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만해사상 실천선양회 Home
불교평론 소개 l 지난호 보기
 
 인기키워드 : 사색과 성찰, 청규, ,
> 뉴스 > 기획시리즈 | 종교학 다시보기
     
종교의 특질 / 최준식
종교학 다시보기 (2)
[19호] 2004년 06월 10일 (목) 최준식 cjskor@ewha.ac.kr
* 여기서부터 보게 되는 내용은 다음의 책에서 참조하였다.닐슨 2세 (N. C. Nielsen, Jr.) 외 (1988) 『세계의 종교들(Religions of the World)』제 2판, 성 마틴 출판사(St. Martin's Press), 뉴욕, pp. 3-10.

우리는 이제부터 12개에 달하는 종교의 특질에 대해 보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열거되는 특질들의 목록이 결코 완벽한 것은 아니다. 누누이 이야기한 대로 종교라는 현상은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어떤 틀로 다 잡아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에 대해서 말할 때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은 초자연적인-혹은 일상과는 완전히 다른-존재 혹은 실재에 대한 것이다. 이제 그것부터 보자.

1) 대부분의 종교들은 초자연적인 존재나 궁극적 실재에 대한 믿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구상에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는 종교들 가운데 대부분의 종교들은 초자연적이거나 궁극적인 그 어떤 실재(實在, reality){{ 실재란 용어는 말 그대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세상에 있는 사물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계의 사물들은 계속해서 변화해가고 그런 과정 속에서 소멸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변하지 않으며 소멸되지도 않는 존재나 실재를 상상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일러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라 불렀다.

}}에 대한 믿음을 가르쳐왔다. 그 실재는 종교에 따라 성질이 조금 다르게 묘사되는데 크게 나누어서 인격적 존재와 비인격적 실재,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인격적 존재는 말할 것도 없이 유신론적인 종교에서 말하는 신을 가리킨다. 반면에 비인격적 실재는 인격적인 면이 없는 것으로서 불교의 공이나 도교의 무 혹은 유교의 천 등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에 힌두교는 이 두 가지 양상을 통합해서 절대적 실재를 묘사한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절대적 실재인 브라만은 인격적으로도 나타나고 비인격적으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럼 이 실재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역시 가장 큰 특징은 이 실재들이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세계를 넘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배경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믿음이 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현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이 없으면 세상의 사물들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무엇은 세상을 완전히 초월해 있어야 한다. 만일 그 무엇이 세상과 연관된 존재라면 세상(의 만물)처럼 변화하고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실재의 초월성이나 이 세상과의 무관계성을 강조하고자 전통 기독교에서는 신의 완전타자성(absolute otherness)을 주장하는 교리가 나온다. 신은 원죄 투성이인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타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실재는 인간의 경험을 초월해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 실재로부터 나온다. 앞에서 본 특징이 궁극적 실재의 초월성을 강조했다면 지금 말하는 특성은 궁극적 실재의 내재성을 설명해준다. 이 세상에 있는 만물이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설명도 종교에서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인데 세상 만물이 이와 같은 궁극적 실재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장 흔한 설명이다. 20세기 최고의 기독신학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폴 틸리히는 같은 맥락에서 신을 존재의 근본(ground of being)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사실 이런 초자연적인 존재의 설정은 종교와 비종교를 가를 때 아주 유용한-그러나 절대적인 것은 아닌-도구가 된다. 초자연적인 존재나 실재를 상정하지 않는 종교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까닭에 이 조항이 종교의 특질을 열거하는 데에 가장 먼저 등장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세상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할 때 세상 안에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설명하지 않고 세상 밖 혹은 초세상적인 요소를 끌어들여 설명한다면 그런 것들을 일컬어 우리는 종교적인 해석이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는 거의 대부분의 해석은 모두 세상 안의 것만을 가지고 행한다. 정치가 그렇고 경제가 그렇다. 그러나 종교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가령 유교가 종교이냐 아니냐 하는 진부한 문제도 그렇다. 앞에서 우리는 유교에 대해 순전한 종교라고 하기보다는 '종교적인' 가르침이라고 보자고 했는데 그것은 유교에서 초자연적인 실재를 운용하는 방법 때문에 그런 것이다. 유교는 얼핏 보면 전혀 종교처럼 보이지 않는다. 부모께 효하고 윗사람 잘 공경하라는 가르침만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유교를 종교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유교는 종종 천의 존재를 들먹인다. 공자부터 그렇지 않은가? 천명에 대해 주장하기도 하고 '하늘이 날 버렸다{{ 이 말은 안회가 죽었을 때 공자가 탄식한 말로 알려져 있다.

}}'느니 하면서 초자연적인 실재인 천을 끌어들인다. 이런 설명이 절정을 이루는 것은 인간의 성품을 설명할 때이다. 가령 유교에서는 인간의 성품이 선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성품이 하늘의 성품을 품수받았기 때문이다.{{ 이 설명의 가장 좋은 근거는 중용의 첫 번째 문장인 "천명지위성(天命之爲性, 하늘이 명한 것, 그것이 바로 성품이다)"이라는 구절이다.

}} 여기서부터 유교는 단순한 윤리가 아닌 종교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유교를 순전한 종교로 보지 않는 것은 그 초자연적인 실재인 천이 다른 유신론적 종교처럼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중심으로 한 종교의례가 발달한 것도 아니고 그 실재와 신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교통하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실재와 인간계의 관계도 모호하다. 그래서 유교를 '종교적'인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다. 유교에는 초자연적인 존재로 이 '천'말고도 조상신의 존재가 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는 번거로워 제외시켰다.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이 존재에 대한 태도를 보기로 하자. 종교에서는 이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데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일상적인 믿음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믿음에도 여러 단계가 있을 수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겪는 믿음은 보통 심리적인 차원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믿음에는 '경부선을 타면 부산으로 간다는 것을 믿는다' 등부터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믿는다' 등 여러 수준이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심리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에 비해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인지적인(intellectual) 수준뿐만 아니라 정서적인(emotional) 차원이나 의지적인(volitonal) 차원 등 모든 차원이 동원된다. 영어 표현에서 '나는 신을 믿는다'를 단순히 'I believe God'이라 하지 않고 'I believe in God'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신을 믿는 행위는 한 사람의 모든 것이 걸린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표현을 달리한 것일 것이다.

