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석 동국대 강사

1. 문제의 제기

교육현실에 대한 위기의식과 그에 따른 비판이 최근에 한정된 관심사는 아니다. 어느 시대나 사회에서도 교육에 대한 문제점은 소홀히 다루어진 적이 없는 보편화된 관심의 대상이었다.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은 수준과 층위에 따라 각기 다른 진단과 처방이 내려질 수 있으나, 이러한 관심과 지적의 공통적 기저에는 지식중심의 주입식 교육과 입시위주의 교육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교육에 관해서는 누구나 주입식, 암기위주, 입시경쟁 교육이라는 교육문제를 성토하는 것처럼, 이에 따른 문제 해결 역시 도덕이나 윤리교육의 강화와 같은 인성적 측면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도식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분명한 문제의식과 처방이 오랜 기간 지속되어 왔음에도 교육의 문제와 폐해가 여전히 재생산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은 도덕이나 윤리, 인성과 같은 요소들을 추가함으로써 교육문제가 치유될 수 있다고 보는 기존의 상식적 관점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이것은 교육의 문제가 현재의 부분적인 단면을 통해 유추하기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시대인식과 심층적인 사회관계의 분석을 통해 접근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결국, 현대의 교육상황이 부분적 개선이나 새로운 부분을 추가함으로써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은 교육현실을 시대적 전환이나 문명사적 변화와 같은 좀더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방향에서 볼 필요가 있음을 드러낸다. 총체적 방향이라는 틀이 제시될 수 있다면 부분적 노력들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으며 재구성될 수 있다.

또한 부분적 개선의 노력들은 그것들이 합쳐졌을 때 단순한 부분의 합을 넘어선 완전히 새로운 전체로서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교육현실의 위기에 대한 접근을 근대라는 거대 패러다임을 통해서 살펴본다면 그와 관련된 부분의 문제들이 새롭게 조명될 수 있으며, 거대 패러다임의 해체와 전환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개선점들이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근대 이후의 교육문제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총체적 반성에서 주목할 점은, 탈근대 관련 논의와 해체이론의 주요 관점들이 불교에서 이미 제시해온 세계인식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교육패러다임을 구성하는 세계관·인간관·지식관의 문제에서 여실하게 드러난다. 즉, 근대의 요소 환원적인 기계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기 위한 전일적(holistic)·생명적 세계관은 만물이 인드라의 그물처럼 상호 침투되어 있는 연기적(緣起的) 세계관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또한, 도구적 합리성에 기반한 근대의 이성적 인간관에 대한 탈주체중심적 비판들은 비실체화된 깨달음의 전제를 가진 불성적 인간관과 무관할 수 없다. 나아가, 객관을 가장한 지식의 소유를 통해 욕망의 확장을 부추겨온 근대의 주지주의적(主知主義적) 지식관에 대한 비판은 결국 자비와 비움을 강조하는 반야적 지혜관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경향들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어느 시대에서이건 당대의 현실과 한계에 대한 근원적인 자각과 비판에는 깨달음의 씨앗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히 전제되어야 할 것은 교육문제는 더 이상 교육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지금의 교육이 문제로서 드러나기까지에는 이들 배후에 근대의 세계관과 인간관이 뿌리깊게 얽혀 있다는 연기적 자각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고는 근대의 교육문제를 형성해 온 거대 패러다임에 대한 근원을 비판함으로써 현대의 교육문제를 재검토하고, 이들의 해결방안의 경향들에 불교적 교육이념들이 깊숙히 침투되어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것은 교육에서 불교적 가치를 구현한다는 것이 교육현실에 불교라는 새로운 가치를 부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근대패러다임의 해체를 통해 드러나는 교육 본연의 가치라는 점을 환기시키려는 작은 시도이다.

2. 근대의 교육패러다임 형성배경

1) 진보관념에 의한 기계론적 세계관
근대의 형성에는 과학혁명, 계몽주의, 산업혁명 등과 같은 다양한 계기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이 각기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발견과 변화를 주도해 왔으나, 결과적으로 서구문명의 근간이라 수 있는 근대의 패러다임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인류의 보편적 진보와 무한한 가능성을 심어주었던 근대의 패러다임은 오늘날 자연과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위기의식을 제공한 근본 원인으로 비판되고 있다. 현재의 위기의식은 특징은 가시적이고 부분적인 문제상황에 반성이 아니라, 근원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절망과 회의를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인식은 근대라는 큰 틀에서 형성된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과학이라는 강력한 도구의 발견은 이 세계를 과학적인 인과성과 합리성으로 그 전모를 드러낼 수 있다는 확신을 부여해 왔다. 물론 과학의 발달에 의한 근대의 긍정적 기여는 결코 간과될 수 없다.

