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식육관食肉觀 비교

1. 들어가는 말

상좌불교와 대승불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로 다른 전통을 갖고 있다. 교리적·사상적 측면은 물론 실천적 특성에 있어서도 거의 정반대로 보이는 입장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졸고,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실천적 특성 비교], {釋林} 제36집 (서울: 동국대 석림회, 2002), pp. 73∼94.}}

계율적인 측면에서는 일반적으로 상좌불교가 보다 보수적이고, 대승불교는 상대적으로 느슨한 진보적인 성향을 띄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출가자가 고기를 먹는 것, 즉 식육(食肉)에 한에서는 상좌불교 국가에서는 허용되고 있는데 반해서 오히려 대승불교 국가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다.

현재 불교 승단에서 채식을 고수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대만·홍콩·한국·일본 등 주로 대승불교권이다. 반면 스리랑카·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 등 남방 상좌불교권에서는 스님들이 주로 걸식(탁발)과 청식(請食; 신도들의 식사 초대)에 의존하여 생활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육식이 허용되고 있다. 그 대신 오후불식(午後不食)을 철저하게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정반대의 현상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초기불교 교단의 계율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완화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대승불교시대에 이르러 더욱 더 엄격하게 식육을 금지하는 사상과 계율이 나타났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식육과 관련하여 이러한 의문을 제기한 선행 연구가 있다.{{ 申星賢, [不食肉戒 一考] {佛敎學報} 제35집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98), pp. 207∼225.}}

하지만 이 논문에서도 이러한 문제만 제기했을 뿐,{{ 신성현은 "대승불교시대에 들어 왜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였을까. 특히 중기 대승경전들에서 그러한 주장들이 대두되게 되었는가. 이러한 입장은 대승불교의 本義와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라는 문제만 제시해 놓고 있다. 신성현, 위의 글, p. 208. }} 그 정확한 이유와 근거는 다루지 않았다.

이 논문도 근본적으로는 육식의 허용과 육식의 금지 중 어느 쪽이 붓다의 본래 입장인가? 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지나치게 엄격한 채식주의자들의 주장과 식육 자체를 죄악시(罪惡視)하는 편견을 바로 잡기 위해 시도된 것임을 먼저 밝혀둔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채식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부처님의 본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서 초기불교에는 출가·재가를 막론하고 절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해 놓은 엄격한 계율은 없다. 다만 부처님은 재가자들에게 "산 것을 몸소 죽여서는 안 된다. 또 남을 시켜 죽여서도 안 된다. 그리고 죽이는 것을 보고 묵인해도 안 된다. 난폭한 짓을 두려워하는 모든 생물에 대해서 폭력을 거두어야 한다."{{ Suttanipata (=Sn), ed. D. Andersen and H. Smith, (London: PTS, 1913), p. 69. }}라고 가르쳤다.

필자는 이러한 초기불교적 시각에서 식육에 대한 지나친 편견을 해소하기 위해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식육관(食肉觀)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2. 식육에 대한 붓다의 입장

1) 데와닷따의 다섯 가지 제안

붓다는 불교도가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데와닷따(Devadatta, 提婆達多)가 제안한 불교교단 개혁에 대하여 붓다가 취한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팔리 {율장(律藏)} [소품(小品, cullavagga)]에 의하면, 데와닷따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사항을 세존께 제안했다.

즉 ① 비구들은 평생토록 산림에서 거주해야 하며 마을[村邑]에 거주하면 죄가 된다. ② 비구들은 평생토록 걸식해야 하며 청식(請食)을 받으면 죄가 된다. ③ 비구들은 평생토록 분소의(糞掃衣)를 입어야 하며 거사의(居士衣; 재가 신자가 보시한 옷)를 입으면 죄가 된다. ④ 비구들은 평생토록 나무 아래에서 거주해야 하며 집 안에서 거주하면 죄가 된다. ⑤ 비구들은 평생토록 물고기와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야 하며 먹으면 죄가 된다.{{ Vinaya Pi aka(=Vin.), ed. H. Oldenberg, 5 volumes (London: PTS, 1879∼1883), Ⅱ, p. 197.}}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조항{{ 데와닷따가 제의한 다섯 조항은 문헌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숲에서 살고, 나무 아래 앉는 대신 소( , 우유에서 정제된 것)를 먹지 말 것, 소금을 먹지 말 것, 또는 우유를 마시지 말 것이라고 기록한 경전도 있다. 소( )가 낙(酪)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소( )와 낙(酪)은 유제품을 말한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서울: 샘터, 1990), p. 311 참조.] }}을 불교 교단에서 실천하자고 데와닷따가 붓다께 제안했을 때, 붓다는 다음과 같은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즉 ① 비구는 원에 따라 산림에 머물러도 좋고 마을에 머물러도 좋다. ② 비구는 원에 따라 걸식을 해도 좋고 청식을 해도 좋다. ③ 비구는 원에 따라 분소의를 입어도 좋고 거사의를 입어도 좋다. ④ 8개월 동안은 나무 밑에서 좌와(坐臥)해야 함을 인정한다. ⑤ 스스로를 위해 죽이는 것을 보거나 죽였다는 소리를 듣거나 그런 의심이 가지 않는 것은 먹어도 좋다.{{ Vin. Ⅱ, p. 197.}}

