보다 종교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매트릭스를 벗어나는 가장 흔한 방법은 네오가 그랬듯이 빨간 알약을 ‘개인의 선택’에 의해서 먹는 것이다. 한때는 저항군의 일원이었다가 뒤에 저항군을 배신한 사이퍼도 처음에는 파란 알약과 빨간 알약 사이를 갈등하다가 진실을 알기 위하여 빨간 알약을 선택했던 자다. 비록 그 뒤의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 다른 문제다.

자유의지를 갖고 빨간 알약을 선택하는 것 외에 매트릭스를 벗어나는 또 다른 길은 명상을 통한 자각이다. 비파사나라고 하는 불교의 수행법은 숙련자에게 자신의 정신적 과정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얻게 해준다. 의식적 앎과 무의식 사이에 세워진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다.7) 7) 글렌 예페스 엮음,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 굿모닝 미디어,

보다 직접적으로 이와 같은 이야기가 매트릭스 시리즈 안에서 언급된 경우도 있다.

〈애니 매트릭스〉 중에서 〈세계기록〉 에피소드에 나오는 인물이 바로 그런 경우다. 엄청난 의지력과 체력의 소유자이자 세계 기록 보유자인 육상선수 댄(DAN)은 자신의 최고 기록을 수립하는 와중에 아주 잠깐 매트릭스를 빠져나와 현실을 맛보게 된다. 이것은 실제로 스포츠 의학 분야에서도 최근에 해명되고 있는 현상이다.

경기 체험자가 극한에 이르면 두뇌의 처리속도가 현실을 넘어서듯 빨라지면서 먼저 주변의 소리가 일절 들리지 않게 되고, 다음으로 색이 사라지고, 통상의 것들이 분절되는 상태로 들어서게 된다고 한다. 극도로 집중하는 순간, 인간의 뇌는 그때의 가장 중요한 정보에만 초점을 맞추어 통상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 상태에 대한 설명은 듣는 이로 하여금 극한의 고행자가 다다르는 희열의 상태와 비슷하게 느껴지게 한다.

〈애니 매트릭스〉의 또 다른 에피소드인 〈키드 스토리〉 역시 재미있는 암시를 숨기고 있다. 나의 일상이 진짜 현실일까, 하고 의문을 가진 고등학생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서 네오는 요원들이 추격하니 도망치라고 외친다. 매트릭스 요원들의 추격을 받은 그는 네오에 대한 신념을 갖고 옥상에서 스스로 떨어진다.

그 결과 그는 매트릭스를 탈출하여, 꿈에 그리던 네오와 만난다. 트리니티는 “스스로 자각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라며 감탄한다. 빨간 약을 먹지 않고도 매트릭스에서 탈출한 드문 사례가 된 것이다. 그의 이름이 칼 포퍼라는 것은 우연일까? 칼 포퍼는 유토피아를 부인하고 비판하며 열린사회를 제시한 철학자다.

인류를 진정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은 구세주뿐이라는 서양 전통의 사상과는 다르게 매트릭스 세계 내에서의 구원은 많은 부분 스스로의 동기유발과 자각에 의해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는 개인의 의식변화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불교는 세상의 근본적인 문제가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파악하는 현혹된 방식에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해결책은 자각, 즉 그 사람의 의식과 현실 인식 방식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사람의 의식에 대한 연구가 진행됐는데, 4세기 유식학파에 이르러 그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유식학파에서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지각하는 대상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마음에 한번 투영된 산물임을 지적한다. 인식체계는 감각과 대상 인식의 상호작용으로 ‘나’라는 생각을 만들어 내고선 한계를 지운다. 내 밖의 세계와 나를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 이 세계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데 걸림돌을 제공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듣는 세계가 실제 존재한다고 여기지만, 그 세계는 항존하는 실제 현실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매트릭스 역시 분명히 거짓된 현실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수만 있다면 분명히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 착각이듯이.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무엇이 현실인가?”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현실을 어떻게 정의하지? 만일 우리가 느끼고, 맛보고, 냄새를 맡거나 볼 수 있는 것을 현실이라고 말한다면 현실은 그저 뇌에 의해 해석된 전기 신호들에 불과하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라네. 20세기말 그대로의 세계이지. 이제 세계는 우리가 매트릭스라고 부르는 신경들 간의 상호작용 시뮬레이션으로만 존재해. 자네는 꿈 세계에 살고 있었던 거야, 네오.”