근대를 통해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와 인종·계급·신념·성별을 불문하는 평등·자유·정의의 이념, 현대의 의학·물리학·생물학·화학 발달의 혜택, 노예제도의 종말, 페미니즘의 발흥,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권리와 같은 강력한 인류의 진보를 경험할 수 있었다.{{ K. Wilber. The Marriage of Sense and Soul. 조효남(2000). 감각과 영혼의 만남. 서울: 범양사출판부, 33쪽.}}

그러나 화려한 진보의 이념 뒤에는 더 이상 은폐할 수 없는 총체적인 위기상황이 놓여있다. 근대 이후 과학은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더 이상 인류에 기여하지 못하고 상업자본에 기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됨으로써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 과학은 이 세계로부터 무미건조한 실험장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수치화를 통한 수량화·계량화는 모든 대상을 양화시켜 예측과 통제의 가능성을 높이려 한다는 점에서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왜곡시키고 있다.

따라서, 근대에 와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를 음미하고 향유하고 참여하는 속에서 체화(體化)하는 활동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혀있는 기계장치의 각 부위를 관찰하는 활동으로서 인식된다. 물론 여기에는 각 부품의 기능에 대한 관찰 이후, 새롭게 해체·조립이 가능하다는 인간의 전지적 욕망이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데카르트-뉴턴에 의한 기계론적이고 환원론적인 세계관은 18세기 이후 물리학을 비롯한 거의 모든 자연과학의 획기적인 성과를 통해 공인받게 된다. 자연의 모든 법칙은 수학적 방식으로 정식화되고, 양적인 것으로 측정가능하며, 인과적 원리로서 설명되게 되었다. 나아가 기술과 공학과 같은 응용과학의 발달에 활용됨으로써 인류의 이익과 편리에 결부된 무한한 진보의 거대 패러다임으로 자리하게 된다.

이러한 진보의 행진 앞에 놓여 있는 것들은 일종의 장애로서 치부되어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서 간주된다. 그 중에도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아직 개발되거나 관리되지 못한 미개하고 원시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어떠한 형태로든 인간의 손에 의해서 가꾸어져야 할 대상으로 인식된다. 즉, 대상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기계적 원리를 발견하려는 초기의 과학주의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을 지배와 통제를 통해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기계적인 관리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무차별상으로서의 세계는 이제 인간에 의해 엄격한 구분과 분리를 통한 위계와 서열로서 차별화된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 주체와 대상, 중심과 주변의 구분은 결국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분리함으로써 현대의 돌이킬 수 없는 공해와 환경오염의 업(業)을 짓고 있다. 하나의 전체로서 유지되던 생명력은 분열과 이탈을 통해 그 생명력을 상실하고 곧바로 썩어들어 간다는 생명에 대한 기본 진리를 망각한 결과이다.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이 상호의존 할 수밖에 없는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의 몰이해에 대한 댓가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진보에 의한 기계론적 세계관은 결국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대한 유기적이고 무차별적인 관계성을 무시하고, 인간의 욕망충족과 맹목적 편리를 위해 생태와 환경을 지배하려는 매카니즘과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이 생명의 그물망으로 연계된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로 구성되어 있는 화엄적 세계관의 부재이며, 생태환경적 인식에 기반한 자비의 깨달음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과학이라는 하나의 도구를 소유했으나, 만물의 관계성과 생명력에 가치를 상실한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실체개념에 근거한 이성적 인간관
근대적 세계관에서 중심을 이루는 인간관은 세계관과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계몽주의로 대변되는 근대의 인간상은 '목적'보다는 '방법' 혹은 '기능'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자신을 자연과 대립시키고, 자신과 다른 인간의 관계를 분리시킨다. 즉, 자신과 자연을 대립시킴으로써 근대 자연과학적 도구를 통해 자연을 관찰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보았고, 자신과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분리시킴으로써 자아를 중심으로 한 이기적 인간상을 정착시킨다.{{ 이진우(1993).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이해. 서울: 서광사, 16쪽.}}

인간 이성의 무한한 발전에 대한 믿음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주체와 대상이라는 객관적 '틀'을 정당화시키는 기제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으로서의 정신은 결코 자신의 한계를 경험한 적도 없고 설정하지도 않는다. 영원과 불변을 속성으로 하는 실체로서의 정신은 그 자체로 생성도 소멸도 없는 자기전개와 확장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기 때문에 자기부정이나 단절의 경험이 있을 수 없다.

주체로서의 자기확신에 기초한 이성적 인식은 결국 자기동일성으로 수용될 수 없는 것들을 타자화 시키면서 주체로서의 자기의식을 정당화시킨다. 이러한 주체로서의 인간의식은 자기중심성에 입각해서 끊임없이 이 세계를 대상화시킨다는 점에서 나르시스적이라 할 수 있다.{{ 김상봉(2002). 나르시스의 꿈. 서울: 한길사, 21쪽.}}

모든 대상을 관계성 속에서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자기화된 대상 혹은 규정지어진 대상으로서 소유하고자 한다. 즉, 자기를 통해 타자를 이해하려 하며, 자기 아닌 것을 자기와 같은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것을 이해하려 한다.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나르시시즘은 같은 것을 통해 이해하려 한다는 점에서, 낯선 것이나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것을 견디지 못한다.

