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분재 - 곽만연 동아대 교수

5) 장기이식의 근거를 위한 불교사상

(1) 자비사상

가. 자(慈)와 비(悲)
불교가 사회윤리로서 전개할 경우, 평등사상과 아울러 자비사상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불교의 실천을 관철하는 정신이며, 불교의 윤리를 특징짓는 기본적인 사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날 ‘사랑’이라는 낱말을 너무나도 많이 듣고 있다는 사실에 비한다면, 자비라는 낱말은 무엇인지 어색한 느낌을 지니는 낱말같이 듣고 있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상용어로서 우리는 ‘무자비(無慈悲)하다’는 말은 많이 듣고 있는데, 그것은 원래 불교의 자비의 부정형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 다시 불교의 ‘자비(慈悲)’라는 낱말을 되새겨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자비(慈悲)를 하나의 낱말로서 사용하고 있지만, 원래 ‘자(慈)’와 ‘비(悲)’는 별개의 말이다. ‘자(慈)’란 ‘귀여워하다’라는 의미이지만, 불교에서 산스크리트어의 ‘마이트리(maitr┓)’와 팔리어의 ‘메타(metta?’를 번역한 말이다. 그 원어는 ‘미트라(mitra : 친구)’라는 말에서 파생한 낱말이라고 하는데, 우정(友情) 또는 순수한 친애(親愛)의 염(念)을 뜻하는 말로써 인도 일반에서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요컨대 ‘자(慈)’란 순수한 우정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깊이 감싸주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비(悲)’는 산스크리트어의 ‘카루나(karun.a?’의 번역으로서, 이 원어는 인도 일반에서는 애민이나 동정이나 감정 등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비(悲)’란 상대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하는 것같이 깊은 애민(哀愍)의 정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慈)와 비(悲)는 어떻게 다른가 하면, 보통 자(慈)는 생명 있는 모든 것, 즉 일체중생에게 행복을 주는 것, 즉 ‘여락(與樂)’이 된다. 그리고 비(悲)는 불행을 없애는 것, 즉 ‘발고(拔苦)’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어떤 경전에 의하면 자와 비를 반대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 것 같으나, 여기서는 깊이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이 너무나 닮았으므로 그 해석에 있어서도 옛부터 혼동을 일으킬 만큼, 그 구별을 할 필요마저 없었던 것이라고 이해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일찍이 자와 비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의 낱말로서 자비라고 표현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자비라는 낱말이 원래 인도 일반에서 사용하였던 용법과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하겠는데, 그것은 불교의 자비의 관념만으로서 설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고 풀이하는 학자도 있다. 인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불교와 같은 시대의 자이나교에서도 “수행자는 일체의 생물을 애처로워하고, 동정하여라”라고 설하고 있다는 것이며 바라문교 내지 힌두교에서도, 그 성전인 《바가바드기타》(12.13)에서 “일체의 살아 있는 것을 미워하지 아니하고 자애심을 가지고 애민(哀愍)한다”라는 가르침이 설해져 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불교가 일어나기 시작한 시대에는 인도 일반에 자비의 사상이 제창되었을 만한 기운이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 통설이다. 그것은 당시의 사회적 현상에 대응하여 평등사상이 제창된 것과 같은 사정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평등사상을 다른 시각에서 파악한 것이 자비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인도 일반에서 새로이 일어난 사상을 이어 받으면서, 자비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독자적인 전개를 했던 것은 물론이며, 우리는 불교에 있어서 자비사상이 어떻게 전개했던 것인지를 다음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나. 원시불교에 있어서의 자비
원시불교의 성전 속에는 ‘손(孫)’을 주제로 하는 경전이 몇 가지 있다고 알려지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숫타니파아타》에 수록되어 있는 《메타숫타(慈의 經典)》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남방 불교권에서는 이른바 호주경전(護呪經典)으로서 사용하고 있다는 《소송경(굿다가파아타)》에도 들어 있다고 한다. 이 경전은 십시구(句)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자비심을 노래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마치 어머니가 자기의 외동아들을 신명을 걸고 지키는 것과도 같이, 그렇게 일체의 살아 있는 것에 대하여서도 무량한 자비의 마음을 수행해야 한다. 또 전 세계에 대하여 무량의 자비심을 수행해야 한다. 상에도 하에도 또한 옆으로도 가림 없이, 원한 없이, 적대심 없는 자비를 수행해야 한다. 서거나 걷거나 앉거나 눕거나, 잠들지 않는 동안은, 이 자비심을 확립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자비의 숭고한 경지라고 부른다.(149-151)

