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만해사상 실천선양회 Home
불교평론 소개 l 지난호 보기
 
 인기키워드 : 사색과 성찰, 청규, ,
> 뉴스 > 칼럼 > 사색과 성찰
     
길에서 만난 부처 / 김봉현
김봉현 제주불교사연구회 연구원
[19호] 2004년 06월 10일 (목) 김봉현 제주불교신문 편집부장
도법·수경 스님 그리고 순례단 선우(善友)들, 여여(如如)하신가요?

지금쯤은 아마도 거제도나 경상도의 어느 마을 저잣거리를 걷고 계시겠군요.

여전히 ‘생명’과 ‘평화’라는 화두를 바랑에 짊어지고 그림자에게 길을 물으며 가고 있으시겠지요? 백리길 천리길을, 강둑길 비탈길을 따라 묵묵히 걷고 계실 두 도반(道伴) 스님과 이병철 위원장님, 박남준, 이원규 시인, 그리고 권오준, 송정희, 황인중, 조선희, 김민정, 홍상미…….

눈앞에 선한 생명평화탁발순례단원들. 떠오르는 면면마다 보살의 화현(化現)입니다.

수경 스님!
지난 4월 22일, 바닷바람이 휘뚝하게 불던 날, 순례단 일행과 함께 성산포 항에 내리실 제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습니다.

45일간 지리산 1,500리 길을 탁발하고 제주 땅을 밟으시는 울림이 가슴에 전해진 탓이기도 했습니다만, 그보단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한 삼보일배(三步一拜)에 왼쪽 무릎 관절을 바쳐 버린 수경 스님. 그 가냘픈 지팡이에 의지해서야 겨우 갑판을 내려오시는데, 걸음조차 절뚝절뚝 힘겹게 내딛는 모습에, 그 동안 고행길이 녹록치 않았음이 순간 가슴 깊숙이 저며온 것입니다.

삼보일배라는 항의 방식.
투쟁과 욕설과 비난 대신 참회하고 속죄하며 자신을 땅바닥으로 낮추는 ‘하심’의 위력을 당신은 보여주셨습니다. 세상 그 어떤 투쟁방식보다 훨씬 더한 울림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몸을 낮출수록, 말을 하지 않을수록, 오히려 주장하는 바가 극도로 선명해지는…….

놀라운 역설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길을 걷습니다. 탁발순례. 길을 걸으며 사람을 살리고, 땅을 살리고, 세상을 살립니다. 그러기에 지금 당신이 다시 탁발순례길에 짚고 있는 그 지팡이는 한낱 허약한 육신을 지탱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세상의 비뚤어진 모든 것들을 향해 매섭게 경책(警策)하는 장군죽비인 것입니다.


도법스님!

어찌 그리도 명쾌하신지요? 스님과 이야기 나누고 있노라면 막힌 가슴이 어느새 확 뚫려 있습니다.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말씀과 ‘부처 짓하면 부처이고 도둑질하면 도둑놈이다’는 비유는 평생 챙기고 가야 할 화두가 됐습니다.

몇 해 전 선래왓에서 하룻저녁을 꼬박 새워 가며 토론(?)할 때나, 이번 제주탁발순례 여정에서 몇 날을 길 걸으며 스님과 마주할 때나, 당신은 늘 스무 살 청년입니다.

시계추보다 더 빈틈없는 카리스마, 질긴 생명력으로 호흡하는 억새풀, 모진 바람에도 흔들림 없는 정자나무, 한 줄기 맑은 향과 한 권의 경전. 뭐 그런 이미지들이 당신으로부터 연상됩니다. 육신의 나이야 구름 따라 떠도는 운수납자라 해도 속일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세상을 향해 토해내는 스님의 열정만큼은 늘 스무 살 청년입니다.

탁발은 얻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탁발은 단순하게 얻는 행위만은 아닙니다. 주는 이의 입장에선 나눔의 실천입니다. 그리고 받는 이의 입장에선 겸손과 감사를 배우는 마음공부이기도 합니다. 주는 쪽과 얻는 쪽이 동시에 스스로를 가꿀 수 있습니다. 순례단이 한 달여 동안 제주 땅을 거쳐가는 사이, 이제 저 아득히 있어서 딴 세상 이야기 같았던 ‘생명’과 ‘평화’가 우리 곁에 있음을 절박한 심정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무지몽매한 저 같은 범부들에게도 소리 없는 일갈(一喝)로 참회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은 길 걸으며 만나는 세상 모든 이들과 유정무정의 생명체들에게 생명평화가 막연한 것이 아닌, 평범한 우리의 삶 속에서 일구어 낼 수 있는 문화라는 점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래서 낱알 같은 그들을 등불로 묶어 내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결사운동을 이루어 내고 있습니다. 평화의 등불이라는 이름으로, 생명평화결사(結社)의 이름으로.

한 달 동안 육백 리가 족히 넘는 제주 땅을 탁발했습니다.
《화엄경》 〈입법계품〉의 선재 동자의 구도행각처럼 법(法)을 구걸했습니다. 밥을 주면 밥을 먹고 욕을 하면 욕을 먹었습니다. 칭찬, 힐난, 격려, 충고, 모두 안고 갑니다. 처음부터 비우고 나누자고 떠난 길이니 받는 것이 칭찬이면 어떠하고 힐난이면 어떠하겠습니까?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 보면 모두가 경쇠소리의 긴 여음인 것을.

순례단은 그 길에서 농부도 만나고 어부도 만나고 상인도 만나고 노동자도 만났습니다. 군수, 시장, 국회의원도 만났습니다. 목사님도 수녀님도 신부님도 만났습니다.

탁발순례의 길에선 돈이 많고 적음도, 지위가 높고 낮음도, 종교의 같고 다름도, 일체의 차별과 벽이 없었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사귀고, 뜻을 함께하는 동지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평화의 섬을 가꾸려 하는 제주 사람들의 건강한 삶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가능성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과 경쟁논리로 무장되어 가는 안타까움도 역시 보았을 것입니다.

무고한 4·3영혼의 희생현장에서, 자고 나면 늘어가는 골프장에서, 한없이 파괴되는 곶자왈에서. 허나 너무 상심마십시오. 현명하고 강인한 제주인들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수탈과 침략의 역사로 점철되어온 아픔의 땅이지만 제주인, 그 누구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지난 역사에 죽음과 희생이 있었다면 이제 다시 생명살림과 화합상생의 문화를 일구어 낼 것입니다. 제주 사람들의 손으로 해낼 것입니다.

신명나는 세상, 멋들어진 세상, 살 만한 세상, 미륵이 온다는 세상, 그 세상이 바로 생명과 평화의 세상입니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거니, 마음이 비어 있어 어딜 가나 넉넉합니다.
이렇듯 생명평화의 본래 마음 잃지 않으면 그 어느 곳인들 극락이지 않겠습니까? ■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댓글달기는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수(0)  
전체기사의견(0)
불교평론 소개독자투고불편신고구독신청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135-887]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12-9번지 MG타워빌딩 3층 | Tel 02-739-5781 | Fax 02-739-5782 | 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사성
Copyright 2007 불교평론.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udreview@hanmail.net
불교평론을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및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