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류에게 종교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방담

1. 들어가며― 종교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 ―

우리는 정말로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나 종교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한다. 종교에 대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태도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겠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는 그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그들은 종교란 단어가 나오면 으레 따분하다는 표정을 짓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종교란 그저 신이든 부처든 믿고 천당이나 극락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류가 생겨난 이래로 종교가 없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질문에 일생을 걸고 사투를 벌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하다 못해 작은 호기심조차 갖지 않는다. 나날이 먹고사는 것도 바쁜 세상에 무슨 내세를 이야기하고 신을 이야기하느냐는 식이다.

그런가 하면 이런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사람들도 있다. 이른바 종교에 심취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 가운데 특히 기독교와 같은 유신론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종교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종교를 잘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진리라고 쉽사리 확신한다.

가령 기독교에서는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이 사람이 되어 수십 년을 살다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가 부활했다는 교리에 대해 그것이 문자 그대로 진리라고 믿는 신자들이 많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주장을 강하게 확신한다. 나는 이 교리의 진리 여부에 대해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은 과연 진리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진리가 그렇게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 진리를 알고 있는 기독교인이 많은 이 세상은 왜 이리도 혼탁하고 인간 사회에는 대규모의 전쟁부터 해서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갈등이 많은 것일까? 뿐만 아니라 소위 진리를 터득했다고 믿어지는 소수의 성자들의 경우 그들은 그 진리를 깨닫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왜 이 유신론자들은 어찌 그렇게 쉽게 자신의 진리 획득 사실을 단정 내릴 수 있을까?

그런 사람들에게 그들이 믿는 교리의 모순에 대해 지적하면 그들은 곧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가령 ‘당신들이 믿는 것처럼 예수가 유일한 구세주라면 예수 이전에 태어난 사람과 예수 이후에 태어났되 자신의 과실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예수의 복음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지적이 그런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는 신학적으로도 대단히 첨예한 문제라 존 힉(John Hick) 같은 저명한 신학자도 자신의 저서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God has many names)》(이찬수 역, 창, 1991)와 같은 책에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논하고 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 그들의 입장은 대단히 정형적이다. “당신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 놀라운 하느님의 신비를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종교는 그렇게 이성을 가지고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성적으로 따지지 않으면 그것은 도대체 사람으로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중요한 문제를 어떻게 처음부터 그냥 믿어버리고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가? 이성이란 따질 데까지 따져보고 그 다음에 포기해야지 처음부터 포기하는 것은 이성의 능력을 너무 무시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다시 묻는다. 이런 내 질문에 다소 몰린다고 생각이 되면 느닷없이 “당신은 신을 믿는가?”라고 매우 원초적인 질문을 한다. 이것은 당신처럼 신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를 못하겠다는 발언으로 생각된다.

이 질문이 나오면 나는 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아진다. “당신 그 말 한번 잘했다. 당신은 ‘내가 신을 믿는다’는 말이 얼마나 복잡한 말인지 알고 하는 것인가? 우선 거기서 믿는 주체인 나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당신의 이성인가 감성인가 아니면 의지인가? 아니면 그것을 모두 합한 것인가? 아니 당신은 자기가 누구인지 확실히 아는가?

내가 알기론 자기를 확실히 아는 사람은 정말로 극소수에 불과한데 믿는 주체인 자기도 모르면서 무엇을 어떻게 믿는다는 말인가?”라고 치고 들어가는 게 내 반격의 첫 번째 단계이다. 그 다음의 내 질문도 만만치 않다. “당신은 신을 믿는다고 할 때 그 ‘신’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런 질문에 기독교인의 대답은 뻔하다. “하느(나)님은 (기독)성서에 계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곧 “성서에 나오는 신도 시대별로 다르고 예언자에 따라 다른데 어떤 신을 말하는가? 예수가 생각했던 신과 모세가 생각했던 신은 많이 다른데 어떤 신을 말하는가? 뿐만 아니라 유태교 초기의 신 개념―가령 변덕스러운 야훼의 모습―과 최근에 신학자들이 말하는 생태주의자들이 바라보는 신이나 페미니스트들이 바라보는 신은 거의 다른 신처럼 보이는데 당신이 믿는 신은 대체 어떤 신을 말하는 것인가?” 하고 되묻는다.

