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탁 저, 《죽음, 삶이 존재하는 방식》(청림출판, 2004)―

1.들어가는 말

생사학(生死學, Thanatology)이란 죽음에 관한 문제를 학제적(學際的)으로 다루는 학문이다. 즉 철학·의학·심리학·민속학·문화인류학·종교·예술 등 인류문화의 모든 면에서 죽음에 접근하고자 시도하는 학문이다.

주지하듯이 본격적인 의미의 생사학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시작되었다. 1965년 글라세(Glaser)와 스트라우스(Straus)의 공저인 《죽음의 인지(Awareness of Dying)》가 아마 이 분야 최초의 연구서일 것이다. 이후 큐불러 로스(Elisabeth Ku쮊ler Ross)가 《죽음의 순간(On Death and Dying)》을 발간하자 전 세계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로스 박사의 저작을 통하여 현대인들은 죽음이 하나의 학문으로써 연구되어야 한다는 점을 깊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저자는 거의 10년 전부터 우리나라의 학자로서는 드물게, 생사학에 천착해왔다. 저자는 ‘생사학이나 죽음 준비교육은 죽을 각오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준비를 통해 삶을 보다 의미 있게 변모시키도록 도모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삶을 준비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고 여겨,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준비해야 더욱 의미 있는 죽음,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고 보아서 이 일에 매진해왔다고 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아직 생소한 우리나라에서 저자의 연구는 개척자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본다면 《죽음, 삶이 존재하는 방식》은 척박한 인문학의 풍토와 생사학에 대한 몰이해라는 이중의 산고 속에서 태어난 옥동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자는 어렵게 얻은 생사학 연구서를 독서하게 될 기회를 얻었음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며, 동시에 우리 학계에서는 아주 귀한 이 생사학 전문가가 앞으로도 계속 연구에 매진하여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내놓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한다.

2. 이 책의 구성과 내용

《죽음, 삶이 존재하는 방식》은 읽는 이의 견해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 책이다. 또 그것은 저자와는 다른 독자 자신만의 권리일 수도 있다. 평자는 이 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았다. 고심 끝에 하나의 관점을 세워서 독서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 책의 제목에 충실하게 독서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죽음, 삶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이 책을 저술하는 기본적인 사유체계는 ‘죽음과 삶의 함수관계’가 된다. 다시 말해서 삶과 죽음은 서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의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평자는 《죽음, 삶이 존재하는 방식》을 ‘죽음이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므로, 어떻게 하면 우리는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을 삶의 고귀함을 유지한 채로 저 세상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가’ 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읽기로 하였다.

이렇게 골격을 세워놓고 볼 때, 이 책에서 저자가 가장 중심을 두고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1장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 안락사에 대한 논란’, 2장 ‘죽어 가는 사람의 여섯 가지 반응’, 3장 ‘데레사 수녀의 니르말 흐리다이와 호스피스’, 8장 ‘죽음, 끝이 아닌 이유’에 있게 된다. 나머지 4장 ‘낙태, 그 침묵의 절규’, 5장 ‘자살은 사회적 살인이다’, 6장 ‘사형수의 마지막 증언’, 7장 ‘지구촌 최대의 당면과제, 에이즈’는 각론으로서, 죽음을 제대로 맞이하기 위한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된다. 따라서 평자는 담론의 중심을 1장, 2장, 3장, 8장에 두고자 한다.

이 담론의 중심에는 저자의 독특한 생사관이 있다. 저자는 그의 아주 드물게 ‘독특한’ 생사관을 바탕으로 안락사 문제나 호스피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낙태·자살·사형제도·에이즈 등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저자의 독특한 생사관이 들어있는 제 8장을 우선 이해하여야 한다.
8장에서, 저자는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단정한다. 동시에 저자는 죽으면 끝이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현대 과학과 의학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불완전하고 부족한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인간의 부족한 안목으로 죽음을 연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세계의 모든 위대한 영적 전통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분명하게 밝히면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비전을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비전은 역으로 현재 우리의 삶에 성스러운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저자가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라고 확신하면서 내놓는 주장과 그리고 그 주장에 대한 증명이다. 그는 《티베트 사자의 서》에 제시된 내용, 가톨릭·개신교 등 다양한 종교의 가르침, 임사체험자의 증언, 빙의 현상, 호스피스 봉사자의 증언 등 다섯 가지를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8장에서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이 있다는 논증을 하고 난 이후, 저자는 1장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에 대해서 논구한다. 저자는 의학과 의료기구의 발달로 무수한 생명이 구해지고 고통이 크게 경감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죽어가는 환자와 그 가족, 그리고 의사들이 많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딜레마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이제 환자가 자신의 삶을 불필요하게 연장하지 않고 인간적이면서 존귀한 죽음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즉 안락사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마련할 시점이 되었다고 토로한다.

