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버트 슈미트하우젠 지음 / 김성철 옮김

1. 연구의 목적

아힘사(불살생)란 반드시 채식주의와 연관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살아있는 생물을 해치는 것 특히 살해하는 것을 일관되게 자제하는 생활 태도 혹은 양식을 말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힘사의 기원 문제가 매우 논쟁적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슈미트(H. -P. Schmidt),1) 히스테르만(J. C. Heesterman),2) 그리고 툴(H. W. Tull)3)과 같은 학자들은 제식주의적 베다 전통 내부의 발전에서 아힘사를 이끌어내려고 시도했다. 이에 반하여 보드위쯔(H. W. Bodewitz)는 단호하게 아힘사의 출발점이 고행주의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반드시 비베다적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반제식주의적인 것이다. 실제로 아힘사는 자이나교와 불교와 같은 대부분의 중요한 비베다적 고행 운동에서 끈기 있고 널리 퍼진 생활양식으로서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초기 단계에서는 수도승들의 생활양식을 구성하는 요소였고, 평신도에게 완화된 형태로만 확산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베다 전통에서의 상황은 그보다는 불명확하다. 《찬도갸우파니샤드》와 법경류에서 아힘사라는 단어가 가끔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법경류에서는 특히 유행승과 관련하여 아힘사가 비교적 광범위하고 구체적인 형태(비록 개념 그 자체는 사용되어 않았지만)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들 문장의 연대적 배열은 매우 불확실하다. 그리고 법경류 자신들도 이러한 삶의 양식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표현하고 있다. 보드위츠4)에 따르면 “브라흐만의 아힘사는 뒤늦게 어쩔 수 없이 발전하여 자이나와 불교의 대표자들과 동등한 파트너로 형성되지 않았다. 브라흐만의 아힘사는 자이나와 불교를 고무시킨 재료에 불과하다.” 자이나교와 불교 또한(우리가 아는 한) 고행의 요소로서 아힘사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더 오래된 고행 전통으로부터 채용한 것으로 보인다. 자이나교의 경우에는 파르슈바라는 이름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하여 생활양식으로서 아힘사의 기원은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없고, 추론이나 추측의 문제로 보인다.

본 논문의 목적은 아힘사의 기원에 관한 정확한 사회적 위치를 위한 다른 가설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필자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그보다는 아힘사의 발생에 내재한 동기(들)의 문제이다. 아힘사의 기원에 더 이상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 또한 곤란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문제를 두 가지 측면으로부터 고찰함으로써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잃어버린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두 측면이란 한편으로는 선행하는 제식주의적 베다 문헌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자이나교와 불교도 같이 아힘사를 지지하는 운동들의 초기 문헌으로부터이다. 생활양식으로서 아힘사의 기원이 제식주의 전통 안에서 발견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 전통은 여전히 다른 사회적 환경에서 생활양식으로서 아힘사를 발생시킨 동기(들)에 관해 약간의 정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2. 제식과 불살생―희생당한 제물의 복수

이러한 관점에서 베다에 나타나는 아힘사라는 단어가 여전히 신중하게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과 관련하여, 나는 슈미트5)의 의견을 취하고, 그것들을 일괄해서 폐기하는 보드위츠6)에 동의하지 않는다. 슈미트가 제출한 중기 베다 자료에는 실질적인 아힘사가 없고 오히려 제식적으로 아힘사로 위장된 힘사가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하우벤7)이 지적하였듯이, 제식주의자들이 그들 자신을 어떻게든 살상이나 상해와 분리시키기 위해, 혹은 제물에 사죄하기 위해, 혹은 제물들로부터 외형적인 동의를 얻기 위해 채택한 다양한 언어적, 제식적, 그리고 메타제식적 전략들은 명확히 심각한 곤혹스러움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곤혹스러움은 명백히 살아있는 생물(나무와 다른 식물, 물, 땅 그리고 심지어 예외적으로는 인공물도 포함하여)을 죽이거나 해치거나 상처 입히는 것으로부터 유래한다. 교묘한 제식적 조작은 이들 생물들을 해치지 않기 위해 명시적으로 수행되었다. 슈미트가 제출한 많은 문장 속에서 a큚im.sa칪ai는 보어로 살해당하는 생물들을 가리키는 목적어적 속격을 취하거나, 그러한 구문과 대응하는 동사구를 가진 능동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8)

슈미트가 제출한 이 문장들은 대부분 《마이트라야니 상히타(이하 MS)》로부터 인용되었으므로 꽤 초기에 속한다. 다른 상히타의 대응하는 문장에서는 또한 “[특히 땅을]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라는 단어 “a큝ru칞am.ka칞a칪a”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표현이 제식과 관련된 다른 텍스트에는 빠져 있지만 그것들은 적어도 베다 제식주의의 한 맥락에서는 살해에 대한 곤혹스러움이 명확히 감지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것이 철저히 희생 이데올로기의 일부분”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다른 한편 제관 자신과 연관된 수동적인 의미에서 a큚im.sa칪ai의 용법은 슈미트의 예문에서는 단 한 군데서 예증된다.9) 그렇다 하더라도, 적어도 살해나 상해로부터 유래한 곤혹스러움의 한 단면이 두려움이라고 가정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더 정확하게는 살아있는 생물을 죽이거나 상해를 입히면 어떤 형태로든 가해자 자신이(혹은 그의 자손이나 심지어 그의 소가) 같거나 비슷한 상해를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이것이 MS 3.1.8에 명확히 지적되어 있다.

