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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시기 제주도 불교계의 피해 현황과 분석 / 한금순
세미나 중계
[19호] 2004년 06월 10일 (목) 한금순 제주불교사연구회연구원

1. 들어가는 글

제주불교는 제주4·3사건으로 시작된 한국전쟁 시기에 종교 활동 자체가 중단되는 시련을 겪어야했다. 그것은 왜색 불교 청산, 불교 의식 개혁을 위한 활동과 인적자산 등 제주불교 전반에 걸친 손실로 나타난다. 나아가 이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풀어야할 과제로 남아있다.

1945년 해방을 맞은 불교계의 최대과제는 '왜색 불교의 청산'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제주에서도 '조선불교 혁신 승려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는 18-19세기 무불(無佛)의 시대를 깨치고 1908년 관음사가 창건된 이후 1924년 '제주불교협회'와 1939년 '제주불교연맹' 등을 통한 그간의 활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친일을 반성하여 왜색화 된 불교풍토를 정화하고 의식을 개혁 하고자하는 역량과 의욕을 보여주었다.

제주불교계는 이 대회로 제주도 교구 교무원을 만들어 본사가 없는 제주도내에서의 활동을 하나로 결집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는 한국전쟁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4·3사건에 휘말려 제대로운 활동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또한 제주불교 활동을 이끌던 주요 승려들의 희생과 사찰의 피해도 물론 치명적이어서 종교적 활동이 중단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제주도의 4·3사건의 영향은 제주사회 전반에 걸친 만큼 불교계에도 커다란 것이었다.

따라서 이번 조사는 제주4·3사건에서 시작된 한국전쟁시기 제주불교계의 피해 상황을 조사 정리해냄으로서 제주불교계의 친일 청산과 의식개혁을 위한 노력의 좌절, 또한 제주불교 통합 교구 창설의 좌절은 물론 인적 자산의 상실로 종교적 활동 자체가 중단되는 지경에 이르렀던 상황을 규명해내고자 함이다.

당시 불교계는 제주사회 상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조선불교혁신 제주승려대회'의 대회준비위원장으로 의안결정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이일선은, 4·3사건 발발의 원인이 되는 1947년 '3·1절 기념 투쟁 제주도 위원회' 활동은 물론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공동의장으로 활동하였다. 4·3사건이 발발하자 입산하여 무장대 활동에 적극 나서는 이세진, 제주승려대회 부의장이었던 원문상, 관음사 주지로 제주불교의 대표자인 오이화 등이 4·3으로 희생되었다.

또한 제주불교 교무원은 3·1사건으로 인한 희생자 유가족 조위금 모집에 제주신보에 조위금을 기탁하였다. 이러한 불교계의 활동은 당시 제주사회에서의 제주불교의 활동상과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것임에도 그동안 제대로운 조명을 받지 못하였음은 물론 연구마저 미흡한 실정이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시기 제주불교는 물적 재산과 인명의 피해는 물론 근대 이후 이어져온 제주불교계의 계획과 염원 자체가 좌절되는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심각한 피해로 인해 각 사찰의 내력 또는 제주불교 전체의 역사를 증명할 수 있는 문서 또는 인물마저 희귀한 실정이다. 이러한 악조건 하에서도 본 연구회는 생존자를 중심으로 한 증언 채록과 얼마 남아있지 않은 자료를 모으고자 하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2003년 10월 15일 제주4·3사건 진상 정부보고서가 확정되었고 10월 31일 국가차원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었다. 제주 4·3 특별법에 따라 진행되어온 정부차원의 진상조사 결과이다. 4·3사건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규정 되었다.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3만여 명의 주민이 희생되었으며 이들의 80%가 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었다. 이는 이승만대통령의 강경진압에 의한 것임을 입증해내어 4·3은 국가의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규정되었다.

제주4·3사건의 연구는 이제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로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이었음을 규명하는 데에 까지 이르러 있다. 그러나 제주불교계의 4·3사건 피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아직도 전무한 상태인 현실이다. 이번 조사는 이러한 제주불교계의 한국전쟁 시기의 피해에 대한 1차 자료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려한다. 향후 보다 전문적인 연구를 위한 초석이 될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라는 긍지로 이 조사에 임하였다.

우선, 제주에서의 한국전쟁 시기의 피해는 1948년 4·3사건으로 인한 피해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제주4·3사건 진상 정부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은 1947년 3·1절 발포사건으로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 전면 개방까지이다. 4·3사건 발발 이후 한국전쟁 휴전 다음해까지 제주에서의 4·3사건과 한국전쟁은 길고도 힘든 시기였다.

