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욱 동국대 불교학과 연구교수

불교가 괴로움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방식에 사제 또는 사성제(四聖諦)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이것은 불교의 가장 기초적인 사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사성제에 입각해서 생태계의 문제를 살펴보는 기회를 생태학적 사성제라는 타이틀로 전개하고자 한다.

1.생태학적 사성제

먼저 사성제라는 개념을 한번 총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 사성제라고 할 때에는 고집멸도(苦集滅道) 네 가지를 가리킨다. 고(苦)라고 하는 것은 괴로움이고, 집(集)이라고 하는 것은 모임을 의미한다. 즉 어떠한 조건들이 모여서 괴로움이 일어나게 된다는 괴로움의 발생 원인을 설명하는 것이 집이다.

이에 비해 멸(滅)이라고 하는 것은 괴로움의 소멸을 뜻하는 것이고, 도(道)라고 하는 것은 어떤 방법을 가리킨다. 여기서 도는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방법을 함축한다. 이렇게 보면 '고·집·멸·도'는 상당히 체계적인 분류 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유를 들자면 고는 괴로움이므로 어떤 병이라고 한다면, '고'란 병의 상태이고, '집'이란 그런 병의 원인을 진단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멸'이란 그런 병이 치료되어 완치됐다는 것을 뜻하고, '도'는 그러한 완치 상태에 이르기 위한 치료 방법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고'와 '집'은 병이라고 하는 결과가 나오게 되는 원인을 탐구하는 것이고, '멸'과 '도'는 병의 완치라고 하는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원인을 탐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고·집·멸·도는 나름대로의 인과관계를 체계적으로 배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불교적으로 볼 때 우리 중생의 이 현실을 '고'라고 한다면, '집'은 이러한 현실을 낳은 원인 근거라고 볼 수 있다. 또 '멸'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현실의 문제가 다 극복된 불교의 어떤 이상을 뜻하는 것이라면, '도'는 이러한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고'와 '집'이 어떤 현실을 의미한다면, '멸'과 '도'는 불교가 생각하는 이상을 가리킨다. 이처럼 '고·집·멸·도'에는 현실과 이상을 바라보는 불교의 시각이 아주 함축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고·집·멸·도'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불교는 고라고 하는 현실을 일단 인정하고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 현상의 어떤 실상이나 진상이 고라고 하는 것을 일단 인정하고서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우리가 불교를 흔히 상당히 염세적이고 현실 도피적이 아닌가라고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처럼 현실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인식하는 데서 시작하겠다는 발상은 거기에 '제(諦)'라는 말이 붙어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제(四諦)라고 할 때의 '제'는 진리 또는 진상을 의미한다. 즉 '고·집·멸·도' 이 네 가지가 다 진리이고 진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멸'과 '도'는 불교가 생각하는 이상이므로, 그것을 진리라고 하는 것은 일리가 있겠지만, '고'와 '집'이라고 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은 것인데, 어떻게 이런 것이 진리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와 '집'까지도 '제'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현실의 진상이라고 하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가 바라보는 어떤 진리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불교에는 '제' 앞에 숫자가 붙는 개념들이 많이 있다. 지금 살펴본 4제도 있지만 2제라는 것도 있다. 그것은 진제와 속제로서, 어떤 궁극의 진리를 진제(眞諦)라고 하고, 언어를 통해 전개되는 일상의 삶을 속제(俗諦)라고 한다. 여기서 보면 '속'도 '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속' 자체가 하나의 현실인 이상, 이 현실을 무조건 무시하고서 '진'만을 주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현실을 인정하고, 그 위에서 이상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또한 '공가중(空假中)'의 3제라는 것도 있다. 연기(緣起)하므로 어떤 자성도 없어서(無自性) 공(空)이라고 하는 바, 이 공이라고 하는 것은 연기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일종의 부정적 방식의 묘사이다. 이렇게 연기하기에 모든 것이 다 성립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성립하는 것은 실체론적인 실유(實有)가 아니라, 비실체적이지만 묘하게 있기는 있는(妙有) 그런 의미에서의 가유(假有)이다. 그래서 '가'라고 하고, 이렇게 긍정과 부정의 조화이기 때문에 중도(中道)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공(空)·가(假)·중(中) 3제(三諦)라 하여 '가'도 '제'라고 하는 것은 가유라는 현실을 역시 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불교에서는 진리라고 하는 것도 대단히 상대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 서양 사람들 대부분의 상식에서 진리는 언제나 하나이지만, 불교에서는 그런 식의 절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라고 하는 절대자는 거기에 매달리게 만든다. 사람들이 거기에 매달려 정신없이 서로를 배척하므로, 세상이 조용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선 당연히 하나의 진리라고 해서 절대 고정 불변의 진리가 주장되지만, 불교는 2제, 3제, 4제라는 식으로 진리를 상대화 내지 비실체화·탈절대화시켜 나아간다. 여기에는 진리라고 해서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 불교의 독특한 진리관이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2. 생태학적 고성제

우리가 사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제'(諦)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현실을 철저하게 인정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열반과 해탈을 강조하더라도, 일단 인정할 수 있는 출발점은 '고'라고 하는 증상을 우선 정확히 보자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고의 내용은 시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오늘날 시대적 고통에 대하여 살펴보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생태학적인 괴로움만큼 심각한 것도 없을 것이다. 생태계의 위기라는 이러한 점에 맞추어 볼 때, 불교의 '고·집·멸·도' 사제의 방식은 생태학적 괴로움을 해결해 주는 데 많은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사제에서 '고'란 단순히 즐거움에 반대되는 고통이 아니고, 궁극적으로는 불만족과 충족되지 되지 못하는 상실감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연기법(緣起法)에 따라 덧없이 변화해 가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뭔가 변치 않는 것을 설정하여 그것을 붙잡고 소유하고 집착하고자 애를 쓴다.

