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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적 글쓰기 / 최재목
최재목 영남대 교수
[19호] 2004년 06월 10일 (목) 최재목 choijm@yuncc.yeungnam.ac.kr
첨단의 편집술: 〈법계도〉 혹은 〈선기도〉의 발상법

나는 이미 앞선 글(《불교평론》 제17호)에서 소개한 의상의 〈법계도(法界圖)〉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해왔다. 의상은 왜 하필 그런 형식의 그림[圖]을 고안해 냈을까?

나는 그 그림의 근본 ‘발상법’에 주목하고, 중국의 각종 문양과 연구서를 통해서 그 근거를 지금까지 추적해 오고 있다.

그러나 화엄일승법계도의 저술 경위와 같은 글을 읽어봐도 별 신통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1)

이런 가운데 나는 우연히 〈선기도(璇璣圖)〉(그림 참조)를 알게 되었고, 그것이 〈법계도〉와 좀 통하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2)

〈선기도〉는 남북조시대 전진(前秦)의 소약란(蘇若蘭)이 유배를 간 남편 두도(竇滔)를 그리워하며 오색실로 수놓아 만든 841자로 된 시이다.

그런데 이것은 돌려가며 읽을 수도 있고, 하나씩 건너 뛰어 읽어도 시어가 연결되어 읽어 낼 수 있는 시는 전체 7,958수이다.

〈선기도〉는 〈직금회문(織錦回文)〉이라고도 부른다.

회문(回文)이란 한시체(漢詩體)의 하나로서 위아래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뜻이 통하는 글의 한 형식이다.

어쨌든 나는 〈법계도〉나 〈선기도〉야말로, 그 편집 경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현대에도 빛나는 멋진 아니 대단히 첨단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늪의 편집 전략―‘주제’에서 ‘방법’으로

우리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말이 있다. 사실 지금까지는 ‘구슬 서말’을 마련하는데 급했고 ‘꿰는 일’은 그 다음의 일, 주변적인 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 물론 선후를 따진다면 꿰기 전에 꿰어야 할 ‘그 무엇’이 있어야만 하기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없는데 뭘 꿴단 말인가?

그런데, 인류의 역사, 지성사에서 본다면 구슬의 부족은 없었다. 도처에 구슬은 쌓여 있었다. 하잘 것 없는 것, 잡된 것들 속에도 진리가 있다. 매일 눈앞에 접하고 있는 하잘 것 없는 것도 값진 보석일 수 있다. 의상의 〈법계도〉에 있듯이, “티끌 하나 속에도 우주가 들어 있다(一微塵中含十方)”. 다시 말해서 하나의 털구멍에 무수한 불국토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영원히 존재하고, 하나의 미립자 속에 일체의 미립자와 같은 수의 작은 국토가 모두 들어 있다(《화엄경》 〈노사나불품〉 참조)는 말이다. 그러니, 눈앞의 손닿는 것, 발 밑의 밟히는 것 모두가 보석이고 보배이다. 단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그렇다. 우리들에게는 쌓여있는 구슬들을 어떻게 꿰는가 하는 방법론의 빈곤이 있어왔다. 도처에 쌓여있는 구슬은 어떻게 꿰는가에 따라 전혀 새롭게 보일 수 있다. 말을 바꾸면 ‘구슬 서말’은 ‘정보’에, ‘꿰어야 보배다’는 ‘방법’ 즉 ‘편집술’에 해당한다. 주제는 ‘이는 기의 조리이고, 기는 이의 운용이다(理者氣之條理, 氣者理之運用)’3)라고 하듯이, 정보의 편집에 의해 생성된 주제는 정보 편집의 조리(條理)일 뿐이며, 편집된 정보는 주제의 운용(運用) 즉 현실적 실현이다.