모스크바삼상회의의 신탁통치나 단독 정부 수립 등으로 인한 시대적 갈등은 제주에서도 같은 양상으로 나타났다.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움직임들이 3·1절 기념 투쟁을 기점으로 희생자가 발생하고 미군정과 우리 정부의 통치의 문제점으로 인해 4·3사건은 발발했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될수록 점차 내전의 양상으로 바뀌어, 결국은 좌익과 우익이라는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포장되어버리면서 한국 전쟁으로 이어져 큰 피해를 남기게 되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4·3사건을 좌익과의 싸움이었다고 기억한다. 이는 사건 발생의 원인을 잊어버리고 사건 전개과정에서 강자에 의한 왜곡된 의도만을 기억하고 있는 결과이다.

따라서 이번 조사는 1차 자료 발굴로서 크게 사찰의 피해와 인명피해를 조사 정리하였다. 사찰의 피해에서는 지역별피해, 사찰별 피해 및 피해 시기와 복원 현황을 조사하였다. 인명피해는 4·3사건 시기의 직접적 피해자 가운데 스님들만을 대상으로 조사하였다.

조사 정리 과정에서 계속 사용하게 될 토벌대와 무장대라는 용어에 대해 여기서 정리해 두려한다. 제주 4 · 3사건에서의 토벌대라 함은 서북청년단, 경찰, 군을 통칭하는 말이다. 미군정은 4 · 3사건의 진압을 위해 육지부의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의 극우단체에게 토벌 권한을 주며, 국군인 경비대와 함께 초토화 작전을 펼친다. 무장대라 함은 4 · 3사건 초기에는 미군정의 탄압에 대해 적극적인 항쟁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나, 나중에는 토벌대의 강경작전으로 인한 횡포를 피하기 위해 무고한 주민들까지도 입산하였는데 이들을 통칭해 무장대라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족한 자료임을 절감하는 상황 하에서, 문서자료는 본 제주불교사연구회의 연구물인『근대제주불교사 자료집』(제주불교사연구회, 2002. 5. 1)에서, 그리고 사실 확인은 관련인물에 대한 직접적인 대담과 현장 확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스님들의 후손이 남아있지 않고 세월이 많이 흘러 당시를 증언해줄 생존자들이 많지 않다는 점은 물론이고, 증언자들이 처참했던 기억을 되살려야하는 것 자체를 지금에 와서 또 다시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힘들어하여 증언 채록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4·3사건 관련은 제민일보 4·3취재반의 『4·3은 말한다』와 제주 4·3사건 진상규명위원회의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참고하였다.

II. 사찰 피해 현황

이 장에서는 피해 사찰에 대한 지역별, 사찰별 피해와 피해시기, 그리고 복원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한국전쟁 시기 제주도에 몇 개소의 사찰이 있었는가에 대한 정리된 자료는 없다. 본 연구회는 『조선총독부 관보』 및 『매일신보』 기타 일제시대의 불교계 잡지와 1951년의 『제주교무원 자료』 등을 통하여 한국 전쟁 시기 제주도에 있던 사찰을 대략 90여개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번 조사로 피해가 확인된 사찰은 35개소이다.

그러나 위의 기록 어디에도 나오지 않으나 실재했던 사찰이나 암자들이 피해사찰로 조사되기도 하였다. 제주도는 1946년 8월에 전라도에서 분리되어 도(道)로 승격되었다. 해방 전 제주도에는 본사가 없었기 때문에 제주도의 사찰명은 육지부의 사찰 중 백양사, 대흥사, 위봉사 등이 제주도에 마련한 ' 사 리 제주도포교소'라는 형태로 기록에 남아있다.

이처럼 오늘날과 같은 구체적인 사찰명이 없는 경우와 일제 말기에는 총독부의 포교계를 거치지 않은 사찰도 다수 나타나고 있어서 정확한 전체 사찰 수를 집계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이번 조사 결과를 분석함에 있어서 백분율로 계산하는 통계는 피하였다. 백분율이 갖는 의미가 오히려 차후 오류로 남을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1) 지역별 피해 사찰 현황

토벌대는 '1948년 10월 20일 이후 해안선에서 5Km 이상의 지점과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하고 위반하는 자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한다.'고 포고하고 주민 소개령을 내리고 마을을 방화하고 주민을 무차별 학살한다. 제주도의 지형상 해안선 5Km 이상은 해변 마을을 제외한 전체에 해당하며 한라산은 1954년 9월에서야 출입통제가 해제된다. 해안마을은 무장대와 주민과의 차단으로 무장대를 고립시키기 위해 마을 마다 성을 쌓게 하고 마을 밖 출입도 통제하였다.

사찰의 상황도 이들 마을과 같은 양상이다. 사찰의 피해는 산간지역이나 인가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경우에 피해가 많았다. 토벌대에 의한 소개(疏開)는 남겨진 시설물이 무장대에게 이용될 여지마저도 없애기 위해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소각 등의 방법으로 폐허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피해를 입은 사찰은 거의 폐허가 되거나 소각되어지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제주도에는 지금까지도 4 · 3사건 때 사라진 채 다시 사람이 살지 않게 된 마을이 있다. 이러한 양상은 또한 조사하지 못한 사찰이 있을 수 있는 여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여타 기록에 드러날 일이 없었거나, 마을이 사라져 버렸거나 산간 지역에 있거나 했던 사찰이나 암자의 경우는 지금에 와서 조사대상에 조차 포함되지 않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 한 예로 백양사 북촌 포교소의 경우는 이번 조사가 끝날 시점까지도 불교계 누구의 증언이나 기록에서조차 나타나지 않았던 곳이다.

