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네가 잘생겼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못생겼다고 생각하느냐?"

몇 년 전 찾았던 조계산 깊은 산 속의 한 암자. 큰스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스님 앞에서 좋은 법문을 기대하고 자리에 앉았던 나는 그만 당황한 나머지 귓등마저 화끈거렸다.

'무슨 뜻이지?' '왜 스님이 이런 질문을 하시지?'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다 결국 '에라, 본전은 찾겠지...'싶은 생각에, "못 생겼다고 생각하는데요..."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스님은 껄껄 웃으며, "'그때는 '저는 잘생긴 것, 못생긴 것 둘 다 잘 이용할 줄 압니다.'라고 해야 하는 게야!" 라고 말해 주었다.

그제 서야 스님의 질문을 너무나 좁게 이해한 스스로가 부끄럽고 무안해서 고개조차 들 수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잘생긴 것은 무엇이고 못 생긴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을 잘 이용한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 이따금씩 그 때 그 스님의 말씀이 떠올라 그것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곤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이란 흔히 구분하는 방식으로 외적인 아름다움과 내적인 아름다움을 떠올리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란 그렇게 나누기 쉬운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대한 사람들마다의 의견과 접근 방식들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하이라이트를 주는 부분이 어디인가에 따라 그 사물이 달리 보이듯, 요즈음 아름다움에 대한 강조는 지나치게 한 부분만을 비추어서 어느 측면으로는 맹목이 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현상들의 원인은 남의 시선에 신경을 쓰고 드러난 결과만을 중시하는 가치관과 급변하고 있는 가치들을 아무런 반성 없이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에서 연유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인터넷상의 화두는 '얼짱' '몸짱'이다. 소수의 계층에서 시작한 '짱 문화'가 이제는 주류 문화 코드가 되어, 옆집 아줌마도 동네 초등학생도 '짱'의 반열에 오르려는 부단한 노력들을 한다. 과도한 '얼짱'과 '몸짱'의 열기는 급기야 강도마저도 얼굴이 예쁘다는 이유로 팬클럽을 조직하고, 순식간에 3만 명의 회원이 가입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문화 현상이 보여 주는 외모지상주의의 세태를 보노라면, 이 신드롬이 상업적이고 비균형적인 가치관 속에서 점점 노골적이고 극단적으로 치닫는 다는 부정적인 시각을 지울 수 없다. 이제 성형수술은 더 이상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 되었고, 선천적인 '얼 짱'이 못된다면, 최소한 후천적 노력을 통해서 '몸 짱'은 되어야 예의인 세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에 따라서 아름다움의 추구의 주체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미 그 전통적인 경계들을 무너트린 지 오래로, '꽃미남'이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관심을 전통적인 여성의 영역에서 남성의 영역으로 확장시켰다면, '얼 짱'은 그러한 성별의 구분 뿐 만 아니라 세대의 구별까지도 초월하게 만들었다. '얼 짱' 이 되고 싶어 하는 초등학생들의 장래 희망 1위가 연예인으로 바뀐 것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불교 경전 속에도 이러한 외모에 대한 언급이 재미있게 오해할 수 있도록 나와 있다는 것이다. '삼십이상팔십종호(三十二相八十種好). 붓다가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신체적 특징과 80가지의 신체에 있는 미묘한 표지에 관한 항목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은, 마치 성불하기 위한 외형적인 조건들이 상당히 까다롭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꽃미남' 이어야 성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표현은 논의를 위해 일정부분 곡해한 것이기는 하지만, 외모에 대해 갖고 있던 우리의 관념이라는 것 속에 아름다운 것은 선한 것, 절대적인 것이라는 생각과 연결지어진다는 것이고, '아름다운 외모의 추구'라는 일관된 성향에 관해서는 불경 속에서건 세간 속에서건 어디에서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당나라 관리를 등용하는 시험에서 임용의 기준이었던 '신언서판(身言書判)'. 이 중에 신(身)이라고 하는 기준에 주목을 해보면, 외모에 대한 관심이 그저 개인적인 차원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것이 가장 처음 등장하는 덕목으로, 신(身)이 뜻하는 단정한 용모는 고금을 막론하고 여전히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 중의 하나였고, 이러한 외모에 대한 신뢰는 그 사람의 내면에 대한 신뢰 뿐 만 아니라 외모를 실력에까지도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이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 잘생긴 외모에 대한 선호는 인간 본성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주체적이고 다양해야할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이 비판 의식 없는 추종으로 가치의 공존이라는 여유가 없이 한 가지 획일적인 기준으로 모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문제에 대한 의식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연예 산업, 뷰티 산업 등 대량 자본에 의해 상업적으로 조작된 자본주의가 스폰서 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미교(美敎)'의 신자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에 열렬히 환호하는 사람들을 무작정 비난하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여기서 우리가 이러한 현상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이러한 우리들 각자의 태도에 대해 반성과 고민을 생각보다 열심히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왜냐하면 비판 없는 추종은 건전한 방향으로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꼭 불교적인 생각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일시적인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불꽃이 진정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순간에 살고 순간에 지는,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아름다운 것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우리의 태도를 어떻게 유연하게 가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필요해지는 것이다. 늘 꾸미고 가꾸는 우리의 얼굴과 몸은 결국은 원효가 마셨던 해골바가지로 돌아간다. 외적인 아름다움에서 오는 만족과 위안감과 자신감을 다 부질없다며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진정 우리가 보다 지속적인 행복을 위한다면, 아름다움에 대해서 유연한 접근 방식을 갖고 다양한 아름다움의 공존 방식을 찾아가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 짱', '웃음 짱'등도 멋진 '짱' 들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이 '외면적 아름다움보다는 내면적 아름다움을 추구하자'는 식의 도덕 교과서적이고, 진부한 결론으로 비추어지길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은 외면적 아름다움도 중요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멋진 옷차림은 전략이고, 호감 가는 외모가 취업도 잘된다. 또, 일단 '짱'이 되면, 부와 명예도 보장된다. 게다가 '짱'도 나름의 내면적 덕목도 지니고 있다.

'몸짱 아줌마'가 '몸짱'이 되기까지는 각고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임을 볼 때, '짱'이 되는 것 역시 대단한 자기 노력과 절제가 필요한 일종의 수행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급변하고, 주체적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획일적으로 몰아세워지는 가치들 속에서 우리의 태도가 그에 맞게 유연하게 바뀌지 않는다면, 그 변화 속에서 방향을 잃어버리기 쉽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와 그것의 수용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고, 그러한 가운데에서 어떠한 방향을 잡아서 나아가든 그것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이나 그 방향이 그저 외모만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스님의 말씀처럼 '잘생긴 것'과 '못생긴 것'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유연한 태도는 한결 여러 아름다움들의 공존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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