하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이렇게 빗나가는 것에서 나오는 상실감, 그것이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이런 괴로움에 대해서 과연 그 누가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세상을 고라고 보는 것을 하나의 진상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고(苦)에 해당하는 인도 말은 dukkha인데, 이것은 du와 kha로 분리해서 볼 수 있다. du는 '배반한다' '어긋난다'라는 뜻이고, kha는 '하늘'이나 '공허함'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상실감'이자 '불만족스러움'이다. 그러므로 dukkha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이치와 어긋남으로 인해 생겨나는 상실감 내지 불만족스러움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상당히 고차원적 어떤 우주론적 질서에서 나오는 그런 괴로움이지, 단지 즐거움의 반대로서의 고통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 어긋나고 배반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연기법에서 보면 이 세상은 수많은 조건들에 따라 흘러가면서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와 무자성(無自性)의 공(空)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붙잡으려 애를 쓰는데, 이것은 마치 빨리 흘러가는 강물 옆에 앉아 강물에 손을 담그면서 그것을 계속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려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그것은 집어넣어지지 않으며, 주먹으로 쥐는 순간에 어느덧 빠져나갈 뿐만 아니라, 그 주먹 자체도 순간 순간에 소멸해 가고 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런 형국으로 살아가고 있고, 결국은 채워지지 않은 채 끝나고 만다. 그런 상실감, 그것이 바로 dukkha이다. 즉 이치에서 어긋나면서 벌어지는 그런 불만족의 상태를 뜻하는 것이 dukkha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염세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낙관주의도 아니다. 염세도 낙관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실상의 모습을 보라는 가르침이 고라는 말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를 좀 더 분석해 보면, 불교에서는 8고, 2고 등으로 나눈다. 고에도 8가지가 있는데,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네 가지와 애별리고(愛別離苦) 외 세 가지가 합쳐진 것을 말한다. 애별리고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의 괴로움이고, 원증회고(怨憎會苦)란 증오하는 것과 만나게 되는 괴로움이다. 구부득고(求不得苦)는 구하고 구해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인데, 사실 우리의 삶에 기본적인 상실감이 전제되어 있는 이상, 과도하게 구하고자 하는 욕망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8고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여덟 번째인 오음성고(五陰盛苦)이다. 오음, 즉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온(五蘊)이 잠정적으로 결합하여 있는 것이 자아라고 하는 것인데, 이런 자아가 어떤 실체로 따로 있다고 집착하면서 생겨나는 괴로움이 바로 오음성고이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 집착이고, 철학적으로 보면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의 일종이다. 인간이 자신한테 집착하여 생겨나는 이런 중심주의적 발상이 모든 괴로움 중에 가장 근원적인 것이 된다.

한편 고에는 2고도 있다. 내고(內苦)는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괴로움이고, 외고(外苦)는 생태학적으로 본다면 환경에서 발생하는 괴로움을 말한다. 따라서 생태학적 균형 파괴는 일종의 외고에 해당한다. 이렇게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8고와 2고를 생태계의 문제에 대입시킬 경우, 오음성고와 외고가 가장 대표적인 괴로움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오음성고라고 하는 자기중심 또는 인간중심주의에 바탕을 두고서,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생겨나는 외적 고통, 이것이 생태학적 괴로움에 대한 불교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생태학적 고성제(苦聖諦)'는 생태계의 위기와 고통이라는 현재 지구가 처한 난처한 상황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은 생태계의 구조와 기능 또는 생태계의 질서가 어긋남으로써 생겨나는 상실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생태계의 구조와 기능 또는 질서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생태계의 구조는 생산자와 소비자와 분해자로 되어 있다. 유기물을 산출하고 산소를 배출하는 식물을 생산자(producer)라 하고, 이렇게 식물이 만들어 놓은 것을 사용하는 동물을 소비자(consumer)라 하며, 식물과 동물의 사체를 해체하는 미생물 박테리아를 분해자(decomposer)라 하는데, 이처럼 이것들 사이에는 어떤 순환작용이 존재한다. 즉 생산·소비·분해의 과정이 수없이 되풀이됨으로써 생태계의 모든 물질은 결코 고정되지 않고 순환한다는 이런 '순환성(circularity)'이 하나의 질서가 된다.

또 하나의 질서는 이런 상호작용을 통해서 자기조절을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지구가 탄생할 당시 원시 대기에는 이산화탄소가 98%였고 산소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러던 것이 현재로부터 6억 년 전에는 이산화탄소가 0.03%로 거의 100%가 제로의 상태로 줄어들었고, 거의 제로 상태에 있었던 산소는 약 21%라고 하는 상당히 많은 정도로 늘어났다.

이런 상태가 현재까지 6억 년 동안 늘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평형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를테면 석회암과 산호초와 식물 등이 이산화탄소를 고정시키고 산소를 배출하는 작용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각각 유기적으로 서로 작용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평형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일러 '항상성(homeostasis)'이라고 한다.