북촌리의 경우는 마을의 피해가 극심한 지역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런 단서 없이 본 연구회의 추측에 의해서만 무조건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조사하던 중 피해 사찰로 밝혀진 경우이다. 이런 사례가 없어져버린 마을이나 산간에 있던 사찰의 경우 향후 피해 사찰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찰명 소재 피해내용

관음사 제주시 아라동 법당, 기타 건물 7동 전소. 오이화 스님 고문 사망
대각사 제주시 이도동 원문상 스님 사망
백화사 제주시 아라동 법당, 요사채 파옥
불탑사 제주시 삼양동 법당, 요사채 파옥
서관음사 제주시 도평동 법당, 요사채, 객실 전소. 이세진, 고제선 스님 사망
석굴암 제주시 법당 전소
소림사 제주시 아라동 법당, 요사채 전소
용장사 제주시 도평동 법당, 객실 전소. 백인수 스님 사망
원당사 제주시 삼양동 소개
월정사 제주시 오라동 법당, 가옥 5채 전소. 김덕수 스님 사망
정광사 제주시 일도동 이일선 스님 사망
법화사 서귀포시 하원동 법당, 요사채, 객실 전소
용주사 서귀포시 호근동 법당, 요사채 파옥
원만사 서귀포시 하원동 법당 전소. 양홍기 스님 사망
월라사 서귀포시 신효동 법당, 요사채 파옥
호촌봉 암자 서귀포시 하효동 법당 파옥
단산사 남제주군 대정읍 인성리 소개. 강기규 스님 사망
두수사 남제주군 성산읍 신산리 소개
선광사 남제주군 남원읍 남원리 법당철거, 객실 소각
봉주사 남제주군 표선면 토산리 법당, 객실 파옥. 동불상도난
고관사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 강제매각
고운사 북제주군 애월읍 고내리 법당, 요사채 2동 철거
광룡사 북제주군 한림읍 상대리 법당, 객실 2동 전소
귀이사 북제주군 애월읍 상귀리 법당, 요사채 2동, 불상 등 일체 전소
극락사 북제주군 애월읍 상귀리 법당, 요사채 전소
금붕사 북제주군 구좌읍 하도리 법당 반 소각, 요사채 소각. 이성봉 스님 사망
금천사 북제주군 애월읍 어도리 법당, 객실 전소
묘음사 북제주군 애월읍 어음2리 법당, 객실 전소
백양사 북제주군 조천읍 북촌리 법당, 요사채, 객실, 불상 등 일체 전소. 김유신 스님 사망
북촌포교소
보광사 북제주군 애월읍 고내리 법당, 요사채 철거. 성명미상 스님 사망
본원사 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 법당 일부 소각
수덕사 북제주군 애월읍 광령리 법당, 객실, 석가모니불상 등일체 전소
수산사 북제주군 애월읍 수산리 법당, 객실 철거. 고정선 스님 사망
외꼴절 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 법당, 요사채 전소. 신홍연 스님 사망
은수사 북제주군 한경면 고산리 고인봉 스님 도일(渡日)

제주도는 현재 제주시와 서귀포시, 남제주군과 북제주군, 즉 2개의 시와 2개의 군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번 조사로 제주시 지역의 피해사찰은 11개소, 서귀포시 5개소, 남제주군 4개소, 북제주군 15개소로 총 35개의 피해사찰이 조사되었다. 실제적인 피해 사찰은 이 보다 더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4 · 3사건의 피해가 제주도 전역 제주도 전 사회, 제주도민 모두에게 걸쳐 있음을 상기할 때 불교계의 피해 또한 그 흐름을 피해갈 수 있는 아무런 대책도 따로 없었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에 와서 그 피해를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이미 많이 소실되어 버렸고, 기억에서 애써 지우려 노력하며 살아왔던 피해 공포로 인해 그 전체 전모를 밝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하여 향후 이 보다 더 많은 피해가 나타날 수 있는 여지도 있음을 밝혀둔다.

