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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에 대한 선사상적 고찰 / 서재영
- 법계, 질서, 개체의 상호 관계성을 중심으로 -
[19호] 2004년 06월 10일 (목) 서재영 puruna@dreamwiz.com

* 본고는 2004년 4월 한국선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이며, {불교평론}의 지면 관계상 내용과 각주를 축약했다

1. 문제의 제기

산업사회 이후 인류는 성장과 풍요, 욕망과 소비라는 현란한 꿈을 좇아 질주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인류의 위기는 바로 그 같은 꿈을 좇는 욕망에 의해 잉태되었다.

문제는 그 꿈이 낙원을 향한 희망이 아니라 점차 악몽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 현대성이 처한 위기다. 자연을 파괴하며 급속하게 물질문명을 구축해 온 '서구의 지배적 세계관(Dominant western worldview)'은 자연을 무한하고 광대한 것으로 보았으므로 인류의 진보도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Carolyn Merchant, 허남결 역, {래디컬 에콜로지}, (서울:이후, 2001), p.129}}

그러나 거북한 포만감 속에서 인류가 발견한 것은 이제 물질적 성장중심주의로는 더 이상 인류의 생존이 지속 가능할 수 없다는 절박한 위기감이다.

이 같은 위기의 근저에는 인간중심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을 서로 별개의 존재라고 보고 인간에게 우월성을 부여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에 기초해 있다.{{ Bill Devall·George Sessions, Deep Ecology, (Salt lake city: Gibbs smith, publisher, 1985), p.65}}

이렇게 자연과 인간을 구분하는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s)적 사유의 특징은 인간과 자연, 남성과 여성, 서양과 동양 같이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 짓고 전자가 후자를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폭력적 계층질서를 낳는다는 점이다.{{ 이도흠, [원효의 화쟁사상과 탈현대철학의 비교연구] ({원효학연구} 제6집, 2001), p.272}}

다시 말해 인간을 자연보다 우위에 두고 인간을 중심으로 위계질서를 설정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정당화했던 것이 현대적 사유의 특징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처럼 사물을 이원적 대립항으로 분류하는 이분법적 사유방식을 '미개정신'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그 같은 미개정신은 여전히 인간의 문화에 깊이 자리잡고 있으며, 더구나 현대적이고 선진적인 사회에서조차 그대로 온존해 있다.{{ Stuart Hall, 전효관 외 옮김, {현대성과 현대문화} (서울:현실문화연구, 1996), p.354}}

환경위기를 초래한 사유의 핵심이 자연을 타자로 보는 이분법적 사유에 기초해 있다면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가치관의 전환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전지구적 환경파괴는 바로 인간중심적 성장중심주의와 같은 가치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태철학자들은 단순한 자연 보호의 차원을 넘어 세상을 보는 철학적 인식의 전환과 삶의 양식을 전면적으로 변화시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창한다.{{ Arne Naess, 'Deep Ecology and Lifestyle', (George Sessions, Deep Ecology for the 21st century, Boston: Shambhala, 1995), pp.259-261}}

즉, 기존의 인간 중심적이고 물질 중심적인 가치관을 지양하고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탈풍요의 시대(post-exuberant age)'를 열어 가야한다는 것이다.{{ Carolyn Merchant, 같은 책, p.129}}

이 같은 철학적 인식의 전환에서 중요한 문제가 바로 자연과 인간을 서로 다른 존재로 바라보는 이분법적 사유의 극복이다. 자연을 타자로 바라보는 이분법적 사유는 인간에 의한 자연의 착취를 아무런 도덕적 책임감 없이 무한대로 허용함으로써 생태적 위기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개체와 생태계의 관계성을 조망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가치관을 선사상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서양 철학은 플라톤 이래 주로 일자(一者) 즉, 동일한 것을 지향해 왔다. 이 같은 사유는 다자(多者)나 구별되는 것을 하나의 일자로부터 파악하려 한다.{{ H. 키멜레, 박상선 옮김, {데리다 철학의 개론적 이해} (서울:서광사,1996), pp.15-16}}

다시 말해 일자(一者)인 신(神)이 자연을 비롯한 모든 존재를 창조했으며, 인간은 그것들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신이라는 신성불가침의 권위로부터 자연을 지배할 권리를 인정받았다고 보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일방적 지배와 착취는 정당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역사학자 린 화이트(Rynn White)는 이 같은 기독교적 사상이 바로 환경 위기의 근원이라고까지 비판한다. 따라서 자연은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 이외의 어떤 존재이유도 없다는 기독교의 교리를 거부하지 않는 한 생태계의 위기는 계속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L. White, Jr., 이유선 역,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기원", {과학사상} 창간호, (서울: 범양사, 1992), p.295}}

화이트에 따르면 신은 도덕적 위계질서를 창조했는데, 거기에서 인간은 자연보다 우월하고, 자연을 지배하도록 신에 의해 명령받았다는 것이다.{{ 위와 같음.}}

이는 곧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할 수 있다는 인식과 더불어서 모든 존재를 인간을 중심으로 서열화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인간, 동물, 식물, 무생물과 같은 순으로 생명과 가치에 대한 도덕적 존엄성의 순서가 매겨졌다.{{ Joseph R. DesJardins, 같은 책, p.162
}}
오늘날 물질문명의 기저가 된 서양철학의 근간은 주체중심의 동일성에 대한 철학이다. 그러나 이 같은 동일성의 사유는 타자와 나를 구분하고 대립시키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의 담론을 형성한다.{{ 이도흠, 같은 글, p.289}}

이에 대해 본고는 자연의 모든 존재와 질서는 하나의 절대개념인 일자(一者)의 드러남이 아니라 수많은 개체들의 상호관계성임을 설명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자연과 우주의 질서가 신에 의해 설정된 수직적 질서가 아니라 모든 존재들의 업연(業緣)으로 성립된 수평적 관계성의 질서라는 점을 규명하려 한다. 이 같은 가치관의 확립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을 지배와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2. 생태적 전일론과 법계연기