종교적 믿음은 종종 종교체험과 같은 맥락에서 비교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종교체험이 일상적인 체험과 구별되기 때문이다. 종교체험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저명한 비교종교학자인 요하킴 바흐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바흐가 정의하는 종교체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것이 전인적인 반응(total response)이라는 데에 있다. 우리가 종교 체험을 할 때 위에서 본 것처럼 인간이 갖고 있다는 세 가지 기능 가운데 하나로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 기능이 동시에 반응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와 같기 때문에 종교체험은 강렬함에서 인간의 다른 체험을 능가한다.

인간의 체험 가운데 종교체험에 육박하는 체험을 굳이 들자면 미적인 체험일 것이다. 그런데 미의 체험은 강렬함에서 종교체험을 능가하지 못한다. 그것은 이 체험들이 가져오는 인간 행동의 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종교체험은 워낙 강렬하기 때문에 순식간에 인간 행동의 변화를 유발한다. 가령 성령 체험을 강하게 받은 사람은-그런 체험이 있다고 전제하고-바로 그 순간에 다른 인간으로 탈바꿈될 수 있다.

가장 극적인 예 중의 하나는 기독교에서 성인으로 되어있는 아우구스티누스일 것이다. 그는 매일 밤 여인을 바꿔 자지 않으면 안 됐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매우 방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그의 모친이 기도하는 모습에 충격을 먹고 일순간에 대변신을 한다. 탕아에서 성인이 되는 그런 순간이다. 세상에 이렇게 전적인 변신을 가능케 하는 것은 종교체험 이외에 다른 것이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 초자연적인 실재가 종교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라 해도 이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종교로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누누이 말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특질들은 종교를 형성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들은 아니다. 대체로 종교들이 이런 요소들을 갖고 있지만 없을 경우에도 종교로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시불교 같은 경우를 보면 초자연적인 실재의 유무가 필수적인 종교 성립 조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원시불교에는 그 후의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라든가 법신불 같은 절대적 실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저 심작용의 지멸(止滅)을 통해 해탈을 얻는 것이 주 목표로 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원시불교가 종교가 아니라고 할 사람은 없다. 이런 식의 예는 계속 앞으로 될 것이다.

2)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나눈다.

인간의 다양한 삶의 분야 가운데 성스러움과 같은 개념이 등장하는 것은 종교밖에 없을 것이다. 루돌프 오토 같은 학자들은 종교를 '성스러움의 체험'이라고 정의할 정도로 성스러움을 강조한다. 또 앞에서 본 것처럼 엘리아데도 종교적 현상을 '성스러움이 속된 공간이나 시간 속으로 침투하는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성스러움이 현현하는 데에는 몇 가지 차원이 있다. 그 차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과 '지역'과 '시간'이다. 종교에서 어떤 대상이 성스럽다는 것은 너무나 자주 발견되는 현상이다.

불상 같은 성상(聖像)이나 성당 같은 건물이 성스럽다고 하는 것은 종교가 아닌 삶의 다른 국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지역이 성스럽다고 상정하는 경우도 종교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예를 들 것도 없이 절이란 불타가 거주하는 신성한 공간이다. 그 공간은 속계와 구별된다. 절의 입장에서 볼 때 일주문 바깥은 속된 공간이다. 그러면 일주문만 통과하면 바로 성스러운 지역이 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전체 절의 공간 가운데 신성한 공간은 불이문(不二門)을 통과해서 들어온 다음의 공간-즉 대웅전(과 앞마당)이 있는 공간-을 말한다. 그럼 일주문과 불이문 사이의 지역은 무엇일까? 바로 속된 공간에서 성스러운 공간으로 들어가는 과도 지역이라고 보면 된다. 기독교의 경우에 교회 안을 거룩한 성소(聖所, sanctuary)라고 해서 그 안에 범죄자가 들어가면 잡지 못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삼한에 있던 소도(蘇塗)가 이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보면 소도는 조금 높은 지역에 있는 성소인데 이곳에 나무를 세워놓고 방울과 북을 달아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천군(天君)이라는 사람을 두어 그곳을 주재하게 했다고 한다. 대체로 이 천군은 무당으로 추정되는데 중요한 것은 이곳에 범법자가 들어와도 잡아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거룩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성과 속이 교차하는 것을 종교적 현상이라 할 때 동제 지낼 때의 서낭당처럼 극적인 예는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동네 어귀에 있는 서낭당은 보통 때는 그다지 성스러운 지역이 아니다. 그러나 마을 굿을 할 때가 되면 그곳에 금줄이 쳐지고 황토가 깔리면서 성스러운 공간으로 바뀐다.

그 성스러움은 마을 굿을 하는 동안에만 통용된다. 굿 기간이 끝나면 그 공간은 다시 속된 공간으로 돌아간다. 한 공간에서 성스러움과 속됨이 교차하는 것이다. 공간뿐만이 아니다. 마을 굿을 하는 동안 이 동네의 시간은 성스러운 시간으로 바뀐다. 이러한 성스러운 시간의 선포는 대부분의 종교에서 발견된다. 기독교에서는 고난 주일부터 부활절에 이르는 기간이 성스러울 것임에 틀림없다. 불교에서도 굳이 찾는다면 석가모니가 깨닫기 전 마지막 7일간 고행했던 기간을 들 수 있겠다. 이 기간이 성스럽기 때문에 승려들은 자지 않고 용맹정진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종교에는 반드시 성과 속이 구별되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원시' 종교들을 보면 거기서는 성과 속을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애니미즘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믿음에 의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는 아니마 혹은 정령(혹은 생기)이 있어 모든 것이 영적인 힘을 갖는다. 다른 말로 하면 성스럽다는 것이다. 굳이 성스러운 존재와 속된 존재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종교에서는 성과 속의 구별과 비슷한 구별이 또 존재한다. 어떤 종교에서는 실재의 세계(reality)와 드러난 세계(appearance)를 구분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힌두교라고 할 수 있다. 힌두교의 주장에 의하면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브라만뿐이다. 우리가 감지하고 있는 이 세상은 마야 즉 환(幻)에 불과하다.