하지만 '항상성'이든 '순환성'이든 이 모든 것은 상호의존 작용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다. 생태계를 구성하는 각 요소들 사이에 끝없이 전개되는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에 의해서 이런 '순환성'과 '항상성'이라고 하는 생태계의 질서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오늘날 생태계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이런 '순환성'과 '항상성'과 그것의 기초가 되는 '상호의존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생태학적 집성제

여기서 이렇게 흔들리는 양상을 불교의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지(地)라고 하는 것에는 토양오염이, 수(水)라고 하는 것에는 수질오염이, 화(火)라고 하는 것에는 더워짐, 즉 지구의 온난화가, 풍(風)이라고 하는 것에는 대기오염 등이 각각 해당한다.

이들 중 그 범위나 피해 규모 면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 지구 온난화이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의 상태를 '생태학적 고(苦)'라 할 경우, 이런 고의 원인을 탐구하는 것은 '생태학적 집(集)'이라 할 수 있다. 집(samudaya)은 집기(集起), 즉 어떤 조건들이 모여서 일어남을 뜻한다. 불교에서는 이런 괴로움의 발생 조건을 열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곧 12연기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열두 가지 의 조건들이 모여서 괴로움이라고 하는 생로병사가 일어난다는 말이고, 갈애와 탐욕 등이 결합하여 괴로움이 발생한다는 인과관계의 연쇄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생태학적 집성제(集聖諦)'는 생태계 위기의 원인이 어디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되는데, 일반적으로 생태학에서는 생태계의 질서가 파괴되는 일차적인 원인을 산업화에서 찾는다. 산업화 과정에서 그 에너지원인 화석연료를 너무 많이 사용함으로써,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이 증가하고 그리하여 대기오염과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산업화로 인한 오염은 인구증가나 도시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구가 증가하고 거대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개인당 자연재 소비량, 즉 자연의 산물을 소비하는 양이 증가하고, 이것은 각종의 토양오염과 수질오염을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생태계 파괴의 원인이 됨에는 틀림없지만,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원인일 뿐이다.

산업화도 역시 인간의 일이라고 보면, 좀더 심층적인 원인은 인간의 사고방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고방식의 문제란 산업주의적인 가치관이나 자연관이나 세계관의 문제를 가리킨다. 생산성의 증대를 유일의 가치로 삼아 소유와 욕망을 무한히 추구하는 탐욕(貪慾), 그리고 자연과 인간을 실체적으로 분리시킨 다음 그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하고 장악하고자 하는 이기적 분별심(分別心) 등이 문제이다.

또한 인간이 중심에 서서, 그것도 서양의 백인 남성이 중심에 서서 자연뿐만 아니라 비서구의 유색인과 여성을 억압하는 제국주의적 인간중심주의(imperialistic anthropocentrism), 즉 권력 강화의 문명적 아집(我執)이 문제이다. 이처럼 아집이나 그것이 투영된 분별심과 탐욕 등이 생태계 파괴의 심층적인 원인인데, 불교에서 보면 이런 것들은 일종의 무명의 소산이다.

무명(無明, avijj )은 무지, 즉 연기법(緣起法)이 세상의 이치인 다르마(Dharma)가 된다는 점을 전혀 자각하고 있지 못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12연기는 무명으로부터 시작한다. 다르마에 대한 무지란, 이 세상이 연기하므로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이고 무자성(無自性)이어서 공(空)의 상태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모르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알지 못하므로 행이 나온다. 이때 행(行, sa khara)은 단순히 행동이라기보다는, 행동할 때 언제나 함께 수반되는 것인 의지를 가리킨다. 의지가 있어야 무언가를 할 수 있으므로, 행은 곧 의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의지는 무지에서 나온 맹목적인 삶의 의지이다. 세상의 이치를 모르므로 맹목적으로 무조건 살아남아야 되겠다는 강력한 삶의 의지가 먼저 발동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식(識, vi a)이 나온다. 즉 의지가 인식에 선행하고, 삶의 의지에 물들지 않은 순수 의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 또는 인식 작용은 식, 명색, 육입, 촉 등으로 이루어진다. 식이 일종의 인식 주관이라면, 명색(名色, n ma-r pa)은 비물질적인 관념적 대상과 물질적 대상이고, 육입(六入, sa yatana)은 이런 대상을 인식하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라고 하는 여섯 가지 기관을 가리키며, 촉(觸, phassa)은 접촉하여 화합함, 즉 식이라고 하는 인식 주관과 명색이라고 하는 인식 대상과 육입이라고 하는 인식 기관 세 가지가 화합하여 일어남을 의미한다.

이런 촉을 통해서 완벽한 인식 작용이 성립하는데, 그렇게 되면 수가 일어난다. 수(受, vedan )란 어떤 느낌, 즉 인식을 함으로써 그 결과로 즐겁다, 괴롭다라는 느낌이 나오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느낌이 있으면, 즐거움에 대해 좋아하고 그것을 갈망하게 된다.

마치 갈증 상태에서와 같이, 아주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애(愛, ta h ), 즉 갈망과 욕망이다. 그 다음에는 취(取, up d na)가 일어난다. 취란 집착으로서, 갈망의 대상을 끝까지 놓지 않고 간직하려는 것을 말한다. 이어서 유가 일어난다. 유(有, bhava)란 일종의 있음으로서, 갈망하는 그것이 나의 소유로서 실체적으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하여 업(業)이 있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어서 생(生, j ti)이 일어나니, 그런 식으로 해서 삶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마침내 늙어 죽음이라는 노사(老死, jar -mara a)가 일어난다. 결국 생과 노사라고 하는 우리 모두의 괴로움은 이렇게 무지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고, 맹목적인 삶의 의지로 인해 전개되는 그런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무명행식으로 시작해 생로병사로 끝나는 것을 하나로 연결해서 설명해 보자. 다르마에 대해 무지하므로 맹목적인 삶의 의지를 앞세워, 물질적인 것이나 비물질적인 그 모든 대상을 분별하여 인식한 후, 거기서 즐거움과 즐겁지 못함을 느껴, 그 중에서 즐거운 것을 갈망하고 그것에 집착하게 되니, 그것을 영원히 고정돼서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 업을 짓게 되어, 무상한 생로병사를 계속 되풀이 하는 괴로움을 이어간다.