〈매트릭스〉는 인류가 경험하는 세계가 완전히 왜곡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자신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며 내가 보고 느끼고 맛보는 이 세계는 절대불변의 진짜 세상이라고 믿고 싶어할 지 모르겠지만, 현실 속에서 우리는 감각기관에, 그리고 또 다른 존재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부처는 ‘무아(無我)’라는 개념을 통해 자아가 있는 독립된 ‘나 자신’이라는 것이 어디에도 없음을 설파한다. 이러한 자각은 장황한 이론과 지식만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습득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획득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피어스는 계속해서 네오를 독려한다. 생각해서 알지 말고, 느끼고 믿으라고. 모피어스는 1편 끝까지 길 안내자 역할을 하며 중요한 것은 행동하는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확히 그의 말을 따른 끝에 네오는 자각한다.

1편의 핵심은 ‘스푼은 없다’이다. “스푼을 휘려고 하지 말아요. 그건 불가능해요. 대신 진실을 깨달아야 해요. 스푼은 없어요. 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죠. 당신의 마음이 휘면, 스푼도 휘어져요.” 우리가 보는 거기에 숟가락은 없는 것이다. 이 핵심을 이해하면, 우리는 안과 밖이 다르지 않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더 이상 그것에 방해받지 않는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절대적 공간을 불교는 부정한다. 불교에서는 항상 공간을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깨달은 자는 어떻게 되는가. 깨달은 자는 자신의 아바타8)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갖는다. 자신의 잘못된 인식을 걷어내 본질을 직시함으로써, 외부와 내부를 초월하는 것이다.8) 아바타(Avater): ‘化神’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에서 온 단어. 원래는 힌두교에서 신격이 변화한 모습을 뜻하는 것이었지만 현대에서는 웹상에 자신의 모습을 구현해 놓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매트릭스 안에

매트릭스와 뇌는 상호작용을 한다. 그리고 뇌는 몸에 영향을 미친다. 네오가 훈련 도중 다쳤을 때, 훈련 프로그램을 빠져나와서도 입안에 피가 나는 것을 알게 된다. 네오가 어째서 그러냐고 모피어스에게 묻자, 모피어스는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들려준다. “정신이 죽으면 몸도 죽지.” 정신 상태와 믿음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육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스미스요원이 매트릭스 안 네오의 아바타를 죽이자, 네오의 뇌는 이 운명을 받아들여 실제 몸에서도 생체기능이 멈춘다. 그러나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며 삶을 포기하려는 찰나, 네오는 이전부터 알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깨우친다. “It is not Real.” 네오는 이제 부활뿐 아니라 초인적인 힘도 행사할 수 있는, 자신의 아바타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적인 수준의 ‘앎’을 넘어선, 본능적인 통찰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안과 밖이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은 굳이 매트릭스 시스템 안으로 접속해 있을 때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매트릭스 시리즈의 2편 격인 〈리로디드〉 마지막 부분과 〈레볼루션〉에서 네오는 가상공간 밖의 현실세계에서도 기계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된다. 이것은 매트릭스의 구조를 낱낱이 깨달은 네오의 힘이 똑같은 기계인 센티널에게도 미칠 수 있음을 나타내는 아주 작은 예에 지나지 않는다.

네오는 가상현실 세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실세계인 시온에서도 기계를 장악할 수 있지만 그것은 초능력을 사용하는 게 아니다. 네오는 현실에서도, 가상현실에서도 수의 행렬을 볼 수 있었던 것뿐이다. 예로, 영화 속에서는 매트릭스 세상의 비트를 녹색으로 표현하지만 현실 세상의 비트는 오렌지색으로 설정해 구분하고 있다.9)9) 민경진, 〈아톰과 비트, 매트릭스의 세계관〉, 오마이 뉴스, 2003. 11.

네오가 오렌지 빛으로 가득찬 기계도시의 광경은 볼 수 있었음에도 바로 옆에 있던 트리니티의 상태는 깨닫지 못했던 장면을 떠올려보자. 매트릭스 밖의 현실이 다중구조가 아니라 네오가 세계를 이루고 있는 구성물질의 본질을 통찰한 것이다. 〈매트릭스〉 1편에서 우리는 현실과 가상이라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보았다. 그러나 〈매트릭스 리로디드〉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를 넘어, 불교적 통일장의 세계관으로 발전한다. 매트릭스 시리즈는 자아와 세계의 분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화엄적인 사상을 차용하고 있는 셈이다.