결국 새로운 것, 개별적인 것은 나르시스적 세계에서는 부정되고 배제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로티(R. Rorty) 역시 서구의 인식론 중심의 전통철학을 정초주의(foundationalism)로 간주하여 일종의 현대판 나르시스와 같다고 주장한다. 전통철학은 마치 나르시스의 연못처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과 같은 것이 존재하며, 인식은 이러한 거울을 통하여 성립된 것으로서 세계와 대응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거울은 없으며,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구성한 불완전하고 잠정적인 인식의 흔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엄태동(1999). 로티의 네오프래그마티즘과 교육. 서울: 원미사, 12쪽.}}

그런 점에서 근대 이후의 인식론은 나르시스적인 근대 인간관을 대표하는 부정적인 개념으로 간주된다. 푸코가 제시한 바 있듯이, 근대의 휴머니즘은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를 내포하고 있다. 어떠한 '-중심주의'이든 그 자신이 소외되지 않는 주체적 존재로서의 긍정적 의미를 내포하면서도, 그것이 전체속에서의 의미를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강조될 때에는 '이기주의'나 '우월주의'로 발전될 수 있다. 특히 인간에 대한 협소한 이해를 바탕으로 했을 경우의 휴머니즘은 편협한 '인간중심주의'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중심의 사상은 서구의 오랜 역사에 기인한다. 플라톤적 이데아계와 현상계의 이원론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의 사유가 신과 인간, 내세와 현세, 선과 악의 이원적 구분을 정당화되기 시작하고, 이러한 이분법적 사유는 근대 이후에도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다. 물론 이분법적 사고는 위의 것이 아래의 것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차별적·위계적 권위를 전제하고 있다.

근대의 인간을 이성적 주체로 상정하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간과 비인간이 구분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인간을 규정하는 이성과 비이성, 합리와 비합리의 구분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이는 서구의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실체와 속성, 형상과 본질,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 선과 악을 구분해온 이원적 흑백논리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주체(subject)의 라틴어 어원인 "subjectum"에서 "sub"는 "아래로", "jectum"는 "던지다"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주체는 자기 아닌 모든 것을 자기 아래로 던져두고, 자기 의지대로 조종하고 조절할 수 있다는 힘을 갖게 됨을 의미한다. 한번 주체가 설정되면, 다른 모든 것들은 대상화되고 주변화되며, 수단시되는 것이다. 이러한 서구의 근대적 이성개념은 종(種)으로서의 모든 인간에 대한 추상적 보편성 혹은 추상적 동일성이라는 원자론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다.

수(number)는 추상적 동일성을 잘 드러내주는 전형적인 양적 기호이다. 각각의 숫자들이 그 자체에 어떠한 질적인 특성이나 개별적 성질을 내재하지 않듯이, 인간의 이성은 마치 개별 숫자의 추상적 동일성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에게 내재한 보편성을 의미한다. 근대 사회의 개인 개념 역시 이러한 추상적 보편성을 전제하여 하나하나의 동일한 단위로서의 수적 동일성을 표현하고 있다. 라틴어 어원인 'individuum'에서 알 수 있듯이, 개인은 더 이상 '분할이 되지 않는(in-divide)' 최소단위로서의 원자(atom)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이러한 수적인 추상적 동일성에 근거한 인간관은 인간의 존엄성에 입각한 평등 이념의 실현을 의미하기보다는, 인간 가치의 양적인 균등으로 전락해가고 있다. 나아가, 실체로서의 인간 이성은 주체로서의 권력을 획득함으로써 타자를 소유와 지배의 대상으로서 정당화시킨다. 이것은 앞 절에서 제시한 기계론적 세계관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관리자로서의 인간위상을 고착시키는 근대의 인식을 반영한다.

3) 실증주의에 기반한 주지주의적 지식관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과 이성적 인간관은 주지주의적 지식관의 형성으로 연결된다. 지식이 한 시대의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다고 볼 때, 근대의 지식관은 근대의 세계관과 인간관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의 관점에서 형성된 지식관은 시대에 따라 특정한 의도와 목적을 담고 있음에도, 지식 그 자체를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역사적 발견의 산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과는 지식을 시대적 상황과 요청에 맞게 선별하고 조직한 것이 아니라, 유일하고 절대적인 지식을 담지하는 경전(經典)의 개념으로 고착된다. 교과는 학교라는 지식 전수의 실천적 장 속에서 학생들의 경험세계를 풍요롭게 하고, 지적인 자극제로서의 매개체라기 보다는 교육활동 전체를 주관하는 기준이며 핵심으로 자리하게 된다.

