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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빈곤, 그리고 무소유 / 박경준
박경준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19호] 2004년 06월 10일 (목) 박경준 sjkj@dongguk.edu

* 이 글은 〈사회적 불평등 문제와 태고사상〉《태고사상 제 2집》 등의 拙稿 가운데 본 주제와 관련된 내용을 발췌하여 수정 보완한 글임.

1. 들어가며

자유민주주의가 '역사의 종말'이 된다는 후쿠야마의 주장은, 구소련과 동구공산주의의 붕괴를 바라보면서 의기양양해진 우파들에게,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의 최종적 승리를 알리는 세기말의 한 복음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프랑스의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통해 여기에 대해 즉각적인 반박을 가한다. 그것은 오늘의 자본주의 신세계질서가 궤도를 벗어나 잘못 가고 있기 때문이라며, 그 증거로 대규모의 실업, 참여민주주의의 배제, 국가간의 무자비한 경제전쟁, 외채의 심화, 군수산업과 핵무기의 확산, 민족 분쟁, 마약 조직의 강화 등의 현실을 지적한다.

데리다는 계속해서 지금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의 이상세계가 도래했다고 기뻐할 때가 아니라,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폭력, 불평등, 기근,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라고 경고한다.{{) 자크 데리다 저/양운덕 역, 『마르크스의 유령들』(서울: 한뜻출판사, 1996), pp.143-150.}}

마치 이러한 데리다의 우려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제레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The End of Work)》에서 지구적 차원의 실업문제로 인한 노동의 위기에 대해, 구체적 자료를 제시하면서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분석을 하고 있다.

리프킨은 이 위기에 대해 "세계 도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하고 있다. 젊은층들은 좌절감과 분노를 반사회적 행위 속에 발산하고 있으며, 노년층 노동자들은 과거의 영광과 암울한 미래 사이에서 포기하거나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힘에 사로잡혀있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 획기적인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세계적으로 만연하고 있다.

이 변화의 규모는 너무나 커서 우리는 그 궁극적인 영향을 측정할 수가 없다."고 진술한다. 그것은 다국적 기업들이 전세계적으로 하이테크 생산 설비를 채용하면서 비용 효율성, 품질 관리, 분배 속도상 더 이상 경쟁이 안 되는 수백 만의 노동자들을 해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 저/이영호 역, 『노동의 종말』(서울: 민음사, 1996), p.23.}}

이러한 노동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고 시장의 법칙을 과신하는 자본의 영원한 속성에 기인한다. 이러한 자본의 본질적 속성은 급기야 '세계화된 경제' 또는 '세계자본주의'를 낳았으며 피도 눈물도 없이 거침없이 질주하는 세계자본주의는 노동의 위기를 초래함은 물론 약소국과 주변국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국제 금융계의 전설적 인물로 알려진 조지 소로스(George Soros)가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를 주창하고 나선 것이나, 가톨릭 교황이 이익과 시장의 법칙만을 신뢰하는 '경제인간'의 개념에 의거한 '신자유주의'의 확산을 경계하고 자본주의의 착취성과 사악성에 대해 경고한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일 것이다.{{) 박경준, 「불교의 노동관 소고」『불교학보』제35집(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98), p.130.}}

한마디로 이러한 시대 조류는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을 더욱 심화시켜 사회적 긴장을 고조시킬 것이라는 점에서 심히 염려된다.

그렇다면 부익부 빈익빈은 과연 어느 정도이며, 불교에서는 소유 및 경제활동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또한 빈곤에 대한 불교의 인식은 어떠하며 경제적 불평등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 어떠한 길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이 시대의 빈부격차가 얼마나 심각한지 여러 통계자료들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2. 부익부 빈익빈의 현실

자본주의의 성장이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격차를 더 크게 벌려놓을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에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선진국의 경제성장과 사회복지는 생활수준의 전례 없는 향상을 가져왔으며 부자와 빈자의 격차는 실질적으로 줄어들었다. 반면에, 소련식 사회주의는 빈곤한 다수의 대중들만을 양산했고 부와 이익의 혜택은 오직 극소수 최상층 당원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시장경제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렸다.{{) 조르주 V. 바실리우, 「새로운 불평등: 머리말」, 『21세기 예측』(클라우스 슈밥 편/장대환 감역, 서울: 매일경제신문사, 1997), pp.134∼135.}}

