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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에 대한 몇 가지 오해 / 조준호
[19호] 2004년 06월 10일 (목) 조준호 yathabhuta@hanmail.net
1. 문제의 소지는 무엇인가

근래에 들어 화두선 전통의 우리나라에 미얀마 등지로부터 위빠사나 수행법이 소개되면서 양자간의 비교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대부분 화두선 우위론의 입장에서 위빠사나 열등론이 제기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화두선 이론가나 실천가의 대부분은 현재 유통되는 위빠사나를 "낮은 단계의 소승불교 수행법" 정도로 간주하는 경향이 우세하다. 이에 위빠사나 측의 대응은 누가 뭐래도 위빠사나야말로 부처님의 정통 수행법이고 화두선은 고작 중국 송대의 대혜종고로부터 시작한 종파불교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려 한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양자간의 만남은 동질성보다는 차별성이 강조되면서 두 전통 사이의 수행론에 대한 이해 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나름대로 양자의 관련성에 대한 신중한 접근의 필요성을 표명해왔다.{{ 이러한 점을 의식한 필자의 몇 해 전 한 졸고의 결론에 해당하는 마지막 단락은 다음과 같다.
"화두선의 근거와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오히려 초기불교 지·관의 내용과 관련시켜서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념무상(無念無想) 그리고 무심(無心)을 강조하면서, 한 마음도 일으키지 않고 화두를 관(觀) 또는 간(看)하는 것이라 할 때, 화두선의 근거는 Vipassan 로부터 정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Vipassan 는 화두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는 물론 더 나아가서는 서로가 다르다는 전제 아래 양자간의 차별성만을 강조하고 상대적으로 어느 것이 더 뛰어난 수행법임을 애써 증명하려는 태도는 성급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졸고, 〈초기불교에 있어 止 · 觀의 문제〉,《한국선학》 제 1 호(서울 : 한국선학회, 2000), pp. 355-356)

}} 이상과 같은 위빠사나 열등론의 배경에는 근본적으로 위빠사나 수행은 '초선 이전부터 가능하다'는 견해나 또는 '초선에서 가장 온전한 위빠사나가 이루어진다'거나, 아니면 '처음 시작부터 관(觀)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은 물론, 심지어는 '선정의 바탕 없이 위빠사나'는 가능하며, 아예 선정과 무관한 행법이라도 되는 것인 양 이해하는 데 기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의 맥락은 진리인식에 가장 중요한 용어들을 '알아차림'이나 '감지한다'나 '마음챙김' 또는 '마음지킴' 정도로 쓰고 있는 데에도 기인한다. 따라서 당연히 경전의 선정론이나 실수(實修)의 잣대에 따라 '분별법'이나 챙김과 지킴과 같은 인위적인 '조작의 행법'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안고 그 비판의 여지를 제공해 주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 유통되는 이러한 식의 위빠사나 이해는 근본적인 의미의 위빠사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미얀마 등지를 내왕하면서 수입한 특정 부파의 위빠사나 행법으로 대중 교화 차원으로 개량된 위빠사나라는 점이다. 문제는 이 같은 위빠사나가 마치 초기불교의 위빠사나인 양 소개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위빠사나와 화두선은 근본적으로 다른 행법이라 여기게끔 된 것이다. 그리고 갈수록 교집합의 확보는 불가능하고 교두보까지 놓을 수 없는 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만약 이 같은 주장을 전부로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화두선의 근거를 초기불교의 부처님 수행법에서 찾는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과 여러 대아라한들은 '분별법'이나 '조작법' 정도의 수행자로 전락하고 반대로 화두선은 그 교리적 정통성을 확보할 바탕을 잃게 되며 단지 중국 종파불교의 산물인 사생아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양측 모두를 살려내려면 교리적인 연결고리를 확보하고 제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모든 불교경전의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선정체계인 사선을 통해 화두선과 위빠사나를 보아야만이 서로간의 내연을 확인할 수 있으며, 양자는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2. 양자간의 교리적인 연결 고리는 선정

<불교신문> 주관의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라는 논의에서 필자는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근본적으로 선정론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불교신문> 제2012호 5면(2004년 3월 9일). }}

다시 말해, 양자가 만날 수 있는 것은 결국 선정 사상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몇몇 다른 반론자들은 필자의 주장에 이견을 제시하면서 결코 선정은 양자의 연결고리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선정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의 성취에 있어 별로 중요한 위치가 아니라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제시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반론은 필자의 불교 지식으로는 이상스러울 만큼 생경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간화선에 '선(禪)'자가 붙어 있는 이유와 사념처의 작용적 측면을 이름하는 위빠사나에 있어 사념처라는 말이 보여주듯 '염(念)'은 바로 선정의 범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염 즉 사띠 행법의 설명은 분명히 선정의 범위에 있다. 이는 삼학 가운데 정학에 정념이 들어 있는 이유나 또한 사선의 제3선에서 염의 언급에서도 너무나 자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선정이 양자의 연결고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다.

