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매장보다 화장으로 가자는 캠페인은 더 이상 신선하지 않다. 이미 화장의 비율이 절반을 넘어섰으며, 오히려 화장시설과 납골시설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 전개된 화장장려운동의 결과 화장율은 급증했으며, 화장 위주의 법령도 제정되었고, 장례와 관련된 학과도 대거 신설되었다. 특히 이러한 추세에 발맞추어 납골·석재 관련 업체는 최고의 호황기를 맞고 있다.

이들에게 화장장려운동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다름없다. 이러한 먹이감에 참지 못하고 종교계도 적극 뛰어들고 있다. 그 중심에 불교사찰이 있다. 본래 화장과 불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화장이나 납골시설과 관련하여 불교계가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전개되는 상황은 정반대이다. 사회의 잘못된 풍조에 적극 동참하여 왜곡된 현실을 한층 조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불교계는 어떠한 의식과 죽음관에서 현재의 화장과 납골시설을 추진하고 있는가? 그 점을 반드시 짚어보아야 할 시점이다.

먼저 매장과 화장의 궁극적 목표를 생각해 보자. 불교풍수학자 황영웅의 논리를 빌려 설명하면, 모든 생명틀은 집합(삶)과 환원(죽음)의 과정으로 되어 있다. 모든 생명체는 원소핵의 집합체이다. 생명체가 죽으면 집합된 것이 이산·괴멸되어 원래의 왔던 제자리로 다시 돌아간다.

그것이 환원과정이다. 그러므로 환원이란 집합되어 인간의 몸을 구성하기 이전의 원래 원소로 회귀하는 것을 말한다. 시신을 땅에 매장하면, 정상적인 경우 통상 200∼300년이 경과하면 깨끗하게 원래의 원소로 돌아간다. 이처럼 매장이란 죽은 인간의 몸을 땅에 묻음으로써 서서히 환원되는 과정이다.

그에 반해 화장은 시신을 태우고 또 태워서 급속히 환원시키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만 본다면 매장과 화장의 본질은 결국 같다고 할 수 있다. 본래의 온 곳으로 돌아가는 목표가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주 자연의 입장에서는 매장과 화장의 본질이 같은 것이지만, 인간의 가치개념이 개입되면 달라진다. 인간은 자신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부모와 조상의 시신이 환원되는 과정의 생명에너지를 동조·흡수하여, 정신적·육체적으로 생명활동력을 개선·상승시키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풍수지리의 요체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개념마저도 끊고자 한 불교적 가치관에서 추구하는 최고의 방법은 일체의 인연마저도 끊어버리고 즉시 환원되는 것이다. 더욱이 원칙적으로 동기감응(同氣感應)하는 후손을 두지 않은 상황에서, 매장을 통한 후손과의 교류는 어차피 무의미한 일이다. 따라서 화장방식은 고대부터 있어 왔지만, 본격적인 성행은 불교의 영향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매장이 항상 풍수지리와 관련하여 시행된 것은 아니다. 사실상 시신을 불에 태우는 화장의 방식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따라서 풍수의 영향이 아니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살았던 근처의 땅에 묻히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런 바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매장이든 화장이든 궁극적 목표는 인간이 본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므로, ‘무(無)로 돌아간다’라고 표현되기도 하고, ‘자연으로 돌아간다’라고 표현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본질을 이해하는 한, 어떠한 경우에도 매장과 화장의 방식이 자연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 근본정신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파괴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석재채취이다. 이 점은 호화분묘의 경우만이 아니라 일반묘지의 경우에도, 그리고 화장과 관련된 납골당이나 납골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석재사용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서 산의 중심부를 파괴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양질의 석재는 산을 절단내야 캐낼 수 있다. 이보다 더한 환경파괴는 없다. 그러므로 묘지에 있어 그것이 호화이건 아니건 석재사용을 원칙적으로 금지해야 한다.

석재사용의 문제점은 현재의 화장방식에서 더욱 크게 나타나고 있다. 납골당·납골묘·납골탑 할 것 없이 지나치게 석재를 많이 쓰고 있다. 특히 납골탑은 가장 문제가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라. 1000년 넘게 유지되는 유물은 결국 석탑처럼 돌로 만든 문화재이다. 돌은 원칙적으로 그 수명이 다른 재료와 비교할 수 없이 영구적이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납골탑이 500년, 1000년 뒤에 취하고 있을 모습을 상상해 보라. 자랑스런 문화재가 아니라 천하의 꼴불견 중에 꼴불견일 것이다.

석재 화장보관시설도 외형적인 환경파괴이지만, 뼛가루가 보관되어 썩게 되면서 자연으로 품어낼 악취는 더더욱 심대한 환경파괴를 자아낼 것이다. 지금은 새로 시작하였고 기간이 얼마되지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재의 화장시설은 납골, 즉 화장하고 남은 유해를 보존하고자 한다. 그래서 유해를 숨도 쉬지 못하는 항아리에 넣어 사방이 돌로 된 곳에 영구히 보존한다.

 그 유해가 그대로 있거나 자연적으로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결로현상으로 인하여 습기가 생겨 온갖 악취를 풍기며 썩는 것이다. 항아리 안에서 그리고 돌덩이 안에서 영원히 본래의 원소로 환원되지 못한 채, 부패상태로 백 년 천 년을 지내게 된다. 지금의 화장방식이 계속 유행하여 전국이 이러한 유해 덩어리로 가득 채워진다고 생각해 보라. 보통 심각한 환경파괴가 아니다.

지금의 납골당은 무슨 보물덩어리처럼 유해를 항아리에 담아 석재 조성물 안에 보관하고 있다. 그것은 형태만 다를 뿐이지 흡사 ‘뼛가루 형태의 미이라’, ‘뼛가루와 물이 결합된 악성 부패물 공장’이나 다름없다. 세월이 흘러도 석재는 남으며, 그 속에 보관된 유해는 남는다. 오래된 석탑 하나가 서 있다면 아름다움이라도 있겠지만, 그 숱한 악성 부패물을 간직한 저 수많은 돌집들을 천 년 후에는 어찌할 것인가?

우리가 죽음의 깊은 의미를 깨닫는다면, 모든 것을 본래의 원소로 환원시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매장한다면 일정 기간 묘지는 남겠지만, 어차피 화장을 선택한다면 무슨 애착이 필요할 것인가? 뼛가루를 남길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아니면 과도기적 형태일지라도 뼛가루를 땅속에 묻음으로써 서서히라도 환원되도록 해야 한다.

물론 사람들은 흔히 망인(亡人)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그 흔적을 남기고 싶어한다. 따라서 화장한 뒤 남는 유골가루를 보관하여 필요시 찾아가 기억하고자 한다. 그에 따라 납골의 방식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아마도 긴 역사의 흐름으로 보았을 때, 화장을 하면서 유해를 남기고자 하는 것은 결국 과도기적 현상으로 나타난 문화형태로 자리매김될 것으로 예상한다.

불교계의 화장운동은 이러한 점을 깊이 인식하여 현실의 문제에 대해 적절한 해답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작금의 현실처럼 오히려 이 사찰 저 사찰 납골시설을 만들어서 뼛가루를 보관하고, 그것도 자연을 파괴하는 석재시설을 기본으로 하며, 더 나아가 부처님과 고승들만이 안치되었던 납골탑 형식으로 버젓이 팔아먹는다면, 머지 않아 불교계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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