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숙 동국대 인도철학과 강사

1.고타마 붓다와 나타 붓다

불교의 개조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뒤에 ‘고타마(Gotama)족 출신의 성인’이라는 뜻으로 ‘고타마 붓다(Buddha)’라고 불렸듯이, 자이나교의 개조인 바르다마나(Vardhama칗a)는 나타(Na칣a)족 출신의 성인이라는 뜻에서 ‘나타 붓다’로 불렸다.

후대에 이르러 바르다마나는 나타 붓다라는 칭호보다는 ‘지나(Jina) 마하비라(Maha칥┓ra)’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붓다는 고타마를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었다.

그렇지만 본래 ‘붓다, 지나, 마하비라, 아르하트(arhat)’ 등의 용어는 인도에서 깨달음이나 해탈을 성취한 이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보통 명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용어가 불교와 자이나교의 교세 확장과 더불어 각각의 인물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단어로 굳어진 것이다.

교조에 대한 이러한 호칭에서도 보듯이, 불교와 자이나교는 많은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각각의 개조인 고타마 붓다와 마하비라의 생존 연대와 활동 범위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생에서도 유사한 점이 많으며, 그들의 사상 또한 흡사한 점이 매우 많았다. 그런 까닭에 힌두교의 문헌에서 두 교의를 혼동한다든지, 근세 서양의 학자들이 불교와 자이나교, 붓다와 마하비라를 서로 동일하다고 보았던 해프닝도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와 같은 혼동은 힌두교 속에 불교와 자이나교가 포섭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만큼 유치한 지식 수준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점에서 두 사상이 교차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아직도 힌두교 쪽에서는 자이나교나 불교가 힌두교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별개의 힌두 교파쯤으로 여기는 태도 또한 상존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두 사상이 각기 다른 차이를 드러내는 점들 또한 적지 않다.

두 종교는 각각 고유한 성전(聖典)을 가지고 있으며, 철학적 견해에서 볼 때 특히 상이점이 두드러진다. 그 중에서 극명하게 대립되는 사항으로는 영혼 내지 자아(自我)에 대한 견해를 들 수 있다.

자이나교에서는 영혼의 실재를 인정하고 있는 반면에, 불교에서는 영혼의 실재성을 부인한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두 사상의 성립 초기부터 첨예한 대립으로 나타났다. 소위 ‘무아설(無我說)’이 불교의 핵심 교리로서 인정받고 있듯이, 영혼이 실재한다는 것 또한 자이나교의 중심 교의로서 고금의 모든 자이나 학파에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붓다가 주장했던 무아설 내지 5온설은 영혼의 존재를 주장하는 입장에 대한 반박을 토대로 하여 성립된 설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필자는 두 교파의 중심적 교의라 할 만한 영혼론에 대한 입장의 대립은 두 교설이 독자적으로 발전한 별개의 사상 체계라는 점을 입증하고도 남을 만큼 중요한 차이라고 본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영혼에 대한 불교와 자이나교의 논박을 중심으로 하여, 불교 경전 속에 나타난 자이나교와 불교의 논쟁을 살펴본 뒤, 양자 대론의 특징과 그 쟁점에 대해서 재론해 보고자 한다.