아울러 “‘믿는다’는 행위도 도대체 어떤 차원의 믿음을 말하는가? ‘사람은 죽는다’와 같은 사실을 믿는 아주 단순한 믿음부터 시작해서 수 없이 많은 차원이 있는데 어떤 차원을 말하는가?”라고 묻게 되면 대체로 우리들의 대화는 끝이 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종교를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신앙인들이 사실은 별 생각 없이 종교를 신봉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다. 종교가 그렇게 간단한 주제라면 예수나 붓다 같은 인류 최고의 천재들이 그렇게 오랜 동안 골머리를 썩지는 않았을 게다.

물론 이런 식의 대화는 기독교 신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많은 불교 신자들과도 불교의 교리를 가지고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다. 불교는 교조적인 교리가 적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논쟁할만한 교리가 적을 뿐이지 불교 교리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불교는 엄청난 세월 동안 세계의 각기 다른 지역에서 발전해왔기 때문에 심지어 서로 상충되는 교리마저 발견된다. 가령 초기 교리인 무아론과 선불교의 진아론은 완전히 교리 내용이 상반되는 것 아닌가?

또 불교의 가장 핵심 교리라고 할 수 있는 이 무아론(無我論) 자체에 대해서도 우리는 논쟁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무아론에 의하면 붓다는 ‘내가 없다’라고 설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없다면 불교의 사성제 중에 첫 번째 나오는 진리로 ‘인생은 괴롭다’고 할 때 도대체 누가 괴로워하는 것일까? 내가 없으면 괴로워할 주체도 없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불교의 최고 목표인 해탈을 달성했다고 했을 때 내가 없다면 도대체 누가 해탈을 한 것인가 하는 질문도 던져볼 수 있다.

또 불교가 가장 대표적으로 주장하는 교리인 ‘참 나를 찾자’라고 할 때 내가 없는데 또 ‘참 나’는 어디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도 가능할 게다.

이렇듯 종교를 둘러싸고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나 차분히 따져보면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그저 하나의 신념에 불과할 뿐 자신이 끊임없이 되묻고 숙고해서 완전히 체화된 그런 믿음들이 아니다. 그저 책에 씌어 있으니까 혹은 우리 교회 목사님이 얘기했으니까 진리라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남의 이야기를 그저 되뇔 뿐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뒤로 하고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려 한다.

‘종교란 과연 정말로 무엇일까?’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왜 인류는 한 번도 종교를 떠난 적이 없을까? 왜 인류는 끊임없이 종교적인 질문을 할까? 또 지구상에는 왜 이렇게 많은 종교들이 있을까? 이 종교들은 매우 다른 교리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 교리들은 외적으로 보기에 매우 다르게 보이는데 과연 각각이 다른 것일까? 중근동의 종교에서는 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불교에서는 대체로 그런 신은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렇게 상반된 교리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면 그 중 하나는 진리가 되고 다른 하나는 진리가 아니어야 하지 않은가? 가령 신이 있다면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종교는 거짓이 되어야 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되어야 한다.

도대체 종교란 무엇일까? 종교가 무엇이기에 사람을 죽음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일까? 초기에 박해받던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을 잡아먹을 사자 앞에서도 찬송을 하면서 기쁨 속에 죽을 수 있었던 초인간적인 행위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을까? 신라의 혜초 스님을 비롯해 중국과 일본의 수많은 스님들이 진리를 찾겠다고 그 험한 인도로 가는 길을 갈 수 있게 만들었던 그 동인은 대체 무엇일까? 인도로 가는 길이란 먼저 간 수행자들의 해골을 이정표 삼아 가는 죽음과 삶의 중간 길인데 그 굳이 안 가도 되는 어려운 길을 왜 갔을까? 종교의 영역에서는 이렇듯 정치나 경제와 같이 일상적인 다른 삶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 발견된다. 이렇듯 종교에 관해서는 수많은 질문과 방담이 생겨난다. 이제 그런 종교를 이해하려 하는데 앞으로의 깊은 이해를 위해서 우선 종교를 학문적으로 객관적인 시각에서 이해해보기로 하자.