이렇게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을 체계화한 것이 교과로 간주된다면, 이러한 교과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과정은 필연적으로 기계적인 교수-학습의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지식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반영하기 때문에, 그러한 지식의 전달에 참여하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물화된 지식을 효율적으로 주고받는 기계적 관계 이상을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타일러의 교육과정 창안은 당시 19세기와 20세기의 경제구조의 변화를 반영한 것을 이해된다.{{ 타일러는 과학적 경영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통해 교육과정의 방법론을 네 단계로 완성하였다. W.F. Pinar. Understanding Curriculum. 김복영 외(2001). 교육과정 담론의 새 지평. 서울: 원미사, 135-136.
}}

당시의 산업사회로 접어든 초기에 대량생산 체제를 위해서는 효과적인 생산공정과 노동의 절차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실행방안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교육의 과정을 교육목적-교육내용-교육방법-교육평가의 획일적인 라인으로 구성함으로써, 최단기간에 최대이윤을 얻기 위한 중앙통제적 관리를 가능하게 한다.{{ 실제로 타일러의 '교육목적-교육내용-교육방법-교육평가'의 모형에서는 '교육'을 '생산' 혹은 '작업'이라는 말로 대체해도 무관할 정도로 생산공정과 경영관리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

이러한 효율적인 생산공정을 관리하기 위한 체계로서의 교육과정의 가장 큰 문제는 교사와 학생이 지식 자체의 생산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지식의 생산자라기 보다는 단순 유통업자로 표현될 수 있다. 권위있는 생산자들에 의해 제작된 지식은 견고한 통조림처럼 내용물에 관여할 수 없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지주의적 지식관의 문제가 학교교육의 문제로 반영되는 것은 주지주의적 지식관 자체의 한계성뿐만 아니라, 고도 선진산업사회의 상업적 자본주의와 결함됨으로써 교육의 변질을 가속화시켜왔다고 볼 수 있다. 마르쿠제는 선진산업사회가 기술적 합리성(technological rationality)과 실증주의(positivism)에 의해 지배된다는 점에서 '일차원적(one-dimensional) 사회'라고 규정지었다. 일차원적 사회는 물질적 풍요를 토대로 사회구성원들의 비판과 반대를 억제시키고, 지배와 통제를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사회를 말한다.{{ H. Marcuse(1964). One-dimensional Man. Boston: Beacon Press, p.Ⅸ-Ⅹ.}}

이러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피상적 지식으로 구성된 일차원적인 현실을 긍정하고 만족해하기 때문에, 현실 이면의 반대적, 이질적, 초월적 사유가 불가능하게 된다. 결국, 물질문명의 자연스러운 억압은 인간 사유의 고유한 가치인 현실 비판능력, 초월적 사유능력, 예술적 상상력을 포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일차원적 사회의 지식관의 한계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지식의 배경으로 자리하는 것이 바로 기술적 합리성 혹은 도구적 합리성(instrumental rationality)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관의 실증주의적 경향은 '원인-결과'로 통제되는 프로그램학습, 교사효율성, 측정과 계량화, 효율적 학교경영, 행정체계, 발달과 경험의 선험적 질서 등과 같은 기계적 인과성의 정당화로 이어진다. 따라서, 목표는 방법에 통합될 수 없고, 교육의 과정은 대화·탐구·변용의 과정이 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또한 사실과 가치의 차원이 분열되면서, 맹목적인 사실적 지식의 추구로 인해 본질적 가치에 대한 물음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목적과 수단, 가치와 사실, 경험과 지식이 분열되는 것은 실증주의의 가장 큰 과오로 평가되어 진다.

주지주의적 지식관은 지식의 가치중립성과 객관성을 내세우면서 인간의 세계에 대한 지배와 관리의 욕망을 드러낸다. 나르시스적 이성의 세계에 대한 소유의 욕망은 객관화된 체계로서의 지식 형태로 드러나지만 결국 통제와 조절로서의 세계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욕망의 자기전개 과정으로서 축적과 확장을 의미하는 이와 같은 지식관은 필연적으로 자비와 사랑이 결여된 무한 경쟁을 통한 지식획득의 학교교육 과정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

3. 불교적 교육패러다임의 현대적 의미

(1) 연기적 세계관과 생태적 생명인식
모든 생명은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불교의 동체대비(同體大悲)에 입각한 세계인식은 근대의 기계론적이고 요소환원적인 세계관을 극복할 수 있는 연기적 깨달음의 출발점이다. 모든 것이 인과 연에 의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에 입자나 요소와도 같이 독립적인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건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다는 '공(空)'에 입각한 존재의 자각은 분열이나 분절에 의한 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으로서의 유기체적 전체를 인식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까지 활성화되고 있는 서구 근대의 자기반성적 시도라 할 수 있는 해체론이나 포스트모던, 생태학적 환경담론 등은 마치 최근의 발견이나 새로운 인식인 것처럼 관심을 모으고 있지만, 그것은 불교의 연기적 세계인식에 대한 주석서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이 없듯이 탈근대 담론 역시 전혀 새로운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의 왜곡된 세계인식에 대한 불교적 깨달음의 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 교육을 지배하는 세계관 변화의 가장 큰 특징은 근대에서 상실된 유기적 우주의식을 복원하는데 있다. 유기적 우주의식이란 기계적·개체적·분절적 세계인식을 극복하기 위한 생태적(ecological)·관계적(relational)·영적(spiritual) 세계인식의 회복을 의미하는 전일적(holistic) 우주관을 의미한다. 전일적 우주관은{{ 홀리스틱은 홀리즘(holism: 전일론)에서 유래한다.

