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국불교의 선농관(禪農觀)―

1. 서언

한국불교의 근현대는 정체성 찾기와 근대성을 함께 아울러야 하는 힘든 시기였다. 그만큼 당시 승단의 개혁을 주장하는 내용들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더구나 승단은 그 주장들을 수용하고 실현할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단의 개혁을 요구하는 열성은 끊임없이 지속되었음이 여러 자료에서 확인되는데, 그 중에서도 승려의 노동에 대한 주장은 핵심의 하나라 생각된다. 이것은 또 현재 승단 혁신의 주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본 원고는 승려 노동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불교에서의 노동의 역사와 의미를 되새겨 보며, 한국불교 근현대 시기에 주장된 승려 노동의 특성을 살피고자 기획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승려 노동의 긍정적·부정적 측면을 살펴서 현재의 과제를 드러내 보고자 한다.

2. 승려 노동의 근거

불교사 속에서 승려의 노동에 대한 관점과 사원경제의 시스템은 시대별로 차이가 있다. 시대 및 지역별 사회적 여건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면서 불교 특유의 유연성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연성의 결과가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때로 나태와 무명과 탐욕이 깃든 유연성은 승단을 해치는 주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역으로 승단의 무질서가 잘못된 유연성을 키우기도 했다. 언제나 승단의 온전한 발전은 어떻게 화합할 것이며, 어떻게 중생과 같이 할 것인가 하는 코드 맞추기에 달려 있다고 보인다. 이러한 대전제 속에서 그 유연성(중도)은 크나큰 의미를 갖는 것이다.

초기불교 승단의 경제시스템{{) 초기불교 노동과 사원경제에 관한 논문으로 아래의 것들이 있다.
이재창, 〈불교의 사회경제관〉, 《불교학보》 제10집, 불교문화연구소, 1973
박경준, 〈佛敎의 勞動觀 소고〉, 《불교학보》 제35집, 1998, pp. 129-148.
박경준, 〈인도불교계율에 있어서의 노동문제〉, 《대각사상 》제2집, 1999, pp.149-170.
}}은 잘 알려져 있듯이 걸식시스템 이었다.

출가수행자는 일체의 경제 행위가 금지되어 있었다. 이것은 인도의 오랜 전통이자, 당시 여타의 교단들도 그러했다. 이러한 전통은 인도 특유의 뜨거운 기온 때문에 수하암상(樹下岩上)이 가능했고 권장되었기 때문이며, 물질의 허망함을 일깨우려는 의도 또한 있었다. 불타는 이러한 인도 전통을 받아들였지만 지나친 고행과 선정에 대해서 반대했음은 잘 알려진 있다.

출가수행자는 삼의일발(三衣一鉢)이라는 기본 소유물 외에는 소유하지 않았으며, 1일 1식(一日一食)으로 정해진 식생활도 병자를 제외하고는 걸식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경제행위는 물론 생산노동도 금지되어 있었다. 이는 기본적으로는 물질적 소유 및 탐욕의 근원을 없애자는 의도로 보인다. 또 자급자족의 경제 시스템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 인도의 환경을 이용하여 보다 많은 사람에게 불교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정신적 노동을 강조한 것이다. 불타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습니다. 믿음은 종자요, 고행은 비이며, 지혜는 내 멍에와 호미, 부끄러움은 괭이자루, 의지는 잡아매는 줄, 생각은 내 호미날과 작대기입니다. (중략) 노력은 내 황소이므로 나를 안온의 경지로 실어다 줍니다. 물러남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 그곳에 이르면 근심걱정이 사라집니다. 이 밭갈이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고 단 이슬의 과보를 가져옵니다. 이런 농사를 지으면 온갖 고뇌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법정 역, 《숫타니파아타》, 샘터,1991, pp. 30-32. }}

이 대화에서 불타의 의도를 짚어볼 수 있지만, 생산노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재가자들을 위한 가르침에는 노동의 신성함과 경제생활의 바른 길을 역설하는 전거들이 많음을 볼 때, 불타의 노동에 대한 관점이 출가수행자와 재가자 사이에 교육과 생산노동이라는 상보적 관계를 지향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대승불교 시대에 이르면 경제 활동 자체를 수행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는 소수의 출가자와 다수의 재가자로 구성되었을 대승 교단의 성격상 자연스럽게 야기된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의도는 다양한 대승경전에서 드러나는데, 《유마경》〈방편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속인으로 백의를 몸에 걸치고도 사문의 수행을 완수하며, 재가에 있으면서도 삼계에 물들지 않는 생활을 하였다. 처자가 있으면서도 항상 청정한 범행을 닦고 권속이 있지만 항상 멀리 떨어져 있기를 좋아했다. (중략) 정법을 굳게 지키어 어른들과 어린이를 가르치며, 모든 생업의 경영이 순조로워 세속적인 이익을 얻지만 그것에 기뻐하지 않았다{{ " … 一切治生 諧偶雖獲俗利 不以喜悅."(대정장14, p.539.)}}."

이 구절에서 우리는 출재가의 구분이 없음과 일상의 삶에 대한 긍정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생업, 즉 노동(생업)에 대한 긍정과 더불어 그 이윤에 대한 애착마저 없는 불교 특유의 노동관이 드러나 있다. 또 《법화경》〈법사공덕품〉에서도 "그가 설하는 모든 법이 그 뜻을 따르되 다 실상과 같아 서로 위배되지 아니하며, 혹은 세간의 경서나 세상을 다스리는 말씀이나 생업을 돕는 방법을 설할지라도 모두 정법에 따르게 되리라"{{ "… 治世語言 資生業等 皆順正法."(대정장9, p.50.)}}고 하여 생업(노동)이 정법(불법)과 다르지 않다고 설한다.