이 마야에서 벗어나 원래의 상태인 브라만과의 합일적 상태로 돌아가는 게 힌두교의 목적이다. 이 세간에 존재하는 삶의 방식이나 생각 중에 이 세상을 환상(illusion)이라고 주장하는 삶의 부분은 없다. 정치고 경제고 다 이 삶을 최고의 실재(혹은 실제)로 놓는 데에 아무 이견이 없다.

세상을 환상이라고 보는 견해는 유독 힌두교 같은 종교에서만 통용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같은 종교이면서도 힌두교의 이런 견해를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종교도 있다. 기독교가 그 대표주자가 되겠다. 기독교(혹은 유대교)에서는 이 세상이 환일 수 없다.

왜냐면 이 세상은 야훼가 창조한 것이고 창조한 세상을 보고 그 자신도 좋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신이 창조하고 좋다고 생각한 것이 환일 수가 없을 것이다. 이렇듯 한 견해에도 각 종교들이 각기 다른 입장을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3) 많은 종교에서는 숭배대상과 관계된 종교의례 혹은 종교적인 행위가 발견된다.

종교 하면 의례를 떠올릴 정도로 의례와 종교는 관계가 깊다. 그 예를 들어보면 너무 많아 다 열거하기가 힘들지만 종교적인 장소에서 성상에 대해 행하는 숭배가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 외에도 순례라든가 어떤 종교적인 유물을 숭배하는 것, 희생제의를 지내는 것, 또 축제적인 종교 의례 등등 실로 다양한 종교의례가 있다. 세속 사회에서는 이렇게 어떤 일정한 대상을 숭배하는 일은 거의 없다. 아니 세속 사회에서 이런 일-가령 일정한 정치 지도자를 광적으로 숭배하는 등-이 벌어지면 그것을 일컬어 종교적인 일이라고 한다(김일성 숭배를 생각하자). 법당이나 모스크에서 종교의례를 행하는 것이 종교 고유의 일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더 이상의 설명도 필요없다.

이러한 종교의례에는 특별한 소품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법복이나 미사복 같은 특별한 옷이 필요하고 향, 촛불 같은 소품들이 매우 중요한 물품으로 등장한다. 또 기독교의 성체성사(영성체)에서 목격되는 것처럼 포도주 같은 술이 신성한 액체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평상시에 입는 옷과는 다른 이상한(?) 옷을 입고 빵이나 술을 들고 주문을 외고 그것을 경건하게 받아먹는 모습과 같은 것은 세속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기괴한 모습처럼 보일 것이다. 특히 지구상의 종교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는 외계인이 보면 종교의례야말로 가장 이해 못할 일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하는 억측을 해본다.

그 다음 주제는 순례에 대한 것이다. 순례만큼 종교적인 것도 흔치 않다. 이슬람교도들은 5가지 의무를 반드시 수행해야 되는데 그 가운데에는 일생에 적어도 한번은 메카를 순례해야 하는 것이 포함된다. 메카에 있는 신석(神石)을 둘러싸고 수많은 교도들이 절을 드리는 장면은 장엄하기 짝이 없다. 힌두교인인 인도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 역시 적어도 일생에 한번은 가장 성스러운 강이라고 생각하는 갠지즈 강에 순례여행을 가야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그들의 믿음에 의하면 갠지즈 강에서 목욕을 하면 강의 성력(聖力)의 의해 그들의 죄업이 탕감되고 깨달음에 더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순례는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일생에서 일종의 방향타(orientation) 역할을 해 삶에 궁극적인 의미를 제시하는 궁극적인 근거가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의 전 인생에 걸쳐 하나의 큰 방향이나 가치를 제공하는 것은 종교적인 신념이 아니면 가능치 않을 것이다.

앞에서 순례와 더불어 거론된 것으로 종교적인 유물의 숭배가 있었다. 가장 인기 있는 종교적인 유물 가운데에는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이 신앙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탑에 대한 신앙을 만들어냈다. 불교 건축이나 신앙에서 탑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 중요성을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다.

탑이나 그 안에 있다고 추정되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숭배하는 행위는 인간의 다른 삶의 국면에서는 결코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우 비록 가짜로 판명됐지만 예수의 수의(壽衣)라고 믿어지던 옷에 대한 신앙도 이런 예에 속한다고 하겠다. 기독교의 경우 이러한 종교의례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예로 가톨릭의 미사를 들 수 있다. 이 미사를 하는 행위는 그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사람이 보면 이해할 수 없는-어떤 때는 기괴한- 것 투성이다. 예를 들어 작고 동그랗게 생긴 과자를 들고 '주님의 살'이라 하고 포도주잔을 치켜들고 '주님의 피'라고 한 다음 먹고 마시는 행위는 선이해가 없다면 기괴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런 식의 고도의 상징적인 행위는 종교가 아닌 다른 삶의 분야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의례의 기괴함 때문에 초기 기독교 신자들은 주위로부터 사람을 잡아 피를 빨아먹는 식인의 집단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고 해서 모든 종교에서 이런 상징적인 의례행위를 두둔하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숭배대상이나 의례가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성스러움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내에서는 우상숭배의 타파로 유명한 개신교가 여기에 속한다고 하겠다. 개신교는 천주교의 의례가 갖고 있는 종교적인 상징성을 부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가령 개신교에서는 천주교의 미사가 갖는 제사성(祭祀性)을 부정하고 자신들의 의례는 단지 예배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천주교의 미사는 신께 바치는 제사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고도의 상징성-심지어는 사실성-이 부여된다.