거기에서 발견되는, 대지에 입힌 상해를 위장하기 위한 제구의 고안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관 자신이 고통을 입을 것이라는 관념에 명확한 동기를 두고 있다. 슈미트가 지적하였듯이, 이 상관관계의 본질은 다른 많은 문장들에서 더 분명해진다. 그 문장들은 사람이 제사를 통해 보호되지 않는다면, 소 혹은 인간에게 먹힌 어떤 생물이라도 타계(他界, yonder world)에서는 반대로 인간을 먹을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타계의 브르구(《샤타파타 브라흐마나(이하 S퀯) 11.6.1; 《자이미니야 브라흐마나(이하 JB)》 1.42-44)라는 유명한 설화에서 이 원리는 동물뿐 아니라 식물, 장작, 그리고 (S퀯에서는) 심지어 물에게도 명백하게 적용되어 있다.

롬멜(H. Lommel)을 따르면서, 슈미트10)는 “이 설화는 모든 것이 반대인 세계에 대한 개념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윤리적인 관념” 즉 형벌과는 “전혀 관계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 역전현상을 희생당한 생물이 가해자에게 복수한다는 관념에서 해석했다. 두 개념은 모두 민족학적 대응 개념으로 입증할 수 있다. 그것들이 전혀 호환불가능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실제로 S퀯의 브르구 설화의 표현법은, 제물이 타계에서 과거의 가해자에게 보복하면서 ‘지금 전생에서 우리들을 괴롭혔던 자들을 반대로(pra칣isaca칖ahai) 괴롭힌다’고 선언하는 한, 복수의 관념을 제시하고 있다. 더 명백한 것은 슈미트11)에 인용한 《바가바타 푸라나(Bha칐avata-Pura칗.a(이하 Bha칐P))》의 한 게송에서 볼 수 있다.

그가 무참하게 죽인 제물이 (지금) 가해자가 가한 고통을 기억하면서 분노와 함께 도끼로 가해자를 죽인다.(Bha칐P 4.28.26)

그리고 비슷하게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오 왕이여, 피조물의 주인이여! 보시오, (저 위에 있는) 생물들의 무리를, 그대가 제사에서 수천 번이나 무자비하게 죽였던 소를 보시오. 그들은 (지금) 그대의 잔인함을 기억하면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분노로 가득 차 그대가 죽은 후 쇠로 만든 뿔로 그대를 찢어버리려 하오. (Bha칐P 4.25.7-8)

이 게송들은, 확실히 특정한 반제식주의적 맥락에서 복수의 관념을 사용하고 있다(《마하바라타》와 《마누스므르티》에 삽입된 게송이 그것을 채식주의적 맥락에서 사용하듯이). 그러나 여기에서 필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타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매우 명확히 복수 행위로 이해한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보드위츠는 어떤 사람이 저지른 힘사와 그가 두려워하는 상해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12) 그는 “거기에는 자신의 힘사에 대한 어떤 속죄도 없고” 또한 “모든 베다 제식 문헌에는 아힘사의 개념이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일도” 없다. “어떤 브라흐마나(예를 들어 JB와 S큑칗?hB)에서는 심지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살해라는 행위, 심지어 직접적으로는 피투성이로 만들어 죽이는 행위에도 곤혹스러워 하지 않고, 살해당한 생물이 살해자를 어떻게든 복수하려 한다는 견해를 공유하지 않는 베다 제식주의의 한 흐름이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이것이 베다 제식주의의 더 본래적이고 주류적인 태도라 하더라도, 약간의 자료 혹은 문장은 명확히 다른 태도를 증언하고 있는 것을 거부하기는 어렵다.

브르구 설화에서 펼쳐진―그리고 더 많은 문장들에 의해 언급된―관점은 주류 베다적 제식주의에 대한 전형적인 것을 아닐 것이지만, 어쨌든 명백히 입증되고 그러므로 그렇게 존재했던 것이다. 그것이 만약, 보드위츠가 제시하듯이, 대중적인 견해의 반영으로 간주된다면 더욱 그러하다.

이 경우, 그것은 제식주의적 베다 환경에서 벗어나 더 널리 퍼졌을 것이다. 브르구 설화가 유래한 개연성 있는 원형이 정확히 어딘지를 결정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공통된 근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두 판본, 곧 “동부 기원”의 《샤타파타 브라흐마나》의 후대 부분과 갠지스강 유역 평원 남서쪽(불확실하지만 동쪽 변경)에 위치한 베다 학파에 속하는 《자이미니야 브라흐마나》―의 초기 부분―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중부 갠지스강 평원이 가능한 후보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지역이 브르구 설화의 세계관과 친화성이 있다는 가정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역이 적어도 자이나교와 불교의 고향이기도 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미 서술했듯이 살해자에게 복수하는 제물이라는 관념은 민속학적 문헌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인도 아대륙에 관하여 나는 로타나가가 입증한 것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개는…… 죽은 자에게 단지 복수하려고 하는 상처입은 적과 살해된 야생동물을 길에서 쫓아내었다.”13) 이와 연관된 견해는, 이미 현세에서 제물과 같은 종이 가해자나, 혹은 그 고기의 냄새를 통해 그것을 먹은 자를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팔리 율장에서 비구가 사자나 호랑이 혹은 다른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되는 이유로 제시된 견해와 같다. 이 견해는 인간의 부족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같은 종의 동물은 그들 중 하나가 살해되면 복수하려고 하는 부족과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슈미트는 S퀯의 다른 문장(3.8.5.8-10)을 언급한다. 그것에 따르면 제사를 통해 생물에 대한 살해나 상해를 무효화하는 것은 바루나의 속박으로 풀려났다는 것을 보증하는데, 그것은 바루나가 다른 살해자와 마찬가지로 제관도 처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제식주의자에게는 살해에 대한 곤혹스러움이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공포이기는 하지만 이 경우는 확실히 신비적인 힘이 포함되어 있다), 적어도 살해와 상해가 그 자체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한다. 나는 이것이 브르구 설화에서 복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제구가 속죄(pra칪as큓itti, nis.kr.ti)로 불렸다는 사실14)에 의해서도 표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결정하지 않은 채 남겨둔다. 왜냐하면 “속죄”라는 개념은 단순히 죄를 피하는 것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 단어에는 포함되지 않는 관념을 상기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15)