1) 생태적 전일론(Holism)
생태계(生態界)에 대한 생태학적 통찰은 존재들이 머무는 생태계는 서로 밀접한 상호 관계성을 띤 세계라는 것이다. 그 관계성이란 생명체와 환경이라는 일차원에 머물지 않고, 개체와 개체, 생명과 무생물, 인간과 숲, 숲과 강처럼 전방위적 관계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태계는 하나의 시스템이며 개체는 그 시스템 속에서만 의미를 갖게 된다. 생태계가 이렇게 중첩된 관계성의 세계이기 때문에 호주의 철학자 워윅 폭스(Warwick Fox)는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 지을 수 있는 어떤 구분점도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Bill Devall·George Sessions, Deep Ecology, (Salt lake city: Gibbs smith, publisher, 1985), p.66}}

그러나 지구의 생태계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기 전까지 인간들은 자연 생태계의 모든 존재들이 상호관계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못했다.

오늘날 생태철학자들이 깨달은 것은 인간과 자연 생태계가 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같은 인식에서 출발하는 생태학은 지구라는 가족의 모든 구성원들을 서로 연결 지우는 관계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될 만큼 개체 존재들의 상호관계성이 중심적 주제가 된다.{{ Fritjof Capra, 김용정·김동광 옮김, {생명의 그물} (서울: 범양출판사, 1998), p.53}}

그러므로 생태학이라는 말은 '지구 가족(earth houeshold)'에 대한 연구로 이해되며, 생태계의 모든 존재와 그 존재들간의 관계성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된다.{{ Bill Devall·George Sessions, Deep Ecology, (Salt lake city: Gibbs smith, publisher, 1985), p.66}}

따라서 생태학은 생명체와 생명체의 상호관계, 생명체와 무생물적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생물학자나 동물학자와는 달리 생태학은 개별 생명 개체 보다 전체 생태계의 상호의존성과 존재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Joseph R. DesJardins, 김명식 역, {환경윤리}, (서울:자작나무, 1999), p.250}}

생태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독일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도 생태학을 '유기체와 그 유기체들을 둘러싼 외부 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과학'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Fritjof Capra, 같은 책, p.53}}

그러므로 오늘날 생태학은 단순히 인간의 풍요로운 삶이나 멸종 위기에 처한 개체 생물에 대한 연구에 한정되지 않고 수많은 존재들의 상호관계와 그존재들을 둘러싼 생태계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발전하고 있다.

자연 생태계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의 발전은 생명 개체를 다른 존재와 독립된 개체로 보지 않고 생태계 속에서 바라보는 생태중심적 윤리로 확장된다. 따라서 생태철학에서 말하는 '생명(Life)'이란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는 동물이나 식물 같은 생명체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Arne Naess, Ecology, community and lifestyle,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9), p.29}}

생태계(ecosystem)라고 했을 때 그것은 생물학자들이 '생명이 없는 것(non-living)'으로 분류하는 강, 풍경, 문화, '살아 있는 지구(the living earth)'와 같은 개념까지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근본생태론(Deep Ecology)에서는 생태학의 초점이 생명에 한정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생물권(biosphere)'이라는 용어보다 '생태권(ecosphere)'라는 용어를 제안하기도 한다.{{ 위와 같음}}

그 이유는 생명은 강, 바위, 에너지, 토양과 같은 생명 없는 것들로 인해 존재하기 때문에 생명을 의미하는 'Bio'보다 그것을 둘러싼 환경을 의미하는 'Eco'가 더 적절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생태중심적(ecocentric) 윤리는 인간과 같은 개체 존재나 생명 자체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 무생물이나 생태계(Ecosystem), 존재들의 관계와 과정에 대해서도 생명 개체와 같이 도덕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생태윤리는 자연물들 간의 관계, 무생물, 그리고 종과 생태계 등과 같은 생태적 '전체'에 대해서도 도덕적 지위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holistic)'적 입장을 취한다.{{ Joseph R. DesJardins, 같은 책, p.250}}

2)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세계
생태계(生態界)는 작게는 한 생명체가 가진 일정한 범위 내에서의 시스템적 관계성일수도 있고, 크게는 전 지구적 차원의 대기의 순환과 같은 것이 될 수도 있으며, 더 크게는 태양을 중심으로 한 에너지의 공급관계와 우주적 질서의 상관관계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이렇게 무한히 확장된 생명의 상호 의존적 관계성의 세계를 생태철학에서는 '생태계(Ecosystem)', '생물권(biosphere)', '생태권(ecosphere)'이라는 개념 등으로 표현하는데 이에 비견될 수 있는 불교적 개념은 '법계(法界)'라고 볼 수 있다.{{ Ecosystem은 생태계(生態系)로, Ecosphere는 생태권(生態圈)으로 각각 번역된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Ecosystem에 대해 법계(法界)의 개념과 맥이 상통하는 의미를 지닌 생태계(生態界)로 번역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선적 의미에서 볼 때 생명체와 환경의 상호관계성은 일정한 범위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생태계는 전 지구적 차원의 관계성을 말해주는 생태권(Ecosphere)으로 확장되며, 더 나아가 태양 에너지나 인력과 같은 우주적 차원의 관계성까지 포괄하는 생태우주(Ecouniverse)로 확장된다. 따라서 본고에서 사용하는 '생태계(生態界)'의 의미는 '하나가 곧 전체 우주[一卽一切]'라는 맥락에서 생태권과 생태우주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법계에 대한 개념은 초기 불교에서는 인식의 대상이 되는 18계를 의미했다.{{ {잡아함경} 권17, ({대정장}2, p.116a)}}

그러나 대승불교, 특히 화엄사상에 이르면 법계의 의미는 '진리의 세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가마다 시게오(鎌田茂雄)· 한형조 역, {화엄의 사상}, (서울:고려원, 1987), p.128}}