예를 들어 미사 중에 하는 성체성사, 즉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는 상징성을 넘어 사실 그 자체를 대변한다. 그러니까 신부가 밀떡과 포도주를 높이 들고 기독교경 구절을 낭송한 다음 종을 울리면 그것은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천주교도들은 믿는다. 그래서 미사가 단순한 예배가 아니라 제사라고 하는 것이다. 개신교는 이런 것들을 모두 부정하고 성체성사는 단순히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 하는 것이지 실제로 주님의 살과 피가 현현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개신교도들에게는 천주교인들이 애용하는 '예수 달린 십자가'도 우상숭배의 일종이다. 신을 빼놓고는 어느 누구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개신교인들이 천주교의 마리아 숭배를 부정할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뻔한 일이다. 그런 이유라고 생각되는데 개신교의 교회는 천주교 성당이 갖고 있는 많은 성상들이나 신심을 불러일으키는 많은 종교적 장치-색유리나 그림, 조각 등-들을 전부 없애버렸다.

이슬람교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슬람교에서는 어떤 종교적인 이미지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사원인 모스크에는 추상적인 문양 외에 다른 것은 일절 발견되지 않는다. 개신교에서는 그래도 예수를 이미지화해서 그림으로도 그려내지만 이슬람교에서는 그것마저 안 된다.

알라 외에 다른 대상을 형상화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물론 알라는 성스럽고 불가지의 존재이기 때문에 형상화 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발전한 게 유명한 아라베스크 문양이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형상화 하는 데에 쏟은 열정을 그들은 아주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도상을 만드는 데에 쏟아 부은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종교적 행위가 가진 고도의 상징성에 대해 지금 본 유일신 종교들만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다. 사실 종교의 외적인 것을 부정한 강도로 따지면 전 세계 어떤 종교도 선불교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선불교는 제도화된 것은 모두 부정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떤 종교의례도, 경전도 그들에게는 의미가 없다. 심지어는 그들의 대스승인 석가도, 혹은 석가에 대한 숭배도 의미가 없다. 다음 이야기는 선가에서 자주 회자되는 것이다. 어떤 객승이 밤에 추워 목불상을 때고 잤다가 아침에 그 절 주지와 실갱이 하던 이야기는 선가에서 얼마나 종교의 외적 요소들을 부정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같은 종교적 행위-여기서는 종교 의례나 숭배와 같은 것-가 어떤 종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또 어떤 종교에서는 부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종교의례적 행위가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지만 어떤 종교가 이러한 의례나 행위의 상징성을 부정한다고 해서 그 종교가 종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종교의례의 유무여부가 종교와 종교가 아닌 것을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기 때문이다.

4) 보통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윤리적인 계율이나 도덕 규범을 제시한다.

종교가 계율이나 금지조항을 말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하면 '무엇무엇을 하지 말아라'하는 금지조항이 생각날 정도로 계율 혹은 율법은 우리에게 종교와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비춰진다. 기독교에 십계명이 있듯이 불교에도 오계니 십계 혹은 보살계 같은 것이 있다.

이것들은 이름은 같지만 내용은 좀 다르다. 기독교와 같은 유신론에서는 계율이 종종 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계율이 외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행을 돕기 위해 자율적으로 생성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가 하면 유교에서는 인간의 규범이란 궁극적 실재가 인간의 마음에 투영되면서 생겨났다고 믿는다. 천성(天性)이 인성(人性)이 된 것이다. 우리가 규범으로서 효를 행해야 하는 것은 궁극적 실재인 하늘에 그렇게 프로그램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율은 어떻게 전달이 될까? 계율이 전달되는 가장 흔한 통로는 예언자나 성전(聖典)을 통해서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예언자를 고르라면 무함마드가 단연 그 영순위 대상에 오를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슬람'이라는 단어가 '(신께 완전한) 복종'을 뜻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함마드는 무슬림들에게 새로운 율법을 선사했다. 이런 예언자들에 의해 계시된 율법은 성전에 기록된다.

무함마드에 의해 계시된 알라의 진리는 꾸란에 기록되었다. 따라서 예언자가 타계하고 난 뒤에는 꾸란이 알라 말씀의 전달자가 된다. 이렇게 계시된 계율들은 궁극적 실재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막중한 무게를 갖는다. 이런 계율을 받아들인 신자들의 생활은 모두 이 계율에 의해 제재(制裁)된다. 신자들은 그 계율의 틀 안에서만 생활하게 된다. 일반 사회에서는 이런 광범위한 계율의 적용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종교적인 규범은 독특하다고 하겠다.

이른바 고등종교들이 이와 같이 수준있는 윤리나 계율을 요구하고 있는 것에 비해 이른바 원시종교에서는 광범위한 금기 체계를 갖고 있다. 아울러 신적인 권위에 무조건적인 복종만 강조하고 있어 그들의 규범에는 윤리성이 다소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신령 등으로 대표되는 권위적 존재와 쌍방적인 교류를 하기보다는 신령들에게 호소하고 그들을 달램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멀리 갈 것 없이 우리나라의 무교를 생각하면 된다.

무교에는 기독교의 계명이나 불교의 계율 같은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 아울러 신령들의 성격도 선한지 악한지 확실히 구분되지 않는다. 신령은 힘을 가진 영적인 존재로만 인식된다. 무당이나 신도들은 신령들에게 굿을 바침으로써 그들을 달래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것이다.

5) 종교는 "절대적 의존감정(feeling of absolute dependence)"이다.