이러한 전통은 중국에 와서 더욱 논쟁의 대상이 되고 구체화되어 갔다. 앞서의 《법화경》 구절에 대하여 천태지의는 "생산업이 모두 실상에 위배되지 않는다"{{ "治生産業 皆與實相 不相違背"(대정장33, p.733.)
}}고 해석하여 노동을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특히 선종에서의 노동불교를 가능케 한 것은 획기적 공로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승니가 "논과 밭을 개간하고 농사를 짓는 것은 농부와 같았고, 혹은 돈으로 물건을 사고팔며 재물을 추구함에 상인들과 같이 이익을 다툰다."{{ 대정장52, p.143. }}고 하는 기록이 있고, 동일한 내용이 《홍명집》권6에 있는 도항(道恒)의 〈석효론(釋駁論)〉{{ 대정장52, p.52.}}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중국에서 승려들의 노동은 일찍이 동진(東晋) 시대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종에서 노동선을 실현시킨 장본인은 4조 도신(道信, 557-651)인데, 그는 노동(作)과 좌선(坐)이 다르지 않음을 부각시켰다.{{ 《傳法寶記》에 보면 도신은 승려들에게 "…努力勤坐 坐爲根本 能作三五年 得一口食寒饑瘡…"라고 하여 노동(作)과 좌선(坐)을 병행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도신의 노동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은 《전법보기》〈홍인장(弘忍章)〉에서, "홍인은 낮에는 도신이 시키는 일에 열중하였고, 밤에는 좌선하기를 새벽까지 하였으며, 일찍이 게으름을 피운 일이 없었으며 여러 해를 지극히 열심히 하였다{{ 《歷代法寶記》 〈弘忍章〉(대정장51, p.182上)에도 같은 내용을 전한다.
}}"라고 하여 도신이 제자들에게 노동을 수행의 방편으로 지도했음을 알 수 있다.

도신이 노동과 좌선의 병행이라는 독특하며 획기적인 시도를 한 것은 일찍이 남북조시대나 수·당대처럼 국가권력에 의한 지원이 없었고, 또 인도에서와 같은 걸식이 불가능했던 중국불교 변방에서의 자연스런 선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출가승들의 노동을 통한 자급자족 시도는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고, 계율의 유연한 적용이라는 큰 의미를 부여했다.

도신 이후 노동과 좌선의 병행은 홍인과 혜능으로 이어지면서 선종의 교단 내의 전통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혜능이 8개월을 디딜방아를 밟은 것과 신수가 나무하고 물 긷는 일을 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노동의 편린들이지만 당시의 선종교단의 경제력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능가불인법지(楞伽佛人法志)》는 "옳고 그름에 함구하고, 주체적 의지(心)로서 색과 공의 경계를 통일시킨다. 노동에 힘써 대중들에게 공양하였다 …, 사의(四儀: 行住坐臥)가 모두 도량이고, 삼업을 모두 불사(佛事)로 삼았다. 고요함과 어지러움을 둘로 보지 않아서, 어묵(語默)이 항상 같았다."{{ "緘口於是非之場 融心於色空之境 役力以申供養 法侶資其足焉 彫心唯務渾儀 師獨明其觀照 四儀皆是道場 三業咸爲佛事 盖靜亂之無二 乃語默之恒一"(대정장.85-1289.)}}고 혜능을 평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노동과 좌선의 병행에 그친 것이 아니라 노동의 현장을 깨달음의 장으로 발전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혜능이 '세간으로의 지향'을 역설한 것은, 마조의 '평상심'의 사상으로 이어지고, 이후 백장회해(749-814)가 평등한 대중노동을 하나의 준칙(淸規)으로 삼는 데에까지 이르게 된다.

백장은 기존의 생산노동에 대한 금기의 계율을 유연하게 적용하여 그 유명한 일구인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을 선언하여 노동을 성문화하였다. 또한 노동을 대중이 평등하게 실천(普請)해야 함을 역설했다.{{ 원대에 편찬된 《칙수백장청규》 권6 〈普請〉항에 "普請之法 蓋上下均力也. 凡安衆處 有必合資衆力而辦者. (중략) 當思古人 一日不作 一日不食之誡"(대정장48, p.1144上)라고 하여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 것과 노동에 있어 상하가 균등히 할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진허 가 편찬한 《唐洪州百丈山故懷海禪師塔銘》에는 "선사는 마조문하에서 수행할 때도 대중들과 똑같이 행동하였고 노동에도 문도들과 함께 어렵고 힘든 일을 같이 하였다"(行同於衆 故門人力役 必等其難勞, 대정장48, p.1256下)라고 전하는데, 그는 보청법을 성문화하기 전부터 공동노동을 실천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이러한 청규 제정의 이면에는 인도와 다른 중국의 사회적 조건과 회창폐불 등의 외부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는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렇다면 백장은 각종 경전과 율장에 명시된 경작 금지의 계율들을 어떻게 극복하였을까? 다음의 글에서 백장의 의도를 살필 수 있다.

"반드시 죄가 된다고 말할 수 없고, 죄가 안 된다고도 말할 수 없다. 유죄와 무죄는 각자에게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일체유무 등의 법에 탐염(貪染)하여 취사(取捨)의 마음이 있고, 삼구(三句)를 투과(透過)하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죄가 된다. 만약 삼구를 투과하여 심중이 허공과 같이 되고, 또한 허공과 같다는 생각도 없다면, 이 사람은 무죄이다. 죄를 짓고 나서 죄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하면 말이 안 되며, 죄를 짓지 않았는데 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도 말이 안 된다.