여기에서는 무량의 자비심을 수행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가 그의 외아들에 대하여 가지는, 본능적인 절대 무조건의 애정에 비유하고 있는데, 그러한 깊은 애정을 모든 생명 있는 중생에게도 미치도록 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무량의 자비심은 전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서도 원한이나 적대감이 없는, 또 화내지 않는 마음으로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설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자비심을 행주좌와(行住坐臥) 늘 잊지 않고 지니는 것을 자비심의 숭고한 경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자비심은 원시불교에 있어서는, ‘자(慈)’와 더불어 설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나아가서 ‘희(喜)’나 ‘평정(平靜)’이라는 덕목과 더불어 설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희’는 사람의 행복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을 뜻하며, ‘평정(平靜)’은 한역으로는 ‘사(捨)’라고 하는데, 그것은 사람에 대하여 공한심이나 집착심 등을 버리고, 전적으로 마음이 평안(平安)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숫타니파아타》(73)에서도 출가수행자가 취해야 마땅한 태도로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자비와 평정과 연민, 그리고 해탈과 즐거움을 때에 따라 잘 다스려, 세상을 등지는 일 없이,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1)

이러한 가르침은 약간 뒤에 성립한 경전에서는 이 4가지의 마음을 모아서 설하게 된다. 예컨대 《전륜성왕사자후경(轉輪聖王獅子吼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재보에 부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비구가 있는데, 자비심을 가지고 한 쪽에 편만(遍滿)하여 머문다. 마찬가지로 제2의 방향에, 또 마찬가지로 제3의 방향에, 또 마찬가지로 제4의 방향에 편재해서 머문다. 이와 같이 상(上)으로 하(下)로 횡(橫)으로 모든 곳에, 두루 일체를 포함하는 세계에 널리 크게 무량하게 원한 없이 노여움이 없이 자비심으로서 편만하게 머문다. 애초로워하는 마음으로서 (中略) 기쁨을 함께 하는 마음으로서 (中略) 평정을 지니는 마음으로서 편만하게 머문다. 비구들이여, 그것이 비구가 재보에 부하다는 것이다.2)

이상과 같이 자(慈)와 비(悲)와 희(喜)와 평정의 4가지의 마음을 일체 한량없이 충만하는 것을 원시불교에서는 ‘사무량(四無量)’ 또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고 부르고 있다.

다. 대승불교의 자비관
대승불교에 있어서의 자비사상은 보살행의 실천이라는 양상으로서 전개된다. 대승의 구도자인 보살은 일체중생에 대하여 자비심으로서 대하는 사람이다. 보살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는 서원을 세우고, 그 완성을 위해서 실천한다. 이 서원은 자비(慈悲) 이타(利他)의 정신에 바탕하는 것임으로, 달리 비원(悲願)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대승의 보살에는 출가의 보살과 재가의 보살이라는 구별은 있으나 모두가 보살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출가와 재가를 통해서 보살의 실천은 자비이타로 일귀(一歸)하며, 자비행의 완성을 통해서 자리이타(自利利他)가 충족되며, 깨달음을 얻어서 성불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보살행으로서의 자비는 대승경전에 여러 가지 형태로 설해지고 있다. 예컨대 《법화경(法華經)》 〈안락행품〉에서는 보살은 “일체 중생에 대하여 자력을 버리지 아니한다”라고 설하고 있으며, 〈법사품(法師品)〉에서는 보살로서 《법화경》을 설하려고 하는 자는 여래의 방에 들어서 여래의 의복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 설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약왕(藥王)이시여, 여래의 방이란 무엇인가. 일체중생을 대하는 자비가 머무는 곳이, 실은 여래의 거실인 것이다. 거기에 저 양가의 자식은 들어가야 한다. 약왕이시여, 여래의 의복이란 무엇인가. 크나 큰 인내에 의한 유화가 여래의 의복인 것이다. 그것은 저 양가의 자식 또는 양가의 자녀가 입어야 할 의복인 것이다. 약왕이시여, 여래의 법좌(法座)란 무엇인가. 일체의 존재하는 것은 공이라는 것에 들어가는 것이 여래의 법좌인 것이다. 거기에 저 양가의 자식은 앉아야 한다.

