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의 불교학(9) - 세친(世親)의 비판에 대한 중현(衆賢)의 반론을 중심으로 -

{{ * 이 글은『印度哲學』第16輯(2004, 2)에 실은 글을 수정 및 축약한 것임.}}

1. 서론

일반적으로 설일체유부(이하 유부로 약칭함)는 부파불교를 대표하는 학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인식에는『구사론』{{ 본 논문의『구사론』텍스트는 Swami Dwarikadas의 교정본 'Abhidharmako a-Bh ya of Acharya Vasubandhu with Sphut rth Commentary of c rya Ya omitra. (Varanasi, 1970∼1973)'를 번역한 것으로, 앞으로 'AKBh'로 약호한다.}}으로 대표되는 세친(Vasubandhu)의 역할이 지배적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역할로 말미암아 보다 체계화된 유부사상뿐만 아니라, 경량부(Sautr ntikas)의 사상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친의 사유는 유부의 가장 강력한 대론자였던 경량부에서 출발한다. 즉 그는 『구사론』에서 유부에 대해 비판적인 경향을 띰으로써 이미 중현에 의해 경주(經主, S trak ra)로 취급받고 있으며, 중국 비담종(毘曇宗)의 대표적인 주석가들 역시『구사론』을 경량부적 문헌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권오민,『유부아비달마와 경량부철학의 연구』, (경서원, 1994), p. 253. }}

그러나 세친의 이러한 태도는 유부 본래의 사상적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는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이에 유부를 대변하는 중현(Sa ghabhadra)은 이른바 '구사박론(俱舍雹論)'이라고 불리는『순정리론(順正理論, Ny y nus ra)』을 지어, 세친의 잘못된 비판에 대해 반론하고, 그것을 통해 유부 본래의 사상적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

그러면 이러한 비판과 반론의 근본적 대립은 어디에서 비롯되었까? 그것은 아마도 존재론적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한『구사론』제5장에 의하면, 실유론(實有論)의 선두주자였던 유부는 그들의 교설인 삼세실유설의 근거로서 4가지 경전적·논리적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법이 삼세에 걸쳐 존재한다는 유부의 논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경전적 근거 : 1) 과거와 미래는 존재한다. 왜냐하면 "다문성제자(多聞聖弟子)들은 과거색에 관심을 갖지 않으며, 미래색에 만족하지 않는다." 라고 세존이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2) 붓다가 말씀하시기를 : 인식은 두 가지 조건 때문에 일어난다. : 시감관(視感官, Cak urindriya)과 색(r pa) 내지 의근(意根, manoindriya)과 법(dharma)이다.

2. 이론적 근거 : 1) 감관에 의해 과거에 지각된 대상이 인식의 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식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상없는 인식은 없기 때문이다. 2) 만일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악의 행위가 어떻게 미래에 과보를 산출할 것인가. 사실 과보가 산출되는 순간, 과보인(果報因, Vip ka-hetu)은 과거이다.{{ 서성원, [第一義空經과 Vasubandhu], 『印度哲學』제3집, pp. 16∼17
}}

이와 같이 유부가 삼세는 실유하며, 법체는 항유한다는 '삼세실유 법체항유'{{ '삼세실유ㆍ법체항유'는 본래 서로 이어진 대구(對句)가 아니며, 일본의 응연(凝然)이 편찬한『八宗綱要』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지만, 고래로 유부철학의 내용을 규정하는 명제로 회자되어 왔다.}}를 주장하는데 반해, 세친은 과거와 미래에는 법(dharma)이 없으며[過未無 ], 오직 현재의 한 찰나에만 법이 존재한다고 하여, 사실상 법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법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이견은 다시 존재 구조의 문제로 확대되어 대립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인과론과 작용론이다. 여기서 인과론이란 모든 법들이 어떤 관계성에 놓여 있는가를 논구하는 것이고, 작용론이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 법들이 어떻게 발생하고 소멸하는가를 논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친은 인과론에 있어서는 법들을 인(hetu)과 연(pratyaya)의 관계로만 파악하고, 작용론에 있어서는 인과 연의 관계가 곧 작용이라 하여, 별다른 작용력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유부는 인과론에서는 보다 복잡하고 세세한 6인(因)·4연(緣)·5과(果){{ 6인: 능작인(能作因), 구유인(俱有因), 상응인(相應因), 동류인(同類因), 변행인(遍行因), 이숙인(異熟因) 4연 : 증상연(增上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소연연(所緣緣), 인연(因緣)5과 : 증상과(增上果), 사용과(士用果), 등류과(等流果), 이숙과(異熟果), 이계과(離繫果)}}를 주장하는데, 이것은 유부만의 독특한 인과론으로서, 삼세는 이 인ㆍ연ㆍ과의 관계성에 놓여 있다고 한다.