2. 불교 경전 속의 자이나교

인도 철학사의 특징 중의 하나로서, 논쟁을 통한 발전이란 점이 꼽힐 정도로 인도에서는 각 학파간의 대론과 논쟁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다. 불교 또한 성립 초기부터 그러한 논쟁을 피할 수 없었다. 도리어 그러한 논쟁 끝에 승리한 만큼 교단을 이루고 발전을 거듭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으로 시작된 불교는 후대에 ‘육사 외도(六師外道)’로 불렸던 당대의 사상적 지도자들과 대론을 시작함으로써 그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육사 외도, 그들 중 첫 손에 꼽히는 외도가 흔히 ‘니간타’(Nigan.t.ha)로 일컬어지는 자이나 교단이었다. 니간타들은 초기 불교 경전에 수도 없이 등장하여, 범지(梵志)로 불리는 브라마나(Bra칑man.a) 교단에 못지 않은 대론을 펼치곤 한다. 특히 니간타를 지칭하는 불전의 용례들은 붓다 당시에 니간타를 바라보는 인도인의 시각을 짐작하게 해주는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마하비라를 가리킬 때는 대웅(大雄, Maha칥┓ra) 야제자(若提子, Jn쁝칣iputra), 니건타(尼乾陀) 야제자, 니건련타야제불달라(泥健連他若提弗?羅), 니건친자(尼乾親子), 친자(親子, Na칣aputta), 노체친남(露體親男) 등으로 한역(漢譯)하여 불렀지만, 일반적인 자이나 수행자들은 노행(露行) 외도, 나형(裸形) 외도, 무참(無?) 외도, 노형(露形) 외도, 무참자(無慙子) 등으로 불렸다. 이는 자이나 수행자들이 옷을 입지 않은 채로 돌아다니는 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리고 일설에 의하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호칭인 니건자(尼乾子)는 백의파의 자이나 교도를 지칭하며, 공의파는 나형 외도라 구분했다고 한다. 그러나 두 파의 교의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수행 방법상 옷의 착용 여부만 다를 뿐이기 때문에 그러한 구분은 큰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고 본다. 따라서 두 경우 모두 자이나교를 지칭한 것으로서, 타 학파와의 교의 논쟁을 말할 때 그러한 구분의 실익은 거의 없다고 본다.
불교도들은 통칭하여 말하기를, 자이나 교도들이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없다. 신심도 없고 그릇되다. 다른 이들을 깔보고 탐욕스럽고 고집이 세다.’라는 등으로 폄하하기 일쑤였다.

물론 자이나교 쪽에서도 불교의 비구들이 ‘도둑과 같다’는 식의 수식을 써서 비난하기도 한다. 특히 불교 수행자들의 생활이 화려하다고 비난한다든지, 금강승(金剛乘)의 수행법이 그릇되었다는 등은 비단 자이나교에서만 비난했던 것은 아니다.

불교도에 의해 집중적으로 비난받는, 자이나교의 나체 수행은 마하비라 이래의 기본적인 수행 방법으로서 나체는 곧 초탈을 상징한다. 또한 나체는 인간이 태어날 때 그대로의 상태로서 순수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자이나교에서도 마음의 순수가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으며, 수행자는 마음 내부로부터 진정한 알몸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무런 교리상의 뒷받침도 없이, 단순히 불교도가 비난하듯이, 수치를 몰라서 그저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자이나 교도의 나체 수행은 자이나 철학의 실재론, 업론 등과 긴밀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이나의 업론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단순히 나체 수행 자체만을 비난하는 것은 독단적인 교조주의(敎條主義)에서 기인된 것이라 비판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비판은 자이나교의 나체 수행 방법을 비난하기보다는, 업(業, karma)이 물질의 일종이라고 보는 자이나의 교설을 논박하고, 업이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나체 고행으로써 업 물질이 몸에 쌓이게 된다는 사상이 그릇된 것이라는 점을 논박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아함경류, 《법구비유경》 등의 초기 경전에서부터 《사분율(四分律)》 《백론(百論)》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마하지관(摩訶止觀)》 등 후대의 논서류에 이르기까지 자이나교는 곳곳에 다양하게 언급되고 있으며, 다른 어느 학파보다도 활발한 논전(論戰)을 펼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지만, 과연 올바르게 대론이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니간타가 등장하여 펼쳐지는 불전 속의 논쟁들은, 니간타 즉 자이나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공정성을 잃었다고 말할 만큼 불교의 일방적인 승리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영혼에 대한 논박

인도 철학파는 크게 유파(有派)와 무파(無派)로 나뉜다. 유무의 기준이 되는 것은 베다를 신봉하는가, 베다의 신들을 믿는가, 사후 세계의 존재를 믿는가 등이다. 사후 세계를 인정하는 파는 유파, 사후 세계의 존재를 믿지 않는 파는 무파로 분류된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무파에 속하는데, 브라만교에 대응하여 발전되었던 슈라마나(S큥aman.a, 沙門)적 전통을 불교와 자이나교가 공유하고 있다는 데서도 양자의 무파적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동일한 기반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와 자이나교는 영혼에 대한 견해만큼은 그 차이가 적지 않다.
먼저, 불교에서는 무아설을 주장함으로써 인도 정통 학파에서 주장하는 유아설과 배치되는 입장을 취한다. 반면에 자이나교에서는 지바(j┓va), 즉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며, 그 영혼이 영원히 존재하는 다수의 실재라고 한다.