만약 두려움만이 살해와 상해에 대한 곤혹스러움의 원인이라면, 왜 제식주의자들이 살해를 포기하지 않았는가가 쉽게 설명된다. 그들이 제구가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한, 엄숙한 제사나 혹은 식용을 위한―제례적?―도축과 같이 목적이 있는 행위와 관련이 있다면 살해를 중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곤혹스러움이 잘못된 행위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하더라도, 사회 경제적 상황이 집단(가족, 부족)의 장성한―남자―구성으로 하여금 그러한 행위를 그만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브르구 설화가 다양한 소비 상황(즉 먹는 것, 마시는 것 그리고 연료로 사용하는 것)과 S퀯본의 몇 가지 예에서는, 그 직전에 이루어지는 살을 바르는 행위를 묘사하지만, 살해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살을 바르거나 먹는 행위 속에 전제되거나 아마도 함축된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흥미롭다. 이것은 먹는 것과 살해가 떨어질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고 느껴졌다는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중요한 점은 브르구 설화는 제사에서 제례적 살해에 관한 것이 아니라―적어도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오히려 장작과 고기, 야채 그리고 물 S퀯에서만의 사용을 포함한―일상적 소비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텍스트는 동물과 식물, 그리고 물(S퀯) 사이에 어떤 차이도 두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소비자에게 복수한다. 그 모든 것이 소비에 의해(예를 들면 물) 혹은 소비를 위해(예를 들면 소) 살해되는 것을 고통스러워 하는 살아있는 생물로 간주되지 않는 한, 이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살해와 고통을 포함한 모든 먹는 행위는 곤혹스러운 것이고, 복수라는 관점에서 그것은 비참한 결과를 수반한다. 그러나 인간은 음식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제식주의자가 모든 소비과정을 복수를 방지하는 능력이 보증된 아그니호트라 제례에 끼워넣음으로써,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제사에 기대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3. 살해와 소비의 분리

물론 브르구 설화는 아힘사(심지어 제식적으로 힘사를 위장한다는 의미에서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제식적으로 방지하는 것만을 가르친다)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설화는, 제사를 통해 딜레마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무슨 이유로든 효과적이지 않고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되자마자, 진정한 아힘사에 대한 가능한 출발점과 동기부여라고 슈미트가 바르게 간주했던 일군의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이 사실은 이러한 일군의 믿음들, 혹은 그것과 밀접히 연관된 믿음, 곧 상해를 입히면 그와 같은 종으로부터 복수를 당할 것이라는 믿음이 필연적으로 유일한 출발점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힘사의 중요한 측면은 매우 다른 원초적인 동기를 가질 것이다. 예를 들면 곤충을 죽이지 않는 것은 점차 더위와 추위 혹은 배고픔과 목마름을 견디는 것으로 종종 나타나는데, 그것은 고행(tapas)의 한 요소로서 고난을 감수하는 고행자의 능력을 나타내는 예이다. 그것의 목표는 아힘사라기보다는 차라리 비범한 능력의 집적이나 어떤 은총의 획득, 혹은 번뇌를 태워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본 논문의 목적은 포괄적인 것이 아니라, 슈미트의 접근에 어느 정도 기초하여, 아힘사의 실천과 태도로 이끈 적어도 하나의,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소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 요소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브르구 설화에서 표현된 혹은 반영된 생물과 사후에 관한 관점들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만약 그 문제에 관한 제식적인 해결책은 폐기하지만 동물 뿐 아니라 식물과 씨앗, 그리고 아마도 물까지도 살해당하거나 상처받는 것을 꺼리는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관념과 그들을 살해하거나 상처를 입히면 내세에서 복수를 당할 것이라는 관념을 유지한다면, 유일하게 안전한 방법은 어떤 것도 죽이거나 해치지 않는 것 즉 완전한 아힘사가 논리적인 결론일 것이기 때문이다.