여기서 '법(法)'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사물[事]'이라는 의미와 '진리[理]'라는 의미가 함께 들어있는 개념이다. 현상적 존재는 곧 진리의 드러남이며, 진리는 곧 사물들 통해서 나타난다. 이렇게 진리가 사물을 떠나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사물은 법성(法性)을 지니고 있는 '법(法;dharma)'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는 법성을 지녔다는 의미에서 존재 일반을 '제법(諸法;sarva-dharma)'이라고 부른다.{{ {불교학개론}, (서울:동국대학교 출판부, 1993), p.68}}

이처럼 현상과 본체로 구분되는 법(法)에 대해 화엄사상은 사법계(事法界)와 이법계(理法界)로 설명한다. 사법계는 산천초목, 인간, 살아 움직이는 동물 등 모든 존재를 포괄하는 개념이며, 이법계는 이성(理性)의 세계, 공(空)의 세계, 본체의 세계를 의미한다.{{ 가마다 시게오, 같은 책, p.129}}

그러나 화엄의 법계관은 현상과 본체를 사법계와 이법계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법계와 사법계의 상호 소통과 관계성을 설명하는데 초점이 있다. 즉, 사법계와 이법계의 상호 관계성과 소통은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를 통해 설명되며, 개별 존재 사이의 원활한 소통과 관계성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를 통해 설명된다. 그런 점에서 법계란 현상과 본질, 개체와 전체, 개체와 개체들이 자유롭게 서로 소통되고 전환되는 세계를 의미한다.

법계에 대한 이 같은 개념은 선(禪)에서도 그대로 수용되고 있다. 승찬 선사의 {신심명}에서는 "바로 깨친 진여의 법계에는 남[他]도 없고 나도 없다."{{ {신심명} ({대정장}48, p.76)}}라고 노래한다. 즉 진여의 세계, 본체의 세계란 나와 남이 둘이 아닌 하나의 세계이며, 상호간에 자유롭게 소통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이 같은 법계의 개념은 오늘날 생태철학에서 바라보는 생태계의 상호 관계성의 개념이나 전일론적 세계관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법계는 곧 진리의 세계를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 그것은 광대무변한 세계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화엄경}에서는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집착과 구속이 없는 마음을 얻어 광대하기가 법계와 같고 궁극에 도달하기를 허공과 같이 되게 하겠다."{{ {대방광불화엄경} 권17, ({대정장}9, p.507 下).}}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문장의 문맥을 볼 때 법계의 의미는 '넓고 끝없는 세계'를 뜻하는 것으로 읽혀진다.

황벽선사의 {전심법요}에서도 "당장에라도 무심(無心)하기만 하면, 본 마음자리가 스스로 나타나서 밝은 햇살이 공중에 떠오르듯 시방법계를 두루 비추어 장애가 없게 된다."{{ {황벽산단제선사전심법요(黃檗山斷際禪師傳心法要)} ({대정장}48, p.380b).}}라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법계란 태양이 비치는 우주 공간으로 비유된다. 즉, 법계가 '진리의 세계'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라 넓고 광대한 현상의 세계로 그려지고 있다.

선종의 대표적인 어록인 {육조단경}에서의 쓰임새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혜능의 설법을 들은 위거(韋據)는 "훌륭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널리 원하옵나니, 법계의 중생으로 이 법을 듣는 이는 모두 일시에 깨쳐지이다!"{{ {단경(壇經)} ({대정장}48, p.341c)}}라고 찬탄하고 있다.

혜능이 법을 설한 곳은 중생들이 살아가는 사법계의 세간이다. 그의 설법이 미칠 수 있는 곳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바세계임은 분명하다. 이 같은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일반적으로 법계의 의미는 중생들이 살아가는 세계, 더 나아가 광대한 생태적 공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조록}은 이상의 개념보다 더 구체적으로 법계에 대해 정의하고 있다. 즉, 마조(馬祖)는 "다만 지금 움직이고, 머물고, 앉고, 눕는 일상과 인연 따라 중생을 이끌어주는 이 모든 것이 도(道)이니, 도가 바로 법계(法界)이며 나아가서는 항하사 만큼의 오묘한 작용까지도 이 법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마조록(馬祖錄)} ({만속장경(卍續藏經)} 199, 812a)}}라고 기술하고 있다.

마조는 법계 속의 개체와 그 개체의 행주좌와(行住坐臥)라는 모든 일상과 작용이 그대로 '도(道)'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도'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와 그 작용은 법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이처럼 마조는 모든 개체 존재들은 하나의 질서, 즉 도(道)이며 그 질서의 세계가 법계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법계는 그 속에 살아가는 항하사와 같은 수많은 개체와 행주좌와라는 그들의 작용을 떠나 있지 않는다. 그러므로 법계의 개념은 '진리의 세계'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모든 개체들과 그 개체들이 어우러진 질서의 세계를 곧 법계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법계란 모든 존재가 상호 관계성의 질서 속에서 하나의 통일적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생태계의 개념과 상호 맥락이 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 생태계의 상호 의존성과 인드라망의 관계성

하나의 생명체는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라는 전체를 통해서 드러난 것이므로 생태학에서는 개체에 대한 탐구를 넘어 이 같은 생태적 공간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존재들이 머물고 있는 공간이나, 생태계 역시 그 자체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공간은 공간 아닌 것들로 인해 비로소 허공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있음'과 '없음', '물질[色]'과 '공(空)'의 관계가 상호의존적 관계로 설정된다면 개체 생명은 생태적 환경 없이 스스로 있을 수 없으며[本不立有], 생태적 환경 역시 개체와의 관계를 떠나서 스스로 있을 수 없다[無亦不存]. 따라서 생태계와 개체 생명에 대한 올바른 성찰은 '있음'을 '있음' 그 자체로 이해하거나 '없음'을 '없음' 그 스스로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하고 '있음과 없음을 개별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不見有無]' 중도적 통찰로 귀결된다. 이처럼 있음과 없음이라는 현상은 성품(性品)이 공(空)한 것이며, 상호 의존적 연기성(緣起性)이기 때문에 무자성(無自性)이다.{{ {중논} 권4 ({대정장}30, p.33b)}}