이러한 간단한 표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듯이, 유아론(a칣mava칍a)에 대한 붓다의 거부는 타 학파와의 논쟁이 거듭될수록 더욱 강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증일아함경》 〈육중품(六重品)〉에서는 영혼의 문제에 대한 불교와 자이나교의 논박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 때 살차(薩遮, Saccaka) 니건자(Nigan.t.haputta)는 멀리서 마사(馬師, Assaji)가 오는 것을 보고 가서 그에게 말하였다.
“너의 스승은 어떤 이치를 말하고 어떤 교리와 어떤 계율로 제자들에게 설법하는가?”
마사가 대답하였다.
“범지(梵志)여, ‘물질[色, ru칛a]은 덧없는 것이다. 덧없는 것은 곧 괴로운 것이요, 괴로운 것은 곧 무아(無我)이며, 무아인 것은 곧 공(空)한 것이다. 공이라면 그것은 내 소유가 아니요, 나도 그것의 소유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지혜로운 이의 앎이다. 느낌[痛]·생각[想]·형성력[行]·의식[識]은 덧없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쌓임은 덧없기 때문에 그것은 괴로운 것이요, 괴로운 것은 무아이며, 무아이면 곧 공한 것이요, 공이라면 그것은 내 소유가 아니요, 나도 그의 소유가 아니다. 너는 알고 싶은가? 우리 스승께서 가르치시는 이치는 이와 같고, 제자들을 위해 이런 이치를 말씀하신다.”
그 때 니건자는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면서 말하였다.

“그만, 그만. 마사여, 나는 그런 말 듣고 싶지 않다. 아무리 구담 사문이 그렇게 가르쳐도 나는 조금도 듣고 싶지 않다. 왜 그러냐 하면 내 주장으로는 ‘물질[色]은 영원하다’고 하는데, 그 사문은 ‘물질은 영원하지 않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언제 한 번 사문 구담을 만나면 변론해서 그의 뒤바뀐 생각을 고쳐 주리라.”

그리고 나서 살차 니건자는 바이샬리의 500명의 동자들과 함께 고타마 붓다에게 가서 대론하였다.
살차 니건자는 말하기를, “마치 역사가 털이 긴 염소를 붙잡고 동서 어느 쪽으로나 마음대로 끌고 가되 아무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나도 그와 같이 저 사문 구담과 논의하여 그를 잡고 놓기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라는 등의 호언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살차 니건자는 색(色), 즉 형상을 갖는 물질은 영원한 실재라는 자이나교의 기본 교리에 따라 붓다와 논박하기 시작한다.

니건자가 세존에게 물었다.
“어떤 교리와 어떤 계율로 제자들을 훈계하는가?”
부처님께서 니건자에게 말씀하셨다.
“내 주장은 ‘물질은 덧없는 것이다. 덧없는 것은 곧 괴로운 것이요, 괴로운 것은 무아이고, 무아는 곧 공이요, 공한 것 그것은 내 소유가 아니요, 나도 그의 소유가 아니다. 느낌·생각·형성력·의식도 그렇다. 이 다섯 가지 쌓임은 다 덧없는 것이다. 덧없는 것은 곧 괴로운 것이요, 괴로우면 무아이고, 무아는 공이요, 공이면 그것은 내 소유가 아니요, 나도 그의 소유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이 가르친다.”
니건자가 대답했다.
“나는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내 해석으로는 ‘물질은 영원한 것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온 마음으로 묘한 이치를 생각해 보라. 그 다음에 내가 설명하리라.”