이 정의는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라는 신학자가 내린 것으로 기독교에서 종교를 정의할 때 가장 많이 쓰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감정은 인간이 창조주라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거대한 존재 앞에서 느끼는 피조물 감정을 표현한다. 이 감정에 대해서는 루돌프 오토가 자신의 저서인 『성스러움의 의미(Das Heilige)』(길희성 역, 분도출판사, 1987)란 책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오토는 이 책에서 인간이 신과 만날 때 겪는 감정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신과 같은 절대자와 조우할 때 겪는 첫 번째 감정은 공포다. 자기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존재 앞에 섰을 때 인간은 엄청난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만일 여기서 끝난다면 이것은 귀신을 만났다고 할 때 겪는 공포와 그리 다르지 않다. 인간은 이 공포의 감정 외에도 자신을 완전히 넘어서 있고 포용적인 신 앞에서 큰 황홀감을 느낀다. 이른바 엑스타시이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오토는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이런 강렬한 체험을 하지 않았다면 종교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할 정도로 이런 감정에 대해 강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종교에 대한 정의는 거의 유신론적인 종교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 정의는 절대자와의 만남을 전제로 하니 절대적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종교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을 것 같다. 그 예로 멀리 갈 것도 없이 선불교를 들어보자. 선불교인들이 체험할 수 있는 절대적 실재는 참나일 터인데 이 나와의 만남에서 공포와 환희를 느낀다는 것은 그다지 공감을 얻지 못할 것 같다.

선의 깨달음 체험에서는 물론 공포는 없을 것이고 대신에 다만 깨닫는 순간에 엄청난 환희를 경험하는 것은 절대자를 체험하는 것과 비슷할는지 모른다. 어떻든 이 정의가 비유신론적인 종교에는 잘 어울리지 않을지 몰라도 세계 종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신론적인 종교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정의라 생각된다.

6) 거의 모든 종교가 기도나 신과의 교통을 중시한다.

이 정의도 유신론 종교에 더 적합한 것이지만 기도는 많은 종교에서 중요시되는 요소임에 틀림없다. 기도에는 많은 종류가 있는데 가장 흔한 것으로는 어떤 것을 바라는 간구의 기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해주시옵고' 하는 기도는 우리가 주위에서 가장 많이 듣는 기도이다.

그 외에도 찬양하는 기도나 감사드리는 기도, 고백하는 기도, 참회하는 기도 등 기도에는 종류가 많다. 기도하는 행위가 종교가 아닌 다른 삶의 분야에서는 그리 자주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게다. 기도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수많은 종교에서는 신과 교통하고 신의 의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을 고안해냈다.

예를 들어보면, 찬송하기, 주문 외우기, 염불하기(chanting), 경전읽기, 예언하기 등등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신자들은 이런 방법들을 통해서 절대자의 뜻을 알아내기도 하고 그 절대자에게 자기 의견을 전달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한다. 그런데 인격적인 신을 믿지 않는 종교에서는 관심의 향방이 밖으로 향하기보다는 안으로 되어 있어 기도보다 내적인 명상을 더 중요시 한다. 선불교 같은 경우가 가장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불교는 알려진 것처럼 유신론적인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기도가 별로 발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현행 한국 불교에서는 '백일기도'니 '관음기도'니 하면서 기도란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위에서 말하는 기도와는 상당히 다른 개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불교에서 기도란 절대자와의 교통과는 별 관계가 없다. 한국불교도들이 하는 일은 부처나 보살의 이름을 일정기간 동안 계속해서 외우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요구를 들어달라는 간구라고 보기보다는 일종의 수행으로 여겨진다.

비슷한 것은 '만트라'라 불리는 주문을 외는 수행이 잘 발달되어 있는 힌두교에서도-불교에도 있지만-발견된다. 힌두교나 불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문은 '옴'일 것이다. 그들은 이 글자를 성스러운 것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이 주문의 암송이 자신의 수행에 대단한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수행법은 기독교나 이슬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렇듯 같은 기도나 주문이라는 단어를 쓰면서도 각 종교에서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 종교는 세계관을 제공한다.

종교와 세계관은 동의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양자의 관계가 깊다. 인간은 이 세상을 살면서 도대체 이 우주나 자연은 왜 혹은 어떻게 생겨나게 됐을까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이런 의심은 오로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더불어 인간은 이 우주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인간은 왜 생겨났으며, 어떻게 생겨나와 지금과 같은 상태에 있는가에 대한 관심, 즉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 혹은 삶의 신비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대한 관심 가운데 가장 비중이 큰 것은 아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의 문제 아닐까 한다.

위에서 열거한 질문들을 통칭해 우리는 세계관 혹은 인간관이라고 부른다. 세계관이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이 이 세계를 기본적으로 어떻게 이해하는 가에 대한 것으로 여기에는 우주의 물질적 기원이나 시간적 기원 등에 대한 이해가 포함된다. 인간관도 세계관과 비슷한데 인간관에서는 특히 인간이 처해있는 실존적 상황에 대해서 분석이 가해진다.

거의 모든 종교들은 이런 것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들을 갖고 있는데 그 생각들은 대부분 신화의 형태로 설명된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게, 이 세계는 원래 아무것도 없던 데에서 생겨난 것이라 무(無)에서 유(有)가 생겨난 것을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는 어떤 유가 다른 유로 변화하는 것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없던 데에서 어떤 것이 생겨나는 것은 논리의 법칙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논리적으로 볼 때 없는 것은 영원히 없는 것이지 있는 것이 될 수가 없다-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에 비해 신화는 논리의 법칙과는 그다지 관계없는 설명의 한 형태라서 무에서 유가 나오는 것과 같은 주제를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신화는 논리적이 아닌 나름대로의 문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는 기본적으로 상징적이고 은유적이며 혹은 원형적인(archetypical) 이야기이다. 세상에 대한 여러 설명 가운데 신화는 대단히 유용한 설명이다. 인간의 삶이란 워낙 복잡하고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신화를 필요로 한다. 우리 인간은 이 신화를 통해 우주의 생성과 인간이 처해진 실존적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에는 반드시 그 신화가 생성되는 사회의 문화가 반영되어 나타나기 마련이다.