2. 이른바 종교를 정의하는 문제
―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한 번은 짚어봐야 할 문제 ―

종교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답변을 한다. 물론 ‘신이나 부처 같은 절대자를 믿어 복을 받고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다’와 같은 대답이 가장 흔할 것이다. 혹은 단순하게 ‘죽어서 천당이나 극락에 가려고 믿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조금 유식하게 대답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종교란 절대자인 신(혹은 붓다)과의 대화를 통해 인생의 진리를 깨치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여기에서 계속해서 기독교와 불교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이슬람교와 같은 다른 세계 종교를 도외시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보아서 인류의 종교는 셈족 종교(Semitic religions)―유대교에서 시작해 거기서 나온 기독교와 이슬람을 통칭해 부르는 용어―와 인도에서 파생된 종교라는 두 개의 큰 군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돼 각 군에서 우리와 친숙한 대표적인 종교만 뽑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나는 종교를 정의하는 문제를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해 인류의 그 복잡한 종교 현상을 어느 정도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를 정의하는 문제를 조금은 짚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주제부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종교학자들이 연구하는 붓다나 예수는 한 번도 스스로에게 종교의 정의가 무엇인가 라고 물은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종교학자들은 자신들이 연구하는 사람들은 한 번도 던진 적이 없는 질문을 심각하게 생각하니 비본질적이라는 것이다. 지난 세기의 위대한 종교학자였던 엘리아데와 같은 종교사학자들은 그들이 천착한 종교현상학을 통해 많은 연구업적을 쌓았다. 그런데 그들은 구원이나 초월 같은 종교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라 밖에서 보이는 현상에 대해서만 언급을 했다. 그 결과 성과 속과 같은 이분법적인 개념을 추출해 종교를 정의함으로써 종교가 어떤 현상이라는 것에 대해 매우 확실한 그림을 선사했다.

그런데 항상 종교의 본령을 생각하는 나로서는 어쩐지 미진하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가령 엘리아데는 종교를 ‘일상적인 속의 공간에 성이 침투하는 사건’이라고 풀이했는데 이 이론 자체는 매우 훌륭한 설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곧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과연 종교가 그런 사건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인류의 최고 천재인 예수는 광야에서 오랫동안 헤매고 다니고 붓다는 6년 동안이나 고행했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종교란 그 이상의 것이기에 옛 성현들이 전신의 힘을 다해 추구했던 것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듦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정의하는 문제는 우리가 종교에 대해 갖고 있는 개념을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1) 종교라는 단어를 둘러싼 오해들―특히 동북아시아의 관점에서

위에서 본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를 말할 때 신과 연관해서 말을 한다. 종교와 신은 으레 관련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럼 신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불교나 유교 같은 종교는 종교가 아닐까? 물론 어떤 사람들은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수행체계라고 말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유교는 윤리이지 종교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위에서 보는 세계종교사 책에는 왜 불교나 유교가 반드시 포함되는 것일까? 왜 이런 혼선이 생기는 것일까? 다시 말해 종교라는 단어와 얽힌 문제는 어디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서 나아가고자 한다. 그러면 곧 종교라는 현상을 설명하고 정의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종교라는 개념이 우리 동양인(혹은 한국인)에게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은 우리의 언어체계에는 종교라는 단어가 원래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란 단어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이 개념은 생긴 지가 100여 년밖에 안 되는 아주 새로운 것이다. 종교란 단어는 영어의 ‘religion’을 번역한 용어이다. 이 용어를 만든 사람은 동아시아에서 서양 문화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일본의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19세기 말에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수많은 영어 단어를 번역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 학문에 관계된 것을 살펴보면, ‘정치’니 ‘경제’니 ‘철학’이니 ‘경영’이니 하는 단어들이 모두 이때 종교와 같이 번역된 말이다. 서구의 새로운 학문들이 물밀듯이 전해질 때 ‘politics’나 ‘philosophy’와 같은 서양 학문의 이름이 이렇게 번역된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정치니 철학이니 하는 단어들이 중국에서 유래한 오래된 단어로 생각하고 있었을 터인데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철학 같은 단어는 완전히 일본 학자들이 새롭게 만들어낸 단어이다.