이제 고정된 ‘주제’에만 머물 수만은 없다. ‘방법’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주어진 정보는 편집술에 의해 새로운 주제로 재생될 수가 있다. 주어진 정보는 순환(회전), 재결합, 재생되어야 한다. 고여 있으면 낡고 저절로 썩어간다. 나는 ‘구슬 서말’을 고정된 주제에만 맞추려고 하는 주제의 시대를 ‘부계적(父系的) 사유’의 시대라 부르고, ‘구슬 서말’을 ‘꿰어서 보배로 만드는’ 이른바 방법의 시대를 ‘모계적(母系的) 사유’의 시대라 부르고 싶다.

《장자(莊子)》 〈도척편(盜?篇)〉에서는 “신농(神農)의 세상에는 누우면 편안하고 일어나면 흐뭇했다. 백성들은 그 어미는 알지만 그 아비는 알지 못했고, 고라니나 사슴의 무리들과 함께 살며, 밭을 갈아서 먹고, 베를 짜서 입고, 서로 해칠 마음이 없었다. 이것이 도덕이 가장 융성했던 시대이다(神農之世, 臥則居居, 起則于于, 民知其母, 不知其父, 與?鹿共處, 耕而食, 織而衣, 無有相害之心, 此至德之隆也).”라고 했다. “그 어미는 알지만 그 아비는 알지 못한다”는 것은 중국 고대의 모계사회나 군혼(群婚)의 풍습을 반영한 것4)으로 부계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륜을 어지럽히는(亂倫)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사회윤리나 전통적 질서유지라는 면에서 보면 당연히 무정부주의적, 반사회적인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 문제를 다른 문맥에서 읽고 적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계에서 모계로의 전환은 결국 정보의 ‘편집’에 관련한 문제에 한정된다. 고정된 주제의 위계(또는 순수 계통이나 일정 체계)만을 고집할 것인가 아니면 정보의 평등한 관점의 순환(회전), 재결합, 재생을 통한 무수한 새로운 영역의 개척을 시도해갈 것인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주제중심-부계적 사유에서는 개인이나 영웅 중심의 이른바 순계 혈통의 위계에 기초한 족보(族譜)적 논의나 관심이 주가 되기 쉽다. 방법중심-모계적 사유에서는 범(凡)/속(俗)/잡(雜)과 성(聖)/진(眞)/순(純)을 불이(不二)로 하는, 양자 평등의 결합과 재생, 순환이 주가 된다.

잠깐 앞서서 말한 ‘편집’에 대해 좀더 이야기 해두자. ‘편집(編集, edit)’이란 캡터(capta)를 취급하는 기본 기법을 말한다. 캡터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다양한 해석을 동반하는) 정보단위이다. 캡터라는 정보단위는 편집이라는 기법(방법)에 의해 ‘지(知)’로 바뀐다.5) ‘구슬 서말’의 정보는 ‘꿴다’는 작업에 의해 ‘지(知)’의 지도(地圖)를 만들어낸다. 사실 편집이란 대단히 넓게 사용된다. 한자로 풀어보면 ‘편(編)’은 ‘짜다(compile, edit)’, ‘집(集)’은 ‘모으다(collect)’라는 뜻으로, 편과 집을 합하면 ‘짜 모으다’라는 말이 된다. 짜 모은다는 것은 지(知) 즉 문화와 문맥을 결합,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편집은 의미의 동향(動向)을 매개로 하기 때문에 상당히 다이내믹한 방법이다.6)

편집의 작업은 순(純)·잡(雜)의 무수한 어울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을 상호편집성(相互編集性, mutual editing: 스스로 게임 속에 들어서서 마침 거기에 있는 멤버와 함께 무언가를 상황에 응해서 상호편집해 가는 것)이라 부를 수 있다. 상호편집성은 ‘자기편집성(自己編集性, self editing: 스스로 게임 속에 들어서서 거기 있는 요소·기능·조건을 살려가면서 혼자 편집해 가는 것)과 함께 편집의 주요 특성이기도 하다.7) 특히 상호편집성은 상즉상입의 사사무애적 편집성이라고 한다면 자기편집성은 그 단계로 나아가기 전의 편집단계이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적(事的) 글쓰기, 연기적(緣起的) 글쓰기는 바로 상호편집성 즉 상즉상입(相卽相入)의 편집성에 기반한 것이다. 말을 좀 덧붙인다면 이것은 게릴라적 글쓰기나 편집의 전략이다.