이는 필자와 기본적으로 염 즉 사띠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인 것이기도 한다. 즉 필자가 이전 논문에서 이미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듯이 사띠 행법을 선정 이전 또는 밖에 있을 수 있는 행법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오류라는 것이다.{{ 졸고,〈사띠(sati/sm ti: 念)는 왜 '수동적 주의집중'인가 - 초기불교경전에 나타난 염의 교설에 대한 재검토〉, 《인도철학》제16집(서울: 인도철학회, 2004), p. 108-109 ; 〈 사띠란 무엇인가〉, 《한국불교학》, 제35집, 2004).}}

예를 들면, 김재성과 임승택 등은 사띠 즉 염이 바탕한 위빠사나를 초선 이전에도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초기불교 입장에서 이렇게 되면 선정이 바탕되지 않은 위빠사나 수행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선정과 무관한 위빠사나가 있을 수 있다는 이해는 큰 오해이다. 분명한 것은 화두선이나 위빠사나는 모두 공통적으로 선정이 바탕되어 있고 그렇기에 선정론을 통해 양자간의 연결고리는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1) 사선의 선정론과 화두선, 그리고 위빠사나
이렇게 화두선과 위빠사나의 연결고리는 바로 선정사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양자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법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대략적으로 선정사상을 통해 양자간의 공통점과 연결고리를 살펴보면, 화두선과 함께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근본적인 의미의 위빠사나 또한 좌선의 선정을 강조한다. 위빠사나는 적어도 제4선과 같은 높은 수준의 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불립문자 언어도단'의 화두선은 위빠사나의 바탕인 사선(四禪) 가운데 초선에서 '말과 언어의 그침', 그리고 다시 화두선에서 '분별(사량)을 쉬는 것'이나 '심행처멸(心行處滅)'의 경지는 그대로 제2선의 '언어가 쉬는 것에 따른 분별사유(尋伺)의 쉼'과 통한다. 그렇기에 초기경전에서 부처님 또한 위빠사나는 "지극히 고요하고 뛰어나 분별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음"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선은 제행(諸行)의 순차적인 쉼을 보여주는데 이는 화두선에서 '조작심을 쉬는 것'과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화두선에서 강조하는 성성적적 또한 본래 '지극한 깨어있음'을 의미하는 제3선의 정지(正智, sampajana)와 또한 '지극한 평정심이나 고요함'을 의미하는 제4선의 사(捨, upekha)와 내용면에 있어 그대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화두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두에 드는 것'이라 할 때 이는 위빠사나의 바탕이 되며 또한 가장 중요한 제3선과 제4선부터의 염(念, sati)과 또한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염은 선정 수행 시 '관찰 대상에 대한 '대면(對面)의 확립'을 의미하여 한 순간이라도 놓치지 않는 것이 강조된다. 이러한 대면 상태가 확립되려면 당연히 높은 수준의 선정이 바탕이 되어야만 가능하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염의 확립'은 성성적적한 가운데 간단없이 '화두에 드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차이라면 위빠사나가 심수심법과 같은 모든 상황에 간단없는 대면을 강조한다면, 간화선은 '특정한 화두만의 집중적인 대면'을 강조하는 것으로, 초기불교 입장에서 보면 위빠사나를 한정적으로 전문화·특성화시킨 행법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화두선과 위빠사나의 수행의 결과 또한 다를 수 없다. 만약 다르다면 둘 중 하나는 불교가 아닐 것이다. 근본적인 의미의 위빠사나는 여실하게 볼 수 있고, 투명하게 볼 수 있고, 매우 생생하게 볼 수 있고, 적나라하게 볼 수 있어 집착을 끊어가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지극히 높고 깊은 수준으로 고요해져 있고 투명해져 있는 상태로 그것은 오개(五蓋)와 팔재환 등에 의해 대상을 조작·왜곡하지 않는 상태에서 여실지견(如實知見)이 가능한 것으로 교설된다.

이렇게 위빠사나는 일차적으로 삼법인의 여실지견임에 대해 화두선은 견성성불로 달리 표현되지만, 견성은 불성에 대한 견성으로 달리 각성(覺性)을 의미한다. 그리고 다시 이러한 각성은 위빠사나의 무상·무아를 떠나 있지 않다. 즉 양자 모두 공(空)이나 여여, 실상 또는 진여에 대한 각성이고 여실지견으로 열반·해탈을 이루는 것이다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양자간의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위빠사나를 분별법이나 낮은 단계의 소승법이라는 오해의 소지는, 다름 아닌 위빠사나가 초선 이전부터나 초선에서 또는 선정과 무관하다는 식의 이해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초기불교의 근본적인 위빠사나를 초선 이전이나 초선 정도로 보게 되면 결국 위빠사나는 언어와 문자에 사로잡힌 행법이 되며, 심사와 같은 분별사유조차 뛰어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초선 이전의 오개, 언어와 문자 그리고 분별사유의 범위에 갇힌 위빠사나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나는 근본적인 의미의 위빠사나 이해, 즉 제4선 이후라야 본격적인 위빠사나가 수행된다는 이해로 접근해나갈 때만이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교두보는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2) '사띠(sati) 행법'과 '화두에 드는 행법'은 근본적으로 같다
앞의 대략적인 비교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화두에 드는 것'과 위빠사나 수행의 기초가 되는 '사띠(sati) 행법'이라 비견할 수 있다. 필자는 기존의 사띠 이해에 있어 문제를 지적하고 경전에 따른 올바른 그리고 새로운 사띠 이해를 제시한바 있다.{{참고 앞의 졸고《인도철학》제16집과 《한국불교학》제35집, 그리고 <정각도량> 제86호(동국대학교 , 2004, 4월)의 '사띠는 수동적 주의집중'.}}