방금 본 것처럼 일정한 언어에 어떤 사물을 지칭하는 단어가 없다면 그것은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머리에는 그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언어가 없으면 어떤 생각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종교라는 개념이 없던 것이 된다. 그럼 동양(특히 동북아)에서는 종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캐나다의 맥길대학에 있는 윌프레드 C. 스미스 교수의 《종교의 의미와 목적(The Meaning and End of Religion)》(길희성 외 역, 분도출판사, 1991)라는 결코 쉽지 않은 책을 읽고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에 의하면 동북아시아 사람들에게는 방금 언급한 것처럼 종교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에게는 다만 불교나 유교라는 이름의 전통만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전통들은 종교라는 일정한 이름으로 일상적인 삶과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삶 자체 속에 녹아 있었다. 가령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의 일반 국민들은 유교의 예에 따라 으레 조상제사를 지냈고 때(초파일이나 초하루 혹은 보름)가 되면 뒷산에 있는 절에 가 불공을 드리며 화급한 일이 생기면 무당에게 달려가서 점을 본다. 이런 ‘종교’ 생활은 너무나 생활 속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그게 ‘종교’라는 삶의 또 다른―그리고 일상적인 삶과 거리가 있는―체계를 형성한다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으레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생활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만일 19세기 조선의 어떤 주막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댁은 종교가 무엇이요?”라고 묻는다고 상정해보면 그런 장면은 어색하기가 그지없지 않겠는가? 한말에 조선에 온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에게는 종교가 없고 다만 귀신숭배나 우상숭배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였는데, 그네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 종교란 서양의 유일신론에서 파생한 개념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것은 종교라는 개념이 유일신론을 상정하는 서양의 종교문화에서 파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양적인 유일신론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물론 재론할 것도 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의 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신과 인간을 철저하게 나눈다. 종교란 바로 이 신에 대한 담론이다.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특히 신과 인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반되는 속성이 있는 것으로 묘사하면서 양자를 가른다.

이 도표를 보면 이러한 분석이나 구분에 동의하든 안 하든 기독교에서는 신과 인간을 얼마나 다른 존재로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기독교에서는 신의 영역을 인간의 영역과는 완전하게 다른 것(absolutely other)으로 보는 것이다. 종교란 단어는 바로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유래한 것이다.

종교의 어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가령 기원전 1세기 사람인 키케로(Cicero)는 religion이라는 단어가 라틴어의 ‘religio’에서 나왔는데 이것은 ‘다시 읽는다’라는 뜻이라고 풀었다. 이것은 성전을 반복해서 낭송하는 종교의식에 초점을 두고 한 말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것보다는 기원후 4세기에 살았던 천주교 신학자 락탄시우스(Lactantius)라는 사람이 내린 해석이 일반적으로 더 선호되는 것 같다.

그에 의하면 종교란 ‘다시 묶는다’라는 뜻이다. 무엇을 다시 묶는다는 뜻일까? 원래 하나였다 떨어진 신과 인간을 다시 묶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종교란 이렇게 유신론적인 신앙에서 파생된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확실한 유신론적인 전통이 없는 동북아시아에서 종교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동북아시아에 이런 종교 개념이 없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계속된다. 유대교와 같은 유일신교에서 신은 자연을 절대적으로 초월해서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도가 만물에 있다’느니 ‘모든 것이 한울님’이라느니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졌다’느니 하는 ‘만물은 절대적 실재(ultimate reality)의 현현(manifestation)’이라고 주장하는 동양의 대부분의 종교와는 상반되는 입장이다. 그리고 유일신교에서는 절대적인 하나의 신에 대한 충실한 믿음을 강조하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엄격한 정의가 필요하고 그 까닭에 종교는 자연스럽게 배타적이 된다. 아울러 서양에서 종교라는 뚜렷한 개념이 생기게 되는 또 하나의 요인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근세에 와서 서양에서는 종교가 세속과 더 강하게 분별되는 경험을 겪게 된다. 바로 계몽주의 사상가들이나 사회과학적인 입장을 띤 사상가들이 그 주인공으로서 이 사람들은 종교를 초자연적인 영역에 속한 것으로 보고 가능한 한 명확하고 철저하게 인간세계가 포함된 자연세계와 구분하려 했다. 특히 계몽주의와 더불어 세속적인 세계관이 강하게 대두되면서 종교를 일상적인 세계와 구분하려는 노력은 더 눈에 잘 띄었다.
위와 같은 이론적인 면 외에도 실제적인 면에서 유신론적인 종교는 동양(혹은 동북아) 종교와 매우 다르다. 특히 유대-기독교 전통이 그렇겠지만 유신론적인 전통에서는 신자들이 일요일(혹은 그에 버금가는 주일)에는 반드시 교회를 가야 한다. 교회도 아무데나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소속된 교회가 있어 그 교회에만 가야 한다. 그 교회의 교적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가 있기 때문이다.