경전에서는 이상과 같이 보살은 여래의 자리에 앉은 다음에, 법화의 법문을 보살의 길을 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설해야 한다고 하는데, 보살의 모든 중생에 대한 크나 큰 자비심을 으뜸으로 들고 있다. 또 그것이 인내에 의한 유화한 마음, 즉 유화인전심과 일체의 존재하는 것이 공이라고 관하는 것, 즉 일체법공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설하고 있다.

그것은 보살의 자비가 인육과 표요를 이루고, 사상적으로는 대승불교의 근본을 이루는 공관을 바탕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실로 자비와 인내와 공관이라는 삼자는 《법화경》에서 설하는 보살행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며, 《법화경》을 넓히려는 자에게 있어서는 규범이 되는 것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다음에 《유마경(維摩經)》 〈문수사리문질품(文殊師利門疾品)〉에는 병문안을 온 문수보살에 대한 유마 거사의 말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문수사리여, 무명(無明)이 남아 있는 한, 생존에의 애착이 있는 한, 나의 이 병도 그만큼 계속됩니다. 모든 중생에게 병이 있는 한, 그만큼 내 병도 계속됩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병을 떠나게 되면 그때 내 병도 가라앉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수사리여, 보살이 윤회 속에 있는 것은 중생에게 그 원인이 있고, 병은 이 윤회가 그 원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모든 중생에게 병이 사라지게 되면 그때는 보살에게도 병은 사라질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잣집 외동아들이 병이 났을 때, 그 병 때문에 양친도 병이 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외동아들에게 병이 없어지지 않는 한, 양친도 계속 고민할 것입니다. 문수사리여, 그와 마찬가지로 보살은 모든 중생을 외아들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중생이 모두 병들어 있는 한, 그도 병들어 있고 중생에게 병이 없어졌을 때, 그에게도 병이 사라지게 됩니다. 문수사리여, 이 병은 무엇에서 생겼느냐고 물으셨는데, 보살의 병은 크나큰 자비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대승의 보살이 모든 중생의 병, 즉 무명과 생존에의 애착에 의한 괴로움을 자기 스스로의 괴로움으로 한다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보살은 중생의 병을 더불어 앓고,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그리고 중생을 외아들과도 같이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 사랑은 앞서 인용한 바 있는 《숫타니파아타》에서 설하는 “마치 어머니가 자기의 외아들을 신명을 걸고 지키는 것처럼”이라는 자애심과 전적으로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아무것도 구하는 것이 없는 사랑을 여기서는 ‘크나큰 자비’라고 부르고 있는데, 불교에서는 그것을 대비(大悲)라고 부른다. 보살의 자비심을 이와 같이 대비라고 부르는 것은, 이 경전뿐만이 아니다. 예컨대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을 보면, 보살은 열 가지의 계층인 십지의 첫째 단계인 초지 즉 환희지에서, ‘대비(大悲)를 으뜸으로 하는’ 마음을 일으킨다고 설하고 있다. 또 모든 중생이 모든 외로움에서 해탈하지 않는 것을 보고, ‘대비’를 일으키고,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게 하여 열반에 들게 하려는 ‘대비’를 일으킨다고 설한다. 대승의 보살은 ‘대자’·‘대비’라고 부르기에 알맞은 대자비를 실천하는 것을 목표한다는 것이다.