인문학의 창의성은 ‘편집술’에서 나온다

티베트 불교미술을 대표하는 ‘만다라(MANDALA)’는 산스크리트어로 ‘MANDA(본질)’라는 어간(語幹)과 ‘LA(소유, 성취)’라는 접미사로 이루어진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그 어의(語義)에서보다는 정보의 탁월한 편집, 편집의 창의적 발상에 감탄한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유학자인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많은 저작 중에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성학십도(聖學十圖)》는 ① 〈태극도(太極圖)〉, ② 〈서명도(西銘圖)〉, ③ 〈소학도(小學圖)〉, ④ 〈대학도(大學圖)〉, ⑤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⑥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⑦ 〈인설도(仁說圖)〉, ⑧ 〈심학도(心學圖)〉, ⑨ 〈경재잠도(敬齋箴圖)〉, ⑩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의 10가지 도를 편집한 작품이다. 이 가운데 퇴계가 직접 만든 ③ 〈소학도(小學圖)〉, ⑤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⑥〈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중의 일부(중도, 하도)가 있지만 이것도 사실은 모두 타인의 저작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퇴계의 《성학십도》는 그의 순수한 저작이 아니라 그때까지 있어 온 타인의 저작을 창의적 발상에 의해 ‘열 가지’로 훌륭하게 ‘편집’해 놓은 것이다.

나는 《성학십도》를 보면서 항상 그 각각의 내용에서보다도 정보와 지(知)의 탁월한 편집 혹은 그 창의적 선별과 배열의 발상에 감탄한다.

그리고 선(禪) 수행의 입문 과정에서 ‘각(覺)’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를 열 단계, 즉 ① 심우(尋牛), ② 견적(見跡), ③ 견우(見牛), ④ 득우(得牛), ⑤ 목우(牧牛), ⑥ 기우귀가(騎牛歸家), ⑦ 망우존인(忘牛存人), ⑧ 인우구망(人牛俱忘), ⑨ 반본환원(返本還源), ⑩ 입전수수(入廛垂手)로 나누어 비유 설명한 〈십우도(十牛圖, 또는 尋牛圖)〉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그뿐이 아니다. 《주역》에도 이러한 생각을 적용할 수 있다. 《주역》에서 ‘어려운 일이 다 끝났음(모두 해결되었음)’이란 의미의 63기제괘(旣濟卦) 다음에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음’이란 의미의 64미제괘(未濟卦)가 오는 것은 시종(始終: 始→終)이 아니라 종시(終始: 終→始)이며, 끝은 늘 새로운 시작임을 의미하는 중국인의 지혜와 철학을 편집해 둔 것이다. 어쨌든 주역의 64괘 또한 정보의 창의적이고 탁월한 편집술에 해당한다. 편집에 의해 새로운 지(知)가 창조되어 나온 것이다.

나아가서 중국 고대적 사유 속의 순환과 재생의 지혜와 철학을 잘 편집한 것이 ‘육십갑자(六十甲子)’(六十干支·六甲이라고도 함)다. 중국 고대 이래 현재까지 수천 년 지속되는 정보, 지의 창의적 편집의 하나인 ‘육십갑자’란 10간(干)과 12지(支)를 결합하여 만든 60개의 간지를 말한다. 10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은 천간(天干)이라고도 하며, 12지(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는 지지(地支)라고도 한다. 이 둘을 결합해 가면 마지막 60개째의 간지를 얻은 후에 다시 갑자로 되돌아온다.