이러한 붓다의 답변에 데와닷따는 승복하지 않고, 500명의 비구들을 데리고 교단을 떠나 별도로 생활한 것으로 되어 있다.{{ 李箕永, {釋迦} 世界大思想全集 5 (서울: 知文閣, 1965), p. 243.}} 데와닷따의 교단은 그 이후에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장(玄 )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의하면, 현장스님이 벵골지방을 방문했을 때, '유락(乳酪)을 먹지 않고 데와닷따의 유훈을 받든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데와닷따의 교단이 그때까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앞의 책, pp. 308∼311 참조.] }} 여하튼 데와닷따가 제안한 것은 당시 인도 전통의 출가자 생활방식이었던 사의법(四依法)에 육식 금지의 조항을 추가한 것이다.

사의법이란 ① 출가자는 걸식으로 살아가며, 목숨을 마칠 때까지 이에 힘써야 한다. ② 출가자는 분소의(糞掃衣)에 의지하여 살아가며, 목숨을 마칠 때까지 이에 힘써야 한다. ③ 출가자는 수하좌(樹下座)에 의하여 살아가며, 목숨을 마칠 때까지 이에 힘써야 한다. ④ 출가자는 진기약(陳棄藥)에 의해서 살아가며, 목숨을 마칠 때까지 이에 힘써야 한다.{{ 사토우 미츠오 지음·김호성 옮김, {초기불교 교단과 계율}(서울: 민족사, 1991), p. 35.}}

붓다 재세시 인도에서는 수행을 목적으로 출가한 사람이라면 교단과 교파에 관계없이 기본적으로 걸식·분소의·수하좌·진기약 등 사의법에 의존하여 생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데와닷따의 제안은 불교 교단의 비구들이 이 사의법을 철저히 준수하고, 여기에 다시 육식금지 조항을 추가하여 엄격한 계율주의를 견지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붓다는 데와닷따가 제안한 마지막 다섯 번째의 불식육(不食肉)에 대하여 세 가지 점에서 깨끗한 고기, 즉 삼종정육(三種淨肉)은 먹어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팔리 {율장} [대품(大品, Mah vagga)]의 약제편(藥劑篇)에 의하면, 자이나교의 신자였던 시하(S ha) 장군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불교의 재가 신자가 되었다. 그는 부처님과 제자들을 초청하여 육식이 포함된 공양을 올렸다. 이에 대해 자이나교도들이 시기심으로 사문 고따마가 자신을 위해 가축을 죽여서 만든 음식인 줄 알면서도 그 고기를 먹었다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붓다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구들이여, 자기 자신을 위해 죽인 고기라는 것을 알면서 그 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 누구든지 그러한 고기를 먹으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만일 자기를 위해 죽이는 것을 보지 않았고, 자기를 위해 죽였다는 소리를 듣지 않고, 자기를 위해 고의로 죽였다는 의심이 없다면, 즉 세 가지 점에서 깨끗한 생선과 고기는 먹어도 좋다고 나는 허락한다."{{ Vin. I, p. 238.}}

또한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 ya, 中部)} 제55 [지바까 숫따(J vaka sutta)]에 의하면, 의사 지바까는 외도(外道)들이 '사문 고따마는 자신을 위해 죽인 동물의 고기인 것을 알고도 먹는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사실인지 비방인지에 대해 세존께 여쭈었다. 붓다는 지바까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 주었다.