율장에서 '본래 미혹하여 살인을 하거나 나아가 서로 살인한다 해도 살생죄가 되지 않는다' 했거늘, 하물며 선종의 문하에서 그럴 수가 있겠는가?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허공과 같다는 생각조차 없는데, 죄가 어디에 자리 잡기나 하겠는가?"{{ 《百丈廣錄》(宇井伯壽,《第二禪宗史硏究》, 日本 ,東京, 岩波書店, p.402.)}}

이 일단에서 백장이 계율을 유연하게 적용한 근거는 각자의 선(善)에 대한 자발성(삼구투과)에 있다. 유와 무에 대한 고정적 시각, 언어와 이름에 대한 집착 등 일체의 실체론적 시각을 비판하고 인간의 자발성과 창조성, 자유의지(허공, 마음)로서 극복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선종에서 노동의 의미는 무엇인가? 원대(元代) 중봉명본(中峰明本, 1243-1323)의 《환주청규(幻住淸規)》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혹시 보청에 있어 노동에 임할 때는 일의 경중을 따지지 말고, 힘을 다하여 그 일을 하도록 해야 한다. 좌선 수행에 집착하여 적정함을 간직하기 위해 대중의 뜻을 따르지 않고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노동에 임할 때는 좌선수행중과 같이 하여야 하며, 소리내어 농담을 하거나 큰 소리로 웃거나 해서도 안 되며, 남보다 뛰어남을 자랑하거나 능력을 들어내려고 해서도 안 된다.

단지 마음으로 도념을 보존하고 몸으로는 대중과 함께 노동에 전념해야 한다. 일을 마치고 승당으로 되돌아 온 후에는 고요하고 묵묵히 하여 처음과 같이 하도록 하라. 일을 할 때나 좌선을 할 때나 동정의 두 모습이 여여하게 같아야 하며 근원적인 본래심인 당체는 일체의 경계를 지양(초연)하도록 해야 한다. 비록 종일 노동을 하였지만 아직 노동하지 않은 것처럼 여여하도록 해야 한다."{{ 속장경111, p.499.}}

이 일단에서는 선종 교단의 노동은 공동노동을 지향하고 있고, 노동을 할 때도 단순한 행위가 아닌 자신의 자발성을 끌어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 공동노동에 있어서도 남에 대한 배려와 노동에 대한 상(相)을 갖지 않아야 함이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선종 노동관의 핵심이다.

선종의 노동은 교단의 경제적 자립 가능하게 하여 개인의 자발성(자유) 확대와 교단이 중앙권력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 그것은 노동을 통하여 생산력을 증대한다거나, 노동이 소유의 권리원천이라거나, 또한 노동을 역사 발전의 원동력으로 보는 근현대적 의미의 노동은 아니다. 하나의 수행으로서 노동을 자리 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수행이 중도의 실천이고 노동이 하나의 수행이라면, 중도적 노동은 현대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끌어낼 수 있는 단초가 된다. 다만 중도적 노동은 하나의 범주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의 모순이 노동의 소외라면 평등에 키워드를 맞출 것이고 생태적 모순이라면 좀더 넓은 의미로 확대될 것이겠지만, 다양한 모순들의 영역 속에서 각각의 의미가 모두 중도(조화로운)적 노동으로 자리매김하여 전체에서 그 의미가 드러나는 화엄의 사사무애적 노동이 될 때 진정한 전체로서의 중도적 노동이 가능할 것이다.

중국불교, 특히 선종교단의 노동을 통한 수행과 경제적 독립은 불교의 입지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획기적인 사건이었고, 이를 받아들인 한국불교의 선종으로서는 행운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3.만해(卍海)의 승려 노동 주장

근현대 한국불교는 사회적으로는 봉건성의 극복과 주권상실이라는 복잡하고 힘든 문제들을 안고 있었고, 내적으로도 산일된 불교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당시의 다양한 불교개혁론에서 발견되고, 그 중 돋보이는 것이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일 것이다.

만해는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승려의 노동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승려노동 주장으로서는 처음이며, 그의 개혁론에 핵심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만해는 석가의 경제사상을 불교사회주의로 보았던 바, 조선불교의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그리고 승려의 인권회복 방안으로 승려의 노동을 주장한 것일 테고, 승려 노동 주장을 개혁론의 핵심으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만해에게 있어 개혁의 목표는 불교의 사회적 역량을 높이는 것이었고, 승려의 노동을 주장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의 사회적 실천운동은 대중불교의 건설로 압축되는데, 《불교(佛敎)》지에 실린 〈조선불교의 개혁안〉에 잘 나타나 있다.