'있음'과 '없음'의 관계성을 통해 터득할 수 있는 것은 우주의 상호관계성이다. 마찬가지로 생태학에서도 '환경 속의 인간(Man-in-Environment)'이라는 이미지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모든 환경과 개체는 동시적 관계성 속에서 서로를 형성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태학은 존재의 관계 속에서 모든 존재를 조망하는 전방위적 이미지(Total-field-Image)를 선호한다.{{ Arne Naess, 'The Shallow and Deep, Long-Range Movement: A Summary', (Alan Drengson, The Deep Ecology Movement: An Introductory Anthology, Califonia: North Atlantic Books, 1995), p.151}}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유기체들은 생물권이라는 그물 망, 혹은 본질적인 관계망의 결절점(結節點)으로 이해된다.{{ Arne Naess, 위의 글}}

개체와 생태계의 관계도 상호 의존적 관계성이며, 존재와 존재 사이의 관계도 상호 의존적 관계성으로 유지된다. 이 같은 우주적 관계성에 대한 불교의 사유는 {화엄경}에서 말하는 인드라망[因陀羅網]의 개념이다. {화엄경}에는 "모든 부처님은 그 지혜로 일체 법계가 인드라의 그물 같다는 것을 모조리 다 아신다."{{ {대방광불화엄경} 권31, ({대정장}9 p.597c)}}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 화엄학을 집대성한 중국의 현수법장스님도 {화엄소}에서 모든 존재의 끝없는 관계성에 대해 "제석천궁의 구슬 그물과 같아서 하나를 따르면 무궁무진한 일체와 통하게 된다."{{ {화엄소(華嚴疏)} ({대정장}36, p.75下)}}라고 설하고 있다.

지혜의 눈으로 보면 일체 모든 법계가 인드라의 그물처럼 서로 관계성에 의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드라망의 개념은 전 우주를 거대한 인드라의 그물로 이해하고 모든 존재는 인드라망의 씨줄과 날줄의 결절점으로 바라보는 통찰이다. 이 같은 화엄의 개념은 여러 선전(禪典)에서 존재의 관계성을 설명하는 비유로 수용되고 있다.

"연기의 도리를 막힘 없이 관찰하니 사물의 성품이 불가사의함을 믿게 된다. 그것은 마치 천상의 보배 궁전에 드리워진 진주 구슬과 같고, 신선 세계의 전각에 걸려 있는 구리 거울과 같다."{{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 ({대정장} 85, p.1286b)}}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를 연기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사물의 본성은 곧 불가사의한 상호관계성을 갖고 있다. 하늘 궁전에 드리워진 인드라(Indra)의 그물은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결절점에 영롱한 진주구슬이 매달려 있다. 그 구슬은 맑고 밝아서 한 구슬 속에 전체 모든 구슬이 반영되며, 전체 모든 구슬은 다른 모든 구슬들을 왜곡 없이 반영한다.{{ 성철(性徹), {백일법문(百日法門)}하, (합천:장경각, 1993), p.119}}

현수스님은 인드라망의 관계성에 대해 "이것이 저것을 포섭함으로 일체가 포섭되며, 저것이 다른 것을 포섭함도 또한 그와 같다."{{ {화엄소(華嚴疏)} ({대정장}36, p.75下)}}라고 설명한다.

이 비유에 나오는 영롱한 진주 구슬은 바로 법계에 존재하는 하나의 개체, 하나의 존재를 상징한다. 따라서 법계 속의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고 포함되어지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무궁 무진한 관계성을 띠고 있다. 이처럼 나와 남이 자유자재하게 서로 융섭(融攝)하는 것이 거대한 법계의 관계성이다.

"저것과 이것은 다르면서도 서로 드나들고, 붉은 구슬과 자주 빛 구슬은 빛깔이 나뉘지만 서로를 비춘다. 존재는 나와 남[自他]이라는 차별에 구애되지 않고 사물은 옳고 그른 구별을 문제삼지 않는다."{{ {능가사자기} ({대정장} 85, p.1286b)}}

인드라 망의 세계는 나와 남, 같음과 다름, 허공과 대지는 각기 다르지만 서로 의존하면서 서로를 드러내는 세계다. 붉은 구슬 속에 자주 빛 구슬이 비치며 자주 빛 구슬에는 붉은 빛 구슬이 비친다. 법계는 곧 모든 존재들의 드러남이자 표현이며 존재들의 자기 실현에 의해서 생성되는 세계로 볼 수 있다. 자연 생태계 역시 전체 생태계와 개별 생명 개체는 상호 유기적 관계 속에 있다.

"곧 개체가 그대로 전체요, 사물은 서로 드나들면서도 결코 혼동되지 않는다. 그 근거를 말하면, 현상은 그 스스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진실에 말미암는 것이며, 진실의 도리가 융합돼 있는 이상에는 현상도 역시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다."{{ {능가사자기} ({대정장} 85, p.1286c),}}

모든 존재들이 서로 상즉상입하는 질서가 바로 신비로운 관계성의 원리, 연기의 도리이며, 개체적 존재의 무자성성(無自性性)이다. 사물은 서로 다르면서 같고, 전체적 질서 속에 포함되어 있지만 각각의 특성을 지닌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따라서 개체가 그대로 전체가 되며 전체가 그대로 개체가 되어 상호 융합한다.{{ {능가사자기} ({대정장} 85, p.1286c)}}

이상과 같은 내용은 "하나가 곧 전체이며, 전체가 곧 하나"{{ {화엄일승법계도} ({한불전} 제2책, p.1)
}}라는 의상의 화엄적 세계관과 선사상이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엄사상과 선사상은 다 같이 하나의 개체를 전체의 부분을 이루는 부품으로 이해하지 않고 개체가 그대로 전체이며 진리라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개체는 단순한 개체로 머물지 않고 완전한 전체와 상통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모든 존재를 제법(諸法)이라고 부르는 불교적 세계관의 의미가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4. 법계는 하나의 진리로 통일된 세계