라. 자비의 특성
불교의 자비사상은 대략적으로 말해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전개를 했다고 하겠는데, 그러면 그러한 자비를 윤리적(倫理的)인 관점에서 말한다면, 어떠한 특성이 있다고 하겠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자비와 가장 잘 대비할 수 있는 관념으로서는 ‘사랑’이라는 것을 들어야 할 것이다. 사랑은 서양의 사상사를 통해서 본다면,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그리스적인 감성적 사랑, 즉 ‘에로스(eros)’와 다른 하나는 기독교에서 설하는 종교적인 사랑, 즉 ‘아가페(agape)’가 그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자비는 그 어느 하나의 관념과도 동일한 것이 없다. 자비는 그러한 서양적인 사랑과 닮은 것 같지만, 그러면서 그것과는 이질적인 의미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불교가 사랑의 종교가 아니라, 자비의 종교라고 흔히들 부르고 있는 것은, 실은 거기에 사랑과는 구별되는 자비의 특성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사랑에 대하여 자비는 어떠한 특성을 지니는 것인지를 가장 뚜렷한 점만을 들어 설명해 보기로 한다.

우선 지적해야 할 점으로는 불교의 자비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초월해서, ‘일체의 살아 있는 중생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사랑이 어디까지나 인간 관계의 심정이며,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 위에 서고 있다는 점과 겨누어 보아서 매우 다르다고 하겠다. 물론 사랑은 인간 관계에만 한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현재 서양에서는 동물애호라는 점을 강조하고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근세에 이르러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아울러 그것에 부수해서 설해지게 되었다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에서는 동물에는 영혼이라는 것이 없으며, 따라서 영혼의 구제를 받을 수가 없으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또 동물은 인간에 봉사하기 위해서 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므로 그것을 죽여도 죄악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의 자비는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에까지도 미치는 사랑이다. 자비의 대상으로서는 인간도 동물도 모두가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비는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까지도 포함한 모든 생물을 죽이지 않는다는 불살생(不殺生)의 사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비의 정신에서 말한다면 동물애호라는 것은 어떠한 말을 하지 않아도 당연한 도리인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불교 윤리의 특색은 ‘살아 있는 모든 것’, 즉 중생(衆生)의 윤리라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자비사상도 바로 그것을 바탕으로 삼고 있음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불교의 자비의 특성으로서는 일체의 차별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평등(平等)성을 관철하는 점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사랑에는, 부부의 사랑, 친자의 사랑, 형제의 사랑, 친구의 사랑, 조국사랑 등등 여러가지의 사랑이 있으나, 그 각각에는 친조나 호오(好惡)의 차별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친근한 것, 바람직한 것에 대해서는 애정을 강하게 가지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애정이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불교의 자비는 그러한 사랑의 차별성을 초월하여, 무차별·평등의 입장에 선 것이다. 그것은 자기자신에게 친근하거나 않거나를 가리지 아니하고 모든 것에 평등하게 미치는 사랑인 것이다. 앞서도 언급한바 있지만, 원시불교에서 설하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의 정신에 비추어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자비심은 시방세계의 만물에 편만(遍滿)해야 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비의 입장에 선다면, 인간사회의 평등이라는 것은 당연한 도리로서 요청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불교는 평등사상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바로 자비사상과 표리의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불교의 자비사상의 특성으로서는, 사랑이 감성적인 상대적 성격을 지니는 것에 대하여, 순수한 절대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들어야 하겠다.

불교에서도 자비 이외에 사랑이라는 낱말에 해당하는 낱말이 있으며, 인간의 사랑을 여러가지의 양상으로 설하기도 한다. 예컨대 남녀의 성애라든가 연애 등은 ‘카마(kama)’라고 해서 애욕에 해당하는 낱말이 있으며, 친자와 같이 친근한 사람 사이의 애정은 ‘스네하(sneha)’라고 해서 친애라고 번역되는 낱말이 있다. 그리고 일반적인 인간애는 ‘애호’라는 의미의 ‘프리야(priya)’와 ‘애념’이라는 의미의 ‘프레만(preman)’ 등과 같은 개념의 낱말들이 있어서, 그러한 사랑이 인생에게 주는 아름다운 의의를 여러 가지로 설하기도 한다.