물론 이들의 논박은 붓다의 승리로 끝을 맺는다. 논의하는 도중에 니건자는 대답을 못하고 온 몸에서 땀이 흘러 옷을 적시고 앉은 자리와 땅까지 적실 정도였으나, 세존은 자신의 법복까지 들춰 보여 주면서 겨드랑이의 땀조차 없다는 것을 자랑스레 내보이고 있다.

니건자와 붓다의 대론을 전하고 있는 대부분의 불교 경전에서는 니건자 쪽, 즉 자이나교 쪽의 완패로 귀결짓고 있다.
니건자는 재차 묻는 붓다의 질문에 긍정으로 답한다.

“어떤가? 니건자여, 이 몸은 영원한 것인가, 덧없는 것인가?”
“몸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만일 영원하지 않다면, 그것은 바뀌고 변하는 법이다. 너는 거기서 ‘이것은 나이다’라고 보는가? 또 ‘나는 저의 것이다’라고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구담이여.”

이와 같은 대론은 불교와 자이나교가 각자의 교단을 형성하여 발전한 뒤에도 오래도록 논쟁의 주제로 남아 있었다.

《증일아함경》보다 후대에 성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니건자문무아의경(尼乾子問無我義經)》에서는 보다 치밀하게 무아설에 대한 논박이 이루어지고 있다. 《니건자문무아의경》에서는 최상아(最上我, parama칣man)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어도 천안으로는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니건자의 말에 지자(智者)는 대답한다.

“천안으로도 그것은 능히 볼 수 없다. 그것은 비현색(非顯色)이며, 또 비형색(非形色)으로서 자성공(自性空)이기 때문이다.”

《니건자문무아의경》에서 재차 강조하듯이, 시대와 분파를 불문하고 불교의 확고한 입장은 무아와 공(空) 사상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무아와 공에 대한 붓다의 주장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낳게 되었고, 교단 내부뿐 아니라 타 학파의 논박을 받게 되는 쟁점이 되었다.
이러한 불교의 입장을, 자이나교의 전승 문헌인 《수트라크리탕가(Su칣rakr.ta칗?a)》에서는 인중무과론자(因中無果論者, asatka칞yava칍in)라 하여 비판한다. 인과론적으로 볼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아이며, 단지 5온(蘊, skandha)의 화합물로서 구성되어 있을 뿐이고, 일시적인 존재라고 보는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은 인중무과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이나에서는 생성이 파괴의 원인이라는 불교의 연기설은 오류라고 본다. 자이나교에서는 특히 순야바딘(s큨칗yava칍in), 즉 중관 학파를 차르바카(ca칞va칔a)와 동일하게 놓고 논박한다.

중관 학파는 모든 현상, 즉 일출과 일몰, 물이 흐르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부정했다. 그들은 ‘존재하는 것이란 없다.’라고 주장하는데, 그 예로서 마치 맹인은 빛이 있어도 사물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자이나교에서는 마치 기름이 모래에서 나올 수 없듯이, 영혼이란 차르바카 등의 학파에서 주장하듯이, 5요소 즉 지·수·화·풍·공 등의 5대(大)에서 나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불교에서 말하듯 5온 화합물의 결과에서도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논박한다. 또한 감각 기관의 지식은 감각 기관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5대의 성질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단단함이란 땅의 성질이고, 빛은 불의 성질이고, 움직임은 공(空)의 성질인 것 등등을 거론할 수 있다.

그리고 자이나교에서는 의식(意識)이란 각기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는 5대들 중의 어떤 것의 성질이 아니라고 한다. 5대 각각이 의식을 지니고 있지 않는데, 어떻게 언제 그것들이 결합하여 의식을 낳는가? 이러한 요소들은 의식 자체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식은 지바(ja칥a), 즉 아트만(a칣man)의 특성이며, 5대의 성질이 아니라는 입장에 근거하여 5요소설 등을 반박하고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5요소설과는 달리 5온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특히 식(識)이 5온 중의 하나를 구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모든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요소인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즉 5온은 무상(無常)하며, 5온이 무상하기 때문에 5온으로 이루어진 모든 존재는 결국 무상한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자이나교와 불교의 존재론적 기반이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간과하고 논의를 전개한다면, 마치 소의 머리에 난 두 뿔처럼 영원히 화합할 수 없는 평행선만 그을 따름이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에 주목하여, 자이나교의 입장에서 불교의 주장을 해명해 보자.