홀리즘은 전체를 의미하는 홀로스(holos)로부터 왔으며, 여기에서 파생되는 의미로 완전체, 통일체, 건강, 치유, 전체의, 신성한 등이 있다. 스머츠(J.C. Smuts)는 기존의 과학과 교육이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전체는 부분의 합 그 이상이다"는 주장을 하면서, 홀리즘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J.C. Smuts(1961). Holism and Evolution.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pp.85-87.
}}

연기적 세계관의 현대적 변용이라 할 수 있으며, 기존의 객관주의 인식론과 과학적 실증주의의 파편화된 원자론으로 인하여 교육과정이 세분화되고 분열되가는 환원적 인식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즉, 원자론적 인식에 기반한 교육은 인간의 삶과 인간 의식을 주변의 다른 모든 것들과 분리시킴으로써 분열과 분리에 의해 관찰되고 정리된 것이 마치 체계화된 진리로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달리, 전일적 차원에서 우주의 연관성에 주목한다는 것은 우주전체가 하나의 생명적인 일체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영적이고 생명적인 우주인식은 연기적 세계관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근대의 세계인식에서 제외된 전체로서의 생명 가치에 대한 각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각과 각성의 부재해 온 근대 이후의 세계인식의 문제는 전(全)지구적인 생태환경의 모순된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모순된 현실이라는 것은 인간이 생태파괴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된다는 점이다. 즉, 현재의 생태학적 위기는 인간의 위기인 동시에 인간 자신이 위기의 원인이 되는 점에서, 가해자이면서 피해자가 되는 모순적 현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관계망적 인식의 부재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다. 주관과 객관, 주체와 대상이 본래 구분될 수 없는 불가분의 전체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자기 회귀적 순환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던지는 모든 돌은 모두 나를 향한 것이고, 내가 쏘는 모든 화살은 나를 과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대상이 구분될 수 없듯이, 나와 전체는 분리될 수 없는 전체라는 전일적인 세계인식의 결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적인 회귀는 시간적인 동시성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모든 것이 인과 연에 의한 관계성의 총체라는 연기적 깨달음은 근대의 과학적인 인과성과 달리, 모든 것이 다른 것의 원인인 동시에 결과로 얽혀 있다. 모든 원인은 단지 직선적 시간에 획일적으로 널려 있는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전체로서 공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인은 결과를 낳고 결과는 원인을 낳는 동시인과적 체계를 이룬다.

부모는 자식을 낳은 원인이지만 부모없는 자식없고 자식없는 부모없듯이, 자식은 부모를 부모로서 탄생시켜준 원인이 된다. 마찬가지로 스승과 제자나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단선적 원인과 결과의 연계가 아니라, 동시인과적인 필연적인 만남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인과성이 동시에 탄생한다는 깨달음은 바로 전체로서의 유기체적 생명인식에서 우러나오는 동시인과적 전일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현대의 교육문제 해결은 결국 이러한 연기적 세계관에 입각한 생태적 생명인식의 자각에서 출발되어야 한다. 생명의 약동이 없이 기계적인 상호작용으로 설명되는 교사와 학생의 교육활동은, 수업이라는 절대시공 속에서 개별입자들이 상호작용한다는 근대물리적 세계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세계인식에 대한 회심(回心)이 없이는 어떠한 제도적·행동적 개편도 무의미하고 무책임한 시도로 전락될 것이다. 즉, '생태학적 각성'(ecological awakening)을 통해 자신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하나의 그물망으로서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동체대비적 인식이 교육적 인식의 유일한 출발이어야 할 것이다.

(2) 불성적 인간관과 초월적 인간인식
교육은 인간에 대한 신뢰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일종의 상식으로 자리한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교육은 정확히 말해서, 인간에 대한 신뢰라기 보다는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된다. 이성적 정신능력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이성 이외의 능력을 의식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인간이 갖는 다양한 능력들을 사장시켜 온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에는 '이성중심주의'가 내장되어 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근대적 자아의 이성적 자기 중심성은 마치 진보의 역사에 노정되어 있는 절대정신(Geist)처럼 모든 대상들을 자기 동일성 안으로 포섭하면서 지배하고자 한다.{{ 헤겔은 진보로서의 인간관과 역사관을 확고하게 정착시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진보라는 것은 의식의 점진적 발전을 뜻하는 것으로 규정되는 바, 실제로 인간이란 원시적으로는 세계와 자기를 몽롱하게 의식하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자체적 내지 대자적 존재로서의 자기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때까지는 경험적 인식으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차례의 점진적 단계를 거쳐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G.W.F. Hegel(1955). Die Vernunft in der Geschichte. 임석진 역(1980). 역사에 있어서의 이성. 서울: 지학사, 200쪽.}}