하지만 1970년대 말 이후, 이러한 추세는 바뀌기 시작했다. 먼저 미국, 영국 그리고 1980년대 중반 이후 서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소득격차는 더욱 커져 부자들의 소득은 보통 사람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보다 훨씬 빨리 증가하였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의 실질소득은 떨어졌다. 예컨대 영국의 경우, 전체인구의 평균소득은 1979년과 1991년 사이에 36% 정도 늘었으나, 상위 10%의 실질소득은 62%가 늘어난 반면 하위 10%의 소득은 14%나 감소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영국처럼 심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경향을 볼 수 있었다.{{) 하워드 데이비스, 「부익부 빈익빈」, 『위의 책』, p.142.}}

국가간의 빈부격차도 더욱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87개국의 경제력을 산업능력에 따라 순위를 매기는 방식으로 작성된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의 보고서에 따르면, 선진공업국과 빈곤개도국 사이의 경제력 격차가 지난 20년 사이에 더욱 벌어졌으며, 지난 1985년부터 1998년 사이에 순위가 올라간 개발도상국은 58개국 중 16개국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카를로스 마가리노스 유엔산업개발기구 사무국장은 아직도 인간의 기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생하고 있는 저개발국가들은 지난 20∼30년 동안 보건이나 사회·경제적 수준이 오히려 낮아졌으며, 30개 빈곤국의 1인당 실질소득은 35년 전보다 더 줄었다고 지적했다. 지난 1950년에는 세계인구중 상층부 인구 20%의 소득이 하층부 인구 20%의 30배였으나 1990년에는 90배로 늘어났음을 이 보고서는 알려주기도 한다.{{) 2002년 9월 5일자 『매일경제』참조.}}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의 최근 보고에 따르면, 세계 49개 최저 개발국 국민의 80% 이상이 하루 2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생활하며, 특히 아프리카 최저 개발국에서는 국민의 65%가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UNCTAD는 1달러 미만의 하루살이 인구를 3억 7백만 명으로 보고하고 있지만, 세계인구의 약 30%가 미화 1달러에 해당하는 소득으로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앤서니 기든스/한상진·박찬욱 역, 『제3의 길』(서울: 생각의 나무, 1999), p.223.}}

이처럼 지구촌의 빈부격차가 더욱 심해지면서 자기보호능력이 없는 어린이들이 최대의 희생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사주간지 『Time』은 얼마 전 아시아판 표지기사를 통해 가난한 아시아 나라의 어린이들이 매춘업소·고기잡이배·광산 등에 팔려가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도해 충격을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국제노동기구의 집계에 따르면, 지구촌의 어린이는 100명에 16명 꼴로 노동 착취에 시달리고 있고, 노예노동과 매춘 등 가장 비참한 처지에 내몰린 어린이도 800만 명에 이르며, 이 중 매춘업소에서 일하는 어린이는 100만 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02년 8월 8일자 『한겨레』.}}

또한 70년대 말 이후 선진국에서 심화되고 있는 이러한 소득불균등의 현상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1997년 말 IMF 이후 발생된 대량실업은 실직자 및 잠재적 실업자의 증가, 임금구조의 양극화, 빈곤층의 급증, 중산층 및 저소득층의 생활수준 저하와 같은 문제점들을 발생시켰다.

1998년 말 이후의 경제회복과 경제성장도 성장구조 및 소득분배의 양극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어, 빈부격차의 확대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박순일 외, 『빈부격차 확대요인의 분석과 빈곤·서민생활 대책』(서울: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00), p.25.}}

통계청이 발표한 '2000년 가구 소비실태 조사 결과'에 의하면, 근로자 가구는 물론 사업자 가구까지 포함해 산출한 지니(GINI) 계수{{) 소득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0∼1의 값을 가지며, 1에 가까울수록 분배구조가 불평등하고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함을 나타낸다.