브르구 설화에서 그 딜레마가 자세히 이야기된 곳은 유일하게 소비/음식의 맥락에서다. 그러나 같은 난점이 또한 다른 상황, 예를 들어 위험한 동물이나 성가신 곤충을 피하는 것이나 잡초를 뽑는 것에서도 명백히 발생한다. 그러나 의심할 바 없이 소비―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 그러한 맥락에서 요리하는 것―가 가장 결정적인 문제다. 만약 소비되어야 할 모든 것이, 혹은 거의 모든 것이 살아있는 것이고, 소비를 위해(혹은 소비에 의해) 살해되어야 한다면, 살해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발적인 아사로 나타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것은 실재로 힌두 법경류에 언급된 일군의 자이나 교도와 고행자가 최종적으로 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관되지는 않지만 보다 실용적인 해결책이 있다. 살해와 소비를 분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음식을 무생물이나 식물에서 떨어진 부분 혹은 맹수가 사냥감을 먹고 남긴 것으로 한정하는 것이나, 탁발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으로 성취할 수 있다. 베다 학습자(brahmaca칞in)의 생활방식 중 한 요소이기도 한 탁발은, 잘 알려져 있듯이, 자이나교와 불교의 비구(그리고 비구니)는 물론 법경류에 묘사된 자들을 포함한, 다른 교파의 유행승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이런 방법조차 출가하기 전에 그들이 그랬듯이, 생계를 가장이나 평신도들에게 의존하는 소수에게만 열려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이러한 해결책은, 비록 적어도 자이나 승려들은 그들이 다만 자투리만 얻고 어떤 음식도 승려를 위해 특별히 입수했거나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려고는 하지만, 보통 가장이 살해를 행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어쨌든 이 패턴에 따르면 가장은 아힘사의 이상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초기 자이나교와 불교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초기 베다 시대와는 매우 달라졌다. 가축을 중심으로 한 반유목 경제는 점차 현저하게 정주성의 농경적인 생활양식으로 변화하고, 마침내는 도시화하였다. 팔리 경전을 통해 수집할 수 있듯이, 고기의 공급에 관한 한 도시에는 양과 돼지, 소 등을 전문적으로 도축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도시에서는 육식과 살해를 더 많이 분리할 수 있게 되었고, 적어도 동물의 경우에는, 일반인들도 육식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살해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힘사를 생활양식의 한 요소로 확산시킨 그러한 운동의 초기 자료에서 실재로 타계에서 복수에 대한 두려움이 아힘사의 동기로 발견되는가, 그리고 그것이 유일한 동기인가 아닌가? 그리고 거기에는 브르구 설화에서 표현되는 관점과 어떤 연관점이 있는가? 이 논문에서는 자이나교와 불교 그리고 힌두교의 자료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에 기초하여 이들 질문에 대답할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주로 자이나교와 불교로부터 골라낸 문장에 기초하여 예비적인 대답을 주는 것이다.

4. 업설의 도입

1) 자이나교의 경우

보편적인 아힘사를 강조하는 가장 유명한 문장 중 하나는 《아야랑가(A칪a칞an?a(이하 A칪a칞))》 제1장이다(특히 Sttha-parinna?. 그것은 윤회의 주체로서 자아(a칪a?= a칣man)를 가졌다는 것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를 구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한 자아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이 모든 종류의 (대부분 바람직하지 않은) 존재들 사이로 윤회하는 이유는 자신의 행위, 특히 동물과 식물 혹은 요소들에 대한 폭력과 살해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이나 고행승은 해로운 행위 전체를 인지하고 그 행위를 멈추어야 한다. 주된 동기는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을 혐오하고 심지어 환멸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존재들은, 자신의 폭력이 사후에 대부분 바람직하지 않는 존재로 재생하는 것을 초래하여 자신의 불행을 영속시킨다는 것을 모른 채, 스스로 불행하면서도 다른 존재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생존하고 있는) 세계는 괴롭고 비참하며 교화하기 힘들고 식별력이 없다.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서, 보라, (존재들은 비록 스스로) 괴로워하면서도 모든 곳에서 갖가지로(?) 다른 존재들을 괴롭힌다. ……어떤 사람이 ……생물을 해칠 때 ……이것은 그에게 불행을 초래할 것이다.(A칪a칞 p. 2,3-15)

그러나 이것은 고행자로 하여금 살해와 다른 폭력 행위들을 그만 두게 하는 윤회의 부침과 고통뿐만 아니라 곤혹스러움도 혐오하는 것이다. “보라. (보통 사람들과)(?), 달리 부끄러움을 느끼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lajjama칗.a?pud.ho pa칢a) 반면에, 이 문장에서 “자아” 즉 영혼(a칪a? a칣man) 개념은 간접적으로만 살해나 폭력을 그만 두도록 결심하는데 기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후 세계의 존재를 보장하고, 그리하여 악행의 과보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는 서로 죽이고 죽는 것이 편재한다는 것에 대한 공포는 A칪a칞 Ⅰ.6.1.2-4에서도 동기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텍스트는 윤회 속에서 생물들에게 생기는 괴로움의 다양한 측면을 지적한 후 설한다.

“생물들이 생물들을 괴롭힌다! 보라, (이것이 이) 세상에서 큰 위험이다. 생물들은 실로 많은 고통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 자신도) 괴로우면서 (다른 생물들을) 괴롭힐 것이다 …… 보라, 성자여, 이것은 큰 위험이다. (그러므로) 결코 어떤 (생물도) 죽여서는 안 된다.”

다른 예는 A칪a칞 Ⅰ.3.2.3이다.

그러므로 살해하기를 그치고, 영웅은 빛이 되어 가면서(즉 세계의 정점에 있는 해탈한 영혼이 머무는 곳으로 오르면서) 슬픔을 끊을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hi) …… 인간들 사이에서 [낮은 존재로 출생하는 급류에서] 벗어나는 (기회를) 가지면서, 그는 생물들의 생명을 뺏아서는 안되(고 그것 때문에 재생의 악순환으로부터 탈출하는 이 유일한 기회를 버려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도 역시, 살해가 초래하는 강화된 재생과 괴로움이라는 나쁜 결과를 피하고, 궁극적인 해탈을 얻고자 하는 바램이 살해를 그만두게 하는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아야랑가》에서 이러한 종류의 동기부여를 마지막 예로서 A칪a칞 Ⅰ.9.1.11-15.를 살펴보자. 여기에서는 아힘사에 대한 마하비라 자신의 동기부여가 언급되어 있다. 먼저 그는 식물과 씨앗 뿐 아니라 흙과 미세한 요소까지 포함한 생명과 유정물의 정확한 범위를 깨닫는다.