4. ‘매트릭스’에는 신이 있는가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신이 언급된 경우는 다음과 같다. 1999년작 매트릭스에서, “god”라는 단어는 오로지 “goddamn”과 같은 욕설을 할 때만 사용된다. 오라클은 네오에게 단지 그가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신에 대한 다른 어떤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매트릭스 리로디드〉에서, 단어 “god”는 오직 “goddamn”과 같은 욕설을 사용할 때만 등장한다. 〈매트릭스 레볼루션〉에서도, 단어 “god”는 오로지 욕설을 할 때에만 등장하는데, 다른 의미로도 언급된 때가 있다면 트레인 맨이 네오에게 “여기서는 내가 신이야”라고 말한 단 한 번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트릭스〉가 1999년도에 개봉했을 때, 많은 기독교 신봉자들은 부활했다가 승천하는 네오의 이미지와 이름, 배우의 역할 등등에서 유일신앙에 대한 은유를 읽고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마지막 남은 인간의 땅이름이 시온이라는 점은 물론이고, 모피어스라는 그리스 신화적인(또는 다분히 마약을 연상케 하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네오를 유일자로 각성시킨다는 점에서 모세에 비유하는 설명은 매우 적절하다고 여겨졌으며, 트리니티는 삼위일체, 네오는 구세주인 예수를 사이버펑크적인 시점에서 다뤘다는 해석들이 어딜가나 넘쳐났다.

물론 매트릭스 시리즈는 서구의, 서구에 의한, 서구를 위한 오락영화임에 틀림없고 따라서 그 속에 포함된 기독교적 상징들 또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영화가 기독교 신앙체험의 이야기인가는 다른 문제이다. 워쇼스키 형제는 이미 1편에서 모피어스의 입을 빌어 매트릭스 내에서 할 수 있는 공허한 일 중의 하나로 교회가기를 꼽은 바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1편의 마지막 장면은, 반체제 좌파 락 밴드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거대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다 함께 일어서자’고 분노를 성토하며 소리치는 노래가 뒷 배경으로 깔려 있음에도 불구하고,10) 특별히 민감한 정치적·종교적 도그마를 해체하고 있다고 보여지진 않았다. 10) 마지막 장면의 오리지날 사운드 트랙 삽입곡은, 이름조차도 매트릭스와 기묘하게 어울리는 Rage against the machine(R.A.T.M)의 “wake up”이다. R.A.T.M은 그들의 밴드명에 들어가는 ‘기계’란 ‘디즈니와 여타 다른 다국적기업, 정부등의 거대보수주의세력’이라고 말한 바 있으며 그들의 첫번째 앨범(삽입곡인 “wake up”이 들어있는) 자켓으로 베트남

확실히 네오는 선지자이고, 인류를 구원하러 왔다고 생각해버리면 우리 모두가 편하다.

예언을 따르라. 그리하면 구원 받으리라.

그러나 모두가 나름대로 좋아했던 1편이 개봉되고서 3년이 흐른 후 2편 격인 〈리로디드〉와 마지막 편인 〈레볼루션〉이 연달아 개봉됐을 때, 관객들의 호불호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무엇보다 관객들이 성토했던 점은 구원론의 중심에 있어야 할 신이 매트릭스 안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언자라고 믿었던 오라클은 메인시스템의 프로그램일 뿐이었다. 메인 시스템의 중심 프로그램인 시스템 아키텍쳐는 자신과 오라클의 두 프로그램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매트릭스의 균형을 이루어 나간다고 설명한다.

2x+3=7이라면 아키텍쳐는 x=2라는 정답을 만들어놓지만, 오라클은 2x+3=7y라고 하며 새로운 방정식을 산출해내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오라클은 시스템의 완전통제를 돕기 위해 존재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6번의 재부팅 끝에 이른 것이며 네오 이전에도 6번의 예외가 있었음을 아키텍쳐 프로그램은 말해준다. 더군다나 영화에서의 악인인 스미스는 정확히 네오의 대칭점에 있다가 마지막에는 네오와 함께 삭제되고 만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에서는 악과 선이 하나로 공존한다는 사상이 없기 때문에, 급격히 실망한 관객들은 급기야 매트릭스가 기독교 사상을 해친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스스로를 매트릭스 광이라 칭하는 현각 스님은 6월 17일자 신문 인터뷰에서, 이러한 전복성이야말로 매트릭스의 뛰어난 점이라며 종교에 이 영화가 던지는 파급효과를 말하였다. 조금은 길지만 그 인터뷰의 일부를 싣도록 하겠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 용어와 상징만 보고 이 영화가 자신들의 종파적 종교관을 입증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1편에선 세계를 구원하는 ‘더 원’이 단순한 정답인 듯도 하다. 그러나 2편은 “정답” 대신 모든 위대한 종교들이 가르쳐온 일, 즉 질문을 제시한다. 사람들이 안주해온 신앙체계를 전복하고 무너뜨린 다음, 우리 실존의 본질 자체에 대한 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맹목적 신앙은 정답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네오는 오라클로부터 모피어스에게 전해진 맹목적 신앙을 이제 버려야 한다고 깨닫는다…….