12연기의 이런 묘사 방법을 생태학적으로 설명할 경우, 그 '생태학적 12연기'란 다음과 같다. 다르마라고 하는 생태계의 질서, 즉 이 세상이 상호의존성으로 성립되어 있다고 하는 그런 생태학적 질서에 대해 무지하므로, 이용과 지배의 맹목적 삶의 의지를 앞세워 자연을 분별 인식하니, 자연은 내밖에 있는 것이고 나와는 무관한 것이며 내가 이용해야만 할 그런 것이라고 인식한 다음, 거기서 이로움과 이롭지 못함을 느낀다. 그리고 나서 그 이로운 것을 갈망하고 그것에 대해 집착을 하게 되니, 그 집착의 대상이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기며, 그리하여 생멸의 질서를 이런 식으로 왜곡시켜 간다.

이것이 바로 '생태학적 12연기'로 살펴 본 생태계의 파괴 실상에 관한 분석이다. 그렇다면 12연기는 실존적 괴로움의 분석일 뿐만 아니라, 생태계의 괴로움의 발생 원인을 탐구하는 데도 충분히 접목시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 생태학적 멸성제

불교가 위와 같은 집성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의 이치에 대한 무지가 극복되었을 때, 행으로부터 유발되는 여러 가지 괴로움도 극복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무지의 극복은 이 세상의 이치(다르마)가 연기라는 것, 그리고 생태계의 질서가 상호의존성이고, 우리는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 살아 갈 수밖에 없기에 상호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자각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러한 자각상태가 확연히 드러남으로써 생태계의 위기나 고통이 소멸된 상태, 그것이 바로 고의 지멸로서의 '생태학적 멸성제(滅聖諦)'이다.

괴로움과 번뇌가 이렇게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열반(涅槃, nirv a)이라고 한다. 열반의 원어 니르바나는 일종의 '불 꺼짐'으로서, 이것은 괴로움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이기 때문에, '생태학적 열반(ecological nirv a)'은 생태계의 위기가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뜻에서의 '생태학적 평화(ecological peace)'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생태학적 평화 상태는 어떤 자각, 즉 무명이 명이라고 하는 어떤 지혜로움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며, 그 내용은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 緣起)'과 '상호존중성(interrespect, 慈悲)'에 대한 깨우침이다. 이렇게 상호의존성을 자각하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이 화해할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도 화해를 이룰 수 있다.

서로 의존관계에 있는 인간과 자연이 공생과 공존과 상생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바로 연기법을 구현하는 것이고, 이렇게 연기법이 구현된 세계가 곧 법계(法界, dharma-dh tu)이다. 이런 법계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상태가 생태학적 평화 상태이며, 생태학적 사성제 중 생태학적 멸의 상태이다. 그리고 인간중심주의적 아집을 타파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상호의존적 공생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이런 생태학적 멸의 상태에 도달하는 지름길이다.

승조(僧肇) 스님의 『조론(肇論)』이라는 책에 나온 식으로 이런 상태를 표현해 보면, "천지와 나는 한 뿌리이다(天地與我同根)."라는 것이 된다. 이것은 자연과 인간은 결국 뿌리가 같다는 말인데, 그 같은 뿌리란 상호의존성이라는 생태학적 질서를 가리킨다. 이렇게 같은 뿌리에 있기 때문에, "만물과 나는 한몸이 된다(萬物與我一體)." 상호의존성으로 인해 자연과 인간은 한몸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상호의존성의 연기법이 구체화된 것이 바로 법신(法身)이므로, 그런 "법신과 이 대지는 본래 둘이 아니며(身土本來無二相)", "삼라만상 역시 나와 다른 것이 아니다(萬象森羅無非自己)." 분별과 집착과 아집의 산물인 각종의 중심주의를 통해 인간은 인간을 죽이며,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연을 죽인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폭력은 전쟁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자연에 대한 폭력은 생태계의 파괴로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인간계와 생태계의 평화는 분별과 집착과 아집의 제거에서만 보장받을 수 있고, 이것은 연기법에 대한 확연한 자각, 즉 무명(無明)으로부터 명(明)의 회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생태학적 지멸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5. 생태학적 도성제

그렇다면 생태학적 평화에 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생태학적 도성제(道聖諦)'이다. 이때의 도(道)는 물론 방법으로서의 '도'이지만, 우주의 궁극적 이치로서의 '도'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방법이 우주의 이치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인 이상, 그것은 우주의 이치에 근거한 방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멸이라고 하는 열반 상태에 가기 위한 방법으로 여덟 가지를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팔정도(八正道)이다. 고집멸도에서 '집'이 내용적으로 12연기를 가리킨다면, 고집멸도의 '도'는 8정도를 뜻한다. 팔정도는 고를 소멸시키기 위한 여덟 가지 방법이자, 생태학적으로 보면 생태계의 위기를 소멸시키기 위한 여덟 가지 방법이기도 하다.