또 그 교회에는 사제가 반드시 주석하고 있으면서 신과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실정과 비교해보면 우리가 속해 있는 동북아시아의 종교적 환경은 매우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동북아시아인에게 유불선은 일상과 떨어진 초자연적이거나 영적이거나 하는 초일상의 이야기들이 아니다. 유불선은 그저 사람이 살아가는 길 혹은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가르침 정도로만 이해되었다. ‘세속이다’ ‘초세속이다’라는 구분이 미약했던 것이다. 종교 공동체라는 개념도 아주 느슨했다. 불교를 신봉한다 해도 나는 불교 신자라고 말하지도 않을 뿐더러 교적을 올려놓고 나가는 절도 없다.

또 절이라고 해도 지정된 사제가 있어 신자들을 돌보는 것도 아니다. 승려는 엄밀히 말하면 사제가 아니다. 사제처럼 하늘과 땅, 혹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저 수도자일 뿐이다(그렇다고 사제 역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3) 종교에는 여러 수준이 있다

그래서 종교학에서는 각 종교들이 가진 이런 성향을 구분해서 종교를 경성(硬性) 종교와 연성(軟性) 종교라는 두 가지의 큰 틀로 나눈다. 경성 종교란 말 그대로 꽉 짜여진 조직을 가진 (딱딱한) 종교를 말한다. 바로 위에서 본 유대-기독교 전통이 대표적인 경성 종교 체계에 속한다. 이런 종교들에서는 모든 게 아주 세밀하게 짜여 있다. 반면에 불교 같은 동양 종교들은 조직체계가 느슨하기 때문에 그런 종교를 가리켜 연성 종교라 한다. 같은 동양 종교이면서 유교는 불교보다 훨씬 더 느슨한 연성 종교라 할 수 있다.

물론 유교를 종교라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문제도 있겠지만 그 문제는 일단 나중으로 돌리자. 다만 확실한 것은 서양에서 나온 세계 종교사 책을 보면 유교가 빠지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유교가 종교에 들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종교의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는데 뒤에서 종교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나면 그 문제는 자연히 풀릴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는 편의상 유교를 철학과 종교 사이에 있는 종교적 가르침이라고 정의하자. 그냥 유교를 ‘종교’라고 하는 것과 ‘종교적’이라고 하는 것은 차이가 크게 난다. 종교에는 위에서 본 절대적 실재와 사제, 그리고 신봉자가 확실하게 갖추어져 있어야 하지만 종교적인 가르침에서는 그런 것들이 그렇게 확실하게 갖추어져 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유교는 바로 후자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유교에 무슨 절대적 실재가 있고 사제가 있겠느냐고 말하겠지만, 그런 요소들이 존재하지만 그다지 확실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연성 종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유교에서 절대적 실재란 무엇일까? 이론적으로야 상제(上帝)가 되겠지만 일반 신봉자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존재이다. 그러면 누가 절대적 실재가 될까? 아마 유교인들에게는 조상신들이 (절대적) 실재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것 같다. 기독교에서 하느님 모시듯이 조상신을 모시니 하는 소리이다. 그러면 사제는 누구일까?

여기서부터 조금씩 헛갈릴 터인데 유교에서의 대표적 사제는 바로 제사를 집전하는 장손―통칭해서 그 집안의 대표자―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장손이 조상신들과 후손들을 매개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장손은 항상 사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제사 때에만 사제 역할을 한다. 평시에는 다른 일반인들과 다름없다가 제사 드리는 당일에만 사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 혹은 신도 공동체는 무엇일까?