즉 그와 같은 개념을 설하는 점에서 말한다면, 불교에서는 인간적인 애정을 없애라고 설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인간에 있어서 바르고 아름다운 애정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 본래의 입장에서 말해서, 세속적인 입장에서의 사랑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언제든지 미망(迷妄)의 외로움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는 상대적인 사랑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녀의 애정은 상대가 배신했을 때는, 곧 바로 증오(憎惡)로 바뀌어진다. 그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증오도 또한 깊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지는 사랑은 궁극적으로는 맹목적·충동적인 애욕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근원적인 사랑을 ‘트리슈나(tr.s.n.a?: 渴愛)’라는 낱말로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구하는 것과도 같이 격렬한 사랑이며, 불교에서는 그것을 근본적인 번뇌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 있어서는 인간애는 그대로 자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자비는 인간적인 애증의 대립을 초월한 절대의 사랑인 것이다. 감성적인 사랑을 초월한 순수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엔 애정이나 증오 따위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자비는 초세속적인 사랑이라고 하겠다. 그 궁극적인 모습을 우리는 부처님의 자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2) 자타카에 나타난 사신 설화

일반적으로 사신(捨身)은 스스로 생명을 버리고 불도를 구하거나, 불도를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도 버린다는 의미이다. 《자타카》에 등장하는 사신(捨身)은 크게 나누면, 첫째는 자신의 신체나 그 일부를 타인에게 주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토끼이야기’ ‘시비왕 이야기’ 등이다. 둘째는 불교의 가르침(진리)을 구하여 목숨을 버리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설산동자 이야기’이다. 셋째는 붓다에게 공양하기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경우이다. 이 세 가지 유형 중에서 첫 번째 사례를 중심으로 논하고자 한다.

가. 시비(尸毘)왕 본생 이야기(Sivi-ja칣aka)
이 전생이야기는 붓다가 기원정사에서 하신 말씀이다. 시비왕은 왕위에 오르자 왕궁의 입구나 거리의 여러 곳에 보시를 하였다. 그러나 재물의 보시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보시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자기의 심장, 피, 살을 떼어주기를 결심하였다. 그리고 누군가 노예로 삼고자 한다면 노예가 되겠다고 하였고, 나의 눈을 욕심내면 나의 눈을 주저 없이 주겠다고 생각하였다.

왕의 이 같은 결심이 진실한가를 확인하기 위해 제석천이 병들고 눈먼 바라문으로 변장하여 왕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바라문은, “나는 눈 먼 사람입니다. 바라옵건대 제게 당신의 눈 하나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시비왕은 “나는 마음이 깃든 보시를 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대는 한 쪽 눈만을 원하지만 나는 두 눈을 주리라.” 그리고 의사를 불렀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였다. “나는 명예가 탐나서도 아니고 안락하게 살기 위해 보시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옛날 훌륭한 이들이 행하였던 올바른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시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격렬한 통증을 참고 양쪽 눈을 뽑아 바라문에게 주었다. 그리고 장님이 된 이상 나는 국왕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하여 국가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출가하였다. 이것을 보고 제석천이 시비왕에게 눈을 되돌려 주기 위해 다가가서 물었다. 그대의 소원이 무엇인가? “나에게는 권력도 있고 수많은 재산이 있습니다. 그러나 장님이 된 이상 지금은 죽는 것이 소망입니다.”

그러자 제석천이 “그대는 왜 죽음을 바라는가? 장님이 되었기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장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양쪽 눈을 잃었고, 내가 바라는 진리를 보는 진실한 눈을 얻는 것도 불가능해졌습니다. 차라리 죽음만이 내가 바라는 소망입니다”라고 하자, 제석천이 다시 “보시란 베푸는 행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 태어나기 위해, 또한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서도 보시는 행해져야 한다. 그런데 그대는 현재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쪽 눈을 보시하였다. 그러므로 그대가 바라는 눈을 얻기 위해서 그대는 진실한 서원을 세워야 한다.” 시비왕은 자신에게 진리의 눈을 주기를 게송으로 노래하였다. 그러자 시비왕에게 진리의 눈이 생겼다.