보통 태어난 간지의 해가 다시 돌아왔음을 뜻하는 61세 생일을 환갑(還甲, 回甲)이라 하는 풍습도 결국 순환과 재생이라는 동양적 전통에 기초한다. 특히 육십갑자 중의 육십 번째의 계해(癸亥)는 각각 10간 최후의 ‘계’와 12지 최후의 ‘해’가 결합한 것이다. 그런데 ‘계’ 자에는 순환의 뜻이 들어 있다. 그리고 ‘해’ 자에는 재생(易의 坤에 해당하며 地力으로 만물을 낳는 것)의 뜻이 들어 있다.

이렇게 보면 계해는 회전과 재생의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간지는 중국의 문자 성립 이전에 어떤 부호로 통용되던 순환 서수사(序數詞)였다. 다시 말해서 간지는 고대 중국인의 예지가 낳은, ‘0’의 발견 이전의 무한히 계속되는 순환 서수사로서 한자 발생 이후에 현행의 글자로 가차(假借)된 것으로 보여진다. 현행의 동물로 배당된 ‘띠’는 하나의 가설이며 오랜 역사 속에서 신앙화된 것이다.8) 어쨌든 간지의 발상법 또한 정보의 탁월한 편집에서 지(知)를 창출해 내어 동양인들의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편집술은 인간의 삶을 인도하기도 하고 변형하기도 하며 또한 적지 않은 상상력을 제공하는 지도(地圖)의 역할을 한다. 불상이 그렇고, 경전이 그렇고, 사찰의 양식이 그렇듯, 인간의 역사 속에서 정보와 지의 편집의 예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국 위대한 인문학적 발상의 태동과 전개는 인간의 지적 감성적 창의력에 의해 주어진 정보의 편집술 여부에 기인한다. 그리고 편집술은 무수한 정보, 정보의 편집에 따른 무수한 지(知), 그 지와 또 다른 지와의 연쇄=상의상존이라는 우리 삶의 실상을 여실하게 보여 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순(純)·잡(雜)의 무애, 사사무애의 기법

중국에서 화엄종을 대성한 현수법장(賢首法藏, 643∼712)은 중국 유일의 여황제인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의 초청을 받아 장생전(長生殿)에서 《화엄경》의 현묘한 가르침을 구체적 예를 들어 알기 쉽게 설명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세상의 모든 존재는 여섯 가지 상(相)인 총상(總相)·별상(別相)·동상(同相)·이상(異相)·성상(成相)·괴상(壞相)을 갖추고 있으며,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이 서로 원만하게 융화되어 있다는 육상원융(六相圓融)의 이치를 금사자(金師子)에 비유하며 설명하였다.9)

또한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이치를 설명할 때에도 법장은 이해력이 낮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쉽게 이해시키고자 10면의 거울을 팔방과 위·아래에 서로 마주 보도록 설치하고서 중앙에 불상을 안치하고 그 뒤에 촛불을 놓았다. 그러자 빛과 그림자가 서로를 비추어 중중무진이 되었다. 여기에는 우리 인문학이 걸어가야 할 시사점이 많다. 추상을 구상화하고, 머리 속에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시켜 주는 능력, 다시 말해서 추상화/내면화된 된 개인의 생각/정보를 시청각화(구체화)하여 공동체 속으로 이끌어 내는 능력을 말한다. 이것은 나의 늪의 글쓰기에서는 순(純)·잡(雜)의 무수한 어울림, 사사무애(事事無碍)의 크로스오버적 기법이 중심이 된다. 얼마 전 나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순과 잡의 구별, 진과 속의 구별, 그래서 순과 진의 편식, 잡과 속의 차별이라는 ‘눈’은 우리를 지적·문화적인 편식증에 빠뜨리고 만다. 순수 우월주의, 정통 지상주의는 한편으로는 요즘 논의되곤 하는 서울 중심주의(중앙 중심주의)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우리들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순과 잡의 싸움, 잡과 잡된 것들에서 순과 진의 집요한 ‘구출’노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잡과의 공생,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들 정신의 편식증 혹은 순종주의, 혈통주의가 스스로의 삶을 철저히 왜곡해 가고 있는 것이다. 사고의 균형을 찾는 것, 오만잡것들과의 공생과 화해를 지향해 가는 것은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목적, 가치)를 원상 복귀시켜 가는 것이다. 이렇게 ‘잡(속) 쯂 순(진)’의 무한 순환적인 느끼기, 생각하기, 말하기, 그리기, 일하기, 글쓰기를 나는 포괄적으로 ‘늪’이라는 상징을 빌어 와서 ‘늪의 글쓰기’로 규정한 적이 있다.10)