즉 이것은 미래의 어떤 법이 현재의 자신의 인과 연을 만나 과거로 가는 과정을 설명한 것으로, 한 법이 일어나 사라질 때까지의 과정은 마치 거미줄과 같이 많은 인과가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이론이다. 그리고 작용론에 있어서는 유위의 4상(catur-lak a a)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유위법을 미래로부터 현재 그리고 과거로 나아가게 하는 실질적인 작용으로 인과론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은 존재론을 둘러싼 세친과 중현의 논쟁 중에서 논자가 무엇보다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유위의 4상 부분이다. 왜냐하면 유부에 있어 4상이란 앞서 설명과 같이 존재와 그 존재들 사이의 인과관계에 있어 직접적인 힘을 발하는 동력인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삼세실유의 관점에서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주장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유위 4상에 대한 몇 가지 쟁점을 세친의 비판에 대한 중현의 반론을 중심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2. 세친과 중현의 찰나관 비교

유위의 4상을 논함에 앞서 찰나(k a a)를 언급하는 것은, 4상의 논쟁이 찰나의 정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즉, 세친은 현재의 생멸만을 한 찰나로 보는 반면, 유부는 4상의 작용을 한 찰나로 보는데 있다.
이것에 대한 두 사람의 정의에 따른 차이점을 보면, 먼저 세친은 경량부설에 근거하여,{{ Abhidharmako abh yam by La Vall e Poussin, p. 540. No. 483}} 찰나를『구사론』「세간품」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시간의 극소는 찰나이다. …… 또한 찰나의 길이(量=pram a)란 무엇인가? 모든 연(緣)이 화합할 때, 법이 저체(自體)를 얻음에 이르기까지의 간격, 또는 법이 극미로부터 다른 극미로 움직이는 간격을 말한다.{{ AKBh. p. 536. l. 2∼5}}

세친의 이 정의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법이 자체를 얻음에 이르기까지'란 앞에 없던 법이 지금 생겨나 그 존재성( 性)을 얻고서 곧 바로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소멸이란 단순히 무존재(無存在)로서 그 자체가 어떠한 사실로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세친은 현상의 배후에 실유하는 어떤 법도 가정하지 않는 철저한 찰나멸을 주장한 것이다. 둘째, '극미로부터 다른 극미로 움직이는 간격'이란 움직이는 법이 원자(atom) 정도로 이동하는 시간을 말한다.{{ "대덕 세우(Vasumitra)는 [설한다]. [극미는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극(틈)없이 [생할] 때, [서로] 접촉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고 대덕은 [말한다]. 대덕의 생각은 인정할 만하다."(AKBh. p. 122. l. 3∼5) 라고 하여, 세친은 극미 간에는 간극이 없고 사실 제로(Zero)에 가깝다고 하는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원자는 공간적 부분이 없으므로, 이 원자는 전 부분과 후 부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세친은 사실상 순간적 지속을 제로(zero)까지 축소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서성원, 앞의 글, p. 23.}}이런 찰나의 개념을 전제로 할 때, 사실 요소들은 거의 이동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라고 하는 것은 간극없이 병열된 순간들의 연속된 하나의 사슬에 불과하다는 것이 세친의 주장이다. 이에 중현은 찰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찰나란 무엇인가. 극히 적은 시간을 말한다. - 중략 - 시간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때(分位)가 같지 아니함이다. 이 가운데 찰나는 다만 온갖 작용이 있는 때(位)를 취함이다. 말하자면 오직 현재이다. 곧 현재의 법이 머무는 분량(分量)이 있음을 찰나라고 한다. - 중략 - 오직 현재에 반드시 조금의 틈이 있어서 자신의 과(自果){{ 自果란 取果ㆍ與果을 말한다.