바로 가정이다. 아버지가 사제 역할을 시작하게 되면 그 가정은 일정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 물론 신도들은 그 가정의 가족―여기에도 차등이 존재하는데 남자들은 정식 신자들이지만 여자(특히 딸들)들은 마치 예비 신자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들이다. 그러니까 유교는 느슨한 종교 조직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마저도 임시로 생겨났다 없어졌다 하기 때문에 아주 ‘소프트한’ 종교 조직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4) 다양하고 다양한 인류의 종교 현상

이와 같이 서양의 유대-기독교적인 관점을 가지고 종교에 대해 접근하면 지구상에 있는 수없이 다양한 종교들을 모두 포괄해서 정의 내리는 일이 심히 어려워진다. 우리는 위에서 동북아 종교에 대해서만 살펴보았지만 전 세계에 걸쳐 널려있는 종교 혹은 종교적 현상들을 보면 종교를 싸잡아서 한 마디로 정의 내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가령 멜라네시아의 어떤 부족이 개구리를 숭배하는 종교 행위와 미국 보스턴에서 융성하고 있는 기독과학교(Christian Science)와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이며 지금도 인도의 설산 속에서 수행하는 도인들과 강증산을 하느님으로 신봉하는 한국의 증산교도들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할까?

그러나 이런 현상들은 모두 전형적인 종교 현상이니 이것을 포괄해서 종교를 정의 내리는 일이 필요하다. 종교를 정의하는 문제가 복잡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이렇게 여러 종교를 섭렵할 필요도 없다. 힌두교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힌두교는 서양의 좁은 유신론적 체제로는 도저히 잡히지 않는 종교이다. 힌두교 안에는 수많은 종교적 견해들이 병존하기 때문이다.

가령 모든 사물에 신이 깃들여 있다는 범신론부터 시작해서 그 신이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해 있다는 범재신론으로 해서 다신론, 일신론, 유일신론, 이원론, 일원론 등등 일련의 주장들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럼 힌두교를 유일신론을 지향하는 서구적인 의미에서 종교라 할 수 있을까 없을까?

그런가 하면 종교에 꼭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요소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느냐와 같은 문제도 명확하게 대답하기가 힘들다. 가령 초기 불교 같은 경우를 보면 인간의 본성을 넘어선 어떤 실체도 인정하지 않는데 그렇다고 초기 불교를 종교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게다가 붓다는 윤회와 같은 초지각적인 사건에 대해서 언급을 회피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울러 공(空)과 같은 초이론적인 교리도 아직 나오기 전이다. 그래서 불교를 놓고 종교라 하지 않고 철학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불교가 칸트 철학과 같은 순전한 철학에 그칠 수만은 없는 일이다(철학에는 구원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종교와는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유교에도 어느 정도 적용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공자도 초자연적인 것을 설명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숨겨진(covert) 종교 혹은 준(準, quasi) 종교라 불리는 마르크시즘이나 나치즘, 더 나아가서 김일성주의 혹은 키미즘(Kimism)에도 적용된다. 혹자는 이런 이데올로기가 종교와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 이즘들은 가장 종교를 반대하는 것 같아도 사실은 그 내부 구조는 종교를 쏙 빼어닮았다는 의미에서 준 종교라 하는 것이다. 이 이즘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우선 교조에 대한 강한 숭배열을 들 수 있다. 과거 특정한 인류들은 이 정치 지도자들을 향해 인간의 도를 넘는 숭배를 보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북한인들의 김일성 숭배열은 아마 다른 도전자들을 일치감치 따돌렸을 것 같다. 과거에 독일 TV에서 우리나라의 종교에 대해 찍으러 왔을 때 무당의 굿하는 모습과 개신교의 부흥회 하는 모습, 그리고 김일성에게 열광하는 모습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찍었다는 것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대단히 재미있는 사실로 생각된다. 서양인들에게는―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김일성에게 열광하는 모습이 무당이 굿할 때 신명내는 것이나 부흥회 때 망아경 속으로 빠져들어 방언을 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게 보인 모양이다.

그 다음 공통점은 자신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을 들 수 있다. 이른바 정통성에 대한 집착이다. 가령 마르크시즘을 신봉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 마르크스주의야말로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유대-기독 전통에서 자신들의 종교만이 유일한 진리로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정통에 대한 집착은 강한 교조주의 혹은 강한 도그마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정통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보니까 자신들의 체제를 배신한 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한 압박이 가해진다. 공산주의나 전체주의 국가에서 반체제 인사들을 어떻게 처리했는가 하는 것은 다시 거론할 거리도 못된다. 한 마디로 무자비한 숙청만이 있을 뿐이다. 스탈린이나 히틀러, 김일성 정권에서 정치적으로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잔인하게 대했는가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유일신론을 주장하는 종교들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진 것으로 보이는데 과거에 유대-기독 전통과 같은 종교에서는 배교 자체를 인정하지도 않았지만, 그런 중에서 아주 드물게 배교자들이 생겨나면 이들을 아주 잔인하게 처단했다.