"대중불교라는 것은 불교를 대중적으로 행한다는 의미니, 불교는 반드시 愛를 버리고 親을 떠나서 인간사회를 격리한 뒤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만반현실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번뇌 중에서 보리를 얻고, 생사 중에서 열반을 얻은 것인즉, 그것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이 곧 대중불교의 건설이다."{{정해염 편역, 《한용운 산문선집》, 현대실학사, 1991, p.160. }}

불교가 현실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현실 속에서 부정되고 다시 부정되는 과정임을 강조하는 것은 마치 대승불교 초기나 중국초기 선사들의 선언과도 상당히 닮아 있다. 그는 사회적 불교의 구체적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실행이라는 것은 불교도의 자체가 사회적으로 진출하여 불교 교화를 궁행 실천함이니, 사회교육적 시설은 불교의 교화가 대중층에 파급할 만한 시설을 말함이니, 보편적 독자를 얻을 만한 불교적 문예작품, 불교교화에 대한 실사 및 창작영화, 선적적 삐라 및 팜플렛의 무료 반포, 불교도서관의 공개, 노농층에 대한 사회적 시설, 기타 종종의 대중적 교양에 필요한 시설을 말함이요, 불교도의 실행이라 함은 불교도 스스로가 대중불교를 건설하기 위하여 먼저 등장의 인물이 되지 아니하면 안 될지니, 불교도로는 속계 진세를 여의고 백운유수의 청정 도량에서, 때로는 정에 들고 때로는 천공을 받을지라도 대중과의 교섭이 없으면 부처님이 이르신 바 소승외도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불교도는 마땅히 自未得度 先度他人을 體認하여 스스로 入泥入水, 교화의 衝에 당하지 아니하면 안될 것이다."{{ 앞의 책, p.161.}}

특히 불교도가 소유하고 있는 인적 물적 자산들을 사회와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주장과 노동 층에 대한 사회적 시설을 언급한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계속하여 대중불교의 건설이 가능해지려면 산간암혈에서 나와 중생과 함께 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는데, 선사로서의 만해를 평가할 때 만해의 선관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만해는 "선(禪)이라는 것은 고적(枯寂)을 묵수(墨守)하는 사선(死禪)이 아니요, 기봉(機鋒)을 활용하여 임운등등(任運騰騰)하는 활선(活禪)이다. 선은 능히 위구(危懼)를 제하고, 선은 능히 애상(哀傷)을 구하고, 선은 능히 생사를 초하는 것."{{ 앞의 책, p.138.}}이라고 하여 산간암혈에서 묵조하는 것이 아닌 자유는 일상 삶 속의 활발함 속에서 구가되는 것이 선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그의 선관이 한국선의 자주적 종풍인 임제선임을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러한 선사상을 볼 때, 만해가 승려노동을 주장한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만해는 승려노동에 하나의 장을 설정하고 있다. 만해는 당시 승려가 수백 년간의 압박을 받아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를 노동을 통한 자립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명쾌하게 정의한다. 이 놀고먹음이 '분리(分利)'라고 하여 다른 사람과 국가에도 해로움을 역설하고 있다. 만해는 이 분리의 해로움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만일 한 사람이 있어서 하는 일이 입고 먹으면서 갚는 것이 전연 없으면 이것은 농사짓고 길쌈하는 사람의 몇 분의 일의 노력을 헛되이 소비하는 것이며, 전체 경제에서 볼 때에도 한 사람의 역량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대중 노동력의 증감과 경제의 발전과 침체가 반드시 분리인(分利人)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비례의 차이를 삼는 것이니 분리자는 생산자의 도둑이라 할 수 있다."{{ 앞의 책, p.75.}}

또한 노동을 통한 경제의 자립이 있을 때만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경제적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인을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승가 경제의 걸식에 대해 몰라서가 아니라 그 걸식이 기취가 되고 호구지책으로 되었을 때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취생활을 다음과 같이 맹비난하고 있다.

"기취생활이란 무엇인가. 글자를 좀 이해하고 조금 교활한 자가 화복 보시 따위의 말로 우매한 부녀자를 말로 꾀어 행동을 개처럼 하고 아첨을 여우같이 해서 누더기를 몸에 걸치고 입에 풀칠하는 계략을 영위하는 것을 말한다."{{ 앞의 책, p.75.}}

말 그대로 노동하지 않으면서 그 목적마저 불순하게 경제적 삶을 누리는 승가교단에 대한 노골적이 비판이 담겨 있다. 또 걸식에 대해서도 "개걸 생활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대부분의 승려들이 업으로 삼는 것으로, 남의 집 대문에 이르러 만나보고 절하면서 한 닢 돈과 몇 톨의 곡식을 구걸하는 것을 말한다. (중략) 이것도 수도와 중생제도의 지극한 뜻에서 나온 방편일 뿐이며, 오로지 걸식에 종사하여 호구지책으로 삼으라는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음.}}고 하여 걸식의 본래 취지를 망각하여 단순히 호구지책으로서의 걸식을 비난하고 있다.

물론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이 당시 승단 전체는 아니겠지만, 불교의 대중화를 꿈꾸던 만해에게는 승단의 노동만이, 경제적 자립만이 스스로를 떳떳하게 하고 더 나아가 사회에 이바지하는 길로 보였던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립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차스럽게 남에게 부양을 받으면 비록 그 몸을 연약한 버들가지나 바람 앞에 풀처럼 그 마음을 굽실거리지 않으려 해도 굽실거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슬픔이 커지기만 한다.

오늘날의 세계는 반 넘게 황금을 경쟁하는 힘에 좌우되고 있다. 문명의 온갖 일이 돈의 힘에 따라 이루어지고 성공과 실패의 모든 실마리가 이익을 다투는 데에 말미암게 되었다. 진실로 생산이 없으면 세계가 무너지기도 하고 한 나라가 망하기도 하고 따라서 개인도 살 수 없을 것이니, 사람과 생산의 관계는 고기와 물과 같다."{{ 앞의 책, p.77.}}

이것은 당시 세계자본의 쟁탈전에서 승가뿐만 아니라 국가경제의 활로가 생산노동에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시대적 사조에 맞춰 승단이 전날의 굴레를 벗고 스스로의 인권을 회복하여 자유를 찾는 유일한 길이 생산노동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만해는 또한 생산노동에 있어 자본의 부족에 대한 그 방법적 대안으로서의 노동을 역설하고 있다.