}}가 0.351로 나타나, 1996년의 지니 계수 0.290보다 0.061이나 높아졌다. 특히 91년의 지니계수가 0.274였음을 감안한다면, 소득분배구조가 1996∼2000년 사이에 급속히 나빠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소득이 높은 상위 20% 가구의 소득을 하위 20% 가구의 소득으로 나눈 소득 5분위 배율도 1996년 4.74에서 2000년에는 6.75로 높아져, 상·하위 가구의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사업자 가구의 경우 지니계수는 0.389, 소득 5분위 배율은 7.34로 96년에 비해 각각 0.096, 2.80이나 높아진 것으로 조사됐다. 근로자 가구의 지니계수는 0.291, 소득 5분위 배율은 4.68로 1996년에 비해 각각 0.035와 0.83 상승했다.{{) 2000년 4월 26일자 『한겨레』. 근로자가구는 사무직·생산직 근로자가 가구주인 경우이며, 사업자가구는 기업체의 이사 이상 경영자, 변호사·회계사 등 자유업자, 청장급 이상 고위직 공무원 등이다.

}} 겉으로 드러난 지니계수에 의해서도 분배구조가 더 나빠진 것을 알 수 있지만, 지니계수의 조사 과정에 숨어있는 문제점을 고려한다면, 실제 형편은 발표된 수치보다 더욱 나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2000년 4월 26일자 『한겨레』. 통계청의 가계소비실태 조사는 조사원이 응답자를 면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업의사, 변호사, 회계사, 자영업자 등의 사업자 가구가 소득을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3. 자본주의의 기원과 전개과정

자본주의가 개인적 소유의 욕망에서 기인한다고 본다면, 자본주의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많은 이윤을 좇는 인간의 활동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초기 바빌로니아 또는 로마 상인들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라 부르는 체제는 몇 가지 근본적인 전제들을 함축하고 있다. 그 근본적 전제란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보편적 합리성의 존재"라는 개념이다.{{) Ellen Meiksins Wood, 정이근 역, 『자본주의의 기원: 장기 고찰』(부산: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2), p.19.
}} 이러한 근본적 전제로부터 '시장'을 중심으로 한 설명과 개념의 사용이 시도되었다.

그렇기에 시장을 통한 잉여생산물의 이동과 교역에 의한 자본주의 발달이 철학적으로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의 노동력마저 상품으로 전락해 버리는 가운데, 맑스가 지적한 것처럼 계급적 착취가 발생함으로써 인간소외 현상이 발생함은 역설적이다.

어쨌든 자본주의(capitalism)란 자본에 의한 이윤의 추구를 뜻한다. 원료·자원·도구·기계·건물·토지 등의 생산수단에 노동력이 부여될 때, 생산물이 산출되는 생산과정이 일어나는데, 특정한 개인이나 기업이 화폐 자본으로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구입하여 이것을 이용해 자신의 이윤을 얻는 것이 자본주의이다.

영리의 추구는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 활동과 사유 재산 제도의 확립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에, 요컨대 자본주의는 '이윤과 자유와 사유'를 기본 원칙으로 한다. 특히 자유 경쟁을 통한 이윤의 추구는 오직 개인적 소유의 보장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므로, 자본주의의 핵심은 개인적 소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는 이와 같은 자본에 의한 이윤 증식의 방법에 따라 크게 '상업자본주의'와 '산업자본주의'로 이분된다.

상업자본주의는 무역활동과 같은 상품의 유통 과정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신항로와 신대륙이 개척되기 시작한 16세기 이후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상업자본가들은 절대왕정의 중상주의적 정책의 비호 아래, 상품의 유통 과정과 화폐의 유통 과정을 통해서 이윤을 획득하였다.

특히 르네상스기를 통한 교역의 증대와 도시의 성장은 이러한 활동의 기반이 되고 있었다.{{) 에르난도 데소토(Hernando de Soto), 윤영호 역, 『자본의 미스터리(The Mystery of Capitalism)』(서울: 세종서적, 2003), pp.25-27 참조.}}