4. 오온설에 대한 자이나교의 반론

5온 중의 하나인 색이란 물질이 지니고 있는 한 특성으로서 형체성을 지시할 뿐이다. 형체성이란 물질이 갖는 고정적인 특성이 아니며 변화하는 양상을 지시하는 것일 따름이라고 본다. 특히 ‘루파(ru칛a)’라는 말은 ‘색’이라 한역되어 쓰이지만, 흔히 몸(body)이라고 번역한다. 이 점은 ‘루파’의 개념이 영혼과 대칭되는 의미, 즉 심신 이원론적인 견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자이나교에서의 ‘물질’은 실재체(實在體, astika칪a)의 하나이며, 푸드갈라(pudgala)에 대응한다.

따라서 5온 중의 루파와 푸드갈라는 각각 의미의 지시 대상이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양 교의상 물질에 대해 논의하는 중에 지칭하고 있는 내용이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지·수·화·풍의 4대로 이루어진 물질은 무상한 것이라는 취지로서 루파를 거론하고 있는 불교의 논지는, 실재체로서 영속성을 전제하고 성립된 푸드갈라의 특성 중 하나로서 인정되는 변화하는 루파성(ru칛a性)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결국 불교의 루파는 자이나교의 푸드갈라에 내포된 일부의 특성을 지시하는 루파와 대응된다.

그리고 5온 중의 수(受)·상(想)·식(識)이란 영혼이 지닌 기능적 특징일 따름이다. 수·상·식 등은 영혼이 각각 외계의 상황 내지 변수와 작용하여 파생되는 결과일 뿐 요소적 구성물이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불교에서 5온 중의 하나로서 수·상·식을 꼽고 있는 것은 실재 내지 존재의 본질과 그 기능을 혼동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자이나교에서는 영혼의 실재성과 영혼의 기능성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수·상·식 등은 실재인 영혼에 따르는 기능의 일종일 뿐이다. 따라서 주체와 그 주체에 부수되는 기능을 혼동한 불교의 5온설은 존재를 해명하는 기본 관점에서 이미 자이나교의 입장과 어긋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5온 중의 행(行)이란 존재 현상을 요약하는 특성을 표현하는 것일 뿐, 그 자체가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적 성격을 띠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자이나에서는 5온의 하나로 거론하는 ‘행’이란 존재가 갖는 양상적 특징을 요약한 것일 뿐이다.

결국 자이나교와 불교의 논쟁은 영혼, 즉 아트만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따라 빚어진 결과라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영혼을 비롯한 운동(dharma), 정지(adharma), 허공(a칔a칢큑), 시간(ka칕a), 물질(pudgala) 등의 6종을 실재로서 인정하고 있는 자이나교에서는 영혼을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것만으로 보는 입장을 용인하지 않는다.

자이나교에서는 영혼이란 영속적이며, 무한하고, 창조되지 않으며, 지각할 수 없으며, 파괴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영혼이 지각되지 않는 까닭은 형체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비물질적인 영혼은 공간에 절대적인 수로 가득 차 있는데, 영혼 각각은 공간점(空間點, prades큑)을 차지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영혼은 업의 과보로 인해서 지, 수, 화, 풍, 씨앗, 알 등의 형태 속으로 재생하게 된다는 것이 자이나의 기본 입장이다.

그런데 중부 경전 〈제5 삿차카 소경(小經)〉에서 붓다는 이렇게 묻는다.

“악기베사나, 너는 정말로 이렇게 말하는가? ‘물질은 내 자신이고, 감수(感受)는 내 자신이고, 상념(想念)은 내 자신이고, 형성력(形成力)은 내 자신이고, 의식(意識)은 내 자신이다.’라고.”

“그대 고타마여, 나는 확실히 이와 같이 말합니다. ‘물질은 내 자신이고, 감수(感受)는 내 자신이고, 상념(想念)은 내 자신이고, 형성력(形成力)은 내 자신이고, 의식(意識)은 내 자신이다.’라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도 이렇다고 합니다.”