"지바까여, '사문 고따마를 위해서 생명을 죽이는 자들이 있는데, 사문 고따마는 그 고기가 자신을 위해 죽인 동물의 고기인 것을 알고도 먹는다'고 말하는 자들은 나에 관하여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진실이 아닌 말로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지바까여, 나는 세 가지 경우, 고기를 수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보여진 것이고, 들려진 것이고, 추측된 것인 경우이다. 지바까여, 나는 이러한 세 가지 경우, 고기를 수용한다고 말한다. 즉 보여지지 않은 것이고, 들려지지 않은 것이고, 추측되지 않는 경우이다. 지바까여, 나는 이러한 세 가지 경우, 고기를 수용한다고 말한다."{{ Majjhima Nik ya, ed. V. Trenckner and R. Chalmers, 3 volumes (London: PTS, 1887-1901), I, p. 369.}}

이와 같이 자기를 위해서 죽인 것이라는 견(見)·문(聞)·의(疑)의 세 가지 사항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생선이나 고기를 먹어도 좋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동물의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팔리 {율장}에 의하면, 붓다는 제자들에게 열 가지 종류의 고기는 먹어서는 안 된다고 금지시켰다. 먼저 인간의 고기는 엄격히 금지하였다. 이를 허용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코끼리나 말의 고기는 왕의 상징이기 때문에 쓰지 못한다. 개고기는 사람들이 메스껍게 여기는 까닭에 금지되어 왔다. 뱀·사자·호랑이·표범·곰·하이에나와 같은 숲 속에 사는 짐승들을 잡거나 그것들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 어떤 동물들은 자신들의 고기냄새를 맡고 승려들을 공격했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고기들은 나쁜 행위를 유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Vin. I, pp. 216∼220. }}

그런데 당시의 자이나교에서는 불살생(不殺生, ahi sa)을 엄격히 적용하여 어육(魚肉)을 절대 먹지 않았다.{{ 엄격한 계율을 실천하고 있는 자이나교도는 전혀 육식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철저하게 육식이 금지되지는 않았다. 자이나교의 성전에 의하면, 신도로부터 시여된 것이라면 고기를 먹는 것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출가수행자가 먹을 수 있는 고기의 종류가 언급되어 있다. [中村元選集 (決定版) 제10권 {思想の自由とジヤイナ敎}, p. 289; 신성현, 앞의 글, pp. 2∼3 참조.] }} 데와닷따의 주장은 이러한 자이나교의 엄격한 고행주의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붓다는 출가자가 원칙적으로는 사의법(四依法)에 의존하여 생활해야 하지만, 거기에 꼭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전통적인 사의법에 많은 예외 조항을 신설하여 보다 융통성 있게 생활하도록 조치했다. 이러한 붓다의 생활태도는 중도사상(中道思想)에서 나온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붓다는 모든 면에서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적 삶을 최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과론 적이긴 하지만 자이나교는 너무나 엄격한 고행주의를 고수함으로 말미암아 인도 밖으로 전해지지 못했다. 결국 자이나교는 인도인만을 위한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붓다는 긴 안목으로 출가 제자들에게 엄격한 고행주의를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가 원해서 고행의 길을 선택하는 경우에는 굳이 막지 않았다. 만일 붓다께서 출가 제자들이 모두 사의법에 의존하여 생활하기를 고집했다면, 불교는 오늘날의 세계종교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2) 식육과 부정의 관계
붓다 당시 고행주의자들은 '비린내' 나는 음식 때문에 그 사람이 부정해진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바라문은 붓다께서 '비린 것' 즉, 생선과 고기를 금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실망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직접 붓다를 찾아가서 '비린 것'과 '부정'의 관계에 대해 붓다께 질문한다. 그러한 내용이 곧 초기경전인 {숫따니빠따(Suttanip ta, 經集)}의 {아마간다 숫따( magandha sutta)}에 실려 있다.{{ Suttanip ta(=Sn.), ed. D. Andersen and H. Smith, (London: PTS, 1913), p. 42f.}} 이 경전에 의하면, 띳사(Tissa) 바라문이 과거불인 깟싸빠(Kassapa, 迦葉佛)에게 닭고기와 함께 밥을 먹으면서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당신이 말한 비린 것이란 어떤 것인가'라고 묻는다. 이에 깟싸빠 붓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산 것을 죽이는 일, 때리고 자르고 묶는 일, 훔치고 거짓말하는 일, 사기와 속이는 일, 그릇된 것을 배우는 일, 남의 아내와 가까이 하는 일, 이것이 비린내나는 일이지 육식이 비린내 나는 일이 아니다."<Sn. 242.>
"이 세상에서 욕망을 억제하지 않고, 맛있는 것을 탐내고, 부정한 생활에 어울리며, 허무론(虛無論)을 가지고 바르지 못한 행을 하는 완고하고 어리석은 사람들, 이것이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니다."<Sn.243.>

"난폭하고 잔혹하며 험담을 하고 친구를 배신하고 무자비하며, 몹시 오만하고 인색해서 아무 것도 남에게 주지 않는 사람들, 이것이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니다."<Sn. 244.>