그런 의미에서 이성적 주체로서의 자아는 세계와의 합일을 관계성을 통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소유와 포섭을 통한 자기화로서의 전체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근대적 주체개념으로서의 '자아실현'(self-actualization)은 무한한 자기확장의 이념으로 해석될 수 있다.{{ 불교의 관점에서 근대의 사유는 인간자신의 자기중심적 사고를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지적한다. 틸리히가 "휴머니즘은 생의 자기창조적 기능(self-creative function)을 절대화시킴으로써 자기초월적 기능(self-transcending function)을 무시했다"는 비판과 동일한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다. 土居眞俊(昭和58년). 宗敎の人間學. 京都: 法藏館. 294-295頁.}}

이와 같은 근대적 주체개념이 갖는 이성적 자아중심성의 한계 극복은 이미 불성(佛性: Buddha-nature)으로서의 인간관에 구현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일체의 중생에게는 모두 불성이 있다"(一切中生 皆有佛性)고 함으로써, 인간에게는 불성이라는 본성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부처의 성품(性品)이 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박선영(1989). 불교의 교육사상. 서울: 동화출판공사, 88쪽.}}

따라서, 부처라는 인간상이 불교적 테두리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자"라는 보편적 가치의 인간상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불성이 '있다'는 것은 결코 고정 불변의 실체적 관념으로서의 '있음'이 아니다. 오히려 규정되어 질 수 없는 것으로서의 '무아'(無我)에 의한 공(空)으로서 설명되어진다. '있음'과 '없음'의 문제가 이처럼 모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구분하거나 단절시킬 수 없는 것을 이분법적 언어로 표현하는데서 오는 한계에 의한 것이다.

'본유(本有)'라는 표현도 결국은 불변과 영원함의 실체로서 포착할 수 있는 유(有)가 아니라, 일체의 고정관념을 극복한 무차별상으로서의 공(空)의 언어를 방편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박범석(2003). 인간본성에 대한 종교교육적 고찰. 종교교육학연구 제16집, 149-152.}}

여기서의 깨달음은 합리적 계산이나 판단에 의한 결과물이 아니라, 여여(如如)한 본래의 자기자신에 대한 자각과 각성일 뿐이다. 그것은 이성적 자기개념에 대한 집착도 아니며, 이성적 인간능력이라는 실체화된 어떤 것도 아니다.

따라서 불성이 '있음'은 이성이 '있음'과는 다른 존재론적 의미로서, 이성과 같은 실체적 입자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전통적으로 서구에 있어서의 실체(substance)의 어원은 "sub(아래에)"와 "stance(있는 것)"가 합쳐져서 감각적 세계, 혹은 현상적 세계의 아래에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이는 자연(physis)의 뒤에(meta) 있는 "존재"를 추구한다는 점과 같은 맥락에서 형이상학(metaphysics)적 사유의 대상이 되어 왔다. 결국 변화하는 현상계의 뒤에서 변화를 가능케하는 불변의 존재로서의 "실체" 개념이 전제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본질상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분리된 불변의 실체성이 전제되는 것처럼, "본성이 있다"는 것은 인간을 규정하는 실체로서의 본성이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이와는 달리 불성이 '있음'은 서구의 존재론적 맥락에서의 有와 無의 구분을 초월해 있다.초월하면서도 포함하기 때문에 공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된다. 이러한 공의 논리는 그것의 무규정성 때문에 "공이란 이것이다", 혹은 "불성이란 이것이다"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실체적 사유에 의하면, 시간적·공간적인 제약없이 불변하고 고정된 어떤 것을 전제하므로, 어떠한 시·공적 맥락에서이건 대상에 대해 "이것"으로 지칭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의 어느 한 단면을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분리하여 추상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 중도적 사유의 기본적 입장이다. 따라서, 불변의 고정된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이것이다"는 단정적, 규정적 지적이 있을 수 없으므로, "∼도 아니요, ∼도 아니요"라는 부정의 표현을 통해서 형상화시킬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있음'으로 실체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결국 상황(situation)과 맥락(context)에 따른 생성적이고 변용적인 차원에서 인식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생성적이고 변용적 차원의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은 결국 초월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데 가장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초월이란 자기 폐쇄적 한계를 넘어서서 자아의 진정한 자유인 동시에 해방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아의 긍정에 의한 무한 확장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부정(self-negation)과 자기포기(self-surrender)를 통한 대아(Self)적인 긍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초월은 자기동일적 나르시스도 아니며, 자기중심적 주체관념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또한 그 방향성은 '밖으로' 혹은 '위로'가 아니라, '안으로'·'아래로' 내려가는 내재성과 깊이(depth)의 은유를 담고 있다.
이러한 초월을 전제하는 공(空)에 입각한 불성의 개념은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끊임없는 부정을 통해 새롭게 자신을 비약시켜나가는 본질적인 자기교육의 과정임을 의미한다. 불교적인 체험적 현상, 특히 "깨달음"이라는 자각적 체험에서 방편적으로 사용된 언어들을 오늘날의 개념적 표현으로 다 설명할 수 없음은 너무도 분명하다.