그런 다음, 2장에서 엘리자베스 큐불러 로스 박사의 죽어가는 사람이 겪게 되는 5단계의 심리적 반응을 우선 소개한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의 여섯 번째 반응으로, 저자의 독자적 견해인 ‘희망’을 이야기한다. 저자에 의하면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간에 보여주는 삶의 마지막 모습은 많이 다르다. 하나의 사례로 티베트 수행자들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으므로, 죽음이 재앙이 아니라, 하나의 축복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3장에서, 저자는 현대 호스피스 활동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인다. 호스피스라는 언명은 죽음을 앞둔 말기환자와 그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행위로서, 환자가 여생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평안하게 맞이하도록 환자와 가족을 신체적·정서적·사회적·영적으로 도우며, 사별가족의 고통과 슬픔을 경감시키기 위한 총체적인 돌봄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때문에 호스피스의 철학은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인간성 회복과 복지사회를 이룰 수 있게 하는 돌봄의 봉사로써, 구체적으로 말기환자와 임종환자와 그 가족들을 돌보고 지지하며, 남은 생을 가능한 한 편안하게 하고 충만된 삶을 살도록 해주고,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죽음을 삶의 자연스런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3. 비판적 검토

《죽음, 삶이 존재하는 방식》은 전체적으로 글이 유려하면서도, 동시에 이해하기 쉬운 예화를 들어 서술하고 있어서, 저자의 주장대로 고등학생 정도의 학력이라면 누구나 읽기에 불편함이 없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대목에서 소략한 설명으로 그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다시 말해서 깊고 중요한 내용을 치밀한 논증없이 선언적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과연 이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게 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저자의 주장이 맞다면 그 논증이 빈약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학술적인 성격보다는 대중에게 가깝게 가려는 의도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만약 그렇다면 이 책은 대중적인 계몽서도 아니고, 전문적인 연구서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비록 대중적인 계몽서라 할지라도, 논증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가치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는 현직 교수의 오랜 사색 끝에 나온 산물이다.

즉 대중에게 보다 쉽게 다가가려는 방편으로 평이하게 쓰여진 글이지만, 학술적인 면이 강한 저술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형식이 비록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하여 쉽고 편안한 문체로 쓰여졌다 하더라도 ‘논증의 결여’라는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평자의 눈에는 이 저술이, 저자가 본래 의도한 것으로 보이는, 한편으로는 대중적이고 계몽적인 성격을 띠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학술적으로 만만치 않은 내공이 보이는 그런 저술이 될 성공 가능성에 대해 상당히 비관적이다. 평자만의 편견일까?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저자 담론의 중심에는 그의 독특한 생사관이 있다. 저자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생사관을 바탕으로 해서 안락사 문제나 호스피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낙태·자살·사형제도·에이즈 등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독특한 생사관이 들어있는 8장은 모든 담론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나머지 안락사 문제나 호스피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낙태·자살·사형제도·에이즈 등의 문제는 모두 8장의 각론 내지는 방편이 된다.

다시 말해서 저자는 《티베트 사자의 서》에 제시된 내용, 카톨릭·개신교 등 다양한 종교의 가르침, 임사체험자의 증언, 빙의현상, 호스피스 봉사자의 증언 등 다섯 가지를 죽음이 끝이 아니고 다음 생이 있다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좀 세밀하게 논구해볼 필요가 있다.1)1) 가톨릭·개신교 등 다양한 종교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저자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논의를 고의로 회피한다.

우선 《티베트 사자의 서》를 보자. 주지하듯이 이 책은 불교 사유체계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선 불교의 사생관을 조금 볼 필요가 있다. 붓다는 고의 원인을 욕망이라 한다. 그렇다면 욕망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붓다는 내(我)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 모든 욕망을 낳는 욕망의 어머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아(我)는 없는가?