〈십현문(十玄門)〉11)의 제5 제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具德門)에서 말하듯이 일법(一法)은 제법을, 제법은 일법을 서로 거두어 갖추고 있다[諸藏]. 예컨대 금사자(金師子)의 눈(眼: 일법/一)을 가지고 사자(일체/多)를 받아들이면(이해하면) 사자 전체(多)가 순전히 눈(一)에 들어오고, 귀[耳]를 가지고 사자(일체/多)를 받아들이면(이해하면) 사자 전체가 순전히 귀에 들어온다.

이 경우 일체의 제법을 들어서 일법을 말하게 된 것을 ‘순(純)’이라 하고, 일법에 일체를 갖추었다는 것을 ‘잡(雜)’이라고 한다.12) 이것을 글쓰기에 적용하여 설명하면 ‘순’은 하나의 글쓰기를 들어서 글쓰기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 ‘잡’은 하나의 글쓰기에 모든 글쓰기가 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일행(一行)을 예로 해서 만행(萬行)을 말하는 것, 일행에는 만행이 들어 있다는 것의 궁극은 순·잡 무애의 경지, 중중무진과 사사무애의 경지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모든 행위와 연결되어 있다. 의상의 〈법계도〉에 잘 드러나 있듯이 초발심이 곧 궁극적인 것, 전체적인 것으로 연결되어 있다(初發心是便正覺). 예컨대 손끝에 펜을 들고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이미 세상과 연결되어 일체 사물을 느끼고 보고 말하는 것이 된다. 글쓰기는 단순히 글만에 갇힌 행위가 아니다. 글을 쓰는 순간 개체는 우주의 일체와 연결된다. 모든 행위에는 그 행위가 지향하는 화면(畵面)/화상(畵像)이 하나씩 붙어 있다. 그것은 행위의 얼굴이며 눈동자[眼目]이다. 쓰는 것은 써 보는 것이며, 읽는 것은 읽어 보는 것이며, 만지는 것은 만져 보는 것이다. 모든 행위에 붙어 있는 ‘보는 것’ 즉 행위의 화면/화상은 그 행위와 어떤 관계인가? 《금사자장(金師子章)》 앞머리에서는,

금(金)은 법계(法界)의 체(體)를 비유한 것이고, 사자(師子)는 법계의 용(界)을 비유한 것이다.13)

라고 하고 있다. 금과 사자는 하나이다. 금으로 보면 사자도 금이다. 사자로 보면 금도 사자이다. 글을 쓰는 것[用]과 글을 써서 본 것[體]의 세계는 하나이다.

결국 글쓰기는 깨달음을 향해서 있다. 그 깨달음은 앞서서 말한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의 불이(不二)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늪의 글쓰기는 철학적인 것과 더불어, 미학·윤리학·종교학 등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갈 수밖에 없다. 늪의 글쓰기에서는 당연히 ‘불이 미학’이 존재한다.

미의 ‘얼굴’ 성스러움, 미와 성 그 불이의 미학

최근에 내가 관심을 갖고 쓰고 있는 〈열 자로 읽는 세상〉14) 가운데 이런 글이 있다. 〈아름다움에 성(聖)스러움이〉. 이것은 지난해(2003) 12월 중국 동해안의 아름다운 도시 영파(寧波)의 밤 풍경을 관망하면서 느낀 점을 메모한 것이다. 여기에 나는 이렇게 시작 노트를 붙였다.