이러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살펴보면, 사띠(sati)는 선정 수행에 따라 존재의 상황을 '끊김없이 대면(對面)'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간단(間斷)없는 대면 상태를 바로 '사띠의 확립(四念處)'이라한다. 만약 간단없는 대면 상태가 일순간이라도 끊기면 그것은 바로 '실념(失念)'이 된다.

이러한 맥락의 사띠 이해는 다시 화두선에서의 '화두에 드는 것'과 일맥상통함은 최근의 연구에서도 잘 드러난다. 즉 김호귀는 최근의 한 발표 논문에서 방편적인 기능과 본질적인 정기능으로서 화두를 나누어 설명하는데, 전자의 기능으로 "산란심과 혼침의 두 가지를 제거하기 위하여 제시된 가장 효과적인 방식"{{ 김호귀,〈간화선에서 화두의 양면적 기능〉, 제40회 춘계전국불교학술발표대회, 한국불교학회, 2004, p. 165 n. 3.}}으로 '화두를 드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는 많은 초기경전에서도 왜 오개(五蓋) 가운데 혼침수면(昏沈睡眠, th na-middha)을 정념정지(sati- sampaja a)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시설하는지와 정확히 일치한다.

사띠가 강조되는 이유는 혼침 수면은 물론 다른 오개(五蓋)를 떠나 번뇌가 없는 상태의 유지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분별이 쉰 상태로서 보는데 듣는데 냄새 맡는데 맛보는데 접촉하는데 그리고 인식하는 데 있어 그 어떠한 것도 싣거나 개입시키지 않고, 첨가하지 않고, 단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여실지견'의 '무분별(無分別)한 경지'이자 그 어떠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무심한 주의집중'의 상태로 필자의 다른 표현으로 '수동적 주의집중'의 상태를 말한다.

물론 이 같은 필자의 사띠에 대한 교리적 이해는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생경하게 느낄지 모르지만 전적으로 초기경전에 근거한다.{{ 특히 앞의 졸고 가운데 Sa yutta Nik ya Ⅳ. pp. 73-76을 인용하고 있는《인도철학》제16집 pp. 106-120 참고.}}

사띠는 바로 이러한 상태를 말할 때 그 행법에 있어 화두선에서 화두를 간단(間斷)없이 드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띠나 화두에 드는 것 모두는 선정 수행 상에 있어 간격없이, 간단없이 대면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차이라면 화두라는 특정한 법이냐 아니면 법을 포함한 신수심법이냐 하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초기불교 이래 화두선에 이르기까지 '모든 불교 수행에 있어 사띠 행법은 그 핵심에 놓여있다'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3) 왜 본격적인 위빠사나는 제4선 이후인가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위빠사나는 느낌과 생각의 '투사', '반영', '조작', '왜곡'의 힘 또는 작용부터 쉬고 보는 문제이다. 그리고 사선은 '조작', '왜곡'을 쉬는 것으로 심, 사, 고(苦), 락(樂), 우(憂), 희, 입식, 출식이 적정하고 정화되어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것들이 작용하고 있는 한 있는 그대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실지견할 수 없다는 것이고 여실지견의 위빠사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3선에 이어 제4선만의 내용으로 불고불락(不苦不樂)의 결과인 사(捨 , upekh )가 언급되는 것도 위빠사나가 바로 제4선 이후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사선은 불선법에서 선법으로 조건적이고 차제적인 연생·연멸의 과정인데 사(捨)는 다름 아닌 제4선의 최종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는 위빠사나의 중심에 있는 사띠와 사(捨)가 경전에서 항상 같은 선상의 선정 경지로 나타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평정심(捨)이 갖추어질 때 고락의 투사나 조작 그리고 왜곡은 쉬고 여실지견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신행(身行)의 멸(滅)이 호흡과 관련하여 설명되는 것은 제4선과 그 이후의 사념처의 신념처의 내용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는 것도 또한 위빠사나가 바로 제4선 이후임을 보여준다.{{ 졸고,〈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한국선학》 제 1 호 2000. pp.345-350.}}

사념처에서 첫 신념처가 사선의 마지막 단계인 제4선과 연결되어 있음은 제4선이야말로 위빠사나 수행의 바탕이 됨을 말해준다. 주지하다시피 신행의 멸은 초선 상태에서도 아니고 제3선 상태에서도 아니고, 오로지 제4선 이후 상태에서이다.