붓다는 진아(眞我, 형이상학적 자아)는 없고, 단지 가아(假我, 경험적인 자아)만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아(假我)인 인간은 하나의 물질적 육체적인 요소[蘊]인 색온과 네 개의 정신적인 요소[蘊]인 수온·상온·행온·식온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우리가 아(我)가 있다고 본다면 그것은 이 오온을 아(我)로 착각하는 것이다. 붓다에 의하면 인간 존재란 단지 5가지 요소들이 어떤 원인에 의해 잠시 결합되어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여러 가지 목재를 모아 세상에서 마차라 일컫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바퀴, 차체, 축 등 여러 요소가 모였을 때 우리가 그것을 마차라고 부른다고 해서 마차가 실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에 마차가 존재하는 것은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마차라고 이름을 붙여 부른다. 그와 같이 가아(假我)인 인간존재를 인간[我]이라고 이름을 붙여 부르지만 그것은 단지 유명(唯名)일 뿐이지 실체(眞我)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불변한 자아(自我·眞我·實體)가 존재한다는 집착이 깨뜨려지면 우리는 우리 존재가 변해도 그리고 외부세계가 변해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숲 속의 나무들을 베어 가져가도 우리들이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 나무들은 나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붓다 사유의 근본적인 대전제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붓다의 이러한 인간 존재에 대한 분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단지 고정불변한 존재자로서의 아(我)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서, 고를 직시해서 고에서 해탈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붓다에 의하면 모든 고는 형이상학적인 자아에 대한 강한 집착에서 나오며 해탈은 형이상학적인 자아를 버리고 경험적인 자아를 수용하는 데에서 생긴다. 결국 붓다가 존재에 대해 사유하는 것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중생의 해탈이라는 실용적인 목적인 위한 유익한 방편(用)이다. 붓다의 경우 (중생의 고로부터의) 해탈은 그 모든 것, 심지어 윤회설이나 업의 이론보다도 우선하는 궁극적 목적[體]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티베트 사자의 서》를 독서한다면, 이 책이 노리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가 보다 명료해진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사후에 보게 되는 그 모든 빛들과 신들의 세계가 사실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투영된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 세계가 펼쳐 보이는 환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나아가 삶도 죽음도 우리의 환영이고, 모습도 색깔도 마음까지도 실체 없는 환영의 세계이다. 삶도 내 자신이 만드는 것이고, 세계도 내가 창조하는 것이다. 때문에 《티베트 사자의 서》가 우리에게 일깨우는 진리는 바로 그 환영의 세계를 속히 깨달으라는 것이다.

죽음에 이른 자의 귀에 대고 죽음은 환영에 불과한 것이며 삶까지도 그림자일 뿐이니 서둘러 그것에서 벗어나라고 이 책은 속삭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사후세계의 설명이 목적이 아니라, 생의 근본진리를 단호한 어조로 설파하는 산 자를 위한 가르침이다. 따라서 《티베트 사자의 서》는 종교적·심리적 의미를 강하게 함유하고 있는, 하나의 강렬한 ‘메시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 신념의 토로이거나 특정 종교의 범주 내에서의 주장이라면 몰라도,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그의 저술에서, 《티베트 사자의 서》를, 메시지를 뛰어 넘어,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객관적 증거자료로서 내세우는 것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임사체험자의 증언’에 대해서 논구해보자. 평자는 이 글을 적기 전에 우선 임사체험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평자가 과문해서인지 모르겠으나, 이 주제에 관한 학위논문이나 연구논문은 하나도 없었고, 단지 단행본 두 종류만을 찾을 수 있었다.2)2)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윤대석 옮김, 《임사체험》 上,下(서울: 청어람미디어, 2003).다카다아 키카즈 지음, 전파과학사 편집부 옮김, 《임사체험의 불가사의》