"노력은 실로 자본의 자본이라 할 수 있으며, 방법이란 것은 자본을 움직여 이익을 늘리는 계획인 것이니, 자본이 없는 사람은 마땅히 먼저 자본을 갖출 방법부터 연구해야 하며, 이익을 늘리는 방법은 틀림없이 둘째 문제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자본을 갖추는 방법도 또한 노력 외에는 그 길이 없으니 노력이야말로 천연의 자본이요 최초의 방법이라 하겠다."{{ 앞의 책, p.78.}}

곧 만해는 노동이 자본의 원천이자 유일한 대안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주장은 노동을 소유의 권리원천으로 보았던 서구 계몽주의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승가의 문제를 태만으로 보았던 만해에게 노동의 강조는 필연적이었지만, 선종교단의 전통적 선과 노동의 일치 속에서 어떻게 그 시대의 노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승단의 모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그 대안으로서 승려노동을 핵심 고리로 파악했음은 선지자로서의 혜안이 아닐 수 없다.

4. 용성의 선농일치

용성은 승려노동을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직접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했다. 그는 당시 승단과 거리를 두고 민중불교로서의 대각교운동을 제창하였다. 그의 승려노동의 주장도 대각교운동의 일환이었고 스스로도 실천하였다.

이러한 승려노동에 대한 주장은 대각교운동의 교의인 《대각교의식(大覺敎儀式)》에도 명시하고 있다. 십이각문(十二覺文) 중의 "자기 생활에 힘써 노동하고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自活勞力不賴也)."{{ 《대각교의식》하권, 대각교중앙본부, 1931, pp.170∼173.}}는 것으로 자급자족의 원칙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또 그는 중국 용정의 '선농당(禪農堂)'과 경남 함양의 '화과원(華果院)' 등의 수행도량을 두어 농업노동을 중심으로 염불·간경 수행을 하는 승가 모델을 제시했다.

용성의 노동 장려와 실천은 《불교》지에 실린 〈중앙행정에 대한 희망〉이라는 시국 논설에서 잘 드러난다.

"아(我)는 여시(如是)히 관(觀)한다. 세계사조가 년년월월히 변하고 반종교운동이 시시각각히 돌진(突進)하고 잇다. 오인(吾人)이 차시(此時)를 당하야 교정을 급속도로 개신치 안이하면 안이 될 것이다. 하나는 선율(禪律)을 겸행하지 안이하면 안이 될 것이요, 하나는 오인(吾人)의 자신이 노동하지 안이하면 안이 될 것이다. 석일(昔日)에도 황벽임제(黃蘗臨濟)와 위산앙산(僞山仰山)이 다 전중(田中)에서 보청(普請)하사 친히 경작하시엿다. (중략) 대각(大覺)께서 오인(吾人)의 농상(農商)을 금하였으나 현금에는 도저히 걸식할 수도 업게 되엿다. 아 우리는 광이들고 호무가지고 힘써 노동하여 자작자급하고 타인을 의뢰(依賴)하지 말자. (중략) 오불(吾佛)의 교리와 세간의 상식을 겸비케 하여 유심유물무이도(唯心唯物無二道)를 실행하야 노력 자급함으로써 반종교자를 방어하며…{{ 백용성, 〈中央行政에 對한 希望〉,《佛敎》93호(1932.3), p.15.}}"

이 일단은 용성의 사회적 안목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만해와는 달리 승려의 노동을 선종교단의 전통으로서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만해와 더불어 평생 독립과 불교의 민중화를 고민했던 용성이 시대적 흐름 속에서 승단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역사의식을 드러낸 대목이기도 하며, 승단이 사회의 광명이 되지 못하고 반사회적 집단으로 비춰지고 있을 당시에 유심과 유물의 통일로서 그러한 우려를 자주적으로 개혁코자 하는 의도는 역시 중국의 초기 선사들의 고민과도 맞닿아 있다고 보아진다.

용성은 농업뿐만 아니라 공업도 장려하여 그 실천의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또 허다한 재산을 낭비하지 말고 공장이나 혹 농촌을 건설하야 교육하되 오교(吾敎)를 불신할 자는 제태(除汰)하고 오교(吾敎) 신앙자(信仰者)를 구급하여 주면 자연히 오교(吾敎)가 진흥할 것이니 각 사원의 토지가 불소(不小)한 것이라. 농촌이나 도시나 공장을 건설하되 소비사업으로 하지 말고 생산작업으로 하면 일변은 구제도 되고 일변은 발전도 될 것이다. (중략) 각 도시에 실업공장을 건설하고 신교자(信敎者)의 생활을 구제하여 주며 포교사를 치(置)하야 피등(彼等)에게 포교하고 각 농촌을 건설하고 각 지방기관을 설립하야 생산소비조합 등을 실시하며 농촌 교당(敎堂)을 건설하고 농촌순회포교사를 치(置)하야 소작인이 전가적(全家的)으로 신앙케 하며 각 사원산림제도(寺院山林制度)에는 혹율혹시목(或栗或枾木等)을 다수(多數) 종식(種植)하여 식량품 생산등에 유족(裕足)케 할 것이다."{{ 앞의 책, p.16.}}