생태철학의 기본적인 통찰은 'Holistic World View', 즉 세계를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바라보는 전일론(全一論)적 입장이다. 따라서 생태학은 개체 자체보다 전체적 관계성에 주목한다.{{ Fritjof Capra, 'Deep Ecology: A New Paradigm', (George Sessions, Deep Ecology for the 21st century, Boston: Shambhala, 1995), p.20}}

전일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작은 미물에서 거대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들은 상호 관계의 질서 속에 존재한다. 이에 대해 모로비츠(H. Morowitz)는 모든 생명체는 '흩어져 사라지는 구조(dissipative structure)'라는 개념으로 존재의 관계적 질서를 설명한다. 예를 들어 시냇가의 물방울이 시냇물이 힘차게 흐를 때에만 존재할 수 있듯이 모든 존재들도 우주적 에너지의 흐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H. Morowitz, "Biology as a cosmological science," Main currents in modern thought 28(1972), p.156, (데자르뎅, 앞의 책에서 재인용)}} 따라서 모든 존재는 전체적 질서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불교사상에서도 모든 존재는 일정한 법칙 속에 존재하고 있다고 본다.{{ {잡아함경} 권12, ({대정장}2, p.48b)}}

불교는 바로 그 법에 대한 깨달음의 종교이며, 법을 설하는 가르침이다. 법(法)의 어원인 'Dharma'는 "유지하다, 보전하다"라는 동사 'Dh '을 어근으로 성립된 말로 우주의 원리, 보편적 진리를 의미한다.{{ {불교와 인간}, (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2), p.61}}

그리고 그 법이란 다름 아닌 관계성의 법칙인 연기법(緣起法)이다. 이렇게 모든 사물이 법칙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법주(法住, dharma-sthiti)'라는 말로 표현한다.{{ {불교학개론}, (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93), p.68}}

연기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전체는 개체와 다르지 않고 개체 역시 전체와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개체는 또한 개체로써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전체와 개체가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으면서 모든 개체는 전체의 질서 속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선사상에 나타난 세계관은 법계를 하나의 통일된 질서의 세계로 바라본다.

"문수가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합니까?'라고 물었다. 부처님께서 대답하기를, 법계의 세계는 하나의 모양이다[法界一相]. 그러한 법계의 세계에 대하여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 {능가사자기} ({대정장} 85, p.1286c)}}

법계의 세계란 다양한 개체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반대로 그것은 또 하나의 통일된 질서를 갖고 있다. 수많은 개체로 구성된 법계가 하나인 것은 하나의 진리가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능가사자기}는 법계가 하나라는 사실을 올바로 직관하는 것이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모든 법계는 하나의 진리가 드러남이기 때문에 삼라만상은 모두 진리의 표현이다. 그것은 마치 존재하는 모든 생물이 태양의 에너지를 받고 생존해 가는 것처럼 삼라만상도 하나의 진리의 투영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 같은 진리의 속성은 흔히 살아 있는 모든 생물에게 생장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태양에 비유된다.

"은빛 세계가 그대로 금빛 부처님의 몸이며(白銀世界金色身)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이 모두 다 같은 진리이다.(情與無情共一眞)
밝음과 어둠이 다했을 때는 모두 비치지 않다가(明暗盡時俱不照)
오후의 태양에 온몸을 보이도다.(日輪午後示全身)"{{ {임간록(林間錄)} 상, (합천:장경각, 1990), p.133
}}

이 노래는 {임간록(林間錄)}에 게재된 수산성염(首山省念) 선사의 게송이다. 비록 중생의 눈에는 은빛의 세계로 보이지만 그 세계는 그대로 금빛 부처님으로 이해된다. 모든 존재가 '다 같은 진리[一眞]'로 이해될 때 삼라만상의 존재들은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긍정된다.

그 가치는 생명 있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이 모두 참다운 일법(一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의 진리는 차별 없이 빛을 발산하는 태양에 비유된다. 빛이 없을 때는 은색도 금색도 없지만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한 낮에 이르러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태양은 생명과 생명 없는 모든 존재를 제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진리로 비유되고 있다.

선어록에 나타난 이 같은 비유는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는 곧 하나의 진리가 드러남이라는 사실을 '태양의 빛'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제각각의 모양과 빛깔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어두운 밤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오직 태양의 빛을 받을 때 비로소 각각의 개별성이 드러나게 된다. 모든 존재 역시 각각의 개별적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법계의 질서 속에서 비로소 각자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빛과 어둠의 관계를 통한 이 같은 비유는 {황룡록}에서는 보다 은은한 시각적 은유를 담고 있는 달빛으로 대체된다. 즉, {황룡록}에서는 삼라만상이 모두 하나의 달빛이 드러난 존재라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달빛이 의미하는 것은 태양과 같은 통일적 진리를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태양이든 달이든 이 같은 비유의 핵심은 개별적 존재는 전체적 질서 속에서 비로소 개체적 특성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산하대지의 모든 존재는 하나의 빛에서 나타난 그림자로 이해된다.

"손바닥의 마니 구슬은 갖가지 색깔 따라 빛이 나뉘고, 하늘에 걸린 보배 달은 천 강에 달 그림자를 드리운다. 여러 납자들이여! 한번 묻고 한번 답하며, 방망이 한 대, 할 한번 하는 것이 다 빛 그림자이며, 밝고 어두우며 잡고 놓아줌이 다 빛 그림자이며, 산하대지(山河大地)도 빛 그림자이며, 일월성신(日月星辰)도 빛 그림자이며, 삼세(三世) 모든 부처님과 일대장교(一大藏敎), 나아가서는 모든 큰 조사와 천하의 훌륭하신 화상과 문 두드리는 기와 쪽 따위 천차만별(千差萬別)까지도 모두 다 빛 그림자이다."{{ {황룡사가어록(黃龍四家語錄)} ({속장경} 120, p.190b) }}

법(法)의 성품은 마치 천 강에 두루 모습을 나타내는 달과 같다. 하늘에 걸린 달은 큰 바다에도 드러나며, 강과 시내에도 드러나며, 깊은 우물 속에도 드러나며, 심지어 낙엽에 고인 한 방울의 빗물에도 드러난다[一月普現一切水]. 물이 고인 그릇의 형태와 크기는 저마다 다르지만 그 속에 비치는 달빛은 모두 하나같이 둥글다.