"생선이나 고기를 먹지 않는 것도, 단식·나체·삭발·결발(結髮)·먼지, 거친 사슴 가죽을 입는 것도, 화신(火神)을 섬기는 것도, 또는 불사(不死)를 얻기 위한 고행도, 베다의 주문·공양·제사나 계절에 따른 고행도 모두 의혹을 넘어서지 않으면 그 사람을 청정하게 할 수 없다."<Sn. 249.>

위에서 인용한 {아마간다 숫따}를 설하게 된 배경이 {숫따니빠따}의 주석서에 설해져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아마간다( magandha)라는 바라문이 있었다. 그는 이 세상에 붓다가 출현하기 이전에 고행자가 되어 오백 명의 제자들과 함께 히말라야 기슭에서 살았다. 그들은 생선과 고기를 먹지 않았다. 매년 그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소금과 식초를 구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갔다. 마을 주변의 주민들은 그들을 매우 존경했으며, 매년 4개월 동안 환대해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붓다께서 제자들과 함께 같은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주민들은 붓다의 설법을 듣고, 붓다의 재가 신자가 되었다. 그 해에 아마간다와 그의 제자들은 평소와 같이 그 마을로 갔다. 그런데 가장(家長)들은 이제까지처럼 그들을 열광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궁금해 하던 그 바라문은 붓다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흥분하였다. 그리고 그는 붓다께서 '비린 것' 즉, '아마간다( magandha; 그는 아마간다를 생선과 고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를 먹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는 붓다께서 '비린 것'을 금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듣고 크게 실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붓다로부터 직접 그것에 대해 듣고 싶어서 제따와나(Jetavana, 祇園精舍)로 찾아갔다.

붓다는 그에게 '아마간다' 즉 '비린 것'은 생선이나 고기가 아니라 악행(惡行)에 속하는 것이고, 자신은 모든 종류의 악행을 삼가고 피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같은 질문이 띳사(Tissa)라는 고행자가 과거불인 깟싸빠 붓다께 제기했던 것이다. 띳사는 나중에 깟싸빠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깟싸빠 붓다와 띳사 사이의 대화는 곧 붓다께서 아마간다에게 설한 {아마간다-숫따}인 것이다. 아마간다 바라문과 그의 제자들은 붓다의 설법을 듣고 승단에 입단했으며, 몇 일만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Sn., pp. 42∼45; SnA. Ⅰ, p. 278ff; ed.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New Delhi: Munshiram Manoharlal, 1937-1983), pp. 280∼281에서 재인용. }}

위에서 살펴본 {아마간다-숫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사람의 청정 혹은 부정은 음식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 스리랑카 출신의 담마난다(K. Sri Dhammananda) 스님의 견해도 {아마간다-숫따}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그는 육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생선이나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사람이 부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편협한 신앙, 기만, 질투, 오만(傲慢), 시기와 다른 나쁜 의도들에 의해서 부정해진다. 사람은 오직 자신의 나쁜 생각과 행동에 의해서 부정해지는 것이다."{{ K. Sri Dhammananda, What Buddhists Believe, Expanded & revised edition (Kuala Lumpur, Malaysia: Buddhist Missionary Society, 1987), p. 215.}}

그리고 그는 "채식주의 자체만으로는 자신의 고매한 인품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채식을 하지 않는 사람 중에서도 겸손하고 예의 바르며 종교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청정하고 종교적인 사람은 채식주의를 실천해야만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반대로 누구든지 생선과 고기를 먹지 않고서는 건강한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세계 도처에서 수백만 명의 채식주의자들이 고기를 먹는 사람들보다 튼튼하고 건강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Ibid., pp. 216∼217.}}라고 지적했다.

이와 같이 음식과 부정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 그리고 음식과 건강과도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청정해지고 부정해지는 것은 음식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과 행위에 의해서 결정될 뿐이다. 비록 생선과 고기를 전혀 먹지 않는 채식주의를 실천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나쁜 생각 혹은 나쁜 의도를 갖고 행동한다면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3. 율장과 대승계경에 나타난 식육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붓다는 비록 조건적으로나마 식육을 허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식을 금지하는 계율이 율장에 삽입되어 있을 까닭이 없다. 따라서 팔리 {율장}을 비롯한 {사분율(四分律)}과 근본율장(根本律藏) 그 어디에도 '고기를 먹지 말라'는 계율은 발견되지 않는다.