용성은 승려의 노동뿐만 아니라 승단의 시스템이 본래의 목적인 사회구제의 모습으로 변해야 함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고, 그 내용 또한 낭비하는 물적 인적 승단의 자산으로 농촌과 공장을 건설, 고용확대를 통한 중생구제와 또한 그들을 지도(포교)하여 결속시키고 생산소비조합을 만들어 유통시키는 등의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농촌교당을 건설하되 소작인을 중심으로 신앙케 한다는 대목인데, 그의 당파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일단이다. 또 용성은 이러한 실행이 이론적인 논의만으로 그치면 안 되고 승려 자신부터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용성의 노동은 이와 같이 단순한 승려의 노동만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로서 노동을 통한 사회의 변혁, 노동을 통한 중생의 구제, 노동을 통한 국가의 독립을 생각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 그 외의 승려노동 주장과 특성

일제하의 한국 산업의 주류는 농업이었으며, 승단의 재산 또한 토지와 산림이었다. 또한 불교 신도의 대부분도 농업에 종사하였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승단의 혁신이나 사회의 구제는 이러한 기반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리라 생각된다. 중생구제라는 불교도의 당연한 의무로서 식민지 중생들을 어떻게 구제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사회의식을 가진 몇몇의 선각 승려들이 주장하고 실천한 편린들 속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그 극복의 대안으로서 만해· 용성과 더불어 승려의 노동을 제기하고 있는 기록들은 어찌 보면 당연한 주장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에 관련한 흥미로운 주장이 있는데, 《불교》지에 김만태(金卍態)가 〈불교청년들아 농공업에서 불(佛)을 찾아라〉라는 논제로 승려의 노동을 독려한 글이다. 그는 의식주가 사람의 생명에 적절한 일대사인연임을 말하고, 과학문명이 발달한 생존경쟁의 시대에 능력과 기술에 따라 노동해야 함을 주장하면서 일곱 가지로 그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대사회는 종교를 미신이니 우상이니 하여 비종교(非宗敎)를 지향하는데, 승려는 유식민(遊植民)으로서 사회의 해독자인 기생충을 벗어나려면 사회적 인식을 가져야 한다.

둘째, 불교는 사람의 생명인 정도(正道)를 보호하고 생명의 본원을 고찰함에 진제(眞諦)의 묘각(妙覺)으로 증과(證果)할 것이고, 승려도 육도고행(六道苦行)과 육바라밀(六波羅密)을 실천하여 불(佛)을 구하고 도(道)를 증(證)하여 중생을 구제해야 함이니, 불(佛)은 오직 생명의 본원이고 승려의 본업은 만고행(萬行苦)인즉 무엇이든 업에 따라 근수정진(勤修精進)함이 승려의 생명이다.

셋째, 조선의 사원은 다른 나라와 달라서 보시체계(布施體系)를 수용할 처지가 못 되고, 사찰이 처해진 여건(사찰경제, 禪道文敎, 토지와 임야)을 보더라도 노동은 불가피하다.

넷째, 이것은 대승의 사회적 불교를 건설하고자 하는 의도이며, 칠천 명이나 되는 승려가 실업자로 있는 것은 사회적 해악이며 불교 장래의 성쇠가 달린 문제이다.

다섯째, 현재의 승단의 시스템은 구습을 답보 하여서 독신생활에 안주하고 있다. 사회적 제도와 집단적 가족생활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나태성은 의타성을 키워서 빈곤을 키우고 빈곤은 나태성을 키우는 연속적 병폐를 안고 있다.

여섯째, 승려도 이 시대에는 남과 같이 활도(活道)를 찾아야 하며 사찰 유휴 토지에 공장과 농장을 건설해야 한다. 성불의 인과(因果)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고, 노는 자에게는 오직 고통스런 지옥이 있을 것이다.

일곱째, 전조선불교도는 먼저 농장을 건설하고 삼림공장을 시작해야 하며, 남의 사원에서 낮잠자지 말고 두 손이 터지고 안면이 흑색이 되도록 일하여야 한다. 이것이 불교를 위하고 사회를 위하는 대도사(大導師)의 불(佛)이다.{{ 《佛敎》60호(1929.6), pp.53∼54.}}

위와 같은 일곱 가지 주장은 다소 선동적이기는 하지만, 승려의 노동에 대한 당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김만태 역시 승려의 노동으로 당시의 승려들의 나태성을 극복하여 승단을 개혁하고 나아가 사회적 역할을 목표로 하고 있다.

비슷한 주장을 역시 《불교》지에 실린 춘은(春隱)의 〈농촌계발과 현대불교의 선무적(先務的) 사명〉에서도 볼 수 있다. 춘은 역시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농민이 다수를 점하기에 농민의 계몽이 필요하고 그에 따른 포교당·강습소·병원·약국·농민조합·금융기관을 시설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농촌의 어려움은 지주들의 무도와 지주와 소작인의 불평등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농촌문제의 해결은 소작쟁의가 해소될 때 가능하다고 보고 지주들의 착취와 전횡이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승려 자신이 농촌에서의 원력을 가져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농민으로 더불어 일도 하고 포교도 하고 지도도 하고 한 가지 농장에도 나가고 지개도 지고 광이도 들고 더욱 친교를 가져야 한다. 사찰이 모다 산곡에 있고 승려 자신이 농가의 생육(生育)을 받았고 사찰의 재산이 토지인즉, 어느 방면으로든지 어느 관계로 보든지 조금이라도 농촌을 떠날 수가 없다.{{ 《佛敎》75호(1930.9), p.21.}}"

그는 또한 그 대상에서도 사찰토지의 소작인 중심으로 불교신도가 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는 점도 특이할 만한 지적이다. 그리고 사찰 지주도 농민에 대한 박애정신을 갖고 승려 자신도 사찰 인근의 지역민들과 같이 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현대의 지역공동체의 정신과 비슷한 주장으로서 현대 승단이 지향해야 할 모델이 될 수 있는 지적이라고 본다.