그 후 그는 생물들이 그들 각자의 업에 의해 어떤 형태로든 재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 모두를 해치지 않기로 결심한다. 정지된 존재가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정지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업과 그 재앙적 결과(“어리석은 자는 그의 [업이라는] 짐과 함께 파멸할 것이다: sovahie hu luppa┓ ba칕e”)를 완전하게 이해하므로, 악행을 그만둔다. 여기서도 또한 아힘사에 대한 주요한 동기는 생물을 살해하거나 해치는 것이 초래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피하고자 하는 바램으로 보인다.

그것은 심지어 행위자로 하여금 정지된 생물로도 재생하게 한다. 그러나 브르구 설화와 관련해서 특별히 흥미로운 점은 여기에서 정지한 생물과 움직일 수 있는 생물이라는 기본 범주의 상호 전환을 언급하는 것이다. 나는 타계에서의 인간과 제물(식물 즉 정지한 생물을 포함하여)의 역할 전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자이나교의 세계관에서 보복은 평범하게 제물이 살해자에게 개별적으로 복수한다는 측면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업의 과보라는 측면에서 인식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비인격적인 차원에서 행위자와 제물, 음식과 그것을 먹는 자의 관계역전은 보존된 것으로 보인다.
생물을 해치거나 살해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업의 결과를 언급함으로써 아힘사에 단도직입적으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다사베얄리야(Dasaveya칕iya, 이하 Dasav)》에서 발견된다.

“걸으면서 생물을 상처 입히는 자는(즉 명백히 비구) 악업에 묶인다. 이것은 쓰라린 과보를 수반한다.”(Dasav 4, 게송 1, 등)

“절제된 …… (비구들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땅(/물/식물/동물)을 해치지 않는다. 땅(즉 땅이라는 생물)을 해치는 자는 틀림없이 또한 그 속에 사는 많은 (작은) 움직이는 생물(즉 동물)을 해친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보이고 어떤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이 악취(duggai)로 재생하는 것을 조장하는 악행이라는 것을 알고, 일생 동안 땅을 해치는 것을 피해야 한다.”(Dasav 6.27-29)

사후에 악행을 저지른 자를 기다리는 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지옥에서 그들에게 가해지는 고문을 서술하는 《수야가다(Su칪agad.a, 이하 Su칪)》Ⅰ.5에 풍부하다. 지옥의 고문을 받아야만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격렬하고 잔인한 살해를 즐긴 자들이고(5.1.4-5), 마지막 부분에서는(5.2.24) 이들 지옥 이야기를 들은 현명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떤 (생물)도 해치거나 살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명백히 서술하고 있다.

주로 타계에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과 관련된 것을 차치하면, 브르구 설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고문이 인간의 모습과 매우 유사한 생물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브르구 설화에서 그 생물은 이 세상에서 그들을 잘라 먹은 자들을 반대로 잘라 먹는다.

확실히 수야가다에서 고문하는 생물은, 내가 알 수 있는 한, 명백히 전생의 제물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한 곳에서(5.2.19) 그들은 “전생의 적(puvva-m-ar┓)”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그들이 “(비슷한) 형벌에 의해, 전생에 저지른 악행의 모든 (희생자를) 상기한다”고 말한다. 야코비16)처럼 “비슷한” 이라는 단어를 보충하는 것은 5.1.26과 특히 “미래에는 이전에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입힌 것과 정확히 같은 (고문을) 당한다”하고 명확히 서술되어 있는 5.2.23에서 정당화할 수 있다. 실제로 묘사된 많은 고문은 인간이 동물이나(예를 들어 5.1.15; 5.2.2-3; 15-16), 몇몇 곳에는 아마도 식물(5.1.14; 5.2.14)과 씨앗 혹은 수액을 채취하는 식물(5.2.19)에게 가한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몇몇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명확히 서술되어 있다. 예를 들면, “고기가 산 채로 불위에 놓이듯, 그들은 거기에 눕혀져 구워진다”, 혹은 “사람들이 사로잡힌 위험한 맹수(〈s큩a칛ada(ka)?; Jacobi: 돼지 곧 soariya?)에게 했던 것과 같이 (처형자는) 날카로운 창으로 그들을 고문한다. 가끔(5.2.7과 9) 지옥에 태어난 존재들은 동물에게 잡아먹힌다고 한다.

힌두 전통의 아힘사적 맥락에는 많은 비슷한 자료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위에서 인용된 바가바타 푸라나로부터의 문장에 덧붙여, 같은 텍스트의 다른 문장을 보충하여 언급하는 것으로 제한한다. 여기서는 지옥에 대해 묘사하면서, 동물을 죽이거나 고문해서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반대로 지옥에서 같은 취급을 겪는다고 서술된다.