그 팔정도란 무엇인가?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의 여덟 가지이다. 정견(正見)은 바른 견해라는 뜻인데, 팔정도의 시작이자 제일 중요한 요소이다. 바른 견해란 똑바로 본다는 것이고, 이것은 생태학적으로 본다면 생태계 질서의 핵심인 상호의존성(緣起性)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올바른 자연관을 정립하는 것인데, 불교식으로 보면 우리의 자연을 연기법이 드러난 법계(法界)이자 동시에 법성(法性)을 본질로 하여 성립한 화엄법계(華嚴法界)라고 보는 것을 말한다.

그 다음 정사(正思)는 바른 생각이고, 이것은 생태계에 대해 해를 끼치지 않는 생각을 가리킨다. 그리고 정어(正語)는 바른 말이라는 의미로서, 생태학적으로 본다면 인간이나 집단의 탐욕을 위해서 생태계의 위기를 호도하고 기만하는 언사나 미사여구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개발이나 발전이나 성장이라는 거창한 미명 아래 아직은 위기가 아니라고 기만 호도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업(正業)은 바른 행위이니, 생태계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정명(正命)은 바른 생활이니, 생태계의 질서에 합당하게 의식주를 구하는 생활을 한다는 의미이고, 또한 정정진(正精進)은 바른 노력이니, 생태학적 위기와 해악을 근절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정념(正念)은 바른 기억이기 때문에, 생태계의 질서를 언제나 잊지 않고 떠올린다는 의미이며, 정정(正定)은 바른 집중으로서, 명상의 통찰을 통해 탐욕과 집착과 아집에 물든 분별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을 뜻한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자기중심주의가 억제되었을 때, 생태학적 평화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6. 생태 지혜

팔정도의 핵심이 정견에 있듯, 생태계 위기 해소 방법의 관건도 '생태학적 지혜'에 있는 것이므로, 동서양의 지혜 양태 일반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 소피아로서의 지혜
그 어떤 것을 잘 아는 것을 일러 ‘지식’이라 하기도 하고, ‘지혜’라 하기도 한다. 이 때 그 앎이 ‘어떻게 그런지에 관한 앎(know how)’일 때는 흔히 지식(knowledge)이라 하는 반면, 그것이 ‘왜 그런지에 관한 앎(know why)’일 때는 지혜(wisdom)라고 부른다. 즉 지식이 방법과 기술에 관한 것이라면, 지혜는 의미와 가치 혹은 이유나 근거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생명 혹은 삶(life)에 관한 앎일 경우, 지식은 어떻게 생명체는 살아가는지에 관한 것이 되며, 생명체는 신진대사 작용과 생식 작용과 진화 작용을 하며 살아간다는 일종의 생물학적인 내용을 함축하는 것이 된다. 이에 비해 지혜는 그런 작용들을 하는 생명체나 인간이 도대체 왜 사는 것인지, 또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지 그리고 이 우주에서 그런 생명체나 인간의 위치는 무엇인지 등에 관한 것이 되어, 삶의 의미나 가치를 해명하는 철학적이고도 종교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지식이 일상이나 현상을 기술하는 차원의 것이라면, 지혜는 본질이나 본체를 탐문하는 차원의 것이 되고, 그렇기 때문에 지식이 이익과 관련된 유용성의 측면으로 쉽게 이어지는데 반해, 지혜는 특정한 이익을 넘어선 총체적인 사고방식과 연관된다. 그렇다면 지혜란 삶 전반이나 우주 전체와 관련된 총체성 속에서 개체의 존재 의미와 근거를 해명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런 지혜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삶이나 우주의 질서 내지 이치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동서양의 모든 심오한 사상들은 이러한 총체적인 지혜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서양에선 그런 지혜를 소피아(sophia)라 부르고, 이런 소피아에 대한 한없는 갈망과 애정(phil)을 필로소피아(philosophia), 즉 철학이라 한다. 그리고 불교에선 그런 지혜를 반야(般若, praj )라 부르며, 이런 반야의 최고 완성(波羅蜜, p ramit )을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praj p ramit )이라고 하여, 이것의 완벽한 구현을 불교는 지향한다.

그렇다면 철학이란 세상의 총체적 본질에 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본질을 서양철학의 발원지인 플라톤(Platon)의 사상에선 이데아(idea)라고 불렀다. 원래 모양이나 형상을 뜻하던 이데아는 어떤 것을 바로 그것이게 하는 본 모양이나 원형이 되는 본(本, paradeigm)을 의미하며, 이 세상의 사물들은 이런 각각의 이데아를 본뜨고 본받아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원을 하나 그리고 있다고 하자. 기하학에서 원은 임의의 한 점에서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을 이은 선과 그 내부의 면이라고 정의된다. 또한 점은 위치는 있으나 크기는 없는 것으로, 선은 길이는 있으나 넓이는 없는 것으로, 면은 길이와 넓이는 있으나 깊이는 없는 것으로 정의된다. 우리는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점을 찍고 길이를 표시하기 위해 선을 긋고, 넓이를 표시하기 위해 면을 그리지만, 그런 점과 선과 면이 실제로 종이 위에서 그려지는 순간, 점은 크기를, 선은 넓이를, 면은 깊이를 갖게 된다.