“아름다움의 수준이 그 사회의 수준이다. 그 사회를 알고자 하면 그들이 어떻게 아름다움을 느끼고 표현하는지를 보라. 아름다움엔 사람다움과 성(聖)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내가 느낀 영파의 거리는 단순한 건물의 집합체가 아니었다. 아름다움을 그 너머의 무엇으론가 이끌어 가고자 한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거기서 나는 작은 감동을 얻었던 것이다.

그렇다.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은 서로 통한다. 대니얼 맥닐(Daniel McNeill)은 《얼굴》이란 책의 앞머리에서 “모든 것은 얼굴에 있다.”라는 키케로의 말을 적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마음은 나비가 꽃을 찾듯이 얼굴을 찾는다. 얼굴은 우리에게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15)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라는 노랫말처럼, 인간이 있는 한 어디에서건 ‘얼굴’을 찾아내려고 한다. 그래서 얼굴을 통해 자신의 관점과 미관을 불어 넣는다.

그럼으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개성을 창출하고 자신의 내면적 지향을 복구시켜 간다. 중국 송대 초기 마의 도사(麻衣道士)가 써서 그의 제자인 진희이(陳希夷, 867∼984)에게 전수했다고 하는 비결서 《마의상법(麻衣相法)》16)에 제시되는 얼굴(나아가서는 신체, 그림 참조)에는 능숙하고도 섬세하게 수많은 정보가 편집되어 있다. 이러한 정보의 편집술에서 보듯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현상물에서 얼굴 혹은 그에 해당하는 정보를 편집하여 지(知)를 구축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얼굴의 지도 하나의 온전한 얼굴을 완성해 가려는 과정에서 생겨난 정보의 집합일 뿐이며, 그런 의미에서 방편적이며 실체란 없다. 짜 맞춘 얼굴, 즉 허공의 얼굴이다. 아래의 나의 시 〈허공의 얼굴〉에서처럼 문득 보이고(보여지고) 잊혀지는 그것이다.

허공의 얼굴

세수하다가 문득 두 손에 든
물을 바라보다가, 물 한줌 쥔 동안 비치다 깨어지고
다시 짜 맞춰지는 나를 보았네, 두 손과 얼굴 사이에서
은밀히 살아남은 허공의 물방울
물 한줌 쥘 동안 비치는 이목구비
그것마저 놓쳐 버리면 낱낱이 분해되거나
세상으로 흘러다닐 얼굴을 보았네
자신을 잊을 때까지 두 손과 얼굴 사이에서
떠오르다 가라앉는 물방울, 그러다가 그러다가
당장에 무슨 뾰족한 수도 없이
아주 잊혀져가는 얼굴을 보았네17)(강조는 인용자)
이렇게 어디까지나 ‘방편적’이긴 하나,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은 우선 사물과 인간(나아가서는 인격체)의 ‘얼굴’이란 매개를 통해서 상호 내밀하게 교류한다. 아름다움에서 찾아낸 얼굴은 바로 성스러움이다. “얼굴은 육신의 중심이다.”18)

아름다움에 얼굴이 있게 되면 바로 성스러움으로 연결되어 간다. 가끔 이 얼굴은 ‘꽃’으로도 비유된다. 인간 외의 만물에서 발견된 아름다운 얼굴은 바로 꽃이다. 꽃은 만물의 아름다움에 ‘눈(眼)’을 찍은 것이다. 바위나 산을 바라보면서 하필이면 ‘얼굴’을 보고, 화성(火星)을 보면서 ‘얼굴’을 발견해 내듯이 말이다(그림 참조).

우리가 불상을 볼 때 미학자의 눈에 비친 것은 ‘아름다움(美)’일 수 있겠지만 불교신자의 눈에는 ‘성스러움(聖)’일 수 있다. 미와 성은 다른 것이 아니다(不二).