이러한 악기베사나의 답변은 자이나교 또는 마하비라의 가르침 그대로인가? 마하비라는 과연 ‘물질을 곧 나라고 또는 나의 것이라고 보는 것인가?’ 그리하여 물질이 나일 수 없고 나의 것일 수 없기 때문에 무아설이 정당한 이론인가? 단적으로 말하자면, 불교측에서 거론하고 있는 자이나의 교설은 왜곡된 표현이라 보여진다.
왜냐하면 마하비라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영혼에 대한 의문을 갖는 제자 인드라부티(Indrabu칣i)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 인드라부티여! 너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는데, 물단지와 같이 지각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너는 지각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예를 들면 허공에 핀 꽃처럼.

그리고 나서, 영혼의 인정 여부는 지각의 가능성과 무관한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영혼은 원자들이 모여서 물단지 등을 이루어 지각할 수 있게 되는 것과는 달리, 쉽게 지각할 수 있는 존재 상태를 갖지 못한다. 영혼은 추론의 대상도 아니다. 왜냐하면 추론 또한 지각에 의해서 생겨나고, 보편적 주연(周延) 관계에 의한 기억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마하비라는 영혼이란 오직 전지자(全知者), 즉 순수하고 완전한 지(知)를 성취한 자의 경우에만, 마치 태양의 빛과 열이 동시에 생기는 것처럼 주체와 객체에 대한 모든 지식이 동시에, 순간적으로 일어난다고 보았다. 영혼이란 전지자에게는 의심할 수 없는 실재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문맥으로 보아도 자이나교에서 물질이 곧 ‘나 자신’이라거나 ‘영혼’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불교 경전에서 말하고 있듯이, 붓다는 5온의 화합체인 사람이 곧 아트만이라 할 수는 없다고 한다. 즉 무아라는 논리를 5온 각각이 아트만이라 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되물으면서 매우 단순하게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단적인 예를 들어 보자.
‘바닷물의 주요 성분은 소금과 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소금이 바닷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물이 바닷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따라서 바닷물이란 없는 것이다.’
붓다의 논박은 이와 같은 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바닷물을 사람[존재]에, 소금과 물의 자리에 5온을 대입해 보자. 5온 그 각각이 곧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자이나교뿐만 아니라 브라만교에서도 5온이 곧 존재라거나, 5온이 곧 영혼이라는 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5온 각각에는 자아 내지 영혼이 없고, 5온 각각이 곧 영혼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고 말하며, 따라서 영혼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자이나교에서도 영혼이란, 화합의 결과물이나 화합물의 요소 각각을 지칭하는 말로서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할 따름이다.

‘마치 금광석 자체는 금이라 할 수 없지만, 일련의 가공 과정을 통해서 그 속의 금을 드러내는 것처럼 영혼은 존재 속에 그와 같이 내재한다.’라고.

요컨대 자이나교에서는 금광석 속의 금 성분이 영혼과 같다고 말하는 반면에, 불교에서는 자이나교 입장이 마치 금광석을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거나 상정한 다음에 결코 영혼이 아니라는 식으로 반박하고 있는 격이다.

이와 같이 자이나교 입장에서 볼 때, 붓다 또는 불교 측의 추단(推斷)으로 인하여 그릇되고 부적절한 논의가 진행된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그 까닭은 양자의 대론상 불가피했던 몇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5. 양자 대론의 특징

갖가지 논쟁에서, 불교와 자이나교 양측은 서로가 ‘잘못된 견해’(micca칍it.t.hi)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하비라와 붓다가 직접 대론한 적이 있었는가?

양 교파의 대론을 전하는 대부분의 경전 등 양 교파의 대론을 전하는 문헌들은 자이나교의 수행자 또는 신도, 즉 마하비라의 대리자가 붓다와 논박하는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예컨대, 중부 경전 〈제8 아바야 왕자 경〉에서는 빔비사라 왕의 아들인 아바야(Abhaya)에게 마하비라가 매우 상세하게 붓다와 대론할 내용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경전상에서 보이는 직접적인 대론이 아니어도, 각각의 문헌 곳곳에서는 다른 학파의 주장들을 열거 또는 예시한 뒤에, 그에 대한 자파의 소신과 입장을 밝히고 있다.