기하학에서 정의하는 본래의 원과 그것을 본떠 그려진 원 사이의 이런 관계가 곧 본체의 이데아와 현상의 사물 사이의 관계이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그려지는 원은 기하학에서 정의하는 이상적인 원을 본으로 하여 그것을 모방할 수밖에 없지만, 현실의 원은 이상의 원을 완전히 담아낼 수는 없고, 현실의 세계와 이상의 세계 사이에는 괴리의 틈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현실의 원이 지워져 없어지는데 반해, 이상의 원은 사라져 없어지지 않으므로, 현실은 덧없는 변화를, 이상은 영원히 고정된 불변을 함축한다. 이처럼 개별 사물이 생성 소멸 변화해도, 그것의 보편적 본질로서의 이데아는 영원 불변하고, 이렇게 영원 불변하는 보편자를 인식하는 것은 물질 작용의 육체가 아닌 정신 활동의 이성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변화 소멸하는 물질이나 육체의 현상계와 불변 불멸하는 정신이나 이성의 본체계로 구분된다.

그리하여 세상은 가변(可變) 가멸(可滅) 가사(可死)의 현상 세계와 불변(不變) 불멸(不滅) 불사(不死)의 본체 세계로 나누어지고, 이런 구분에 맞추어 순간과 영원, 우연과 필연, 개별적 다수와 보편적 하나 등이 분립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서양 철학에서 지혜란 본체를 식별하여 현상과 구별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인데, 불교적으로 본다면 이러한 지혜는 일종의 차별지(差別智)나 분별지(分別智, savikalpa-j na)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보았듯, 이 세상의 총체적 본질이나 그 의미에 관한 앎을 지혜라 하는데,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런 지혜를 소피아(sophia)라고 불렀다. 그런데 로마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그리스적 기운이 쇠잔해지고 기독교의 시대가 도래하자, 그리스에서 인간의 지혜는 중세에선 신의 지혜로 바뀌고, 소피아는 사피엔티아(sapientia)가 된다.

소피아적 지혜의 대상이 우주 만상의 이치이듯이, 사피엔티아로서의 지혜도 세계의 질서를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사피엔티아는 어디까지나 '신적인 지혜'(divina sapientia)이기 때문에, 그런 지혜의 내용도 신의 세계계획이나 섭리와 그로 인한 만물의 완전한 질서나 영원한 법칙 등이 된다. 이제 지혜는 한갓 피조물인 인간의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한 신에게나 합당한 것이 되고, 지혜가 떠난 그 자리를 인간은 신앙으로 채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신앙으로써 자신의 주인을 섬기는 대가로, 창조주인 신은 나머지 피조물들인 자연을 다스릴 수 있는 지배의 권한을 인간에게 위임한다. 인간은 위로는 신앙을 통해 신을 숭배하고 아래로는 이성을 통해 자연을 지배한다는 기독교적인 이런 위계의 구도는 지혜의 근저에 지배의 의지가 잠복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세상을 창조한 신이 전체 세계의 시원이라는 신중심주의(theocentrism)와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이 나머지 피조물 세계의 중심이라는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가 동시에 성립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처럼 신중심주의에 기대어 인간중심주의가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의 주체로 등장하는 근대에도 신에 의해 보장된 인간의 자연 지배권은 흔들림 없이 더욱 강화된 형태로 등장한다.

우리는 지혜가 자연의 지배로 강화되는 이런 근대적 권력화 과정의 시작을 베이컨(Bacon)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아는 것이 힘이다(scientia est potentia)."라고 말했을 때, 그 앎이나 지식은 과학으로서의 학문을 지칭하고, 그 힘은 이런 과학에 의한 자연 지배의 능력으로서의 권력을 가리킨다. 결국 "지식은 권력이다."는 말이 되는데, 이것은 세상의 이치에 대한 총체적인 파악을 통해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던 '지혜'가 특정한 목적에 이바지하는 방법과 기술을 찾는 한낱 '지식'으로 전락하고, 이런 지식이 어떤 타자의 지배를 위한 권력으로 절대화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어느 철학사가가 "현대문명은 지식은 압도적으로 많으나 지혜의 깊이는 놀랄 정도로 얕다."고 진단한 것이 어느덧 현실화되는 단초를 우리는 여기서 목도하게 된다. 더욱이 베이컨이 과학의 목적은 첫째, 신을 찬미하는 것이고 둘째, 인간을 위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볼 때, 지혜의 이런 천박화 과정 밑에는 인간에 의해 거행되는 숭배와 지배의 이중주가 여전히 가로놓여 있음을 역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지혜가 지식과 등치되고 그런 지식이 지배의 도구가 되는 것은 근대 철학의 실질적 비조인 데카르트(Descartes)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그에게서 지혜란 "모든 기술들을 발명하기 위하여 알아야 하는 일체 사물들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의미하는데, 인간은 이런 지식을 사용함으로써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된다.