따라서 〈리로디드〉는 종교적 확실성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어떤 도그마나 예언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쉬운 신앙을 주창하는 영화도 아니다. 쉬운 정답 대신 위험하고 심오한 질문을 제시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상영금지된 것이다.11) 정치적이건 민족적이건 종교적이건 아무리 확실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맹목적으로 따르는 대신 질문해야 한다. 〈리로디드〉는 매우 변혁적인 영화이다.11) 〈이집트, 영화 ‘매트릭스2’ 상영 금지〉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이집트 당국의 의사와 교수 등으로 구성된 검열단은 “영화에 동원된 첨단 기술과 환상적인 특수효과에도 불구하고 이는 우리가 존중하고 신봉하는 3대 종교와 관련된 존재와 창조의 주제를 터놓고 다루고 있다. 영화는 창조주와 창조 행위, 창조의 기원에 대한 탐구, 그리고 강제와 자유의 지라는 문제에 도전하고 있다……. 이같은 종교적 주제들은 과거에도

왜냐하면 우리가 안주해온 맹목적인 종교적 믿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서 놓지 못하는 믿음을 뿌리부터 뒤흔든다. 내가 접한 대중문화 가운데 이만큼 멋진 통찰을 보여준 영화는 드물다. 인간 밖의 유일한 권력을 믿는 제도화된 종교들은 또 다른 형태의 통제와 지배, 즉 인간의식을 지배하는 매트릭스에 불과하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종교 자체가 일종의 매트릭스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한 믿음을 위해 매트릭스에 도전해야만 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왔는가” “맹목적 신앙은 진실한 길인가 아니면 거짓인가” “이 방대한 시스템의 설계자 내지 프로그래머는 선한가, 악한가”

우리는 무지와 미몽에 빠져 잠들어 있으며,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만 스스로 깨닫고 또 다른 사람들이 깨닫도록 도울 수 있다. 한편 니오가 오러클을 만나러 가는 장면에선 종교물품 벼룩시장이 등장한다. 힌두교 신, 성모 마리아, 예수상 등이 보인 후 마지막으로 카메라는 불상을 비춘다. 화면 속의 부처는 명상자세로 앉아 자기 마음의 본질을 관조하고 있다. 니오가 오러클을 만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비춰진 종교의 이미지가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1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니오는 마치 최후의 초영웅 ‘더 원’처럼 보인다. 하지만 2편에서 밝혀지는 놀라운 사실에 따르면 니오는 “수학적 완성”의 여섯 번째 예외, 여섯 번째 구원자이다. 흔히 상징 기법을 사용하는 영화에서 과연 이 여섯 번째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불교에 매료된 감독들의 답은 명료하다―불교에서 2500년 전 나타난 석가모니 부처는 고해의 매트릭스인 이 우주에 나타난 여섯 번째 부처로 간주된다.

고전불경에 따르면, 새로운 우주가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부처가 나타나 미몽에 빠진 중생을 제도한다. 만물이 유전하므로 우주 또한 끊임없이 변하고 이윽고 쇠하여 적멸한다.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고 따라서 새로운 부처가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태어나고 다시 또 태어나고―나는 중생들 가운데 다시 태어날 것이다.”12)12) “‘매트릭스 광’ 현각 스님 〈매트릭스-리로디드〉 관람기”, 〈한겨레신문〉(2003. 6. 17).

네오의 힘이 커지는 만큼 똑같은 비율로 폭주됐던 스미스가 기계나 인간세계 모두에 위협이 되자 네오는 기계도시로 가서 직접 아키텍처를 만나고 아키텍처의 본체로 접속해서 스미스와 싸우게 된다. 스미스가 이겨서 네오를 흡수하는 순간, 네오와 접속하고 있던 시스템 메인 컴퓨터는 변종 버그화 되어버린 스미스를 삭제하는데 성공하고 매트릭스는 7번째 재부팅을 시작한다.