왕은 다시 왕국으로 돌아와 시비국 사람들에게 말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부터 보시하는 마음을 가져라. 나는 마음이 담긴 보시를 하였기에 진리의 눈을 얻었다. 타인에게 보시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큰 기쁨이다. 부디 각자의 생활에 걸맞는 보시를 행하라.”라고 하였다.(중략) (《자타카》 499)

나. 토끼 본생 이야기(Sasa-ja칣aka)
이 이야기는 붓다가 기원 정사에 계실 때 말씀하신 것이다. 옛날 보살(붓다의 전생)은 토끼로서 태어났다. 그 토끼는 원숭이, 여우, 수달 등의 친구와 함께 숲 속에서 살고 있었다. 토끼는 보살의 전생(轉生)이므로 보통의 동물과는 달리 지혜가 있었다.
그들은 낮에는 각각 먹이를 찾아 별도로 행동하였지만, 밤에는 한 곳에 모였다. 그때 토끼는 나쁜 짓, 교활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였고, 또한 자신만을 위한 삶의 방식이 아니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하는 보시를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수행 등의 이야기를 하였다.
어느 날 토끼는 세 친구와 함께 수행을 하였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먹이를 찾으려고 생각하였다. 토끼는 “오늘은 수행 중이므로 혼자서 먹이를 먹어서는 안 되고 누군가에게 일부를 주고서 먹어라”고 친구에게 말했다. 그래서 수달은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여우는 밭에서 사람들이 먹다 남긴 고기와 치즈를 발견하였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망고를 취하여 왔다. 토끼는 풀을 먹기 때문에 먹이를 저장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먹기 전에 보시를 해야 한다고 자신이 정하였기 때문에 커다란 고민이 생겼다. 왜냐하면 풀을 구걸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세 마리의 친구들의 먹이는 인간도 먹을 수 있는 것이므로 간단하게 보시가 가능하였다. 토끼는 자신이 위선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끼는 “위선은 안 된다. 누군가 음식을 구걸하면 나의 신체를 바치자. 토끼 고기를 먹고싶어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지 않는가”라고 결심하였다. 이것을 제석천이 보고 모두가 진심인지를 실험하기 위해 걸식하는 사람으로 변하여 각자의 동물에게 갔다.

여우, 수달, 원숭이는 자신의 먹이의 일부를 기쁘게 보시하였다. 그리고 토끼에게도 가서 먹을 것을 구걸하였다. 그러자 토끼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보시를 하겠습니다. 장작을 가져와서 불을 피우십시오.” 불을 피우자 토끼는 몸에 붙어 있는 벌레를 떨어지게 하기 위해 몸을 흔들고, 그리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중략) (《자타카》 316)

다. 찬베야 용왕(龍王)의 이야기(na칐ara칓a?ja칣aka)
옛날 앙가국과 마갈타국 사이에 찬바라는 강이 있었다. 그 강에는 찬베야라고 이름하는 용왕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앙가국과 마갈타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마갈타국이 싸움에 패하였다. 그래서 마갈타국왕은 도망치게 되어 찬바강에 이르렀다. 왕은 적에게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죽을 것을 작정하고 타고 있던 말과 함께 강물에 뛰어 들었다. 그때 용왕 찬베야가 왕을 구해주었다. 그리고 왕을 도와 앙가국을 멸망시켜 서로 사이좋게 지냈다.

그런데 용왕이 죽었다. 용왕이 죽은 지 7일 후에 보살이 용왕으로 다시 재생하였다. 재생한 용왕은 짐승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포살(布薩)을 어기므로, 인간세계에 가서 포살회를 바로 지키고자 결심하여 인간세계로 갔다. 그리고 용왕(보살)은 “나의 가죽을 원하는 자는 가죽을 가져가도 좋다. 나를 잡아 재주를 부리는 뱀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라고 하면서 신체를 무조건적인 보시물로서 내던졌다.