또 하나의 주장은 재일 불교유학생이었던 정봉윤(丁鳳允)의 것이다. 그는 사원공동체의 평등성을 무시하고 주지가 전횡하는 당시의 행태를 비판하고, 주지의 대중에 대한 헌신을 통한 사원공동체의 평등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승려노동에 있어서도 질적 발전을 주장하는 바, 전 조선사원의 산림면적이 막대한 유리한 조건에 있음을 들면서 조림사업을 개선하고 효율적 산미증산을 통해 빈곤을 벗어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소작인문제나 수리조합문제는 노동조합을 구성하여 해결할 것 등,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는 승려의 노동에 대해서도 사회의 현실인식을 강조하고 있다.

"승려생활이 농민화되고 노동화되여야 현실생활을 지속할 수 잇스며 불교의 대중화가 될 것이다. (중략) 이리하야 승속(僧俗)이 일치되고 내외가 부합되는 현대적 실생활(實生活)을 하면서 그 중에서 도덕적 임무와 종교적 사명을 이행(履行)하난 것이 현대 승려의 맛당히 취할 바 길이라고 생각한다."{{ 《金剛杵》19호(1931.11), p.41.}}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출가자와 재가의 일치를 이루는 사부대중공동체에 대한 구상이다.
또 하나의 주장은 당시 중앙불전의 교수였던 김경주(金敬注)가 《불교》지에 〈승려의 생활문제〉{{ 《佛敎》100호(1933.10), pp.43∼51.}}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에 보인다.

그는 승려의 노동을 인도의 탁발걸식이 전부가 아니며, 조선 불교가 대승교단인 보살불교인 이상 그 변형은 불가피하며, 세계공황과 사원경제의 빈곤을 타파하려면 계율과 도덕을 시대의 방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승려생활이 농민화 하고 노동화 되어야 불교의 대중화를 이룰 수 있음을 역설하고, 구체적 방법으로 토지를 승려가 직접 관리하고 농장을 경영하며 협동조합 및 공장의 경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사유토지의 관리는 사유토지 소작인 50호 이상의 부락에 승려 1인을 보내 그 토지를 관할하고 매 일요일 저녁에는 교리를 선전케 할 것을 주장한 점은 특이하다.

소작인 문제에 있어서도 소작권을 회수하여 당해 사찰이 그 토지를 농장으로 경영하면 2배의 사찰수입을 기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소작인들에게 노동조합을 결성케 하여 농장의 일에 전속으로 계약토록 하면 소작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그는 상식 있는 무직 승려들은 불교기관 외에도 은행원, 회사원, 관리, 사농공상 등 무슨 일에도 종사하여도 무방하다고 주장하고, 다만 확고한 신앙심만 있으면 된다는 특이한 주장을 하였다.

승려의 노동을 반농반선(半農半禪)의 입장에서 주장한 석운애(釋雲涯)의 주장은 좀 독특하다. 학인이면서 봉선사 강원 잡지인 《홍법우(弘法友)》 창간호에 기고한 〈현대에는 반농반선(半農半禪) 불교라야 한다〉에서 석운애는 농즉선(農卽禪)의 입장에서 승려의 노동을 주장하고 있다.

"무엇이 농즉선(農卽禪)인고 하면 벼씨를 뿌리면 벼싹이 나서 벼열매를 결성(結成)하며 콩을 심으면 콩이 결실하는 것은 인과의 필연을 여실히 증명하고, 아모리 좋은 종자를 심었드라도 경전비배(耕耘肥培)의 관리가 불충분하면 열등의 결과를 보게 되고, 조곰 나쁜 종자를 심었드라도 경전비배(耕耘肥培)의 충분(充分)으로 우등(優等)한 결과를 보는 것은, 과거소작선악제업(過去所作善惡諸業)을 금생(今生)의 수행(修行) 여하(如何)로 능히 회인전과(廻因轉果)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 지적하고, 근(根)과 엽(葉)은 일 년 중에 춘생추사(春生秋死)의 생멸이 있으나 그 종자는 영세존속(永世存續)하는 것은, 우리에게 육신은 무상하야 일생의 생멸이 있으나 정신은 진상(眞常)하야 사생취생(捨生趣生)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현시(顯示)하는 것이 농즉선(農卽禪)이 아니고 무엇이랴."{{ 《弘法友》창간호(1938.3), p.40.}}

농사가 바로 선(禪)이라는 것이다. 즉 자연 속에서 노동은 불법과 다름이 아니라 오히려 불법을 깨닫고 증장시키는 매개가 됨을 설명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한 이로 백학명(白鶴鳴)이 있는데, 그는 선원 운영에 있어서 반농반선을 규칙으로 정하고 자선자수(自禪自修)와 자력자식(自力自食)을 원칙으로 삼고, 오전에는 학문, 오후에는 노동, 야간에는 좌선이라는 세 단계의 수행을 강조했다. 특히 동안거는 좌선위주로, 하안거는 학문과 노동위주{{ 김광식, 〈백용성 스님의 선농불교〉《대각사상》제2집, pp.64∼66. 참조 }}로 하여 선원의 개혁을 통한 불교의 정체성을 찾으려 노력했다.

