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 도연(道衍) 외로운 노인들을 바라보며

나라가 어려울 때 반드시 일반 시민들 앞에 나서 시국선언을 낭독하는 분들이 있다. 종교지도자들이다. 최근에도 대통령 탄핵이라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불교를 비롯해, 가톨릭 그리고 기독교의 대표자들이 나라를 걱정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혹자는 종교는 본연의 업무에 치중할 일이지 왜 정치에 간여하는가 하는 불만을 털어놓을 수도 있다. 과연 종교지도자는 도탄에 빠지게 될지도 모를 국사에 침묵해야 할 것인가?

중국 명대(明代)의 승려 도연(道衍, 1335∼1418)을 만나보자. 조카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조선시대 세조 임금과 똑같은 과정을 거쳐 황제위에 오른 이가 중국에도 존재하는데 바로 명(明)의 제3대 황제 성조 영락제이다. 영락제의 부친은 원(元) 말기의 정치적·사회적 혼란 속에서, 한발과 황해(蝗害)로 부모를 잃고 황각사(皇覺寺)에 들어가 탁발승으로 수 년 동안 회하(淮河)유역을 유랑하던 주원장이다. 그는 여러 군사집단을 물리치고 1368년 남경에서 명조를 세우고 황제에 등극한다.

30년 간 황제 독재체제를 유지하려고 애쓰던 태조가 숨을 거두자 손자인 건문제(혜제)가 22세로 즉위하였다. 건문제에게 있어서 최대의 적은 북평(현재의 북경)에 주둔하며 강력한 군사력을 소유하고 있던 삼촌인 연왕(후의 영락제)이었다. 건문제는 일찍 그 위험을 간파하고 연왕의 세력을 삭감하려고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연왕은 황제를 보필하고 있는 간신을 제거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1399년 '정난(靖難)의 변(變)'을 일으켜 4년간의 전쟁 끝에 조카를 물리치고 황제위에 등극하게 된다. 이 정난의 역에서 황제의 측근으로 활약한 이가 승려 도연이다.

도연은 강소 장주현(江蘇 長洲縣. 蘇州) 사람으로 본래는 의가(醫家)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은 요(姚), 어렸을 때의 이름은 천희(天嬉)라고 한다. 도연은 그 법명인데, 불문(佛門)에 들어간 것은 그가 14세 때였다. 그리고 불도의 수행에 정진한 것은 물론, 독서를 좋아하고 시문에 뛰어나, 당대의 문호인 고계(高啓)나 송렴(宋濂) 등과도 교류를 가져 신뢰가 깊었다고 한다. 도사로부터 음양술수의 학문을 배우고, 승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병서에도 달통하고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 소양이 연왕의 측근으로 발탁되고 모사로서 활약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정난의 변' 당시에는 도연 자신이 진두에 서서 싸움을 지휘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략전술을 보좌하는 참모로서의 막중한 임무를 담당하였다. 연왕이 건문제에게 반기를 드는 문제로 참모를 불러모아 회의를 여는 순간, 일진광풍이 불어 궁전 지붕의 기와를 날려서 땅에 처박아 산산이 부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마치 자신들의 앞날의 운명을 예견하는 듯. 암울한 침묵이 계속되자 도연이 나섰다.

"좋은 징조가 아닙니까?"

"화상(和尙)은 뭘 말하는 거요. 어디가 길조요?"

도연은 동요하는 기색도 없이 말했다.

"전하께서는 들으신 적이 없는지요. 비룡(飛龍)이 하늘에 오를 때는 풍우를 동반하는 것 말입니다. 궁전의 기와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황색의 기와로 바꾸라는 하늘의 뜻입니다."

용은 황제의 심벌이며, 명대의 제도에 황성의 기와는 황색으로 정해져 있었다. 다시 말하면 연왕이 황제가 된다는 하늘의 계시라는 것이다. 모두를 희망으로 반전시키는 도연의 명석한 해석이었던 것이다.

그 공적에 의해 불교교단을 통할하는 승록사 좌선세(정6품)라는 승직을 제수받은 도연이었지만, 대업을 완수한 후 만년에 그의 마음이 반드시 평안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가장 사랑했던 누이로부터 냉소받았던 것이 최대의 이유였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정난의 변'이 끝난 건문 4년(1402) 6월, 도연의 고향인 소주지방에 대수해가 발생하자 그는 칙명을 받고 구휼활동을 위해 이 지방으로 향하였다. 도연의 입장에서 보면 연왕을 보좌하고 북평에 살게 된 때부터 실로 20년만의 귀향이었다.

그는 금의환향의 모습을 고향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었다. 고향집에는 80세에 가까운 누이가 건재한 채 생존해 있었다. 그러나 그를 맞아주는 누이의 태도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차가웠다. 누이는 수십 년 전, 도연이 처음으로 불문에 들어갔을 때, 화상이 되면 자비심을 잊지 말도록 그에게 충고한 적이 있다.

그러나 '정난의 변'이 일어났을 때 연왕의 군대가 얼마나 잔인하였던가를 목격하였고, 게다가 총참모 자격으로 자신의 동생이 가담하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내가 가르친 화상의 자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며 심히 개탄하였다고 한다. 20년만의 재회에 마음을 두근거리며 도연이 집의 문으로 들어섰으나, 누이의 말투는 빈정댐으로 가득 찼다.

"나로서는 도저히 그러한 일은 할 수 없어요. 옛적의 화상은 이러한 인간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목숨이 잘도 붙어있군요."

말을 마친 누이는 재빨리 안쪽 깊숙한 곳으로 물러가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침울한 기분으로 도연은 고향을 떠나 북평으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도연의 누이는 화상이 자비심을 잃어버렸다고 나무랐지만, 역사를 공부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좀 다르게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라가 난세에 처하고, 그 난세에 떠밀린 중생이 유랑하고 있는데 본분만 찾는 것이 진정 옳았을까? 물론 난세의 백성을 거두어서 보살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고 또 더 바람직할 수도 있었겠지만, 너무 수동적인 태도이지 않았을까? 혹여 자비심의 발휘라는 승려의 본분을 떨쳐버리고, 세속에 뛰어들어 능력 있는 인물을 황제 자리에 앉혀서, 백성들이 안정된 나라의 울타리 안에서 평안하고 복을 받기를 바랐던 점에 도연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오늘도 동악(東岳)에는 젊은 스님들이 어깨에 책을 짊어지고 가파른 길을 올라오거나, 묵중한 코란도를 몰고 교정으로 들어온다. 깊어 가는 밤인데도 불구하고 대학원 휴게실에서 연구에 매진하던 스님들이 차를 마시는 모습이나 여럿이 모여서 토론하는 광경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도연이 새로이 왕조를 창업한 황제의 최고 참모가 되어 현실 정치에 참여하였듯이, 배움 도중에 있는 젊은 스님들은 끝없는 구도 행각을 통해 자신을 완성해야 할 것이다. 또한 불경만이 아니라 성서를 비롯한 타종교의 교리, 더 나아가 역사, 문학, 철학 등의 다양한 학문에도 정통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정진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고, 나라가 방황하고 있을 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불교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갈등과 혼란으로 점철되는 오늘 또 다른 승려 도연을 기다리고 있다면 과한 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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