그리고 산업자본주의는 산업의 생산 과정에서 생산성의 향상을 통해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기계 공업을 통해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고, 시장에서의 판매를 통해 대량소비가 이루어지자, 생산 과정에서의 이윤을 독점하게 된 산업 자본이 기존의 상업 자본을 신속하게 대체하였다. 따라서 시장에 의존한 완전한 교환체제로서의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산업혁명을 거쳐오면서부터였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처음에는 농업의 효율화와 생산량 증대에서 출발하여 영국의 경우 그 결과(예를 들면 인클로저 운동)로 농촌을 이탈한 이들이, 증기기관의 발명과 더불어 시작된 산업혁명의 도시노동자로 전락해들어 가면서 근대적 의미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결정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어난 자본의 집중화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공산주의로 하여금 자본에 의한 생산수단의 개인적 소유를 철폐하고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주장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본다면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는 산업혁명의 추진 이념인 산업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업주의(Industrialism)란 기계 설비에 의한 제조 산업이 한 국가의 경제 발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말한다. 이것은 기계화와 공업화가 경제 성장의 척도라는 입장에서, 기계의 생산성 향상과 공업의 생산력 발달을 통해 물질적 부의 무한한 증가를 추구하는 이론이다. 산업주의는 산업의 생산성이나 생산력의 실현 방식과 관련하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누어진다.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을 자본가가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시장을 수요와 공급이라는 자율적 경쟁 원리에 맡겨야 한다고 보는 것이 자본주의(capitalism)라면, 생산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을 노동자 대중이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시장을 국가 계획의 통제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공산주의(communism)이다. 그렇다면 흔히 상반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전혀 상이한 것이 아니라, 생산성의 향상과 생산력의 발달을 지향하는 산업주의의 동일한 소산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공산주의에서는 생산수단을 사회적으로 공유함으로써, 생산 과정은 제반 요소가 결합된 사회적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나온 생산물은 개인적 소유가 되는 생산관계상의 모순을 해소하고, 그리하여 생산관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생산력이 무한히 발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생산물의 사회적 공유는 개인의 이윤을 봉쇄함으로써, 개인의 성취 동기와 노동 의욕을 상실케 하여 생산성을 방해하였고, 더 이상의 생산력 발달을 저해하였다. 이것은 분배의 평등에만 초점을 맞춰 개인적 소유 자체를 부정할 경우, 누구의 것도 아닌 것으로 생산된 것은 그 양이 너무 적어, 공평한 분배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에 비해 자본주의는 자본의 자기확장과 팽창이라는 속성을 지니는데, 자본은 곧 거대해져서 독점의 단계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급격한 생산력의 확장과 잉여생산물의 증가는 그것을 위한 시장을 요구했고, 그 결과 서구 열강들은 제국주의적 발전 방식을 선택하였다.

앞서 언급했듯 산업혁명은 기계에 의해 생산성이 향상됨으로써 생산물이 효과적으로 증대하는 대량생산의 길을 열어 놓았으며, 아울러 그렇게 대량 생산된 상품을 시장을 통해 지속적으로 판매함으로써 대량소비의 길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생산과 소비의 과정을 거쳐 생겨나는 이윤의 대부분이 소수의 부유층에게 과도하게 집중되고 이와 반대로 다수의 대중은 계속 빈곤한 상태에 있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가속화됨으로써, 오히려 소비는 줄어들고 그 결과 경제의 성장 자체가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더 이상 국내에서 유효 수요를 가질 수 없게 된 과잉상품과 과잉자본을 해소하고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내 시장의 한계를 넘어서 국외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지향하는 산업주의적 자본주의는 과잉상품의 소비를 위한 힘에 의한 시장 팽창이라는 제국주의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산업 열강들은 전세계를 그들의 식민지로 분할함으로써, 식민지에서 값싼 원료를 수입하여, 그것을 완제품으로 가공 생산한 다음, 거기에 엄청난 이윤을 붙여 식민지에 다시 판매하는 제국주의적 수입-수출 구조에 입각한 생산-소비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이런 시스템은 소비 시장의 확대와 원료 공급지의 확보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과잉 인구의 배출 지역을 개척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국내적으로는 기득권층의 정치력을 유지하는데도 기여하였다.