다시 초선이나 초선 이전에도 사띠라는 말이 언급되고 그리고 위빠사나가 진행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경전의 맥락은 이미 제4선이라는 선정 상태가 바탕이 된 것으로, 시설(施設)의 초점은 위빠사나가 중심이 되어 설해지고 있을 때이다.{{ 졸고,〈초기불교경전에 나타난 수행에 관한 용어와 개념의 검토(Ⅰ),止觀을 중심으로〉,《한국선학》 제 3 호 2001, p.139 n. 43 ; 〈초기불교중심교리와 선정수행의 제문제 - 화두선 전통과의 교두보 확보를 위하여〉, <불교학 연구회 제22차 학술발표회>, 2004. pp.19-24.}}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마음의 정화 단계 상 제3선이나 제4선에서만 있을 수 있는 선법이 초선에서부터 이미 중복되어 나타난다. 또한 이는 법념처에서 오개(五蓋)는 물론 사선 자체가 관찰 대상화할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수·심념처에서의 불선법을 관찰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완전히 제거되어 버렸다면 관찰의 대상으로 나타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제4선이나 이후라는 높은 선정 상태에서 가능한 심소(心所) 예를 들면, 법념처의 사각지(捨覺支)는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사(捨), 그리고 심념처의 16가지 중 '탐진치 삼독으로부터 벗어난 마음'이나 '해탈한 마음에 대한 위빠사나'(vimutta cittan ti paj n ti) 의 언급은 불가능하다.

위빠사나 상태는 제4선 이후의 선정 상태에서 초선 이전은 물론 탐진치를 벗어난 상태를 포함하여 해탈심(解脫心)에 이르기까지 가장 넓은 범위가 그 행법의 포착대상이다. 만약 몇몇 연구자들의 주장처럼 초선 이전이나 초선의 상태에서 가장 온전한 위빠사나 상태라면 그 이후에 가능한 심소는 아예 관찰 대상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초선 이후라야만이 나타나는 선법(善法)을 초선 이전이나 초선의 상태로는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경증과 교리적 논증은 지면 관계상 다음으로 미룬다 하더라도 이번 기회에 제시하고픈 경전적 근거 하나만을 들어보자. 그것은 다름 아닌 사선과 위빠사나의 사념처 정형구가 보여주는 차제구조이다. 먼저 제4선의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낙(樂)도 없어지고 고(苦)도 없어지고(pah na), 이전에 있었던 '기쁨과 근심도 제거된다(somanassa -domanass na atthagam )'. 그리하여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사(捨, 완전한 평정심)에 의한 염(念, sati)과 청정(淸淨)의 제4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Sukhassa ca pah n dukkhassa ca pah n pubbe va somanassa -domanass na atthagam adukkha asukha upekh -sati -p risuddhi catutthajjh na upasampajja viharati." 한역은 다음과 같다. "離苦樂行先滅憂喜 不苦不樂捨念淸淨 入第四禪."}}

다음으로 사념처의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여기에는 몸에서 몸을 따라 관(觀)하는 것에 머문다. 이는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vineyya loke abhijjh domanassa ) '오롯한 정진력( t p )'과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sampaj no)' 그리고 '염(수동적 주의집중)이 이루어진 상태'(satim )에서이다. 느낌에서 느낌을 … 마음에서 마음을… 법에서 법을 따라 관하는 것에 머문다. 이는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 '오롯한 정진력'과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 그리고 '염(수동적 주의집중)이 이루어진 상태'에서이다.{{ "idha bhikkhave, bhikkhu k ye k y nupass viharati t p sampaj no satim vineyya loke abhijjh domanassa . Vedan su vedan nupass viharati t p sampaj no satim vineyya loke abhijjh domanassa . Citte citt nupass viharati t p sampaj no satim vineyya loke abhijjh domanassa . Dhammesu dhamm nupass viharati t p sampaj no satim vineyya loke abhijjh domanassa ."}}

여기서 초점은 바로 제4선의 '기쁨과 근심도 제거된다(somanassa-domanass na atthagam )'와 사념처의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vineyya loke abhijjh domanassa )'이다. 양쪽 모두 '근심(domanassa){{ 여기서는 일단 domanassa를 한역 우(憂)에 따라 '근심'으로 옮긴다. 이 용어에 대한 우리말 번역에 있어 필자는 이전에 여러 번 지적한바 있다. 많은 연구자들이 위빠사나 수행과 관련해 이 말을 영역의 영향인지 '혐오'라고 옮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재고해야 한다. 이유는 교리 상에 있어 이 말은 수온(受蘊)의 한 종류로 분류되지 행온(行蘊)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이 제거되거나 제거되고 난 후(vineyya{{ 빠알리어에서 vineyya는 동명사(gerund)로서 문법학자들에 따라 절대분사(absolutive)나 불변화 과거분사(indeclinable past participles)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주로 설명하는 행위의 완료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 바로 앞의 '몸에서 몸을 따라 관(觀)하는 것에 머문다(k ye k y nupass viharati)'의 주동사인 viharati 라는 행위에 앞선 행위의 완료를 나타낸다. 드물게는 주동사와 행위와의 동시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위빠사나의 사념처는 제4선과 맞물려 수행되고 있음을 역력하게 보여준다. }})의 지경'임을 보여주는데, 이는 사념처가 제4선에 바탕하고 있음을 그대로 잘 보여준다.