달빛을 머금은 모든 강과 우물은 개별적 존재를 의미하며, 그 속에 비친 은은한 달빛은 하나에서 기원한 진리 또는 질서를 의미한다. 따라서 천 강에 비친 달빛은 모든 존재가 참다운 진리를 반영하고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존재일지라도 달을 담아 낼 수 있는 이상 그것이 비록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하나의 통일된 우주적 진리를 함축한 완전한 법계가 된다[一切水月一月攝]. 의상은 이 같은 관계성에 대해 "작은 티끌 속에 시방의 우주가 들어 있다"{{ {화엄일승법계도} ({한불전} 제2책, p.1)}}라고 표현한다.

하나의 진리(一眞)로부터 모든 존재가 비롯되었다는 것은 역으로 모든 존재가 달빛을 받은 천강(千江)의 물결처럼 그대로 진리라는 뜻도 된다. 그래서 존재의 행위, 즉 묻고 답하고, 방(棒)과 할(喝) 같이 모든 몸짓과 동작이 그대로 진리의 드러남이 된다. 뿐만 아니라 산과 강과 대지와 같이 인간이 보기에 생명이 없는 무정물 역시 진리의 드러남이며[山河大地是光影], 더 크게는 태양과 달과 별과 같은 천체까지도 진리의 드러남[日月星辰是光影]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하나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일원(一元)의 세계이다. 그리고 이 같은 진리는 존재의 모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즉, 삼세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광대무변한 진리의 말씀과 천하의 뛰어난 조사와 화상의 가르침으로까지 확대된다. 따라서 우주의 모든 존재와 작용은 미물에서 일월성신과 전 우주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진리라는 인드라망의 통일성에 도달하게 된다.

5. 법계의 질서와 개별 존재의 관계

법계라는 개념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관계망이며, 그 같은 관계성의 질서에 의해 유지되는 곳이다. 선사들은 이 같은 법계를 그대로 진리의 현현(顯現)이자 법신(法身)이라고 이해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 법계는 그 대로 법신과 진리 그 자체가 된다.

하늘과 땅과 삼라만상에서(乾坤幷萬象)
지옥과 천당에 이르기까지(地獄及天堂)
모두가 다 진리의 드러남이니(物物皆眞現)
각각의 존재가 조금도 모자람이 없네.(頭頭總不傷){{ {운문광진선사광록(雲門匡眞禪師廣錄)} ({속장경} 118, p.390)}}

모든 존재가 살아가는 거대한 생태계는 '하늘(乾)'과 '땅(坤)'이다. 이는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무(無)와 유(有)의 관계성이다. 운문은 무와 유로 직조된 하늘과 땅이 모두 진리의 드러남[眞現]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늘과 땅은 더욱 확장되어 인간의 인식 영역인 천당과 지옥까지도 진리의 드러남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하늘과 땅이라는 생태계는 진리의 몸, 즉 법신이 된다. 이는 "하얀 은빛의 세계가 그대로 금빛 부처님의 몸"이라고 노래한 수산성염(首山省念) 선사의 통찰과 맥락을 같이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전 법계가 하나의 진리의 드러남이라는 표현은 다소 추상적이다. 이에 대해 {현사록}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눈앞에 펼쳐진 모든 존재가 곧 진리의 작용이라는 동적(動的) 이미지로 그려낸다.

"말이 오고 말이 가면서 백호광을 누르니(言來言去鎭毫光)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이 여여한 그대로여라.(現前施說只如常)
펴고 말아들이는 큰 작용 모두 자재하니(大用卷舒皆自在)
작은 티끌에서 국토에 이르기까지 향기로 가득하다.(塵塵刹刹顯芬芬)"{{ {현사록(玄沙錄)} (합천:장경각, 1991), p.133}}

눈앞에 펼쳐진 삼라만상은 그 자체로 여여(如如)한 진리의 세계로 긍정된다. 작은 티끌에서 전 국토에 이르는 모든 세계는 하나같이 절대적 공간으로 긍정되며 '큰 작용'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큰 작용[大用]'이란 전 우주의 근원인 법신의 작용이며, 삼라만상의 질서로 이해할 수 있다. 운문은 "두두 물물이 모두 진리의 나타남(物物皆眞現)"{{ {운문광진선사광록} ({속장경} 118, p.390)}}이라고 바라봄으로써 우주의 질서에 대해 {현사록}보다 능동적으로 이해한다.

운문에 따르면 거대한 국토에서 작은 티끌에 이르기까지 눈앞에 펼쳐진 삼라만상은 모두 진리의 현현이자 큰 작용이 미치는 곳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큰 작용의 원리 아래 존재하는 곳이며, 전체와 부분이 커다란 질서와 작용으로 통합된 전체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큰 작용, 큰 질서의 범위 속에 존재하는 전체 우주는 작은 먼지에서 산하대지와 국토에 이르기까지 모두 진리의 드러남이 된다.

삼라만상이 진리의 드러남이고, 진리의 작용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면 그 진리는 과연 무엇인가? 이 같은 진리에 대한 이해는 자칫 잘못하면 형이상학적 존재에 초월적 힘과 권능을 부여하고 수많은 존재와 생명체를 대상적 객체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서구적 전통에서 보듯이 모든 존재의 기능적 서열화를 초래하고 삶을 초월적 질서에 끼워 맞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만약 화엄과 선사상에 나타난 이 같은 '하나의 진리[一眞]'라는 개념도 자칫 잘못하면 그 같은 초월적 개념으로 오해될 소지를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선어록에서는 그 진리가 개체를 떠나 있는 초월적 진리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법신(法身)은 모습이 없어 사물에 따라 형체를 나타내며, 반야(般若)는 앎이 없으나 인연을 만나면 즉시 비춘다."