그런데 세계 분할로 성립된 제국주의적 생산-소비 시스템이 원료 공급지와 제품 생산지와 상품 소비자를 나누는 것은 마치 산업의 효율성을 위해 생산 과정을 분업화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것은 산업화의 분업 원리가 공장만 아니라 국가들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서, 여기서도 우리는 세계 분할의 제국주의 밑에는 일종의 세계 분업으로서의 산업주의가 기본 원리로서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자본주의는 17-18세기의 상업 자본주의에서 출발하여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산업 자본주의로 변모되었고, 20세기 초반에는 카르텔과 독점을 중심으로 한 금융 자본주의로 발전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다국적 기업들의 국제적 연결망이 강조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동현·조준현, 『글로벌화와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부산: 부산대학교 출판부, 1999), pp.5-16 참조.}}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들은 해소되지 않고 있으며, 보다 강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러한 팽창에서 오는 욕망의 분출과 물질적 편의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삶의 변화이다.

산업혁명 이후 물질적 편의와 안락의 추구를 통해 비판적 의식이 사라지고 오로지 부의 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현상에 대해서 마르쿠제나 슈마허 같은 이들이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인간상을 '일차원적 인간'{{) Herbert Marcuse, 차인석 역, 『일차원적 인간』(서울: 진영사, 1976) 참조.}}이라고 표현했고, 슈마허는 비물질적 가치들조차도 물질적 가치에 의해 대체되어 버린 데 대해 안타까워하였다.{{) E. F. Schumacher, 김진욱 역, 『작은 것이 아름답다』(서울: 범우사, 1998), p.316.}}

그렇지만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생산의 글로벌화를 통한 자본의 국제적 이동과 노동의 국제적 분업과정에서 노동의 소외 현상과 자본의 독점현상이 가중된다는 점이다.

즉 생산의 글로벌화는 국제적 분산화의 양상을 보이지만, 실은 전지구적 범위의 집중화를 보이면서 통합되는 과정을 동시에 수반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자본 관리에 필요한 안정성과 효율성을 확보하려는 것으로서, 인류의 참된 복지에 유용한 것인지의 여부는 아직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정동현·조준현, 앞의 책, pp.161-162 참조.
}}

그렇다면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로 이어지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자기 팽창의 역사에 대해 새로운 대안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그 대안을 우리는 불교의 가르침 속에서 모색해 보고자 한다.

4. 경제활동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불교의 입장

붓다 당시의 출가수행자들에게는 땅을 파고 씨앗을 뿌리는 농사일이라든가 물건을 사고 파는 장사일 등의 모든 노동과 생산활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수행자들은 탁발에 의한 하루 한 끼[一日一食]의 식생활을 영위하였고, 이른바 삼의일발[三衣一鉢]로 참으로 검소한 생활을 꾸려나갔다.

이러한 이유로 불교는 모든 욕망을 부정한 무소유의 종교, 또는 경제적인 활동에 매우 소극적이거나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는 종교, 심지어 세속적인 노동을 떠나있는 초월적 종교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붓다의 다음 가르침은 그러한 인식이 매우 잘못된 편견이요 선입견이었음을 깨닫게 해 준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무엇이 셋인가? 눈먼 사람, 한 눈만 있는 사람, 두 눈 가진 사람이 그 셋이다.

비구들이여, 눈 먼 사람이란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 어떤 사람들은 재산을 얻거나 늘이는 안목을 갖고 있지 않다. 또한 (재산을 얻거나 늘이는 데 있어) 악하고 선한 방법, 비난받고 칭찬 받는 방법, 천하고 고상한 방법, 떳떳하고 어두운 방법을 잘 식별하는 눈을 갖고 있지도 않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사람들을 눈 먼 사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한 눈만 있는 사람이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 어떤 사람들은 재산을 얻거나 늘이는 안목은 갖고 있다. 그러나 재산의 획득과 증식을 위한 선하고 악한 방법, 비난받고 칭찬 받는 방법, 천하고 고상한 방법, 떳떳하고 어두운 방법을 식별하는 눈은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사람들을 한 눈만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비구들이여, 두 눈 가진 사람이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 어떤 사람들은 재산을 얻거나 늘이는 눈을 갖고 있다. 그들은 또한 재산의 획득과 증식을 위한 선한 방법과 악한 방법, 비난받고 칭찬 받는 방법, 천하고 고상한 방법, 떳떳하고 어두운 방법을 잘 식별하는 눈도 갖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두 눈 가진 사람이라 부른다.{{) ANⅠ, pp.111∼112.}}