그리고 취과ㆍ여과란 6因이 삼세에 걸쳐 작용하여, 현재 및 과거에 그 果를 취함과 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취과란 직접적으로 결과를 초래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質料因에 상당하는 것이고, 여과란 제법의 생기에 간접적인 힘을 부여하여 결과를 초래하게 하는 것으로 動力因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취과는 현재에 因이 되어 後果를 취하는 것이며, 여과는 법이 장차 생기려고 할 때, 그것에 힘을 부여하여 현재로 나오게 하는 것이다. (櫻部 建,『佛敎思想 3 '因果'』, pp. 139∼142 참조) }}를 취하기 때문에 찰나가 있다고 말한다. - 중략 - 또한 상속함에 의거해서 말한다고 하지 말라. 체가 없으면 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정장29, p. 533b7∼26.}}따라서 세친과 중현의 찰나에 대한 정의를 비교해 보면, 적어도 2가지의 상반된 견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세친에 있어 시간은 오직 현재뿐이다. 그리고 현재의 순간적 지속을 사실상 제로까지 축소시켜 공간적 분량, 즉 현재의 요소들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중현은 우선 시간을 미래ㆍ현재ㆍ과거의 삼세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 현재에서만 찰나의 작용이 있으며, 그 현재에는 조금의 틈이 있어 자신의 과를 취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세친이나 중현은 현재를 시간의 극소단위인 찰나로 보는 것은 같다. 그러나 세친에 있어서 찰나란 공간적 틈이 거의 없는 제로상태를 말하지만, 중현에 있어서 찰나란 어느 정도의 공간적 틈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면, 이 찰나에 대한 '공간적 틈'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될까. 이것은 아마도 세친이 찰나를 생멸만으로 보는 것에 대해, 중현은 생ㆍ주ㆍ이ㆍ멸이란 4상의 작용을 한 찰나로 보는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세친은 '모든 연이 화합할 때, 법이 자체를 얻음에 이르기까지의 간격'을 찰나라고 한다. 즉 세친은 과거와 미래에는 체가 없으며, 오직 현재의 한 찰나만 체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중현은 삼세가 실유하므로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도 체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체가 없으면 체를 얻을 수 없다.'고 하여, 무(無)에서 어떻게 체를 얻을 수 있는가를 반문하고 있다.

즉, 세친에 있어 찰나란 전에 없던 것이 지금 나타나 그 체성을 얻고, 곧바로 사라지는 것을 말하는데, 중현은 어떻게 전에 없던 것이 지금 생겨나 체를 얻을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어떤 중간 과정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멸할 수 있는가를 반문하는 것이다.
위에서 설했듯이 찰나의 정의에 대한 이견은 4상의 작용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이것에 대한 본격적인 쟁론은 다음 항목에서 논하고자 한다.

3. 4상(相)에 대한 몇 가지 쟁점

유부에 있어 유위 4상이란, 유위법이 생멸함에 있어 반드시 거치는 과정을 말함은 앞선 설명에서 간략하게 서술했다. 이 항목부터는 유위 4상에 대한 세친의 비판에 대한 중현의 반론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생상(生相)에 대하여
유부는 생상(j ti-lak a a)은 미래에서 작용하며, 미래법을 현재로 나오게 하는 작용을 가진 것이라 한다. 그러나 세친은 유부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는데, 그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친] : 또, 만약 미래의 생[相]이 생해야 할 [유위법]을 생하게 하는 것이라면, 모든 미래[법]이 동시에 생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유부] : 그러므로 [게송으로 설한다.] 생[상]이 생하게 할 [유위법을] 생하게 하는 것은 인과 연을 떠나서는 안 된다. 인과 연의 화합을 떠나서는 생[상]은 [유위법을] 생하게 하지 못한다.

[세친] : 그 경우 인과 연만이 [법을 생하게 하는] 능력을 갖는다고 우리는 본다. [인연의] 화합이 있을 때 [법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화합이] 없을 때 [법이] 없기 때문이다. 생[상]이 없어도 인연만으로도 [법은] 생한다.{{ AKBh. p. 266. l. 7∼12.}}

위의 내용에 따르면, 세친은 생상에 대해 2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미래에 생상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미래에 있는 모든 요소들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가.
둘째, 모든 법은 인(hetu)과 연(pratyaya)의 작용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생상이 별법(別法)으로 있을 이유가 없다.