붓다와 마하비라 당시의 그러한 사상적 입장을 가장 많은 예를 들어서 정리하고 있는 문헌으로 유명한 자이나교의 《수트라크리탕가》에는 총 363종의 이견(異見)들이 담겨져 있다. 180종의 행위론자(kriya칥a칍in), 84종의 무행위론자(akriyava칍in), 67종의 불가지론자(ajn쁝칗ava칍in), 32종의 율의론자(律儀論者, vinaya칥adin) 등이다.

그 중에서 특히 행위론자들은 영혼이 행위의 결과에 대한 담지자(擔持者)로서 역할을 하지만, 무행위론자는 행위 주체로서의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다.

이러한 갖가지의 주장들은 마하비라와 고타마 붓다의 생존 당시에 성행했던 사상적 조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데, 주목할 점은 그러한 사상적 이견(異見)들이 업론과 업의 주체, 즉 영혼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 따라 갈래가 나뉜다는 것이다.

불교와 자이나교의 대립과 논쟁 또한 그러한 기본적인 차이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런데 필자의 소견으로는 양자가 존재론적 내지 실재론적 범주를 달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존재론적 관점에 대해서 동일선상에서 논의하기보다는, 그 결과로서 파생된 관점이나 실천 방식에만 국한적으로 집착하여 논의함으로써 그 실익이 없는 무한 논쟁을 펼치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본다.

그렇게 된 원인 중 하나는, 붓다와 마하비라가 직접 토론하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두 사람의 생존 연대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학설이 대립되어 있으나, 자이나 교단에서는 마하비라는 기원전 599∼527년, 붓다는 기원전 557∼477년이라고 본다. 따라서 마하비라가 석가모니보다 약 42년 정도 앞선다고 한다. 생존 연대에 대한 어느 학설을 따르든지 간에, 후대의 전승 문헌에 따르면 두 사람이 직접 대론한 사실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마하비라와 붓다가 직접 대면해서 논쟁을 벌였다면 다른 내용의 논의가 전개되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붓다와 마하비라, 두 사람 모두 최상의 완전지를 성취한 것으로 자부하고 있었지만, 불교 경전상으로 보면 붓다가 보다 더 뛰어난 지력을 가졌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증일아함경》 〈마왕품(魔王品)〉에서 보듯이, 붓다에게 일체지(一切智)가 있어 삼세(三世)의 일을 안다면 큰 불구덩이와 독이 든 음식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시험을 해 보지만, 모두 참패를 당하고 만다. 붓다가 니건타 교도인 시리굴 장자의 집에 발을 내딛자마자 몰래 파 두었던 불구덩이는 욕지(浴池)로 바뀌고,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오르고, 독이 든 음식에서 독기를 제거해 버리는 신통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부 경전의 〈제6 우팔리 경〉에서는 마하비라의 죽음과 관련된 일화를 전하고 있다.
나란다(Na칕anda)에 살던 자이나 교도 우팔리(Upa칕i) 장자가 붓다를 이기고자 논파하러 갔다가 붓다에게 설복당하고 만다. 불교도가 된 우팔리가 붓다에 대해서 찬탄을 늘어 놓자 마하비라는 입에서 뜨거운 피를 토했다. 그 후 마하비라는 슬퍼하다가 마침내 죽고 말았다고 한다.

자이나 교단의 전승에 따르면 마하비라는 30년 동안의 교화 활동 끝에 기원전 527년, 즉 출가 후 42년째 되던 72세에 파탈리푸트라 근교의 맛지마 파바 마을에서 열반에 들었다. 그 때 마하비라는 그 지역의 통치자였던 하스티팔라(Hastipa칕a)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는 끝이 가까워졌다고 느끼자 가부좌를 하고 손을 모으고 조용히 앉아서 아침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마침내 열반에 들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승 내용 어디에도 불교도와의 논쟁 끝에 병세가 악화되었다거나 어떤 관련이 있다는 식의 언급은 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불교측에서는 왜 이와 같은 모함과 험담, 편협한 독단으로 경전을 써야만 했는가?