이 가르침의 내용은 결국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그 하나는, 출가수행자를 제외한 재가자나 일반인들은 재산의 획득과 증식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방법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들은 첫째, 돈 버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둘째, 돈을 벌되 바르게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무엇보다도 먼저 직업을 가져야 한다. 붓다는 "종종(種種)의 공교업처(工巧業處)로 스스로 생활을 영위하라."({雜阿含}) 또는 "먼저 기술을 배우고 그 후에 재물을 구하라"(『長阿含』)라고 설한다. 여기서 공교업처란 정당한 기술과 공예를 바탕으로 한 건전한 직업을 의미한다. 붓다 당시에는 생산력이 매우 낮은 상태였기 때문에 붓다는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기술을 중시하였던 것 같다.

물론 붓다의 가르침은, 재화를 생산하는 데 따른 직업인의 기본적인 태도나 자질에 관한 윤리적 측면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어쨌든 기술 습득을 주요한 생산 요소로 본 것은, 경제 흐름을 명확히 파악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솔로우(R. Solow)와 데니슨(E. Denison), 그리고 슘페터(J. Schumpeter) 같은 쟁쟁한 경제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오늘날처럼 경제가 성장하고 자본주의가 발전해 온 데는 기술의 진보 및 혁신의 공이 매우 크다고 지적하고 있음을 상기해 보기 바란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물질적 충족을 결코 악으로 보지 않는다. "어떤 괴로움이 가장 무거운가 하면, 빈궁의 괴로움이다. 죽는 괴로움과 가난한 괴로움 두 가지가 모두 다름이 없으나 차라리 죽는 괴로움을 받을지언정 빈궁하게 살지는 않으리라."{{) 『대정장』권3, p.389下.}}고 한 『금색왕경(金色王經)』의 말처럼, 불교는 오히려 빈궁을 인류의 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생산에 대한 높은 평가와 함께 근면과 정려의 덕을 강조한다. 또한 붓다는 {앙굿타라 니까야}에서 수입과 지출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도록 생활하라고 설한 적이 있다. 물론 여기에서의 지출은 개인적인 욕구 충족만을 위한 지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총수입의 1/4은 생계비로 쓰고, 1/4은 생산비로 쓰며, 1/4은 저축하고, 나머지 1/4은 농부나 상인에게 빌려주어 이자를 얻도록 하라는, 이른바 사분법(四分法)을 설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재가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게 하여 영리 추구를 적극 권장하는 초기 경전의 가르침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초기경전의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불교의 경제원리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빨리 제창된 자본주의적인 윤리라고 함직하다"{{) 이재창, 『한국불교사원경제연구』(서울: 불교시대사, 1993), p.279.}}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자본주의의 목표인 이윤의 무한추구까지를 인정한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불교는 '무아설'(無我說)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근본적으로 나(我)와 나의 소유물(我所)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 또는 '내 것'이라는 전도된 관념은 숱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바, 고통과 윤회의 근본원인인 욕망을 제어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수많은 경전 속에 설해져 있다. 사성제와 연기설 등의 근본교리에서도 무명과 욕망(탐욕)이 모든 고통의 근본원인임을 갈파하고 있다. 그리하여 불교는 욕망의 이기적 추구를 경계하고 욕망의 질적 전환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돈 버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하고' 또한 '올바른 방법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두 가지 원칙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욕망의 질적 전환'이라는 원리는 내가 정당하게 번 돈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내 마음대로 쓰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즉 '바르게 번 돈을 바르게 쓰기까지 해야 한다'는 또 하나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초기불교에서는 재화를 남에게 시여하고 [施論] 스스로 계행을 잘 지킴으로써 [戒論] 천상에 태어난다[生天論]는 차제설법의 종교적 메카니즘을 통해, 생산활동과 부의 증식에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또한 붓다는 자비와 보시를 특히 강조하고 '자리 이타'(自利 利他)의 보살행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번 돈은 우리들 자신과 가족만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을 위해서도 바르게 쓰여져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기적 욕망만을 따르고 주위를 돌보지 않는 사람은 결국 망하게 된다는 것을 《숫타니파타》는 "엄청난 부와 황금이 있고 먹을 것이 많은 사람이 다만 혼자서 누리고 먹는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라고 설한다.