이에 중현은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논하자면, 그 외의 인연의 화합을 떠나서 오직 생상만의 힘만으로 능히 생길 바의 [법을] 생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온갖 미래의 [법이] 모두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생상이 함께 일어나는 가까운 인(近因)이 되어 능히 생길 [법을] 생하게 하나, 모든 유위법은 반드시 자신이 속한 부류(自類)의 인(因)과 그 밖의 바깥의 연(外緣){{ 자류(自類)와 외연(外緣)이란 유위법 자체의 인과 외부의 연을 말하는 것으로, 유위법은 자류로써 동류인, 이숙인 등의 6인(因)이 있고, 외부의 연으로서는 증상연 등 4연이 있다. }}이 화합하는 도움을 기다려야 하나니, 종자와 땅 따위의 차별의 인연이 싹이 나는 것을 도와서 싹 등을 나게 하는 것과 같다.{{ 대정장29, pp. 411a9∼a13.}}

또한 중현은 "미래의 법은 인(因)이 있다고 인정되기 때문에 비록 작용이 없으나  는 있어야 한다."(대정장29, pp. 419c2∼c3)고 한다. 그러나 미래의 법에 인과 체가 있다고 하여, 모든 법이 동시에 생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미래의 법에는 그것을 일으키는 연과 생상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미래의 법이 현재로 현행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무수한 법들이 자체에 갖고 있는 인이 현재의 연을 만나야 하지만, 이 인과 연만의 결합만으로 현재로 현행할 수는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과 연의 화합과 동시에 가까운 인[俱有因]인 생상이 작용해야만 미래의 어떤 법이 현재로 현행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즉 인과 연의 화합 이외에 미래의 법을 현재로 이끄는 동력인(動力因)인 생상의 작용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토대로 하여, 유부의 존재양태를 시간분위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유부의 '시간 분위별(分位別) 존재양태'{{ 이 도표에 따르면, 생상은 미래에 있지만 작용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미래에는 생상의 작용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유부는 생상의 작용은 미래정생위(未來正生位, 미래법이 곧 바로 현재로 현행하는 위치), 멸상의 작용은 과거정멸위(過去正滅位, 현재법이 곧 바로 과거로 떨어지는 위치)에 두는데, 이 위치는 시간적으로 구분 지을 수 없다고 한다.
}}{{{{ 時 間}}{{ 未 來}}{{ 現 在}}{{ 過 去}}{{ 因 緣}}{{ 因}}{{ 因ㆍ緣}}{{ 因}}{{ 因 果}}{{ 因}}{{ 因ㆍ果}}{{ 果}}{{ 法  }}{{ 有}}{{ 有}}{{ 有}}{{ 作 用}}{{ 無}}{{ 有}}{{ 無}}{{ 4 相}}{{ 生相}}{{ 住ㆍ異ㆍ滅相}}{{ 無}}}}

또한 논자는 위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생상에 대한 중현의 논리를 '자전거의 원리'에 비교해 보고자 한다.
"앞바퀴=현재, 뒷바퀴=미래, 체인=인연, 페달(운동)=생상"이라고 할 때, 자전거가 앞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이 4가지 요소가 반드시 갖추어져 상호 동시에 작용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유위법이 미래에서 현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과 연, 즉 체인만이 아니라, 그것에 직접적인 힘을 주는 생상, 즉 페달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중현의 주장이다.

2) 주(住)ㆍ이(異)ㆍ멸상(滅相)에 대하여

유부에 있어 4상은 한 찰나에 동시에 있다고 하는 반면, 그 작용에는 차제가 있다고 한다. 즉, "생[상]은 미래에 있어서 작용을 일으킨다. 이미 [현재에] 생한 것은 [다시] 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 등의 [3상은] 법이 현재에 생함을 마친 때,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에 동시에 주하고 쇠하고 또한 멸하는 것은 아니다"{{ AKBh. p. 263, l. 6∼8.}} 라고 하여, 4상을 동시와 차제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유부의 주장에 대해 세친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주(住) 등 [3상이] 현재 모두 동시에 [현재에 있어서] 작용한다면, 동일 찰나에 있어 법이 주하고 쇠하고 멸하고 있다는 과실에 빠질 것이다. 주[상]이 이 [법을] 주하게 하고 있는 그 때에 그 [법은] 그 때에 주한다고 할 수 있는가, 혹은 또한 쇠한다고 할 수 있는가, 또는 멸한다고 할 수 있는가. 만약 주 등의 작용은 순차로 있다고 설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의해서 [유위법의] 찰나성은 파해질 것이다.{{ AKBh. p. 264, l. 2∼4.}}

이에 중현은 세친의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말하자면 바로 날 때[正生位]에 생상의 작용을 일으키고, 이미 생긴 위(已生位)에 이르러서 주ㆍ이ㆍ멸의 세 가지가 일시에 각각 다른 작용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4상의 작용과 때가 이미 다르다. 어떻게 한 법이 한 때에 생기고 머무르고 쇠하여 달라지고 무너져 없어진다고 힐난해서 말하는가?