《화엄경(華嚴經)》을 중국에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으로 번역한 것은 ‘화엄(혹은 佛華嚴)’이 갖는 두 가지 뜻 즉 ① 간다 비유하(gan.d.-vyu-ha: 雜華-嚴飾→華嚴),19) ② 아바탐사카(avatam.-saka: 꽃 장식 즉 꽃으로 만든 冠 또는 귀걸이)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해서 번역이 되었는가 하는 경위가 분명하지 않다.20) 그런데 명백한 것은 지고의 성스러운 부처(佛)와 아름다운 꽃(華)을 어떤 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편집한 것이냐 하는 그 핵심적인 문제, 즉 ‘인도적 성(聖)/미(美)가 중국적 사유 속에 수용되어 어떻게 재편집되었는가’를 물어 볼 만한 것이다. 그 재편집의 근저에 있는 ‘성·미의 불이(不二)’의 의미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늪의 글쓰기는 마치 선재 동자가 구도행을 행하듯이, 모든 행위에서 얼굴/꽃을 발견하고, 그 얼굴/꽃들로 세상을 장식해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체의 사물에서 얼굴을 발견하고 생명을 느끼는 것은 모든 사물에 점안(點眼)하는 일이다. 그 점안을 통해 성스러움은 드러난다.

‘문득 깨닫는’ 순간-자기 전심신의 감각을 구동시키기

글쓰기의 과정은 모든 곳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늪의 글쓰기는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공자가 이미 있어 온 것을 서술하되 내가 새롭게 창작하지 않았다(述而不作)고 하듯이 말이다. 부처도 자신의 연기법은 이미 있었던 것을 알려준 것일 뿐이지 한마디 자신이 별다른 말을 보탠 것도 아니며 새롭게 무언가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不立)고 하였다. 그러면 이미 있어 온 것들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사적 글쓰기, 연기적 글쓰기는 자신의 전심신(全心身)이 지닌 복수의 ‘감각’을 구동시키고 상호 연계 결합시켜 그 잠재능력을 무한히 확장해 가는 것이다. 사적 글쓰기, 연기적 글쓰기에서 하나 하나의 감각은 정보를 전달, 표현해 주는 미디어(media)라 할 만하다.

사적 글쓰기, 연기적 글쓰기는 개인적 글쓰기=실체적 글쓰기=물적 글쓰기(즉 자기편집성)를 벗어나서 공동체적 글쓰기=관계적 글쓰기=사적 글쓰기(즉 상호편집성)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읽기에서 묵독(默讀)은 개인적이고 음독(音讀)은 공동체적인 것처럼21) 글쓰기에서도 묵독식의 글쓰기가 아니라 음독식의 글쓰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지닌 복수 감각(미디어)의 무한 확장을 통해서 쓴다, 본다, 느낀다, 읽는다, 만진다, 맛본다 ……는 것의 상호편집이 가능하다.

즉, 시(視)는 시+시만이 아니라 시+청+각+촉+미…… 등으로, 청(廳)은 청+청만이 아니라, 청+시+각+촉+미……로 확장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쓴다는 것은 본다-듣는다-만진다-느낀다-맛본다…… 등과 상호의존적이며 상호소통적인 것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중국의 미학에서는 선진시대의 ‘보기(觀)’에서 위진시대의 ‘맛보기(味)’, 송대의 ‘깨닫기(悟)’로 발전한 역사가 있다22)고 하지만 사실 심신상에서 볼 때 ‘보기(觀)’―‘맛보기(味)’―‘깨닫기(悟)’는 동시적 혹은 복합적 중층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수행적 글쓰기, 치유적 글쓰기〉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들의 생각과 느낌은 풍요롭게 열려 있다. 예컨대, 자기 삶의 어떤 느낌과 생각 즉 ‘×’라는 것이 있다고 하자. 그것은 ‘   ▩ ☆ ★ Ⅹ * + #       力   &’ 등등 얼마든지 바꿔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글쓰기는 바로 이 ‘바뀌고’ ‘떨린’ 것(넓이와 깊이를 위한 진동)을 하나하나 표현하는 것이다. 내 생각과 느낌의 ‘지(地, ground)’에다 ‘도(圖, figure)’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잡된 것들과 화해하고 공존하는 것이다. 이것을 포괄적으로 ‘늪의 글쓰기’라 규정하였던 것이다.23)