단계법인 사선에서 왜 근심이 제4선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가는 앞의 사(捨)의 경우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이 같은 사념처의 정형구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 는 위빠사나 수행에 앞서 abhijjh 에서 domanassa까지 쉬고 난 후임을 말한다. 즉 초선의 오개 가운데 첫 항목인 탐욕(abhijjh 또는 k macchada) 에서부터 제4선의 마지막인 근심까지를 말한다. 즉 앞에서 말한 바처럼 위빠사나는 초선 이전에서 제4선 이후의 해탈심(解脫心)에 이르기까지가 그 관찰대상임을 잘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제4선 이후에 혜학의 위빠사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졸고, 〈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한국선학》 제 1 호 2000. pp.327-330, 337-338}}

3. 반론에 대한 반비판

각묵 스님의 마지막 회 정리처럼 필자가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바탕인 그래서 '교리적인 연결고리'로 제시되는 사선(四禪)과 같은 선정에 대해 인경스님, 김재성 그리고 임승택은 모두 '아니다', '그럴 리 없다'라고 이의를 제기하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각묵 스님 또한 이들과 함께 "선정을 통해서 이 둘의 같은 점을 찾으려는 시도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결국 이들의 공통적인 주장은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바탕 또는 전제조건으로서 선정이나 사선은 도저히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일일이 종합적인 비판은 할 수 없지만 대략 몇몇 주장만을 한정하여 그 맹점만을 간단히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려 한다.

김재성, "그 선정이 반드시 사선(四禪)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에서 확인할 수 있는 수행법이다. 조준호 선생이 말하는 사선을 바탕으로 한 위빠사나에 대한 주장은 일부 초기경전을 이론적으로만 파악한 결과이며, 오히려 풍부한 위빠사나 수행의 길을 협소하게 만들어버리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 마하시 수행법에서는 순간적으로 관찰대상에 마음이 집중된 상태(刹那定)에서도 … 설일체유부에서는 초선정에 이르지 못한 선정(未至定)에서 수타원의 깨달음이 가능 … 따라서 초기불교의 사상을 보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부파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은 초선의 포함하는 사선을 미리 닦지 않아도 대상에 순간적으로 마음을 집중할 때 깨달음의 체험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현재 미얀마의 위빠사나 수행은 이런 점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불교신문> 제2016호 5면(2004년 3월 23일). }}

"일부 초기경전을 이론적으로만 파악한 결과"라고 지적하면서도, 스스로는 초기불교적인 답변은 건너뛰고 곧바로 미얀마의 마하시 수행법의 찰나정이나 부파의 논서와 주석서의 이야기에 의존하여 답변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의 범위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보여준다. 즉 초기불교 범위가 아닌 찰나정과 미지정과 같은 논서나 주석서의 선정설로 "반드시 사선일 필요는 없다."라는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칫 초기불교 범위라도 되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 현재까지 필자가 이해하고 있는 한 초기불교에서 초선 이전은 선정의 범위가 아니다. 그렇기에 초선이다.

그리고 수없는 경전에서 한결같이 반복되는 것은 계정혜 삼학 가운데 정학의 범위는 어디까지나 사선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만약 선정을 바탕하지 않고서는 지혜가 생기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결국 초기불교 범위 안에서는 사선 이외에는 따로 없다는 사실이다. 아니면 불교 선정론에 있어 대단히 지엽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찰나정을 이론적으로나마 초기불교 내에서 정학의 범위로 증명하게 된다면 그때 그의 반론은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임승택, "전형적인 초기불교의 경전으로서 〈상윳따니까야〉(VIII.7)에는, 500명의 아라한 중에서 선정(定)과 지혜(慧) 모두를 갖춘 이는 60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대다수가 지혜의 방법으로 아라한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따라서 높은 단계의 선정만을 찬양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또한 역대 조사들의 행적을 전하는 어록이나 문집 등에도 선정의 상태와 무관하게 깨우침을 얻는 경우가 종종 기술된다. 따라서 선정을 중심으로 한 '양자간의 연결고리'는 개인적인 바람의 차원에서 그친다."{{ <불교신문> 제2020호 5면(2004년 4월 6일).}}

이 같은 반론 또한 논점의 범위에서 벗어난 대응이다. 그것은 '화두선과 위빠사나의 연결고리가 선정'이라는 한정된 범위에서 논의해 보자는데, 이를 비껴 나가면서 엉뚱하게도 '선정 없는 지혜'와 깨달음의 가능성의 이야기로 돌리고 있다. 결국 이러한 반론은 화두선이나 위빠사나 모두 선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행법이거나, 아니면 관련이 있더라도 아주 미미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된다. 결국 선정 수행은 아주 하찮은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하여 500명 가운데 60명을 제외하고는 대다수는 모두 선정 없이 지혜를 성취했다는 것은 물론 조사들도 마찬가지로 "선정과의 상태와 무관하게 깨우침을 얻는 경우"를 들고 있다. 전적으로 '화두선과 위빠사나를 연결고리로 선정'의 고찰은 회피하고 있다. 그리고서 필자의 입장은 한낱 '개인적인 바람의 차원으로 그친다'고 간단하게 처리하고 있다.