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이 세상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에 대한 이야기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기독교의 창세신화이다(불교와 같은 동양종교들은 세상의 창조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이 세상의 창조에 대해서는 수많은 설명이 있지만 간단한 예로 기독교의 창조관을 보도록 하자. 기독교인(그리고 유대교인과 무슬림)들은 이 세상이 어떤 한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하나의 설명일 뿐이라 이것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신화란 처음부터 끝까지 상징적이기 때문에 이것을 과학적이거나 사실적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신이 인간이 되어 강림했다고 하는데 이런 신화는 유목민족들에게서 흔하게 발견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독교의 창세 신화 말미를 보면 유대인 나름대로의 해석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야훼가 세상을 다 창조해놓고 야훼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식으로 끝나는 게 그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외에는 다른 세상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최고의 신인 야훼가 창조한 것이니 당연히 최고의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는 이 세상만 창조했으니 이 세상만이 리얼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관은 인도의 많은 종교철학가들이 주장했던 것과는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다. 많은 인도 철학자들은 브라만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철학자들에 따라 이 창조방식에도 여러 방법이 설해지고 있지만 이 문제는 복잡한 문제라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가령 가장 대표적인 주제 중에 하나로 브라만이 왜 세계를 창조했는가에 대한 문제부터 해서 어떤 식으로 창조했는가에 대한 논의는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복잡다단해 여기서는 생략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브라만이 야훼처럼 이 세상을 창조하고 좋아했다는 그런 기록은 접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인도 사상에 의하면 이 세상은 환영(마야)이기 때문에 그 환의 세계를 보고 좋아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인도사상가들이 파악하는 세계는 이원적이다.

브라만이라는 진정한 실재와, 전통적인 표현으로 해서 브라만에 무명이 가해지면서 생기는 이 사바세계,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인도인들로 하여금 인생 최고의 목표로서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이른바 해탈을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세상을 벗어난다는 생각은 생소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내세는 있을지 몰라도 이 세상을 넘어서면서 동시에 근본이 되는 그런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힌두교와 기독교는 신에 의한 세상의 창조라는 생각은 같았을지 몰라도 그 해석은 양 종교가 이렇게 다른 것이다.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이 생겨난 배경에 대해서도 기독교의 창세신화는 매우 독특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아담과 이브라는 남녀의 형태로 에덴이라는 최고의 장소에서 아무 고통없이 살고 있었다. 이 동산에는 단 하나의 금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선악과(善惡果) 나무 혹은 지혜의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남녀 가운데 뱀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악마의 꼬임에 먼저 넘어간 것은 여자였다. 뱀은 이브에게 '만일 저 열매를 따 먹는다면 당신은 신처럼 지혜가 밝아질 것'이라고 꼬드겼다.

그 꼬임에 넘어간 이브는 자신이 먼저 먹고 다시 아담을 꼬드겨 그 역시 선악과를 먹게 한다. 이때 벌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 이 두 사람은 신의 명령에 따라 벌로서 고통을 전혀 모르는 에덴 동산을 떠나게 된다. 인간은 이때부터 고통을 알게 되는데 당시의 상황에 대해 창세기 신화에서는 이 일로 말미암아 '남자는 일을 하는 고통을 알게 되고 여자는 해산하는 고통을 알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이 기독교의 창세기 신화가 전하는 인간의 타락-혹은 인간이 고통을 처음 알게 되는 배경-에 관한 이야기를 극히 간단하게 추린 것이다. 이 신화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대해 대단한 통찰을 주기 때문에 나중에 자세하게 분석할 예정이니 여기서는 해석의 문제만 가지고 보기로 하자. 이 이야기에 의하면 인간은 신의 명령을 불복종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 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죄의 대가인 것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원죄는 바로 여기서 온다. 이 원죄부터가 그렇다. 서양인(혹은 근동인)들은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종교에서 원죄라는 것을 유난히 강조했다. 원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아무리 해도 인도(혹은 다른 동양 국가들)의 입장에서 원죄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라마크리슈나의 고제였던 비베카난다가 1893년 시카고 종교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기독교의 원죄론을 비난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그런데 이 원죄론의 설정보다 근동 지방의 문화적 요소가 더 많이 반영된 것은 인간을 타락시킨 주체가 누구냐에 대한 것이다. 이 신화에서는 여성인 이브가 사탄의 꼬임에 먼저 넘어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근동 지방의 여성관을 적나라하게 반영한다. 당시에 여성은 인격적인 주체자가 아니라 하나의 소유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모든 악의 발생을 여성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화를 상징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실제로 인간은 근본이 죄로 뒤덮여 있고 여성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믿어버리면 곤란하다.

사실 신화를 사실로 해석하는 실수는 종교인들이 너무 자주 범하는 것이다.

구약{{ 사실 '구약'이라는 단어도 기독교 중심적인 어휘라 쓰면 곤란하다. '이전의 약속'이라는 것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지 유대교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성전을 옛 (혹은 낡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구약을 '히브류 성서'로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여기서는 관례를 따랐다.}}을 보면 아담이 몇 백 년을 살고 누가 몇 백 년을 살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전근대 사회에 살았던 기독교인들은 이 자신들의 시조들 나이를 전부 역산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이 내린 결론은 기원전(BCE){{ BCE는 Before Common Era의 약자인데 종교학에서는 특정 종교(기독교)의 교주를 중심으로 시간을 나누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시간 구분법이 통례가 되었기 때문에 용어만 바꾸는 수준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

4004년에 이 우주가 창조되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지금 입장에서 보면 어이가 없는 발상이겠지만 신화의 세계와 사실의 세계를 혼동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당시 과학계에서 천재로 통했던 뉴턴마저도 이러한 세계관을 진실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또 잊어버릴 만하면 재개하는 노아의 방주 찾기 작업도 그렇다.