여기까지 본 관객들은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다. 어쩌면 〈레볼루션〉 전후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는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지도 모른다. 인간과 기계의 묘한 공존 관계는 혁명 후에도 계속되기 때문이다. 네오는 급진적인 방식으로 변형시키거나 매트릭스를 파괴하지 않았고, 남아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구원하기 위해 휴거해 가지도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화의 시리즈가 모두 완결된 이후에도 대체 네오가 매트릭스에서 하려했던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불평하는 관객도 많았다. 그러나 네오가 자유의지와 책임에 대해 여러 메시지를 전한 것은 분명하다. 네오는 적을 준엄히 심판하는 대신에 각 개인이 자신의 의식을 명확하게 자각함으로서 스스로의 주체가 되는 쪽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길 바라며, 이러한 바램은 〈매트릭스〉 1편 마지막의 나레이션에서도 분명히 나온다.

너희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너희가 있음을 느낀다. 너희는 우리를 두려워 한다. 변화가 두려운 거야. 나는 미래에 대해 모른다. 이것이 어떻게 끝날지 너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시작될 지를 말해주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다. 이제 전화를 끊고 사람들에게 전부 다 보여주겠다. 진짜 세상을 보여주겠다. 사람들에게 너희가 없는 세계, 통제와 구속이 없는 세계, 경계나 국경이 없는 세계, 무엇이든 가능한 세계를 보여줄 것이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할 지는 알아서 하라구.

네오는 상황을 배척하기보다, 상대방에게 원인과 결과를 보여주고 스스로 선택이 가능한 상황을 제시한다. 이것은 대단히 불교적인 사고방식으로, 이러한 관점은 붓다가 윤회세계의 지배자인 마라를 대했던 방식을 떠올리게 만든다.13)13) 붓다와 마라의 대화와 네오가 하는 나레이션의 유사성을 알고 싶으신 분은 제임스 포드의 〈불교, 신화, 매트릭스〉,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5. ‘매트릭스’가 지닌 불교적 은유의 한계

여기까지 우리는 매트릭스에서 나타나는 불교적 상징이나 사상들을 살펴보았다. 그 밖의 많은 레퍼런스에도 불구하고, 매트릭스 시리즈의 현실과 자아를 다루는 부분은 불교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음을 보고 나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 영화의 곳곳에 불교적인 오마쥬의 흔적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부분의 무슨 내용이 일치하는가를 목록으로 만든다는 것은 사실 영화의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영화와 사상의 일치점을 찾아 한 권 분량의 목록을 만든다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매트릭스〉는 결코 특정 종교의 종교영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이런 영화가, 불교나 기독교 세계관과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핵심적 가치들을 달리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하겠다.

근본적으로 매트릭스에는 윤리적인 내용이 빠져 있다. 매트릭스는 과도한 폭력으로 미국 내 성인 입장가인 R등급을 받았다. 예를 들어, 현란한 촬영기술로 편집되어 있긴 하지만 영화 속의 모든 주인공과 조연들은 거리낌 없이 총기를 난사한다. 영화의 무법자격인 스미스는 물론이거니와, 자비심 넘치는 마음으로 인간들의 해방자가 되겠다는 네오도 종종 한 부대의 인간들을 전멸시키곤 한다. 사실 매트릭스 속에서의 죽음은 현실에서의 죽음과 같은 것이다.

이런 현란한 파괴 장면은 단순히 은유적인 것을 넘어 분명히 좀더 직접적인 폭력과 관계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매트릭스에는 불교의 깨달음을 위한 여덟 가지 길에 포함돼 있는 윤리적 차원이나 기독교의 윤리적 율법은 영화 이야기에서 근본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서양인들의 불교에 대한 관심의 이면에 있는 교묘한 이국정서에 대한 동경이나, 그것을 날카롭게 짚어내어 상업적인 목적으로 치환하는 마케팅 방식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서양에 부는 선불교나 요가 열풍은 교리와 신앙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서 오는 환영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 것이다. 최근에 미국의 격월간지 〈뉴욕불교〉가 미국 캔자스의 불교단체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미국 불자들은 정치적으로는 민주당 지지자이며, 인종은 유럽계 백인으로 고학력 중년층이 대부분이라는 조사가 나왔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건강상의 이유나 마음의 안정 등을 위해 참선을 공부하기 시작한다고 대답했으며 스스로 불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30%가 그렇지 않다고 답해 종교와 수행을 분리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수행방법은 선수행이 40%에 이르렀으며, ‘선불교’와 ‘불교’를 별개로 취급하는 응답자가 많았다.14)14) 하정은 기자, “설문조사로 본 미국불자들의 성향”, 〈불교신문〉 1985

대부분의 미국 참선수행자들은 불교가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신들의 종교관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구미 쪽 불교포교가 교리 쪽으로는 얼마나 취약한가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새롭고 신선한 방식이라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신앙형태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교리는 철학적 사변, 신행(참선이나 절)은 운동으로 여겨질 뿐이다. 기초적인 불교 지식이 없다 보니 불교의 기본적인 진리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공(空)관으로 넘어가면 더 하다.