그리고는 불자(拂子)를 일으켜 세우면서 말씀하셨다.

"불자를 일으켜 세움을 법신이라 하니 어찌 이것이 사물에 따라 형체를 나툼이 아니랴. 불자를 눕히는 것을 반야라 하니 어찌 이것이 인연을 만나 즉시 비춤이 아니랴."{{ {황룡사가어록} ({속장경} 120, p.188b)}}

서구적 형이상학에서는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써의 진리는 지상에 존재하는 인간이나 생명과는 아무 관계없는 초월적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나 선(禪)의 입장에서 보면 우주를 총괄하는 진리와 작용은 초월적이지 않다. 그 법은 인간을 떠나 있지 않으며, 동물을 떠나 있지 않으며, 식물을 떠나 있지도 않고 더군다나 생명 없는 돌이나 불자(拂子)와 같은 무정물(無情物) 마저도 떠나 있지 않다.

황용은 '법신이란 어떤 정해진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다[法身無相]'라고 간파한다. 그 법신이란 '사물에 따라 형체를 나타낸다는 것[應物現成]'이다. 따라서 숫한 생명들과 사물을 떠난 초월적 법이란 존재치 않는다. 그 법은 인연을 만나면 즉시 비추는 법이다. 인연이란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므로 우주의 진리란 곧 관계성의 법이 된다. 그 법은 존재를 떠난 곳에 있지 않으며, 그 법의 성질은 초월적이지 않다. 존재하는 그것이 곧 법을 함축한 것이며, 그 존재들의 관계성이 곧 법임을 말하고 있다.

결국 이 우주의 궁극적 법이란 곧 개개의 모든 존재들에게 있고, 상호 관계하며 존재하는 삶의 모습 속에 있다. 그러므로 전체 우주의 삼라만상을 통일하는 하나의 법은 존재들이 만들어 내는 관계성의 법이며, 상의성(相依性)의 법이며, 상호 작용성의 법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어느 날 현사(玄沙)스님께서 설봉(雪峰)스님을 모시고 있는데 설봉스님이 눈앞에 있는 화로를 가리키면서 "삼세 제불이 모조리 이 속에서 설법하시면서 대 법륜(法輪)을 굴리신다."{{ {현사록} (서울: 장경각, 불기 2535) p.181}}라고 했다.

전체 우주가 하나의 진리의 드러남이며, 그 진리가 존재들의 상호관계성에서 성립되는 것이라면 그 진리의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대로 진리가 되며, 화로 속의 불타는 불꽃 역시 법신의 작용이 된다. 따라서 이런 법은 존재를 떠나서, 눈앞의 초목과 동물과 산하대지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법은 삼라만상의 사물이 없는 초월적인 단절의 질서가 아니라 존재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사는 '제불은 바로 화로 속의 불꽃으로 설법한다'고 한다. 제불은 화로 속의 불타는 존재들의 작용을 떠나서 설하지 않고 모든 존재들의 모습을 통해 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로 속의 불꽃이라는 개체의 작용은 곧 우주의 '큰 작용'이자 법신의 작용이다. 제불의 설법이 존재들의 법을 떠나 있지 않는다면 제불은 역으로 이 존재들의 법을 듣기도 한다. 그래서 {운문록}은 제불이 삼라만상의 설법을 듣는다고 설한다.

"삼세(三世) 제불(諸佛)이 불꽃 위에서 큰 법륜(法輪)을 굴린다"하신 설봉스님의 말씀을 들려주고는 말씀하셨다. "불꽃이 삼세 모든 부처님에게 법(法)을 설하니 삼세 모든 부처님이 제자리에서 법을 듣는다."{{ {운문광진선사광록} ({속장경} 118, p.355b)}}

진리를 설하는 부처님이 사물의 작용에서 드러나는 법을 듣는 다는 것은 부처님의 진리가 사물의 작용과 존재 그 자체를 떠나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제불이 설하는 법은 존재와 그 존재의 작용을 떠나 있지 않다. 그런 고로 제불도 사물의 작용이 설하는 법을 듣는다. 여기서 '삼라만상은 진리의 드러남'이라는 명제는 역으로 '진리는 삼라만상에 의해 성립된다'라는 명제로 전환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진리와 삼라만상의 존재가 둘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꽃과 같이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의 범주를 벗어난 자연 현상도 진리의 드러남으로 인식된다.

"온 누리가 다 큰 빛인데 무엇을 자기(自己)라고 하겠느냐? 그대가 빛을 알아버렸다면 경계도 성립하지 못하는데 무슨 똥 같은 빛이니 경계가 있으랴."{{ {운문광진선사광록} ({속장경} 118, p.356a)}}

운문선사는 모든 만상(萬象)은 빛의 드러남이라고 했다. 삼라만상은 진리의 드러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진리는 존재를 떠나 있지 않고 존재와 빛은 의존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기에 빛은 대상화된 경계를 비추지 않는다. '온 누리가 모두 큰 빛(盡大地是光)'이기 때문이다. 일체는 그 자체가 빛이기 때문에 더 이상 비추고 드러낼 대상도 설 수 없다. 여기서 초월적 빛과 그 빛의 반영이라는 수동적 존재의 관계성은 해체된다.