이것은 자연이란 '과학을 통해 이용 가능한 정복의 대상'이라고 본 베이컨과 동일한 맥락에서의 귀결점이지만, 자연을 지배하는 주인 됨의 조건을 자아의 주체성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야말로 근대적 정신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그의 유명한 선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나의 존재의 근거를 나의 사유에 둠으로써 자아와 자아의 사유 능력인 이성을 진리의 절대 부동의 기초로 삼았다. 그런데 이렇게 이성을 지닌 자아가 주체가 되어 자연을 지배하는 주인으로 등극하자, 그 맞은편에 있는 자연은 감성에 의해 타자화된 객체로서 소유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리하여 자아와 타자, 이성과 감성, 정신과 물질, 인간과 자연 등이 주체와 객체로서 분열한다. 그리고 이런 분열은 산업혁명 이후 제국주의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백인과 유색인, 산업과 농업, 진보와 퇴보, 남성과 여성, 중심과 주변 등으로 대립하며, 그리하여 마침내 이 모든 것의 총체로서의 생태계는 파멸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이상의 경로를 반추해 볼 때, 서양에서 지혜의 역사는 지혜가 지식으로 되고 그 지식이 지배의 권력이 되는 과정이며, 그 밑에는 언제나 분별과 분리라는 양분화의 논리가 잠복해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분별은 차별을 낳고 그 차별은 다시 폭력적 지배를 수반할 수밖에 없었던 서구식 지혜의 변천 과정은 오히려 '분별의 종식'(無分別) 없이는 자비의 평화도 없다는 불교적인 깨달음을 인류 구원의 메시지로 부각시키는 반면교사의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2) 반야로서의 지혜
일상의 이익이나 표피적 현상을 넘어, 삶의 본질과 만물의 이치를 탐문하여 아는, 그래서 세상 전체에 대해 총체적인 사고로 통찰하는 것을 일러 동서양에서는 모두 지혜라 하였다. 특히 서양에서는 이런 지혜를 소피아(sophia)나 사피엔티아(sapientia)라고 불렀는데, 합리성을 인식하는 인간의 이성을 소피아라고 한다면, 섭리를 주관하는 신의 전지전능성은 사피엔티아에 해당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든 신의 지혜든, 가변적 물질 세계와 불변적 정신 내면을 현상과 본체 또는 객체와 주체라는 식으로 양분한 다음, 본체의 장악을 통해 현상의 세계를 힘과 권능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차별적 분별지'였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이치에 대한 총체적인 통찰을 지혜라고 할 때, 불교에서는 이것을 반야(般若, praj )라고 부른다. 이것은 '뛰어오른다'는 뜻의 접두사 pra와 '인식한다'는 뜻의 j 가 합쳐진 말로서, 지혜 직관 통찰력 인식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혜는 일상적 지각이나 개념적 분별을 뛰어넘어, 보다 깊은 불이(不二)의 근원적 실상으로부터 체험되는 직관적 통찰력이며, 따라서 주객분리의 이원적 사고가 극복된 무분별의 지혜(無分別智)이다.

즉 일상의 지식과 분별에서 뛰어올라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불교적 지혜로서의 반야인 것이다. 결국 반야란 세상의 이치와 실상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말하는데, 이 때 세상의 이치를 다르마(dharma, 法)라고 한다면, 그 다르마의 내용은 바로 연기(緣起)이다. 다시 말해 불교적으로 볼 때 세상은 연기를 이치로 하여 전개되어 가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것은 무수한 조건들(衆緣)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和合) 형성되는 것(生起)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세상의 이치를 연기로서 받아들이는 지혜(攝受緣智)가 곧 '법에 의지하는 지혜(法所依智)'이다. 이렇게 '법에 의지하는 지혜'는 '법에 대한 관찰(法隨觀)'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런 관찰이란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원리에 대한 직관적 통찰을 의미한다. 따라서 불교에서 지혜는 연기법에 따른 통찰이며, 그 내용은 세상의 실상을 무상과 고와 무아로 인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법구경》(제 277, 278, 279 게송)에 나타난 부처님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에서도 확인된다. "형성된 모든 것은 무상이고 고이고 무아라고 지혜로써 관찰하는 자는 괴로움을 진정으로 싫어하게 되나니, 이것이 바로 청정함에 이르는 길이다."

여기서 '형성된 모든 것'이란 '조건지어진 모든 것' 또는 '인연 따라 형성된 모든 것', 즉 한마디로 '연기한 모든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모든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건들에 의해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생멸을 언제까지나 반복하는 것이라면, 이처럼 매 찰나마다 생멸을 거듭하는 것들에 대해 영원 불변성을 인정할 수는 없는 것(無常)이고, 결코 변치 않고 동일하게 남아있는 자아와 같은 것이 실체로서 따로 존재한다고 여길 수도 없는 것(無我)이며, 이렇게 무상과 무아임에도 불구하고 무시이래 훈습된 사유 습관(業)에 따라 불변적인 신이나 동일한 자아를 내세워 이를 토대로 집착과 소유를 일삼지만, 실상과의 이런 괴리로 인한 상실감은 어쩔 수 없이 삶의 고통(苦)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연기이므로 무상이고 무아이지만 이를 자각하지 못할 때 삶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는 이와 같은 지혜의 통찰은 무상한 것에 대해 항상하다고 착각하는 전도, 괴로운 것에 대해 즐겁다고 집착하는 전도, 무실체적인 것에 대해 실체가 있다고 강변하는 전도 등 일체의 전도 망상을 바로 잡아 우리를 해탈과 열반에 이르게 한다.