또 곧바로 없어질 때[正滅位], 이 4상[所相]의 법은 그 밖의 주상을 수승한 인으로 하기 때문에 잠시 안주해서 능히 자과(自果)를 이끈다. 곧 그때에 그 밖의 이상(異相)을 수승한 인으로 하여, 쇠하여 달라지게 된다. 곧 그때에 그 밖의 멸상을 수승한 인으로 하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무너져 없어지게 한다.{{ 대정장29, p. 409c2∼c7.}}

즉, 중현은 현재의 3상은 그 위치에 있어서는 현재라는 한 찰나에 같이 있지만, 그 작용에 있어서는 각각 다르기 때문에, 시점에 있어서는 동시이지만 작용에 있어서는 차제가 있다고 한다. 또한 중현은 세친이 현재에 3가지의 작용이 각각 다르게 일어난다면, 그 체도 달라야 한다고 반문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바로 생하는 위[正生位]에 이(異)라는 이름을 세우지 않는다. 작용은 그 때에 아직 쇠하고 손하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곧 이 이치를 말미암아 주(住)ㆍ이(異)의 이름을 세운다. 이것이 능히 과를 이끌어[引果] 작용을 쇠하고 줄어들기 때문이다.

법의 작용이 쇠하고 줄어들 때, 비로소 스스로의 과를 이끌게 된다. 인이 줄어듦으로 말미암아 뒤의 과[後果]의 생하는 때[生位]가 점점 앞의 인[前因]을 약하게 한다. 그러므로 과가 점점 뒤떨어지는 것은 인(因)에 달라짐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과는 찰나에 다시 함께 일어나는 다른 상을 연으로 하여, 쇠하고 줄어들게 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다시 후과의 점점 약해지는 연이 된다.{{ 대정장29, p. 410b24∼b29.}}

이것은 현재의 찰나에 인과가 주(住)ㆍ이(異)의 작용에 의해 취과ㆍ여과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예컨대, 미래의 동인류(同類因, sabh ga-hetu)은 현재에 등류과(等流果, ni yanda-phala){{ 여기에서 동류인이란, 결과가 유사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유사하다고 해서 모두 동류인인 것은 아니고, 반드시 자부(自部; 見苦所斷 내지 修所斷)와 자지(自地; 欲界와 8가지 無色界 靜慮)에 속하는 것만을 동류인이라고 한다.

즉, 인이 선이라면 과도 선, 악이라면 악, 무기라면 무기라고 하는 바와 같이 그 성질을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인이 욕계에 속하면 과도 욕계에 속한다고 하는 바와 같이 그 속하는 부류도 같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것이 '동류'의 의미이다.

그리고 동류인 등류과의 관계란 "인이 선행하고 과가 그 후에 생긴다는 점과 인과 과가 동일한 종류라는 점이 이 2가지의 인관관계에 공통된 특질로서, 동류인 등류과는 그러한 인과관계가 널리 유위의 다르마 일반에 보이는 경우를 말한다."(櫻部建ㆍ上山春平 共著. 정호영 譯,『아비달마의 철학』, 민족사. 1989, p. 68 참조)}}가 되는데, 이 과는 점점 약해져, 다시 앞의 동류인에 대해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과가 점점 약해져 인이 되고, 그 인이 다시 과가 되는 과정을 말하는데, 이 과정에서 앞의 유위법과 뒤의 유위법은 비슷한 종류이지만, 엄밀히 유위법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것이다. 따라서 찰나 간에 인과를 이루는 동류인의 경우에 있어, 찰나 사이에 주ㆍ이 하는 변화를 거치지 않으면, 그것은 앞과 유사한 인을 과로 끌어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현은 "이 과는 찰나에 다시 함께 일어나는 다른 상을 연으로 하여, 쇠하고 손해하게 함을 말미암아 다시 후과(後果)의 연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유부의 이러한 주장에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도 동시와 차제라는 말은 상반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부가 한 찰나에 4상의 작용을 동시와 차제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찰나관에 근거한다고 생각한다.