율장에서는 오직 생명을 빼앗는 행위, 즉 살생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을 뿐이다. 바라이법(波羅夷法, p r jik ) 제3조 단인명계(斷人命戒, mussa-viggaha-p r jika)는 그 대표적인 계율이다.{{ Vin. Ⅲ, p. 78.
}} 그리고 파일제법(波逸提法, p cittiya) 가운데 제10조 땅을 파지 말라(堀地戒), 제11조 초목을 베지 말라(壞生種戒), 제20조 벌레 있는 물을 사용하지 말라(用蟲水戒) 등과 같은 계율이 있는데, 이러한 계율들은 모두 생명존중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런데 육식과 관련된 계율은 파일제법 제39조 색미색계(索美食戒)가 있다.{{ Vin Ⅳ, p. 88; {南傳大藏經} 제2권, p. 140.}} 하지만 이것은 고기를 먹는 것을 완전히 금지한 불식육계(不食肉戒)가 아니다. 색미식계는 비구가 병이 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식(美食, pa ita-bhojana)을 구해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식(美食)이란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가리킨다. 미식의 종류는 각 율장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신성현, 앞의 글, pp. 217∼220 참조.}} 팔리 율장에 의하면, 숙소(熟 ), 생소(生 ), 유(油), 밀(蜜), 석밀(石蜜, 黑沙糖), 어(魚), 육(肉), 유(乳), 낙(酪) 등이 미식에 포함된다. 이 계율은 비구들이 몸에 병이 없으면서도 자기 몸을 위하여 맛있는 음식[美食]을 구함으로써 재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율장 외에 붓다의 계율관(戒律觀)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문헌 가운데 하나가 팔리어로 쓰여진 {범망경(Brahmaj la sutta)}이다.{{ D ghanik ya(=D.), ed., T.W. Rhys Davids and J. Estlin Carpernter, 3 Volumes(London: PTS, 1890), Ⅰ, pp. 3∼40.}} 이 경전에서는 소계(小戒), 중계(中戒), 대계(大戒)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불살생(不殺生)에 대한 설명은 있지만 불식육(不食肉)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리고 마하가섭이 실천했다고 하는 두타행(頭陀行)의 내용에도 불식육에 대한 언급은 발견되지 않는다.{{ 신성현, 앞의 글, pp. 209∼210 참조. }}

그러나 대승불교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식육을 무조건 금지하는 경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열반경(涅槃經)} {능가경(楞伽經)} {범망경(梵網經)} {승만경(勝 經)} 등은 극단적인 육식금지 사상을 담고 있는 경전들이다. 이러한 대승경전 가운데 특히 불식육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경전은 {열반경}이다. {열반경}은 불식육계(不食肉戒)를 불성계(佛性戒)로 이해하고 있다. 이 경전은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의 사상을 주장한 경전이기 때문에 모든 생물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사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전에서는 "고기를 먹지 말라."라는 학처(學處)를 식세기혐계(息世譏嫌戒)에 포함시키고 있다.{{ 신성현, 위의 글, p. 221.}}

그리고 불식육의 문제를 더욱 강조한 경전은 {능가경}{{ {楞伽經(La k vat ras tra)}은 인도에서 최소한 A.D. 300년 이전에 편찬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경은 {十地經(D abh mikas tra)}과 {解深密經(Sa dhinirmocanas tra)}과 더불어 대승불교의 '唯心(cittam tra)' 사상을 표방하는 대표적인 경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인도불교의 유가행유식학파(Yog c ra School)의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능가경}은 현재 네팔에서 발견된 범본과 세 개의 한문본과 두 개의 티베트본이 존재한다.

}}이다. 이 경전에서는 단순히 불성 때문이 아니라 뭇 생명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매우 강경한 식육금지 사상을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대승경전의 육식금지 사상을 바탕으로 대승계경(大乘戒經)에서는 하나의 완전한 계율로서의 불식육계(不食肉戒)가 제정된다. 특히 대승율부(大乘律部)의 대표적인 경전인 {범망경}{{ {梵網經}의 본래 이름은 {梵網經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이다. 後秦 鳩摩羅什이 번역했다. 이 경전은 대승 율부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보살수행에 있어서 그 心地法門과 階位 및 수지해야 할 10重戒와 48輕戒를 설하고 있다. }}에서는 불식육이 계율로 제정되어 나타난다. 즉 48경계(輕戒) 중 세 번째 계율이 바로 그것이다.