어떤 경우에는, 처벌이 야마(Yama)의 시종에 의해 수행된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브르구 설화와 꼭 마찬가지로 이전의 희생자(혹은 적어도 이전의 희생자를 포함하여)가 자신을 해친 자에게 복수한다. 그리하여 Bha칐P 5.26.11에는, 규환지옥에 사슴으로 태어난 후,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생물을 해치는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이들이 그를 해칠 것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물론 여기에서 그 사슴은 무해한 동물이 아니라 텍스트가 명확히 서술하듯이 뱀보다도 잔인한 어떤 종류의 육식동물이다. 5.26.17에 따르면, 이 생에서 신이 (특정한) 음식―예를 들어 인간의 피―을 (먹고 살도록) 정해놓고 그것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모기, 이, 벌레, 파리와 같은) 생물을 해치거(나 죽인) 사람은, 내세에 이들 생물에 대한 적의로 말미암아 이들 생물이 반대로 그를 공격하는 ‘깊은 우물[지옥]’에 떨어진다.

2) 불교의 경우

불교문헌에서도 산발적으로 살해자를 복수하는 초기 관점의 흔적을 보인다. 《상윳타니카야》17)는 비구가 기묘한 귀신을 목격한 것을 이야기하고, 붓다가 그 업의 배경을 설명하는 일군의 경전을 포함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귀신이 변형된 사람 모습으로 공중을 나르고 있고 그를 육식의 조류가 쫓고 공격한다. 어떤 귀신들은 전생에 인간이었을 때 ‘직업적인’ 도살자라고 선언된다.

육식 조류에 의해 쫓기고 공격을 당하는 그들 존재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오직 이 경우뿐이다. 살해자에게 복수하는 제물이라는 오랜 관념의 잔재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새 사냥꾼의 경우 뿐 아니라 소, 양, 돼지 도살자의 경우에도 새가 복수하는가. 아마도 새 만이 하늘을 나르는 귀신을 사냥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살해자에게 복수하거나 (혹은 그를 처벌하는) 것은 더 이상 살해된 동물이 아니고 같은 종도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여전히 동물인 것은 확실하다.

약간 다른 것은 동물을 죽인 사람이 정확히 같은 종류의 동물로 태어나 비슷한 죽음을 당하는 사례이다. 예를 들면 숫양을 (여러 번) 제물로 바친 브라흐민은 숫양으로 태어나 반대로 브라흐민에 의해 제물로 바쳐진다. 그러나 그 브라흐민이 전생의 숫양과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에 비인격화한 복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교 경전은 내세나 심지어 현세에서 받을 악행의 과보를 지적함으로써 살아있는 존재를 죽이지 말도록 하는(pa칗.a칣ipa칣a) 설법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때로는 그 공식화가 여전히 복수의 관념 중 하나를 막연히 떠올리게 한다. 그리하여 《앙구타라니카야(An?ttaranika칪a, 이하 AN)》 Ⅲ 205에서는, 생물을 죽인 사람은 현세 혹은 (사후의) 내세에서 위험과 적대감을 초래한다고 한다. 그리고 AN Ⅳ 246에서는 의도적이(고 아마도 명확히 선언된) 살해의 자제는 헤아릴 수 없는 생물들에게, 위험이 아니고 적이 아니며 그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선물을 주는 것을 의미하고, [보답으로 그들로부터] 같은 선물을 받는다고 하는 보완적인 관념이 표현된다.

공격당하는 것을 방지하는 방법으로서 이러한 아힘사의 적용―혹은 그러한 맥락에서 자비(metta?―은 힌두 자료에서 증명되듯이, 확실히 고행자와 산야신(특히 모든 종류의 잠재적으로 위험한 동물이 사는 황야에 사는)에게 적합하다. 그러나 지금 제시된 불교 자료로부터의 문장은 평신도에게 관한 것이다. 그들과 관련해서 현세에서 초래할 수 있는 악행의 바람직하지 않는 과보는, 다른 문장에서 왕이나 사회적인 악평에 의한 처벌이라는 관점에서 묘사되었고, 사후에는 종종 지옥에 떨어지거나 그보다는 덜하지만 축생으로 태어나는 등 악취에 태어나는 것을 초래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사후에 받는 나쁜 과보를 지적함으로써 평신도로 하여금 생물을 죽이지 않도록 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나타나는 것은 행복한 내세, 특히 천상에 태어나는 전망을 제공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살해를 그만두도록 그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식주의적인 베다 종교에서는 제사를 통해 성취되는 것에 대한 불교적 대안(들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식물(요소들은 말할 것도 없고)을 제외하고, 업과 관련한 상해를 의도적이거나 적어도 의식적인 살해로 제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많은 평신도에게조차 살해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 실행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5. 공감에 의한 불살생

1) 불교의 경우

자이나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또한 불교에서도 생물을 살해하지 않는 것이 궁극적인 해탈도(초기 단계에서는 비구와 비구니를 위해 고안된)의 한 요소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한편으로 살해를 포기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재생에서 벗어나는 것 사이의 연관은 덜 직접적이다. 윤회에 속박되는 원인은 본질적으로 행위(그리고 특히 생물을 죽이는 것과 같은 악행)이 아니라 특히 욕망(“갈애”: tr.s.n.a? 혹은 탐욕(lobha), 분노(dosa/dves.a) 그리고 무지(moha)다.

그리고 생물을 죽이는 것과 같은 악행은 그로부터 파생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해탈도와 관련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살해를 그만두도록 동기부여하기 위해 언급되는 것은 살해가 사후에 초래하는 바람직하지 않거나 무서운 결과가 아니다(살해를 그만둠으로써 획득되는 천상의 과보도 아니다. 궁극적인 해탈을 추구하는 사람은 더 이상 그것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구제론적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생물을 죽이는 것이 무자비함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반면 비구는 모든 생물에 대한 염려나 자애로운 동정(daya? 그리고 연민이라는 태도에서 어떤 생물도 죽이지 않는다.