이로서 그는 선정의 바탕 없이 지혜가 있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나아가 양자는 각각 독립한 별개의 영역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또한 선정과 무관하게 깨우침을 얻는다는 조사들을 이야기하는데, 도대체 이러한 식의 선정 개념의 이해가 합당한지는 앞으로 더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초기불교이든 화두선이든 자리 틀고 앉은 좌선만이 선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여기서 더 큰 맹점은 필자의 제의에 중심 반론으로 들고 있는 '선정없는 지혜'가 압도적이라는 〈상윳따니까야〉의 계산은 지극히 자의적인 단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500명 가운데 선정이 바탕이 되지 않은 어떠한 경우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전에 김재성이 찰나삼매에 의한 순관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논문에도 나타나는데 재미있게도 그 논평에 임승택과 함께 필자가 참여한 적이 있다.{{ 김재성, [순관(純觀, suddha-vipassan )에 대하여-남방상좌불교 수행론의 일고찰〉 {불교학연구} 제4호(서울, 불교학연구회, 2001) , p. 277과 n. 57.}}

그리고 임승택의 계산이 전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은 당장에 김재성의 분석에서도 드러난다.{{ 참고 앞의 논문, pp. 275-278.}}

다시 말해, 그의 이해와는 반대로 60명을 포함한 500명 모두가 선정이 배제된 것이 아니라 선정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초기불교의 내용은 차지하고서라도 주석서에서조차 혜해탈자는 다섯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이 가운데 넷은 사선과 관계되며 마지막 남은 것은 관행자 또한 찰나정이 이야기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논의를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있는 각묵 스님은 다소 애매한 논리를 펴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임승택 등의 오류를 간과하고서 화두선과 위빠사나의 연결고리를 선정에서 찾으려는 필자에 반해 다른 반론자들의 입장에 찬성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필자의 주장처럼 양자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리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각묵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빠사나는 바로 반야를 뜻하지 선정이나 삼매가 아니다. 《육조단경》의 '유론견성 불론선정해탈(有論見性 不論禪定解脫)'은 중국 남종선의 전통이 견성이라는 지혜를 실현하는 체계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으며 단경이나 서장 등의 어록에서도 이는 자명하다. … 선정만으로는 견성이나 해탈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초기불교와 남북의 양 전통에서 분명하다."{{ <불교신문> 제2024호 7면(2004년 4월 20일). }}

필자의 주장은 화두선이나 위빠사나가 그 자체로 바로 사선과 같은 선정을 뜻한다는 것이 아니라 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그 교리적 연결고리를 사선을 통해 살펴보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점은 별로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대신에 앞의 다른 토론자들과 궤를 같이하여 선정의 바탕이 없는, 선정을 통하지 않고서 가능할 수 있다는 견성이나 해탈에 대한 앞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육조단경》의 "오직 견성을 말하고 선정해탈을 말하지 않았다(唯論見性 不論禪定解脫)."라는 구절을 들어 앞의 토론자들의 주장을 더욱 강화시켜 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짧은 구절로 육조 혜능이 선정은 물론 해탈을 말하지 않거나 부정하였다는 맥락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큰 오해이다. 선가의 독특한 화법은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더 설명이 필요없는 문제이다. 만약 스님의 인용 자구 이해처럼 진실로 혜능 대사가 선정을 배제 또는 배격하고 있는 맥락이라면 《단경》 내의 좌선의 의미에 관한 독특한 설명의 '교수좌선 제사(敎授坐禪 第四)는 물론 그토록 널리 회자되는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만약 문자 그대로 육조가 선정을 부정하고 오직 견성만을 이야기했다고 한다면 육조 혜능의 가풍은 결코 선종의 반열에 들어가 있을 수도 없다. 그리고 또한 마찬가지로 혜능의 종지를 이어받고 있는 화두선 전통에서 선원이 있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필자의 제시에 대한 반론은 전체적으로 부파불교적인 해석을 끌어들여 마치 초기불교의 선정과 위빠사나의 관계를 증명하는 것인 양 이용하고 있다. 그 가운데 전체 불교사의 선정사상의 논의에서 보면 지극히 지엽적인 찰나정 개념을 끌어들여 초선을 포함하는 사선을 닦지 않아도 순간 마음 집중에 의한 깨달음을 이야기하려 하고 있다.

이 같은 선정이론이 합당할 수 있는지는 앞으로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립 각을 이룬 모든 점은 선정과 반야지혜가 마치 별개의 영역이라도 되는 듯한 주장이다. 따라서 필자가 오직 선정을 바탕한 반야지혜로서 화두선과 위빠사나를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선정의 바탕이 없는 반야지혜나 깨달음이 바로 있을 수 있다고 반론을 펴고 있다.