자신이 지닌 전심신의 감각(미디어)을 잘 살리는 것은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바깥에 대해서 ‘문득 깨닫는’ 순간들을 중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순간은 언제나 어디서나 찾아드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그런 순간을 놓치고 만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구호가 늪의 글쓰기에서 필요 충분한 것은 아니다. 다음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말처럼 ‘정보도시’ 즉 정보의 늪을 발견해 가는 일은 선택과 집중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문득’ 이루어질 수 있다. 그 ‘문득’의 정보를 지로 바꾸어 가야 한다.

내가 여섯 살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나는 문득 몸을 숙이고 땅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때 나는 정원의 흙 속에 작은 도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거주자들로 가득 찬, 말 그대로 하나의 도시였다. …… 나는 그 광경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별로 흥미를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24)(강조는 인용자)

새로운 인문학을 위한 도전, “항룡(亢龍)하라 유회(有悔)라도”의 정신을

‘문득 깨닫는’ 순간들이 연속될 때 창의력, 발상의 전환은 배가 된다. 문득 깨닫는 것을 소홀히해서는 안 된다. 삶은 깨달음의 연속이고, 글쓰기도 깨달음의 연속의 한 방식이다. 첨단의 편집술인 〈법계도〉 혹은 〈선기도〉의 발상법 또한 ‘문득’에서 이룩한 것인지도 모른다.

《주역》 〈건괘(乾卦)〉에는 우리가 흔히 쓰는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말이 있다. 보통 이것을 “항룡(亢龍)이니 유회(有悔)라”라고 읽고 있다. 항룡의 ‘항’은 ‘한껏 높이 올라간’ ‘목에 힘이 들어간’ 등으로 풀이된다. ‘한껏 높이 올라간(혹은 목에 힘이 들어간)’ 즉 ‘너무 튄’ 사람은 후회가 있게 마련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항룡유회를 부정적으로 읽고, 이렇게 되지 않도록 일상생활에 조신, 조심하며 살고자 하는 경계의 잠언으로 이 말을 귀하게 여겼다. 그런데 인문학, 글쓰기에서도 과연 그럴까? 나는 이제 “항룡(亢龍)이니 유회(有悔)라”를 “항룡(亢龍)하라 유회(有悔)라도”로 읽어 보고 싶다.

선각자, 선구자는 늘 외롭다. 외롭지 않으면 선각자, 선구자가 될 수 없다. 그 고존(孤存)의 길을 걸으며 앞서가는 인문학의 역사를 이끌기 위해서는 “항룡(亢龍)이니 유회(有悔)라”를 “항룡(亢龍)하라 유회(有悔)라도”로 바꾸어야 한다. 튀면 욕먹고 칼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런 가능성 있는 사람에겐 진실과 역사가 함께 해준다(德不孤). 인문학의 새 길을 열기 위한 창의적 발상은 한껏 ‘튀어야’ 한다. 마음껏 ‘튀는’ 일을 계속하면 설령 한 번 죽는 일이 있더라도 역사 속에서는 영원히 산다. ■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졸업. 쯔꾸바(筑波)대학원 철학사상연구과 졸업(문학석사·문학박사). 동경대 객원연구원(1996). 하버드대 연구교수(1998~1999) 역임. 현재 영남대 교수.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1987. 시인). 저서로 《동아시아의 양명학》 《나의 유교 읽기》 《양명학과 공생·동심·교육의 이념》 《시인이 된 철학자》 《동양의 지혜》 《내 마음이 등불이다》 《크로스오버 인문학》 등이 있으며, 공저로 《실학사상과 근대성》 《한말 영남 유학계의 동향》 《한국문화사상사대계》, 공동번역으로 《논쟁으로 본 일본사상》 시집으로 《나는 폐차가 되고 싶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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