다만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언어상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이들 개념들에 내재한 불교적 인식의 차원을 실천적 자각을 통하여 교육적 함의를 이끌어내는 일일 것이다. 특히, 인간이 누구나 불성을 지녔다는 확신은 인간의 향상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서, 학습자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관심을 환기시키는 교육적 이념이라 할 수 있다.

(3) 반야적 지혜관과 통합적 진리인식
앞서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과 불성적 인간관은 결국 통합적인 진리의식을 의미하는 반야적 지혜관으로 전환을 요구한다. 그것은 근대의 지식중심의 편협한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 교육관에 대한 대안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근대 이후의 지식은 지속적인 분화를 통하여 이전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양적인 축적을 이루어왔으나, 그 질적인 측면에서는 양적인 축적에 상응하는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객관적인 진리를 반영하고자 하는 지식의 실증적·가치중립성의 경향은 오히려 지식과 세계, 앎과 삶, 경험과 세계를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분리-통합의 역동적 전체과정은 분리와 배제를 통한 객관적 지식체계의 축적에 집중함으로써 전체로서의 통합적 인식은 자리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객관적인 것이 진리이고 그러한 진리를 반영하는 것이 지식이라는 근대의 지식관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은 키에르케고르의 교육관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개인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가 지식과 '어떻게' 관련을 맺는가의 문제라고 본다.

'어떻게'라는 의미는 시간의 차원에 속해 있으면서 영원한 진리를 '자기화'하려는 개인의 자세이며, '무한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자기갱신을 위하여 몸부림치는 개인의 자세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주관성이 곧 진리'라고 함으로써 지식의 객관적 성격의 문제를 재검토하도록 촉구하였다.

마찬가지로, 폴라니(M. Polanyi)는 객관적 지식관의 문제를 해소하고, 우주적 세계에 근원을 두는 인간사유로서의 전환을 '인격적 지식'(personal knowledge)이라는 관점에서 모색한다. 그는 모든 명시적 지식의 배후에는 암묵적인 차원이 내재하기 때문에, 편재해 있는 암묵적 요소는 결코 '과학적'인 기준에 의해 판단될 수 없음을 제시한다.{{ M. Polanyi(1958). Op. Cit., p.132.}}

따라서 객관적 지식에 관한 문제는 모두 주관적인 앎(knowing)의 문제로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가 의도하는 지식이나 주관은 통합적 인식의 측면을 반영하는 것이지 근대적 배타적 의미로서의 지식이나 주관이 아니다.

그의 암묵적 지식의 핵심적 역할은 '통합'(integration)에 있다. 통합에는 개개의 사실들과 부분적인 세목들이 관련된 전체로 인식되기 위해 요구되는 개인의 인격적인 참여의 노력들이 포함된다.{{ Ibid., p.139.
}} 그러므로 통합된 전체는 부분으로 환원될 수 없고, 기계적인 조합이 아니라는 점에서 유기적인 앎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의미 이해의 작용은 객관적인 우주를 비인격적으로 응시하는 것(looking at)이 아니라 '그 안에 머무는 것'(indwelling)이라고 말한다.{{ M. Polanyi(1967). The Tacit Dimension. Garden City: Doubleday & Company, Inc., p.18.}}

폴라니의 이러한 사유는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언어도단"(言語道斷)과 같은 불교적 사유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물론 폴라니에게서는 이러한 직접적인 의도를 확인할 수 없으나, 서구 사상사 전반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읽을 수 있다.

결국, 반야의 지혜를 대변하는 통합적 진리인식은 전체로서의 생명적 세계인식을 의미하는 생태학적 각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생태학적 각성을 위한 교육 방법으로 생태학적 문해력(ecological literacy)의 함양을 상정해 볼 수 있다.{{ D. W. Orr(1991). Ecological Literacy: Education for the Twenty-First Century. ed. by R. Miller. New Directions in Education. Brandon: Holistic Education Press, pp93-95.
}} 생태학적 문해력이란 복잡한 환경의 문제를 생물, 물리, 사회, 문화, 지역 등과 같은 다양한 측면들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다시 말해 '생명'을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생태중심 생명가치관(Eco-centred Life Values)을 확립함으로써 미래의 생태적 생활을 준비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의 세계관은 불교에서의 모든 생명에 대한 무차별적 자비심(慈悲心)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불교에서는 자비를 수준에 따라 전 우주적인 자비심인 무한편만(無限遍滿: anadhiso pharana), 한정된 영역에 대한 자비심인 한정편만(限定遍滿: adhiso pharana), 어느 한 방향을 향한 기도로서 방향편만(方向遍滿: dhiso pharana)의 세 가지로 구분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상호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기도는 전 우주의 모든 존재의 평안을 얻는 기도로서 시작된다. 전재성(1996). 불교사상과 환경문제. 동양사상과 환경문제. 서울: 모색, 117-118쪽.}}