주로 터키 지방을 중심으로 이 작업이 벌어지는데 이것 역시 신화와 역사적 사실을 혼동한 것이다. 노아의 방주에 나타나는 홍수 신화는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근동 지방에는 흔한 신화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드물지 않게 발견되는 신화이다. 즉 새로운 질서를 도입하려고 할 때 신화에서는 이 홍수 모티프(motif)를 자주 이용한다. 이런 간단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노아의 배를 찾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그만큼 사실에 대한 집착이 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화가 그 신화가 나온 사회의 문화를 반영한다는 것은 다른 여러 가지 예에서도 발견된다. 지금까지 너무 기독교의 예만 들었으니 우리 민족의 기원신화인 단군 신화를 예로 들어보자. 단군 신화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신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습을 중심으로 보기로 하자.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유목 사회에서는 신이 하늘에서 강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는데 단군 신화에서 환웅이 하늘에 있다가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신이 하늘에서만 내려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농경 사회에서는 신기하게도 신이 땅 속에서 올라오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제주도의 삼성혈을 들 수 있다. 삼성혈이란 주지하다시피 제주도의 시조라고 하는 양, 고, 부 씨 등 세 성씨의 시조가 땅에서 솟은 구멍을 말한다. 이로써 제주도는 아주 전형적인 농경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농경 사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농사이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농사는 땅에 씨앗을 뿌려 키운 다음에 거두는 것으로 농경 사회에서는 신도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다. 특히 씨앗이란 농경 사회에서는 생명과 같은 것이라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데 중요성에 있어서 씨앗에 뒤질 수 없는 신도 씨앗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씨앗과 같은 모습이란 어떤 모습을 말하는 것일까? 씨앗은 일단 땅에 묻히면 씨앗으로는 죽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농경 사회에서는 신이 신화 속에서 꼭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신이 땅 속에서 나타날 뿐 아니라 이전 존재로는 죽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단군 신화에 이런 신의 모습이 보인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공감을 할지 모르겠다.

단군 신화에 나오는 농경사회의 신은 바로 곰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곰은 새롭고 성스러운 존재로 태어나기 위해 굴로 들어간다. 여기서 굴이란 여성의 자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곰은 굴 안에서 곰으로서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가 굴에서 나왔을 때는 신과 결합할 수 있는 성스러운 존재로 부활하게 된다. 죽음과 재생이라는 농경 사회의 신의 모습이 재연된 것이다.

다 알려진 것처럼 단군 신화에서는 이런 두 가지 성격의 신이 결합하게 되는데 이것은 당시의 한국인들이라는 게 북방의 유목민들과 남방의 농경민족이 서로 결합한 결과라는 것을 암시해준다. 앞에서 신화는 문화의 반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찌 됐든 신화에는 그 신화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세계관이나 인간관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을 하고 이 부분의 설명을 마치자.

8) 종교는 많은 경우 같은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가진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이런 공동체는 종교에서만 발견되는 것인데 여기서는 구성원들에게 전적인 헌신과 희생을 요구한다. 이런 공동체의 예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현재 우리들에게 익숙한 예로 틱낫한 스님이 불란서에서 운영하는 프럼 공동체를 연상하면 되겠다. 이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불교적인 세계관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틱낫한 스님이 정한 규범도 확실하게 지켜야 한다.

예를 들어 구성원들로 하여금 세속이나 자신에 대한 집착을 갖게 할 수 있는 저금 통장을 못가지게 한다든가, 심지어는 이메일 주소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이런 공동체 안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것이다. 구성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 공동체에 바쳐야 하는데 세속에서는 이런 공동체를 찾기가 쉽지 않다. 전 세계에는 허다한 공동체들이 있는데 그것들 가운데 대부분은 일정한 종교적인 세계관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도 현재 종교 공동체가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가장 이름있는 공동체로는 청학동을 들 수 있다. 일반인들은 이 청학동 공동체가 단순히 옛것을 고집하고 사는 마을로만 아는 경우가 많은데 옛것에 대한 고집은 단순히 외적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이들은 일심교(一心敎) 혹은 갱정유도(更定儒道)라는 이름의 종교를 믿는 신자들이다. 일심교는 지금은 유교를 표방하지만 원래는 증산의 영향을 많이 받고 생겨난 신종교 단체이다. 이와 비슷한 단체로 국제적으로 알려져 있는 공동체는 미국 펜실바니아주에 있는 아미쉬 공동체를 들 수 있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청학동처럼 현대 문명을 거부하고 사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 정도가 청학동보다 더해 이들은 자동차도 타고 다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전기도 쓰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기독교의 일파인 아미쉬파를 믿는 신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면 이런 독특한 단체에 들어와 색다른 고통을 감내하려하지 않을 것이다.

9) 종교는 앞에서 본 공동체 외에도 종교에서만 가능한 많은 조직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조직은 8번에서 말한 공동체와는 조금 다르다. 가령 승가 공동체나 가톨릭의 수도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 조직들이 성직자를 위한 공동체라면 절이나 교회 안에는 신자들이 중심이 된 다른 많은 조직들도 존재한다. 이런 조직에 대해서는 별달리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독일의 신학자였던 트뢸치(Troeltch, Ernest)는 유럽의 종교 단체들을 셋으로 나누었다. 이런 조직들도 종교에서만 가능한 것인데 그가 나눈 단체들은 다음과 같다.

교파(denomination), 분파(sect), (이단적) 지파(cult)가 그것인데 용어의 번역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교파란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장로교다 감리교다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기성화된 교단들을 뜻한다. 여기서 분파가 생겨나는데 가령 우리나라에는 장로회에 큰 분파가 두 개가 있는데 예수회 장로회와 기독교 장로회가 그것으로 바로 이 예에 속한다고 보면 되겠다.