게다가 이러한 태도는 여전히 초기단계에서 천상에 태어나기를 열망하는 신앙심이 깊은 평신도에게 이상적인 것으로 추천되었다. 이러한 개념으로 표현되는 동기부여는 사후에 고통스런 과보를 언급하는 것과는 매우 달라 보인다. 그것은 공포가 아니라 공감이다. 곧 다른 사람의 느낌에 참여하는 능력, 혹은 더 구체적으로는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도 고통과 죽음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능력과 그에 알맞게 그들을 대하는 능력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후기 불교 문헌 뿐 아니라 원시 경전에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살생하지 않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황금율이라는 명확한 형태로 때때로 규범화된 것은 이러한 공감의 태도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하여 추측컨대 《숫타니파타》에서도 꽤 고층에 속하는 게송에서 비구는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생물을 적대시하거나 공격하면 안된다고 설한 직후에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내가 그렇듯이 이들도 그러하다; 이들이 그렇듯이 나도 그렇다’ 자신을 비교(의 기준으로) 삼아, 그는 (스스로) 죽이거나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죽이게 해서는 안 된다.”(SN 705)

비슷하게 《법구경》(129-130)에서 설한다.

모든 (존재들은) 폭력을 무서워하고, 모두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자신을 비교(의 기준으로) 삼아, 그는 (스스로) 죽이거나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죽이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존재들은) 폭력을 무서워하고 모두는 삶을 좋아한다. 자신을 비교(의 기준으로) 삼아, 그는 (스스로) 죽이거나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죽이게 해서는 안 된다.

《상윳타니카야》의 산문 경전에서, 결론은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한정되었지만, 황금율의 전체가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 뿐 아니라 바람직한 것도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되었음을 볼 수 있다.

“실로 나는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싫어한다. 내가 살기 등등을 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내 목숨을 뺏는 것은 기분 좋고 즐거운 일은 아닐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역시, 내가 그의 목숨을 뺏는 것은 기분 나쁘고 불쾌한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도) 살기 등등을 원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기분 나쁘고 불쾌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기분 나쁘고 불쾌한 것은 명확하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 자신에게 기분 나쁘고 불쾌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할 것인가.”(SN Ⅴ 353.29)
첫 두 가지 예가 초기불교 운문 텍스트라는 사실은, 살해하지 않는 것 즉 아힘사에 대한 명확히 윤리적인 동기부여가(cf. Uda칗a 5.1), 고행운동의 초기 맥락으로부터 불교가 물려받은 태도와 이상에 유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2) 자이나교의 경우

실제로 자이나교에서도 역시 불교에서만큼 자주 아힘사에 대해 동정(daya?뿐 아니라 황금율에 의해 동기를 부여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자이나교의 소위 “원시경전”에서 완벽하게 명시적인 공식화는 드문 것으로 보이지만 구성요소들은([a] 모든 생물에서 느낌과 반응은 비슷하다는 가정 [b] 자기자신과의 유비, 그리고 [c] 윤리적 결론)은 자주 발견된다. 약간의 예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즉 모든 생물을 …… 죽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다른 스승들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모든 생물을 때려서는 안 되고, 지배해서는 안 되며, 학대해서는 안 되고, 괴롭혀서는 안 되며, 죽여서는 안 된다. …… 이것이 성자들이 설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스승들) 각자에게 물을 것이다. ‘그대 논쟁자들이여, 고통은 그대에게 즐거운 것인가, 즐겁지 않은 것인가?’ 그리고 만약 그가 [이 문제를] 잘 이해했다면, 그는 대답할 것이다. ‘모든 생물들에게 ……고통은 즐겁지 않고, 큰 두려움(의 원인)이다.’”(A칪a칞Ⅰ.4.2.5-6)

위 인용문이 황금율(충분히 논리적인 귀결은 아니지만)의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반면에, A칪a칞Ⅰ.2.3.4(p. 8, 23-26)에서는 모든 생물이 즐거움을 좋아하고 살기를 원하며 고통과 살해를 싫어하지만(즉 [a]), 이 사실로부터 살해를 그만두는 것 곧 아힘사를 도출하려는 시도는 없음을 명확히 서술하고 있다.
Dasav에서 인용한 다음 문장은 자신과의 유비[b]에 대한 명확한 언급을 결여하고 있다.

“모든 생물은(j┓va) 예외없이(vi) 살기를 원하고 살해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속박을 벗어난 자(=자이나 비구들)들은 두려운 살해(행위)를 피한다.”(Dasav 6.11)

다른 한편으로 Dasav 10.5는 유비를 설하지만 그것을 즐거움과 고통의 느낌 등에 명확히 적용하지 않는다. 곧 [a]의 명확한 서술을 결여하고 있다.

“육도에 윤회하는 모든 (생물을) 자신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다섯 가지 큰 서원(즉 생물을 살해하지 않는 것 등)을 받아들인 자는 …… (진정한) 비구다.”

비슷하게 Su칪Ⅰ.11.33에서 설한다.

“세간의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을 자신(이 대우받기를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하도록) 노력하면서 유행해야 한다.”


Dasav 4.10(p. 15; J S 64)도 완벽한 절제(즉 모든 생물을 죽이지 않는 것)로 이끄는 것으로서 동정(daya?를 언급한다. 동정은 전제가 되는 지식, 곧 무엇이 살아있는 유정물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직전의 게송인 4.9는 savva-bhu칪-appa-bhu칪a, 곧 자이나 고행자를 “모든 존재를 자기(와 같은) 것”으로 보는 사람으로 특징지우는 표현, 다시 말해 Cu칞n.i가 황금율의 관점에서 설명한 표현을 사용했다.