만일 불자들이 고의로 고기를 먹겠느냐 일체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니, 대저 고기를 먹는 자는 대자비의 불성종자(佛性種子)를 끊는 것이어서 일체중생이 보면 곧 버리고 도망하느니라. 그러므로 일체의 보살은 모름지기 일체 중생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니 고기를 먹으면 한량없는 죄를 얻느니라. 만일 짐짓 먹는 자는 경구죄(輕垢罪)를 범하느니라.{{ {梵網經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 卷10下(大正藏 24, p. 1005中).}}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붓다 당시 더 나아가 율장 성립 때까지도 고기를 먹는 것 자체는 허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일체의 식육을 금지하는 사상으로 발전하여 나중에는 계율로까지 제정되었다.

4. 불식육계에 대한 비판적 검토

그러면 왜 초기불교는 물론 부파불교에 이르기까지 허용되었던 고기를 먹는 문제가 대승불교에 이르러 금지되었을까? 대승불교의 육식금지 사상의 원인을 불교 밖에서 찾는 경우와 불교 안에서 찾는 경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의 불교외부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경우는 대승경전 편찬 당시 인도의 일반적인 추세에 따른 것이라는 견해이다. 즉 당시 인도 바라문 집단의 참여나 주도에 의해 자극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흥기(興起)할 당시 바라문들은 대부분 채식위주의 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회적인 분위기가 수행자들의 육식에 대해 부정적인 흐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의 대승불교에서 육식금지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Lambert Schumithausen, [채식주의의 경우-불교의 관점], {인도철학회 국제학술대회 및 제15회 추계학술대회} (서울: 인도철학회, 2002), p. 38; 이재수, ['자비심'과 '숲'을 불태워버리는 육식], {참여불교} 제12호 (서울: 참여불교재가연대, 2003. 3·4월), p. 51 참조.}} 두 번째의 불교내부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경우는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요약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육식은 불교의 불살생계(不殺生戒)에 위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② 육식은 불성(佛性) 혹은 여래장(如來藏) 사상에 위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③ 육식은 자비의 종자(種子)를 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세 가지 가운데 첫 번째의 육식과 살생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불식육계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육식은 불교의 불살생계에 위배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육식 자체가 곧 다른 동물의 목숨을 빼앗은 살생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비록 자신이 직접 동물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죽인 동물의 고기를 사먹는 행위 자체가 살생과 다름없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사상을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경전이 바로 {입능가경}{{ 513년에 북인도의 보디루찌(Bodhiruci, 菩提流支)에 의해 {입능가경(入楞伽經)} 10권이 번역되었고, 704년에 씩샤난다( ik nanda, 實叉難陀)에 의해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7권이 번역되어 총 세 가지 한역이 존재한다. [소운, "{楞伽經}의 구조와 사상에 관한 일고찰" {釋林} 제36집(동국대 석림회, 2002), p. 96∼99 참조.] }}이다. {입능가경} 제8, [차식육품] 제16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고기를 먹지 않는 자[不食肉者]라면, 고기를 먹는 사람 때문에 또한 중생을 살해하고자 들어가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만약 곳곳에서 먹을 수 있는 고기를 매입하지 못한다면, 돈을 벌기 위한 사람이 매입하는 사람을 위해 죽이고, 판매하기 위해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입자도 또한 살생하는 자와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는 자는 성스러운 길[成道]에 장애가 된다."{{ 大正藏 16, p. 671b.}}

이 경전의 내용에 의하면, 고기를 먹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중생을 살해하는 사람이 있게 된다는 논리이다. 즉 소비자가 있기 때문에 생산자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기를 사서 먹지 않는다면, 그 만큼의 동물은 생명을 건지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재수, 앞의 글, p. 44.}} 따라서 육식의 권장은 동물 살생을 간접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육식과 살생은 한 가지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살생은 직접적으로 다른 사람을 시키거나 또는 자신이 동물의 목숨을 '고의로' 빼앗는 것을 말한다. 산목숨을 고의로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첫 번째로 금하는 계율이다. 이것은 행동 뒤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즉 의도나 목적이나 살생목적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르는 것이다."{{ 아잔 자가로, 서수정 옮김, [불교와 채식], {참여불교} 제12호 (서울: 참여불교재가연대, 2003. 3월호), p. 68.}}

이와 같이 육식과 살생은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그 의도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붓다는 어떠한 살아있는 생명체라도 고의로 죽이지 말라고 했다. 이러한 계율에 의해 육식을 완전히 금하는 채식주의를 고수하라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이러한 논리로 오늘날 어업과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는 전 세계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겠는가?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붓다는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상주의자가 아님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엄격한 채식주의를 고수하는 자이나교에서도 똑같은 논리로 육식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행위, 즉 살생(殺生)이기 때문에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자이나교에서는 살생을 한 사람은 물론 그 고기를 먹은 자도 살생을 저질렀다고 본다.