4. 선정 바탕 없는 반야지혜나 깨달음은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앞의 토론자 대부분은 혜학이 정학의 바탕 없이 독립하여 있을 수 있는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불교교학이나 선정론에 있어 정학의 바탕 없이 혜학이 별개의 영역으로 존립할 수 있다는 관점은 재고할 문제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은 '선정 없는 지혜'가 마치 수행의 처음 시작부터 가능할 수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즉 처음부터 진리의 관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는 선정 수행 없이도 해탈 또한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점이 필자와 다른 연구자들의 건널 수 없는 이해의 차이로 이제까지 시시비비해왔던 논의의 핵심이다.

필자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반야지혜나 해탈이나 깨달음의 문제에 있어 낮은 단계의 선정이나 심지어 선정삼매와 무관하게 가능한 것으로 보려는 태도는 전적으로 초기 불교교리에 합당할 수 없다는 강조이다.{{ 각묵스님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생각되는데 예를 들면, 불교신문과 선우논강, 화림원이 공동주최한 <성철스님의 백일법문 동안거 간경결제>의 마지막 종합토론에서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혜원스님은 수행자는 계정혜 삼학이 진리에 이르러 , 진성을 깨친다'며 '부처님이 깨달은 것도 선정에 의해서니 논할 필요가 없다'고 일축했다. 잠시 토론은 '삼매에 들어서 깨달음을 얻는가, 못 얻는가'에 각묵스님과 혜원스님이 견해를 달리했다"(<불교신문 제2001호(2004년 1월 30일) 12면) 라는 논의이다.

그리하여 결국 각묵스님은 찰나정을 언급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정황은 각묵스님은 혜원스님과 의견을 달리한 점은 바로 깨달음은 삼매와 관계없이도 또는 찰나정 정도로도 얻을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반대 견해인 '선정 없는 지혜'의 가능성을 말하려는 것은 오랜 불교교리사에 있어 '계정혜 삼학의 차제와 상섭(相攝) 체계'를 일순간에 무너뜨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입장과 함께 근본적으로 선정 개념과 선정수행의 지향점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대단히 의아스럽기도 한다.

만약 선정개념이 좌선만이 아니고 마음의 안정이나 집중과 같은 문제뿐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감정이나 사유를 정화시키는, 다시 말해 선정을 분별망상을 쉬는 내용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으로 이해한다면 분명히 지혜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한결같이 불교는 분명코 '선정 지상주의'이며 '극단적인 수정주의(修定主義)'라는 입장이다. 수정주의를 버렸다는 말은 불교적 선정 이해를 바르게 한다면 결코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별망상을 쉬는 것으로 청정한 마음을 확립하는 것만이 완전한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길임을 강조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이렇게 청정해진 마음의 확립 없이는 반야지혜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불교 교단에서 하루생활의 거의 대부분 선정 수행으로 짜여진 환경이었고 모든 불교의 가르침은 사실 선정론으로 귀결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심대한 비중이다. 이 점을 조금이라도 감안한다면 그 어떠한 경우에도 선정수행의 경시는 물론 부처님은 수정주의를 버렸다거나 하는 식의 주장은 결코 언급할 수 없지 않나 생각을 해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선정과 반야지혜와 관련한 너무나 유명한 그리고 자주 인용하는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마음의 삼매가 없으면 제법(諸法)이 드러나지 않는다."{{ Sa yutta Nik ya Ⅳ. 78., "asam hite citte dhamm na p tubhavanti."}}

"반야지혜가 없다는 것은 곧 선정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선정이 없다는 것은 반야지혜가 없다는 것이다. 선정과 반야지혜를 함께 갖춘 자라야 실로 열반에 가까워진다.{{ Dhammap da. v. 372 , "Natthi jh na apa assa pa natthi ajh yato Yamhi jh na ca pa ca sa ve nibb asantike."}}

두 번째 경문은 일부 연구자에 의해 마치 수행의 '처음 시작부터 지관을 겸수 또는 쌍수'할 수 있다는 전거처럼 이제껏 잘못 사용되는 측면이 있어 필자와 논란이 있어왔다. 사실 수행의 '처음 시작'부터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뒤의 열반을 기점으로 볼 때 선정과 반야지혜는 반드시 구족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즉 수행의 처음 시작에는 반드시 선정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반야지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반야 없는 선정은 있을 수 있지만 선정 없는 반야는 있을 수 없다. 반야는 반드시 선정 수행이 확립되어야만 뒤따른다는 점이다. 선정의 완성으로 선정에 실린 반야의 상태로서만이 열반 해탈의 길을 말한다. 이는 대승의 육바라밀 수행도 마찬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즉 마지막 반야바라밀에 이전의 모든 다섯 바라밀은 회향(廻向)되어야 함을 유독 강조하는 맥락이 그것이다.{{ 대표적으로 《대품반야경》〈攝五品〉(대정장 8, p. 323b) 참고. }}

이는 위빠사나의 반야바라밀은 반드시 지(止)의 선정바라밀이 바탕 또는 전제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즉 처음부터 이전의 다섯 바라밀이 생략된 채 반야바라밀이 이야기되는 맥락이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지관쌍수나 정혜쌍수는 수행의 처음 시작부터 동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따라서 반야 없는 선정은 있을 수 있으나, 선정 없는 반야는 있을 수 없다.