이 책들을 두 번에 걸쳐 독파한 후, 상당한 실망감을 가진 채, 다시 《죽음, 삶이 존재하는 방식》에서 서술하는 임사체험 부분을 정독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자가 임사체험에 대해서 서술하는 분량이, 그것도 대부분이 사례를 진술한, 두 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되풀이해서 읽어보았지만, 서술의 양뿐만이 아니라 서술의 질에 있어서도, 오직 단정적이고 선언적인 표현만 반복될 뿐이어서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임사체험’에 대해서 여러 가지 자료를 구해보았다. 평자는 이 조사를 통하여 임사체험에 대하여 소략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우선 환자들은 자기가 죽는다는 의사의 말을 듣든가 무슨 암시를 받으면,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느낌을 받고 그러면서 환한 빛이 자신을 맞이한다는 느낌을 가지거나, 죽은 친척이나 친구들의 영혼을 만나든지, 어떤 절대자의 존재를 느끼는 임사체험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는 이러한 영상들을 뇌 안의 탄산가스 축적에 의한 환상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사망과 비슷한 상황에서 뇌에 혈액이 잘 가지 못할 때, 뇌에 탄산가스가 모여서 그런 환상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도에서 조르기 등으로 의식을 잃게 되는 경우 등에서도, 임사체험과 마찬가지로, 어두운 터널을 지나거나 빛이 자신을 맞이하는 등의 환상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학자들이 임사체험 경험자들의 인터뷰를 치밀하게 조사한 결과, ‘나이’·‘국적’·‘종교’ 등에 의해 그 경험 내용이 분류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즉 동양문화권에서의 임사체험에는 죽으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경험이 많은데, 서양문화권의 체험자들에게서는 그런 경험이 없었으며, 더 나아가서 염라대왕·부처님·예수님이라는 식으로 그 사람이 믿거나, 믿지 않더라도 알고 있는 특정 종교에 관련된 영상들이 임사체험자의 경험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임사체험 경험은 당사자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미 알고 있어서 만들어낼 수 있는 내용의 환상으로 한정된다. 만일 실제로 사후세계가 임사체험자들로부터 알아낼 수 있는 것이라면 나이나 국적·종교·민족 등에 상관없이 뭔가 공통된 묘사가 나와야할텐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이 알려지면서 현재 이 분야의 연구는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평자는 임사체험자들의 경험이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후세계가 없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본다. 동시에 임사체험자들의 증언으로 사후세계를 증명하려는 방법도 역시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3)3) 평자는 존경하는 오 교수의 임사체험에 대한 언급 등이 특정 종교나 무슨 정신수련을 선전하려는 엉터리 등에 의해서 이용될 것이 무척 두렵다. 그리고 그 고민이 평자로 하여금 보다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하게 하였다.

세 번째로 ‘빙의(憑依, possession)현상’에 대해서 논구해보자. 평자는 이 글을 적기 전에 우선 빙의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역시 학위논문이나 연구논문은 하나도 없었고, 단행본 8종류만 찾을 수 있었다.4)4) 벽사진경·김명강 저, 《빙의 퇴마》(서울: 배문사, 2003). 민시하 지음, 《(소설)빙의》(서울: 백송, 2003). 성영주 지음, 《빙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서울: 굿데이신문, 2003). 묘심화 지음, 《빙의》(서울: 찬섬, 2002).川村邦光 著, 《憑依の視座》(東京: 靑弓社, 1997).일사 지음, 《접신》(서울: 석문출판사, 2003).이중화 著, 《빙의를 천도한다》(서울: 한솜, 2003).최영식 지음, 《빙의, 그 영혼의 노숙자들》(서울: 인화, 2004).

이 책들의 대강에 대해서 읽은 후,5) 다시 《죽음, 삶이 존재하는 방식》에서 서술하는 빙의 부분을 정독했다. 전체 3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저자의 빙의에 관한 부분은 대부분 탤런트 김수미씨의 빙의 체험만을 서술하고 있었다. 이 부분 역시 놀랍게도 임사체험과 유사하게 오직 단정적이고 선언적인 표현만 반복되고 있었다.

그래서 자료를 조금 찾아보았다. 대개 두 가지의 시각이 있었다. 하나는 종교적 입장이다. 빙의현상을 귀신 따위의 외적인 존재에 의하여,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귀신이 들리거나’ ‘귀신에 씌우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벙어리, 절름발이, 간질병, 정신분열, 히스테리, 다중성격 등의 원인을 귀신이 들렸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신의학적·심리학적 입장이다. 여기에서는 빙의현상을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고 정신과적 치료를 통해 문제의 해결을 도모하고 있다. 즉 빙의현상을 개인 내면의 다중성격적인 증상으로 진단하며, 인간에 내재된 악의 경향성, 다시 말해서 인간 내면의 부정적인 경향성이 종교적인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빙의현상으로 여겨지는 환자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는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부정적인 성향이 악마 또는 자신에게 유해한 귀신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의 경우엔 인간 내면의 부정적인 성향으로 나타난다고 보기엔 한계가 있는 사례들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을 괴롭힌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어떤 때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어떤 때는 정신의학 영역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빙의현상의 경우는, 퇴마의식을 통하여 치료가 되는 경우와 정신과적인 치료를 통하여 완치하는 경우 두 가지 모두 있는 것 같다.