그들은 고기 자체에 이미 고기를 죽인 행위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고기를 먹으면 자신도 그렇게 부정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죽은 동물의 사체(死體)에 생명 혹은 영혼이 담겨져 있다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 세 가지 점에서 깨끗하며, 음식에 대한 탐욕이 없이 먹는 고기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본다.

이처럼 육식에 대하여 자이나교와 불교의 다른 시각은 업(業, Karma)에 대한 해석과 윤리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교 윤리는 기본적으로 동기, 즉 의도(意圖)를 중요시한다. 의도는 곧 업이라고 말해진다. 붓다 자신이 내린 업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내가 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도(意圖, cetan )이다. 의도가 있으면 육체적·언어적·정신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Cetan 'ha bhikkave kamma vad mi. Cetayitv kamma karoti k yena v c manas ." [A. (Colombo, 1929), p. 590;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London: Gordon Fraser, 1959), p. 22에서 재인용.]}} 그러므로 의도가 없으면 새로운 업을 짓지 않는다고 본다. 반면 자이나교에서는 결과를 중시한다. 동기와는 관계없이 결과만을 갖고 선악을 판단한다. 그래서 육식은 살생의 결과이기 때문에 악(惡)이라는 것이다.

불교는 분명히 살생을 삼가라고 주장한다. 수많은 경전들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살생과 관련하여 상가(Sa gha, 僧團)의 구성원들에게 들려준 최초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비구는 생명 파괴로부터 초연해 있어야 한다. 비구는 몽둥이와 칼을 제쳐놓아야 하고, 난폭함을 부끄러이 여겨야 하며, 자비심으로 충만해야 하고, 생명을 가진 모든 생물들에게 온정적인 동정심을 갖고 머물러야 한다."{{ "p tip t pa ivirato hoti nihitadan o nihitasattho lajj day panno sabbap abh tahit nukamp viharati." D. Ⅰ, p. 63.}}살생에 대한 출가자의 금계(禁戒)는 팔리어 빠나(p a)의 의미를 확인해 봄으로써 밝힐 수 있다. 빠나(p a)라는 단어가 원래의 계율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생명 모두를 의미한다. 계율적으로는 인간을 살해했을 때와 동물을 살해했을 때의 처벌 규정이 다르다.

그러나 정신적인 측면에서 빠나(p a)라는 말은 금계(禁戒)로써 인간과 동물의 생명은 동일하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아무런 구별도 없다. 계율이 제정되기 이전과 사미와 비구의 구분이 나타나기 이전의 붓다 교화의 최초 단계에서 출가자들은 씨앗과 식물들을 파괴해서는 안된다고 요구되었다.{{ "b jag mabh tag masam rambh pa ivirato hoti." D. Ⅰ, p. 64. }} 승단의 새로운 발전과 함께 참회의 규정이 식물의 성장을 파괴한 구족계를 받은 승려들에게 유효하다고 선포되었다.{{ Vin. Ⅳ, p. 34. }} 이러한 계율이 유효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들의 믿음에 따라서 나무들도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붓다께서는 이러한 율을 제정함으로써 '샤카족의 출가자들이 생명을 해치고 있다'는 반발을 적절하게 해결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식물들도 하나의 기능을 지닌 생명체이다. 식물들은 빠나(p a)의 범주로 포함되지 않을지라도 그것들은 생명(J va)의 범주로 생각되었다.

빠나(p a)와 지와(J va)가 모두 생명과 관계되기 때문에 동물의 살생에 대한 일정한 참회는 동시에 식물을 파괴할 경우에도 역시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족계를 받은 승려에게 인간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에 추가하여 제3의 생명체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식물의 생명이다. 식물은 나무를 자르고 식물을 파괴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농작물과 초원을 짓밟는 사람과 땅을 파헤치는 사람들에 의해 피해를 받는다.{{ Vin. Ⅰ, p. 137∼138; Vin. Ⅳ, p. 296. }}

이처럼 엄격한 계율을 재가자에게 적용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다만 수행자는 자신을 위해서 고의적으로 어떠한 생명체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식물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모두 생명체로 인정하고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식물도 생명이 있는 것이다. 동물을 죽이는 것과 식물을 죽이는 것 모두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채식을 하면 죄가 되지 않고, 육식을 하면 죄가 된다는 주장은 인간과 동물위주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식물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지닌 생명체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면 불교도들은 음식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유익한 정보를 담마난다 스님의 견해에서 얻을 수 있다.