(2) 사찰별 피해 현황

피해 상황으로는 주로 건물피해가 조사 집계되었다. 우선 피해시기 이전의 사찰의 재산 목록에 대한 기록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또 소개령을 받고 피난 할 경우는 불상 등의 중요 집기를 피난시킬 여유가 있어서 건물 피해가 그중 제일 많다. 그러나 끌어안거나 등에 업어서 옮겨 다녀야 했던 상황이어서 불상과 탱화, 집기 등의 훼손도 심각하였다. 거기다가 소개된 사찰의 경우 해안가 마을의 남의 집 빈방을 빌려 불상을 임시로 봉안해야 했고 이마저도 여러 번 옮겨 다녀야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관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점점 훼손 정도가 심해져 대부분 몇 년 안에 폐불 시킬 수밖에 없었다. 현재 4 · 3사건 이전의 불상과 탱화 등은 조사대상 전체 사찰을 통틀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현실이다.

사찰 건물의 피해는 전소, 폐허, 일부소각으로 조사 정리하였다. 전소는 사찰의 법당을 비롯한 부속 건물 전체가 소각된 경우, 폐허는 더 이상 건물로 사용하기 어려운 정도의 피해를 입은 경우이며 일부소각은 건물의 일부분이 불에 탄 경우이다. 물론 이들 경우는 모두 복원될 때까지 사찰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1) 전소는 사찰 내에 있던 모든 건물의 소각을 뜻하며 모두 16개소이다. 이 경우 법당은 물론이고 요사채 또는 객사 등의 건물까지 모두 불태워졌다.

일부 소각은 3개소이다. 이 가운데 금붕사는 법당은 절반이 소각되었고 요사채가 전소되었으며, 선광사는 법당이 철거되고 객실이 전소되었다. 본원사는 사찰 내의 건물이 불 질러졌으나 바로 불을 끌 수 있는 상황이었고, 또 바로 사용할 수 있게 복원되었다.

폐허가 된 사찰은 14개소이다. 소개령에 의해 이주하였다는 것 자체가 마을이나 주택의 기능을 전쟁의 상대편 즉 제주도의 경우는 무장대가 와서도 이용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소개령이 내려지면 주로 방화하거나 지붕과 벽체 등 건물의 주요부분을 훼손시키는 방법을 이용하였으며 건물의 자재를 뜯어내가는 경우도 있었다. 소개될 때 훼손 시켜 놓고 이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하더라도 소개된 이후 오랫동안 되돌아오지 못함으로써 더욱 폐허로 변했다.

소개령을 받고 이주할 때는 금방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인가가 모여 있는 곳을 중심으로 마을에 성을 쌓고 마을 밖으로 나갈 때는 허가를 받고 출입해야 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가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고, 소개된 곳을 돌아보러 가는 것 자체가 위험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나중에는 무서워서 갈 수 없는 버려진 곳이 되어버렸다.

인명 피해는 14개 사찰에서 16명의 스님이 피해를 당하였다. 인명피해 상황은 뒤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2) 이러한 사찰 건물의 피해는 일부 소각되었던 함덕리 본원사 1개소를 제외한 32개소가 모두 군과 경찰,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토벌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본원사는 4 · 3사건 초기 입산한 마을 청년들이 내려와 1948년 5월, 7월, 8월에 걸쳐 세 차례나 불을 질렀으나 건물의 일부만 피해를 입었다. 본원사의 주지스님 아들 네 명이 당시 경찰로 활약하고 있었다는 것이 불을 지른 이유이다.

그 중 둘째 아들은 제주비상경비사령부 산하 특별수사대 제1반장을 지낸 김병택이다. 세 번째 불을 놓던 날에는 석자 높이의 아미타 좌불을 가지고 갔으며, 이 부처님은 무장대가 굴속에 봉안하여 예불을 드렸던 것으로 증언 되었다.

1948년 초토화 작전으로 온 섬이 공포에 휩싸여 있을 11월 말에 후환을 두려워한 마을 사람들이 초가였던 법당을 뜯어내고 기와로 바꾸어 놓았다. 증언자는 마을 청년들이 동네에 있던 생 소나무를 베어다가 부랴부랴 지어냈다고 증언했다. 한참 토벌이 이루어지고 있던 험악한 시기에 빨리 복원 시켜 놓지 않으면 안 되는 사찰이었음을 의미한다.

3) 피해 내용은 표1과 같으며 '전소'는 사찰 소속의 모든 건물이 소각된 경우이고, '파옥'은 건물로서의 기능을 없애기 위해 지붕이나 벽 등을 인위적으로 헐어버린 경우, '철거'는 건물의 자재를 뜯어 다른 곳에 이용하거나 소개되면서 자재를 옮겨 두었다가 나중에 이용할 수 있던 경우이다. '소개'라고 표현한 곳은 소개되어 폐허가 되긴 하였으나 이번 조사에서 피해규모를 상세히 파악하지 못한 곳이다.

이 중 선광사는 지은 지 3년 밖에 안 된 좋은 목재여서 철거 후 남원중학교 건설에 사용되었다. 은수사는 고기호 주지스님이 수배되어 일본으로 피신하였고, 함께 거주 했던 스님은 군에 입대해 사망하는 바람에 폐허가 되었다.