이처럼 '사물에 따라 형체를 나타내는 법'이라는 통찰은 결국 초월적 실재로서의 법이 아니라 법은 사물과의 관계성 속에서 형성되며 존재들이 만들어 내는 법이라는 의미를 획득한다. 법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은 선사상의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는 {금강경}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읽은 수 있는 대목이다. {금강경}에서는 법이란 강을 건너는 뗏목에 비유된다.{{ {금강반야바라밀경} ({대정장} 8, p.749c}}

그러나 법은 어떤 고정된 상(相)을 갖는 법이 아니다. 그 이유는 법이란 바로 '사물에 따라 형체를 나태는 것'이라는 {황룡록}의 논지를 통해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 졌다. 따라서 실체하는 법이 있다거나, 삼라만상을 지배하는 법이 있다는 법에 대한 실체론적 사유는 해체된다. 그렇다고 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초월적이며 실체화된 법은 없지만 사물과 사물들이 관계를 통해 형성해 가는 법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에 따라 드러나는 법'이라는 개념은 의상의 법성게에서 말하는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인연 따라 이룬다[不守自性 隨緣成]'{{ {화엄일승법계도} ({한불전} 제2책, p.1)}}는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모든 존재는 관계성의 존재이기 때문에 독립된 개체로써의 자성을 고집하지 않는다[不守自性]. 존재는 연(緣), 즉 수많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자기를 드러낸다[隨緣成].

이처럼 초월적이며 실체화되지 않고 '사물에 따라 성립되고', '인연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隨緣成]'을 {금강경}에서는 '무유정법(無有定法)'으로 표현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묻기를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는지 또는 여래는 정해진 원리와 같은 진리를 설했는가를 질문하자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제가 알고 있는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일정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여래께서는 일정한 법을 설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모두 들어서 취(取)할 수 없으며, 또 말해질 수 없고 법이 아니며 법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 ({대정장} 8, p.749c)}}

수보리가 이해한 불법은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 만한 법이 따로 있다고 설하지 않는다'라는 것과 '여래는 어떤 정해진 초월적 법을 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법은 황룡이 말하듯이 '응물현성(應物現成)'이기 때문에 정해진 법이 아니라 사물에 따라 이루어지고 드러나는 법이다. 따라서 그 법은 정해진 모습[相]으로 취(取)할 수 없고 언어적 명제로 정의될 수도 없다. 그래서 여래는 고정된 원리로 확정된 법을 설하지 않는다.

{화엄경}에서도 "모든 세계는 생명의 업력(業力)에 따라 생긴 것이다."{{ {80권 화엄경} 권6({대정장} 10, 38b)}}이라고 설한다.

세계 자체가 어떤 초월자에 의해 창조되거나, 어떤 초월적 질서와 법이 있어서 완벽하게 만들어진 다음 아파트에 입주하듯이 생명체들이 그 속에 들어가 산다라는 것이 세계와 그 속에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오해였다. 그러나 {화엄경}은 그 같은 사유자체를 무너뜨린다. 모든 국토는 그 속에 살아가는 중생들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따라서 "모든 국토는 모두 중생들의 업력을 따라 생긴 것"이라고 단언한다.

6. 끝맺는 말

본고는 생태계의 개념을 불교의 법계의 개념을 통해 이해하고자 했다. 불교에서 법계라는 개념은 초기 아함에서 선사상에 이르기까지 전체 우주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돼 왔다. 법계와 생태계가 비교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즉, 법계는 인드라의 그물로 비유되는 세계로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된 관계성의 질서로 바라본다. 생태계라는 개념 역시 상호 의존적 관계성과 상호작용으로 유지되는 시스템적 구조를 의미한다. 따라서 생태계는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총합이 아니며, 개체들은 전체로부터 분리될 때 개체의 특성은 상실된다.{{ Fritjof Capra, 'Deep Ecology: A New Paradigm', (Deep Ecology for the 21st century, Boston: Shambhala, 1995), p.23}}

부분들은 전체의 맥락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생태계라는 시스템적 사고에서는 전체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조직원리에 주목한다.{{ Fritjof Capra, 김용정·김동광 옮김, {생명의 그물} (서울: 범양출판사, 1998), p.49}}

따라서 법계와 생태계라는 개념은 모든 존재가 상호 연결된 세계이며, 상호 작용하는 세계라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질서한 세계가 아니라 진리로 표현되는 질서의 드러남이며, 시스템적 구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계와 생태계의 질서란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개체들의 관계성이 빚어낸 질서다. 법계와 생태계가 가진 이상과 같은 개념들에 대한 통찰을 통해 생태적 위기를 초래한 가치관의 오류와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다음과 같은 철학적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다.

첫째, 법계라는 개념으로 볼 때 모든 존재는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전일론적(全一論的) 관계성의 세계 속에서 존재한다. 존재의 이 같은 관계성을 화엄과 선에서는 인드라망으로 이해되고, 생태학에서도 동일한 개념, 즉 모든 존재는 관계성의 결절점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개체는 법계와, 생태계와 같은 전체적 관계성 속에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함으로써 환경 파괴의 기저에 깔려 있는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를 극복할 수 있는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다.

둘째, 법계는 '하나의 진리[一眞]' 또는 '법(法)'이라는 질서에 의해 유지되는 세계라는 점이다. 서구적 사상전통에서도 세상을 지배하는 모든 질서를 일자(一者)의 드러남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써 일자는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이지만 선(禪)에서 바라보는 법계의 질서는 바로 수많은 존재들의 관계성 속에서 구성되는 질서를 말한다. 모든 존재와 개체의 관계성이 곧 법계와 생태계를 유지하는 질서를 낳은 것이므로 모든 존재들은 그들이 가진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를 확인 받게 된다. 이 같은 통찰은 신으로부터 자연을 지배할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존재에 대한 위계적 가치관과 자연은 인간에게 유용할 때만 가치가 인정된다는 세계관을 극복할 수 있는 윤리적 근간이 된다.

셋째, 지배적 세계관의 오류는 생태계와 그 속에 살아가는 생명체를 서로 분리된 존재로 바라보는 이분법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법계와 생태계라는 개념은 모든 존재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작용하는 관계성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 같은 사유는 곧 이분법적 가치관을 극복할 수 있는 철학적 통찰이 된다. 다시 말해 자연과 인간이 둘이 아니라는 통찰은 자연에 대한 일방적 착취와 파괴를 극복할 수 있는 윤리적 가치관이 된다.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바라볼 때 환경을 살리고자 하는 인간의 실천은 동체대비(同體大悲)와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종교적 실천으로 승화된다.

서재영
동국대 선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동국대 강사이며 의상·만해연구원 연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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