어느 날 뱀을 잡아 마을이나 도시에서 재주를 시켜 재산을 늘리려고 생각한 한 젊은이에게 순순히 잡혔다. 그리고 수많은 고통을 참아내며 사람들에게 많은 재주를 보여 젊은이에게 많은 재산을 얻게 해주었다. (중략) (《자타카》 506)

라. 로한타 사슴 왕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서론 부분인 현생에서 아난(아난다)가 붓다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희생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붓다는, 아난은 전생에서도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였다는 과거 이야기를 시작한다.

옛날 범여왕이 바라나에서 나라를 통치하였다. 그에게는 게야라는 왕비가 있었다. 보살은 그때 설산에서 사슴 팔만 두를 인솔하는 황금색 색깔을 띤 사슴왕(로한타)으로 있었다. 그의 남동생은 치타미가라는 이름이었고, 여동생은 스타나라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앞을 못 보는 양친이 있었다.(중략)

어느 날 게야 왕비는 왕에게 부탁하여 황금색 사슴을 잡아오도록 부탁하였다. 그래서 일찍이 황금색 사슴을 본 사냥꾼이 사냥을 나갔다. 사냥꾼은 사슴이 물을 마시러 오는 연못가에서 덫을 놓아 사슴을 기다렸다. 드디어 사슴 왕(보살)이 사냥꾼의 덫에 걸렸다. 사슴 왕은 생각했다. “만약 내가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팔만 마리의 사슴들이 모두 겁을 먹고 물도 마시지 못하고 당황하여 도망갈 것이다. 모두가 물을 마신 후에 나에게 걸린 덫을 제거하자.” 그리고 사슴들이 물을 다 마신 후에 사슴 왕은 세 번이나 덫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였다. 첫 번째의 시도에 가죽이 벗겨지고 두 번째의 시도에서 살이 찢어지고 세 번째의 시도에서 힘줄까지 끊겨 덫이 뼈까지 닿았다. 그 고통에 사슴 왕이 소리를 지르자 놀란 사슴들이 세 갈래로 나누어 도망쳤다.

그런데 도망치던 남동생(치타미가)과 여동생(스타나)은 그의 형의 목소리라고 생각하여 되돌아왔다. 사슴왕은 여기는 위험하니 빨리 도망가라고 하였으나 둘은 도망가지 않고 양쪽에서 그의 형을 부축하였다.
드디어 사냥꾼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사냥꾼을 보고도 남동생(치타미가)은 도망가지 않았다. 여동생은 공포에 질려 조금 도망갔지만 다시 되돌아왔다. 그리고 두 오빠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다고 하여 왼쪽에 섰다. 여기서 남동생은 아난이고, 사슴왕은 나의 전생이었다. (중략) (《자타카》501)

마. 백조 왕의 본생이야기(hamsara칓a?ja칣aka)
이 이야기도 서론 부분인 현생에서 아난(아난다)가 자기의 생명을 희생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붓다는, 아난은 전생에서도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였다는 과거 이야기를 시작한다. (생략) (《자타카》 502)

바. 독수리 왕의 본생이야기
이 이야기도 서론 부분인 현생에서 아난(아난다)가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여 데바달다(Davadatta)로부터 붓다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붓다는, 아난은 전생에서도 자기의 생명을 희생했다는 과거 이야기를 시작한다. (생략) (《자타카》 533·534)3)

사. 투신아호(投身餓虎)
이것은 《금광명경(金光明經)》제17 〈사신품(捨身品)〉에 등장하는 붓다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살타태자(붓다의 전신)는 어느 날 숲에서 7마리의 새끼를 낳고 7일 동안 굶주린 호랑이에게 자신의 몸을 던져 보시하였다. (생략)

앞에서 언급한 이야기들은 전생에서 붓다와 아난이 실천한 보시이다. 지금부터는 앞에서 제시한 《자타카》의 사례를 바탕으로 신체의 전체나 일부를 보시하는 행위와 장기이식을 관련시켜 서술하고자 한다.