법화사는 소실 된 후 1950년 법당과 요사채를 어렵게 마련하였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2년 2월부터 1953년 9월까지 모슬포 육군훈련소 제3숙영지로 이용되며 폐허가 되었다. 고관사는 마을 안에 인가와 인접해있어서 소개될 상황도 아니었으나 1948년 11월 조천면사무소가 불에 타 업무를 볼 수 없게 되자 면사무소로 적합하다 여겨 경찰이 총을 등에 들이대며 요구하는 바람에 40만원에 강제매각 당하였다. 1968년에 다시 사들여 복원되었다.

(3) 피해 시기

대부분의 사찰 피해는 1948년 11월경에서 1949년 2월에 걸쳐 주로 이루어지며, 인명피해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예비검속기에까지 생겨난다. 이들 피해는 제주 4 · 3사건 진행과 일치하는 피해 현상이다. 바로 1948년 11월 중순부터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어 1949년 3월까지 무자비한 학살과 방화가 자행되었다. 4 · 3사건 전개 과정 중 가장 참혹하고 무자비한 피해를 입은 시기인데, 중산간에 있는 마을은 불타고 수 만 명의 제주도민이 노인에서 부녀자에 이르기 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되는 말 그대로의 초토화 상황이었다. 해변마을로 이주하라고 명령한 소개령이 내려진 후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었으나 일부 중산간 마을 주민들에게는 이 소개령이 다 알려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무자비한 학살과 방화가 자행되었다.
사찰의 피해는 이들 초토화 작전시기인 1948년 11월경에서 1949년 2월에 걸쳐 주로 일어났다.

(4) 피해 사찰 복원 현황

토벌대의 해안선에서 5Km 이상의 무허가 통행금지와 소개령 그리고 마을의 성 쌓기와 마을 밖 출입금지와 같은 행위는 인가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던 사찰들의 피해를 유발시킨 것은 물론 사찰 복원에 있어서도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우선 원래 사찰이 있던 위치로 돌아가 복원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해안 마을 인가 근처에 있던 사찰은 피해가 적거나 한국전쟁 이후 복원이 이루어지는 반면, 소개령에 의해 이전되었던 사찰들은 오랫동안 원래 자리로 못 돌아가던지 다른 장소를 구해 이전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표. 2의 복원현황은 복원과 이전으로 정리하였다. 원래 위치에 복원한 경우에는 '복원'으로, 원래 사찰의 뜻을 이어 다른 장소로 이전하여 복원되는 경우를 '이전'으로 표기하여 정리하였다. 현재 종파와 사찰명을 표기하였다.

피해조사 대상 사찰 중에서 현재 복원된 사찰은 16개소, 다른 장소로 이전하여 복원한 곳은 10개소이다. 이번 조사대상 사찰 중 7개소인 고운사, 귀이사, 백양사 북촌포교소, 서관음사, 소림사, 은수사, 호촌봉 암자는 폐사된 이후 복원되지 않고 있다.

사찰명
현 사찰명
종단
현 소재지
구분
관음사
관음사
조계종
제주시 아라동
복원
백화사
광명사
태고종
제주시 이도2동
이전
불탑사
불탑사
조계종
제주시 삼양동
복원
석굴암
석굴암
태고종
제주시
복원
용장사
흥룡사
태고종
제주시 도평동
복원
원당사
원당사
태고종
제주시 삼양동
복원
월정사
월정사
태고종
제주시 오라동
복원
법화사
법화사
조계종
서귀포시 하원동
복원
용주사
봉림사
조계종
서귀포시 호근동
복원
원만사
원만사
태고종
서귀포시 하원동
복원
월라사
월라사
조계종
서귀포시 신효동
이전
단산사
단산사
태고종
남제주군 대정읍 인성리
복원
두수사
혜림사
태고종
남제주군 성산읍 신산리
이전
선광사
선광사
태고종
남제주군 남원읍 남원리
복원
수덕사
영산암
태고종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이전
봉주사
영천사
태고종
남제주군 표선면 토산리
복원
고관사
고관사
조계종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
복원
광룡사
황룡사
태고종
북제주군 한림읍
이전
극락사
극락사
태고종
북제주군 애월읍 상귀리
이전
금붕사
금붕사
태고종
북제주군 구좌읍 하도리
복원
금천사
금천사
원효종
북제주군 애월읍 이전
이전
묘음사
개법사
태고종
북제주군 애월읍 어음리
이전
외꼴절
덕림사
태고종
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
이전
보광사
보광사
일붕 선교종
북제주군 애월읍 고내리
복원
본원사
본원사
태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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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인명 피해 상황

제주 불교의 한국전쟁 시기의 피해 중에 인명피해는 사찰의 피해 이상으로 치명적이었다. 해방을 맞아 의욕에 차있던 제주불교계는 그동안 불교 활동을 이끌던 주요 승려들의 희생으로 침체 되어버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물난의 영향 끼치고 있다.