생명의 가치를 중시하는 생태학적 문해력은 파편화된 교과교육의 위기를 생명관을 중심으로 통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지속적인 교육적 관심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교육이 이처럼 전일적인 관계성에 주목하는 것은 협소한 자기이해의 범위를 벗어나 우주적 생명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자각하기 위한 것이다. 생명의 관점에서 자기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성을 자각해 나가는 생태학적 자아(ecological self)의 성숙과정은 일종의 '생태학적 정체성'(ecological identity)이라 할 수 있다.{{ E. O'sullivan(1999). Transformative Learning, Educational Vision for the 21st Century. Toronto: Univ. of Toronto Press, p.229.}}

폭스(W. Fox)가 밝혔듯이, 생태적 관점에 기반한 정체성은 그 관계성 인식의 정도에 따라 개인적(personal), 존재론적(ontological), 우주론적(cosmological)인 정체성의 과정으로 구분된다.{{ Ibid.
}} 여기에서 뒤의 두 과정에 해당하는 존재론적이고 우주론적인 과정이 바로 '초개인적'(transpersonal) 초월의 과정인 것이다. 그것은 통합적 인식에 기반한 반야적 지혜를 통해 가능한 인간형성의 과정이다.
반야의 지혜를 대변하는 통합적 진리인식이란 깨달음을 의미한다.

통합은 획일지향의 통폐합이 아니라, 그 반대로 다른 것들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음에 대한 포용의 이념이다. 반야의 지혜란 지식을 통한 '채움'이 아니라 '비움'을 통한 충만으로서, '버림'을 통한 '얻음'이라는 '공'의 자각이다. 즉, 부분과 전체, 나와 세계, 생과 멸이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부정은 전체의 긍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의 앎이다. 즉, '나'가 없어진 세상에서 '나' 아닌 것이 없게 되는 화엄적 세계관에 관한 자각적 앎이다.

4. 결 론

이상의 교육패러다임 전반에 걸친 비판과 반성은 앞서 밝혔듯이 이미 불교에서 구현되어 있는 교육이념들이다. 단지 서구적인 시각에서 새로운 문제의식에 의해서 환기되는 것일 뿐, 불교의 세계와 인간과 인식에 대한 가장 근본이 되는 원리들이다. 그것은 현대의 교육문제 해결이 기존의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교육개편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총체적 깨달음을 전제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관 형성의 근원에서부터 불교적 교육이념을 재확인하고 발굴해내는 노력들을 필요로 한다. 물론 불교적 교육이념의 구현은 현대의 교육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해석들과의 긴밀한 연계와 논의를 통해 소통과 공존을 위한 통합의 장 형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반야의 지혜에 기반한 불교적 교육의 이념은 있는 그대로의 여여(如如)한 상태를 깨닫게 하는데 있다. 그것은 나의 마음과 대상세계가 다르지 않음에 대한 여여이며, 모든 만물이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음에 대한 여여를 의미한다. 그것은 욕망의 충족형태로서 지식을 소유하는 활동이 아니라, 자비에 의한 지혜 그 자체로 스스로 체화되어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대교육의 문제는 여여한 상태를 깨닫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근거한 지식과 그러한 지식을 통한 욕망실현이라는 자기반복적이며, 악순환적인 회로 안에서의 윤회를 거듭하는데 있다. 그러한 속에서 자아실현의 교육 모형은 인간 자신의 근원적 본성의 구현이라기 보다는 국가·사회적 필요에 의한 특정 노동력의 추출에만 매달리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근거한 "교육인적자원부"의 교육에 대한 인식은 결국 무한경쟁을 위해서 물적자원의 부족과 고갈의 문제를 인적자원으로 대체하겠다는 파괴적이고 착취적인 발상을 반영한다. 개개인은 마지막 하나까지 자신의 에너지를 다 쏟아내야만 하는 소모품적인 배터리로 전락된다. 이러한 구조적인 교육현실에서 우리가 어떠한 교육적 가치와 개선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말해야 할 것이다. 교육은 그 자체가 희망과 가치의 사업이기 때문이며, 어둠과 절망이 극심할수록 새벽의 깨침이 가까이 왔다는 소박한 바램 때문이기도 하다. ■

박범석
동국대학교 교육학과 학부 및 석·박사과정 졸업. 현재 동국대학교 강사, BK21불교문화사상사연구단 post-doc.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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