즉, 세친이 찰나를 극단적으로 거의 제로에 가깝게 정의한 것에 대해, 유부는 찰나의 개념을 다소 간의 여유가 있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왜냐하면, 미래의 법들이 현재를 지나 과거로 갈 때, 현재의 작용에 변화의 과정을 수용하지 않으면, 그 법들의 작용은 사실 없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그렇다면, 세친이 주장하는 상속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현은 찰나를 정의함에, "오직 현재에 반드시 조금의 틈이 있어 자과(自果)를 취하기 때문이다."고 말한 것이라 생각한다.

3) 4상 상속설에 대해서

유위 4상 상속설에 관한 논쟁은 크게 '4상 가립설'과 '찰나 상속설'의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유위 4상 가립설'에 관한 논쟁은, 유부가 4상은 유위법으로써 실유(實有)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반해, 세친은 그것들은 상속 중에 임으로 설정된 법(假法)일뿐 실유가 아니라고 하는데서 비롯된 논쟁이다. 즉, 이 논쟁은『증일아함』에서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 가지 유위의 유위상(有爲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며, 이 세 가지 유위상을 잘 분별해야 한다."{{ 대정장2, p. 607c21∼c22.}} 라는 경문(經文)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근거하는 것으로, 이것에 대해 세친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세존에 의한 의미만을 의존해서 해야 할 것이지, [문자를 의존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이 [경문]의 의미란 무엇인가. 어리석은 자들은 무명에 무지하여 모든 유위법(諸行)의 [상속하는] 흐름을 아(我)ㆍ아소(我所)라고 [잘못] 승해(勝解)해서 애착한다. 그 잘못된 승해(勝解)를 제거하기 위해서 세존은 이 제행의 [상속하는] 흐름이 유위인 것, 연기인 것을 명확하게 하고자 해서 '여기에 3가지의 유위상이 있다.'고 설했던 것이다. 따라서 [한] 찰나[의 제법] 상에 [3가지의 상이] 있다고 한 것은 아니다.{{ AKBh. pp. 257, l. 5∼258, l. 6.}}

즉, 세친은 세존이 유위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상속 중에 4상을 가립한 것으로, 유부는 문자에만 얽매여서 세존의 본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중현은 세친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구사론』원문을 그대로 인용하고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세존께서는 집착한 것을 버리게 하고자 하여 온갖 행의 한 상속 중에 많은 찰나의 생멸의 차별이 있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세 가지 유위의 유위상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경을 설함은 깊이 유용한 데가 있다. 만약 "온갖 행이 찰나에 생하는 따위는 그가 현저히 보는 것이 아니라 설하여도 이익이 없다."고 말한다면, 너희들은 여기에 대해서 또한 현저히 보지 아니했거늘 어찌 이치를 구하지 아니하고 알지 못함이 아니겠는가. 만약 찰나의 생 등을 알지 못하면, 반드시 능히 我와 我所의 집착을 버릴 수 없다. - 중략 -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유위상을 설함은 오직 찰나를 잡은 것이지 상속에 의거한 것은 아니다.{{ 대정장29, p. 407a9∼a18.}}

즉, 중현은 세존께서 경에서 말한 내용은 의미 그대로이며, 그것에 대해 자의적 해석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하는 것이다. 이에 또한 세친이 "4상은 색법처럼 현량(現量, pratyak a)이나 비량(比量, anum na) 혹은 성교량(聖敎量, abda)에 의해서 실체가 증명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가법(假法)이다."{{ AKBh. p. 257, l. 1∼4.}}고 한 것에 대해, 중현은 다시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또한 한 찰나에 생하는 따위의 온갖 상은 미세한 각혜(覺慧)로 능히 알 바이니, 말하자면 찰나에 간단없이 점차 잘 관찰하는 자는 능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미세한 각혜는 가르침의 힘을 말미암아 생긴 것으로 행(行)의 무상함을 요달하고 능히 아집을 제거한다. 이미 미세한 각혜로 알 바인데, 한 찰나에 일어나는 따위의 세 가지 상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자는 이치와 같이 설한 것이 아니다.(대정장29, p. 407b1∼b5)

앞서 유부는 세존의 말씀에 근거하여 '생' 등의 유위상의 실재성을 주장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한 찰나에 4상의 상속이 이루어짐을 주장했지만, 세친은 다시 4상은 색법처럼 현량, 비량 등에 의해서 인식되지 않으며, 더구나 1찰나에 4상의 인식은 불가능함을 주장한다.