조사된 인명 피해는 모두 14개 사찰의 16명의 스님이다. 사찰 소속 인명의 피해는 제외하였다. 피해 형태로는 총살 10명, 수장 2명, 고문 후유증 사망 1명, 일본으로 도피 1명, 행방불명 2명이다. 가해자는 모두 토벌대이다. 피해 시기는 사찰 피해와 유사한 시기인 1948년 말부터 1949년 초에 걸쳐 많이 나타나지만, 인명피해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인 1950년 여름까지 나타난다.

1950년 7월에서 9월까지는 예비검속 된 인사들의 피해시기이다. 4 · 3사건 발발의 원인인 1947년 3 · 1사건이나 2 · 7사건 등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요시찰 인물, 또는 불순분자라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무허가 집회, 폭동 음모 등의 구실로 어떤 계기가 있을 때마다 토벌대에게 예비검속 되었다. 예비검속 된 사람들은 총살이나 수장 등으로 희생되었다.

수장은 군경토벌대에 의해 저질러진 4 · 3사건 진행시기의 극악한 만행 가운데 하나이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돌을 매달아 빠뜨리거나 총을 쏘아 바다로 던지는 끔찍한 방법을 사용했는데, 후환이 두려워서 개인 신상에 대한 흔적까지 없애려고 알몸으로 수장시키는 등 학살의 흔적자체를 없애려한 만행이었다.

1948년 11월부터 수장으로 희생되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하루에도 수 백 명 씩 무더기로 비밀리에 수장이 행해졌다. 수장은 정식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임의대로 처분하였던 불법적인 일이었으며 이 때문에 수장 희생자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근대 제주불교의 발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고, 불교계의 4 · 3사건 희생자를 떠올릴 때 여러 증언자들이 가장 많이 증언한 주요 인물 순서로 인명피해를 정리하였다.

1. 이일선
1950년 예비검속 되어 희생된 이일선 스님은 1895년 생으로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선운사로 출가, 백양사에서 공부하고 활동하였다. 1920년 조선불교청년회 발기인이기도 하였던 이일선 스님은 1937년 백양사 포교사로 제주에 내려온 이후 제주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 '제주불교연맹' 포교부장으로 전도 순회강연을 주도하였으며, 해방이 되자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승려대회'의 대회준비위원장으로서 친일을 반성하여 왜색화 된 불교풍토를 정화하려는 노력을 주도하였다. 1947년 '3 · 1절 기념 투쟁 제주도 위원회' 가 결성되자 선전동원부에서 활동하였으며,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공동의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고도 1950년까지 희생되지 않은 것은 상좌인 김우송이 헌병장교로 스님을 보호하였기 때문이라고 증언되었다. 1950년 56세에 정광사에서 예비검속 되어 제주도 산지포구에서 돌에 묶인 채 수장 당하였다. 정광사에 숨어있다 손을 뒤로 한 채 포박당하여 줄줄이 묶여 가면서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던 이일선 스님을 정광사 보살님이 숨어서 목격하였다.
증언 : 김평수(81세, 남제주군 토산리), 양경월(78세, 제주시 외도동), 김택춘(82세, 서귀포시 하원동), 혜일스님(53세, 서귀포시 정방사), 광일 스님(76세, 신산리 혜림사), 성월 스님(84세, 하모리 대각사)
기록 : 제민일보 4·3취재반의 『4·3은 말한다. 1』(전예원, 1994)

2. 이세진
이세진 스님은 1910년 저지리에서 태어나 내장사에서 출가하였다. 1932년 경성 개운사 불교 전문강원의 망년 강연회에서 강연을 하기도 하였고 1937년에는 금강산 표훈사 중향강원 강사를 지냈다. 1939년 한림포교당 포교사로 부임하면서 제주도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9년 '제주불교연맹'에서 교육부장으로서 학인을 교육한 강사스님이다. 1942년 도평리에 서관음사를 창건하여 기와공장을 운영하며 강원설립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1948년 입산하여 무장대로 활동하였다. 무장대 지휘부였던 이덕구 등 15인과 함께 관음사에서 기거한 적이 있다고 증언된다. 관음사는 이후 토벌대에 의해 소각되었다. 1949년 초, 토벌대의 포로로 잡혀 제주시 동부두 주정공장에 잡혀있었으나, 이일선 스님의 상좌였던 헌병장교 김우송의 도움으로 목숨을 유지한다. 그러나 1949년 7월 관음사에서 잡혀나가 수장 당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증언: 광순 스님(68세,북제주군 하도리 명법사), 고계생(78세, 제주시 아라동), 양경월(78세, 제주시 외도동), 강순익(84세, 제주시 일도동), 김평수(81세, 남제주군 토산리)