이 같은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비유에 따르면 계(戒)의 그릇이 새지 않고 튼튼할 때 거기에 맑은 정(定)의 물이 동요 없이 담겨질 수 있고, 정의 물이 맑고 고요해야 거기에 밝은 지혜는 저절로 드러날 수 있다. 물이 맑지 않고 동요하면 '있는 그대로의 완전한 모습'(如實)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선정 없는 지혜를 말하는 것은 마치 허깨비를 말하는 것 같이 단지 말뿐이고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5. 마치는 말

최근 불교와 불교 수행문제와 관련해 여러 가지 입장이 표명되고 있다. 그런데 초기불교 전공자의 입장에서 볼 때 결코 동의할 수 없는 함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많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주장은 선정 수행의 전제 없이도, 의지하지 않고서도 진리의 관찰이 가능한 것은 물론 열반·해탈까지도 가능하다는 식의 입장이다. 이러한 주장에 그 동안 힘들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선정 수행의 부담감으로부터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준다는 점에 많은 사람들이 들떠 있다. 그들에게 있어 선정 이해는 마치 고행과 같이 억지로 가부좌 틀고 앉아 있어야 하는 수행이라도 되는 듯이 또는 그러한 가운데 집중 수준을 고도로 올리는 일종의 테크닉 정도로 생각하여 이에 대한 무게에 짓눌려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선정 없는 지혜'의 주장이나 행법 또는 '수정주의를 버렸다'는 식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탈출구로 환영 받고 있다. 현재 학계 또한 마찬가지로 이 지겨운(?) 선정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내심 솔깃해 있다. 더 나아가 한편에서 외국을 내왕하는 일부는 그것을 배워 와서 선정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을 큰 장점이라도 되는 듯이 불교시장에 마치 일종의 상품처럼 내놓고 구매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모두 선정이 배제된 초선 이전이나 낮은 단계의 초선 정도로도 여실지견이 가능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더 나아가 선정을 완성한 후에라야 깨달음이 가능한 수행법이라면 그것은 수정주의적이라고 할 것이라고 마치 비불교적인 것이라도 되는 양 되레 공박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처럼 선정 없이도 또는 쉬운 방법이라는 찰나정이나 더 나아가 낮은 수준의 선정에서만도 열반이나 깨달음까지 가능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이러한 추세라면 앞으로 '도인 수급난'에 허덕이고 있는 한국불교는 조만 간에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현재 많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모두 위빠사나 수행하고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즉 선정수행의 바탕 없이 곧바로 처음부터 반야지혜의 여실지견에 있는 수행자가 넘쳐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혜학의 수행자들이 갑자기 대거 속출 또는 양산되고 있으니 자연히 한국 불교는 크게 변화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기대될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그토록 초선 이전이나 초선에 즈음하는 선정만으로도 여실지견이 가능하고 깨달음과 열반·해탈까지 가능하다면 이제껏 그토록 많은 동아시아 전통의 선수행자들은 초선은 물론 초선의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했다는 것인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동아시아의 선수행자들은 그러한 선정 수행의 전제 없이도, 낮은 단계의 선정만으로도 진리의 관찰이 가능하다는 행법으로서 위빠사나를 '준비단계의 수행법'이나 '분별법'과 같은 낮은 단계의 소승선으로 격하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필자의 주장은 이러한 격하는 단순히 종파적인 입장에 따른 일방적인 폄하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현재 위빠사나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는 행법이나 소개서들을 보면 화두선측이나 불교의 기본 선정론인 사선 체계를 통해 보더라도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거꾸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불교의 근본적인 그리고 본래적인 의미에서 선정 수행의 전제 없이도 그리고 낮은 단계의 선정만으로도 진리의 관찰이 가능한 주장이 얼마나 많은 문제점들을 소지한 주장임을 반증한다.

마지막으로 현재 우리의 현실에서 당장에 가능할 수 없다고 하여 위에 있는 것을 우리에게 억지로 끌어내려 맞출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직 닿지 않는 상위법을 단계를 뛰어넘어 자신에 갖다 부치려는 것도 어쩌면 주제넘은 욕심은 아닌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차라리 가능한 범위 내에서 겸허하게 차츰 위로 오르게 하는 편이 바람직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그렇기에 경전에서는 항상 착실한 차제 실천 수행도로서 계정혜 삼학이 제시되어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적인 차제성을 일탈한 어떠한 주장이나 실수(實修)도 결국 불교가 본래 지향하는 가르침에서 벗어나 오히려 혼란과 혼동만을 더 초래할 뿐이다.

조준호
동국대 및 인도 델리 대 불교학과 석사·박사, 현재 동국대 강사. 저서(공동)로 《실천불교의 이념과 역사》, 주요 논문으로는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난 불타관 연구〉.〈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 〈위빠사나 수행의 인식론적 근거〉,〈초기불교경전에 나타난 수행에 관한 용어와 개념의 검토〉, 〈사띠(sati / sm ti , 念)는 왜 '수동적 주의집중인가〉 그리고 〈사띠(sati / sm ti , 念) 이해에 대한 비판적 검토〉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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