즉, 세친은 첫 찰나에는 다만 생기만이 있고, 다음 찰나에 주, 이 등의 찰나가 각각 연이어서 일어남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현은, 4상은 1찰나 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것의 인식은 미세한 각혜로 알 수 있다고 하여, 세친의 주장에 대해 반론하는 것이다. 나아가 중현은 하나의 법에 생멸이 동시에 일어나 상속한다는 경량부의 상속설을 주장하는 세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또한 생과 멸은 하나의 법에 의지해서 성립한다. 만약 다르다고 하거나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모두 과실이 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만약 이것이 다르다면, 이것은 이것과 다르다.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발생하는 때에 소멸할 것이고, 소멸하는 때에 발생할 것이다.

또 둘이 없을 것이다. 생과 멸 두 가지는 서로 장애하기 때문이다. 또한 생법의 체는 멸법의 체이지만, 생과 멸이 서로 뒤섞이는 과실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자재천이 행하는 환혹이다.{{ 대정장29, p. 408c20∼a25.}}

즉, 중현은 하나의 법에 생과 멸이 함께 있다면, 발생하는 때에 소멸할 것이고, 소멸하는 때에 발생하는 것이어서 어떠한 상속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상속의 첫 찰나에 생이 있어 서로 비슷한[相似] 찰나들이 상속하는 것이라면, 상속의 첫 찰나가 생기할 때, 상속의 다른 찰나들도 동시에 생기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상속의 다른 찰나들이 첫 찰나와 동시에 생기한다면, 이 찰나들은 첫 찰나와 구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찰나 상호간에도 아무런 구별이 없으므로 비슷하게 상속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현은 말하길, "생도 멸도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생과 멸 두 가지는 서로 장애하기 때문에 과실을 낳는다."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4. 결론

본문을 통해서 알아 본 유위 4상을 둘러싼 논쟁은 결국 존재론적 차이에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친은 법의 본성을 찰나 간에 생멸하는 것이라 하여, 법 이외에 4상 등을 건립하는 것을 부정했다. 세친이 이렇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와 미래의 체( )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부는 '삼세실유ㆍ법체항유'를 주장한다. 그러므로 삼세에 걸쳐 존재하는 법들이 어떠한 관계를 유지하고 존재하는가를 논구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유부는 삼세에 존재하는 법의 관계를 크게 인과 연으로 보고, 그것을 세분하여 정리한 것이 6인·4연·5과이다.

왜냐하면, 삼세에 있는 법들이 어떤 관계로 놓여있지 않으면, 존재 자체는 무용(無用)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세실유와 법체항유를 주장하는 유부에 있어서는 현재를 중심으로 한, 현재와 미래, 현재와 과거와의 관계, 그리고 그 속에 항유하는 법과의 관계성을 논구함은 필연적 수순이었던 것이다.

또한, 존재의 관계성에 있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존재의 현행을 드러내는 것이다. 세친이 존재는 찰나 간에 생멸하면서 상속한다고 하지만, 중현에 있어서 그것은 모순이었다. 왜냐하면, 만일 법들이 찰나 간에 상속한다면, 생멸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상속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찰나관의 비교'에서 보았듯이, 세친은 찰나를 거의 제로에 가까운 것이라 하여, 사실상 법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적 분량을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세친의 논리에 근거해 보면, 찰나란 어떠한 법도 작용할 수 없는 즉, 상속도 일어날 수 없는 상태로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중현은 찰나란 반드시 자신의 과를 취할 수 있는 틈이 있다고 하는 것으로, 이것은 현행하는 법이 한 찰나 간에 6인·4연·5과의 관계를 가지면서 4상의 작용을 거쳐야 만이 상속이 실질적으로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이 유부에 있어서 유위의 4상은 존재와의 관계에서 실질적인 힘을 가진 작용일 뿐만 아니라, 시간을 규정짓는 척도로써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나아가 이러한 4상의 역할은 유부의 존재론을 형성하는데 있어, 그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

황정일
인도사회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지금 학위논문 준비 중이다. 용인대 강사와 월간 '봉은'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박사과정수료. 논문으로 〈六朝時代神滅不滅論爭硏究〉 〈중국근대불학의 사상기원〉과 《대당내전록》(공역)을 번역하였다. 현재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회원.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