덧붙여 언급하자면, 중부 경전 〈사마가마 경〉에서는 ‘마하비라가 최근에 파바(Pa칥a? 마을에서 죽었는데, 그가 죽자마자 교단이 둘로 분열되었다.’라고 전한다. 그러나 자이나 교단의 2분열, 즉 백의파(白衣派)와 공의파(空衣派)의 분열은 마하비라의 타계 직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후대의 일로서 인도 역사가에 의해 공인된 바 있다.

이와 같이 자파의 교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타 학파를 폄훼하는 것은 논쟁을 위한 한 기술은 될지언정, 정당한 포교의 방법은 될 수 없을 것이다.

6. 결론

경전의 표현대로 논의(論議)라고 하거나 논쟁이라고 하거나 간에 대론을 통해서 자파의 주장을 발전시켰던 것은 불교나 자이나교 모두 예외가 아니었다.

《증일아함경》 〈육중품〉에서는 말문이 막힌 니건자가 거듭된 세존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잠자코 있게 되자, 허공에서 밀적 금강 역사가 금강저를 들고 소리친다.

“네가 여래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면 마땅히 네 머리를 부수어 일곱 조각을 낼 것이다.”
그러자 온몸의 털이 곧추설 만큼 놀란 니건자는 살려 달라고 하면서 대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또 답변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한 니건자가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자 두마(頭摩, Dumukha) 동자가 나서서 말한다.

“연못에 사는 다리 많은 벌레의 다리를 기왓장 돌로 잘라내 버리면 다시는 연못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니건자도 이와 같다. 시샘과 교만이 가득하여 여래에게 왔지만, 이제 다시는 논의하지 못할 것이다.”

경고 또는 저주의 말을 듣고 나서 굴복하는 논쟁 형식은 불전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마치 상대를 제압하기 시작하는 신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반면에 그 시점을 계기로 하여, 동등한 대론자로서의 입장이 균형을 잃고 협박과도 같은 경고에 겁먹고 마는 일방을 상대로 한 붓다의 설교를 듣는 교도의 입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본고에서 다뤘던 영혼의 실재성 문제를 비롯하여, 실체론자와 비실체론자, 실재론과 반실재론의 논쟁은 자이나교와 불교의 대론에 그치지 않고, 불교 내부에서도 부파 시대를 거치면서 극명한 논쟁을 야기시켰던 해묵은 철학적 주제이다.

교단을 성장 발전시키기 위해서 타 학파와 논쟁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각자 자신의 전승 문헌에서 보이듯이, 도그마에 가까운 주장으로 자신의 승리만을 내세우는 것과 실제 현실은 어느 정도 합치했던가? 이 점 또한 인도 종교의 교단사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라 할 것이다.

각 교파의 사상이 얼마나 논리 정합성을 갖고 있는지, 교리의 합리성이 어떠한지 등등은 신앙의 실제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 어느 교설이 보다 더 진리성을 띤 것인지, 누가 판단할 것인가?

현재 인도에서는 힌두교의 절대적 점유 아래, 불교와 자이나교는 소수 종교로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교도수의 다소(多少) 여부는 각 교의 내용의 보편적 진리성 여부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종교 신앙에는 문화적 특수성이 큰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불교와 자이나교가 ‘슈라마나 상가(S큥aman.a sam?ha)’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공동 기반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서로 다른 교단으로 발전하게 된 주요 원인 중의 하나로서, 유아론(a칣amava칍a)을 주장하는 자이나교와 무아론(ana칣amava칍a)을 주장하는 불교간의 대립이 깔려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끝으로, 붓다와 마하비라라는 인물의 전기적(傳記的) 관점에서 볼 때, 불교 경전의 일방적 진술만을 전거로 하여, 자이나교 내지 마하비라의 사상을 올바르게 알고 이해하는 데는 큰 난점이 있다는 점 또한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는 것을 재언하고자 한다. ■

김미숙
전남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를 수료하였다. 전공 분야는 인도 불교와 자이나교이다. 현재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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