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불교대학 가까이 센본도오리(千本通)에는 밖에서 볼 때 멋있게 보이는 큰 절이 하나 있습니다. 특히, 종각이 큽니다.(일본 절은 종각이 비교적 절 전체에서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들어가 봤습니다. 일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지난 여름의 일입니다만,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오싹 오싹, 소름이 끼치더군요. 공동묘지에 혼자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이 절 이름이 상품연대사(上品蓮臺寺)인데요. 상품연대사의 법당을 중심으로 매우 큰 경내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만, 사방으로 모두 납골 묘원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한두 군데 보다가, 빙∼ 둘러보면서 저도 모르게 섬뜩한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법당이 있고, 주변에 여러 채의 요사채도 있고, 마당도 있고 할 공간에 빼곡이 묘원(墓園)이 들어서 있습니다. (물론, 다른 집이 필요할 만큼 스님들이 많이 사는 것도 아니지만…….) 납골을 하는 비석을 세운 묘원들이 모두 차지합니다. 그 공간이 부족해서 점차 밖으로 땅을 넓혀 나가야 할 것 같은데요. 부처님 계신 법당이 차지하는 공간의 몇 배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숙사 가다가 있는 초선사(招善寺)도 그런 경우입니다.

이렇게 사원에서 법당이나 강당이 차지하는 공간이 묘원이 차지하는 공간보다 좁다는 것은 상징성이 있습니다. 불교사원의 기능이 장례의식과 죽은 자를 위한 뒷처리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지요. 그런 점을 그들 스스로도 인정하면서 좀 시니컬하게 말하는 용어가 ‘장례불교’인 것이지요.

일본불교는 이렇게 장례불교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불교의 안정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 유례는 도쿠가와 막부의 에도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바로 기독교가 들어오는데, 금지정책을 펴는 것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이 이야기는 엔도 슈사꾸(遠藤周作)의 소설 《침묵》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침묵》은 명작입니다. 불교인으로서도 일독(一讀)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스에끼 후미히코 선생은 《일본불교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침묵을 인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억압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한 번 난을 일으킵니다. “시마바라의 난”인데, 아마 나까사끼 근방 어디인 것같습니다. 이 난을 무력으로 진압한 막부에서 후속대책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단가(檀家)제도입니다.

에도 막부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그리스도교도가 아니다”라는 증명서(寺請)를 요구합니다. 그 증명서는 절에서 그 사람의 신앙을 조사해 보고 내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절이 일종의 호적정리와 관리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든 사람은 반드시 어느 하나의 절에 소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절의 부처님을 모시고 스님들을 받들면서 신도로서의 의무를 다하지요. 그러다가 가족 중에 죽는 사람이 생기면, 반드시 자기가 등록하고 있는 절의 스님을 초빙하여 염불하고 화장한 뒤, 그 절에 납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불교의 신도들은 이러한 의미의 신도들이기 때문에 ‘단가’라고 하는 것입니다.(원래 단은 보시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 da칗a의 한문음사 檀那에서 온 것이겠지요.)

이는 에도 막부의 민중통제정책이고, 그것을 불교사원에 위임함으로써 불교는 일종의 국교가 되고, 절은 일종의 동사무소가 되며, 스님들은 일종의 동사무소 직원처럼 관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리이면서 스님이라는 의미에서 관승(官僧)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도 이 같은 유풍은 남아 있습니다. 절의 주지스님이 전과자를 지도·관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일본 영화 중에 〈우나기〉라는 영화를 보면 전과자가 일본의 스님에게 불려가서 꿇어앉아서(꿇어앉는 것이 보통이긴 합니다만) 뭐라뭐라 설교를 듣고는 하지요.

그런데 지금 “일본불교는 장례불교다”라고 하는 소리가 나오는 데에는 일종의 자기비판과 냉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불교가 죽은 사람 뒤치다꺼리나 해서 되겠느냐”하는 것이지요. 사원이, 스님이 해야 할 역할은 그 이상으로 더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스님이 바라문교의 바라문처럼 사제 역할만 하는 것은 불교의 본의가 아닌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이를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이를 옹호하는 주장도 있긴 합니다. 그것은 장례불교가 된 배경과 관련하여 나라(奈良)시대나 헤이안(平安) 시대만 해도 관승(官僧)들은 시체를 만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정탄다’는 생각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시체를 만지고, 장례를 치러주고 하는 것은 관승이 아니라 둔세승(遁世僧)들의 몫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허(鏡虛, 1846∼1912) 스님이 전염병 돌던 마을에서 한 일을 생각하면 되겠지요. 그것은 바로 민중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일은 국가불교의 관료가 된 승려들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죽음의 문제는 여전히 불교에서도 문제가 되지요. 그러므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그 의례에의 동참은 불교가 담당해야 할 하나의 몫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을 견학하면서, 장례문화를 연구하고 납골당을 신축하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일본의 특수한 역사가 있고 또 현재 그들의 고민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일본불교가 어떻게 장례불교의 오명을 벗고, 단순히 장례불교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러면서도 민중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죽음 앞에서 슬픔에 빠져있는 후손들을 위로하는 일들을 행할 수 있을지……. 이 모순된 과제 앞에서 고민해야 할 것은 일본불교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바로 우리의 고민거리가 되기도 하겠지요.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과연 우리가 죽은 뒤에 굳이 석물 속에 우리의 유골을 보관시켜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땅 속에 묻는 매장과는 또 어떻게 다른가? 단순히 평수의 차이 이상의 어떤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일본의 산이나 절에서 납골묘원을 볼 때, 저로서는 결코 그것이 자연과 온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는 없었거든요. 그냥 우리의 유골을 자연 속에 뿌리고 갈 수는 없는가 하는 점입니다. 일본에서는 이와같은 장례의 개념을 ‘자연장(自然葬)’이라 하고, 그러한 자연장을 추진하는 시민단체도 있습니다. ‘장례의 자유를 권유하는 모임’이라 합니다만……. 우리도 좀더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고민해 보아야 할 것같습니다. ■

* 이 글은 교토불교대학에서의 연구년(2002. 8∼2003. 8) 동안 필자의 홈페이지에 ‘교토통신’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였던 것 중의 하나이다. 연재한 글들은 머지않아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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