처음 키아누 리브스가 〈매트릭스〉의 시놉시스를 읽었을 때, 그는 이 영화의 메시지가 ‘마음을 먹는다면 뭐든지 이룰 수 있다’는 내용으로 이해했다고 인터뷰 한 바 있다.15) 15) 키아누 리브스와 캐리 앤 모스의 대담 참조(http://www.roughcut.com/features/ qas/reeves_moss.html).

종종 연기 관계를 망각하고 공관에 빠져들 경우, 막행막식을 일삼는 사견에 빠져버릴 수 있기 때문에 극히 위험하다. 영화 안에서는 정부청사에 잠입할 때, 요원을 상대하기 위해 요원으로 변해버린 민간인을 모두 쏴버리는 장면 같은 것이 특히 위험한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불교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꾸준한 노력과 수행이 뒷받침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면역이 없는 어린세대들에게 사견부터 심어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잇달았던 총기사건은 이 영화의 핵심이 되는 제법무아의 세계가 잘못 이해될 때 얼마나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다음은 그 기사의 전문이다.

[미국] “매트릭스 안에서 살인했을 뿐이다”
[속보, 세계] 2003년 05월 20일 (화) 17:36
최근 2편이 개봉된 화제의 영화 ‘매트릭스’가 살인 조장 혐의를 받고 있다.

1999년 1편이 나왔을 때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킨 이 SF영화는 인간 사회가 사실은 매트릭스라는 거대한 기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꿈과 같은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문제는 현실과 가상을 너무도 교묘히 섞어놓은 탓에 일부 광적인 영화 팬들이 현실과 영화를 혼동하고 범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19일 영국 일간 〈가디언〉 보도에 따르면, 올 2월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한 청년(19)이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키아누 리브스)의 검은색 가죽코트 복장을 하고 영화 소품과 비슷한 총으로 부모를 쏴 숨지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태연히 “나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주 오하이오 주에서는 한 여성(37)이 집 주인을 살해하고 “꿈속에서 저지른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검찰 측은 “영화가 피고의 인식을 왜곡시켜 범행에 일부 역할을 했다”고 인정했으며 그녀는 정신착란을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00년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매트릭스에 영향을 받은 살인사건이 발생했으며 지난해 워싱턴 일대를 공포에 떨게 한 연쇄 스나이퍼(저격수) 살인범 리 말보(18)는 교도소에서 “너 자신을 매트릭스에서 구출하라”는 메모를 적기도 했다.

위 사건은 공성(空性)을 불교사상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결여된 상태에서 잘못 받아들이면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6. 맺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매트릭스 시리즈를 아우르는 불교적인 사상을 살펴보았다.

최근 서양의 철학사조라 할 수 있는 해체주의와 서구과학계의 큰 발견이라 일컬어졌던 양자역학 등을 불교의 공관(空觀)이나 연기법에 기대어 설명하거나 이 둘 사이의 유사성을 밝혀내는 등의 작업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한 실정이다. 이런 시대에, 매트릭스 시리즈라는 대중적인 영화가 불교적 코드를 차용하여 거둔 성공은 불교사상의 참신함과 심오한 통찰이 거둔 명백한 승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空)사상이나 그 밖의 불교사상은 불교의 맥락 안에서 받아들여질 때 올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불교에 대한 전반적인 통찰 없이 받아들인 단편적인 견해들이 얼마나 큰 잘못된 결과를 불러오는 지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이런 몇몇 미흡한 점에도 불구하고 매트릭스와 불교의 비교는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매트릭스는 우리가 현실이라 믿어왔던 것들에 대한 은유이다. 이것들이 우리가 진실을 바로 볼 수 없도록 우리 눈을 가리는 세계이다.

우리는 종종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호 의존적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고 우리 자신의 독립된 상태가 영원하다고 착각한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이기주의, 욕망, 집착, 괴로움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우리에게 깨어나라고 말한다. ■

이은비
동국대 불교문화대학 불교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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