"고기를 먹는 불교도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음식에 대한 불교도들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살아있는 존재(有情)는 음식물이 필요하다. 우리는 살기 위해 먹는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음식물을 자기 몸에 공급해 주어야만 한다. 그 음식물은 자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일을 하기 위한 에너지를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부(富)가 증가한 결과, 점점 더 사람들은, 특히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에서는 단순하게 자신들의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먹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음식이라도 간절히 바라거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동물을 죽인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탐욕 없이 먹거나 직접 죽이는 행위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단지 육체적인 몸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며, 그는 스스로 자제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K. Sri Dhammananda, op. cit., p. 217.}}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로부터 필요한 영양소를 섭취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어차피 인간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육식이든 채식이든 먹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육식 자체를 죄악시할 필요는 없다. 다만 다른 생명을 희생시켜 가면서 그러한 음식을 먹고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반문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붓다는 재가자들에게 육식에 대하여 엄격히 규제하지는 않았다. 재가자도 출가자와 마찬가지로 세 가지 종류의 고기와 앞에서 언급한 열 가지 고기가 아니라면 자유스럽게 먹어도 될 것이다. 재가 신자도 '살아있는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계율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살아있는 것을 죽여 음식을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죽은 것을 음식으로 요리하는 것은 무방할 것이다.{{ 전재성 역주, {맛지마 니까야} 제2권, p. 427. No. 395.}}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육식을 권장한 것은 아니다. 붓다는 육식의 폐해도 잘 알고 있었다. 붓다는 "예전에는 탐욕과 굶주림과 늙음의 세 가지 병밖에는 없었소. 그런데 많은 가축들을 제사 지내기 위해 죽인 까닭에 아흔 여덟 가지나 되는 병이 생긴 것이오."{{ 법정 옮김, {숫타니파타} (서울: 샘터, 1991), p. 98.}}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붓다는 몇몇 음식은 몸을 망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지나치게 먹는 것과 그릇된 종류의 음식을 먹는 것에 빠지는 것도 경계했다. 붓다는 인류가 오직 세 가지 질병을 겪은 때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심리적인 병인 탐욕(icch )과 물질적인 것인 배고픔(anasana) 그리고 자연적인 것인 노쇠함(jar )이다. 그러나 고기를 먹은 결과 인간들은 98가지 형태의 질병으로 발전시켰다."{{ 숫따니빠따 311; 데이비드 칼루파하나, [초기불교와 환경] {21세기 문명과 불교} (동국대학교, 1997), pp. 478∼479.}}라고 지적했다.

남방불교의 경우 재가자들은 자신이 마련한 음식을 스님들에게 공양한다. 스님들의 발우에는 채식은 물론 육식으로 가득 찬다. 재가자들이 올린 공양물은 선택의 여지없이 모두 먹는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불교도라면 육식을 해야 할 때에는 세 가지 점을 고려하여 판단한다. 그리고 그 음식물을 먹고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깊이 숙고한다.

5. 나가는 말

대승불교권인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불교에서는 완전히 육식이 금지되어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현재 한국의 사찰에서는 관습적으로 육식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한국 사찰에서는 김치를 담글 때에도 젓갈류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스님들이 생선이나 고기를 먹으면 크게 잘못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신심 돈독한 불자들은 채식을 실천해야만 훌륭한 불자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이 불교 본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극단적인 채식주의자가 아니었다. 육식이든 채식이든 자신의 취향에 따르면 그만이다. 음식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다. 그 사람의 개인적인 체질과 건강 상태에 따라 채식이 이로울 수도 있고, 육식이 이로울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개인도 자신의 건강상태와 신체 리듬에 따라 입맛이 달라지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음식물의 선택은 그 사람의 체질과 건강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 할지라도 인체 내에서 받아들이는 기능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를 만들어 내고, 뱀이 마시면 독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신체적 상황에 따라 필요한 영양소를 보충해 주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지나치게 채식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먹을 것이 없어 아사(餓死) 직전에 있는 사람들이나 육식을 주로 하는 국가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현실을 무시한 배부른 사람들의 헛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이런 사람들에게 육식이 좋다거나 채식이 좋다는 논쟁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음식은 오직 이 신체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채식만을 고집하는 것은 또 하나의 집착에 불과하다. 붓다는 중도(中道)에 의해 세 가지 종류의 육식을 허용하였다. 그 주어진 음식을 어떻게 먹고 소화할 것인가. 그 음식을 통해 얻어진 에너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그 음식을 먹고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졸저, {불교신행공덕} (서울: 불광출판부, 2004), p. 227.}}■

마성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강사,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논문으로 "Man in Buddhist Perspective", [포살과 팔재계에 관한 고찰], [자등명 법등명의 번역에 대한 고찰]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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