슈미트18)가 이미 지적했듯이 “동정(daya?”라는 개념은 브라흐만적인 법경류와 《마하바라타》에서도 발견된다. 거기에는 동정(daya?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타날 뿐 아니라 황금율의 명확한 표현도 다소 있다.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또 다른 점은 Dasav에 나타나는 sarva-bhu칣a늯ma-bhu칣a라는 표현이 마하바라타에서 아힘사의 동기부여와 관련하여 매우 자주 나타난다는 것이다.

6. 공포와 공감의 공통분모

결론적으로 초기 자이나교와 불교의 자료에서 (그리고 베다 이후의 힌두교 문헌에서) 아힘사 곧 생물을 살해하거나 해치지 않는 것에 대한 동기부여는 (적어도) 두 가지 다른 중대한 논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① 이 세상에서, 특히 타계와 사후에 바람직하지 않거나 심지어 공포스러운 결과를 지적함에 의해, ② 황금율에 의해서이다. 첫 번째 동기부여는 바로 브르구 설화를 그 배경으로 떠올리게 하는 형태로 제시되었다.

그것은 ‘눈에는 눈’ 식의 복수와 매우 유사한 형태에서 그들이 행한대로 보복한다는 요소를 강조하며, 때로는 제물이 복수한다는 관념도 제시한다. 이 동기부여의 주된 정조는 의심할 바 없이 공포다. 이에 반하여 두 번째 동기부여는 완전히 공감에 기초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두 동기부여는 전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삶에 대한 마술적-제식주의적 금기”19)처럼 보이고, 둘째는 진정으로 윤리적이다. 브르구 설화의 관점에서는 알스도르프20)를 따르고 싶을 수도 있다.

그는 첫째 동기를 숙고하면서 아힘사에 대한 유사-터부적인 동기부여가 원래적인 것이고 윤리적인 동기부여는 후대의 발전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아힘사의 기원에 관해 풀리지 않은 문제점 하나와 다른 하나의 풀리지 않은 문제점, 곧 실질적으로 익명의 문헌으로부터의 관련 단편들을 상대적인 연대순으로 배열해야한다는 점에서 나는 이 문제에 관해서는 어떤 판단도 삼가하고자 한다.

그러나 내가 지적하고 싶은 점은 두 가지 동기부여 사이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전자를 자세히 분석하면 그 두 가지가 결국 완전히 회통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동일한 배경으로부터 도출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브르구 설화에 포함된 관념 즉 타계에서 제물이 자신을 먹거나 죽인 자에게 복수하려 하거나 (혹은 그러한 맥락에서 제물과 같은 종류가 심지어 이 세상에서 그렇게 한다)는 관념은 명백하게 제물(혹은 동종)이―정서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그들에게(혹은 친척이나 동종에게) 가해진 상해에 대해 가해자가 그런 것과 다소 동일한 방식으로, 반응한다는 관점을 전제로 한다.

가해자가 상처받거나 살해당하는 것을 (혹은 친척을 잃는 것을)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물도 (혹은 그의 동종도) 그렇다. 가해자가 복수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물도 (혹은 그의 동종도) 그렇다. 제물이 타계에서 가해자에게 복수한다는 관념은 적어도 직관적으로 다른 생물의 느낌이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느낌과 유사하다는 의미에서, 어렴풋한 공감을 전제로 한다.

동물뿐 아니라 식물조차 (물과 다른 요소들은 제외하더라도) 정확하게 인간과 같이 느낀다고 하는 전제는 현대 유럽인에게는 다소 낮선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소위 고등생물에 관한 한 고통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서 인간과 다소 유사한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하등” 생물이나 식물이 이 맥락에서 실제로 무엇을 “느끼는지” 우리는 아는가? 어쨌든 결정적인 문제는 복수를 바라는 제물이라는 관점이 어느 정도의 공감, 혹은 적어도 자신과의 유비를 통해 어느 정도 다른 생물을 이해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이 공감이 공포 혹은 살해와 상해에 관련한 곤혹스러움으로 표현될 수 있다.

제사를 통해 복수로부터 보호된다는 것이 어떤 이유로든 포기되거나 무용한 것으로 간주될 때 공포는 진정한 아힘사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살해에 대한 곤혹스러움, 즉 공감이 힘을 얻고 자신을 자각하는 진정한 공감이 되었기 때문에, 생활양식의 기초적인 요소로서 진정한 아힘사가 나타났거나 적어도 진전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하여 제식주의자의 회피방식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고(사회경제적 환경의 변화 덕분에 아마 더 이상 필연적인 것이 아니게 되었을 것이다), 살해에 대한 곤혹스러움 즉 공감이 스스로를 동정(daya?과 황금율로 표현하게 되었다.

이러한 발전에 기여한 베다 종교에서 다른 맥락이 있는지 조사하는 것은 본 논문의 범위를 벗어난다. 마찬가지로 무엇보다 먼저 마하바라타에서, 특히 위에서 언급한 개념인 ‘모든 존재를 자기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sarvabhu칣a칣mabhu칣a)’와 관련해서 초기 힌두 자료에서 발견되는 관련된 자료를 정밀히 검토하는 것도 유익하다. 그러한 검토는 의심할 바 없이 하라 교수에게 헌정된 이 책에 더욱 더 적당할 것이다. ■

김성철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동국대와 가산불교문화연구원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논문으로 〈유가행파 수행에서 意言의 역할과 의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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