이 일곱 가지 사례의 공통점은 철저한 보살의 자비심을 바탕으로 한 보시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보시는 자신의 철두철미한 자발심을 기초로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양의 종교와는 달리 자신의 생존을 자기 자신이 조정하는 것을 불교는 원칙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적인 논리(자타카)에 따른다면 자기의 신체를 보시하는 장기이식은 기증자(도나)의 의사표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장기이식이 보시인가? 장기이식이 보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장기이식이 보시가 되기 위해서는 ‘삼륜청정(三輪淸淨)’4)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불교에서는 주장한다. 이른바 도나(보시자)·레시피언트(보시를 받는 사람)·장기(보시물)는 모든 집착과 분별(계산)5)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생사를 불문하고 타인이 필요하다고 하는 경우에 자신의 신체 전부나 일부를 보시(기증)해야 한다. 절대적이고 철저하게 이타적인 마음의 발로가 보살행으로서의 보시이다. 이처럼 불교 입장에서는 장기이식을 보시행으로 삼고자 할 때는 반드시 앞에서 언급한 내용(三輪淸淨)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500명의 회원을 가진 세계 최대의 인도학·불교학회인 일본 인도학불교학회에서는 3년간의 연구 성과물로서 ‘삼륜청정’의 조건을 갖추었다면 장기이식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위원장(마에다 센카쿠) 보고서를 1990년에 학회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설사 보시자(도나)의 자발적인 의견에 의해 보시물(장기)를 받는다고 하여도 보시를 받는 사람(레시피언트)은 다음과 같은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남의 장기를 받으면서까지 그렇게 생명을 연장하고 싶은가? 자기의 생명에 대해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모르는가?” 이와 같이 불교에서 집착은 부정한 것이고, 보시행은 성립하지 않는다.

‘생의 집착을 버려라’는 가르침은 어느 시대에도 통하는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즉 생의 집착을 떠나 생의 의욕을 억제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진정한 불교도의 입장이다. 그러나 장기를 이식하면서까지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어느 누가 비난할 것인가? 따라서 현실적으로 인간에게 삶의 욕구를 비난하거나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보시 행위가 자기 육체의 전부나 일부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는 현재의 장기이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자타카에 나타난 사신설화는 장기이식의 근거를 위해 귀중한 자료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고 본다.

3. 맺는말

필자는 불교의 근본정신이 중생의 고통을 제거하는데 있다고 보고, 특히 중생의 고통 중에서 병고를 가장 큰 고통 중의 하나로 보고, 병고를 제거하고 근본적으로 해결하는데 있어서 장기이식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서술하였다.

우선 뇌사를 살펴보고 불교의 여러 사상에서의 죽음관을 살펴보고 그러한 불교의 죽음관에서 뇌사를 죽음으로 볼 수 있다고 서술하였다. 그리고 불교의 인간관을 살펴보고 특히 불교의 무아사상이 장기이식을 위한 근본적인 인간관이라고 제시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한국인의 근본적인 심성과 가치관을 지배했던 무속신앙과 유교적인 육체관이 여러 긍정적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이식을 위하여 장애요소가 될 수 있다고 보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을 불교윤리 사상 가운데 자비윤리사상으로 보고 그것에 대하여 자세하게 고찰하였다. 그리고 사신설화에서 장기이식의 근거를 위한 논리를 찾아보았다.

필자의 이러한 작업에 여러 무리한 논리적 비약이나 자세한 논리적 전개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작업이 불교 쪽에 너무 없어서 자료를 정리하는 마음으로 서술하였다. ■

곽만연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동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동국대, 한양대, 인하대에서 강의를 하였고, 현재 동아대학교 인문학부 교수이다. 논문에 <불교의 직업관> <불교윤리사상이 신라사회에 끼친 영향> <불교의 죽음관의 전개와 한국문화에 끼친 영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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