3. 원문상
1908년 하원리에서 태어난 원문상 스님은 기림사에서 출가하였다. 1945년 '조선불교혁신제주승려대회'의 부의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승려대회의 준비위원으로서 대회를 진행하였다. 대회이후 중앙교무회에 파견될 제주대의원으로 추대되었다. 중문중학교의 전신인 중문중학원에서 역사와 국어, 한문을 가르쳤다. 1950년 7월 7일 서귀포 경찰서장 김호겸의 이름으로 제주도 경찰국장에게 보고한 문서인 '공무원 구속자 명부'에 의하면 원문상 스님은 2·7사건의 주모자로서 좌익사상 극렬자로 기록되어 있다. 증언으로는 서북청년단으로 내려온 전문규가 누명을 씌워 예비검속 되었다고 한다. 검속되고 바로 처형당하였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증언 : 원인상(2000년 84세로 사망, 서귀포시 보목동 혜관정사), 일조 스님(64세, 북제주군 수산리 대원정사), 김택춘(82세, 서귀포시 하원동), 이경순(83세, 제주시 용담동)
기록 : 이도영의『죽음의 예비검속』(월간 말, 2000)

4. 오이화
1903년 제주시 오라리에서 출생하였다. 12세에 출가하여 관음사 서기에서 포교당 서기, 법화사와 불탑사 감원, 포교당 감원 포교사를 거쳐 관음사 2대주지를 역임하였으며 제주교구 교무원 재무국장, 조선불교 중앙대의원을 거쳐 제주교구 교무원장을 지내는 등 제주불교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1924년 '제주불교협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39년 '제주불교연맹'활동을 주도하였다. 1949년 1월 관음사가 불태워지던 당시 고문을 당한 것으로 증언되고 있으며, 1950년 음력 5월 25일 45세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증언 : 김평수(81세, 북제주군 토산리), 김종민(4·3 진상규명위원회)의 도움말에 의하면 증언자는 강덕윤(제주시 삼도동)

5. 이성봉
1895년 행원리에서 출생한 이성봉 스님은 화엄사 제주포교소 포교사였다. 1937년 10월부터 두 달에 걸쳐 법화산림 대작불사를 마련하여 제주도 순회포교를 실시하였다. 1939년 '제주불교연맹'에서 검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조선불교혁신제주승려대회'에 금붕사를 대표하여 참여하여 교무회원으로 선정되었다. 1949년 10월 21일 55세로 금붕사에서 토벌대에게 총살당하였다. 금붕사 경내로 도망 온 마을주민을 숨겨주었는데, 뒤따라온 토벌대가 그의 행방을 물었으나 스님이 모른다고 하자 여덟 발의 총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
증언 : 수암 스님(64세, 북제주군 하도리 금붕사)

6. 백인수
도평리 용장사의 백인수 스님은 1940년 백양사 김녕포교소 감원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1945년 '조선불교혁신제주승려대회'에서 교무회원으로 선정되었다. '제주불교청년단' 선전부장으로 추대되었다. 백인수 스님은 1949년 1월 6일 군인, 순경들이 도평국민학교로 소집을 시켜서 나갔는데 그때 학교에 모인 60여명의 마을사람들과 함께 연대마을 입구에서 총살당하였다.
증언 : 홍순여 (75세, 제주시 도평동)

7. 신홍연
함덕리 백양사 포교소를 창건한 신홍연 스님은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불교 공부를 하였으며 1934년 10월에 백양사 북촌포교소 포교소 계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제주도에 들어왔다. 비파, 시금치, 무, 배추 등을 갖고 들어와 함덕리에 보급하였다. 함덕 배추는 스님의 보급으로 시작되었고 함덕 주민들에게 퇴비 만드는 법 등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밭을 세내어 신도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수확물은 팔아서 신도들과 함께 나누었다고 한다. 사찰이 있던 외꼴 지경은 함덕리 인가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마을 청년들이 토벌대를 피해 절에 와서 숨어 있기도 하였고, 밥을 해먹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스님은 절에서200m 쯤 떨어진 곳에서 귤나무에 묶인 채 살해되었다. 군인들이 총을 쏘아도 스님을 비껴나가고 맞지를 않았다고 당시 청년들이 증언할 만큼 신망 있는 스님이었다. 군인들은 동네 청년들에게 죽창을 들고 스님을 찌르게 하였다. 가부좌를 하고 염불을 하며 임종했다고 한다. 가부좌 상태로 굳어 있어서 펼 수가 없었는데 상좌 김두전 스님이 몸을 펴주십사고 기도하여 몸이 풀리자 묻을 수 있었다.
증언 : 신금자(65세, 제주시 연동), 혜종 스님(75세, 제주시 충혼각), 수암 스님(64세, 북제주군 하도리 금붕사), 양지규(69세, 북제주군 함덕리)