요컨대 돈 버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벌어야 하며, 바르게 쓰기까지 해야 한다는 것은 재가 경제의 금언율임과 동시에 불교경제 또는 보살경제의 대원칙이며 불교자유경제의 대전제라 할 것이다. 이러한 원리적 근거에서 이기적 욕망과 탐욕은 대승적 이타의 원으로 질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불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원리를 수용하면서도, 삶의 궁극적 목표가 물질적 가치추구가 아닌 해탈과 열반에 있다는 대전제 아래, 다양한 종교적 메카니즘을 통해 자본주의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있는 것이다.

5. 불교가 가르치는 분배의 정의

불교의 평등이념은 자비의 실천을 통해서 현실사회에 구현된다. 자비의 실천은 시여 또는 보시라는 실천 덕목으로 더욱 구체화되며 복전사상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특히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에 대한 봉사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빈궁전은 복지 개념으로서 사회적 분배라는 기능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는 것이다.

원래 빈궁전이란 말은 『우바새계경』에 나타나고 있지만 그 사상적 연원이 초기경전에 있음은 물론이다. "병자를 돌보아 주는 것은 곧 나(붓다)를 돌보는 것이요, 병자를 간호하는 것은 곧 나를 간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몸소 병자를 간호하고 싶기 때문이다."고 한 『증일아함』의 가르침이나 "어떤 괴로움이 가장 중하냐. 이른바 빈궁의 괴로움이다."는 『금색왕경』의 가르침은 그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나아가 불교에서는 국왕의 분배 정책을 중요시하여 올바른 경제 운용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국가가 재화를 사용하는 것은 국민으로부터 징수한 세금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분배정책은 조세라는 바탕 위에 가능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국민이 내는 세금이 국가 목적에 충당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국왕 개인의 사적 수입으로 소비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므로 세금을 많이 징수하는 것은 그만큼 인민을 괴롭히는 것이고 이에 반해 세금을 경감하는 것은 그만큼 인민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대승경전에도 반영되어 "세금의 징수는 일정한 법을 따를 것이며 세율을 낮추고 빈궁한 자에게는 면세의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교설이 설해져 있다.{{) 홍정식, 「불교의 정치사상」(『불교학보』 제10집, 불교문화연구원, 1973), p.65 참조.}}

이것은 지급능력에 따라 공평하게 조세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현대 재정의 주류를 이루는 능력의 원칙에 매우 가까운 조세관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징수된 세금은 올바른 대상에게 올바른 절차에 따라 재분배되어야 한다는 것이 국가분배정책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특히 『구라단두경(Kutadanta-sutta)』은 분배에 대한 국가의 정책이 어떻게 시행되어야 하는가를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 바라문 사제는 이와 같이 말했다.

"왕의 국가는 약탈과 유린으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곳곳에 강도가 들끓어 마을과 도시를 약탈하므로 마음놓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세금을 징수한다면 왕은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왕께선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위를 빼앗거나 추방·벌금·구금 또는 사형에 처함으로써 범법자를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방종은 그렇게 한다고 하여 만족할 만큼 종식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처벌을 받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국토를 어지럽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무질서를 철저히 없앨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王의 국토에서 목축과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식량과 종자를 제공하십시오. 왕의 국토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자금을 제공하십시오.

왕의 국토에서 관직에 종사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식량과 임금을 제공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백성은 자기 일에 전념하게 되어 국토를 유린하는 일이 없어지고 왕의 권위는 날로 강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국민들은 서로 즐거워 아이들을 팔에 끼고 춤추며 행복해 할 것이고 대문을 활짝 열고 살아갈 것입니다." 왕은 이 말을 받아 들였다.{{) D.N.Ⅰ, p.134f.}}

여기에서는 나라의 안녕과 평화는 올바른 경제의 운용으로부터 가능한 것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붓다는 사회적 제 문제란 경제적 불균등에 기인하고 있으며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정책적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국가는 적절한 재분배정책을 통해 사회적 공정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소득분배의 불균등은 단순히 근면과 검약의 차이로만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서, 아무리 부지런하고 절약하며 자기 생업에 최선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도 다르고 상속받은 재산도 다르며 개인적 능력에 대한 기회도 다 상이하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면 반드시 불균등한 결과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자유시장경제 체제에서는 경쟁의 출발조건이 동일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이와 같이 동일한 조건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김대식 외, 『경제학원론』(서울: 박영사, 1991), p.465 참조.}} 여기에 정부에 의한 분배정책의 당위성이 있게 된다.