사실 이데올로기와 종교의 공통점은 이런 정치적인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교조를 둘러싼 신화들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가령 기독교에서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느니 예수가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오천 명을 먹여 살렸다느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신화 만들기 작업은 이데올로기 체제 안에서도 매우 흡사하게 일어난다. 특히 종교 체제와 가장 많이 닮은 ‘김일성교’―북한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신을 아버지로 부르듯이 김일성을 아버지로 불렀다!―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북한인들은 김일성을 하나의 개인이 아니라 거의 신에 가까운 존재로 파악했다. 이것은 그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종교의 교주에게서나 적용될 수 있는 신화가 형성되어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가령 김일성이 나뭇잎 하나를 의지해 압록강을 건넜을 뿐만 아니라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어 일본군과 싸웠다는 일화는 거의 종교에서 말하는 신화처럼 들린다. 나뭇잎 하나를 타고 강을 건넜다는 신화는 불교도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신화 아닌가? 선불교의 초조로 간주되는 달마가 양자강을 건널 때 같은 일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달마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반에서 발견되는 신화이기도 하다.

김일성에 대한 신화는 그가 죽고 난 다음에 절정을 이룬다. 북한인들은 세뇌가 되었든 아니든 김일성이 죽지 않고 살아서 아직도 그들을 통치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이른바 유훈통치이다. 이런 믿음을 극대화하기 위해 북한 당국은 TV로 달을 비추면서 달에 나타나는 음영이 바로 김일성 주석이 움직이는 모습이라고 선전했다. 사태가 이 정도가 되면 이것은 ‘새빨간 거짓이다, 아니다’의 차원을 넘어서 신화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북한인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까마득한 고대에 있었던 영웅에 대한 신화로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웅은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형이 되어 북한인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다. 이것은 마치 예수가 죽은 뒤 부활해 제자들에게 죽음을 극복했다는 확신을 준 뒤 다시 승천해 성령으로 영원히 같이 있다는 기독교의 영원한 신화를 연상시킨다.

이렇게 보면 이데올로기와 종교들이 얼마나 서로 닮았는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이데올로기를 숨겨진 종교라 하는 것이다. 북한은 인류 역사상 종교를 가장 억압한 나라로 알려져 있는데 실상은 그 반대로 가장 종교적인 나라가 되어버렸다. 가장 반종교 국가처럼 보이는 북한이 사실은 종교 국가로 보이는 것은 김일성주의(그리고 주체철학)를 종교에서 말하는 도그마적인 교리의 수준으로 올려놓고 종교에서 요구하는 것과 거의 같은 일을 행해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가장 반종교 국가로 시작한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종교적인 국가로 변신하는 아이러니 현상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류에게는 종교가 없었던 시기가 없다는 설이 설득력을 가진다. 종교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인류는 죽음이라는 절체절명의 한계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유사 이래로 종교라는 사회 체제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인류라는 동물이 생겨났을 때부터 종교적 행위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나중에 다시 자세하게 보게 되는데 실제로 인류사를 되돌아보면 종교가 없었던 시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굳이 반론을 내세운다면 지난 세기 초에 생겨나 아직도 몇 국가는 그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공산주의 체제 국가에는 적용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종교를 철저하게 억압했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니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 거론한 대로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종교 역할을 대신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면 다시 인류사에서 종교가 없었던 시기는 없게 된다.

5) 이렇게 다양한 종교를 정의하는 일―비트겐슈타인의 가족닮은꼴 이론

지금까지 이렇게 다양한 종교나 그와 비슷한 현상을 본 것은, 그저 종교가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한두 문장으로 정의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종교들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그런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어느 한 종교에 있는 요소가 다른 종교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다. 가령 앞에서 본 것처럼 신의 존재를 믿어야만 종교라고 한다면 신을 믿지 않는 불교는 종교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뉘라서 불교를 보고 종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지구상에는 이런 대전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종마다 부족마다 다른 종교 전통들이 허다하게 있다. 이렇게 수없이 많은 종교들을 정의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게다가 종교라는 용어는 앞에서 본 것처럼 유대-기독 전통과 같은 유일신 전통에서 생겨나고 전 세계로 유포된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유일신 전통적인 시각에서 종교를 바라보는데 지구상에 있는 이 다양한 종교들을 유일신론적인 시각으로 다 설명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 그렇다고 이 수많은 종교들이 전혀 다른 별개의 현상일까? 그렇지는 않다. 서로간에 분명히 공통점은 있는데 그것을 모두 꿸 수 있는 그런 하나의 코드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종교를 어떻게 정의하고 묘사할 수 있을까?