예장과 기장은 1950년대에 기독경{{ 기독교의 경전만을 지칭해 보통명사인 '성경'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지극히 기독교 중심적인 사고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불경'이라는 용어의 예를 따라 기독경이라는 낱말을 썼다. 자세한 것은 졸저(2002), 『콜라독립을 넘어서』, (사계절)을 참조하면 좋겠다.}}의 해석을 달리 하면서 분파가 된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주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에 나온 이단적 지파라는 것은 기성 교단의 교리 해석과는 해석을 완전히 달리 해 교단에서 떨어져 나온 경우를 말한다.

이런 교파들은 교리 해석이 아주 혁신적이라 기성 교단의 박해 대상이 되기도 한다. 기독교의 경우를 보면 통일교 같은 것이 그 예에 속한다고 하겠다.{{ 불교의 경우를 예로 들면 교파는 선불교나 미륵불교 같은 것이 되겠고 분파는 (선불교의 경우) 임제종이니 조동종이니 하는 것이 되겠다. 한편 이단적인 지파는 미륵불교의 경우 민간에서 스스로가 미륵이라고 주장하면서 나온 사람들이 만든 종교단체가 해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따위의 조직 역시 종교가 아니면 발견하기 힘든 것들이다.

10) 종교는 대부분 내면적인 조화(inner harmony)나 심리적인 평안 상태를 약속한다.
우리가 종교인들로부터 자주 듣는 이야기는 종교를 믿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마음이 이렇게 편안해지는 데에는 여러 방법들이 있다. 이를테면 신에게 완전히 복종을 한다던가, 선행이나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던가,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던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가장 잘 요약한 것이 요가에서 말하는 세 가지 길 아닌가 싶다. 지혜의 획득을 중요시하는 즈냐나 요가는 고도의 통찰력만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박티 요가는 신에게 향한 완전한 헌신이야말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카르마 요가는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여러 일들을 통해서 최고의 행복한 상태로 갈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런 최고의 상태가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종교이든 이런 최고의 상태로 가는 길은 매우 험난하고 긴 여정이 될 것이라는 가르침을 잊지 않는다.

11)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내세를 약속한다.

종교에서 유토피아를 설하고 내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생소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세를 설하지 않으면 종교가 아니라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종교에서는 내세의 존재에 대해 강한 주장을 한다.

어떤 종교에서는 아주 정교한 종말론과 내세에서 받게 되는 과보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기독교에서-비록 조로아스타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는 하지만-세상의 종말이 오고 그때 비신자들은 지옥의 유황불 속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에 대한 묘사는 그 생생함이 훨씬 뛰어나다. 춥기가 이를 데 없는 한빙 지옥이나 온 산이 칼로 뒤덮여 있다는 칼산 지옥이니 하는 것들은 신자든 비신자든 그 신앙에 관계 없이 그가 생전에 행했던 악행에 대해 정확한 과보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역사가 오래 된 기성종교에서는 이와 같이 내세의 존재에 대해 강한 주장을 하는 반면 갖 생겨난 신종교에서는 내세보다는 지금 이 땅에 유토피아적인 시대(천년왕국)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예는 멀리 갈 것도 없이 20 세기 전후로 일어났던 우리나라의 신종교 운동을 보면 된다.

이른바 개벽시대로 통칭되는 이 시기에 대해 신종교의 창시자들은 이 땅에 모든 문제가 해결된 유토피아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강증산으로 그는 앞으로 곧 모든 사회적 차별이 없어지고 물질적 불편함이 해소되는 지상선경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하여 많은 추종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신종교에서 이런 지상(地上)의 유토피아를 주장하는 것은 신종교를 추종하는 신자들이 많은 경우에 사회적인 조건을 박탈당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낮은 신분과 가난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 죽어서 복을 받는다는 생각은 별로 설득력이 없었을 것이다.

현재 기성종교로 되어 있는 종교들도 초기에는 지상의 유토피아를 설파하는 경우가 있는데 기독교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초기 기독교의 신자들은 바울을 포함해서 예수가 곧 재림해서 로마를 무찌른 다음 천년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 교회가 제도화 되자 지상의 유토피아 교리는 들어가고 내세를 더 강조하는 현상이 생겨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지상의 유토피아 건설과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 같아 보이는 불교에서도 발달해가는 과정에서 이와 관계된 불교 종파가 생겨나는데 미륵불교가 바로 그것이다. 미륵이 하생해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것이 그 기본 교리로 이 종파는 불교 내부보다 민중종교와 혼합되면서 더 많은 인기를 누렸다.

12) 종교는 선교를 한다.
종교가 선교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게 보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종교처럼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것을 알리려고 하는 것은 없을지 모른다. 어떤 때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선교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현상은 종교에서만 목격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간혹 선교에 무관심한 종교들이 있는데 이런 종교들은 한 두 세대 안에 절멸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열두 개에 달하는 종교의 특징들에 대해서 보았다. 만일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이 이 묘사에서 빠진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좋은 신호로 간주될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종교를 정의하려 노력해보아도 인류의 종교 현상은 너무나 풍부하고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우리의 언설로는 다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종교의 특징에 대한 묘사는 끝내고 종교의 본령에 대해 보기로 하자.

최준식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템플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국제한국학회장, 한국문화표현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콜라독립을 넘어서》《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유네스코가 보호하는 우리 문화유산 열두 가지》(공저) 등이 있다.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댓글달기는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수(0)  
전체기사의견(0)
불교평론 소개독자투고불편신고구독신청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135-887]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12-9번지 MG타워빌딩 3층 | Tel 02-739-5781 | Fax 02-739-5782 | 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사성
Copyright 2007 불교평론.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udreview@hanmail.net
불교평론을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및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