세존이 주장한 국가의 분배정책의 기준은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롤스(J. Rawls)의 견해와 상당한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롤스는 소득분배의 공평이란 사회구성원의 현재 사회적 위치에 관계없이 사회구성원의 동의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공평하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최저 소득 집단인 극빈자들의 후생을 최대한 올려줄 수 있는 소득분배정책이라면 일단 공평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John Rawls, A Theory of Justice(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3), pp.78∼82.}}

국가는 빈한한 농부에게 생산기반을, 상인에게는 자본을, 고용인에게는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올바른 방향으로 재화의 균등분배가 이루어져서 사회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구라단두경의 설명이다.

그러나 보다 양자가 근접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도덕적 명령에 그 기반이 있다는 것이다. 구라단두경은 평등과 자비라는 불교의 실천이념이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살펴야 할 것이며, 롤스에 있어서도 도덕적 원칙이 분배원칙에 대한 판단의 기준을 이루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구라단두경에서 국가의 분배정책은 일시적인 빈민구제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생계수단을 가지고 생산활동에 종사함으로써 자립의 기반을 구축하여 궁핍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주고 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정승석, 「분배문제에 대한 불교의 기본인식」(省潭 金羽泰교수 회갑기념논문집, 1992), p.388 참조.}}

여기에서 우리는 붓다의 인간현실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연민(慈悲)과 경제흐름에 대한 통찰을 만나게 된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생산기반의 취약성과 실업사태가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붓다는 일반적인 보시에 있어서도 종교적 의미와 함께 사회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하고 있다. 이것은 국가 경제정책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선생경』은 "재물을 쓰는데 있어서는 사치스러워서는 안 되며, 분수에 맞도록 올바른 대상을 선택해서 주어야 한다. 속이거나 강요하는 자에게는 차라리 걸식하게 할지언정 재물을 주지 말라"{{) 『대정장』1, p.72 中.}}고 설하고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의 정책은 사회구성원 전부에게 득이 된다든가 반대로 해가 된다든가 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어느 집단의 희생으로 어느 특정 집단이 득을 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사회보장제도에 있어서도 궁극적으로 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이고 해를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구하는 것은 오늘날 복지정책에 있어서의 중요과제 중의 하나인 것이다. 붓다는 국가적 혹은 개인적 재의 분배에 있어서 그 대상인 수혜자의 선택을 도덕적 기준에서 찾음으로써 분배정의에 있어서 사회적 합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6. 나오며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과학 기술의 발달로 절대 생산량은 늘었지만,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확산되어 지구촌 곳곳에서는 빈곤의 문제가 더욱 심각해져 가고 있다. 이것은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고 시장의 법칙을 과신하는 자본의 본질적 속성, 그리고 피도 눈물도 없이 질주하는 '세계자본주의'에 연유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불교는 재화의 획득과 증식 그리고 이윤의 추구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적극 권장하고 있는 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원리를 수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는 나(我)와 내 것(我所)이라는 관념에 바탕한 이기적 욕망의 무한 추구가 우리에게 즐거움이 아닌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삶의 궁극적 목표가 물질과 감각이 아닌 해탈과 열반에 있다는 대전제 아래, 차제설법을 비롯한 다양한 종교적 메카니즘을 통해 자본주의의 폐해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돈 버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벌어야 하며, 바르게 번 돈을 바르게 쓰기까지 해야 한다는, 경제활동에 대한 불교의 기본원칙은 자리 이타, 나눔과 회향의 보살경제 이념을 제시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또한 불교는 보시와 자비, 복전사상 등을 통해 그 심원한 평등의 이념을 구현하고자 하며, 국가적인 차원의 분배정책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의 가르침과 사상은 이 시대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박경준
동국대 불교학과 및 동대학원 불교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이며 불교문화연구원장. 논저서로 《다비와 사리》《문화의 진보에 대한 철학적 성찰(공저)》《아시아의 참여불교(역서)》〈원시불교의 사회·경제사상 연구〉〈대승경전관 정립을 위한 시론〉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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