기실 현대의 종교학자들은 종교를 정의하는 일을 진작에 포기했다. 종교적 현상들이 너무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종교라는 대단히 독특한 인류적 현상을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은 하나의 사건이나 사물을 정의해서 자신의 이해 체계 속에 넣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견디는 존재이다. 그럼 종교를 어떻게 묘사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우리는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같은 상황을 게임에 적용시켰다. 게임을 보자. 지구상에는 수없이 많은 게임이 존재한다. 농구나 축구처럼 공을 가지고 하는 게임부터 시작해서 화투처럼 카드를 가지고 하는 게임, 또 가위바위보처럼 손으로만 하는 게임 등등 여기서 일일이 그 많은 게임의 종류를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그러면 이렇게 복잡한 게임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이 많은 게임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코드나 개념은 절대로 발견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대신에 게임들간의 닮은 점이 연속해서 교집합을 이루면서 그것들이 일정한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는 현실만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축구와 농구는 공을 갖고 한다는 의미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축구와 닭싸움은 발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농구와 닭싸움 사이에는 별 공통점을 찾을 수 없다. 그 많은 게임 가운데 우리는 세 가지 게임만 본 것인데 이 세 게임조차 아우를 수 있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전체 게임을 하나의 공통점으로 묶는다는 것은 차라리 어불성설에 가깝다. 다만 이런 식으로 수많은 게임들이 복잡한 상관관계 속에서 얽혀 있는 것만을 발견할 뿐이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소개한 가족닮은꼴(family resemblances)이란 개념을 참고해보자. 가족닮은꼴이란 가족들을 정의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한 가족을 정의하려 할 때 보면 그 가족 구성원간에는 어떤 두 사람도 꼭 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모든 가족이 공유하고 있는 그런 점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까 하나의 개념이나 특질로 가족을 다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대신에 구성원들은 게임의 예에서 본 것처럼 여러 특징들을 서로 나누어서 공유하고 있을 뿐이다. 육체적인 특질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거나 심리적인 특질, 또 가족적인 관습이나 문화적인 특질들 가운데 몇몇 가지를 구성을 달리하면서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엄마는 내향적이며 눈에 쌍꺼풀이 있는데 둘째 딸은 쌍꺼풀은 있지만 대단히 외향적일 수 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은 내향적이라면, 가족 가운데 이 세 구성원은 여러 특질들을 돌아가면서 공유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런 특질 가운데에는 그 어떤 것도 구성원 중에 한 사람이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여러 특질 중에 충분한 수를 갖고 있으면 대체로 그 가족의 구성원인 것으로 정의하자는 것이다. 충분한 수가 어느 정도가 되느냐 하는 것은 정하기 쉽지 않은 것이지만 어차피 정의하리는 것을 포기한 마당에 그 숫자에서만 정확성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을 종교에 그대로 적용시키면 된다. 모든 종교를 아우를 수 있는 정의는 없다. 대신 수많은 종교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특질들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가운데 일정한 수의 특질을 가지고 있으면 대강 종교 혹은 종교적 현상(사건)이라고 부르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여러 층(spectrum) 혹은 수준이 존재할 것으로 생각된다. 극히 종교적이라고 할만한 현상부터 시작해서 그 경계가 계속해서 희미해져 종교라고 불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아주 느슨한 의미의 종교적 현상까지 존재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특질 가운데 많은 것을 공유할수록 빠듯한 의미에서 종교가 되고 조금 가질수록 덜 종교적인 현상이 되는 것이다. 그럼 이제 할 일은 종교(적인 현상)와 비종교를 가르는 이러한 특질들에 어떤 것이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

최준식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템플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국제한국학회장, 한국문화표현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콜라독립을 넘어서》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유네스코가 보호하는 우리 문화유산 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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