결국 빙의현상과 사후세계와의 관계는 한마디로 ‘모른다’라고 정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따라서 빙의현상으로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증명하려는 방법은, 죽음이 끝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만큼이나 설득력이 없다.6)6) 평자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존경하는 저자의 빙의에 대한 언급이, 임사체험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이비 종교나 엉터리 퇴마사 등에 의해서 이용될 것이 무척 두렵다는 것을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호스피스 봉사자의 증언’을 통하여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저자의 입장을 알아보자. 저자는 호스피스 봉사자의 증언을 빌려, 2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이 죽기 며칠 전부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동시에 보는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고 진술한다.

평자는 솔직히 이 문제에 대해서 그 진위여부를 검증해볼 도리가 없었다. 실제 이 저술에서도 증언자나 환자의 신상에 대해서 ‘이군’, ‘호스피스 봉사자’ 등으로 명기하고 있으므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고, 이런 문제에 대한 연구결과나 조사자료도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평자가 봉직하는 학교에, ‘임종론’을 강의하기 위해 외래교수로 출강하는 김모(45) 여교수가 노인전문병원에서 호스피스 업무와 교육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교수와 이 문제에 관해서 대담하였다.7) 7) 병원명이라던지 김교수의 실명이라던지 하는 구체적인 문제는 만일 이 문제가 계속해서 논의의 대상이 될 경우에, 당사자와의 협의를 거쳐 공개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교수의 말에 의하면, 20년 정도의 간호사 생활 동안, 호스피스 업무에 전념해 왔는데, 저자가 말한 사례를 한 번도 보거나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이 ‘흔하게’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평자가 만난 호스피스전문 간호사는 20년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 문제는 어떻게 설명이 되어야 할까? 역시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4. 나오는 말

《죽음, 삶이 존재하는 방식》은 전체적으로 훌륭한 책이다. 안락사 문제·호스피스·낙태·자살·사형제도·에이즈 등에 대한 그의 통찰력은 놀라울 정도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가 하는 주장들마다, 그 바탕에 죽음이 끝이 아니고 다음 생이 있다는 증거로 《티베트 사자의 서》에 제시된 내용, 카톨릭·개신교 등 다양한 종교의 가르침, 임사체험자의 증언, 빙의 현상, 호스피스 봉사자의 증언 등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평자는 이 점이 매우 곤혹스럽고 놀랍다.

그리고 솔직히 말한다면 저자의 주장 이후에 발생할 전개상황이 두 가지 점에서 매우 우려된다. 하나는 많은 사이비 종교와 이상한 단체가 저자의 이 이론을 가져다, 자기네들의 입장을 합리화하는데 사용할 것이 두렵다. 평자는 멀지 않은 미래에 이러한 일들이 생길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른 하나는 어렵게 시작된 저자의 생사학이, 그 뛰어난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다섯 가지의 생사관을 이론적 바탕으로 할 경우 안락사 문제·호스피스·낙태·자살·사형제도·에이즈 등에 대해서도 상당부분 설득력을 더 이상 가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생사관에 다소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가치를 모두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한 권의 책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비판하기는 쉽고 쓰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간에 담겨있을 저자의 땀과 생사학에 대한 애정에 대해 경의를 표하면서, 부디 앞으로도 더욱 연구에 매진하여 우리나라의 생사학 발전에 지남(指南)이 되기를 바란다. ■

이덕진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현재 창원전문대 장례지도과 교수. 논저서에 《논쟁으로 보는 불교철학》(공저) 〈보조지눌의 선사상 연구〉 〈간화선의 구자무불성에 대한 고찰〉 〈한국 종교의 상·장례에 관한 고찰〉 〈유교와 불교의 생사관에 대한 일고찰〉 〈우리나라 장례문화의 현황과 그 개선방안〉 등 다수가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