8. 고인봉
고산리 은수사의 고인봉 스님은 1920년생으로 고산리에서 태어났다. 1945년 '조선불교혁신제주승려대회'에서 '제주도불교청년단' 단장으로 추대 되었으며, 1950년 이일선 스님이 총살당하자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일본에서 승려 생활을 하다가 1998년 일본에서 입적하였다.
증언 : 고도인(70세, 제주시 연동), 혜일 스님(53세, 서귀포시 정방사)

9. 고정선
수원사의 고정선 스님은 1945년 '조선불교혁신제주승려대회'의 교무회원, '제주도불교청년단' 선전부원이었다. 1949년 봄, 수원사의 주지였던 고정선 스님은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였다. 당시 좌익 쪽 연락책이었다고 증언되는 고인봉 스님이 잠시 수원사에 기거 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고문 끝에 고정선 스님은 총살당하였다.
증언 : 일조 스님(64세, 북제주군 수산리 대원정사)

10. 양홍기
원만암의 양홍기 스님은 1945년 '제주도불교청년단' 단원이었다. 주지 방동화 스님은 아래 마을로 피난 가 있었고 홀로 절을 지키다 토벌대에게 총살당하였다.
증언 : 정무생(79세, 서귀포시 하원동)

11. 강기규
인성리 단산사의 강기규 스님은 토벌대에 총살당하였다. 1945년 '제주도불교청년단' 선전부원이었다. 1948년 가을, 소개 되던 때 단산사에서 총살당하였다.
증언: 성윤 스님(67세, 남제주군 인성리 단산사)

12. 김덕수
오라리 월정사의 김덕수 스님은 1930년 오라리에서 김석윤 스님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입산하여 무장대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김석윤 스님의 일기에 의하면 김덕수 스님은 1948년 11월 13일 월정사에서 잡혀나가 제주시 박성내에서 총살당하였다. 그 때 나이 19세였다.
증언 : 김동호(57세, 제주시 도남동)
기록 : 김석윤스님 일기

13. 김유신
북촌리에서 출생한 북촌포교소 주지 김유신 스님은 북촌리 집단학살 당시인 1949년 1월 17일 마을주민 500여명과 함께 총살당하였다. 49세였다.
증언: 김택(67세, 북제주군 북촌리)

14. 고제선
도평리 서관음사의 고제선 스님은 1945년 대각사 서기를 역임하였고 이세진 스님의 상좌였다. 1945년 '조선불교혁신제주승려대회'에 서관음사를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서관음사 소각 후 행방불명되었다.
기록: 교적부(관음사 포교소, 1947)

15. 이창현
1950년 9월 4일 현재 제주경찰서 예비검속자 명단에 있는 이창현 스님은 검속당시 51세, 주소: 용담리 437번지, 직업: 승려, 범죄개요: 남로당원, 농위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떻게 희생되었는지는 밝혀낼 수 없었으나, 예비검속 된 점과 남로당원이라는 범죄개요에 의하면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기록 : 이도영의『죽음의 예비검속』(월간 말, 2000)

16. 성명미상
애월리 보광사의 15-6세 정도였던 성명 미상인 스님은 무장대가 다녀갔는지 여부를 조사하러 온 토벌대에게 보광사에서 총살당하였다. 1948년 가을이었다.
증언 : 선미화(65세, 북제주군 고내리)

IV. 맺는말

한국전쟁 시기 제주불교계의 피해상황을 정리한 본 조사 보고서는 사건 발생 55년여를 지난 이제에야 이나마 정리하는 성과물로 나타났다. 그동안 꾸준한 제주4 · 3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은 2003년 10월 15일에 드디어 제주4 · 3사건 진상 정부보고서를 확정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태껏 제주불교계의 4 · 3사건에서 시작된 한국전쟁 시기 피해를 정리 조사해 놓은 결과물이 없었던 점을 생각하면 이번 조사는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의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이 조사결과가 앞으로 더욱 심도 있는 조사의 초석이 될 것임에 믿어 의심치 않는다.

증언자들이 기억을 되살려 놓을 때마다 지금도 흘리는 눈물과 목메임의 의미 속에서 과거를 기억하고 앞으로의 지표로 삼아야한다는 역사의 사명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이번 조사의 책임감을 절감하곤 하였다. 그러나 피해 당시 사찰에 대한 기록의 절대적인 부족과 전쟁시기의 상황에 대한 불교계 기록의 전무, 그리고 증언자들의 고령으로 인한 한계는 시인할 수밖에 없다.

본 연구회는 이번 조사를 통해 35개소의 피해 사찰을 밝혀내었고 각 사찰별 피해내용이 조사 정리되었다. 피해 시기와 복원현황 그리고 16명의 승려의 희생을 지금이나마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낼 수 있었음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번 조사 결과가 향후 더 자세하고 정확한 조사를 위한 기초 자료로서 그 의미를 더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앞으로 더욱 상세한 조사연구의 진척을 기대한다.

이번 조사를 통해 선인들의 시대의식과 소명감에 따른 책임 있는 활동에 대해 커다란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 마음을 모두 공유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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