이렇게 연기하므로,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라는 것이 초기불교의 일관된 가르침이었는데, 그 후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무상과 무아는 무자성(無自性)의 공(空)이라는 맥락에서 논의된다. 즉 연기이므로 자성은 결여되어 있고, 그래서 공이라는 것이다. 부파불교에서는 비록 연기하여 오온 가합의 무아라 하더라도, 오온(五蘊)과 그것이 확장된 75가지의 요소들 자체만은 삼세에 걸쳐 항상적으로 존재하는 자성(自性, svabh va)을 지닌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런 경향을 이른바 소승이라 비판하여 등장한 반야경을 위시한 대승불교에서는 바로 연기하기 때문에, 즉 무수한 조건들이 끝없이 개입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계속 변화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연기적 추세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떨어져 불변적으로 존재하는 자성과 같은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상호의존하여 성립하는 연기이므로, 고정 불변의 실체성이 결여된 무자성의 공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직설인 연기법이 불멸후 오백여년이 지나 정립된 공사상과 무리 없이 연결될 경우에만,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와의 시·공적 차이를 극복하고 불설의 바람직한 계승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이제 초기불교적 지혜의 내용이던 연기관(緣起觀)이 대승불교에 이르러 공관(空觀)으로 재탄생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모든 것을 실체성이 결여된 무자성의 공으로 본다는 것은, 모든 것이 찰나 생멸을 거듭하며 인연 따라 잠정적으로 성립된 가립태(praj apti)일 뿐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실유(實有)가 아니며, 이렇게 실유가 아니기에 고정되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非有), 인연 따라 가현하는 것이기에 그렇다고 없는 것만도 아니다(非無)라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것은 인(因)과 연(緣)이라는 직·간접의 조건들에 맞춰 상호의존하여 생멸을 거듭하므로, 전혀 없었던 것이 새롭게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不生),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져 없어져 버리는 것만도 아니다(不滅)라고 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공(空)·가(假)·중(中) 또는 비유비무·불생불멸의 중도로 보는 중관(中觀)적 공관이 불교적 지혜인 반야(般若)이다.

그리고 이런 지혜는 무시이래 지속된 번뇌의 훈습에 따라 계속 분별하는 우리의 의식을 보리(菩提)와 열반으로 전환해서 얻어진 지혜(轉識得智)이며, 무수한 조건들이 화합하여 일어나는 세상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이 일어나는 바(依他起性), 여기서 주관과 객관을 대립시켜 허망하게 분별하여 어느 일방에 집착하는 것(遍計所執性)이 대부분이지만, 이런 대립을 가환(假幻)으로 여겨, 아는 주체(能知)와 알려진 객체(所知)가 하나의 일체가 되어 분별이전의 것으로 원만하게 성취된 실상(圓成實性)이 달성되는 지혜이다.

이렇게 변계소집성이 원성실성으로 변혁된 지혜 상태에서는, 우리의 누적된 잠재의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만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지혜(大圓鏡智)로, 우리의 뿌리깊은 자아의식인 말나식(末那識)은 나와 남 사이의 차별을 여의는 일여(一如)의 지혜(平等性智)로, 일상의 현상을 인식하는 우리의 의식(意識)은 비실체의 공으로 묘하게 있는(妙有) 실상을 정통하게 관찰하는 지혜(妙觀察智)로 전환된다. 이처럼 삼성(三性: 遍計所執性·依他起性·圓成實性)에 기초하여 성립하는 전식득지(轉識得智)가 바로 유식(唯識)에서 바라보는 불교의 지혜이다.

그런데 중관적으로 보든 유식적으로 보든 참다운 지혜는 번뇌와의 일체 관련을 이미 끊어버린 득도 상태에서의 무루지(無漏智) 또는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정한 보살은 중생 구제를 위하여 훌륭한 방편을 내면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위해 평소와 같이 분별하는 자비로운 지혜를 발휘하게 된다. 이것은 무분별의 득도 후에 이루어지는 분별지이기에 '후득(後得)의 유분별지(有分別智)' 혹은 줄여서 '후득지(後得智)'라고 한다.

이렇게 무분별지이면서 후득의 유분별지가 된다는 것이 바로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이도 그 마음을 내는 것(應無所住而生其心)'이고, 무심(無心)이 자비를 매개로 진심(眞心)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의 지혜는 무분별의 지혜임과 동시에 언제나 자비를 위한 지혜라는 점은, 분별이 차별을 낳고 차별이 지배로 이어지는 일종의 '차별적 분별지'로서의 서구적 지혜, 즉 소피아와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다. 지배 없는 지혜, 그래서 우주의 모든 존재자를 향해 열려 있고 그들을 존중하는 자비로운 개방된 지혜, 그것이 불교의 지혜 곧 반야이다.

이처럼 반야의 통찰은 해탈과 자비라는 궁극적인 구원과 연결된 종교적인 지혜라는 점에서 단순히 학문적인 철학적 지혜와도 다른 것이며, 어디까지나 '계를 지킴으로써 이루어지는 지혜(戒所成智)'이고 '선정을 닦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지혜(修定所成智)'라는 지극히 실천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오로지 이론적이기 만한 지혜와도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반야의 지혜는 연기법에 따라 일체를 상호의존하여 연결된 전체로 보아, 특정한 입장과 이익에 맞춰 사물의 실상을 개념적으로 분화 고정시키지 않는 무분별적인 중도의 태도라는 점에서 지극히 편벽된 분별의 지혜와도 다른 것이다. 소피아나 사피엔티아처럼 분별이 차별을 낳고 차별이 지배를 조장하며 지배가 폭력을 수반하는 것은 진정한 지혜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분별의 해악이고, 인간의 앎에 내재한 이런 독소는 분별 이전의 총체적 실상을 회복함으로써만 치유될 수 있다. 분별된 양항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분별되기 이전의 원초적인 전체를 실상 그대로 보는 것이 반야적 지혜에서 통찰되는 총체성이다. 여기에서는 현상과 본체가 차별되지 않고, 주체와 객체가 분열되지 않으며, 인간과 자연이 대립되지 않는다. 이런 연기적 총체성의 터전에서만 지혜는 치유이자 구원일 수 있는 것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생태계의 고통이 해소된 생태학적 평화 상태가 도래할 수 있다. ■

김종욱
동국대 불교학과 및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동국대 불교학과 연구교수. 논문으로 〈존재론적 차이와 형이상학의 문제〉 등이 있고, 저서로는 《하이데거와 철학자들》 《불교에서 보는 철학 철학에서 보는 불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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