또 불교의 농촌진출에 대한 입장을 밝힌 당시 불교청년 운동가였던 김법린(金法麟)은 민중적 불교의 실현을 사상적 전개의 기반으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불교의 농촌진출에 대하야〉{{ 《佛敎》103호(1933.1), pp.19∼23.}}라는 논설에서 농촌과 사원간의 밀접한 관계의 역사를 지적하면서 승단의 농업노동의 무관심을 질타하고 있다. 그는 농촌포교에 대한 방안을 세 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첫째로 각본산종무소 법무계와 중앙선교양종교무원 교학부에 농촌포교부를 특설 할 것.
둘째로 중앙포교당에 단기농촌포교강습소를 개설하여 각본산에서 모집추천한 지원자를 강습케 하고 중앙불전에 과외로 농촌포교연구부를 상설하여 장래 농촌포교에 지망하는 학도로 하여금 특수한 훈련과 지도를 받도록 할 것.
셋째로 조직적인 실행 계획을 확립 할 것.

이와 같은 실행은 장기적 안목으로 3년 내지 5-10년 등의 기한을 두어 실천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예비과정을 거쳐 첫째, 경제관계를 첫째로 사원토지의 소작농이 많은 지역의 교구를 선정하여 포교할 것을 말하고 있는데, 농촌 문제 중 가장 심각한 문제가 소작쟁의에서 비롯된다고 판단하고 이 문제의 해결이 우선임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로, 포교의 장소는 교구의 중심지점에 두어 농민의 '사회적 중심'이 되게 하여, 실용뿐만 아니라 신앙처의 역할을 하게 하여, 단순한 농업의 교류뿐만 아닌 문화적 센터로서의 기능을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동의 유희장소, 어른들의 야간 집회 장소 등 삶의 터전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셋째로, 포교의 순서는 민중의 실생활을 우선으로 하고 불교적 소양에 대한 포교는 다음임을 지적하고 있다.

포교의 실제 활동 지침도 지적하고 있는데, 첫째로 문맹퇴치운동, 둘째로 상식보급운동, 셋째로 경제운동, 넷째로 단체훈련운동으로 승려의 농촌진출에 대한 세세한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승려의 노동이 아닌 농촌사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기반으로 기획한 프로젝트로서, 사원의 현재위치와 승려의 역할, 포교의 방법과 내용으로서 승려의 역할이 노동자임과 동시에 교육자임을 주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또 기성교단에 대해 시대적 흐름에 대처하지 못하고 안주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화석화된 제도를 반성의 칼날로서 해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법린은 승려의 노동만이 아니라 민중적 불교의 건설을 목표로 이러한 농촌포교의 프로그램을 기획했음을 볼 수 있다

6. 결어

불교에서의 노동은 시대적 사회적 여건에 따라 변해왔고, 중국에서 처음으로 노동을 성문화하는 획기적 계기를 만들었다. 중국의 선종을 받아들인 한국 선종에서의 노동 전통은 지금까지 울력이라는 잔재로 남아있다. 근현대 한국불교의 승려노동 주장은 그 내용이 다양하고 실행방법에 있어서도 각기 조금씩 다름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당시 승려노동 주장에 대한 원인에 있어서는 승려들의 태만과 현실인식의 부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승려들의 나태는 승단의 자주성을 확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해악임을 그 첫째 원인으로 꼽고 있는 것이다. 이 외에 시대적 사조와 반종교인의 무노동 비판, 농촌의 빈곤 등의 외부적 원인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승려 자신의 문제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노동을 통한 사원경제의 자주화와 더 나아가 사회적 구제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실행 방안에 있어서도 농장을 경영하고 농촌에 포교당을 설치, 단체훈련, 협동조합의 설립, 노동조합의 설립, 조림사업과 공장을 경영, 금융기관을 설치하는 등, 노동과 교육을 중심으로 사원과 농촌도심이 결합할 수 있는 제도적 대안까지 매우 심도있는 고민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당시 승려의 노동을 처음으로 제기했던 만해는 승가의 자주성, 특히 인권회복을 위한 노동을 강조하여 이후 승단에서의 노동을 공론화하는데 기여했다고 본다. 또한 용성은 승려의 노동뿐만이 아닌 노동을 통한 사회적 구제책으로 구체적으로 기획하고 실천한 점은 현대에서도 연구할 점이 많다고 보아진다.

용성과 김법린의 승려노동 주장에 있어서 승가의 시스템에 대한 전체적인 기획은 현재 일각에서 심한 자본주의의 대안적 모색으로 실천하고 있는 생태적 도농공동체의 내용과도 흡사한 면이 많이 있다. 현재의 승단의 문제 또한 사회적 안목의 부족과 승려들의 나태, 물질적 소유욕 등 당시의 지적과 다름이 없음을 볼 때, 당시의 고민과 실천에 대한 관심은 두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사원의 자주화를 위한 승려의 노동을 상기시킨 김만태와 춘은, 선원의 반농반선을 재조명하고 실천했던 백학명, 특히 농즉선의 입장에서 노동 자체가 선이라는 주장한 석운애, 사부대중의 노동공동체를 구상했던 정봉윤 등 각각의 주장과 실천은 노동의 실종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 승단에서 귀를 기울여야 할 중요한 대목이다. 또한 노동의 소외인 측면에서의 소작농에 대한 관심과 해법들은 당시 불교의 노동이 근대적 의미를 담고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들이다.

결론적으로 당시 주장했던 승려의 노동은 불교의 대중화와 민중화로 귀결된다. 승단은 사회 속에서 존재하며 그 사회대중과의 호흡 속에서 발전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노동을 통한 경제적 자립은 승단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지름길이며 사회발전에 이바지 하는 중요한 매개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승단에 주는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종명스님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의상만해연구원 연구원이며, 일과 깨달음의 도량에서 정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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